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 - 운영전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1
조현설 지음, 김은정 그림 / 나라말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재미있는 우리고전, 운영전


운영전은 사랑이야기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못지 않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로 조선시대 풍속의 일단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나라말에서 펴낸 운영전 “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방울” 은 우리 고전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기획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한문소설을 우리말로 쉽고 아름답고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번역했고 안평대군과의 인터뷰나 한시나 궁녀들의 풍속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적절히 삽입하여 작품을 다각도로 접근하게 한다. 이는 하이퍼텍스트적 편집으로 인터넷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 고전을 친숙하게 접근하게 한다. 여기에, 수묵화와 민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그림과 글자체를 더해 고전에 대한 느낌과 이미지를 적절하게 빚어낸다. 고전을 낯설게 여기는 청소년과 성인 모두에게 더없이 좋은 책이다.


2. 궁녀 운영과 젊은 김진사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선비 유영이 전하다.


운영전은 임진난이 끝난 직후 선비 유영이 수성궁에서 혼령을 만나 운영과 박진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세상에 전해지게 된다는 구조이다. 다시 신선에 세계로 돌아간 박진사와 궁녀 운영에게 속세에서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전해들은 속세의 사람 유영은 쓸쓸함을 가누지 못하다 명산을 찾아다니며 살아가게 되고 그의 자취를 알 길이 없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직접 신선을 만나 신선계를 체험하고 그들로부터 신선계와 현격히 구별되는 속세의 한계를 접했으니 유학을 하는 선비 유영은 세계관에 변화가 생길 법도 하다. 명산 속에서 그는 신선되는 길을 찾아다니고 있을까, 아니면 속세에서 상처받은 최치원 같은 지식인처럼 은둔하며 한계 많은 세상을 안타깝게 노래하고 있을까.


3. 궁녀들의 애끓는 삶을 전하다.


궁녀는 왕의 여자들로 그 수가 지나치게 많다. 왕의 소유물이나 다름없는 궁녀는 어린 시절부터 차원 높은 교육을 받으나 그것은 왕의 여자로서 갖춰야할 품격을 위한 것으로 개인의 독자적인 삶이 결여된 노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식수준은 높은데 그것을 선택해서 쓸 기회가 없고 자신에게 걸맞는 배우자를 고를 권리가 주어지지 않으니 월하인연은 즐길 수조차 없다. 궁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그네들에게 자기결정권이 없는 지식쌓기나 예술행위는 그 깊이가 깊어갈수록 행위자 자신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런 처지의 궁녀들에게 한 서린 사연들은 참으로 많았을 것이다. 운영전은 바로 그런 궁녀의 한 서린 사연의 일단을 보여준다. 안평대군이 귀하게 여기는 젊은 진사와 바로 그 안평대군이 귀하게 여기던 궁녀 간에 사랑이야기인 것. 조선시대 궁녀들의 일상과 그네들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도록 그네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중요한 소설이다.


4. 왜 고전에는 귀신이 자주 등장할까.


김진사는 선비지만 운영은 부처님께 공양을 하는 것을 보면 불자인 모양이다. 도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당 소격서가 있는 소격서동이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데 무녀의 역할도 중요했던 운영전에서는 조선의 유불선이 총동원되고 있다. 최치원전도 귀신과 하룻밤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인데 장화홍련은 말할 것도 없고 이인보전이나 금오신화의 소설들은 거개가 귀신과 산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이야기한다. 귀신과 함께 했던 고대인들이 지닌 세계관의 특징이기만 할까. 운영전의 경우는 유영이란 선비가 귀신과의 접촉으로 현실을 다시 해석하는 기회를 얻고 최치원전과 이인보전의 경우는 외로운 선비들이 사랑을 나누는 기회이며 최치원전의 경우는 그것을 기화로 최치원 말년에 은둔한 사연을 설명하기도 한다. 고골리 작품 ‘외투’에 등장하는 귀신은 캐릭터와 사건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효과를 내는 것을 보면, 창작자들이 귀신을 등장시키는 맥락과 동기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그에 비해 구운몽은 꿈 이야기고 춘향전은 꿈도 귀신도 없는 매우 리얼한 배경을 깔고 있으니 시대에 따라 이야기 풀어가는 양상의 변화 또한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5. 우리 고전 속 데이트 풍속 - 한시 나누기


최치원전이나 금오신화 운영전 등 고전 속에는 시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우는 데이트가 하나의 풍속처럼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최근 영국에서는 인텔리데이팅이 유행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시 낭송 모임이나 정치토론회 등을 통해 데이트를 하며 말초적인 것 이상의 지성을 꾀하는 새로운 데이팅 것이다. 우리 고전에는 인텔리데이팅이 이미 하나의 풍속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데이트는 어떻게 다를까. 고전을 읽으며 고대와 현대의 데이트를 비교해 보는 일도 흥미로울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미네르바의 올빼미 4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 정종훈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 잉게 숄著. 박종서譯. 靑史. 188면. 값 1,900원



"어머니 오셨어요?"

"오냐, 잘 지냈니?"

"네."



(사이......말 없음)



"애야, 내일이면, 네가 그 자리에 없겠구나"



황지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전문



1. 20년 만에 다시


중고생 시절인 80년대에 처음 이 책을 읽었다. 그때 무엇을 느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청사에서 출판된 낡고 바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자의 죽음'이 의미없는 과거의 이정표처럼 한동안 덩그마니 꽂혀 있을 뿐이었다. 문맹인이 아닌 덕에 다시 그것을 읽었고 20년전 중고생이라 읽어낼 수 없었던 과거와 의미를 서른넷이라 읽어낸다. 세월은 유심한 모양이다.


2. 숄 남매


숄 남매는 히틀러 체제를 반대하는 격문을 뿌리다 체포되었고 체포된지 나흘만에 사형 당한다. 그들이 하고자 했던 수세적 저항운동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격문을 뿌리고 히틀러유겐트를 탈퇴하게 하고 편지를 보내던 저항방식은 그것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게 한다. 저자인 또다른 숄남매 중 하나인 잉게숄은 그렇게 말한다.


"현존하는 바벨탑에 상처를 입히는 그러한 최소한의 일에 모든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은 확실히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처음부터 히틀러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와 달리, 성장기에 히틀러유겐트를 접한 이들은 처음엔 그 재미에 빠져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의 아버지는 강제하지 않았으나 덕분에 그들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 파시즘의 본질을 간파해 간다. 그들이 좋아하던 스테판 츠바이크의 책이 금서가 되는 이상한 증후에 의심하기 시작하고, 중대장 시절 제작한 독수리 깃발이 다른 부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불허되자 어린기수에게 가해지는 명령을 못견디고 한스숄은 상급자의 따귀를 때린다. 신앙을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감이 증폭되고 고전을 읽는 나이에 이르러 히틀러체제를 비판하는 언어를 그 속에서 획득해 간다. 러시아 전선에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목격하고 아버지가 투옥된 채 남형제들은 모두 전선으로 파견되는 불우함을 가족 모두가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신앙이 있었다.


3. 인격과 품위는 어디서 오는가.






'2년 전 숄 남매의 사망 60주년을 기념한 기사에서 그때까지 발표된 적 없던 게슈타포 심문 자료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소피 숄의 심문 자료 첫 번째 페이지엔 그녀의 거짓말이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그 문서를 배포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어떤 독일인도 소피가 거짓말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전형적인 순교자이자 영웅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하지만 이 기록을 보면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부인했다. 그녀를 다그치던 매우 터프한 수사관은 심문 3일째에 이르러 서서히 바뀐다. "네 행동을 후회한다고만 하면 넌 살 수 있다." 그녀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똑같이 행동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타고난 영웅은 아니지만, 심문당하는 3일 동안 매우 극적인 심리 변화를 겪는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새롭게 돌이켜보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존엄함을 찾아낸다. 그리고 죽음을 택한다. 그건 하나의 몸 속에 전혀 다른 두 개의 캐릭터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정말 놀라웠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모든 상황이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나날>의 감독 인터뷰 가운데



백장미 단의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투옥과 전장으로 가족에게 위기의 나날이 지속될 때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어디서든 가족을 지켜 주실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믿는다. 체포되어 사형을 눈앞에 두고도 그들은 말한다. "먼저 가서 준비를 해둘 테니 나중에 다시 만나요 어머니." 사형 전날 소피를 면회간 어머니가 말한다. " 얘야, 예수님을 믿어라" 딸이 답한다. " 어머니도 그러세요" 단두대에 오른 수많은 사형수들과 달리 그들은 끝까지 꼿꼿했던 이들로 널리 회자된다. 사형선고가 내려진 재판에서 아버지는 울부짖고 어머니는 실신 했지만 그들은 신앙으로 자식들의 선택을 품위 있게 지켜낸다. 문화민족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기독교인으로 존엄성 상실을 견딜 수 없었던 이들은 엄혹한 상황에서 작은 저항일지라도 당당하고 심각하게 선택한다. 그들의 신앙이 놀라운 선택과 행동을 이끄는 힘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내가 중고생 시절이었을 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4. 이들이 살았다면 대전 후 그들은 무엇을 선택했을까.



군부독재 시절 저항했던 이들이 현재 다채로운 영역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며 그들이 독재에 저항했던 이유가 모두 다 제각각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절이 단순해서 선악이 분명한 상황과 달리 그것이 분명치 않은 상황에선 오히려 사람들은 혼란과 무기력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그들이 저항했던 바탕의 동기가 무엇에 근거했는가, 얼마나 건강했는가를 시험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운동을 선택한 각자의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의식했건 못했건간에, 그 각각의 이유가 궁금하다. 적어도 숄남매와 그들의 친구과 가족들은 신교에 바탕을 둔 신앙과 거기서 비롯되는 개개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매우 중요한 동기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들이 살았다면 대전 후 자유주의자로 살았을 수도 있고 국경없는 의사회와 같은 봉사자들이 되었을 수도 있고 저널리스트나 혹은 또 다른 어떤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해방직후의 조선의 혼란과 환멸의 역사와 민주화 이후의 변화들을 생각해 보면 엄혹한 시절의 삶과 그 후의 계승과 단절이 간단치 않음에 그들의 선택은 어떠했을까, 간단히 추측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가족 전체가 보여주는 믿음에 뿌리를 둔 인격과 품위는 계승과 단절이, 희망과 환멸이, 어디서 갈라지게 되는지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는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징비록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단 열흘 만에 서울이 왜의 손에 넘어간다. 국가가 애써 걸려낸 온갖 실력있는 인재들은 자만심에 들떠 있거나 정보가 부족해 어영부영 어이없이 무너진다. 전등화 상황을 뒤집은 이들은 용감무쌍하고 실력있는 의병장과 그를 따랐던 평민들, 그리고 이순신 부대였다. 낮은 계급의 무사들과 제도권 밖의 의병들이 무능한 제도권을 압도하며 그들을 보완했던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르랴. 실력있는 엘리트들이 공직을 차지하고 실력발휘 하고 있지만 기성의 제도란 타성과 부패에 젖기 쉬운 모양이다. 뛰어난 실력에도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실력있는 인재들이 모여있는 조정의 무능함과 이순신부대의 유능함은 사뭇 대조된다. 똑똑한 이들이 그들끼리 겨루는 경쟁과 질투와 시기와 모함은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을 만큼 소모적이고 치명적이었다. 반면 소박한 곳에서 소박한 포지션으로 지내던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기투합하여 위기의 국가를 구원해 낸다. 질투와 시기와 모함 속에서도 승리가 가능할 수 있고, 소박한 이들이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의기투합해도 패할 수 있지만 공허한 실력과 옹골찬 조화의 힘을 고루 들여다 볼 안목이 필요하다.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기란 얼마나 중요한가. 

징비록의 교훈이라면 프로도 필요하지만 아마추어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도권이 탄탄해야 하지만 재야도 건실해야 한다. 주류가 실력 있어야 하지만 숨은 비주류의 주류와는 종류가 다른 실력이 요구된다. 보완 관계인 것이다. 어떤 공동체, 어떤 조직에서도 그런 양 날개의 균형이 필요하다. 똑똑한 사대부는 경쟁으로 무능해지고 재야답지못한 비주류는 그들을 닮고 흉내내기도 한다.  서로가 탄탄하게 다 다를 때, 공동체는 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건강하다.  똑똑함과 실력의 잣대도  다 다르게 다양하게 공존해야 한다. '똑똑함'을 둘러싼 오해들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똑똑함'인가.  

쉽게 쓰인 글이다. 중고생, 특히 전쟁 좋아하는 학생들, 성공과 일등에 매달려 달려가는 학생들에게 읽히고 토론하기에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