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가 사는 법
이현우 글.그림 / 북폴리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사실 나는 이현우라는 가수를 매우 싫어했었다. 꿈을 부를때. 그 엉거주춤하게 서서 건들거리는 춤하며 마이크를 그냥 잡지 않고 애끼 손가락에 끼워서 폼내는것 하며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더랬다. 외국물 먹고 온걸로 밀어부치려고 하는 그저 그런 댄스가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그를 약간 다르게 본 사건이 있었다. 꿈 리메이크 앨범이었는데 앨범 하나를 전부 꿈이라는 노래 하나가지고 무슨 버전 무슨 버전 하면서 리믹스를 해 놓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꿈 하나로 뽕을 뽑는구나 싶었는데 나중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을텐데 (안팔린다고)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서 만들었겠구나. 생각보다 고집있는 사람이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다가 이현우는 예의 그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가요계를 떠났다. 꿈 하나 달랑 히트시키고는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현우라는 가수를 금새 잊었다.

이현우가 다시 나타난건 '헤어진 다음날' 이라는 곡을 들고 나오면서였다. 그러더니 옥탑방 고양이에서 시종일관 같은 표정으로 연기하는 실장역을 했고 어느새 어색한 김광민 옆에서 어눌하게시리 수요예술무대 진행도 하고 있었다. 당시 수요예술무대는 친구와 함께 녹화때마다 세종대에 가서 꼬박꼬박 방청할 정도로 열광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 본 이현우는 꿈을 부르며 춤추고 마이크를 폼내서 잡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참후. 나는 이현우가 낸 요리책을 봤다. 뭐 참고해서 만든 요리는 없지만 (사실 내가 본 수많은 요리책 중 실제로 해본 요리는 하나도 없다. 다 그냥 재미로 본다.) 그래도 재밌게 읽었었다.

이현우가 이번에 낸 책 이현우가 사는법은 더이상 요리책도 그의 싱글 이미지를 살린 책도 아니다. 그냥 인간 이상원 (이게 본명이란다.) 연예인이자 사업가인 이현우가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요리책도 또 자신에게 붙어있는 쿨한 싱글이라는 이미지도 전부 연예계 생활을 하다가 보니 붙여진 것이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이라는 말로 피해가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비춰졌다면 자기 안에 그런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로 생각한다고, 한때는 그도 자기에게 가공된 이미지가 버거웠지만 지금은 그냥 그것도 일부라고 인정한다고 했다.

그리 멀지 않은 장소로 여행을 가면서 읽었는데 읽는 내내 재미있었다. 비록 소리를 내서 키득거리는 그런 재미는 아니지만 책장은 수월하게 넘어갔고 책이 넘어갈수록 남은 페이지의 줄어듬이 아쉬워지는 그런 재미였다. 이제는 마흔살이 된 미혼의 남자 이현우. 그는 더 이상 이곳 저곳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나이도 먹었고 세상 경험도 많이 했다. 그래서 꼭 그냥 아는 선배가 자신의 사는 얘기를 주절주절 (허나 재미있게) 얘기 해 준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이미지 중에서 느릿하고 어눌한것 때문에 이현우가 대부분의 시간을 널널하게 책이나 보고 휴식을 취할꺼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의 삶은 바쁘다라고 할 정도로 팍팍하다. 본업인 가수 이외에 연기도 하고 라디오 DJ도 하고 거기다 사업체도 세 곳을 운영하고 있다. 남들은 하나도 하기 힘든걸 이 어눌해 보이는 남자가 몇 가지 씩이나 한다고 하니 좀 신기하기도 하고 의외기도 하다. 그에게서 으례 느껴지는 느림과는 좀 다른 현실이다.

연예인들이 쓴 책을 접할때면 꼭 드는 느낌이 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 사람들인데 화보를 찍었으면 찍었지 책을 직접 썼을라구. 그리고 실제로 연예인들이 낸 책의 대부분은 대필 작가들의 솜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현우의 책을 읽으면서 그가 정말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의 생활이며 대마초 사건. 그리고 혼자 사는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그를 괴롭히는 스토커에 대한 생각까지. 비록 대필 작가가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을 썼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그는 꽤 솔직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쩌면 중요한건 어떤 문장을 써서 얼마나 책을 잘 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담았느냐 인지도 모르겠다. 요리책의 경우 거의 실제 자기와는 다르다는 고백을 해 두었고 미디어에 의해 얼마나 자기가 포장되고 가공될 수 있는가를 느꼈다고 한다. 하긴 거기서 이현우 좀 심하게 요리를 잘했었다. 그리고 그 요리책이 아닌 이 책에 공개된 이현우의 주방은 소박하기 그지 없다.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찍었는데 싱크대가 정말이지 내가 혼자 살때의 그 싱크대랑 별반 다를바가 없다. 요리책에서는 매우 화려했었는데 말이다.

연예인이 낸 책 치고는 참 사진이 많이 들어있지 않다. 특히나 이현우 자신의 사진이 거의 없다. 표지의 꽤 멋진 사진을 보고 저런게 여러장 있을꺼라 생각하면 실망할 것이다. 그나마 있는 몇 장의 사진도 멋진 이현우와는 좀 무관한 뭐 이런 사진밖에 없었나? 싶을 정도의 사진 뿐이니 말이다. 대신 이현우라는 남자의 생각이 그리고 그가 사는 법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누구나 살고 있고 그렇다면 사는 방법 같은게 있게 마련이지 않겠는가?) 이 들어있다. 하루만에 이 책을 다 읽은걸로 봐서 분명 재밌는 책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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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피필름 2006-05-1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현우가 벌써 마흔이 되었군요.. 한때 이현우를 좋아했었는데
노래때문이 아니라 그가 주는 이미지때문에요.. ㅋㅋ
내용이 궁금해지네요..

플라시보 2006-05-16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꽤 재밌습니다. 이현우가 직접 썼다면 글 솜씨가 보통이 아니여요. 그렇다고 해서 굉장히 새련되고 재밌게 잘 썼다기 보다는 솔직하고 담백한. 그런 글입니다.^^ (그래서 어쩐지 그가 직접 썼다고 확 믿게 만드는 구석이..흐흐)
 

첨엔 그냥 노멀하게 녀석의 귀여움을 사진으로 조금이라도 담아보고자 했었다. 정말이지 그게 다였다.

그러나 찍다가 보니 이런짓도 하고 싶어졌다. 녀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마침내 이런 짓까지 하게 되었다. 꼭 녀석에게 기저귀를 채워주고 싶었다. 만인 앞에 곧휴를 내어놓는게 녀석도 부끄러울테니까 말이다. (저 표현은 여동생한테 배웠다.)

이게 마지막. 빵바구니에 담아 재우는 것으로 놀이를 마쳤다.

녀석은 분명 비쌌다. 2만 4천원.

저거 산다고 떡이 나오지도 밥이 나오지도 않는다.

허나 분명한건

사고나면 정말 기분이 So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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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5-14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컴퓨터에는 없는데, 저는 작은거 코끼리 모자 쓰고 있는거 갖고 싶어서 , 얼마나 많이 뽑았게요 ;; 5500원이나 하는 것들을.. 근데, 결국 코끼리 모자 못 뽑았어요.ㅜㅜ

하이드 2006-05-14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아이는 앉을 수도 있지 않나요?

마늘빵 2006-05-1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귀여운 녀석. 콕 때려주고 싶네.

플라시보 2006-05-1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흐흐. 동물 시리즈를 말씀하시는건가봐요. 코끼리 모자 쓴 녀석이 제일 이쁜가요? 랜덤으로 보내주니 하긴 그거 뽑으려면 되게 힘들겠어요. (네. 앉을수도 있어요. 근데 아직은 세워서 놀고 있어요. 이제 저게 지겨우면 각종 포즈를 취하게 해야지요. 낄낄)

아프락사스님. 호호호. 때리다니요. 깨물고싶지는 않나요? ^^
 

제일 첫번째 사진을 볼때만 해도 안그러려고 했었다. 요번달은 고만 질러야지. 피부과를 또 끊었고 책도 너무 많이 샀고 거기다가 홈 프린스가 골프까지 끊지 않았던가. 그래서 정말이지 참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두번째 이 녀석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아달달달 떨면서 장바구니 - 국민은행 - 일시불 - 결제를 누르고 있었다. 저 녀석의 표정은 딱 그랬다. '잇힝 이래도 나 안살꺼야?' 아... 내가 다음달에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내 짠 손가락을 빨았으면 빨았지 녀석의 눈빛을 미소를 외면할길은 없었다.

소니 엔젤 피규어 (아기) 녀석의 정식 명칭이다. 이 녀석을 알게된건 미스 하이드님 서재에서였다. 하이드님은 랜덤으로 배달되어오는 작은 시리즈의 소니 엔젤을 사신 모양인데 그 자랑질 페이퍼를 보고 난 다음부터 언젠가는 저거 함 찾아봐야지 했더랬다. 그러다가 어제 무척 간만에 텐바이텐에 갔다가 그만 딱 하고 녀석을 보고야 말았다. 작은 피규어들은 5,500원으로 비교적 저렴했지만 (그러나 랜덤으로 배송되어 어떤 녀석이 올지 모른다.) 내가 산 저 소니 엔젤 피규어 아기는 무려 24,000원. 거기다 배송료까지 더하니 26,000원 이었다. 참 여동생에게 보여줬더니 너무 야하다면서 빤스를 만들어다 입히던지 기저귀를 채우라고 했다. 야한가? 난 아무 생각없이 봐서 잘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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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6-05-13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렸을때 이 인형이 보편적인 여자애들 인형이었어요 지금의 바비 인형처럼. 진짜 이 인형 가지고 놀았었는데. 키가 약 15cm쯤 되었던가? 그때는 머리숱 없는 이 인형에 불만이 많았는데. 나중에 머리카락이 긴 마론인형 (이렇게 부르는거 맞나 모르겠네요) 보고서 얼마나 가지고 싶어했는지.
지금 이 인형 보니까 감회가 무지 새롭네요.

paviana 2006-05-1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아기 정말 아이디얼한 아기일듯..울지도 않고 웃기만 할테니까요.ㅎㅎ
심지어 집어 던질 수도 있다죠.ㅎㅎ

플라시보 2006-05-1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아.. 그랬군요. 저는 바비 인형부터 가지고 놀아서 (그리고 마론인형 맞습니다.^^) 이 인형은 그냥 슬쩍 다른곳에서 본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근데 그때도 이렇게 비쌌나요? 으음.. 녀석의 크기가 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흐.. 빨리 받아보고 싶어요. 히히

paviana님. 으하하. 그렇죠. 울지도 않고 내내 웃기만 하겠지요. 먹지도 싸지도 않을꺼고 집어던지는건...낄낄. 자다가 깔고 뭉게도 가만있겠지요?

조선인 2006-05-1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출산준비물 쇼핑리스트는 왜 안 올라오나요? 젖병소독기 때문에 요새 고민이 많습니다.

플라시보 2006-05-13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아직 전 아무것도 안샀답니다. 그저 아기 옷 세벌만 선물로 받았을 뿐이여요. 빨리 사야하는데.. 뭘 살지 몰라서 계속 망설이고 있습니다. (음.. 그러고 보니 젖병 소독기도 사야하는군요. 쩝)

클리오 2006-05-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납작한 코와 팅팅불은 볼-은 모든 아가들의 공통점이 아니겠어요. 저도 얼마전에 입체초음파를 첨 봤는데,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는데 낯익은 그 얼굴... ^^ 저는 요즘 제대혈 땜에 고민이 많아요. 단호히 기증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꼬드기는 사람이 많아서.. --; 물론 애 키워본 적이 한번도 없으니 사소하게 쓰는 수납장에서 아이세제까지 모두 고민이지만요... 으흑. 최소한의 지출로 최대의 만족을~~ ^^

Mephistopheles 2006-05-13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은...100% 팔불출의 가능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조선인 2006-05-14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 출산준비 리스트 다 뽑으셨어요? 갑자기 걱정이 와락.
제 리스트도 참고해보시길.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875192

플라시보 2006-05-1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저는 아는 의사의 만류로 제대혈 그냥 안하기로 했습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것에 비해 별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버티고 있습니다. 아기 보험도 걍 제일 싼걸로 하나 들려구요. (그렇습니다. 아직 안들었습니다.) 저도 아길 키워본적이 없으니 대체 뭘 사야할지를 모르겠어요. 우리 조선인님의 리스트를 함께 참고 해 보아요.^^

Mephesto님. 푸핫. 그런가요?

조선인님. 어머 걱정을 와락 해 주셔서 고마워요. 실은 리스트 하나도 안뽑았습니다. 참고할께요. 고마워요.^^
 

일본산 머그컵. 참 이쁘기도 하다. 가격은 만만치 않은데 (34,000원) 그럼에도 당장 지르고 싶을 만큼 예쁘다. 사진처럼 저렇게 진하고 선명한 빨간색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저 머그잔에다 핫쵸코 같은걸 만들어서 먹으면 끝내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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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rain 2006-05-12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진만큼의 빨강이면 저도 지르고 싶습니다 @.@ 34,000원...비싸긴 하네요.^^

paviana 2006-05-1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 자기가 플라시보님의 자기인줄 알고 들어왔어요.ㅋㅋ
즉 빨간색 플라시보 님의 자기 머그컵..ㅋㅋ

sooninara 2006-05-12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컵이 이쁜건지 사진을 잘 찍은건지..
멋집니다^^

플라시보 2006-05-1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단비양님. 그죠? 셋트가 아니라 하나 가격이 34,000이라고 하니... 넘 비싸요.

paviana님. 으흐흐. 자기^^ 도자기라고 쓸껄 그랬습니다. 하핫

올리브님. 으흑. 지르고 싶지만 지나치게 비쌉니다요.

sooninara님. 아마 컵도 이쁠껍니다. (저 가격에 안이쁘면.. 살아남기 힘들껄요? 흐흐)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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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방바닥에 누워서 과자를 먹으며 읽었던 책 한권이 생각난다. 왕룽과 오란이 나오는. 그렇다. 그 책은 펄벅 여사의 (어째서 그녀만 여사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대지이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거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모든 장소와 모든 물건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합쳐져서 내는 모든 상황들을 상상했었다. 실증을 잘 내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대지는 드물게 열번 정도는 읽었던것 같다. 읽을 책이 없거나 심심하면 꺼내서 읽었고 그 증거로 대지는 지금 나달나달해진 채 내 책장에 꽂혀있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지는 단 한번도 지겹거나 재미없거나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뒷 내용을 알지 못하는 다른 새로운 책들보다 이미 내용을 다 아는데도 한번 손에 잡으면 멈출 수 없을 만큼 매번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 나는 다시 펄벅의 대지같은 책을 만났다. 허삼관 매혈기. 제목만 들었을때는 '혈의 누'나 '무정' '화수분' 처럼 고만고만한 시대에 쓰여진 우리 소설인줄 알았었는데 이게 중국 소설가의 책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제목이 너무 친숙했다.) 내가 알고있는 한자가 얼마 안되었지만 그래도 매혈기라는 뜻 풀이는 가능했다. 그러니까 뭐 피를 판다 이런 말인데 과거 우리도 어려운 시대에 피를 팔아서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듯 중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나보다.

내가 대지를. 정확하게는 왕룽과 오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난하지만 절대 궁상을 떨거나 혹은 작가가 그들을 불쌍하다는듯한 느낌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의 가난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 특히나 고생만 진탕 한 오란을 너무나 안되었다는 식으로 썼었더라면 나는 그 책을 결코 재미있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판단 모든 느낌은 독자에게 넘겨준 채 펄벅은 왕룽과 오란을 아주 담담한 문체로 그려내기만 한다. 그리고 허삼관 매혈기도 마찬가지다. 허삼관과 그의 아내 허옥란. 그리고 그 아들들인 일락, 이락, 삼락이의 얘기를 그 어떤 군더더기나 과장없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마치 작가는 자기가 이야기를 만들어낸게 아니라 어디 이웃서 본 얘기를 감정없이 그리고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그대로 읊어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도록 한다.

허삼관과 허옥란은 왕룽과 오란을 닮았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전혀 닮지 않았다. 왕룽이 일세대이고 허삼관과 허옥란이 삼세대쯤 된다고 상상했을때 정도의 닮음과 다름이다. 왕룽은 땅에 집착하고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 목표는 곰처럼 일만 하고 아무 불만도 말하지 않는 아내 오란을 만남으로 인해 현실이 된다. 그러나 허삼관은 좀 다르다. 허삼관은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거창한 목표가 있는것도 더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큰 일이 벌어지면 물을 여덟 사발쯤 들이킨다음 오줌보가 터지기전에 재빨리 병원에 가서 두 사발쯤 피를 팔고 그 돈을 벌어진 일을 해결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삼관을 아무 생각없이 사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고뇌와 번민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허삼관만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허삼관이 아닌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분도 말했지만 허삼관 매혈기를 읽다가 딱 한번 뒹군적이 있었는데 기근이 들어 배가고픈 허삼관네 식구들이 전부 누워서 각자 먹고싶은걸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이 어찌나 리얼하고 또 재밌던지. 꽤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상의 요리를 해 대면서 또 그 안에서는 너무나 진지한 허삼관과 그의 식솔들을 보고 있자니 그분의 말마따나 그 장면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웃을 지경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지지리도 가난한 남자가 거의 매일 피를 팔다시피 해서 정말 궁상스럽게 살아가는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다. 책에서 피를 파는 대목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허삼관은 10년에 한번 11년에 한번 피를 팔기도 한다. 물론 중간에 큰일이 생겨서 자주 피를 뽑다가 생명을 잃을뻔 하기도 하지만 인생 전반에 걸쳐서 늘 피를 뽑아야 하는건 아니다. 그렇지만 큰 일이 있을때마다 허삼관은 피를 뽑는다. 허나 그는 피를 뽑는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를 뽑을 수 있으니 자신은 건강하며, 또 피가 자신의 돈나무라 생각을 한다. 허옥란도 마찬가지로 내 예상에서 빗나가는 인물이다. 오란처럼 허삼관을 하늘같이 모시고 아무 군말없이 그저 일이나 죽도록 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다. 그러나 곰같이 일하는 오란 못지않게 허옥란도 매력적인 인물이다. 허옥란에게 매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목은 허삼관 매혈기이고. 분명 허삼관은 피를 팔아서 큰 일을 치르곤 하지만 책의 큰 줄거리는 허삼관의 피 파는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남의 인생을 이토록 담담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화는 허삼관과 허옥란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담백하게 전해준다. 어떤 양념도 어떤 고명도 얹지 않아서 약간 심심할 정도이지만 그래도 이 책은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을 맛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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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1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다 보면 어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던 소설입니다.

반딧불,, 2006-05-12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룽과 오란이라니..
오란의 그 매정하게 딸내미 전족시키던 장면이 슬그머니...;;

비연 2006-05-1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마지막까지 마음이 찡하고 그러면서도 재미있는...

플라시보 2006-05-1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네. 좀 안되었긴 했지요. 그런데 뭐 그다지 궁상스럽거나 많이 슬프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반딧불님. 아.. 맞아요. 전족하던 장면 기억나네요. 오란은 전족을 안해서 왕룽에게 이쁨을 못받는다 생각해서 딸에게 만큼은 그렇게 해 주려고 전족을 했었지요. 그때가 아마 왕룽이 첩을 들였을때였지 싶은데.. (제 기억이 맞다면..)

비연님. 네. 간만에 꽤 좋은책을 만난것 같아서 저도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어요. 님 말씀처럼 재미도 있었구요.

밑줄긋는남자 2006-05-19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훔쳐보기만 하다 처음 흔적을 남기는군요
플라시보님보다 먼저 읽은 책이 있다니 신기하기도 해서 그런가 봅니다.
아마도 또 계속 훔쳐보지 않을까 싶군요
권위에 약한편인데 에디터스초이스 다음으로 신뢰가는 플라시보님의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플라시보 2006-05-19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는남자님. 아.. 아이디가 참 마음에 드네요. 저도 그 책 재밌게 읽었었거든요. 음.. 이 책 읽으셨군요. 저도 읽고나서 리뷰쓰려고 보니까 리뷰수가 정말 많아서 놀랬어요. 유명한 책이었구나 하고 그제야 알았죠. 에디터스초이스 다음으로 신뢰해주신다니 흐흐.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