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면서 밥해먹기
김혜경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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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밥해먹기>는 그야말로 일을 하면서 ‘요리’가 아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밥 해먹기에 관한 책이다.

나 역시 일을 하면서 밥을 해 먹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혼자 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고, 벌써 8년차나 되었으니 그럭저럭 한다고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제대로 배운 적 없이 내 멋대로 대강대강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했기 때문에 찌게는 종류를 불문하고 한 가지 맛이 나고 볶음은 뭐를 넣건 거기서 거기라는 치명적인 오점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요리책도 사 보았고, 케이블TV 푸드 채널도 드문드문 봐왔건만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요리책이나 요리프로에서의 가장 난점은 몇 그람 몇 티스푼 하는 단위와 좀처럼 집에 갖춰놓기 힘든 재료들이라고 생각한다. 뭐 하나를 해먹기 위해서 저렇게나 많이 필요할까 싶은 재료들을 가지고 요리를 하는 것을 보면 간장, 설탕, 고춧가루, 소금, 다시다가 양념의 전부인 나는 그냥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겠다는 자괴감마저 든다. 거기다 요리프로에서 쓰는 도구들은 역시 도마와 칼이 주방도구의 전부인 이들을 좌절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리를 하는데 필요한 시간이다. 하루에 8시간에서 많게는 10시간까지 일을 하면서 몇 시간이나 투자하는 요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청소도 빨래도 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김혜경의 <일하면서 밥해먹기>는 정답은 아닐망정 해답을 주기는 한다. 우선 주방에 필요한 기본부터 갖추라고 말 하므로써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재료와 도구들이 넘쳐흘러서 이걸 다 사다가는 살림 거덜나겠군 싶은 요리책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무엇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해놓고 그 기본을 가지고 만든 요리들을 소개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만 갖추어 놓으면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는 요리들이 많다. 그리고 저자 역시 기자생활을 하면서 바쁘게 살아서인지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요리들이 많다. 물론 중간에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쉬는 날 충분하게 준비가 가능한 정도이고 만약 시간이 없다면 맛은 조금 덜하더라도 단시간에 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적혀있다.

또 하나. 무슨 소스이건 양념이건 직접 다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여타 요리책 혹은 요리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시중에 파는 소스와 드레싱등을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적혀있다. 웰빙족이라 유기농 이외에는 절대 먹을 수 없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스턴트나 레토르트, 통조림을 이용한 요리도 많아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잘 읽힌다는 것에 있다. 흔히 요리의 그림아래 재료. 만드는 법으로 땡인 요리책들을 여간해서 한권을 그 자리에서 독파하는 것이 힘들다. 허나 기자출신 답게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정감 가는 문체로 저녁거리를 걱정하는 옆집 새댁에게 일러주는 듯한 주방에서 식칼 들고 심호흡한번 하고 나서야 들춰보게 되는 요리책과는 다르다. 한번에 죽 읽어두면 머릿속에 남기 때문에 요리를 할 때가 되어서 찾아보는 레시피북들 보다 훨씬 더 와 닿는다.

이 책에 소개되는 주방도구와 여러 재료들 역시 만만찮게 많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단 한가지 목적에 귀결된다. 바로 일하면서 즉 시간이 별로 많지 않는 상황에서 보다 손쉽고 빠르게 밥을 해 먹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소개되는 것 마다 모두 갖출 필요는 없겠지만 식구들이 밥을 먹고도 쉬는 동안 소화시킬 틈도 없이 설거지통에 손을 담글 바에는 차라리 설거지 기계를 사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혼자 살면서 밥을 해먹는 나도 설거지가 끔찍한데 최소 3인이상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일까지 하는 주부라면 잠자리에 드는 그 시간까지 부엌에서 동동거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유를 부려가며 읽었는데도 이틀 만에 다 읽을 만큼 재미도 있고 실용적인 책으로 일을 하면서 밥을 해 먹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한권쯤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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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오식당
이명랑 지음 / 시공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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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가 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동네 구석구석 생긴 슈퍼마켓도 모자라서 대형 할인마트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재래시장을 이용할 일은 일년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힐까 말까 한다.

내가 기억하는 시장은 어릴때 엄마손을 잡고 가지런하게 누운 갈치들의 꼬리를 팔로 스윽 문지르고 되에 담긴 땅콩을 집어먹던 곳이었다. (마트에는 시식코너가 따로 있지만 시장에는 그냥 집어먹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어쩌다 엄마가 기름속에서 구름처럼 부풀던 도너츠를 사주기라도 할라치면 나는 종일토록이라도 그렇게 시장을 돌아다닐 수 있을것만 같았다.

삼오식당은 주인공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시장통의 작은 밥집이다. 그녀의 어머니뿐 아니라 시장통의 모든 여자들은 한사람의 아내로 또 한사람의 어머니가 되어서 생업을 잇고 있다. 그들은 많이 배우거나 똑똑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지도 않다. 기껏 약아봐야 남들에게 뻔히 들킬 정도의 잇속만 챙길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이명랑이라는 작가에게 아쉬움이 들었다. 글 솜씨는 좋지만 결국 그녀 역시 다른 여류작가들이 그러하듯 '삶의 체험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겪은 일들은 기가 막힌 문장으로 맛깔스럽게 버무려 내지만 상상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물론 등장인물 가운데 몇몇은 허구고 또 스토리 가운데서 어떤것들은 순전히 머리속에서 나오기도 했었지만 애초 가보지 않은 장소, 겪지않은 일들,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쓰는 것에는 절대적으로 인색하다. 그러나 그녀의 글솜씨 만큼은 쓸만해서 은희경과 함께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해 줬으면 싶은 작가의 반열에 올릴 만 하다.

대체적으로 부담없이 읽을 만한 책이며 페이지도 술술 잘 넘어 간다. 하지만 읽고 난 이후의 강력한 임펙트가 없다. 그것은 마치 시장통에서 남의 이야기를 주어듣기를 좋아하는 여편네가 정작 집에 돌아와서는 무슨 얘길 그렇게 재미나게 들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것과도 비슷하다. 새의 선물같은 책을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추천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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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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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인가 대종상 영화제에서 ‘애니깽’이라는 영화가 상을 모조리 휩쓸어서 말썽이 많은 적이 있었다. 왜 말썽이 많았는고 하니 극장에 걸린 작품도 아니거니와 심사 당시 완성된 프린터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던 장모 여배우는 시상식장에서 그 특유의 음색으로 ‘아름다운 밤입니다. 알러뷰~’를 감격어리게 외쳤으나 결국 시끄러운 영화제로 인해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 영화 애니깽에서는 어찌된 이유인지 한국인들이 일하게 되는 멕시코 농장이 애니깽 -원래는 에네켄이나 우리식으로 애니깽이라 불렀었다고 한다.- 농장이 아니라 사탕수수 농장이지만 아무튼 멕시코로간 이민1세대 한인들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에네켄은 로프를 만드는 섬유의 원료로 원산지가 멕시코이다. 당시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던 맥시코가 단 한차례 우리나라 사람들을 이민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됨으로써 농장가서 돈을 벌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던 이들은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 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별로 볼 생각이 없는 이 영화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았던 것은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역시 애니깽을 주제로 했기 때문이다.

영화와 달리 사탕수수가 아닌 에네켄을 제배했던 이들은 잘사는 나라에 돈 벌러 간 후진국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렇듯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온갖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생고생을 무용담처럼 주절주절 늘어놓지는 않는다.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비교적 한정된 공간 -에네켄 농장-에서도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여태까지 김영하를 좀 말랑한 작가쯤으로 봤던 나에게는 좀 충격적인 작품이었는데 조금 더 늘이면 대하소설 감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동로를 작가역시 그대로 따라가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소설속의 인물이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사실적인 역동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작가의 노력 덕분이다. 김영하는 검은꽃을 쓰기 위해 생판 가보지도 않았고 말도 통하지 않은 멕시코에서 소설을 완성했다. 작품의 고저를 떠나서 나는 작가들의 노력을 말 하고 싶다. 이왕 읽을꺼라면 나는 머릿속에서 나온 일기장같은 소설들 보다는 자신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에 대해 상상하고 때로는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발로도 뛰는 그런 노력형의 소설을 읽고 싶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보자. 책의 주인공은 이정이라는 남자아이이다. 멕시코행 배를 타기 전에는 소년에 불과했던 그는 갖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청년으로, 또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멕시코행 배에서는 일본인 요리사를 도와서 소일거리 없이 지내는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일을 하게 되고 멕시코에 도착해서는 다른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에네켄 농장에서 지독하게 고생을 한다. 요행히 에네켄 농장에서 탈출을 하긴 하지만 멕시코 내전에 휘말려 명목 없는 전쟁에 끌려다니게 된다. 마지막에는 멕시코의 한 밀림속의 유적지에서 신대한을 세우려고 하지만 일장춘몽으로 끝난다. 그는 배에서부터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들의 사랑은 시대 앞에서 온전한 축복을 받지 못한다.

이 책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첫 도입부를 너무 길게 끌었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멕시코로 떠나는 배 안에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후반부에 비하면 지나치게 호흡이 더디다. 차라리 대하소설이었다면 어울릴법한 도입부였으나 소설에 쓰이므로서 전체적인 무게중심을 잃었다.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지만 여느 이민사들처럼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는 영웅담을 낳지는 못한다. 당시 그들이 떠나온 대한민국은 너무나 힘이 없는 조그만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정이라는 인간 개인의 삶의 기록이자 당시 시대상황의 재현이며, 더 나아가서는 나약한 국가의 불쌍한 국민들에 관한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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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 2004-05-2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잼있게 읽었던 소설입져..김영하 또한 좋아하지만서도 헤헤..여기서 보니 방갑네여 ^^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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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어하는 등산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부르는 숲은 나를 웃게 만들었다. 작가인 브라이슨과 그의 친구 카츠가 미국의 애팔레치아 트레킹을 걸으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담겨있는 이 책은 정말로 보기 드물게 재미있는 책이다.

전혀 공통점이라고는 없고 고교 동창일 뿐이었던 그 두 사람은 오히려 서로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별 문제없이 무사히 그 긴 애팔레치아 트레킹을 종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싹바가지 없는 애런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단연코 최고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매 끼니를 국수나 스니커즈로 떼워가면서 그들은 걷고 또 걷는다. 그러나 걸으면서 무슨 큰 각오나 목표 따위는 없다. 간혹 그들이 대체 왜 이렇게 힘든일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할때면 인간적인 면마저 느껴진다. 내가 본 여행기들은 너무나 확신에 차서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각오가 충만한 인간들이 쓴 것뿐이었으니까.

온통 나무와 산뿐인 트레킹을 걸으면서 간혹 마을에 닿을 때 마다 그들은 햄버거와 콜라 그리고 침대에 감사한다. 어떤 이들은 무슨 고행이라도 하듯 철저하게 캠프만 하고 배낭에 싸간 음식만으로 버티지만 이들은 마을이 나오면 미련 없이 내려가서 문명을 즐긴다. 특히 카츠는 날짜도 모르면서 X파일을 하는 날에는 귀신같이 알고 시청한다.

책의 처음에는 길을 떠나기 전에 곰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서술하고 있는데 가장 웃기는 부분이다. 그는 각종 곰에 대한 피해사례가 담긴 책들을 사 놓고서는 미리부터 벌벌 떤다. 그 긴 길을 종단하려고 각오했으니 ‘흠. 그까짓 곰쯤이야’ 하고 출발하는 것이 더 어울렸겠지만 그는 자신의 공포를 애써 감추지 않는다. 설사 너무 많은 걱정으로 다소 쫌생이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남에게 보이는것에 신경을 쓰거나 아니면 스스로가 정한 목표, 테두리등등 으로 인해서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을 억지로 버티는 사람들을 여럿 봤었다. 과연 그들이 얼만큼의 성취감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한번뿐인 인생을 너무 참으며 고행하듯 사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애팔레치아 트레킹을 종주하지만 단 한번도 보조를 맞춰서 함께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적이 없다. 왜하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트레킹을 하려고 맘먹었을까 싶은 -그러나 이유 없는 사람치고는 꽤 잘 버텨내는- 카츠가 매번 허덕거리며 늦게 걷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빌 브라이슨은 우리가 상상하듯 친구와 정다운 장면을 연출하며 걸은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게는 주인공이 한참을 걷다가 카츠를 기다리고, 한 30분 넘어 모습을 나타내는 카츠는 무거운 배낭속의 물건을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하나 둘씩 여기저기 버리고 와서 브라이슨을 난감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들은 어금니 콱 깨물고 파이팅 외치며 출발한 그 어떤 팀보다도 별 트러블 없이 종주를 마친다. 등산이라면 고개를 흔들던 나도 이쯤 되고 보니 트레킹을 종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단 카츠와 같이 단순하면서도 착한 친구가 있다면 말이다.

나를 부르는 숲의 가장 큰 미덕은 읽는동안 어느덧 자연스럽게 자연은 정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책들처럼 자연과 정신이 어쩌고, 우리가 자연의 일부네 마네 하면서 다소 짜증나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인간들의 책을 읽다보면 나만 나쁜인간 같아서 왠지 기분나쁘다.) 끝으로 책이 좀 두터워서 좀처럼 할일이 없는 나 같은 인간도 읽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장담하건데 절대 도중에 그냥 덮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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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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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15살 때를 기억하시는지. 나의 15살은 나름대로 치열했었다. 결손가정인 것도 모자라서 아빠와 엄마가 앞에 ‘새’라는 글자를 달고 한분씩 더 있었으며 그분들이 서로의 가정에서 삐걱거릴때 마다 나는 이모집으로 고모집으로 보따리장수처럼 옮겨 다녀야 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졌다. 대부분 그 나이또래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가족 얘기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관심사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책만 읽을 뿐이었다. 이 현실에서 유일하게 나를 딴 정신 팔게 해 주는, 아무런 댓가 없이 지금이 아닌 다른 인생을 살게 해준 책은 나에게 있어 도피처였다. 이 책의 주인공 카프카가 끊임없이 책을 읽듯이 나의 열다섯도 그랬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은 실로 7년만이다. 아마 마지막 작품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였던 것 같다. (실제 마지막 작품인지 아니면 내가 마지막에 읽어서 그렇게 기억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때 하루키를 유행처럼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하루키는 시대에 편승하여 잠깐 빛을 본 작가는 아니다. 지금의 이 책 해변의 카프카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어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첫 번째의 얘기는 일종의 증언으로 그건 곧 책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의 이야기. 책의 주인공인 열 다섯의 다무라 카프카군과 정확한 나이는 나오지 않지만 늙은 나카타상의 이야기가 전계된다. 다무라 카프카군은 아버지의 예언대로 되는 것이 두려워서 가출을 하고 거기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어주는 도서관의 사서. 그리고 혹시 집 나간 엄마가 아닐까 생각되는 도서관의 관장. 마지막으로 집 나간 엄마가 데리고 나갔던 누나라고 생각되는 사쿠라.

카프카는 집을 나와서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찾아 나간다. 늙은 나카타상은 전쟁이 있던 해에 갑작스레 한 반 아이들 전체가 잠깐동안 원인 불명의 졸도속에서 제일 마지막에 깨어났던 아이였다. 그리고 졸도 이전과 졸도 이후에 그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나카타상 역시 카프카와 같은 지역에서 떠나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솔찍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도저히 설명할 재간이 없다. 그냥 이상하게도 몹시 끌렸다는 것 외에. 책을 사자마자 상.하권을 하루만에 읽어치울 정도로 강한 흡입력을 가졌다는 것 외에 무엇을 더 얘기할 수 있을까?

소설은 끊임없이 신화를 인용하고 현실과 몽상속을 오간다. 그러나 누구도 뭐가 현실인지 뭐가 몽상인지는 규명짓지 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때 마다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떠 올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소년 소녀가 등장하는 로봇물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에반게리온은 사람과 사람을 얘기하고 있다. 해변의 카프카 역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몽상과 현실을 매력적으로 오가는 문체 속에 사람이 사람에 대해 가지는 갖가지 감정들이 담백하게 녹아있다. 사람은 한가지 감정만을 가지기는 힘들다. 단세포 동물이 아닌 이상 상대를 좋다, 혹은 나쁘다 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타인에게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실제의 우리들처럼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런말을 했다고 한다. 읽는 독자들마다 해석이 다른 것이 좋다고. 이 책은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른 책을 읽은 것 마냥 틀릴것이라고 본다. 훗날 이 책이 희미해질때쯤 나이가 들어서 나는 이 책을 어떻게 해석할지 무척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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