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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겨우) 떠듬떠듬 읽다(잡생각이 많아서) 오랜만에 밑줄이라도 남겨보자 하고 들왔더니 이미지를 올린 글에는 밑줄을 남길 수가 없단다. (그렇다, 북플이다.) 흥.

이미지를 지우고 밑줄 올리기. 한 쪽만 올리기. 1장 읽으면서 아 이 책은 뭐라도 써야 하는 책이다 했으나. 3장 읽고 있고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은 지나가 버렸고. 돌아와라.

일에 몸을 갈아넣으면서 책과 글과 먼 거리 유지 중인 난티나무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생존 신고 같으다. ㅋㅋ 🤣

그러므로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민족성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과정이다. 민족성이 구성하는 집단체와 ‘그 이익‘은 일반적으로 사회 속에 존재하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 집단체의 위치를 설정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민족적 정치‘에 관여하는 이들이 이 집단체 내부에 있는 타자들과 갖는 관계들의 결과이기도 하다. 특정 민족적 정치 구성의 중심에는 젠더, 계급 및 그 외의 차이들이 있고, 동일한 집단체의 상이한 민족 기획들이 헤게모니를 차지하려고 맹렬히 경쟁과 투쟁에 참여한다. 이들 기획 가운데 몇몇은 예를 들면, 영국 ‘흑인‘ 공동체의 경계들에 대한 논쟁의 경우에서와 같이 (Brah, 1992; Modood, 1998; 1994)집단체의 실제 경계의 구성에 여러모로 관여한다. 민족성은 억압받는 소수집단 특유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헤게모니 민족성 성취의 척도 가운데 사회문화적 구성물들에 대한 ‘자연화‘ naturalize‘의 성공 정도가 포함된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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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6-25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에 몸을 갈아넣으면서 엄청 바쁘게 살고 계시는군요, 난티나무님!
생존신고라도 좋으니 자주 좀 오시어요~~ 풍광 사진도 팍팍 뿌려주시구요^^

난티나무 2024-06-26 14:14   좋아요 2 | URL
아아 느무 피곤합니다. ㅋㅋㅋ
책을 안 읽으니 서재에도..@@ 출퇴근길에만 사진 찍는 일상 ㅎㅎㅎㅎ 출근하고 있어요. 🤣

달자 2024-06-25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쁘지만 자주 와서 일상이나 읽는 책 몇 구절이라도 공유해 주셔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4-06-26 14:17   좋아요 3 | URL
달자님!!!! 👋 넵 출퇴근길 도로 사진이라도 ㅋㅋㅋ 노력하겠습니다! 빠리 덥죠? 더위 조심하세요~~~
 

6장 도입부

사랑을 다루지 않은 급진적 페미니즘에 관한 책은 정치적으로 실패작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출산보다도 훨씬 더 여성 억압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놀라운 사실을 함축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사랑을 없애기를 원하는 것인가?
사랑에 대한 어떤 위협에도 느끼게 되는 공포는 사랑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한 좋은 실마리가 된다. 사랑이 여성 또는 성심리에 관한 어떤 분석에서도 중심적이라는 또 다른 징후는 그것이문화 자체에서 누락되어 있고 ‘사생활‘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이다.(침실에서의 논리에 관해 들어본 사람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소설, 심지어 형이상학에까지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랑은 묘사되어 있거나 더 낫게 재창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분석되어 있지는 않다. 사랑은 충분히 경험되어 왔고 그 경험이 전달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이해된 적은 없다.
분석의 부재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즉, 여성과 사랑은 기본토대이기 때문에 그들을 검토한다는 것은 문화의 구조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본문 강조)
‘남성들이 걸작품들을 창조하는 동안 여성들은 무엇을 하고있었는가?‘라는 지겨운 질문은, 여성은 문화에서 금지당했고 어머니의 역할에서 착취당했고, 또는 역으로, 여성은 자녀들을 창 - P183

조했기 때문에 작품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는 명백한 대답 이상의 가치가 있다.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심층적인 방식으로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여성이 그들의 에너지를 남성에게 쏟기 때문에 남성은 생각하고, 글을 쓰고, 창조한다. 즉, 여성은 사랑에 몰두하기 때문에 문화를 창조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은 사랑을 위해 살고 남성은 일을 위해 산다는 것은 판에 박힌 말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이분법의 근거를 개인의 정신에서 찾으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첫번째 사랑의 대상인어머니에 의해서 성적으로 거부된 남아는 그의 ‘리비도 libido‘-성적 (삶의) 에너지의 보고寶庫를 더 일반화된 형태의 사랑을 얻으려는 바람에서 장기간의 계획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에 대한 욕구need for love를 인정에 대한 욕구need for recognition 로바꾼다. 여성에게는 이러한 과정이 그만큼 많이 발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여성은 직접적인 따뜻함과 승인approval을 끊임없이 찾는다.
‘모든 남자의 배후에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여자는 왕좌 배후의 권력이다‘라는 진부한 말에는 진실성도 많이 있다. (남성)문화는 여성의 사랑 위에 그리고 그것의 대가로 세워졌다. 여성들은 그러한 남성의 걸작품들의 내용을 제공했다. 수천 년 동안 그들은 그 일을 해왔지만 그 수혜가 남성에게 돌아가고 남성들의 업적이 되어버리는 일방적인 감정적 관계에서 고통을 받아왔다. 그래서 만일 여성이 남성 경제의 주변부에 의지해 사는 기생적인 계급이라면, 그 반대 역시 진실이다. *(남성) 문화는 호혜성reciprocity 없이 여성의 감정적 힘을 먹고 자라는 기생적인 것이다.* (본문 강조)
더욱이 우리는 이 문화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한 전체의 - P184

절반만 제시하는 편협한 것임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문화의 구조 자체가 모든 점에서 남성 사회의 이익 안에서, 남성 사회의 이익을 위해, 남성 사회의 이익에 의해 운영될 뿐만 아니라, 성적 양극성 sexual polarity 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전체의 절반인 남성이 문화의 모든 것이라고 불리지만, 남성은 여성의 ‘감정적‘ 절반이 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은밀하게 그것으로 산다. 그들 안에 있는 여성을 거부하는 싸움의 결과로서(우리가 설명해온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그들은 사랑을 문화적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랑이 ‘여행과 모험‘의 커다란 남성 세계에서 사내다움을 증명하려 작정하고 덤비는 모든 남성의 약점이듯이, 사랑은 (남성)문화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여성은 남성이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이 필요를 부정하는지 언제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여성이 보편적으로 남성에게 느끼는 특이한 경멸("남자들은 완전 멍청해")을 설명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성은 그들의 남성이 외부세계에서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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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아동기를 없애자

… 여성 존중처럼 아동 ‘존중’은 여전히 더 큰 사회의 일부였을 때인 16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명백하게 억압받는 집단을 형성하는 지금에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아이들의 소외와 분리가 시작되었다. 아동중심적인 새로운 부르주아 가족은 끊임없는 감시를 수반했고, 초기의 모든 독립성은 없어졌다.
이러한 변화의 중요성은 아동 복식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진다. 복식은 사회적 신분과 번영을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여성에 있어서는 지금도 그렇다. 특히 유럽에서 지금까지도복식의 부적절함에 실색하는 것은 ‘지위를 헝클어뜨리는’ 복식의 부적절함에 주로 기인한다. 의복이 비쌌고 대량생산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한 시대에서 의복의 이 기능은 훨씬 더 중요했다.
의복이 성과 계급의 불평등을 여실히 드러냈기 때문에, 아동 복식의 역사는 어떤 일이 아이들에게 생겼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 P118

소녀들의 복장은 어떤가?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
은 아동기는 여성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아이는배내옷에서 곧장 성인 여성의 복장으로 간다. 그녀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아동기를 구조화하는 제도인 학교에가지 않는다. 아홉 살이나 열 살 때쯤 그녀는 말 그대로 ‘작은 숙녀‘처럼 행동한다. 그녀의 행동은 성인 여성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빠르면 열 살이나 열두 살 정도인 사춘기에 이르자마자 그녀는 훨씬 나이 많은 남성에게 시집 보내진다.
아동기의 계급적 기초는 이렇게 드러난다. 즉, 소녀들이나 노동계급의 소년들이 옷으로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성인 역할이란 상층계급 남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유에의 통과의례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소녀들은 성장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었으므로 복장의 변화를 겪을 이유도 없었다. 성인 여성들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하층계급 - P120

에 속했다. 오늘날까지도 노동계급의 아이들은 복장 제한으로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인 모델들 역시 지배계급과의 관계에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중·상층계급의 소년들은 일시적으로 여성과 노동계급의 지위를 공유하지만, 그들은 점차 이러한 예속된 계급으로부터 빠져나와 상승하게 된다. 반면 여성과 하층계급 소년들은 거기에 그대로 남게 된다. 페미니스트들이 억압적인 여성 복장의 종식을 논했을 때 어린 소년들의 복장의 여성화가 폐지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양자의 의복 스타일은 계급적 종속과 여성 역할의 열등성과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공자 Little Lord Fauntleroy』는 페티코트petticoat와 같은 운명에 빠졌다.(나의 아버지도 긴 바지를 입은 첫날을 기억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이러한 복장의식의 풍습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우리는 또한 새로 생긴 아동기라는 개념의 계급적 기초를 그것과 함께 생긴 아동교육 제도에서도 볼 수 있다. 아동기가 추상적 개념일 뿐이라면, 근대의 학교는 그것을 현실화한 제도이다.
(우리 사회에서 생애주기에 관한 새로운 개념은 제도들을 둘러싸고 조직된다. 예를 들어 19세기에 만들어진 청소년기 adolescence는 병역에서 징병을 용이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의 학교교육은 사실상 아동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명료하게 했다. 학교교육은 재정의되었다. 더 이상 성직자나 학자에게 국한되지 않았고, 아동기로부터 남성기로의 과정에서 사회적 입문 social initiation의 정상적 도구가 되도록 넓게 확장되었다.(진짜 성인기를 맞아볼 일이 없는 소녀들과 노동계급 소년들은 수세기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 P121

요약하자면, 아동중심적인 핵가족의 시작과 함께 아이들을 가능한 한 오래 부모의 관할 아래 두는 ‘아동기‘를 구조화하는데 있어서 제도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고전학문과 실용적인 도제훈련을 이론교육으로 대치하면서 학교의 수가 늘어났다. 이론교육의 기능은 배움을 그 자체를 위하여 전수하기보다는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근대 학교교육이 성장을 증대시키기보다는 지체시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을 성인 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ㅡ결국 어른들이란 속세의경험을 가진 좀 더 큰 아이들에 불과하다 - 또한 인위적으로 1대 20 이상의 어른 대 아이 비율에 예속시키면서, 어떻게 마지막 결과가 아이들을 평범한 지능으로 평준화시키는 것 이외의 것이기를 바라겠는가?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자 18세기 이후에는 나이의 엄격한 분리의 구분이 생겨났다("학년"). 아이들은 더 나이가 많고 더 현명한 아이들로부터 더 이상 배울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이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연령별로 잘 끌어모은 동료집단, 그리고 그다음에는 떠 먹여주는 ‘교과과정‘에 제한되었다. 그러한 엄격한 등급화는 성인기로 입문하는 데 필요한 수준을 높였고, 아이가 자신만의 속도로 직접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학습동기는 창의성을 확실하게 죽이는 외부 지향적outerdirected이고 승인 의식적approvalconscious인 것이 되었다. 한때는 - P126

단순히 어린 성인들로 보였던 아이들은 우리가 반쯤 자란 강아지를 미래의 다 큰 개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이제 경쟁을 조장하는 그 자신의 내적 지위를 가진 뚜렷한 계급이 되었다. ’이 구역에서 가장 큰 녀석’,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녀석’ 등등, 아이들은 위계질서적 용어로 생각하도록 강요되었다. 모든 것은 지고한 말인 ‘내가 자라면.…..’으로 평가되었다. 학교의 성장은 나이와 계급에 따라 점점 더 분리되어가는 바깥세상을 반영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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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한다는 것은 곧 정서적으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342)

“당신 자신이 당신이 드러내는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353)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형태의 행복과 약속의 형태를 띠는 행복은 우리가 그것을 현재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다고 상상하는 한 같은 지평에 속한다. 그리고 현재 행복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불안한 것,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실할 수 있는 것이 되면서 멀어질 수 있다. 현재 행복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방어적이 되어 행복에 위협이 되는 것(혹은 사람으로부터 두려운 마음에) 멀어질 수 있다. - P294

여기서 허위의식은 부르주아가 자신의 동기를 모른다는 것,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이해관계가 우연히 일치함을 알지 못하는 상황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의식적인 믿음들은 이데올로기다. 사람들은 의식으로부터 그런 믿음의 이해관계적 성격을 탈각함으로써 이해관계를 유지한다. 우리는 "허위의식" 관념이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허위/진실의 이분법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은 너무 지배적이어서 "허위의식"이라는 - P301

말 자체가 구시대적인 말처럼 들릴 정도다. 하지만 내가 2장에서 지적했듯이, 의식을 개인 주체에 속한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면, 이 개념을 다시 살려 낼 근거가 있다. 의식이란 주체들의 도착보다 선행하는 기만들이 공유를 통해 사회적인 것을 배열하는 방식에 대한 것일 수 있다. 루카치가 잘 기술하고 있듯이 "부르주아 사회의 본성에 드리운 베일은 부르주아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Lukács 1971: 66[154]). 그 베일은 질서의 재생산을 은폐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재생산한다.
핵심은 진실과 허위의 구분이라기보다는 진실의 재생산에서 허위가 담당하는 역할이다. 다른 말로, 의식이 허위인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와 결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런 상태가 이해할 수 있는 것 혹은 참인 것의 지평을 규정하면서 특정 질서의 재생산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재생산은 이런 불일치에 대한 인식의 실패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질서를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진짜 의식, 즉 진실에 대한 의식을 획득한다는 의미에서 자신과의 일치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혁명가란 단순히 일치의 실패를 목격한 사람이라 할 수도 있다. 베일이 벗겨진다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베일이 벗겨진다 해도 모든 게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니고 그 폭로에는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의식의 불일치를 인정하는 것은 그것의 허위성을 의식하게 되었음을, 그리고 사회적 믿음이 가지는 이해관계적 본성을 의식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 P302

소외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인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의 원인을 인식해야 한다. 소외를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강탈되었는지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세상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소외가 어떻게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 P304

혁명 의식이 세상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 혹은 세상이 이질적이라는 느낌 같은 것을 의미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당신은 주어진 세계- 좋은 습관과 예절로 이루어진 세계, 복종과 선의를 다하면 안락함을 약속하는세계-로부터 멀어진다. 느낌의 구조로서 소외는 불타오르듯 강렬하게 현존한다. 그것은 당신을 소외시키는 타인들 앞에서 일어나는 느낌으로, 마치 당신을 억누르는 동시에 멀어지게 하는 힘처럼 느껴질 수 있다. 당신은 자세를 바꾸고, 머리를 숙이고, 땀을 흘리고, 초초하고 불안하다. 모든 것이 당신을 짓누른다. 세상 전체와 싸우는 것 같고, 세상도 당신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잘 적응된 상태가 아니다. 세상에 적응할 수가 없다. 혁명가는 이런 특정한 의미에서 정서 이방인이다. 당신은 몰입할 수가 없다.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당신이 세상에 저항할 때는 당신이 경험하는 세상도 저항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다. - P306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불행[불만]을 선택할 수도 있다. 즉, 하나의 믿음으로서의 불행은 어느 정도 무관심하게 대상들 사이를 떠돌면서 현재를 붙들고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모든 게 다 불만이라는 것은, 어떤 한가지를 기대하고 있어서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불행하다는 것이다). - P307

아이들의 부재는 그에게 내 희망을 유예할 수 있는, 그를 위해 현재의 내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 누군가의 부재를 나타내는 기표다. 다른 말로, 아이들은 이 판타지의 무게를 지고 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도전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자기 자식 없는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아이 없이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아이가 꼭 있어야 삶이 의미 있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지친다. 우리가 아이 없는 삶은 무의미한 삶이라는 이 관념을 어떻게 해석하든, 여기서 표현된 불안은 관념으로서의 미래가 상실되었다는 불안, 그리고 그 상실에 대해 걱정함으로써 미래가 있다는 관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불안이다. - P332

이는, 4장에서 설명했듯이, 돌봄에 특정 형식을 부여하고 돌봄을받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행복 돌봄이라기보다 우연 돌봄hap care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는 것이다. 우연 돌봄은 돌봄에서 불안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연에 대한 돌봄care for the hap 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보다 더 취약한 것은 없다. 그것은 내가 아닌 존재에 내 에너지를 쏟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다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돌봄이란 불안한 일이다 - 관심 가득하다 full of care, 조심스럽다careful는 것은 그들의 미래가 걱정스러워서(미래 - P335

가 그 존속이 중요한 대상의 허약함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것들에 신경 쓰는 것이다.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 착해지거나 다정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돌봄"을 자신의 자아 이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의 선한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 아주 무뚝뚝하게 행동한다. 돌본다는 것은 대상을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빠져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 P336

만약 불행할 자유가 없다면, 행복할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때 불행은 자유가 될 수 있다. - P350

우리는 불행이 집단적인 것, 공유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할 뿐만 아니라 행복에 도전하는 일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기획이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다수의 불행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투쟁할 때에도, 열망의 순간에도, 계승과 재생산 사이의 간극에서 춤을 출 때도 페미니스트 아카이브, 퀴어 아카이브, 반인종주의 아카이브가 집단적인 불행의 직조물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행복할 권리에 도전하는 것이 곧장 뻗어 있는 똑바른 경로에서 이탈하는 것이라면, 정치 운동이란 그런 이탈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이탈을 함께 나눌 때 즐거움과 경이, 그리고 희망과 사랑이 있다. 만약 이탈을 공유하는 것이 불행의 원인을 공유하는 것이라면, 즐거움과 경이, 희망과 사랑조차 불행 없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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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힘의 행사



(5장 중간에 바타유의 소설 이야기가 나온다. 토 나오는 긴 줄거리와 소설을 심오하고 훌륭하다고 한 비평가들이 나온다. 인용하고 싶지 않아서 패스한다. 다 미친 것 같다.)

성철학자들은 포르노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의 여자에 대한 사회적·성적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자가 남자 이상으로 위험하거나 남자만큼 위험하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여자의 새디즘은, 남자에 의해서 관리되고, 남자에게 쾌락을 주기 위하여 조작될 수도 있다. 남자의 시스템에서 지배는 쾌락이다.
동시에 만족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여자는 남자들에게 통제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는 환상이다. - P219

사진은 또한 강간의 기록이다. 여자들을 배치하고 사용하였을 적에, 제1의 강간이 실현되었고, 그후에 독자가 사진을 소비할 때마다, 강간은 되풀이된다.
......
수잔 브로거가 적고 있듯이, 『강간의 본질은...... 심리적·육체적인 힘의 정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 남자의 여자에 대한 태도, 즉 위장된 강간이나 노골적인 강간을 가능하게 하는 태도 안에 존재한다. 여자를 희생자로 고려하는 권리를 획득하기 전에, 여자가 죽음의 상태나 적어도 피를 흘리기를 요구하는 태도는, 위와 동일한 것이다.』
...... 강간의 본질은, 그러한 사진 - 어떠한 방식, 어떠한 정도도 포함한 - 이, 남자의 권력과 무관계하게 남성지상주의의 범주 바깥에, 남자의 힘에 오염되지 않고 존재하는 여자의 성욕을 보여 줄 수는 없다는 확신 안에 존재한다. <그런 식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는 것처럼 보이도록 여자에 대해 카메라가 한 강간은, 현대사회에서 여자의 희생자성의 명확한 제1조항이다. 그녀는 죽거나, 피를 흘리지는 않는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 P221

중심적인 문제는, 힘이 무엇이고 자유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좋은 질문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잔혹성의 영역 - 역사의 영역 -에서 그것은 완전히 추상적인 의문이다. 중심적인 문제는, 힘이 인종적 및 성적으로 멸시당하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을 때에는, 왜 힘이 힘으로서 절대로 인식되지 않는가이다. - P231

형이상학적인 희생자에 대해, 힘을 사용하는 자에 대해 그 힘을 정당화하고, 다음 그 힘을 불가시한 것으로 치부하는 이데올로기가 일견 모순되게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모든 것을 포함한다. 히틀러는 유대인 남자를 강간자, 아리안 여성의 약탈자로 묘사한다. 그는 유대인 여자는 방종하고 난잡한 음란녀, 금발이고 순수한 아리안 여성의 심미적 대극으로 그리고 있다. 남녀 유대인은 모두, 성욕면에서 금수로서 특징지어지고 있다. 광포한 동물은 위험하므로 우리 안에 가두어야 한다. 히틀러가 반유대인적 행동을 호소할 때, 제일의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호소는 경제적인 면, 즉 유대인이 금전을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면이었다. 독일인의 반응을 자극한 것은, 히틀러가 묘사한 유대인의 성욕이었다. 순수한 아리안 여성이 호색한 유대인 남자에 의해 강간을 당하지 않고, 또한 독일인의 정자가 음란한 유대인 여자에 의해 유혹받고, 혼혈아를 낳아 오용되지 않도록 성적인 금수를 복종시킬 것을 참남자다움은 요구한다. 이것은 인종차별주의자의 성적 이데올로기의 전형이고, 인종적으로 멸시를 당하는 모든 집단은 금수의 성적 본성을 부여받는다. - P232

공격자의 힘과 희생자의 의지간의 단순자명한 등식 - 힘=의지의 침해 -은, 침해당한 자가 여자일 때는 결코 수용되지 않는다.
......
박해의 본질은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한 규준으로 자기 자신을 우월한 자라고 정의한 사람이, 이외의 인간을 외부로부터 정의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매저키스틱하다고 - 남자에 의해서 외부로부터 - 규정되는 것이다. 매저키즘은 본질적으로 도발과 복종의 양면을 갖추고 있다. 여자에 대해 가해지는 힘을 정당화하고, 동시에 그 힘을 불가시한 것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는 매저키즘이 여자의 정상인 상태이고, 여자가 좋아하며, 여자가 모두 원하는 것이라고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보다 명확하게 정의내려지기를, 고통으로부터 도출되는 성적 만족인 매저키즘이 소수의 남자에게서 나타나므로, 여자의 매저키즘은 - 똑같은 매저키즘조차도 - 남자의 매저키즘보다 열등하다고 간주된다. 해부학적 차이상, 남자의 성적 본성과, 그것과는 절대로 다른 여자의 성적 본능이 있다는 허구적인 이분법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 특히, 남자가 매저키즘을 나타낼 수 있다고 인식되었을 때 - 남자의 성적 우월성이 기만적인 것으로 지각될 수도 있다. - P234

바타유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의 변형을 소개한다. 즉, 여자는 순결하기를 선택하거나, 매춘부가 되기를 선택할 수 있다. 여자가 이 선택권을 지녔다는 - 여자가 순결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 주장은 세계의 역사 전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강간이 남자의 끊임없는 성적 활동이다. 그가 말하는 섹스의 선택은, 매춘의 선택을 의미한다. 여자는 <매력적인 한> 먹이이고, 여자가 매력적이지 않는 한 순결을 선택할 수 있다. - P237

인종적으로 멸시를 받는 남자는 중요한 어떤 것 - 인종적 우위에 있는 남자가 선망하는 성욕을 지닌 것으로 승인됨 - 을 뇌물로 제공받기 위하여, 자기와 같은 인종의 여자의 전락, 모든 여자들의 전락에 공모한다. 남자에 대한 모욕에는 찬양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대단한 찬양 혹은 그 같은 필요불가결한 찬양이어서, 인종적으로 멸시받는 남자는 자기 자신의 남자다움의 신화에 의해서 현혹되고, 이 신화가 빈번히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섹스의 힘을 자신의 동일성으로 상정하는 이데올로기를 현혹되어 받아들인다. 그때의 해결책은 간단한 것 같다. 즉, 그는 금기禁忌된 성적 관계를 통해서 인종적인 우위에 있는 집단의 여자에 대해 복수를 하거나, 자신과 같은 인종의 여자를 취하여, 그 여자 파트너에게 자신의 성욕을 행사한다. 그는 자신의 남자다움을 뇌물의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성적 공정을 바탕으로 여자와의 연대 - 자신과 같은 집단의 여자와의 연대 - 를 만들어 내는 방식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였다. 남자다움을 여자와의 공감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그가 지닌 유일한 것인 남자다움을 약화시키거나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 P245

인종차별주의의 바탕이 되는 필요불가결한 성적 적의敵意는, 여자 소유권이 쟁점인 것처럼 표현하지만, 근본적으로 적의는 동성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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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가치체계에서 성적 쾌락을 높이는 것은 적의를 높이는 것이고, 위험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의 사회에서, 인종간의 다툼은 가장 예민하게 느껴지고 가장 위험한 적의다. 이것만이, 남자의 가치체계에서 인종간의 적의에 성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길이다. - P246

그녀의 복종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포르노에 등장한 여자들 중에서 성적 상징으로서 백색 피부에게 주어진 특별한 관능적인 의의다. 그녀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보스이고, 힘과 폭력과 고통을 자신에게 주기를 요구하는 여자다. 그녀는 질릴 줄을 모른다. 그녀는 가장 비참한 전락 속에서 자신의 여자다움이 달성되는 진정한 복종자다. 여자가 힘을 요구했기 때문에, 힘은 현실적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간이나 구타는 여자의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여자의 의지의 침해로 존재하지 않는다. 강간은 단순히 보다 질이 좋은 성교가 되고, 구타는 양질의 전희가 되어 힘의 찬양 - 필경 그녀가 힘을 찬양함 -으로 통한다. 백인 여자는 강간을 요구하고, 구타를 요구하고, 굴욕을 요구하고, 고통을 요구하기 위하여, 지신의 인종적 우월성을 사용한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바라고, 이 경험 안에서 흥겨워한다. 남자는 공모한다. - P253

남자들이 강간과 구타가 여자의 의지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원인의 하나는, 영향력 있는 남자들이 수세기 동안, 사적인 세계에서 포르노그래피를 소비하여 왔기 때문이다. - P255

인간 여자가 관여하는 성적 행위에 관해 킨제이가 품는 관심은, 벌에 관한 그의 관심보다 작다. 인간 사이에서 그의 주요한 관심은 남자들의 계급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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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제이는 인간 남자에 대해, 자연에 반하는 사회적인 구속을 가한 책임이 여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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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자를 성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킨제이의 눈에는 전혀 여자의 권리라고 간주되지 않는다. 그에게 거절은, 성적 억제·도덕주의·성충동이 약하다는 증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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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해야 할 일이란, 예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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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매춘부의 목적은 동일하다. 목표하는 바는 남자의 성적 표현이고, 그것은 남자가 여자의 불복종에 의해서 좌절되지 않는다면 대부분 교접을 표현한다. ... 아내와 매춘부는 동일한 기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내의 기능은, 섹스로써 남자에게 봉사하는 매춘부의 기능으로 유추하여 명확하게 규정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강간은 킨제이의 사고체계에서는 확실한 실재성을 지니지 못하고, 여자가 고발을 통해서 남자를 괴롭히고, 처벌하고, 제한하는 수단으로써의 억압적인 사회개념이다. ... 킨제이의 철학에는 근본적으로, 남자가 뜻대로 여자를 교접에 사용하는 것을 막을 정당한 이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P274

객관적인 과학자들과 포르노업자들은 동일한 견해를 선전한다 - 여자는 그것을 절실하게 원하고, 여자는 그것이 거칠기를 원하고, 여자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도발한다. 그리고, 킨제이가 상정하는 여자의 성적 냉담은 단순히 여자의 의지의 무시를 정당화할 또 하나의 이유를 세운다. 왜냐하면, 여자측의 의지의 주장 - 정의상 거절하기 -은 여자 자신의 성적 본성을 그릇되게 진술하기 때문이다. 그 성적 본성은 여자가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남자에게 성적으로 사용될 때, 특히 교접의 형태로 사용되는 경우에 실현된다고 한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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