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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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학 다닐때 1권을 사서 읽고는 (그때는 새와 물고기에서 나왔고 총 3권이었다.) 너무 재밌다를 연발하며 다음권을 찾았으나 이미 절판된. 나로써는 무척 아쉽고도 안타까운 책이었었다. (더불어 나의 게으름도 통탄스러웠다. 게으르면 죽어야지를 그때 부터 연발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전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책 세상에서 히치하이커 시리즈를 다시 5권으로, 그것도 들고 다니면서 읽기 딱 좋은 사이즈로 재 출간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이 책을 꼭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결국에는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에서 번역일을 하는 지인의 바다와도 같은 배려심으로 책 다섯권을 몽땅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책장에 꽂아두고 내내 흐뭇하게 바라봤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쿠키 상자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맛있는 쿠키가 있는가 하면 맛없는 쿠키도 있다고. 그래서 지금 맛없는 쿠키를 먹더라도 언젠가는 맛있는 쿠키를 먹게 될 것이라고. 나는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한다. 다른 쿠키들을 해 치우는 동안. 나는 이 맛있는 히치하이커 쿠키 시리즈를 고이 남겨뒀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집구석에 쌓아둔 책을 다 읽고 더는 읽을것이 없는 그날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히치하이커를 꺼냈다. 음... 표지가 좀 촌실방하군 싶었지만 뭐 어떤가. 맛있는 쿠키는 가끔 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반하기도 하는 법. (쿠키와 떡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날때 설명하도록 하자)

총 다섯권의 책이기에 아직까지 1권만 읽은 주제에 서평을 쓴다는 사실이 좀 찔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설마 2권, 3권 다 따로 쓰기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지금 이 느낌을 써 놓지 않으면 영영 까먹을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는 관계로 일단은 서평을 쓰기로 했다.

좀 웃긴 얘기지만 이 책. 즉 히치하이커 1권에서 가장 감명을 받은것은 바로 서문격인 '안내서에 대한 안내' 였다. 그 옆에는 -작가가 말하는 별 도움 안 되는 이야기들- 이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이 얼마나 매력 넘치는 문구인가! 별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라니. 그것도 이 책을 쓴 작가가 말하는 도움 안되는 이야기. 너무 흥미롭지 아니한가. 과연 이 서문은 예술이었다. 어지간하면 책의 본문을 인용하지 않는 나 이지만 (그러려면 책을 찾아봐야하는 수고스러움의 압박이 밀려온다.) 여기서는 도저히 그러지 않을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엄청나게 배째는 느낌을 나는 고스란히 전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다음은 그 서문들과 나의 느낌이다.

이 판본에 잘못 적힌 게 있다면, 내가 아는 한 그 잘못들은 그걸로 영영 끝이다. 이 얼마나 뻔뻔스러움의 포스가 느껴지는 말인가. 내가 본 책들은 판본에 잘못이 있으면 머리숙여 백배사죄 올림은 물론 귀찮더라도 가까운 출판사나 구입하신 곳으로 가시면 기꺼이 바꿔드리겠다는 말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라. 작가는 잘못 적힌것이 있더라도 저자인 자신이 아는 한 그것은 영영 끝장이라고 외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저자가 이 책에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과 동시에 귀찮은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진정 멋지구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어떤 저자가 독자들에게 저 따위로 말을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배째라의 정신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에에 빌린 닳아빠진 책이었다. 십년도 넘은 일이고, 그 책은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으니 이젠 훔쳤다고 봐야 옳다. 이 대목은 과연 물건을 빌린지 얼마나 되면 그걸 훔쳤다고 봐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되겠다. 저자는 어떤 책을 빌렸고 (켄 윌시가 쓴 '유럽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란다.) 그 책을 무려 십년이 지나는 동안 아직도 저자의 집구석에 뒹굴고 있는 것을 훔치다 라는 위풍당당한 용어를 쓰며 정리했다. 돌려주려고 했지만 앞집 개똥이가 이사와서 못을 쳐대는 바람에 잠을 못자서 라던가 돌려주려고 가는길에 그만 자동차가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보니 내 위로 원숭이가 날아가고 원시인들이 줄지어 섰더라 따위의 치사스런 변명은 하지 않는다. 그저 돌려주지 않았으니, 그리고 그 기간이 무려 십년이나 되었으니 자신은 훔친것이나 진배 없다고 말하는 이 당당함. 일만 터지면 변명하기에 급급한 현대인들의 습관에 일침을 놓는 주옥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자. 이제부터 뭘 빌려서 십년넘게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았거들랑 우리 모두 훔쳤다 라고 솔직하게 인정하자. 시립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이제 9년 하고도 11개월만 더 버티면 훔친게 된다. 그럼 이제 그건 내꺼다.

현재 소문에 의하면, 영화 촬영은 최후의 심판일 직전에 시작 될 것이라고 한다. 이건 저자가 이 책과 관련한 대본을 썼고. 그게 영화화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거듭 연기가 되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조만간, 곧, 수일내에 따위의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면서 사람들을 기다리게 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기다려야 할 기간은 조만간, 곧, 수일내와는 택도 없을 만큼 긴 시간들인게 대부분이다. 그래도 우린 저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을 얼르고 기다리는 것을 독려한다. 허나 저자는 이런 쓸데없는 말 대신 단 한마디를 했다. 바로 최후의 심판일 직전. 이 얼마나 명확한 말인가. 사실 최후의 심판이 다가왔는데 영화를 찍고 앉았을 미친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저자가 이제 그만 자신이 쓴 대본이 영화화 되는 꼴을 보기를 포기했다는 말을 최대한 코믹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그냥 아마도 영화화 되기 힘들 것이다라는 것 보다 얼마나 로맨틱하고 엘레강스한가. 정말 훔치고 싶은 표현이라 아니할수가 없다.

자. 서문은 이쯤 하자. 그 다음 책 내용...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여기 또 대단한게 나온다. 이번에는 그냥 설명없이 옮기기로 하겠다. 이것은 저자에게 어떻게 하면 이 행성을 떠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간략한 정보이다.

1. 나사 NASA 에 전화하라. 전화번호는 (713) 483-3111 이다. 당신이 지금 당장 떠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하라.

2. 그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백악관 (202) 456-1414 에 있는 아무 친구에게나 전화해서, 나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 좀 해달라고 하라.

3. 백악관에 친구가 하나도 없으면, 그렘린에 전화하라 (0107-095-295-9051 로 전화해 국제 교환수에게 그렘린을 대달라고 하라). 그 사람들도 백악관에 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남들한테 대놓고 말 할 수 있는 친구는 없다.), 영향력은 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시도 해 볼만하다.

4. 그것도 안 되면, 교황에게 전화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봐라. 교황의 전화번호는 011-39-6-6982다. 내가 듣기에 교황의 교환수는 절대로 잘못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5. 이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 신호를 해서 지나가는 비행접시를 정지시킨 다음, 전화요금 청구서가 날아들기 전에 이 행성을 벗어나는게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하라.

쓰다가 보니 너무 길어져서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을 할 시간이 없으니 넓은 이해를 부탁드리면서. 이왕 부탁을 들어주는 김에 하나만 더 하자. 저 번호가 진짜인지 아닌지 겁나게 궁금한데 혹시 나를 대신해서 저 번호로 전화를 해서 알아봐 줄 사람이 있으면 정말로 고맙겠다. 비록 재벌 2세이지만 할일은 없는 사람들의 많은 참여 바라며. 책에 대한 서평은 나중에 다섯권을 다 읽고 쓰겠다. 지금 말 할 수 있는것은 저 서문 만큼이나 책이 재밌다는것. 단 한가지이다. (자자. 흥분하지 말고 짱돌 내려놔라. 알다시피 내신 15등급은 그런거 몇개 맞는다고 해서 뇌가 어찌되거나 죽지도 않는다. 서평은... 수일내에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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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5-06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대목을 읽으면서 전화를 걸고싶은 욕망을 억지로 참았습니다..^^;; 전화를 거신분은 제게도 결과를 알려주세요~ㅎㅎ

mannerist 2005-05-06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이건 서문 리뷰니 앞으로 다섯 편의 리뷰가 더 있겠군요. 흐흐... 기대하겠습니다. =)

2005-05-06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5-05-07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하하. 누가 전화를 할지 한번 지켜봅시다.^^

mannerist님. 다섯권 다 읽고 리뷰 쓸겁니다. 이건 그냥 맛보기여요. 시리즈물을 권당으로 리뷰를 다 쓴다면 너무하잖아요. 흐흐^^

속삭이신분. 아. 바로 수정했습니다. 왜 새와 나무로 기억했을까요? 3권이 없으시다구요? 구입해서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재밌어요^^

nemuko 2005-05-0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고 싶은 걸 꾸욱 누르고 잊을만 하니 이렇게 플라시보 님이 또 부채질을 하십니다요^^ 리뷰 5편 꼭 올려 주세요. 넘 재밌어요....

이리스 2005-05-0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거 ... 서문 리뷰조차 웃기다니... 입니다. 크하핫...
너무 재미나십니다앙 ^^

플라시보 2005-05-0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emuko님. 음... 한권짜리면 부담이 안될텐데 무려 다섯권이니 권하기가 조금 미안합니다만. 분명 재미는 있습니다.^^

낡은구두님. 흐... 감사합니다. 이 책 진짜로 웃겨요. 서문이 저 정도인데 본문은 오죽하겠어요. 하하^^

ejc 2005-06-2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세 질이나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안남길 수 없군요.
DON'T PANIC!

이쁜하루 2005-07-20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영화로 배우는 미술치료 이야기
박승숙 지음 / 들녘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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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신과 치료에 이용되는 미술이란 기껏해야 로샤 테스트 (테칼코마니로 된 그림을 보고 환자들이 느낌을 말 하는것. 원래 그 그림에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환자는 그림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정도였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내가 로샤 테스트 그림을 한장 가지고 있는데, 예전에 우울증과 공항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적이 있던 지인도 그 그림과 똑같은 그림으로 테스트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그림을 보고 토끼와 천사, 그리고 지휘하는 사람을 떠 올린 반면 지인은 치료를 받을 당시 무서운 곤충의 눈이 보인다는 얘기를 했었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 왜 그 그림을 그렇게 해석했는지 상대에게 설명해주었었다. 과연 지인의 설명을 들으니 곤충의 눈이 보였고 그 지인도 내 말을 들으니 토끼와 천사와 지휘하는 사람이 보인다고 했었다. 하지만 서로의 설명을 듣기 전 까지는 그림에서 전혀 상대방이 발견한 부분을 찾지 못했었다.)


책은 미술치료를 영화 속의 사례와 접목을 시켜서 이야기한다. 일방적인 임상 사례들을 드는 것 보다 훨씬 와 닿았다. 왜냐면 영화들 중 상당부분은 이미 내가 본 것이었고,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비디오 가게에서 얼마든지 빌려볼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거기다 저자는 혹시 영화의 많은 부분을 잊어버렸을 나 같은 독자를 위해 친절하게 줄거리까지 설명을 해 놓았다. (물론 저자는 영화를 못 본 사람들에게는 혹여 스포일러가 될까 미안하다는 말을 해 두었다.) 그러면 미술 치료란 뭘까? 내가 알고있는 로샤 테스트 이외에 어떤 미술 치료들이 있을까?


책에 등장하는 미술 치료는 총 여섯가지가 있다. 그것은 상자로 나 자신 만들기, 가면 만들기, 신체 본뜨기, 함께 번갈아 가며 그리기, 치료사의 반응 그림이다. 여기서 마지막 치료사의 반응 그림은 치료를 받는 사람이 아닌 치료사를 위한 그림 치료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치료사도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에 혹여 있을 환자와의 각종 문제점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상자로 나 자신 만들기에는 영화 박하사탕이. 가면 만들기는 재능있는 리플리씨가, 신체 본뜨기에는 가타카가, 함께 번갈아가며 그리기에는 굿 윌 헌팅. 그리고 마지막 치료사의 반응그림은 사랑과 추억이라는 영화가 등장한다. 책은 먼저 영화를 설명하면서 주인공이나 예가 될 만한 인물의 심리 상태를 말해준다. 그리고 나서 그 영화의 문제적 인물이 받았으면 좋았을법한 치료법을 바로 뒤에 설명해둔다. 거기다 여러 미술치료 그림들의 사진을 실어놓아서 이해를 돕는다. (영화를 설명할때도 여러 장면들의 사진을 옮겨 두었다.)


책의 초반부에는 치료자를 위한 이야기들이 많고 책의 뒷부분에는 치료사를 위한 이야기들이 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미술 치료를 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되며 치료를 받으러 찾아가는 사람도 아니어도 상관 없다고 한다. 다만 미술을 곁에 두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게 하며 표현하는것.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도움을 주고 이해하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적어놓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책도 아니며 치료사를 위한 책도 아닌 것이다. 읽으면서 내내 나는 저자가 무척 깔끔하고 정돈된 성격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장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 없이 잘 정리를 해 두었다. 마치 정성들여서 만든 문제집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어렵지 않고 이해도 쉬웠다. 다만 정말로 미술 치료를 통해서 환자들이 자신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책은 비교적 쉽게 읽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책의 이후에 나올 2권과 3권에 나올 영화들을 미리 정리해 둠으로써 독자들이 책을 읽기전에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역시 저자의 꼼꼼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예로 든 영화들은 한편을 빼고는 모두 본 것이라서 비교적 읽기가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워낙에 설명을 잘 해주어서 보지 않았던 마지막 영화도 읽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혹시 미술치료나 심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러나 어려운 책은 피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전문적인 공부를 위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이쪽 계통에 완전하게 무지한 일반인들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책임은 분명하다.


이 책은 내가 팝콘 심리학을 읽을때 어떤 분께서 추천을 해 주신 책이다. 평소 심리학에 관심은 많지만 어렵다는 생각에 접근을 하지 못했는데 팝콘 심리학과 더불어 이 책이 참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려운 용어 없이 쉽게 설명한 저자들에게 감사하고, 추천해준 이에게도 역시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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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4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5-05-0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분. 아. 저도 이 분의 다른 책들 찾아보려구요. 꼼꼼하게 또 어렵지 않게 쓰시는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요^^ 거기다 원래 슬쩍 관심이 있던 분야이기도 하구요. (정확하게 미술 치료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이걸 읽고나니 관심이 생기네요) 좋은 책 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읽었어요^^
 
암호의 세계 - 양장본
루돌프 키펜한 지음, 김시형 옮김 / 이지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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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이런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해봐도 잘 이해가 가질 않지만 아무튼 그 당시 바우네집 (바우하우스) 을 읽으면서 같이 골랐던 책이 이 책이다. 그리고 한동안 책장에 꽂아만 뒀다가 다시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각종 방정식과 순열이 등장해서 겁을 집어먹었지만 이해를 못 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다. (참고로 내 수학실력은 고3 내신 15등급이 말해준다.) 한동안 거의 열풍을 일으켰던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파보나치 수열은 여기서 아주 초보적인 암호로 등장한다. (따라서 다빈치 코드에는 암호학자까지 등장할 것도 없었다.)

냉전이 끝난 이 마당에 암호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인류는 총과 대포로 싸우는 대신 또 정보라는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으니까. 암호란 쉽게 말해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 뜻을 숨기는 것이다. 즉 내가 A라는 사람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데 그걸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할때 우리는 암호를 쓴다. 어릴때 나는 여동생과 한 방을 썼었는데 엄마는 9시만 되면 냉큼 불을 끄고 우리에게 잘 자라고 말했다. (그건 잘 자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이제 그만 자라는 명령어에 가까웠다.) 하지만 명령어가 입력되었다고 해서 바로 실천이 되지는 않았던 여동생과 나는 불을 끄고도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끔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로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별로 할 말도 없을때는 그냥 서로가 자지 않고 있다는 신호가 필요했다. 그 신호는 서로 잡은 손을 두번 꼭꼭 누르는 것이었다. 내가 두번을 누르면 여동생도 두번을 누르고, 만약 상대방이 한번을 누르면 그건 곧 잠이 들것같아라는 신호였다. 이것은 우리 둘만이 알 수 있는 일종의 암호였다. 엄마 모르게 우리끼리만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다는걸 상대방에게 알렸으니 말이다. (물론 이런 원시적인 암호는 물론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 보자면 일기장이다. 이건 다들 한번씩은 해 봤을껀데 사춘기때. 혹시나 방청소를 하러 들어온 엄마가 일기작을 떡 하니 펼쳐봐서 옆집 개똥이만 보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뛴다 이거이 사랑? 하는 글 따위를 읽을까봐 나만의 암호를 만들어서 일기를 쓰곤 했었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의 끝은 언제나 같다. 지가 쓴 암호를 나중에 지가 기억을 못해서 결국은 뭔 내용인지 하나도 모른다는. 아. 그때 암호에 관한 책을 읽었더라면 나는 그때의 일기에 뭐라고 썼는지 알 수 있었으련만. 아직도 그 일기장은 도무지 뭔 소린지 모를 난해한 단어들로 꽉꽉 차서 해석이 불가능하다.

책에는 간단한 암호부터 실제로 세계 1,2차 대전때 쓰였던 해독이 어려운 암호까지 갖가지 암호를 만드는 법과 암호를 풀이하는 법이 나온다. 그리고 뒷장으로 가면 IC카드 해독이나 컴퓨터 암호까지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암호의 역사를 죽 나열한 책이라고 보면 된다. 뭐 정보국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스파이도 아닌 사람이 암호를 알아서 뭣에 쓰냐라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이 책은 꽤나 흥미롭다. 사람이 꼭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만 알라는 법은 없다. 아무리 쓸모 없어도 알아놓으면 다 살이되고 피가 된다는게 내 생각이다. 물론 너무 많이 알면 가끔 다치기도 하지만, 아마 내가 너무 많이 알아 다치는 날은 가만 앉아있는데 우리집 지붕에 보잉747기가 비상착륙을 해서 그 밑에 깔려죽을 확률 만큼이나 낮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 하자면 이 책은 조금 어려워서 단순히 재미로 읽을 책은 아니다. 수학도 많이 등장하고 이해를 하는데도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읽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남아도는 나는 몇 번이고 이해가 갈때까지 다시 읽기를 무한구간반복이 가능했고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이 읽지 못할 책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백수가 아닌 직딩이었다면 과거에 그랬듯 읽다가 포기를 하고 던져뒀을 것이다.) 실제로 쓰이는 암호는 물론 책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암호도 중간중간 예로 등장해서 훨씬 읽기가 편했으며 아주 살짝이긴 하지만 어려워빠진 수학 같은걸 왜 할까? 라는 나의 오랜 의문에 이런 매력때문에 수학자들이 수학을 연구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아주 한가롭고 또 수학에 큰 거부감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수학 실력은 없어도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나 내신 15등급 이었다.) 한번쯤 읽어보길 바란다. 여태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쓰고나니 품절이군 이런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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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5-04-29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퇴근하긴 전 1시간..무지하게 안가는 한시간에 님의 글을 읽고 넘넘 웃고 갑니다.. 살아 펄쩍 뛰어다니는 표현을 읽고 있으니 잠이 다 달아나는군요..감사합니다.^^

플라시보 2005-04-29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viana님. 아 퇴근 전이시군요. 흐흐. 님의 잠을 달아나게 해서 기쁩니다. (기뻐해야 하는거 맞나요? 전 잠이 달아나면 속상하거든요.^^) 퇴근 잘 하시고 주말 재미나게 지내시길^^
 
안녕, 레나
한지혜 지음 / 새움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미용실을 갔었다. 미용실을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머리를 하는 시간은 꽤 길고 지루하다. 그 시간동안 대부분의 여자들은 미용실에 비치된 잡지를 본다. 하지만 잡지를 오래 보면 멀미를 하듯이 어지러운 나는 미용실을 가기 전에 꼭 책을 한권씩 챙겨간다. 컷팅을 하는 자리에서 샴푸실로, 다시 퍼머넌트실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동안 책을 챙겨야 하는게 좀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심심하고 무료한것 보다는 낫다. 이때 챙겨가는 책들은 어렵거나 심각한 책은 절대 금물이다. 중간중간 장소를 옮기느라 책을 읽는 맥도 끊기고 아무튼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다. 이럴때 가져갈 책 중에서 가장 좋은것은 재밌는 단편 소설이다. 그리고 나는 어제 이 책 안녕, 레나 덕분에 지겹지않게 미용실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책의 저자는 외출이라는 단편으로 9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을 한 것으로 등단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녀의 작품집이 나오기까지는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단다. IMF가 터질 무렵 일이 끊기고 생계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쓴 단편이 덜컥 당선이 되고 나자 작가는 그동안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작가라는 호칭을 얻기는 얻었지만 막상 그에 걸맞는 작품을 써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그래도 작가는 어설픈 작품 몇개를 묶어서 얼른 내고 마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7년동안 기다리면서 그녀는 조금씩 천천히, 조급한 사람들이 보면 거의 느림보에 가깝게 이번 작품집을 준비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단편들은 모두 색다르다. 흔히 작가들이 쓴 단편을 보면 조금씩 비슷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인데 한지혜의 안녕 레나는 작품 하나마다 모두 완전히 다른 얘기들을 들려준다. 그녀의 오랜 인내심이 재밌는 단편을 탄생시킨 셈이다.

98년 당선작 외출을 포함해서 이 책에는 총 10개의 단편이 있다. 우선 첫번째 단편인 호출 1995는 삐삐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은 핸드폰에 밀려서 의사등 특수직종 종사자들만 사용하지만 내가 대학에 막 입학한 95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학교 앞 공중전화는 언제나 성냥갑만한 호출기를 들고 음성 확인을 하거나 호출된 번호로 전화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곤 했었다. 그런 아련한 추억과 함께 한번쯤은 상상해 봤을. 내가 쓰던 번호는 남아있을까? 남아 있다면 누가 쓰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두번째 안녕, 레나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건 PC통신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PC통신이 아닌 인터넷 채팅이지만 그때만 해도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등의 PC통신 세상이었다. 이름이 아닌 아이디로 서로를 부르고 단지 글자 만으로 소통을 하는 신기한 세상. 돌이켜보면 나도 한때 하이텔에 미쳐있던 시절이 있었다.

세번째 자전거 타는 여자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는 모녀의 이야기다. 나는 한번도 집에 크게 아픈 사람이 없어서 기껏해야 엄마가 몸살을 앓을때 약을 사주고 머리에 찬 수건을 올려준 것 정도가 다였다. 그러다 작년 이맘때 입원을 했을때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들이 정말 많고 또 그들을 간호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는 것을 말이다. 환자야 말 할것도 없이 고통스러울 것이고 그 고통을 지켜보고 도와줘야 하는 사람들도 못지않게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번째 왜 던지지 못했을까, 소년은 은 지난 2002년 온 나라를 빨간색 Be the Red 티셔츠로 물들였던 월드컵에 관한 얘기이다. 스포츠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축구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 그런 나 조차도 빨간 티셔츠를 걸쳐입고 광장으로 달려가서 사람들과 함께 오 필승 코리아를 부를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자면 그때는 하나의 커다란 최면이 존재했던게 아닌가 싶다.

다섯번째 이사는 임대아파트에 대한 얘기이다. 집 없는 사람들은 아파트 한채를 가지는 것이 소원이다. 아무리 코딱지 만하고 그게 설사 요즘 광고에 나오는 메이커를 떡하니 달고 있는 아파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촌을 보면서 늘 생각한다. 저렇게 많은 집 중에서 내꺼 하나 없다는게 말이 돼?

여섯번째 목포행 완행열차는 목욕탕에서 한 아주머니의 수다로 시작해서 수다로 끝나는 이야기다. 대화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전혀 없이 혼자서 말하는 아주머니의 말투가 무척 이채로웠던 소설이다. 저렇게 한 사람의 화자 만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또 끝낼 수 있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일곱번째 사루비아는 기면증을 앓고 있는 여자의 얘기이다. 기면증이란 이유도 없이 갑자기 푹 쓰러져서 자 버리는 병이라고 하는데 청춘인가 그 영화에서 김정현이 저 병을 앓았던게 기억난다. 근데 정말 뜻하지 않는 장소에서 별다른 이유없이 쓰러져 자 버린다면 무척 난감함은 물론 위험할것 같다. 외출이나 어디 맘놓고 하겠는가.

아홉번째 햇빛 맑음은 화사한 제목과 달리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때 자살모임이나 자살클럽같은게 유행을 했고 지금도 심심찮게 인터넷을 통해서 이런 사람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곤 한다는데 글쎄다.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서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상처를 봐주는것. 그건 그들이 아직은 세상에 미련이 있다는 소리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너무 외로워서 죽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마음과 두 갈래의 길을 지나는 방법에 대하여는 위의 아홉가지 소설들과 달리 판타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별로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10개의 단편중 하나로 들어가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언제나 그렇지만 재미있는 단편을 만나면 즐겁다. 순식간에 읽히기도 하고 도중에 딴짓을 하다가 다시 잡아도 스토리를 따라가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한지혜의 단편은 근래에 만난 단편 중에서 아마 가장 재밌는 단편집이 아니었나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7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재도 다양하고 화자도 다양한 단편집. 이런걸 내려면 적어도 7년동안은 고민을 해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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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1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5-01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5-01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5-05-02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분. 그러게나 말입니다. 흐흐.

돌바람 2005-05-2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지요. 소설가는 7년 동안 사루비아를 키우고 하이텔이며 천리안 시절을 기억해내고, 혹은 살고, 기면증에도 걸렸다가 햇빛 맑은 어느날 짝짓기의 절정에서 생이 짓뭉개져버리는 사마귀(맞나?)를 목도하기도 하는데, 님은 미용실에서, 저는 화장실에서 이 책을 읽고 있으니. 저는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척 기대되요. 이 작가 이 소설집에서 무척 많은 것을 실험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소재, 말투, 구성, 허구성, 이야기, 시대의 키워드, 사건... 의외로 다음 작품이 환타지로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되고... 그런 의미에서 근래에 읽은 가장 재밌는 단편집(사실 전 '자전거 타는 여자' 보면서 무척 아팠는데 그것까지 통틀어서)이라는 평에 같이 설레요. 방명록 대신해서 인사^^ 꾸벅꾸벅

플라시보 2005-06-2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죄송합니다. 이제사 방명록을 통해서 댓글 남기신걸 봤네요. 코멘트가 늦은점 거듭 사과드립니다. 받아주실꺼죠?^^ 님은 화장실에서 읽으셨나봐요. 저도 과거에는 화장실에서 책을 많이 봤답니다. 지금은 안그러지만요. (지금 제 화장실은 불을 켜면 환풍기가 동시에 돌아가서 무척 시끄럽거든요. 흐흐)
 
슬로 라이프 -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삶
쓰지 신이치 지음, 김향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태까지 나는 꽤나 팍팍한 삶을 살았었다. TV 드라마에나 나오는 것 처럼 멋진 커리어우먼처럼 자신의 발전을 위해 혹은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바쁘게 일을 한것이 아니라 단지 돈을 벌어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했었다. 나는 하루 10시간씩, 주당 60시간을 일했었다. 이렇다 보니 나는 직장인이 된 이후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일주일에 겨우 하루 쉬는날은 오직 다음주에도 일을 할 수 있게 하기위한 준비기간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내가 즐길 수 있는 여가 활동은 2시간 남짓 소요되는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책을 읽는게 전부였다. 물론 그 두가지를 상당히 좋아하긴 하지만. 그 두가지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은행구좌에 잔고액수가 늘어나는 재미로 내 하루 하루를 팔아먹는 것에 대해 아무런 느낌을 가지지 않았다. 모두들 학교를 졸업하면 직장을 다니고,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시간중 많은 부분을 직장에다 쏟아 붓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틈틈이 영어 회화랄지 혹은 헬스나 수영으로 자기관리까지 하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나는 너무 게으른거 아닌가 하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얼마전 나는 직장을 관두게 되었다. 이제 당장 내일 아침부터 10시까지 출근해서 8시까지 회사에서 근무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고 나니 나는 도대체 그 10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다잡지 않으면 그냥 물 흐르듯이 시간이 흘러가 버릴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상당히 걱정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뭐든지 열심히라는 구호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슬로 라이프. 초록의 산과 들이 있는 사진아래 적혀있는 문구는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삶이었다. 어쩌면 나는 직장생활을 계속 했더라면 이 책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책에서만 슬로우 라이프를 외치면 뭣 하겠는가 내가 그렇게 살 가망이 전혀 없는데. 하지만 이제 남아도는게 시간일테니 어쩌면 나도 마음을 바꾸고 좀 느긋하게 살 수 있을꺼란 생각이 들었다.

슬로우 라이프는 슬로우 푸드 운동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시간에 쫒겨서 지금 왜 이러고 사는지, 혹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바쁘게 열심히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책은 말한다. 인생은 결승점까지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하는 경기가 아니라고. 한 시간. 하루 그리고 한달이 모여 일생이 되는 만큼 그 작은 단위의 시간까지도 모두 똑같은 삶이라고. 흔히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오늘은 내일이나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담보의 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서는 다르게 말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두 자신의 인생에 속한 똑같은 삶이라고. 삶을 조금 느슨하게 둔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는다. 물론 자신이 앞만보고 정신없이 달리는 삶에 만족한다면 또 그렇게 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이 없는것은 아니다. 슬로우 라이프는 그저 나무늘보처럼 세월아 네월아 하고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것 그리고 그것을 위한 삶을 행복하게 살라고 말한다.

패스트 푸드는 음식을 먹는데 대한 시간을 최대한으로 단축시키기 위해 생겨났다. 먹는 문제 뿐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이 모두 우리의 삶을 일이 아닌 다른 시간에 투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한다. 식기 세척기와 청소기. 그리고 자가용은 조금 더 빨리 허접한 일들을 해치우고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시간을 늘이기 위해 탄생했다. 하지만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며 거리를 걷는것이 그렇게 마냥 줄이기만 해야 할 정말 하잘것 없는 일들일까? 인간이 살아있는 한 계속해야 하는 일을 우리는 왜 그렇게 빨리 해치우지 못해서 늘 안달을 하는 것일까? 사실 나도 답은 모르겠다. 다만 가사일은 정말 쓸모없는 소모적인 일이고 걸어다니는 것은 그저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이 이 책 하나로 완전하게 바뀐것은 아니다. 다만 책에 적힌 문구처럼 또 다른 삶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는 정도이다.

요즘 나는 애쓰지 않아도 슬로우 라이프를 살고 있다.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서 이동을 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잠도 내가 자고싶을때 원없이 잔다. 그동안. 나는 놀더라도 절대로 느슨해지지 말아야 해. 정해진 시간에 일을 하고 밥도 먹고 회사를 다닐때와 똑같이 살아야 하고 그래야 도퇴되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어떤 식으로 살던 정답은 없다. 다만 자신에게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길을 걸으면 그게 정답이 아닐까? 나는 눈코뜰새 없이 바쁜 사람들에게 그건 사는게 아니라며 이 책을 권할 생각은 전혀 없다. 어떻게 보면 슬로 라이프도 하나의 유행같은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말들이 없었는데 현대인들이 너무나 시간에 쫒기며 촉박한 삶을 사니까 생긴 것이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는것의 정답에 관한 많은 책이 쏟아지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것 같다. 교육에 의한 혹은 습관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안에서 나온 말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건간에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은 저만치 앞서는데 자신만 뒤쳐져있다고 초조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번쯤 참고삼아 읽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세상을 살고, 보고, 느끼는 것. 그것에는 누구나 다 따를만한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그 길들을 조금씩 체험해 보고 자기가 선택을 하면 그게 가장 좋은 삶이 아닐까 싶다. 그게 책에서 말하는 슬로우 라이프건 패스트 라이프건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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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5-04-2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살아가면서 열심히 부지런히 사는건 물론 중요하지만 쉬어야 할 때 쉬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근데 우린 부지런한건 오히려 익숙한데 쉴줄을 모른다는게 문제 아닐까요?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좀 아프면 제발 학교 좀 안보냈으면 좋겠는데 엄마들은 죽으라고 학교에 보냅니다. 물론 아이들이 엄살일 때도 있지만 가끔은 아이들에게 엄살이 필요할 수도 있고 또 진짜 아픈데도 학교에 와서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보면 저도 괴롭답니다.이런 아이들이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또 죽어라고 일만하는건 아닐지....

플라시보 2005-04-2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그러게요. 쉬는 방법을 아는것도 중요한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어디가서 뭘 보고 즐기고 해야 한다는게 아니라 그냥 집에 있으면서 뒹굴뒹굴 하는 시간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아파서 죽어도 학교서 죽어야 한다고 주입된 아이들은 사회인이 되어서도 그렇더라구요. 저 역시 아파 죽을것 같아도 회사 나가곤 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가 되어요.^^)

marine 2005-04-2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네요 저도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이 있기 때문에 항상 뭔가를 해야 마음이 편해요 실제로는 킬링 타임이 많으면서도 늘 거기에 대해 죄책감을 갖거든요

마냐 2005-04-27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지 않아도....그리고 비슷한 책을 읽어도.....슬로라이프는 너무 꿈같아요. 좋은걸 모르는게 아니지만....언젠간, 언젠간....아, 밥벌이의 가혹함이라....플라시보님, 쉴 수 있을 때 푹 쉬세요...^^

플라시보 2005-04-27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 음..그럼 한번 읽어보세요. 저에게는 뭐 아주 많이 유익한건 아니었지만 좀 느슨하게 사는것에 대해 죄책감은 안들게 하더라구요. 흐흐.

마냐님. 흐흐. 그렇죠. 바쁘게 살고 싶어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사이클에 맞춰서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그래서 쉴 수 있을때 많이 쉬고 뒹굴거리려구요^^ (근데 가끔은 님이 부럽습니다. 항상 뭔가를 이뤄내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