EROS : 왕가위 에로틱을 슬픔에 담그다.

영화 에로스는 3명의 감독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왕가위의 작품만 말하겠다. 왜냐면 나머지 두 작품은 난해+지루 라는 최악의 조합을 지닌 영화였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와 스티븐 소더버그의 팬들에게는 어필했을지 모르겠지만)적어도 나에게는 그랬으므로 그 두 영화에 대해서는 할말이 별로 없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제목이 The Hands 이다. 우리나라 제목은 '그녀의 손길' 이여서 그녀. 즉 공리의 손길만을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남자 주인공의 손도 영화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직업은 재단사이며 여자 주인공인 공리의 옷을 만드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옷을 공리는 입는다. 한치의 남음도 없이 몸에 착 달라붙는 차이나풍의 드레스를 말이다.
장은 이제 막 옷을 만들기 시작한 재단사이다. 그는 자신의 옷 가게에서 가장 큰 고객인 후이를 찾아가서 인사를 하는데 그 순간 그는 후이에게 반한다. 고급 콜걸인 후이는 장을 만지면서 앞으로 자신의 옷을 만들때 이 손길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장은 오직 후이의 옷만을 만들며, 그녀가 그 옷을 입고 남자들을 만나는 것을 지켜본다. 세월이 흘러 후이는 어느새 잘 나가던 고급 콜걸에서 부두 노동자를 상대해도 먹고 살기가 빠듯한 퇴물로 변한다. 하지만 장은 그녀를 끝까지 옆에서 지켜주고 도와준다. 설상 가상으로 병마저 얻은 후이는 장에게 마지막으로 고마움을 표시한다. 처음 장을 만났던 날과 똑같은 방법으로 말이다.
이 영화를 만들 당시에 세상은 사스로 한참 시끄러웠었다고 한다. 왕가위 감독을 비롯한 스텝들은 마스크를 착용한채 신체 접촉을 극도로 줄이며 촬영을 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접촉에 대해 무척 민감하다. 비록 극중에서는 사스가 아닌 후이의 전염병 때문으로 설정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장과 후이는 그 흔한 키스마저도 하지 못한다. 장이 후이를 만지는 것도 옷 위로 치수를 재는 딱 한번 뿐이다. 장은 후이를 사랑하지만 후이에게 고백도, 표현도 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손길을 대신해서 후이의 몸을 감쌀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일 뿐이다. 그리고 후이는 그 옷을 입고 남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제공한다. 좀 거시기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건 사랑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사랑인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의 더럽다가 아닌 일 참 더럽게 안풀린다 할때의 더럽다는 의미다.)
조물주는 세상의 모든 암컷과 숫컷의 사랑 혹은 암컷과 암컷 혹은 수컷과 수컷의 사랑에 필연적으로 신체적 접촉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물론 플라토닉한 사랑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도 없는 한 공간에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을 경우 신체적 접촉을 피하기란 어렵다. 사랑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눈길을 마주치고 싶고 더 나아가서는 입을 맞추고 싶은것 아니겠는가. 허나 장과 후이는 그러지 못한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장은 돈을 내고서라도 후이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의 사랑은 단지 후이를 만지고 안는 것에 의미를 가지는 사랑이 아니다.
짝사랑이라고 생겨먹은 사랑은 전부 서글프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거기다 그 사랑은 인내력도 대단하셔서 상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꼴마저 지켜보게 한다. 후이는 사랑이 아닌 생계를 위함이라 하더라도 그가 다른 남자를 안는것을 봐야하는 장은 괴롭다. 그리고 장은 후이를 향한 마음을 오직 그녀가 입을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것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장면이다. 살짝 눈물이 날뻔 할 정도로 로맨틱하고 가슴아팠다. 좀 신파긴 하지만 그래도 저런 스토리들은 여전히 심금을 울린다. 뻔할수록 사람들 마음에는 더 와닿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