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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우체국 - 황경신의 한뼘스토리
황경신 지음 / 북하우스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순수 혹은 순진이라는 말을 무척 싫어한다. 아직 내가 어리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의 순수나 순진은 내게 있어 가식과 일맥상통한다. 대체 이렇게 팍팍한 세상에 온갖 나쁘고 슬프고 아픈 일들 투성인 현실에서 순수하거나 순진할 수 있기나 한걸까? 어른이 되고 난 이후 내가 순수하거나 순진했던 순간의 대부분은 알고도 모르는척 했던거였고 그건 마치 모 방송국 프로그램 코너에 들어간 순수의 결정체 같은 꼭지를 맡아서 어거지로 원고를 쓸 때처럼 몸에 작은 옷을 억지로 껴입는 느낌이다.
내가 본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들. 나는 그들이 틀림없이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라고 생각했다. 필요에 의한 순수가 아닌 정말 순진한 사람들은 세상 부적격자 혹은 지진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도무지 나와는 맞지 않는 여직원과 여러번 트러블이 있었는데 내가 그녀에게 가장 견디지 못하는 점이 나이와 걸맞지 않는, 그래서 때로는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순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그녀가 순수하지 않은 순간들을 찾아내고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순진하고 순수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기준으로 밖에는 생각을 하지 못하니 어쩌면 나는 순수하거나 순진하지 못한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대신 그것을 의심하고 부정했는지도 모르겠다.
황경신의 초컬릿 우체국은 그녀가 몸담고 있던 페이퍼라는 월간지에 실린 글들이다. 한때 페이퍼를 꽤나 열심히 봤던 나는 그녀의 글들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심지어는 오만방자하게도 이런 여자는 나를 한번 만나서 제대로 잔소리를 좀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세상은 온통 아름다운 일 뿐이랍니다 하고 생각하는 그녀의 머릿속을 제발 좀 어떻게 하고 싶었었다. 페이퍼라는 잡지의 성격이 원래 좀 그렇기도 하지만 그녀의 글은 유달리 그 증상이 심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잃어버린 순수를 찾고싶네 어쩌네 하는 닭살스런 마음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리 길지 않은 세월속에서 어른이 되는 동안 잡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내 마음과 정신에 풀 한포기 심어주고 싶은 느낌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녀의 글은 수필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동화라고 할 수도 없다. 분명 맨 정신으로 냉정하게 보면 동화인데 그녀의 글을 계속 읽다가 보면 그 모든 일들이 어쩌면 그녀에게 실제로 일어난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그녀는 이 책을 쓸 수 있는 힘이 오른손이 아닌 왼손의 힘이었다고 말한다. 그래 어쩌면 순수와 순진은 오른손이 되기에는 힘들것이다. 그녀의 주변에 온통 착한 일들과 착한 사람들만 살지 않는 이상. 그녀 역시 가끔은 영악하고 나쁘기도 해야겠지. 하지만 그녀는 순수와 순진을 나처럼 아예 거짓으로 몰아붙여서 쓸어내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그것을 왼손으로 슬쩍 옮겨 두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녀의 왼손이 쓴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이 쉽게 읽혀지지는 않았다. 어려운 책도 아니고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내가 책 한권을 읽는데 걸리는 평균치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건 어쩌면 순수와 순진에 대한 내 마음이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아 그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