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 오래된미래 / 2004년 3월
평점 :
사람에게 가지는 편견이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되었다.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배우 김혜자씨는 전원일기에서는 더없이 인자한 한국의 어머니상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밥도 못한다고.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실제의 삶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 얘기를 듣고 나서는 김혜자씨가 극중에서 밥을 하거나 상을 차리는 장면이 나오면 유심히 지켜보곤 했었다. 아마 내 마음 속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던것 같다. '그래. 실제로는 밥 하나 못하고, 아니 안해도 될 만큼 공주로 산 여자가 어쩜 저렇게 능청맞게 나물을 무치고, 전을 뒤집을까'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우 김혜자씨가 실제로는 손끝에 물을 튕기는 삶을 살고 밥도 하나 못하는 공주라는 말을 한 사람은 그녀와 함께 오랫동안 전원일기에 출연해온 한 연기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음식 솜씨가 좋아선지 요즘 TV만 틀면 자신의 이름을 단 간장꽃게장을 파느라 정신이 없다.)
아주 오래전 부터 나는 이 책을 살까 말까 망설였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꺼내기를 수차례. 그리고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이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계산대까지 갔다가 두고온 적도 많았다. 이 책을 그렇게나 오래 망설인 이유는 위에서 말했던 부분이 크게 차지했었다. 하다못해 밥도 안해도 될 만큼 화려하고 고운 인생을 사는 배우 김혜자가 아이들이 굶주림을 정말 마음으로 보고 왔을까? 연예인들이나 유명인들이 흔히 그러는것 처럼 크리스마스날 알량한 라면박스를 들고가서 사진을 박는 정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책의 뒷면에는 저자의 인세가 세상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모두 쓰여진다고 해서 책을 집게 만들었지만 이내 책의 앞표지에는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활짝 웃는 배우 김혜자의 사진이 그 책을 다시 내려놓게 만들었었다. 그렇게 내 편견은 한 사람의 선행마저. 나로써는 정말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는 이런일을 할까 싶을만한 선행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잘 알다시피 배우 김혜자씨가 지난 10년간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세계 각국의 가난한 아이들을 찾아다닌 것을 글로 적은 것이다. 아이들은 그냥 가난한게 아니라 배가 고파도 울 힘이 없으며, 먹을껄 쥐여줘도 입으로 가져가 씹어먹을 힘이 없을 정도로 굶주리고 헐벗는 아이들이다. 여태 내가 알아왔고 생각해온 가난은 언제나 상대적 빈곤이었다. 남들은 월급이 얼마인데 나는 얼마니까, 남들은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데 나는 버스를 타고 다니니까, 남들은 몇십만원짜리 옷도 척척 사입는데 나는 몇만원짜리 옷도 살까 말까 망설여야 하니까 하는 그런 가난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는 저런 가난이 아니다. 그들은 당장 먹을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야 하며, 입을 하나 덜기 위해 엄마가 여자아이를 낳으면 3일동안 굶기다가 3일째 되는날 독풀의 즙을 먹여 죽여야 하는 절대적인 빈곤이었다.
가끔 TV에서 불우이웃을 돕거나 아프리카 난민을 돕는 방송을 할때마다. 나는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하며 외면했었다. 당장 TV채널만 돌리면 외면할 수 있었고, 난 언제나 나 살기도 벅찬 인간이 나 이며 내가 바로 불우이웃이라는 신소리를 해댔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다. 배우 김혜자가 한줄 한줄 써내려간, 높임말의 글들은 내가 인간이라면. 그들과 달리 먹을것이 있고 지붕이 있는 잠자리가 있으며 사시사철 입을 옷이 옷장에 가득 차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외면할 수 없도록 했다. 밤에 잠이 오질 않아서 잠깐 펴서 읽는다던 책은 어느새 새벽 6시가 훨씬 넘어서야 다음날 출근이 걱정이 되어 억지로 책을 덮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회사의 급한일을 대충 처리하고나서 한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서 이 책을 다 읽었다. 집중력이 약하고 산만한편인 나는 책을 읽다가 중간에 일도 하다가 인터넷 서핑도 했다가 정신이 없는 편인데 이 책 만큼은 정말 도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책만 보게 만들었다. 그건 너무 재밌어서 읽다가 밤을 샌 책들이 가지는 집중력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책에 나오는 세계의 굶주리는 아이들은 차마 이 땅에 나와 같이 태어난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참혹하다. 전쟁 때문에, 재물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희생되는 아이들은 지뢰를 밟아 팔다리가 잘리고, 어린 나이에 새벽 다섯시 부터 저녁 다섯시까지 단 30분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노동을 해야 했다. 그 아이들은 때로는 일고 여덟살이고 때로는 네살이기도 했다. 한참 부모의 보호를 받고, 밥은 안먹고 과자만 먹으려고 투정이나 부릴 나이에 그 아이들은 이미 사지로 내몰린 것이다. 아이들의 눈은 맑지만 그 눈빛은 더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이의 눈빛이 아닌. 산전수전 다겪은 노인들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한낮 저런 오해때문에 이 책을 좀 더 일찍보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같은 인간으로써 이 지구에 태어나 여태까지 몰랐거나 혹은 외면해왔던 순간들이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자 마자 한국 월드비전에 사랑의 빵을 신청했다. 그동안 은행에서 숱하게 보아왔지만 나는 단 한번도 거기에 100원짜리 동전하나 넣은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나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100원이면 하루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아이들. 8백원이면 비타민A 부족으로 눈이 멀 위기에 처한 아이를 구할 약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을 돕는거지 하며 뒷짐을 지고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내가 무지하게 오바한다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오바이건 진심이건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밤이면 돌을 배에 얹고 자는 아이의 뱃속에 빵과 물을 넣어줄수 있다면 그게 뭐건간에 상관없지 않을까? 남을 한번도 돕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정말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굶는 아이들을 위해 다른건 몰라도 이 책 한권이라도 사서 보기를 권한다. 이 책은 김혜자씨가 향후 10년간의 인세를 모두 월드비전에 기증하기로 되어있다. 책의 인세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그 돈은 분명 굶어서 배가 고픈 아이가 아닌, 굶어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언어도 다르고 사는곳도 다르며 생김새도 다르지만 그래도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들도 우리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기 이 책에 인간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 담겨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마음이라고 한다. 이 책은 그 거리를 조금은 좁혀 줄 것이다.
한국월드비전 http://www.worldvision.or.kr/ (이 주소로 가면 죽어가는 아이들과 가난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을 도울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