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박과 마요네즈
나나난 키리코 지음, 문미영 옮김 / 하이북스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이 만화책을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든 것은. 저 건조하고도 담담해 보이는 여자의 옆모습 때문이었다. 보통의 순정만화와 같은, 약간은 유치하다 싶은 화려함도 장식미도 없는. 그리고 전혀 순정만화의 주인공 답지 않게 평범한 생김새를 한 여자의 옆모습은 무척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정면을 보고 있지도 않고 위를 보고있지도 않다. 무언가 생각에 잠겼을때, 혹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을때의 멍한 상태처럼 약간은 아래를 향한 시선. 그녀가 입은 티셔츠와 그녀의 피부는 색깔이 없다. (물론 배경색이 비치긴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색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색을 가진건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 뿐이다. 보통은 만화가 흑백이라 하더라도 표지 만큼은 컬러로 그리기 마련인데 저 표지는 마치 책의 한 중간, 혹은 그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은듯. 표지같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나는 책을 처음 잡았을때와 마찬가지로 호박과 마요네즈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농사를 지을때 발로 차일만큼 어느곳에나 다 있던 호박.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면 케찹과 함께 하나쯤은 다 있는 마요네즈. 그만큼 평범하다는 건지 아니면 일상적이라는 건지... 아무튼지간에 이 만화에는 호박도 마요네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호박과 마요네즈이다. 전혀 어울릴 구석이 없어 보이는 그 두가지. 차라리 오이와 마요네즈라던가 샐러리와 마요네즈 같으면 어느정도 조화로우련만 호박과 마요네즈는 도통 만날일이 없는 음식들이다. 허나 이 만화가 일본만화이니 일본에서는 삶은 호박에 마요네즈를 버무려서 먹는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일단 호박과 마요네즈를 따로따로 생각하기로 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흔해빠졌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굳이 둘이 만난다면 드문 부조화이지만 이 세상에는 호박도 마요네즈도 결코 드물지는 않는. 뭐 대충 그런것들.
주인공인 여자는 옷가계 점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음악을 하는 세이라는 남자와 동거중이다. 세이는 음악을 한다고는 하지만 딱히 하는 일이 없는 백수이다. 주인공은 생활비가 부족해지자 돈을 벌 목적으로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세이를 사귀기 전에 하기오라는 형편없는 인물을 사귀었었다. 그녀가 매춘까지 했다는 사실을 세이는 알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해 채소 배달을 한다. 한편 그녀는 어느날 우연히 하기오를 다시 만나게 되고 하기오와 세이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이 만화는 너무 담담하고 평범해서 도무지 만화같지가 않다. 조금의 과장도, 극적인 재미를 높이기 위한 클라이막스도 없다. 마치 우리의 일상이 그런것 처럼. 보이지 않는 큰 물결에 두둥실 떠내려 가는것 같다. 큰 일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생기지만 드라마나 만화에서처럼 그 일 하나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 같은건 없다. 평범할것도 없고 특별할것도 없는 그녀의 일상은 담백하고 건조하게 흘러간다. 그녀를 비롯한 어떤 등장 인물도 선과 악이 확실하게 나뉘어져 있지는 않다. 하긴 실제 세상이 그렇다. 명백한 악인이라던가 누가 봐도 천사인 인물 같은건 없다. 다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이고 그 상황에 따라 악이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도 한다.
달거나 혹은 짠 과자들을 먹다가 어느날 '참 크래카'라는 이상한 과자가 나왔을때가 생각이 난다. 그 과자를 처음 먹어본 엄마는 '이게 무슨 과자냐' 라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크래커를 무척 좋아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크래커의 밋밋한 맛을 견디지 못해서 과일잼이나 땅콩 버터를 발라 먹었지만 나는 그냥 먹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무슨 맛으로 먹냐고 물으면 나는 밀가루 맛으로 먹는다고 대답을 하곤 했었다. 이 만화책을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말 하라면 나는 만화계의 참 크래카같은 작품이라고 말 하겠다. 어떤 자극도 없지만 계속 먹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은 절대로 질리지 않는다. 일상도 그런게 아닐까? 큰 행복이나 큰 불행이 닥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게는 큰 탈들 없이, 그리고 천정을 뚫을만큼 날뛰며 기뻐할 일 없이 흘러가는것. 그래도 질리지도 물리지도 않아서 손목을 그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살아내는 것. 이 만화는 그런 담담한 일상들 속의 한 귀퉁이를 잘라놓은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잘라놓은 일상은 어떤 호들갑도 떨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그 얘기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