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서 써먹기 좋은 대사 메뉴얼
한동원 지음 / 북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예전에 MBC에 출발 비디오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곧 출시될 신작 비디오들을 미리 훑어줌으로써 비디오 대여 활성화에 앞장서는, 그러나 겉으로는 영화정보 제공의 탈을 쓰고 있는 그렇고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프로그램을 일주일 내내 눈빠지게 기다렸었다. 이유는 딱 하나. 그 안에 있는 [결정적 장면]이라는 코너를 보기 (혹은 듣기) 위해서였다. 결정적 장면은 각종 영화에서 결정적인 장면들을 뽑아다가 소개를 하는 코너였는데,누가 생각해도 저 영화의 결정적 장면은 저거 다 싶은 부분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좀 엉뚱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결정적 장면이라고 우기곤 했었다. 그러나 그냥 엉뚱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우겼다면 하나도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 코너가 그토록이나 웃겼던 이유는 웃기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오히려 상당히 FM적인 보이스를 가지고 있는 성우 이철용씨가 택도 없이 오바스러우면서도 진지한 해설을 덧붙인 덕분이었다. 만약 결정적 장면에서 이철용씨가 아닌 목소리 자체에 코믹한 요소가 있는 성우가 했더라면 그만큼 인기를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지하게 웃겨버리는것. 그게 그 코너의 핵심이었다.

이 책은 그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결정적 장면 코너의 대본을 썼던 한동원씨가 쓴 책이다. 결정적 장면을 워낙에 재밌게 봐서인지 내 경우에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목소리로 책이 읽혀지는게 아니라 성우 이철용의 목소리로 책이 읽혀져서 더더욱 웃겼다. 사실 책 제목이 어디가서 써먹기 좋은 대사 메뉴얼 이지만 실제로 써 먹기 위한 대사 메뉴얼은 아니다. 결정적 장면이 진짜로 결정적 장면으로 이루어진 코너가 아니었듯이 말이다. 물론 어디가서 써 먹어도 괜찮을 만한 것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를 실제로 한다고 생각해보라. (ex : 이 안에 너 있다, 애기야 가자 등등) 잠시만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나는 말 주변이 없는데 이 책을 통해 말 주변을 한번 길러볼까?' 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책은 아니다. 그냥 순전히 재미로 읽을만한 책이다. 이미 결정적 장면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동원은 상당히 재미있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물론 그의 글이 다소 길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단점이야 말로 한동원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요소이다. 가끔가다 할말이 너무도 많은 나머지 길고 장황하게 글을 쓰는 인간들을 보는데 그때마다 내가 발견한 건 두 가지의 오류들이었다. 첫째, 말이 너무 길어져서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까먹은 경우. 이 경우는 실컷 길게 말을 하긴 했는데 하다가 보니 자기도 무슨 말을 했는지 까먹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말을 하게 된다. 둘째는 처음 자기의 주장을 뒤에 가서 자기가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처음 펼쳤던 주장 이후로 너무나 말을 많이 하다가 보니 자기가 주장한바를 까먹고, 심지어 까먹는것도 모자라서 지 주장을 지가 뒤 엎는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읽어보니 한동원은 위 두가지 오류를 범할만큼 충분히 긴 문장을 쓰긴 했지만 내가 살펴본 한에서는 저 오류를 범한적이 없었다. 즉 수다스럽지만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또 어떤 결론을 내고 싶은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해보면 알겠지만 이거 생각보다 어렵다.)

한동원의 글이 재밌는 것은 재치가 있다거나 코믹한 단어를 써서가 아니다. 그것은 장황함과 오바스러움에서 오는 재미이다. 장황과 오바를 빼면 남는게 없을 정도로 책의 8할은 그 두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재밌지만 어느정도 읽다가 보면 조금 식상하는 면도 있다. 썼던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그놈이 그놈인 문구들도 자주 눈에 띈다. 허나 그런점들만 감안한다면 이 책은 확실하게 재미있다. 단 이 책을 읽고 정말로 말빨이 늘기를 기대한다거나 여기에 적힌 결정적 영화 대사들을 어디가서 써먹으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 책은 마치 어학교재처럼 좋은예와 나쁜 예. 거기다 응용법까지 적어 놓았지만 그것도 이 책이 가진 재미인 오바의 일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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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4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이미 올리버의 편안한 요리
제이미 올리버 지음, 오정미 옮김 / 삼성출판사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나는 제이미 올리버가 누구인지도 몰랐었다. 그러다가 영국에서 유학한걸 티내지 못해 안달인 남자를 사귀게 되었고 그 남자 덕분에 제이미 올리버를 알게 되었다. 아직 케이블 티비에서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쑈를 방영하기 전이여서 그는 제이미 올리버의 네이키드 쉐프를 어디가서 CD로 다운받은 다음 자막기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자막까지 달고, 심지어는 제이미의 원서를 사서 번역까지 해 주었다. 누가 보면 제이미 올리버 본인이 아닐까 싶게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나는 제이미 올리버를 알게 되었고 요리 프로를 그저 재미로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제이미 올리버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영국에서 아주 유명한 스타급 요리사이다. 요리사라고는 하선정이나 한복려 선생처럼 조용조용한 말투에 설탕 두 큰술, 간장 한 큰술, 파 1,4cm어쩌고 하면서 조신한 요리프로를 진행하던 아주머니들 밖에는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만큼 그의 요리쑈는 파격적이다. 제이미 올리버는 요리를 하다가 재료가 땅에 떨어지면 그대로 주워서 후후 분 다음 다시 쓰고, 레몬즙이 필요하면 직접 손으로 꾹 눌러서 짠다. (실제로 그는 레몬즙짜는 기구를 선물로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한다.) 시간만 나면 하얗게 표백한 행주로 도마를 훔치고 손을 씻고 닦고 하는 요리사들과 달리 제이미는 요리를 하면서 치운다거나 손을 닦는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의 요리는 스튜디오가 아닌 제이미의 집 부엌에서 진행되었고 스튜디오 부엌에서 이미 재료를 다 꺼내놓고 시작하는 여느 요리사들과 달리 제이미는 수시로 자기 집 냉장고와 찬장등을 열어서 재료들을 꺼내가면서 요리를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리사 옆에 서 있던 진행자가 완성된 요리를 한입 먹어보고 뻔한 표정으로 '정말 맛있네요' 를 외치며 끝나는 요리 프로들과 달리 제이미의 요리 프로는 진짜 제이미의 친구나 가족들이 등장해서 요리를 푸지게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런점 때문인지 제이미 올리버는 순식간에 그야말로 스타급의 요리사가 되어버렸다. 영국에 있는 그의 레스토랑은 눈튀어나오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매일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는 이제 비단 영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었다. 내 생각에는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가 기똥차게 맛있다기 보다는 바로 저런 쇼맨쉽 덕분에 유명해진게 아닌가 싶다. 요리를 요리에서 놀이로 만들어버린 제이미 올리버는 현재 세게에서 가장 잘 나가고 가장 유명한 요리사이다.

이렇게 유명한 제이미 올리버는 TV요리쑈 뿐 아니라 책도 여러권 냈다. 그리고 그의 책 중에 일부를 번역해서 낸 것이 바로 제이미 올리버의 편안한 요리라는 본 책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그다지 큰 점수를 줄 수가 없다. 제목은 제이미 올리버의 편안한 요리 이건만 이건 절대 편할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재료가 너무 구하기 어려운것 투성이다. 제이미 올리버에게는 슈퍼에만 가면 (참 제이미가 요리쑈에서 늘 장보러 다니던 슈퍼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혹은 냉장고만 열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요리에 나오는 재료의 8할은 동양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름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재료들이 대부분이다. 설사 물건너온 식재료들을 파는 상점을 뒤지고 뒤져서 찾아내어 어찌어찌 만든다고 하더라도 오븐이며 여러가지 요리를 위한 조리기구들이 또 만만치 않게 필요하다. 밥솥에 전자랜지, 가스랜지에 믹서기 하나쯤이 전부인 평범한 가정에서는 요리를 위해 한살림을 장만해야 할 지경이다. 그래서 제이미의 주장과는 달리 결코 간편하게 할 수 있지가 않다. 시간과 돈이 모자람없이 풍족한 사람들에게는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제이미는 구하기 힘들만한 재료 대신에 넣을만한 간편한 재료따위는 설명해 놓지 않고 있다. 서양권 혹은 제이미가 살고 있는 영국땅에서는 제이미의 요리가 쉽게 따라할 만한 요리인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나로써는 감히 엄두도 내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책은 쑈 보다는 훨씬 재미가 없었다. 그가 그의 집 부엌에서 재료를 턱턱 꺼내어 요리쑈를 할때는 '우와 멋지다' 라고 했건만 막상 활자로된 그 이름도 어려운 재료들을 보자 그만 의욕상실에다 '저 재료가 대체 뭐람?' 하는 신경질까지 동반한다.

제이미 올리버의 광팬이라면 그의 요리책에 실린 글과 사진을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게 행복한지 모르겠지만 정말 만들어 먹기 위해서 요리책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다른 책을 알아보라고 말 하고 싶다.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가 요구하는 각종 허브들과 소스들과 동식물 재료를 다 구하러 다니다가 보면 앵겔지수가 100이 나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제이미 올리버를 꽤나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악평을 쓰는게 마음에 조금 걸리긴 하지만 요리책은 뭐니뭐니 해도 [요리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책] 이라는 기본을 생각해 볼때 내 악평은 조금도 틀린말이 아님을, 이 책을 보면 너무도 분명하게 깨닳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들은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은 작살나게 찐다. 뭣보다 제이미 올리버 그 자신과 그의 요리를 끊임없이 소비했을 그의 아내 줄스의 통통함은 이미 넘어선 몸매가 그 증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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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2005-01-0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맞아요. 저두 제이머 올리버의 요리책엔 절대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심지어 그가 말하는 재료들을 좀 쉽게 구할수 있는 곳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요리를 봐두 별루 먹음직스럽지도 않구, 일단 영국과 영국사람들을 싫어하는 저의 성향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두 플라시보님의 요리책에 대한 판단기준에 동의합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플라시보 2005-01-0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 제이미 올리버가 만드는 요리를 보면 간혹은 먹고싶을때도 있습니다. 다만 한국인인 제가 먹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고칼로리에 느끼할것 같다는 생각은 해요^^ 아무튼 저 책은 책을 소개하는 글에도 나와있지만 그냥 제이미의 팬들이 제이미가 쓴 책이니까 하고 읽는것 이외에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할것 같습니다. 더구나 님처럼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분께도 별로 와닿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瑚璉 2005-01-0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료가 구하기 어렵다는 점은 확실합니다만 저는 이 책에서 소개된 아메리칸 팬케이크는 한 번 만들어 볼 생각인데요. 혹 맛있으면 말씀드리지요 (^.^).

플라시보 2005-01-04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련님. 팬케이크 만들어보고 괜찮으시면 저한테도 말씀 해 주세요.^^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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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려서부터 내가 정말로 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리 혹은 집단이었다.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한 반이 되어버린 아이들. 처음에는 서로 서먹해들 하지만 단 며칠만 지나면 그 속에서 중심과 비 중심 세력들. 혹은 여러개의 무리들이 어김없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건 내게 무척 낯설고 이상한 현상이었다. 마치 둥글게 원을 그리며 빙빙 돌다가 '5명' 혹은 '7명' 이렇게 외쳤을때처럼 아이들은 알아서 스스로 짝을 지었고 그 속에 속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늘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주변을 멤돌곤 했었다. 점심시간에 함께 밥을 먹는 친구, 학교를 마치면 같이 하교하는 친구, 화장실에 손을 잡고 함께 가는 친구가 있는게 너무도 당연했고 그럴만한 친구가 없으면 그애는 따돌림을 당했다. 친구가 없어서 따돌림을 받는게 먼저인지 따돌림을 받기 때문에 친구가 없는게 먼저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런 애들이 늘 존재했었다. 나는 어느쪽이었는가 하면 저런 친구들을 다 가진 쪽이었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럽게 이뤄진게 아니었다. 나는 무리에 속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완전히 진이 다 빠져버릴 만큼 나는 함께 도시락을 먹고 체육복을 갈아입고 매점에 가서 떡볶이를 먹는 친구들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었다. 다른 애들은 그게 노력이 아닌 그냥 자연스럽게 이뤄지는것 같았는데 왜 나만 죽도록 노력해야 하는건지 늘 알 수 없었다. 나는 친구라고 불리우는 내 주변의 여자 아이들에게 단 한번도 그들에 대한 내 진심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나는 무리에 섞이기 위해 하나도 좋아하지도 않는 가수를 함께 좋아하기까지 했었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싶은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이상한 아이 취급을 하며 무리에서 떨어뜨려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무리에서 떨려나는 것이 두려웠다. 자연스럽게 무리의 중간에 있는 아이들과 달리 필사적으로 노력을 해야만 그 속에 겨우 발을 붙이고 있을 수 있었던 나에게는 점심시간에 혼자 도시락을 먹거나 소풍을 가서 한 돋자리에서 놀 아이들이 없다는 것은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것 보다 더 큰 공포였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나는 무리를 짓거나 친한척하는 집단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그 주류 속에 속하지 못하는 비주류 인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약간만 방심하면 나 역시 비주류에 속했을 인간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가끔 소설에서 사람들과 의사소통에 실패해서 혼자 따돌려지는 사람들의 얘기를 읽을때 마다 간담이 서늘해지곤 한다.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나를 닮아있고 내가 조금이라도 무리에 속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했더라면 그들의 얘기는 내 얘기가 되었을테니까 말이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의 주인공은 무리에 섞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우연히 알게된 올리짱이라는 모델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보며 그 등짝을 발로 차 주고 싶다고 느끼고 중학교때 친했던 여자아이가 다른 멍청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면서 자기에게 함께 동참하기를 권해도 외면한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혼자를 선택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혼자 있을 용기를 빼앗아간 것은 바로 저런 외로움 때문이었다. 뉴키즈 온더 블럭 따위는 개가 물어가도 상관없지만 아이들과 함께 지하 상가로 몰려가서 꽥꽥거리며 그들의 사진을 사고, 토요일밤이면 친구네 집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지도 않은 비밀 얘기를 지어서 하는것. 이 모든게 진심으로 토할만큼 싫었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그게 바로 그들과 섞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남들과 무리를 이루지 못하고 섞이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주인공은 비록 담담하게 견뎌내는 것 같지만 그녀도 결국에는 그런 무리들을 갈구하는 마음을 숨길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가진 가장 엿같은 성질은 바로 무리를 짓고 그 속에 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들처럼 저절로 무리가 생기는게 아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로 인해 생기는 무리와 집단들. 진심으로 궁금한건 그들에게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악몽같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렸다. 친구가 많아야 최고이던 시절. 그리고 그 시절에 그걸 유지하기 위해 거의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내 모습. 나이가 들어가는걸 아쉬워 하면서도 그 모든게 깨지 못하는 악몽처럼 존재하던 시간들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책의 주인공처럼 왕따까지는 아니더라도 혼자인 상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가끔은 뼈에 사무치게 외롭다(원초적인 외로움이 아닌 또래집단에 섞이지 못해서 생기는 외로움)는걸 느끼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지옥이다. 차라리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가 있어서 주인공에게 발로 차이고 싶은 올리짱이란 모델에 대해 오타쿠적 성향을 드러내는 남자아이가 훨씬 낫다. 적어도 그에게는 못하거나 하지 않지만 갈망은 하는 딜레마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람들과 섞이는게 어떤 노력도 필요없이 자연스럽고 그게 기쁨이기까지 한 인간들은 알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들에게 그건 무척이나 부럽고 혐오스럽고 외롭고 발로 차 주고 싶은 일이다. 학기 초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파악한다며 취미나 가정환경 조사와 더불어 친한 친구들을 적어내라고 했다. 몇반의 누구누구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걸 시키는 선생과 그걸 적어내야 하는 상황에 욕이라도 퍼 부어주고 싶었지만 나는 어느새 거기다 누구를 적을까 전전긍긍하고 또 내가 적어내는 아이들이 내 이름도 역시 적어줄까 걱정했었다. 내게 있어 집단이나 무리는 정말로 발로 차 주고 싶지만 그 속에 속하기 위해서는 그들 앞에서 네 발로 땅을 기면서 개 흉내라도 기꺼이 낼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은 아쿠타가와상 까지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보지만 그래도 읽을만한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들 작가가 젊어서 놀라는 눈치지만 나는 작가가 젊기에 쓸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본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 그런 일 따위는 다 잊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잊지 않고 있다면 한번 보길 바란다.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인게 아니라 나처럼 억지로 섞인 인간이라면 상처에 소금을 뿌리면서도 어느새 그 고통이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걸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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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1-01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열중 예닐곱은 님과 비슷한 생각을, 그런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대체 인간관계를 빼놓으면 뭘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왔겠슴까...

플라시보 2005-01-02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그렇군요. 다들 저게 너무도 자연스러웠던건 아니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래야 하는건 인간이 불안한 존재기 때문일까요?

비로그인 2005-01-0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를 쓰고 뒤에 가서 서있을려고 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본성은 나서기 싫어하고 혼자 있고 싶어하는데도 계속 불려 세워져서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나 이제 소원 성취하여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불러주지 않아서 행복합니다. 오랫동안의 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지난 연말 연시 회식참석 0건. 동창회 호출 0건. 연하장 0통. 메리크리스마스 + 해피뉴이어 관련 문자 0건. 이메일 0건. 전화 0건!!!! 퍼펙트!!!! 제게 있어 집단이나 무리는 정말로 발로 차 주었습니다.

그로밋 2005-01-04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담이 서늘했던 사람이 여기도 있답니다. 왜 다들 그리도 무리를 지어 다니는지.... 그땐, (외로움을 곱씹으며)홀로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지요.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과 함께 <비타민F>와 <숨쉬어>도 읽어 보세요.


무탄트 2005-01-04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에 한때 제가 왕따였다고 하면 지금은 믿지 않는 친구도 있지만, 초등학교 시절 왕따의 아픔으로 죽고 싶을 만큼 학교에 가기 싫어하던 기억이 있는 저로서는 가슴을 아릿하게 만드는 내용의 글이군요. 나이 먹으면서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척 하면서 적당히 어울리는 법을 배워갔지만, 아직도 제 마음 한 구석엔 혼자되는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걸 느낍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받을 수도, 필요도 없고, 이 지구상엔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제법 많으며, 때론 혼자 있는 것도 좋다는 사실을,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을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거든요. 가끔은 맘에 안 들 때도 있지만. ^^

플라시보 2005-01-05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analei님. 흐음. 그런 반대 상황이 있을수도 있겠군요. 별로 나서고 싶지도 않고 눈에 띄고싶지도 않지만 여타등등의 여건들 때문에... 흐흐. 그래도 이번에는 성과를 거두셨군요. 모두 0건이니^^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이거 축하해야 하는거 맞나? 헤깔립니다. 호홋)



그로밋님. 저 역시 그랬어요. 혼자가 자연스러운 세상이 아니. 내가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길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학교만 졸업하면 그래도 덜 할것 같더니. 정말 어느 정도는 그렇더군요. 손잡고 화장실 가지 않아도 되는것 만으로도 너무 좋습니다. 그런 작은일에도 스트레스 받던 내가 참 불쌍해요. 그리고 추천해주신 책. 기회가 닿으면 볼께요. 숨쉬어라는 책. 제목이 끌립니다.^^



무탄트님. 저런저런. 혼자여봤던 사람들은. 더구나 자의가 아닌 타의로 그런 사람들은 혼자를 약간은 두려워하는것 같습니다. 저 역시 왕따까진 아니었지만 무리에 섞이기 위해 날마다 헉겁할 정도의 노력을 해서 간신히 '또래집단' 이라고 불리는 집단의 끄트머리에서 한발자욱만 움직이면 곧 떨어질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노력을 해야 사람을 사귈 수 있는 거라면 난 아예 사람이 없는 곳에 있고싶단 생각마저 들었어요. 지금은 마음이 편해지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외로움이 있는것 같습니다. 그게 어떤 형태이든 말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100% 이해받을 수 없기에...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은 클론을 만들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자기와 똑같은 자기는 자길 너무도 잘 이해해줄테니 말입니다.

2005-01-05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5-01-0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분. 흐흐. 그죠? 저도 저 책 보고 작가가 예쁘다고 느꼈어요. (특히나 일본 여자치고는 상당히 미인이더라구요. 상큼하게 생긴것이^^ 아마 저 표지 대신 작가 얼굴을 전면으로 내걸었다면 -다른 일본여자 작가들 처럼- 책이 더 많이 팔렸을꺼에요) 그리고 님. 자주 오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출근도장 찍어야 하는것도 아닌걸요. 뭘^^ 그저 내키실때 가끔 오셔서 제 모자란 글 때문에 상처만 안받으셔도 전 고맙습니다. 흐흐.

픽팍 2005-01-1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상당히 공감하면서 읽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제가 남자인지라 이 책을 덜컥 사게 된 것도 아쿠타가와상의 위력만이 아니라 상당히 뽀샤시하게 나온 작가의 이쁘장한 사진덕도 있지요. 부끄럽습니다;;;본능에 너무나 당연하게 충실하는 자신이 너무 싫긴 하지만;;이거랑 공동 수상한 '뱀에게 피어싱'도 상당히 독특하면서 특이하더군요, 제 취향이 아니라서 호불호를 따지긴 좀 뭣하긴 하지만 암튼 아쿠타가와상은 원래 독특한 작품들에만 상을 주는 게 취미인 것 같네요;;;ㅋ

플라시보 2005-01-1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픽팍님. 음..정말이지 작가가 이쁘더라구요. 아마 누가 봐도 이쁘다는 생각을 할것 같습니다. 저는 알라딘에서 샀기 때문에 작가 얼굴은 몰랐다가 책을 받아보고는 이뻐서 놀랐었습니다. 뱀에게 피어싱이란 작품은 제목이 참 독특하네요. 그런데 원래 아쿠타가와상이 특이한 작품에 상을 주는건가요? 전 몰랐었거든요.
 
자오선을 지나다 - 단편
한혜연 지음 / 시공사(만화)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처음 발견한 며칠전. 나는 왜 이제서야 이 책을 발견했을까 싶었다. 올해 7월달에 나온 책인데, 한혜연의 만화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절판된 책들마저 손에 넣고 싶어서 안달인 내가 6개월이나 이 만화책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곧 답을 알아냈다. 나는 출판사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므로 이 작가가 또 단행본을 낼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질 않았었고 또 이 책에는 어떤 리뷰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모를 수 밖에.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한혜연이라는 글자로 검색을 해 봤었다면 조금 더 일찍 찾아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흔히들 순정만화라고 부르는. 여자들이 본다는 만화들은 모두 똑같았다. 생긴것도 그저 그렇고 능력도 없고 가진것도 없는 여자 주인공들. 하지만 그녀들은 언제나 잘생기고 능력있고 가진것 많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물론 중간에 예쁘고 가진것도 많고 능력도 주인공보다 월등하지만 (혹은 능력은 없어도 배경이 좋아서 주인공보다 훨씬 그럴싸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단 하나 주인공보다 못된 여자들의 방해공작이 펼쳐지긴 하지만 그건 지나고 나면 언제나 주인공이 얼마나 착한가를 더욱 더 부각시키기 위한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도 코믹 만화가 아닌 순정만화는 잘 보질 않았다. 그러다가 순정만화에 대한 생각이 바뀐것이 바로 '한혜연' 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면서 부터였다. 착한것 빼고는 볼거 하나도 없는 주인공이 그야말로 만화주인공같은 남자를 만나서 갖은 난관과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러브러브 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순정만화의 스토리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주었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보게 된 것은 단행본이 아니라 내 여동생이 매달 받아보던 만화잡지에서 였다. 그리고 여동생과 따로 떨어져서 살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더 이상 만화를 보지 않았다. 굳이 내가 찾아 나설만큼의 애정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그녀의 단행본을 하나 둘씩 사기 시작했다. 여동생의 것을 빌려보는 것으로 만족스러웠던 만화라는 매체를 내가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여동생과 뗄레야 뗄 수 없었던 만화가 마침내 여동생에게서 분리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단히 만화책을 많이 보는것은 아니다. 아주 이따금씩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정해놓고 그들의 책을 조금씩 사 보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 몇 안되는 작가들의 가장 위에는 '한혜연'이 있다.

이 책 자오선을 지나다는 4개의 단편이 있다. 여전히 그녀만의 색이 뭍어나는 작품들이다. 내가 제일 재밌었던건 마지막 단편인 '시안의 오후' 였다. 기대했던것 보다 크게 재밌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장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조금 안쓰러운 것은 한때나마 만화를 그린다고 껍적댄 여동생 덕분에 만화가 얼마나 노가다인지를 아는데 그걸 단돈 5천원에 팔아야 한다는 현실이다. 어느 소설책 못지 않게 힘들이고 고생을 했을텐데 요즘의 소설책들의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가격에 파니 만화가들이 밥을 굶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 정도의 페이지와 퀄리티를 가진 만화책은 한 8천원 정도 받아도 괜찮으련만... 택도 아닌 내용과 단순해빠진 그림만 가득한 카툰집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이다. 이런식으로 가다가 나중에는 도닦는 심정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만화가를 할까 싶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한권이라도 더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즐기려면 그만한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공짜로 즐기면 (대본소에서 빌려보는것 같은) 또 언젠가는 조금 다른 형태의 댓가를 치를것이다. 예전 경기 같았으면 조금 더 비싼 가격을 달고 나왔을 이 책이 5천원 한다는 것이 진심으로 마음이 아프다. 책값이 싼걸로 마음 아프기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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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4-12-2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혜연이란 작가가 이 글을 보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아요.

송년선물도 이런 선물이 없을 듯 싶구요.

창작의 기쁨은 이쯤에서 완성되겠지요. 플라시보님

플라시보 2004-12-2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흐...뭐 재밌는 만화를 써 주시니 저 정도의 칭송은 받아야지요. 책값이 너무 싼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뭐라 말로 표현할수가 없더라구요. 자꾸 이러다가 보면 만화계 자체가 무너지지 않을까 싶구요. 그럼 자꾸만 일본 만화만 봐야 하잖아요. 재밌어서 일본만화 보는건 괜찮지만 우리 만화 볼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본만화만 봐야 한다면 슬플것 같아요.

마냐 2004-12-30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호박과 마요네즈보다 훨씬 더 땡기는군요...

플라시보 2004-12-30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호박과 마요네즈도 그렇고 자오선을 지나다도 그렇고 둘 다 재밌어요^^

픽팍 2005-01-19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지금은 폐간된 잡지 owho라는 잡지에 연재했던 것을 모아놓은 작품집이네요;;
정말이지 만화계 너무 걱정이 많이 되네요;;;;;
잡지에 한혜연 님 사진이랑 인터뷰도 실려서 읽어 봤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네요 ㅋ
암튼 한혜연 님 작품은 다 독특하고 의미있는 것 같아요 ㅋㅋ

플라시보 2005-01-1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픽팍님. 그러고 보니 만화 잡지도 많이 폐간이 되었죠? 저도 예전에는 만화잡지 많이 봤었던것 같은데... 요즘은 통 안보게 되더라구요.

비로그인 2006-11-23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잡지 나인이 그립네요//
사려고 하니 품절이네요 한혜연님 팬인데;;;;
만화가 생활적인 일본이 이럴땐 부러워요 잡지의 천국이라던
만화잡지도 연령별로 있다죠아마.
 
호박과 마요네즈
나나난 키리코 지음, 문미영 옮김 / 하이북스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이 만화책을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든 것은. 저 건조하고도 담담해 보이는 여자의 옆모습 때문이었다. 보통의 순정만화와 같은, 약간은 유치하다 싶은 화려함도 장식미도 없는. 그리고 전혀 순정만화의 주인공 답지 않게 평범한 생김새를 한 여자의 옆모습은 무척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정면을 보고 있지도 않고 위를 보고있지도 않다. 무언가 생각에 잠겼을때, 혹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을때의 멍한 상태처럼 약간은 아래를 향한 시선. 그녀가 입은 티셔츠와 그녀의 피부는 색깔이 없다. (물론 배경색이 비치긴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색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색을 가진건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 뿐이다. 보통은 만화가 흑백이라 하더라도 표지 만큼은 컬러로 그리기 마련인데 저 표지는 마치 책의 한 중간, 혹은 그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은듯. 표지같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나는 책을 처음 잡았을때와 마찬가지로 호박과 마요네즈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농사를 지을때 발로 차일만큼 어느곳에나 다 있던 호박.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면 케찹과 함께 하나쯤은 다 있는 마요네즈. 그만큼 평범하다는 건지 아니면 일상적이라는 건지... 아무튼지간에 이 만화에는 호박도 마요네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호박과 마요네즈이다. 전혀 어울릴 구석이 없어 보이는 그 두가지. 차라리 오이와 마요네즈라던가 샐러리와 마요네즈 같으면 어느정도 조화로우련만 호박과 마요네즈는 도통 만날일이 없는 음식들이다. 허나 이 만화가 일본만화이니 일본에서는 삶은 호박에 마요네즈를 버무려서 먹는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일단 호박과 마요네즈를 따로따로 생각하기로 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흔해빠졌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굳이 둘이 만난다면 드문 부조화이지만 이 세상에는 호박도 마요네즈도 결코 드물지는 않는. 뭐 대충 그런것들.  

주인공인 여자는 옷가계 점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음악을 하는 세이라는 남자와 동거중이다. 세이는 음악을 한다고는 하지만 딱히 하는 일이 없는 백수이다. 주인공은 생활비가 부족해지자 돈을 벌 목적으로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세이를 사귀기 전에 하기오라는 형편없는 인물을 사귀었었다. 그녀가 매춘까지 했다는 사실을 세이는 알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해 채소 배달을 한다. 한편 그녀는 어느날 우연히 하기오를 다시 만나게 되고 하기오와 세이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이 만화는 너무 담담하고 평범해서 도무지 만화같지가 않다. 조금의 과장도, 극적인 재미를 높이기 위한 클라이막스도 없다. 마치 우리의 일상이 그런것 처럼. 보이지 않는 큰 물결에 두둥실 떠내려 가는것 같다. 큰 일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생기지만 드라마나 만화에서처럼 그 일 하나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 같은건 없다. 평범할것도 없고 특별할것도 없는 그녀의 일상은 담백하고 건조하게 흘러간다. 그녀를 비롯한 어떤 등장 인물도 선과 악이 확실하게 나뉘어져 있지는 않다. 하긴 실제 세상이 그렇다. 명백한 악인이라던가 누가 봐도 천사인 인물 같은건 없다. 다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이고 그 상황에 따라 악이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도 한다.

달거나 혹은 짠 과자들을 먹다가 어느날 '참 크래카'라는 이상한 과자가 나왔을때가 생각이 난다. 그 과자를 처음 먹어본 엄마는 '이게 무슨 과자냐' 라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크래커를 무척 좋아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크래커의 밋밋한 맛을 견디지 못해서 과일잼이나 땅콩 버터를 발라 먹었지만 나는 그냥 먹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무슨 맛으로 먹냐고 물으면 나는 밀가루 맛으로 먹는다고 대답을 하곤 했었다. 이 만화책을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말 하라면 나는 만화계의 참 크래카같은 작품이라고 말 하겠다. 어떤 자극도 없지만 계속 먹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은 절대로 질리지 않는다. 일상도 그런게 아닐까? 큰 행복이나 큰 불행이 닥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게는 큰 탈들 없이, 그리고 천정을 뚫을만큼 날뛰며 기뻐할 일 없이 흘러가는것. 그래도 질리지도 물리지도 않아서 손목을 그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살아내는 것. 이 만화는 그런 담담한 일상들 속의 한 귀퉁이를 잘라놓은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잘라놓은 일상은 어떤 호들갑도 떨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그 얘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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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2-30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유가 쥑임다. 참 크래카같은. 오래전부터 찜 해놓은 만화인데, 아직 인연이 안 닿고 있네요...참 크래카 라 하시니, 다시 생각이 납니다.

플라시보 2004-12-30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한번 보세요. 담담하니 괜찮더라구요. 국내 작가에게선 좀처럼 느끼기 힘들었던 꽤나 드라이한 작품이었습니다.^^

픽팍 2005-04-1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 책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절판이네요;;;나중에 시중에 나오면 꼭 사서 봐야 겠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