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냐 플라스푈러, <힘 있는 여성 -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문제는 '#남녀임금평등'과 같은 해시태그가 '#미투'와 같은 정도의 반향과 효과를 불러오지 못할 것이라는 데 있다. 언론이 미투만큼 주목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언론의 입장에서는 남녀의 임금 격차가 호텔방에서 권력 있는 남성에게 당한 희롱과 괴롭힘을 상세하게 털어놓는 여성의 이야기만큼 섹시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포커스(Focus)>가 "당신도 직장에서 성적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당신의 사연을 이메일로 보내주시면..."과 같은 제보 요청 문구로 여성들의 용기를 부추기는 태도만 봐도 언론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잡지가 앞으로 이렇게 저렴한 가격에 시의적절한 사연들을 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언론이 미투를 소비하는 매커니즘을 보고 있노라면 프랑스 철학자이자 계몽주의자 드니 디드로의 소설 <입 싼 보석들>이 계속 떠오른다. 술탄이 반지를 돌리기만 하면 그 나라에 사는 여성들의 성기가 술술 이야기를 털어놓는 내용이다." 


"만약 이 대목에서 미투가 '침묵을 깬' 매우 자주적인 행동이라고 반론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설득력(여성이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고 고백하는 것에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에만 의지하는 닳아빠진 논리에 불과하다. 당시에 막을 수 있었을 범죄를 시간이 흐른 뒤에 비난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고발한다? 과연 우리가 우리 딸들에게 이처럼 무력한 추종을 자주성과 해방이라고 가르치고 싶다는 것인가? 

실제로 미투는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여성상을, 수동성과 부정성으로 점철된 여성상을 부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미투가 양성 관계, 즉 남성과 여성의 구체적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자. 미투의 목표는 정확히 무엇일까? 미투 운동은 남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것일까, 역전시키려는 것일까? 아니면 지속적으로 망가뜨리는 것일까?" 


"현재의 토론에서는 욕망 자체가 주축을 이룬다. 미투의 특징은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수동적 역할로만 인정한다는 데 있다. 결국 미투 운동은 남성의 욕망에 대처하고 남성의 욕망을 물리치며 남성의 욕망으로부터 여성을 효과적으로 지킬 수 있는 전략을 목표로 삼는다. 이런 노력에서 여성적인 것 자체의 자리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우리는 여성의 욕망에 대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폭력에 노출되었더라도 여성이 섹스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녀 관계의 중심에 전능한 남근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이 돈다고 주장하는 고리타분한 욕망의 경제학을 뜯어고쳐야 한다. 남성의 욕망이 우월하므로 여성은 그저 반응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욕망의 경제학 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Yes Means Yes' 규정의 해방적 효과가 근본적으로 의심스럽다는 데 있다. 여기서도 성적 만족을 원하는 공격적이고 힘 있는 남성과 그에게 허락을 하거나 그를 거부하는 여성이라는 도식이 되풀이된다. 슬라보예 지젝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논리의 귀결점은 여성을 "훨씬 더 굴종적인 위치로 데려다 놓는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정복하기를 원한다고 시인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남성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공개 설명의 등가물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 


"자주적 여성성을 위한 투쟁, 바로 여기에 모든 여성의 개인적 책임이 있다. 입법자에게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감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성이 직접 나서서 자주성을 실천해야 한다. 법도 그 책임을 대신해줄 수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생물학을 들먹이며 남성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며, 여성은 방어적이고 수동적이라고 말하는 헛소리는 땅에 묻어버리자. 그 무엇도 그런 이분법이 옳다고 입증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여성을 약자의 지위로 추방해버렸던 것은 자연이 아니라 남성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오래된 공포다. 힘 있는 여성을 향한 남성의 두려움이다." 


"프랑스의 여성 정신분석가 엘렌 식수는 <출구>에서 성적으로 불가능한 지위를 박차고 나오라고 여성들을 독려한다.   

"욕망이 있어도 죄, 욕망이 없어도 죄, 불감증이어도 죄, 너무 '뜨거워도' 죄, 동시에 둘 다가 아니어서 죄, 너무 지나치게 엄마 노릇을 해도 죄, 엄마 노릇이 부족해도 죄, 아이를 낳아도 죄, 낳지 않아도 죄, 젖을 먹여도 죄, 안 먹여도 죄."  

이것이 여성이 가진 실존적 딜레마다. 따라서 식수는 여성들이 '꽁꽁 봉해진 거대한 신체의 영토'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해야만 자신의 힘을 온전히 활짝 펼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의 피해자 서사에 매달리지 말고 깨어나 굳은 의지로 미래를 바라보기로 마음을 먹어야만 남성과 동등해질 것이고, 여성을 향한 남성의 공포는 쾌락으로 바뀔 것이다." 


우연히 빌려보고 깜놀. 아주 짧은 분량의 글에 번개 파박! 완전 센데 맞는 말이야. 맞는데... 음, 뭔가 아리송... 다시 정독 요망. 다양한 시각의 페미니즘 책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군. 하... 여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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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각방 예찬 - 차마 말하지 못했던 부부 침대에 관하여
장클로드 카우프만 지음, 이정은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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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침대에서 누군가와 함께 잠을 잔다는 것은 많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이다. 결혼하면서 ‘당연하게’ 더블침대를 사고 이불도 깔개도 2인용으로 샀다.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은 넘쳐난다. 잠을 푹 자야 일상생활도 건강하게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은 부부라는 이름 아래 무시되기 일쑤다.


“우리는 분명 그 사람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며,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할 말은 해야겠다.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사랑하는 그 사람이 코를 골기 시작하고, 발이 차갑다고 하고,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고, 나는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옆에서 덥다고 난리를 치고, 돌아누우면서 찬바람을 일으키고(또 그걸 쉴 새 없이 반복한다!), 옷을 둘둘 말아 아무렇게나 던져 놓을 때면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적으로 느껴진다고 말이다.” 


프랑스에서의 첫 1년을 보낸 집은 최소한의 가구가 있는 스튜디오(원룸)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는 낡은 더블침대가, 헤드도 없고 매트리스는 아이들이 올라가 방방 뛴다면 더없이 좋아할 만큼의 푹신함을 자랑하며 놓여있었다. 그 땐 그나마 젊어서? 어려서? 허리가 몹시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몸무게가 거의 내 두 배 가까이 나가는 옆지기가 침대 한쪽에 누우면 그 옆의 나는 한쪽이 기울어진 바닥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가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침대가 화제에 오르면 내가 옆지기 쪽으로 데구르르 굴러내려간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렇게 자는 잠이 편할 리가. 


아이가 생기면서 옮긴 두번째 집에서는 더블침대를 새로 구입했다. 출산 후 침대는 나와 아기의 잠자리이자 생활터전이 되었다. 그러려고 산 더블이었다. 2시간에 한번씩 밤에 깨어 우는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느라 내 하루하루는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의 이음이었고 옆지기는 자연스레 다른 방에서 잠을 잤다.


1인용 침대를 두 개 산 것은 몇 년에 걸쳐 한두 번의 이사를 거친 뒤였다. 조금 큰 집으로 가게 되면서 손님방을 만들어야 했고, 사용하던 더블침대를 손님용으로 넣었다. 그리고 나와 옆지기의 방에는 싱글침대 두 개를 붙여놓았다. 잠귀가 밝고 소리에 민감한 나는 누가 방문을 열어도 깨고 옆자리에 와도 깨고 누워도 깨고 코를 골아도 깨고 뒤척여도 깨고 아무튼 깬다. 새벽에 한번 잠을 깨면 다시 잠들기도 어렵다. 옆지기는 잠에 관한 한 나와는 반대의 성향이라, 머리를 베개에 대고 정확히 3초 후면 가르릉 잠이 들고 옆에서 뒤척여도 웬만해선 깨지 않는다. 그러니 함께 자는 생활에서 손해인 것은 늘 나다. 


“라플뤼마스케(닉넴)는 혼자 소파에서 자는 게 꿈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의 이런 새로운 욕구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시각을 갖기 시작한 그녀는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어째서 부부간의 의무여야 하는지 반문한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하고 밤을(또 삶을) 나눈 지가 거의 11년째에요. 그런데 이제는 함께 밤을 보내는 일이 견디기 힘들어요. 나는 잠이 아주 얕아서 남편이 깨어나는 순간 바로 그 소리를 들어요. 밤에 조용히 자기 위해서 둘이 함께 쓰는 이 침대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질 뿐이에요. 하지만 이런 희망은 마치 상대방을 저버리거나 사랑이 식은 것처럼 아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죠. 함께 자야 한다는 이 신화는 어째서 이렇게 깨기 힘든 건가요?” “ 


붙여놓은 1인용 침대에서 자면서 수면의 질은 조금 나아졌다. 각자 이불을 따로 덮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옆에서 뒤척일 때 침대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뒤척이는 소리는 들리고 가끔 코고는 소리도 들리며 방을 드나들며 내는 소음이 함께 하니까. 그래도 그 당시에는 흔들리지 않는 침대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컸다. 진작 이렇게 할 걸 싶었다. 


“이제 부부는 서로 붙어 있고 싶지 않을 만큼 서로에 대한 욕구가 약해진 것일까? 대부분 아니라고 대답한다. 다른 이유를 든다. 줄리의 이유는 이렇다. “숨결 때문이에요. 숨결이 정말 거슬리거든요. 입 냄새나 입김, 코골이(남편은 코를 많이 안 골아요)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남편 숨결이 얼굴로 불어오면 정말 괴로워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단지 그 때문에 등을 돌리는 거예요.” 그웬은 범위를 조금 더 넓힌다. 숨결을 넘어서서 남편 얼굴 때문에 잠을 설친다. “남편이 내 쪾으로 누워서 입을 벌리고 숨까지 세게 쉬면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아요.” 이런 때 등을 돌리면 자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자신의 자세와 잠자리 애착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 


한밤에 잠결에 무언가 훅 찬기운이 느껴져 소스라치며 잠에서 깬다. 싱글을 두 개 붙인 침대의 가로 길이는 180cm이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 누우면 거리가 생긴다. 그런데 잠을 자다 보면 그 거리가 심하게 가까워질 때도 있다. 나는 잠버릇이 얌전하고 옆지기는 조금 활발(?)하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한밤의 콧구멍찬바람이다. 위의 인용한 부분을 읽으며 뼈에 사무치게 공감했다. 입냄새도 가끔 너무 싫을 때가 있는데 특히 저녁에 생양파를 먹었을 때는… 


그러니까 10여년 동안 싱글 둘을 붙인 침대생활을 했다. 약간의 변화는 코로나 때문에 왔다. 2020년 초, 학교와 관공서, 레스토랑 등 생필품매장만 제외하고 전부 문을 닫는 상황에서 우리집에서는 유일하게 옆지기만 출근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아픈 것이 무서웠던 나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고, 내 침대 매트리스를 들고 작은넘 방으로 피신을 했다. (그렇다, 초창기엔 그랬다.ㅠㅠ)  작은넘은 코를 골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아 가끔 뒤척이다가 발로 벽을 꽝 차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수면 파트너로서 나쁘지 않았다. 잠을 자기 위해 불을 끄는 시간도 비슷했다. 나는 잠을 아주 잘 잤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서 방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돌아갈 시기를 차일피일 미룬 것을 인정한다. 그동안 잠을 아주 편하게 잘 잤으니까.


“사랑은 각자의 침대와 공통의 침대, 즉 침대 사이를 오가며 구축된다. 이는 일회적인 일도 웃어넘길 일도 아니다. 부부가 새로 탄생한 세계에서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면, 침대가 지나치게 유일하고 지속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물론 이는 역설적으로 들린다. 우리는 삶의 그 어떤 때보다 사랑 초기에 1+1은 1이어야 한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중의 움직임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둘만의 새로운 세계를 확실히 만들어 가되, 이 세계를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 그 옆에 개인적인 공간, 즉 또 다른 자기만의 공간을 계속 유지해야만 한다. 이렇게 되려면 몇 달 내지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 


“니니의 잠이 얕은 것은 분명히 사실이겠지만, 이것은 아마도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할 것이다. 게다가 남편의 말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지만 그때 자고 있던 것도 아니다. 이런 점들이 인식된 것은 훨씬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가려 주던 커플의 열정적인 융합은 이제 드문드문 나타나고, 그 대신 이제 새로운 형태의 애정 관계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상호 이해와 애정으로 이루어진 세계, 각자에게 편안한 영역이 온전히 보장될 수 있는 세계를 새로 창조해 내야 한다. 이것은 아주 미세하고 정교한 작업이다. 특히 침대 속에서는 더 그러해야 한다.” 


돌아갈 방을 정리하면서 가구 배치도 이리저리 다시 해보았다. 침대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침대 사이의 거리라도 좀 띄워보자 싶었다. 따로도 잤는데 띄우는 게 안 될 게 뭐람? 고정관념 따위 버려보자구. 침대를 양쪽 벽에 하나씩 뚝 떨어뜨려 붙여놓았다. 거리는 글쎄, 지금은 그 모양이 아니라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2미터가 조금 안 될 것이다. 


“둘이 함께 사는 일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상대방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상대방 몸짓의 리듬, 사물을 만지는 방식 등 무수한 것에서 상대방이 자신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것이 더욱 어려운 이유는 부부라면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리라는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휴가 계획, 자녀 교육 방식과 같은 일에 관해서라면 의견이 실제로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람은 좀처럼 변화시킬 수 없는 일상의 무의식(프로이트의 무의식과는 아무 상관없음)에도 자기 존재를 깊이 기입해 놓는다. 이 일상의 무의식은 사물들에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그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반응을 모조리 기억해 놓는다. 바로 이 때문에 병따개든 빗자루든 집 안에 있는 모든 평범한 사물이 신비로워진다. 이 물건들이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단순한 사물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내부로부터 우리를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침대 위치가 또 바뀌었다. 가구들이 어지럽게 들어와있어 복잡했던 방을 정리하면서였다. 침대를 다시 붙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잖아? 거리만 좀 줄여보자, 하여, 지금은 침대 사이의 거리가 60cm 정도 된다. 붙여놓았을 때보다 방이 좀 틔어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그동안은 침대 주변이 정리되지 않아 책을 얹어둘 공간도 없었다. 집 비우기를 조금씩 실천하면서 가구를 빼고 침대를 띄우고 양옆으로 작은 책꽂이를 놓아 각자의 물건들을 넣어둘 수 있게 만들었다. 읽던 책과 노트들을 쌓아두고 밤마다 아침마다 침대에서 슥 꺼낼 수 있어 새로 만든 공간이 무척 마음에 든다. 


“코골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자주 심하게 코를 곤다. 하지만 이해심이 훨씬 부족한 쪽도 남자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두 상징 세계가 대립해 왔다. 즉 남자는 화염과 전쟁의 이미지를, 여자는 신체와 집을 보살피는 존재를 상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싸움을 좋아하고 쉽게 흥분하고 거만하고 외향적인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트림을 해도 쉽게 용서해 준다. 반대로 여자들은 수세기 동안 자제하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이상화된 고정관념 속에서 여자는 코를 골면 안 된다. 하지만 여자들도 코를 곤다. 남편들이 이를 인정하기 힘들어할 뿐이다.“ 


고정관념 때문에 침실에 대한 생각, 밤에 대한 생각이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오 진짜 그렇네, 이노므 가부장제 문화는 속속들이 침투하지 않은 곳이 없구나 싶었다. ‘버지니아 울프를 잊으서는 안 된다!’며 자기만의 방을 언급하는 부분도 좋았고.


“배우자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잘 자는 배우자인 경우엔 더 그렇다. 그가 나와 똑같은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과 가족, 친구들을 이해시키기도 어렵다. “언젠가 친구들한테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우리더러 미쳤다고, 부부관계가 끝장난 거라고들 하더군요.”” 


오, 그렇지 않아요. 부부관계는 함께 잠을 자야만 유지되는 그런 게 아니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죠. 의사소통. 정신적 교류. 몸의 대화는 거기에 따라와야 하고 또 따라오는 거예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삶. 억울하다. 사랑은 혼자 깨우쳐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사실을 함께 사는 사람은 짐작조차 못한다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 또한 힘든 일이다. 그렇게 자란 남자와 그렇게 자란 여자의 그런 삶. 이젠 좀 둘 다 벗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노력 노력 또 노오력.)


밑줄을 너무 많이 그었다. 인터뷰한 말들과 어우러져 길어서 인용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아 아쉽다. 애초에 인용구를 중간중간 넣으려고 한 것이 잘못인 듯하다. 읽을 때는 이 책을 권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글을 쓰며 다시 보니 그럴 만 하다.


침대가 소재인 책이지만 침대와 침실을 둘러싼 커플의 여러 문제들(수면, 일상, 관계의 의미, 욕구, 섹스, 동의와 거부, 사랑, 정체성, 개인 공간 등등)을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짚어내고 있다. 책의 제목은 다분히 자극적이라 생각한다. 무조건 각방을 예찬하는 내용이 아니다. 둘이 함께 쓰는 침대, 한방에서 각각 쓰는 일인용 침대, 각자의 방에서 쓰는 침대, 각각의 경우에 생겨난 위기를 극복하기도 하고 그러지 못해 헤어지기도 하고 각자에게 맞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하는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함께 살기를 꿈꾸’는 동시에 ‘자기 삶의 유일한 주체이기를 바라’는 현대인들을 이야기한다. 원래의 제목은 ‘둘을 위한 하나의 침대/둘이 쓰는 침대(Un lit pour deux)’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침대를 사용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법은 없다. 문제점을 짚다 보면 결국 해결책이 보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을 수는 없으므로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는 모양새랄까. 

나는 부부의 각방을 예찬하는 입장이다. 지금은 한 방에서 각각 1인용 침대를 사용하지만, 조만간, 각자의 방을 사용하고 침대는 각각 더블로 바꾸기로 합의(?)를 했다. 각방을 쓰겠다면서 침대는 왜 더블로 바꾸는가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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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4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4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 2021-02-04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건이 된다면 중정을 두고 두 집에 나눠사는 것도 괜찮을것 같아요! 늘 만남이 데이트가 될듯!흐흐흐☺😆

난티나무 2021-02-04 20:23   좋아요 1 | URL
아!!! 완전 좋아요!!!!!!!!!!!!!! 집 지어야 되겠다. 철푸덕.

라로 2021-02-04 2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희는 남편이 난티님 같은 과에요. 예민해서 잘 깨고, 깨고나면 잘 못자고,,, 그 짓을 25년이 넘게 했는데도 다른 방에서 잘 생각을 안 하네요. ^^;;; 가끔 서핑 갈때 저 깨울까봐(저 안 깹니다만;;) 그전날만 큰아들 방에서 자요. 암튼, 재밌는 책이네요. 장바구니 척!ㅋㅋ 혹 땡투 들어오면 저라고 생각하세요.ㅋㅋ (난티님께 땡투 자주 하는 일인 올림)

난티나무 2021-02-04 20:54   좋아요 1 | URL
책에도 나옵니다. 각방 쓰자고 하는 쪽은 대부분 여자라고.ㅎㅎ 남자들은 대체로 먼저 따로 자자고 하지 않는대요. 이유는 아시겠죠? ㅎㅎㅎㅎㅎㅎㅎㅎ
땡투, 어우 감사합니다!! 제가 종이책 사는 데에는 라로님의 땡투도 있었네요!! ^^

라로 2021-02-05 02:49   좋아요 0 | URL
ㅎㅎㅎ네 이유를 알 것 같아요. ㅋ 그렇지만 저는 절대 따로 자고 싶지 않아요. 이불 속을 따뜻하게 데우는 난로 같은 남편, 더구나 따뜻한 그의 발이 없으면 안 되거든요. 아마도 제가 남편분처럼 잘 자는 타입이고 남편이 난티님 같은 사람이라 그런가봐요. 제가 쫌 이기적이죠. 🤣

난티나무 2021-02-05 04:50   좋아요 0 | URL
라로님께는 남편분이 보온물주머니로군요! 서로가 불편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

다락방 2021-02-04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오 너무 좋네요. 이 책도 제가 사겠습니다. 제가 코를 심하게 고는 여자라서 말이지요. 이만 총총.

난티나무 2021-02-04 23:2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죄송합니다.ㅋㅋㅋㅋ 살 책을 얹어드렸네요.^^;;;;;;; 📚
 

읽은 책 리뷰나 페이퍼도 잘 안 쓰면서 읽고 싶은 책들 목록은 왜 작성하고 싶은지? 


이틀 동안 계속, 종이책을 사대는 나를 어찌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어젯밤 책에 책을 타고 전자도서관에서 검색을 하다가 빌려읽고 싶은 책 목록을 노트에 한 페이지 넘게 작성하고 말았다. 적으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하루에 한 권도 읽을 수가 없는데 하루만에 이렇게 목록이 늘어나면... 음 그러니까... 지금 적어놓은 목록이.. B5 노트로 6장 반이다. 봤다고 체크한 책은 열 권도 안 되네? 한 페이지에 대략 17~20권이 적혀 있으니 12페이지에 무려 240여 권이 @@. 이것만 다 읽으려고 해도 1년은 걸리겠다. 실실 웃으면서 아 이제 진짜 책 그만 사야지 생각했다. (거짓말 하기 싫으니까 구입에 10%의 여지만 남겨둬야지.ㅋㅋ 꼭! 종이책을 사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안사90%가 지켜지기를 바라며.) 


그래서 아래 목록은 살 예정인 책들이 아니라 읽고 싶은 책들이다. 하하.ㅠㅠ 
















해리엇 러너의 책들. 번역된 책들이 제법 많다. 

<무엇이 여자를 분노하게 만드는가> <무엇이 여자를 침묵하게 만드는가> 

사랑은 무엇인가, 가 요즘 내 질문 중 하나라 벨 훅스의 <올어바웃러브>를 읽고 있다. 거기에도 여러 작가와 책이 나온다. (반갑지만 반갑지 않다. 전자도서관에 없어.) 목차를 훑으니 당장 이 두 권이 읽고 싶어졌다. 보관함에 담아놓고 하루를 지내니 좀 나아졌다. 참아야 해. 책 정보를 다시 보지 마. 목차도 보지 말고. 


















M.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 

이 작가도 벨 훅스 책에 나온다. 책 엄청 많아! 세트 막 다 읽어보고 싶고. 사랑에 대한 정의, 좋아요. 


















핍 윌리엄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사전에서 누락된 여성들의 언어를 복원하다" 라는 문구를 보고 보관함에 넣지 않을 수가. 

















유***님이 강추하신 책, 마리아 포포바, <진리의 발견> 

훑어보니 진짜 읽어보고 싶어졌고요. 비싸고요.ㅎ 그러나 전자책도 있고요. 그러니 진득하게 기다려 볼라고요. 

















지야 통, <리얼리티 버블> 

심하게 땡기는 책. 이런 책을 계속 읽어야 내 생활에도 지속적인 변화가 가능할 것 같다. 습관은 무서워.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전자책으로 산 <이러다 지구에 플라스틱만 남겠어>도 아직 덜 읽었.... 반성해라 반성! 

















미지수, <지속 가능한 삶, 비건 지향> 

<리얼리티 버블>과 같은 맥락에서 읽고 싶은 책. 끊임없는 의문이 그동안의 삶과 충돌한다. 목차를 보니 아주 유용할 것 같기는 한데. 전자책으로 사버려? 하고 째려보는 중이다. 10%의 여지에 들어갈 만한가를 좀더 고민해 보자. 

















샐리 진 커닝햄, <나의 위대한 생태텃밭> 

장-마르탱 포르티에, <소규모 유기농을 위한 안내서> 

텃밭에도 관심이 많다. 지금은 안 하지만 몇년 전까지 손바닥 정원에서 흉내만 내어봤다.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면서 텃밭 다시 하고 싶어졌다. 관심 가는 두 권을 담아두었다. 


















마거릿 애트우드, <오릭스와 크레이크>  

보관함에는 한 권만 있지만 애트우드 책 한권씩 다 사려고 벼르는 중. 전자책으로 사기 참 싫다. 종이책으로 <시녀이야기>, <증언들>, <그레이스>, <페넬로피아드>를 갖고 있다. 헉. <그레이스>와 <페넬로피아드> 아직 안 읽었어. 우선 다 읽자. 

















케이트 커크패트릭,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정의"한다고 하니 이 전기로 보부아르의 생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제2의 성>도 안 읽었는데. 물론 다른 책도 못 읽어봄.ㅠㅠ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북플 읽고싶어요 체크했더니 추천 리뷰가 뜬다. 뭥미,가 절로 나오는 리뷰였다. 열 받아. 아무거나 막 추천하지 말라고. 

















여러 작가 지음, <야자나무 도적> 

여성작가들의 SF단편 모음집! 

"전 세계 페미니즘 SF의 작은 박물관,
28편의 중단편을 엮은 《혁명하는 여자들》 완역판!" 

전자도서관 검색하니 올라왔다! 기다린 보람 있다. 

















여러 작가 지음, <곰과 함께> 

"현대 작가 열 명이 '환경 위기와 인류의 미래'를 주제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 


















박선영/유지영, <말하는 몸 1,2> 

읽고 싶은 책을 모두 읽고싶어요 표시를 할 수 없어서 보관함만 넘쳐나는데 그 중 하나인 책. 사랑은 무엇인가와 함께 몸은 무엇인가 역시 내 요즘 질문 중 하나이기에. 



이밖에도 수많은 책들이 있으나 여기까지. 끝없는 이야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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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2-04 01: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캇 펙 책 예쁘게 나왔네요 ^^ 스캇 펙 책 언젠가는 다 모으고 싶어요. 난티나무님이 읽고 싶은 책 저도 함께 읽고싶어지네요 ^^

난티나무 2021-02-04 02:08   좋아요 2 | URL
오 그런 작가입니까? 전 처음 들어서 ㅠㅠ 꼭 읽어봐야 겠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han22598 2021-02-04 02:47   좋아요 2 | URL
스캇이 무신론자였다가 나중에 믿음을 가지게 되시는데, 그 여정가운데 질문하고 고민하는 과정들이 이 책에 녹여져있어요. 하지만 종교적인 색체는 거의 없어요.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관한것들이어서....개인적으로, 크리스챤인 저에게는 신앙과 관련된 고민들에 대해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난티나무 2021-02-04 03:16   좋아요 2 | URL
아하! 책 소개에도 그런 설명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더 호기심이 일었어요. 저는 종교는 없지만요.^^ 벨 훅스의 책 앞부분에서 사랑에 관해 말한 부분밖에 못 읽었지만 그것만 봐도 책이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2-04 06: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자도서관 들어가면 신간 나올 때마다 제목이랑 작가랑 위시리스트 슉슉 만드는데ㅋㅋㅋㅋ여태 적은 거 십 년 지나도 다 못 볼 거 같아요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02-04 07:31   좋아요 2 | URL
아하하하!!!!!!!! 격하게 공감합니다! ㅠㅠ 웃퍼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라파엘 2021-02-04 0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열음사에서 나왔던 예전 판본의 번역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ㅎㅎ

난티나무 2021-02-04 19:05   좋아요 1 | URL
라파엘님 안녕하세요?
아 그렇군요! 열음사 책들은 절판이네요. 전자책도 단 한권밖에 없고요. 하하^^;;;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좀 고민해 봐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락방 2021-02-04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벨 훅스 책 읽고 스캇 펙 저 책 샀거든요. 그게 벌써 몇 년전인데 아직도 안읽고 책장에 그대로 있어요. 어떡하죠? ㅎㅎㅎㅎㅎ

난티나무 2021-02-04 19:06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다락방님~ 어떡하죠?ㅎㅎㅎㅎㅎ 저도 책장에 작년에 산 책들 그냥 있어요. 어떡하죠? 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2-04 0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니 나 보봐르 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02-04 19:06   좋아요 0 | URL
우왕~ 좋겠당~ 나도 사고 싶지만 참을 꼬야요!!!!!! ㅎㅎㅎ

막시무스 2021-02-04 0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부피와 질량이 심오하지만 꽂아두면 간지는 좀 나는것 같아요! 종이책 강추! 책 내용은 완전 강추입니다!ㅎ

난티나무 2021-02-04 19:07   좋아요 1 | URL
역시 종이책인 것이죠? 저도 그럴 줄 알았답니다.^^;;;;;;
부피와 질량이 심오하다니 더더욱 기대 되어요! 막시무스님 강추 감사히 받겠습니다~^^

비연 2021-02-04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이런 페이퍼는.... 흑흑...

난티나무 2021-02-04 19:08   좋아요 0 | URL
비연님 울지 마세요... 흑흑...

단발머리 2021-02-04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라먹는 재미도 아니면서 난티나무님 서재 완전 책맛집이군요. 뭘 골라야할지 몰라, 일단 다 집어넣는걸로 해요.
오릭스와 크레이크랑 나머지 두 편 다,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하트뿅뿅!!

난티나무 2021-02-04 19:09   좋아요 0 | URL
우와 책맛집!
애트우드 책 살 때는 단발머리님께 땡투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ㅎㅎㅎㅎㅎ 사야지 사야지 언젠간 사야지!!!!!!!
 

책소포를 부쳤다는 연락이 왔다. 원래 1주일 전에 떴어야 하는 소포인데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보냈다고. 일주일 만에 배송비가 올랐다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붙는 추가요금이 킬로당 2천원 가량이 더 올랐다고. (추가요금은 또 뭔가요 @@) 14킬로 보내는데 19만원을 냈단다. 같은 무게에 지난주보다 2만원 넘게 더 낸 셈. 정말 엄청 올랐군.ㅠㅠ 


읽고 싶은 책을 종이책으로 구입해 꽂아두고 싶다는 열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전자책으로 사면 바로 읽을 수 있고 보관할 공간도 필요없는데 말이다. 비싼 배송비를 내고 오랜 시간 기다렸다 손에 쥐는 그 마음은 뭘까? 나에게 필요한 건 이북리더기가 아닐까? 최선의 타협을 해야 하지 않나? 

전자도서관을 이용한 지 몇개월째다. 빌려보면 책을 사는 횟수가 줄겠지 했다. 빌려보고 정말 갖고 싶고 자꾸 읽어보고 싶은 책만 사자 했다. 그러나 전자도서관에는 아직 없는 책이 많았고 나는 언제 될 지 모르는 업데이트를 기다릴 여력이 없다. 종이책 구매 금액은 줄어들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온 책들은 읽힐 차례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중이다. 전자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책들의 목록도 길어져가기만 한다. 갈수록 가관이다. 


슬며시 마음이 반항을 한다. 내가 책을 사면 안되는 이유는 뭐야? 대체 왜 안 되는데?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둘 자리가 없어 쌓아두더라도, 박스에 담아 두게 되더라도, 나중에 처치곤란 애물단지가 되더라도, 다 끌어안고 살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크다. 내 대책 없는 성격은 이럴 때 매우 낙천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 어차피 버릴 수밖에 없다면 그 전에 누구누구들에게 나누어 보내주어도 될 것이고, 이 근방이든 대도시든 한글학교 같은 곳에 기부를 해도 된다고 생각해 버린다. 더 큰 상상도 한다. 넓은 집으로 이사가서 한 공간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그곳을 개방하고 싶다는 상상. 한국책 읽고 싶은 사람들 와라. 한글은 당연히 배워야지. (아... 내가 이래서 프랑스어를 못하나?ㅠㅠ) 이 시골 구석까지 어떤 프랑스사람이 한글책을 읽고 싶다고 오겠냐마는, 안 와도 좋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에 살고 있다고 해도 나는 이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상상을 하다 보면 그 책꽂이들에 꽂힐 책들은 어떤 책들인가 생각하게 된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을 돌아보게 된다. 이런 상상은 때론 유익하다. 책들을 통해 보게 되는 나의 모습. 


그러니까, 오늘의 질문. 

종이책을 계속 사? 말아? 












오늘까지인 적립금 2천원을 쓰려고 보관함과 장바구니를 오가다가 배송비 19만원이 생각나서 ㅠㅠ 책 말고 노트를 샀다.(읭?)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체국에서 선박배송을 한다고 하니 이제는 웬만하면 배로 책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배송추적도 안 되고 중간에 사라져도 어쩔 수 없고 2~3달을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지만 20킬로 6만원(아마 이것도 올랐겠지) 선이면 엄청나게 비용을 아낄 수 있으니까. 아낀 돈으로 책을 더 사겠지만.ㅎㅎ 배로 받는다 생각하고 맘놓고(?) 노트를 산다. (트윈링 노트 검색하면 스누피 사진밖에 안 뜬다. 나는 늘 다른 걸 산다.) 


책을 사 말아 해놓고는! 배로 받을려면 이번달엔 책을 빨리 사서 빨리 보내라고 해야지 다짐하는 나, 19만원을 배송비로 날려먹으면서 적립금 2천원 아깝다고 2만원어치 노트를 사는 나는 도대체 뭔가.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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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2-01 2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프랑스에 거주 중이시군요! 저도 책값 줄여보려고 도서관에서 한번씩 빌려오는데 결국 이것도 그것도 늘어나고 말았어요ㅠㅇㅠ 그치만 읽을 책들 바라봄 행복하잖아요?그..쵸?😊하..

난티나무 2021-02-02 00:02   좋아요 2 | URL
그니깐 산 책도 쌓이고 빌린 책도 쌓이고 진퇴양난이 따로 없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읽을 책들은 뿌듯하고 읽어버린 책들만 남으면 허무해서 자꾸 사는 건가 봐요. 저는 그동안 책을 너무 못 사서 늘 다 읽어버린 책들만 쳐다보고 살았거든요. 지금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책들을 훑으며 아 아직 많이 남았구나, 와 동시에 아 언제 다 읽지, 생각합니다.ㅎㅎㅎ 그래도 이북리더기 고민을 좀 진지하게 해야 할 것 같기는 해요.ㅠㅠ

psyche 2021-02-02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방 한칸 또는 작은 사무실 같은 곳에 제 한글 책으로 채우고 사람들 빌려주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뜨개질도 하고 음악도 나오고 뭐 그런 공간을 꿈꿨습니다만 몇년 전부터 종이책 구입을 최소한으로 하고 있어요. 책이 감당이 안되더라고요. 아까워서 버리거나 누구 주지도 못하는데 책장에 자리는 없어서 이중주차, 박스에 그냥 들어있고 그렇게 살다가 큰 맘 먹었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긴축재정이 필요했기도 했고요. 영어책은 무조건 도서관, 한글책은 밀리의 서재와 가끔 전자책 구입으로 읽고 있어요.
전자책은 쓰다보니 익숙해졌어요. 저에게는 무엇보다 글자크기를 크게 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랍니다. 물론 사 놓고 안 읽은 전자책도 많은데 그건 자리를 차지하는 건 아니니까요. ㅎㅎ

수이 2021-02-02 16:07   좋아요 0 | URL
프시케님 저 그냥 킨들 사버릴까요? 말씀 들으니까 갈등 다시 시작되고 부글부글

psyche 2021-02-02 17:18   좋아요 0 | URL
수연님 킨들을 사시면 이제 종이책은 종이책대로 전자책은 또 전자책으로 사게 됩니다. 전자책의 장점도 많습니다만 정말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지시게 될 듯. ㅎㅎ

난티나무 2021-02-03 06:19   좋아요 1 | URL
psyche님 저도 그런 공간 만들고 싶습니다.ㅠㅠ 뜨개질 저도 좋아해요!
밀리의 서재 가입할까 저도 생각 중이에요. 그런데 그래도 종이책을 살 것 같단 말이죠. 흑흑. 눈이 너무 안 좋아서 전자책 괜찮을까 싶기도 해서 갈등입니다. 공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게 최고의 장점이자 최고의 단점인 거 같아요....^^;;;;;;

psyche 2021-02-03 07:33   좋아요 0 | URL
난티나무님 뜨개질 좋아하신다니 더욱 반갑네요!
밀리의 서재는 작년 4월부터 시작했는데요. 원래는 무료 한 달만 하려던 게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생각보다 책이 많아요. 예전에는 전자책으로 나오는 책이 정말 적었는데 이제는 꽤 많더라고요. 한달에 10.99달라니까 두 권만 읽어도 이익이다 이러면서 끊지 못하고 있네요.

난티나무 2021-02-03 23:16   좋아요 0 | URL
저는 하룻밤 사이에 마음을 좀 고쳐먹으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하하~ 갈대라네 갈대~~~~
전자도서관에도 읽을 책이 많은데...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읽고 싶은 마음에 자꾸 사는 거 같더라고요. 딱 끊어보면 어떨까 막 이런 생각.. 하아~ 뭐 이런 거 갖고 고민하냐 할 수도 있는데 이게 공간과도 연결되고 돈과도 연결되니 가벼울 수가 없네요.
맞아요 밀리의 서재도 두세 권만 읽는다 해도 이익이죠. 음 일단 책사기가 90% 이상 끊어지려는지 실험이라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10%는 양심상 남겨놓는 걸로~ㅋㅋㅋㅋㅋㅋㅋ
뜨개질 안 한 지 거의 1년째예요. 작년에 막 달리다 손목 탈이 나서 그때부터 계속 쉬고 있어요.^^;;;; 대신에 책을 읽었더니 이제는 목에 탈이 나려고 하네요.@@

잠자냥 2021-02-02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적립금 2천원 쓰려고 배송비 19만원ㅋㅋㅋㅋㅋㅋㅋㅋ 웃게 되지만 알라딘 개미지옥 개미들은 다 그렇잖아요? 그놈의 적립금이 뭔지 왠지 안 쓰면 아까운 마음이 들어 그거 쓰려고 항상 배보다 배꼽이 더 크죠.... ㅠㅠ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02-03 06:21   좋아요 0 | URL
그니깐요. 어쩜 좋은가요. 맨날 우네요. 흑흑.
적립금 안 받는다 할 수도 엄꼬.... ㅋㅋㅋㅋㅋㅋㅋ
아 배송비 진짜...ㅠㅠ 울자...ㅜㅜ

잠자냥 2021-02-02 09: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종이책은 (영혼의) 사랑입니다~

비연 2021-02-02 10:16   좋아요 1 | URL
저도 요즘 이북리더기를 사야 하나... 계속 망설이기만.
종이책을 워낙 사랑하는 나머지 ..;;

단발머리 2021-02-02 11:52   좋아요 2 | URL
이북리더기로도 아이패드로도 읽을 수 있지만 저도 아직은 종이책이 좋아요.
뭐라해도 역시 책은 줄치는 맛이 최고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2-02 14:18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줄치는 맛이 살아있는 종이책을 사랑하지만 비연님이 이북 리더기 사는 건 추천합니다. 그럼 이만..

난티나무 2021-02-03 06:21   좋아요 0 | URL
종이책은 (영혼의) 사랑입니다~ 222222222222222

다락방 2021-02-02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적립금 천 원 주면 그거 쓰겠다고 책 몇 만원어치 사요. 다들 이러고 사는건가 봅니다. 저만 그런건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ㅠㅠ

수이 2021-02-02 16:0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운다 ㅠㅠ 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02-03 06:22   좋아요 0 | URL
같이 울어요...ㅠㅠ

수이 2021-02-02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충을 하면 좋지 않을까요 음 😳 저 리더기 살까 갈등중인데 갈등 다 끝내고 안 산다 했는데 그냥 이북으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왔다갔다 해요. 하지만 개미지옥에 들어온 이상 그대여 함부로 탈출을 꿈꾸지 마시기를😎

난티나무 2021-02-03 06:24   좋아요 0 | URL
아니 진짜 위에 프시케님 말씀대로 전자책은 전자책대로 사고 종이책은 종이책대로 사요. 이 무슨...ㅠㅠ 밀리의 서재 가입해도 똑!같을 거 같아 불안해요. 내 안의 합리화 기계를 뽀솨 버려야 하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
 

리베카 솔닛의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앞부분에 버지니아 울프와 관련한 솔닛의 강연 일화가 나온다. 


"그때 나는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우리가 울프의 출산 상태를 추궁하는 건 그의 작품이 제기하는 멋진 질문으로부터 벗어나는 따분하고 무의미한 짓이라고. (기억하기로 그때 나는 어느 시점엔가 내 뜻을 그럭저럭 담았다고 할 수 있는, "이딴 얘기는 집어치우죠"라는 말로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이끌었다) 따지자면 아이를 낳는 건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등대로]와 [3기니]를 쓰는 건 오직 한 사람만이 해낸 일이었으며 우리가 울프를 이야기하는 건 후자의 일 때문이다." (p.15) 


혹시 새로 올라올까 싶어 가끔 전자도서관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검색해본다. 얼마전에도 본 제목인데 위 구절을 읽은 후라 유독 눈에 띄는 제목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솔닛이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했는데. 구미가 당겨 대출했더니, 소설이다. 















안이희옥,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문학동네, 2000년 10월 


소설의 도입부를 읽으며 아 그만 읽을까 생각했다. 문체가 내 스딸이 아닌데. 평범하면서 거친데. 고민하는 사이 알라딘 정보 검색. 응? 성폭행? 설명도 간단하고 리뷰도 페이퍼도 없다. 좀더 읽어보기로 한다. 


"한영의 말대로 비극은 어차피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멸해가는 남녀간 사랑의 제도 속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이 강렬한 유혹. 해체되어가는 가족 제도로 회귀하고 싶은 이 안일함. 그러나 못 이기는 체 감상과 낭만에, 감각에 자기를 맡기는 자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려면 새로 탄생하는 것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무엇이 새로 태어나고 있는가? 희생당했던 여자들의 반란, 가족의 해체, 새로운 공동체의 실험, 거기에는 적어도 신선함이 있다. 그러나 그 신선함의 싹을 집요하게 뭉개버리려는 보수적 문화의 끈끈한 압력들, 이성간의 사랑을 우상시하는 지배 담론, 결혼 제도의 권력, 가족의 관습과 전통, 로맨스를 맹종하는 집단 무의식...... 가족 가운데서 온갖 고통을 받아오고, 남자 때문에 삶이 해체되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나조차도 새로운 대안을 집요하게 추구하지 못하고 집단 세뇌의 끈끈함에 말려들고 만다면, 세상에서 주입하는 생각대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그들은 허구의 행복을 신기루처럼 쫓다 불행을 마주치고는 어쩔 줄 모르고 파멸해간다. 누가 구원할 것인가? 아무도 없다. 불행한 사람 스스로가 자신을 구제해야 한다. 나처럼 파괴된 여성들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끈질기게 자신을 치유하고 집단의 압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 그렇다. 지금은 환상을 꿈꿀 때가 아니라 반란을 꿈꿀 때다. 여자들의 반란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점점 더 끓어오르고 있다." 


흠. 어느새 여기저기 밑줄을 긋는 나를 발견한다. 밑줄을 그으며 가만 보니 주인공의 목소리로 대변되는 작가의 분노가 느껴진다. 성추행, 성폭행, 윤간, 2차 가해, 사회적 낙인, 트라우마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경험으로 말하는 세계. 


" "친족 성폭행이 꽤 흔한 일이지?"

"그럼.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도 일찍이 사촌오빠에게 성추행당했지, 흑인 작가 앨리스 워커도 근친강간의 경험이 있어. 그리고 한국에선 김보은, 김진관 사건이 있잖아. 평생을 성폭행한 의부를 찔러 죽인 거...... 성폭행의 삼십 프로 가량이 근친에 의해 일어나고 있어." 

... 

"성폭행에 관한 소설들은 나도 꽤 읽었어. 미국의 안드레아 드워킨이 쓴 [신에게는 딸이 없다] 같은 거...... 아홉 살 때 성폭행을 당했는데, 부모는 남자의 성기가 삽입됐는지 안 됐는지에만 관심을 갖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주인공이 엄청난 방황을 하는 아주 극단적인 작품이야. 일본 사람 오치아이 게이코의 성폭력 소설이나 흑인 작가 사파이어의 [푸시], 그리고 김형경의 [세월]도 읽어봤어. 그런데 뭔가 할 말이 더 있을 거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 거야." 

"그러면 너, 소설을 써보면 어떠니?" 

"내가 소설을 어떻게 쓰니?" 

"아니, 내 생각엔 누군가 써야 돼. 그리고 넌 쓸 수 있어. 생각해봐. 한국에선 성폭행 체험자들의 글이 많지 않아. 강간 범죄율은 세계 2위라는데...... 당한 여자들이 성폭행의 고통을 몰라서 그럴까? 왜 모두 침묵하는 걸까? 아니야, 침묵을 강요당하는 거야. 그러다가 김부남같이 병들 대로 병들어서 이십 년 전 자기를 성폭행한 동네 아저씨를 찔러 죽이는 극단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거야. 영국보다 미국보다 일본보다 더 과격해. 왜? 감히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야. 이래서는 안 돼. 말을 해야 해. 미치기 전에, 살인하기 전에 말을 해야 해." " 


주인공 현주와 친구 해경의 대화다. 해경은 여성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현주의 가랑이는 정육점에 걸린 죽은 고기처럼 벌려졌다." 


이 문장에서는 <육식의 성정치>가 떠올랐고. 


" "사이킥 에너지라구요? 그래요. 사실 내 안에는 박영미씨처럼 칼이라도 휘두르고 싶은 분노가 있어요. 그 분노는 전 세계라도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에요. 더구나 어릴 때부터 계속 남자들한테 당해왔다는 생각이 들면 모든 남자를 살해하고, 거세시켰음 좋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남자들이 멸종했으면 해요." 

남자 원장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남자들이 멸종하면 인류는 어떻게 유지되고요?" 

"인간 복제 기술이 발달하면 여자들끼리 과학적으로 단성 생식을 할 수 있을 거예요." " 


"왜 남자들은 성폭행을 할까?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남자들의 힘, 남자들의 세력. 남자들은 그들의 힘을 이용해서 여자와 아이들을 지배하면서 가장이 된다. 남자 가장들이 모이면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된다. 그들은 법을 만들고 기업을 경영하고 정치를 하면서 남자들 중심의 사회 제도를 만든다. 남자들 중심의 역사를 만든다. 흔히 말하는 가부장 제도이다. 가부장 제도 속에서 남자는 돈과 힘을 가지고 여자를 선택해 결혼하고, 대를 이어줄 아이를 낳고 기르게 한다. 일부일처 제도다. 그러나 사실은 여자에게만 순결과 정절이 강요된다." 


"그래, 삶의 방식이란 책꽂이에 분류된 책들이나 서류들처럼 일목요연하게 나누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게 아냐. 잘 정리된 이론은 삶의 해명에 도움이 되지만, 그 이론이 곧 삶의 전부를 설명하는 건 아니지. 내 경험을 정리해 주고 분노를 대변해주며 상처의 극복에 도움을 주는 여성해방 이론들은 더없이 소중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지도 몰라. 여성주의 이론에 내 경험을 꿰어맞추려는 시도는 어쩌면 또하나의 식민주의인지도 몰라. 앞으로 페미니스트들과 열심히 만나고 배워야 겠지만, 내 생활을 여성주의 이론틀에 꼭 맞추려고 애쓸 필요는 없겠어. 그냥 내 상황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해. 그리고 내 경험을 해석하고 극복해온 사고의 모험도 그냥 그대로 지켜보자. 그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조심할 것. 무조건 '여성주의 이론에 내 경험을 꿰어맞추려는 시도'는 위험하다고 나도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기는 아주 쉽다. 


현주에게 오랜 연정을 품고 있는 한영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좀 아쉬웠다. 그가 젊은 시절 한 일(짓)은 앞뒤 상황을 재어보지 않아도 확실히 잘못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현주가 애인의 투신-죽음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한영에게 옷을 벗고 덤벼들었다. 그는 그래 내가 책임질게 하며 그녀와 잔다.ㅠㅠ) 현주는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했고 그래서 남자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인물인데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가 우선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는 있지만, 애인의 이름을 부르는 현주를 안은 한영은 잘못이 없는 것일까?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데? 그런 맥락에서 시간이 흘러 만난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소설 전체에서 느껴지는데 이 부분만큼은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 아니면 한영의 캐릭터 자체가 작가의 의도였을까? 


하고 싶은 말을 꿈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나 인물의 대사로 표현하는 방식이 직접적이라고 할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너무 많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격함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소설이지만, 강렬했다. 2000년에 나온 소설이라 더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권하는 건가요 물으면 쩜쩜쩜,이 답이 될 듯. 10년 전 20년 전에 쓰여진 이런 소설들이 어딘가에 더 있을까? 

(최근에 구입한 책이 떠오른다.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 절반쯤 읽었다.)

읽었으니 기록. 

함께 빌린 다른 책의 제목은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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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2-01 08: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화경,이라는 작가를 처음 듣는데, 엄청 강렬한 소설을 썼군요. 읽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ㅠㅠ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은 옆동네 도서관에 있다고 하네요. 상호대차를 신청해서 읽어봐야겠어요. 난티나무님 덕분에 좋은 책을 소개받아요. 우하하하하하! 감사합니다.

전 최근에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라는 평전을 읽으면서 ‘결혼‘할 수 밖에 없었지만 버지니아 울프가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 생각도 조금 들었거든요. 무엇보다 울프의 천재성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이었고 둘 사이에 그런 끈끈한 동료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울프 사후의 일들에는 논란이 있다고 하는데 그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과 모습으로 울프를 제한했다는 논란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난티나무님 방에서 울프 이야기 하니까 좋네요. 전 2월에는 솔출판사 버지니아 울프 전집 순서대로 <등대로>를 읽으려고 합니다. 궁금하지 않으실수도 있지만 혹 궁금하실까 알려드려요^^

난티나무 2021-02-01 19:41   좋아요 1 | URL
엇 이화경은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저자입니다. 이 책은 소설 아니고요, 여러 작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이야기하는 책이더라고요. 첫 시작은 제인 오스틴이고요. 목차에 사강도 있고 하길래 빌려보았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은 음 위에도 썼듯이, 쩜쩜쩜... 뭐라 말하기가 어렵네요. 그래도 시도를 높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이 든든한 버팀목이자 조력자이자 뭐 그랬다고 어디서 봤는데요, 그렇기도 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냥, 넘겨짚어보는 생각입니다.ㅎㅎㅎ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이라는 문구에 끌렸나?ㅎㅎㅎㅎ 암튼 논란이 있었다니 그것 또한 궁금해 지네요. 평전도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솔출판사 전집이 작품 발표 순서대로인가요? 오홍~ 저의 <등대로>는 이제야 한국 우체국에 갔답니다. 허허. 단발머리님 읽으시는 것 궁금해요 궁금해~!! 계속 궁금해 할 꼬야요~!!!


단발머리 2021-02-02 11:51   좋아요 0 | URL
앗!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이 소설이군요 @@

제가 확인해보지 않아서 출간 연도 순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출판사 시리즈 순서대로입니다. 올랜도는 워낙 궁금해서 그냥 읽었구요. 다음에는 순서대로요ㅋㅋㅋㅋㅋ 1. 등대로 2. 파도 이런 순으로 갑니다^^

난티나무 2021-02-03 06:27   좋아요 0 | URL
아아 기대된다...요 ㅎㅎㅎㅎㅎ
의식의 흐름 기법에 완전 취약한데 어찌 잘 읽을 수 있으려나 몰겠어요. 히히~

다락방 2021-02-01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독서의 기록을 보는 일이 요즘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책을 읽고 다른 책과 연결되고 그런 생각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니 말예요.

일전에 버지니아 울프 좋아하시던 분이 알라딘에 계셨는데(공부중이라 하셨던 것 같아요) 그때만해도 저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던 터라 그때를 생각하면 참 후회가 돼요. 그 때 읽을걸, 조금 더 빨리 알걸.. 하고서요. 저는 참 늦된가 봅니다.

올려주신 책은 검색해보니 절판이거나 품절도 아닌 고로, 저는 사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하핫.

페이퍼 감사해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1-02-01 19:48   좋아요 0 | URL
사서 읽으신다니 부담 백배인데요. 글을 적으면서도 이 소설을 누가 사서 본다고 하면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했어요.ㅎㅎㅎㅎ 사서 보고 다시 팔아도 되니깐, 하면서 혼자 정리했습니다.ㅋㅋㅋ 20년 전임을 감안하여 본다면... 아~ 모르겠어요~~~~~~~

늦되기로 말하자면 제가 더..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늦되는 거 없다고 생각합시다! 흑흑...

다락방님께 즐거움을 드려서 즐거운 난티나무.

수이 2021-02-01 0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_은 바로 읽어봐야겠어요. 읽다보면 저는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싶어요. 물론 다 읽어봐야 알겠지만요. 친족에 의한 성폭행은 제가 알기로는 50프로에 가깝다고 들었어요. 여가부에서 일하는 친구에게서. 비단 그 비율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더 플러스 될 거라고_ 왜냐하면 쉬쉬당하고 스스로 쉬쉬해서 밝히지 못하는 이들이 어마어마하니까_ 미투로 인해서 인식이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 침묵하지 않겠다는 인식이 더 퍼져가고 있으니. 오늘 아침 기사에서도 30대 새아빠에게서 계속 성폭행을 당했으면서도 10대 장녀가 제가 조금만 참았더라면 우리 가족이 모두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요 아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점, 그리고 사실을 밝힌다면 엄마에게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점, 엄마와 동생들을 지키고자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 그 자그마한 아이를 지켜주지 못하고 아 세상이 개 같아요.

울프는 울프 그 자체로 우리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시대를 거슬러 계속 읽히겠죠. 좋은 작가란 이렇게 시대를 거슬러 읽힌다...... ‘강렬했다‘고 말씀하시니 일단 소설부터!

난티나무 2021-02-01 20:13   좋아요 0 | URL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을 소설 속에 다 하는 게 아주 강렬했지요. 이거슨 소설인가 페미니즘 입문서인가.ㅎㅎㅎ 20년 전과 공식적인 퍼센테이지가 그렇게 차이나는군요. 아마 20년 전에도 지금처럼 혹은 더 많은 숫자였겠지요.ㅠㅠ 이런 통계와 글과 사건들을 보다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데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잖아,라는 말이 왤케 짜증나는지, 하아~ 세상이 진짜 뭣 같네요.ㅠㅠ

소설 읽고 글을 쓰면서도 작가의 고민이 내 고민 같고 나도 계속 고민 중이라 확실하게 어떻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생각은 뭉게뭉게 더더 많은데 말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간단하게 쓰기도 했고... 내가 작가의 의도를 곡해하나 의심도 해보고, 아무튼 또 많은 생각이 들었네요!!^^

2021-11-02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02 1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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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4 1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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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6 0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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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5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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