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피곤하다는 의식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그동안 살아오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내뱉고 행동했던 것들, 툭 하면 살 뺴야지 다이어트해야지 말하던 주위의 여자들 이 떠오른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어쩌면 나도 죽을 때까지 어이구 이 똥배 좀 봐, 이거 먹으면 살찌는데, 오늘부턴 저녁을 좀 줄여야 겠어,를 입에 달고 살았을 수도 있었다. 죽을 때까지 내 몸을 미워하고 부정하고 낙인찍었을 수도 있었다. 70이 넘은 나의 엄마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렇다. 어쩌면 엄마는 모르고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알면 무척 억울할 테니까. 


<욕구들>을 함께 읽으며 옆지기와 대화를 나눈다. 여자의 일상, 끝도 없이 머릿속을 울려대는 세상의 잣대들을 자신에게 들이대며 사는 일상에 대해. '자기 비난의 목소리'. 여자들의 머리 속에서 매일을 지배하는 목소리. 일상이 되어버린 목소리.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지도 모르는, 결정을 할 수 없는 사람들. 나는 설명과 표현에 애를 먹는다. 모르기 때문에,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커다란 구멍을 메우기에 나의 말은 너무 성기다. 여자들의 말하기는 아직 멀었다. 훨씬 더 많이 말해야 한다. 구석구석 핵심과 맥락을 콕콕 짚어내야 한다. 


거식증 환자였던 캐롤라인 냅의 글에서 옆지기는 거식증을 염두에 두고 읽는 듯했지만 나는 거식증이라는 행위보다 딸과 엄마(부모)의 관계, 통제할 수 없는 불안, 인정과 사랑에의 욕구, 여자들을 '조종'하는 세상의 모든 것 들에 더 무게를 두고 생각한다. 거식증은 결과로 나타난 행동 혹은 그가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행동일 뿐이다. 누군가는 손목을 긋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매일 남자를 찾아나서기도 한다고 냅이 말했듯이 이런 행동들은 분명 스스로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기까지의 용기와 타인의 시선을 거리낌없이 받아칠 수 있는 배짱이 생겨야 없어지지 않을까. (힘이 되어주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옆에 있다면 사정은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기 위한 여정이 너무 길고도 힘들다. <배움의 발견>의 타라가 떠오른다. 현실을 부정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라가 선택했던 행동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신적으로 벗어나버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직시하기 위해 그 역시 긴 세월이 필요했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도 다른 사람도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가 어째서 지독한 괴로움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욕구들>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책이었다. 문장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내용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읽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다. 한번 읽고 말 책은 아니다. 역시 종이책으로 사야 할. 그래 첫번째 읽기라 생각하고 좀은 설렁설렁 읽은 감도 있다. 옆지기는 행간 사이 의미의 간극이 크다며,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고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어려운 철학책을 읽을 때의 기분. 그 기분 이해한다. (나는 냅의 그런 글쓰기 방식이 좋았다. 문장 하나에 멈춰서 오래 생각해야 하는 일이 잦았는데 옆지기도 아마 그런 의미에서 간극이라고 말한 듯하다.) 

나중에 알라딘 어느 책 리뷰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는 공부의 주제로 삼을 만한 것이 '마음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책을 읽을 때 납득이 가지 않거나 생경하게 다가올 때,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문제를 파고들어야 '내 삶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고 전한다."(<세미나책> 리뷰 중 https://blog.aladin.co.kr/712851116/12724109) 딱 들어맞는 말인 듯해 톡으로 보내주었다. 


다음으로 옆지기와 함께 읽은 책은 <탈코르셋 선언 : 일상의 혁명>이다. <욕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레 여성의 외모, 꾸밈, 다이어트 등의 이야기가 함께 나온 터라. 평소에도 조금씩 의견을 나누던 소재니 이참에 이런 책도 읽어보자 싶었다. 


* 가벼운 혹은 얇은 책이라면 일주일에 한 권씩 읽자고 옆지기가 말했다. 나야 물론 콜. 둘이 읽는 이 모임의 이름을 생각해본다. 뭐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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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9-3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간을 같이 나누는 이와 책까지 나눌 수 있다면, <욕구들> 읽으신 시간이 더욱 오래 기억나실 것 같네요. 계속 진행형이 될 거라고 하시니 부러운 맘 살짝 감추고 응원 합니다^^

난티나무 2021-10-01 00:27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북사랑님 감사합니다~^^
토론이 막 불붙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직은 <욕구들>로 그럴 만하지 못했나 봐요, 둘 다. 함께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다음에 더 불붙는 토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해봅니다.ㅎㅎㅎ 그래도 같이 읽고 책으로 이야기나누니 그건 정말 좋아요. 헤헷.
 

이번달에 읽고 페이퍼나 리뷰를 쓰지 않은, 몇 권의 책을 여기 모아본다. 


















박혜윤 <숲 속의 자본주의자> 

김선우 <40세에 은퇴하다>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40세에 은퇴하다>는 옆지기가 읽으면 좋을 것 같아 몇 개월 전에 사서 갖고 있었다. <숲 속의 자본주의자>를 빌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책의 저자가 부부다. 책을 읽는데 크게 상관은 없다. 비슷한 이야기가 간혹 나오기는 한다. 

솔직함이 독자의 눈으로 찾아지는 것이라면 어디까지, 어떻게 말해야 솔직하게 보여지는 걸까. 사전정보 거의 없이 읽었으나 왠지 착 달라붙는 맛이 없다. 매우 존경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인데 나는 왜 자꾸 색안경을 장착하게 되는 건지, 그게 내 선입견 때문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일기 같은 페이퍼를 쓸 때에도 자기검열 모드가 발동하는데 책을 쓸 때는 오죽하겠나 싶기도 하고. 두 권을 굳이 비교하자면 <숲 속의 자본주의자>가 좀더 좋았다고 말하겠다. 삶을 대하고 생각하는 태도 같은 것. 

책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의 삶은 대체로 의미있고 좋아보인다. 그것이 그 사람들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때로 부러움을 느낀다. 비슷한 삶을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있는 용기와 실행력에 대한 감탄이라고 해 두자. (예를 들면 집에서 인터넷 사용하지 않기.)  

에피소드를 좀더 적절히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뭔가 구체적 연상이 되지 않는다고 할까. 하지만 이건 사람마다 다른 글쓰기 스타일일 수도 있으니. 그래서 평점을 매기지는 못할 듯하다. 아리송하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점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나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읽을 만하다.



















오한기 <인간만세> 

첫 부분 읽는데 어, 낯이 익다. 좀더 읽는데 어, 이거 읽었잖아. 단편집인가 했다. <멜랑꼴리 해피엔딩>에서 읽은 단편 「상담」이 실려 있다. 슬슬 읽고 다음 편을 읽으려는데 어라? 이야기가 이어진다? 좀은 황당무계하고 가끔 웃기고 때로는 진지한, 아니 어쩌면 내내 진지함을 장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이야기. 신선했다. 소설은 종잡을 수 없었지만 뒤에 실린 해설보다는 나았다. 차라리 소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겠다.ㅠㅠ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이 조각조각 분석되어서 해설이 붙는 것을 좋아할까, 싫어할까, 재미있어할까, 슬퍼할까, 아무렇지도 않을까. 비꼬다. 이 단어가 떠오른다. 
















이반지하,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빗소리가 들리는 일요일 오전, 결국 빗소리 따라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 노래도 그림도 얼굴도, 무엇도 모르는 상태에서 인터넷북토크 영상으로 처음 만난 이반지하에게서 뿜어져나오던 불안과 자기방어기제 같은 뉘앙스들이 나의 편견이라 생각했었다. 절반을 읽으니 다른 사람 즉 '남'의 입장에서의 내 시각이 편견만은 아니었구나 싶다. 이거 좀 오만방자한가. 무엇으로도 한 사람을 정의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존나 다양하다'. 
















김현미,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밑줄만 올리고 글을 안 썼더니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하다. 내 뇌는 정상이다. 그래도 읽었고 좋았고 다시 읽어야지 생각했으니 이렇게 흐릿하게라도 기록을 남겨야지. 다시 읽을 때 옆지기와 함께 하면 더 좋을 듯하다. 인터넷 강연에서 만난 김현미 선생님 짱! 
















캐럴라인 냅 <욕구들> 

사야 하는 책이라고 ****님이 강추하셨는데 종이책 사서 받기 너무 오래 걸리므로 전자도서관 줄 서서 대출. 뭐라고 페이퍼도 리뷰도 적을 수 없다. 밑줄이라도 올리려고 엄청 체크해두기만 했다. 그것도 못 했네. 옆지기와 함께 읽었다. 책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진짜 별것 없기는 하지만 아무튼 페이퍼 커밍 순. 아, 이 책은 꼭 종이책으로 살 겁니다. 

















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 

하. 한숨부터 나온다. 뭐랄까. 이거 페이퍼나 쓸 수 있겠어? 싶은 마음. 위에 <욕구들>이 마침 있으니 비교하기 딱 좋지 아니한가. 두 권 다 읽으신 분들은 짐작하실 듯. 이 책을 향한 찬사의 말들은 핵심을 좀 비껴나는 것 아닌가. 뭣이 중한디. 한글 제목 <배움의 발견>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읽다가 열받아서 이렇게 썼다. '여자는 인질이다'(책 제목). 딸도 인질이다. 
















윤지선, 윤김지영 <탈코르셋 선언 : 일상의 혁명> 

읽었다. 읽었는데... 또르르... 아마도 다음달에 페이퍼 커밍 순. 그 때 쓸 거니까 지금은 이하 생략. 
















케이트 쇼팽 <이브가 깨어날 때> 

(제목 진짜 구리다.) 용기내어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 이거 진짜 원제목 안 봤고요(전자책 표지에 영어 잘 안 보여요, 아마도 안 봤을 거예요), 제목이 <이브가 깨어날 때>이고요, 내용 궁금했고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뭐가?)인지 아닌지가 알고 싶었고요, 케이트 쇼팽인 거는 알고 있었고요. 지금은 이것만 쓸게요. 아마도 페이퍼 하나 정도는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래요. 이 소설은 케이트 쇼팽의 그 유명한 <각성>이었던 겁니다. 더 웃긴 건 뭔지 아세요? 소설 다 읽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거지요. 만쉐! 




아래는 이번달에 읽고 뭐라도 쓴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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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30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트 쇼팽 어웨이크닝을 지금 이브가 깨어날 때 라고 내놓은 건가요? 세상에.. 이브가 깨어날 때라니… 🥲

난티나무 2021-09-30 13:49   좋아요 0 | URL
오래전 나온 책인데 제목을 아주 자극적으로 뽑았더라고요. 왜 그랬을까요? 많이 읽게 하려고? ㅎㅎㅎ 제목 딱 보고 그래 무슨 이야기 하나 봐주겠어! 이랬다는 거죠 제가. ^^;;

다락방 2021-09-30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배움의 발견은 저도 읽으면서 제가 생각한 내용이 아니라 깜짝 놀랐어요. 제가 기대한 내용이 나오는 대신 알고 싶지 않은 내용(아동 학대)이 이어져서 아오 읽는 내내 힘들었네요 ㅜㅜ

숲속의 자본주의자는 읽고 싶어 찜해두고 있어요. 페투 읽고나니 더 그래요. 훗.

난티나무 2021-09-30 13:54   좋아요 0 | URL
한글 제목은 말할 것도 없고 원제목도 다르게 잡았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글에 없기는 하지만 성적 학대는 없었을까도…ㅠㅠ 그 나쁜 오빠 셰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 같…. 아무튼…. 음 생각과 다른 책이었어요 저도.

숲 속의 자본주의자 다락방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벌써 궁금한데요?^^

단발머리 2021-09-30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많이 읽으셨네요! 책 구하기 어려우신데도 이렇게 부지런히 읽으시는 모습 너무 멋집니다!! <배움의 발견>의 한숨 이해합니다. 다른 책들 이어지는 페이퍼도 기다릴께요^^

난티나무 2021-09-30 13:56   좋아요 0 | URL
이번달 좀 달렸어요.^^ 전자도서관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ㅎㅎㅎ
배움의 발견…ㅠㅠ 종이책 안 산 거 다행이라 생각 드네요.^^;;;
아이구 페이퍼 올리러 일어나야겠어요.ㅋㅋㅋㅋ 🥰
 
[eBook]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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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용 요약 없는 감상문.


최은영 소설만 읽으면 우는데 어김없이 이번 소설도 그렇다. 시작은 8% 지점, 할머니와의 재회 장면이다. 딱히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무덤덤한 만남, 그 무덤덤함 속에 깔린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장편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넘어가는 페이지와 함께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린다. 이른 아침 일어나지 않은 채 책을 읽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다. 눈물을 닦다가 페이지를 넘기고 눈물을 흘리고 손으로 닦고, 페이지를 넘기고. 그렇게 끝까지. 


어째서 이 여자들은 이렇게 정이 넘쳐 흘러서. 어째서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옛날에도 지금에도. 남자들이 없는 세상, 존재하지만 다른 세상에 서 있는 남자들. 고되고 슬픈 삶을 사는 여자들. 풀어내지 못한 감정들. 서로를 알아서, 알아봐서, 고통스럽지만 서로를 끌어안는 여자들.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그러나 그런 연대도 실은 기만이 어느 정도 깔린 것은 아닌가, 문득. 혈연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 관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납득해보려고 발버둥친 결과는 아닌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그 거리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혹은 거리 따위 개나 줘버려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여자는 여자가, 여자를 여자가, 다독이고 쓸어주고 안아주고 그래야 하는지. 그걸 제대로 못하는 여자는 또 어찌해야 하는지. 어째서 남자는 늘 없는지. 없어도 괜찮은지. 차라리 없는 게 나은지. 


엄마의 엄마의 엄마... 요즘 읽는 페미니즘 책들에도 그렇고 연달아 읽은 소설들에도 그렇고 엄마, 딸, 할머니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그 사이에는 죽음이 있다. 가끔 생각한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보고 싶다고,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있을 때 잘하라고 하는데. 나는, 나도 그런 말 하게 될까. 엄마 보고 싶다고 울까. 솔직히 지금으로선 장담하지 못하겠다. 때론 나라는 인간이 한없이 냉정하구나 싶기도 하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후회가 되는 것은, 엄마나 할머니와 나눈 대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은 기억의 조작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을 지워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신기하리만치 남아있는 기억이 없다. 어쨌든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고 기억한다. 할머니는 너무 먼 곳에 살았고 이젠 세상에 없다. 엄마도 멀리 살았고 지금도 멀리 산다. 이젠 만나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야지. 어릴 땐 어땠는지, 할머니는 어땠는지, 결혼하면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어릴 땐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엄마가 기억하는 엄마를 이야기해 달라고 해야지. 그러면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나를 얼마쯤은 건져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이기적인 딸의 속마음. 엄마도 엄마를 얼마간은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화. 다만 감정적으로 싸우지 말 것. 더이상의 상처는 반사. 


100자평에 썼지만 마지막에 나에게 떠오른 말은 "우리들의 밝은 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밤은 밝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 

(밑줄긋기를 앞부분밖에 하지 못했다. 빌린 책은 이미 반납했다. 뒷부분은 이야기에 빠져 읽었나 보다.) 

"난 혼자가 편해."
내가 엄마에게 해줄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엄마가 온전히 내 편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리라는 희망 같은 것을 나는 포기했다. 그와 이혼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입은 상처보다도 이혼당하고 혼자가 될 사위를 신경썼다.
‘나는 너는 걱정이 안 돼. 그런데 그 약한 애가 나중에 자살이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7%

"아빠는 너 이혼한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하더라."
엄마가 무심하게 말했다.
"자기 딸이 쪽팔리는가 보지."
"그래도 너희 아빠 같은 사람이 없어."
"그래?"
"아무리 그래도 아빠는 아빠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 이혼을 결심한 내게 아빠가 한 말이었다. 나보다 사위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아빠의 모습은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다. 아빠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8%

"어떤 분이셨어요?"
"누구? 우리 엄마?"
"네."
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에 내내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냥……"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봤다. "보고 싶지."
할머니는 내가 마치 할머니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입가에 힘을 줘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 11%

그 말에 군인 둘이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남편이 없는 여자아이를 원하는 거였다. 그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도 군인들이 혼인하지 않은 여자아이들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부모들은 고작 아홉 살, 열 살밖에 안 된 딸들을 흔인시켰다. 그게 딸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에게 ‘주인‘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 13%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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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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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시기를 여자들이 비틀비틀 건너간다. 사람마다 너무 다 다른 그들 개인의 역사는 차츰 변한다. 차오르는 고름을 짜내며, 깊은 상처를 한 땀씩 느리게 꿰매가며, 그렇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함께 함‘의 공간에 선다. 그러므로 우리의 밤은,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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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투쟁 -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부터 삶의 보호까지 아우또노미아총서 71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음, 이영주.김현지 옮김 / 갈무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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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부터 삶의 보호까지'이다. 

가사노동은 지금까지 수없이 논의되어왔고 그런 논의들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도 단어만 듣고도 어 그거, 하게 되었지만, 과연 우리는 가사노동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으며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어떤 의미인지, 남성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 실상과 본질을 충분히 구체적으로 말했는지,를 묻게 된다. 매번 여성의 '집안일'과 남성의 '바깥일'이 다르지 않고 남자도 똑같이 힘들다는 말을 들을 때, 그 다름을 어떻게 설명하고 표현해야 할 지 아득하기만 하다. 이 책의 한 구절을 옆지기에게 톡으로 보냈다가 본의 아니게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가사노동에 관한 구절)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문장 사이 거리를 온몸으로 느껴버렸다. 하나하나의 문장을 가지고 오래 이야기해야 했다. 이 거리는 평소 내가 가사노동의 분배와 재정립에 대해 생각할 때 뭔가 석연치 않다고 느꼈던 지점이기도 한 것 같다. (이전 페이퍼에서 나의 부족함이라고 썼었다. 일치한다.)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러니까 내가 아직 납득하지 못했거나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혼 계약의 '사랑과 관계된'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는, 가사노동을 이루는, 어떤 임금도 주어지지 않는 엄청나게 긴 노동 시간과 끝없는 과업들을 설명할 수 없다. - p.483 후주 부분의 문장.) 명쾌하게 짚어주는 책을 읽고 싶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혁명의 영점>을 다음주쯤 받을 것 같고 우에노 지즈코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을 예정인데 이 두 권이 좀 도움이 될지. (쉽다고 생각했던 저자의 글은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의 글은 처음이 아닌가 싶고, 이탈리아 페미니즘 운동 이야기도 처음이다. 그러고 보면 이탈리아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우리 나라 역사도 모르는데 오죽하랴. 반성반성. 미국, 영국, 프랑스 아닌 나라의 페미니즘 이야기를 읽으니 새로웠다고 해야 할까. 투쟁이 있었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투쟁이 승리한 결과를 보고 듣는 게 중요하다는 달라 코스따의 말은 옳다. 돌봄이나 재생산과 이민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눈이 번쩍 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중반부터 계속 이어지는 토지 문제, 환경 문제가 크게 와닿았다. 며칠 전 본 다큐멘터리가 어쩔 수 없이 계속 떠올랐다. 이미 몇십 년 전부터 우려했던 환경파괴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자연재해라 불리는 가뭄, 홍수, 산불, 지진 등의 횟수는 상상 이상으로 늘었고 각종 재해의 소식이 연이어 뉴스를 타고 흘러넘친다. 자연재해가 아니라 이제는 인재다. 지구의 온도는 점점 올라가서 한쪽에서는 땅이 마르고 한쪽에서는 땅이 잠긴다. 꺼지지 않는 불이 산들을 집들을 사람들을 집어삼킨다. 따뜻해진 바다에서는 이미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해조류나 생선을 먹을 수 없게 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 출산 후 미역국을 끓여먹는 것이 당연한 우리 나라에서 미역이 사라진다면? 실제로 바다에서는 감태와 같은 해조류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성게를 먹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건 어떤 것 한두 가지를 먹고 못 먹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저자의 말처럼, 농사 지을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바다가 죽는다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소름이 돋았다. 개인적인 노력이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전세계의 협동이 필요한 일이고 거시적 정책이 필요한 일이다. 내 집은 괜찮다고, 내 나라는 괜찮다고, 어떻게 안심할 것인가? 환경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 어째서 욕심은 환경을 외면하는가.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글들은 통렬하면서, 지금의 현실에 고개를 떨구게 한다.  


<페미니즘의 투쟁>은 페미니즘 책이다. 읽은 후에 왜 환경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페미니즘이 연결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겁이 많고 소심한 개인인 나는 이 거대하고 암울한 환경파괴문제(와 여기에 얽힌 수많은 갖가지 문제들 역시)에 어떻게 맞설 수 있는지, 그럴 흉내나 낼 수 있을지, 방법을 알 수 없다. 거대한 문제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 가능할지, 어떻게 가능할지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기껏해야 거리 시위에 나갈 준비를 하'(p.41)는 사람으로 살면 되는가. 내가 만드는 투쟁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드는 투쟁의 마당에 발만 담그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 것인가. 핑계 같지만 아직 나도 나를 제대로 모른다고 말해 두자. 



* KBS 다큐인사이트에서 최근에 방영한 [붉은 지구] 4부작 영상을 첨부한다. 유튜브에서 '붉은 지구'로 검색해서 볼 수 있다. 








발전과 저발전을 한 단면으로 하는 자본주의 발전을 전체적으로 설펴보면, 우리가 자본주의 발전의 대가를 계속 지불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발전의 대가는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 P197

선진국 혹은 조금 덜 선진화된 국가의 시민들은 타인을 빈곤에 빠뜨리고 뿌리째 뽑아 쫓아내는 이런 유형의 사업에 자기도 모르게 돈을 댄다. 더욱이 그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기부금은 자신과 타인의 목에 부채라는 훨씬 더 무거운 맷돌을 매단다. - P238

그래서 나는 투쟁은 물론이고 투쟁이 거둔 승리를 사람들이 잘 아는 게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투쟁이 거둔 승리를 잘 알면, 자본은 전능하다는 자명해 보이는 사실이 힘을 잃고, 곧 닥쳐올 가장 높은 수준의 발전을 덜 신뢰하게 된다. - P239

살 수 있는 것이 독극물뿐이라면 임금이 무슨 소용인가? - P244

식량은 기본적인 인권이다. 왜냐하면 식량은 모든 권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권리, 즉 다른 모든 권리를 좌우하는 생명권의 토대이기 떄문이다. (중략) 요컨대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살지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즉 살아남기 위한 해결책을 먼저 찾아내지 않고서는, 그 밖에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모두 생존 문제에 종속된다. - P378

아주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어떤 여성도 임금이 없는 재생산 노동에 대항하는 투쟁을 가족의 안녕을 해치는 데까지 끌고 가진 않는다. (중략) 여성들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기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지점까지 가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이는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투쟁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하는 한계이다. (중략) 따라서 삶과 노동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조건을 달성하려면, 사안을 다른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말하자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모든 거짓된 해결책을 거부하겠다는 윤리적 다짐을 한 주체들이 협력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 P398

청색 혁명이란 새우 양식이 주를 이루는 산업화된 수산 양식업을 말한다. 이 양식 유형은 인도뿐만 아니라 수많은 열대 국가에 자리 잡았다. 소비자들이 주로 선진국에 거주하는데도 이 양식 유형이 원칙적으로 개발도상국에 자리 잡은 이유는, 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산업화된 새우 양식은 ‘먹튀‘ 산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보통 그 개발 지역을 바로 벗어나야 할 정도로 생태계가 황폐해지거나, 양식에 타격을 주는 전염병의 확산 혹은 시장 수요의 가변적인 속성 때문에 도중에 그만두고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 P425

현재 이탈리아는 토양의 유기물 함량이 1% 미만으로, <유럽환경청>은 이탈리아를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으로 분류했다. - P445

미국, 아르헨티나, 캐나다에 이어 중국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유전자 변형 식품(주로 형질전환 쌀)을 많이 생산하는 국가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조제 보베는 "유전자 변형 식품 생산은 소농 2억5천만을 없애고 싶어 하는 중국 정부의 현행 논리와 일치한다"며, "하지만 소농들을 어디로 보내야 하나? 유전자 변형 식품 생산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고 말한다. (- 후주) -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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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28 2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300 쪽 남짓 읽고 있는데 토지 문제에 열변을 토하는 마리아로사에 고개 끄덕이고 있어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결국 거기가 아닌가 싶고요. 이 리뷰 참 좋아요, 난티나무 님. 감정적 동요도 얼마나 컸을까 짐작해 보게 되네요.

난티나무 2021-09-28 23:09   좋아요 0 | URL
감상에 불과한 글에 좋다고 해주시는 다락방님! 이 책을 읽으며 건진 큰 물음이 하나 있어 보람찬! 읽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