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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ㅣ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을 조금 읽었을때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 딱 일본 소설이군. 뭐든 시큰둥하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심각한건 하나도 없고 거기다 약간 웃기기까지 하고. 그네들이 죽고 못사는 쿨이 넘쳐 흐르는구나' 그런데 자꾸 읽으니까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소설은 웃기기도 하고 뭐든 약간 시큰둥한 기운이 흐르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것 같다는 느낌이 어디선가 강하게 올라왔다.
이 책은 내 멋대로의 생각이지만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믹서에 넣고 돌리면 나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사람을 믹서에 넣고 돌리는게 아니라 책을 말하는거다. ) 그렇다고 해서 딱 꼬집어서 이 부분은 류. 이부분은 하루키를 닮았다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쩌면 이건 내 머리속에 그들의 작품 스타일을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 일본 작가는 두 사람 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한 집에 같이사는 다섯 사람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21살인 대학생 요스케(남)가 화자였다가 다음에는 23살에 백수이며 탈렌트와 열애중인 고토(여)가 화자이며 다음은 24살의 일러스트레이터 미라이(여), 다음은 18살의 섹스산업 종사자 사토루(남), 마지막으로 28살의 독립영화사에 근무하는 나오키(남)로 이어진다. 여기까지 읽으면 느끼겠지만 이들 사이엔 어떤 공통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셋에 여자 둘이니 어떻게건 연인 사이로 엮였을것이라는 예상도 보기좋게 빗나간다. 그들은 나이도 제각각이며 하는일도 제각각이고 서로 사귀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보니 제일 마지막 화자인 나오키의 맨션인 이 집에 네 사람이 굴러들어왔고 그들은 큰 사건 사고 없이 하루하루를 탕진하듯 잘 산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만약 그게 전부라면 내가 제일 첫 머리에 써 놓은것 처럼 요즘 흔해빠진 느낌의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덮어놓고 그저 쿠~울 한 소설들) 화자가 바뀔때 마다 좀 전의 화자에 의해 몹시 한심하게 그려졌던 인간들을. 독자들은 새롭게 만나게 된다. 마치 별 볼일없이 생겨먹은 친구네집에 하도 졸라서 따라갔는데 수영장까지 딸린 저택에, 일하는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다니며 시중을 드는 모양을 보았을때랑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요스케가 화자였을때는 고토도 미라이도 사토루도 나오키도 모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싶은 인간군상인데 다시 고토가 화자가 되면 고토가 멀쩡한 인간이 되는 대신 다시 요스케와 미라이와 사토루와 나오키가 아무 생각없는 인간들이 되는 것이다.
방 두개와 거실이 딸린 좁아터진 맨션에서 사는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것 같지만 막상 그들이 화자가 되면 너무나 복잡한 내면과 사생활을 드러낸다. 이들은 서로가 버럭 화를 낼 수 있을만큼 가깝지도 않고, 눈앞에서만 짐짓 걱정해주는 척하며 끝낼만큼 멀지도 않은 사이이다. (이건 마지막 화자인 나오키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 집에서 늘 서로 말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한공간에서 때로는 각자의 일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각자의 사연과 사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같이 사는 사람들이 으례 그럴것이라는 종류의 털어놓음이랄지 공감같은건 서로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어쩌면 우리가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느끼고 그 사람에대해 주절주절 떠드는 얘기들은 실제의 그 사람과 한참은 상관없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가끔 이 책에는 같은 상황에 대해 각자의 입장에서 써 놓은걸 보게 되는데 그걸 보면 보는 사람에 따라. 즉 당사자이냐 아니면 주변에서 보는 입장이냐에 따라 하나의 사건이 이렇게나 다른 일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함께 사는 이들도 이렇게 서로를 잘 모르는데 하물며 같이 살지도 않는 친한 친구라던가 아는 사람에 대해 우리가 떠드는 대부분의 얘기들은 자다가 헛다리 짚는 소리일 확률이 무척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의 화자가 써놓은 글을 보면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일종의 '탈'이라 부를수 있는 타인을 향한 얼굴을 생각하게 된다. 남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꽤 여러 종류의 탈을 갖춰놓고 있다. 엄마를 만날때의 탈. 내 동생을 만날때의 탈. 회사에서의 탈. 친구들과 볼때의 탈. 애인을 볼때의 탈 등등 수도없이 많다. (단 한번도 헤깔린적이 없는걸 보면 난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의 주인공들 역시 자신이 보는 자신과 타인이 보는 자신. 혹은 타인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자신이 다르다는 것이 각기 다른 화자들의 입을 통해 증명이 된다. 나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은 심각하게 보는것. 나는 심각하게 보이길 원했지만 상대방은 대체 무슨 삽질이냐고 보는것. 그런 상황들이 이 책에는 수도없이 등장한다. 그렇게 보면 정말이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말이 딱 맞는것 같다.
어찌되었건 이 책은 재미있다. 처음에는 조금 가벼운듯 시작을 하지만 진행이 될수록 책은 점점 무게를 지닌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심각한 문체로 변하거나 하는건 아니다. 똑같이 한심한 인간들이 한심한 일상을 살아가고 군데군데 웃기기까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은 뒷장으로 넘어갈수록 그저 재밌는 소설이라는 것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싶은 무게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화자인 나오키에 이르러 책이 끝나갈 때 즘에는 약간 무섭다 혹은 섬뜩하다라는 감마저 들게 한다. 한편의 소설이지만 화자가 다섯명이나 되기 때문에 절대로 지루하지는 않다. 하지만 작가가 화자에따라 필체를 달리한다거나 하지는 않아서 각기 다른 단편들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이 젊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보고싶을 정도로 상당히 퍼레이드는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끝으로 요즘들어서 내가 고르는 소설들이 모두 재밌는 바람에 신이 내린거 아닌가 싶어 몹시 들떠있다. 이 책 다음으로 고른 책이 또 재밌다면 난 정말 신내린거라고 굳게 믿을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