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페미니즘 철학 입문> 낭독 마지막 날이었다. 오드리 로드가 마지막 두 장을 차지하고 있다. 그 두번째 부분을 읽었다. 김은주 선생님이 오드리 로드를 마지막에 배치한 이유가 오늘 읽은 부분에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서로의 감상과 의견을 나누는 시간, 모두가 복잡다양한 감정에 휩싸여 긴 말을 하지 못했다. 나만 울컥 했나 싶었는데 모두가 그랬던 모양이다. 각자의 경험과 생각은 달라도 같이 글을 읽고 느끼는 감정이 비슷하다는 건 위로와 같다. 오드리 로드 언니가 우리에게, 김은주 언니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묵직한 위로를 건네는 시간이었다.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다양한 여성들로 살아가기 위해'. 7장의 제목이다. 이거 내 이야기, 저거도 내 말 하는 것 같아, 그렇지 그렇지, 나도 겪었지, 음 마더링, 그렇구나, 그런데 하아... 좌절은... 안 되는 건가, 읽는 내내 툭툭 생각했다. 소제목들도 좋다. '정체성의 정치, 차이를 단순한 대립관계로 보는 편협함에 대하여', '차이에 대한 왜곡된 이해', '특권을 인식하고 함께 존재하기', '억압의 구조를 파헤치기', '근대 주체의 환상과 굴레', '분노와 혐오의 방향을 바꾸기', '페미니즘의 윤리적 전회', '어머니되기', '스스로를 돌보는 페미니스트, 여자들', 그리고 에필로그의 제목 '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햐~
내 모습을 생각하게 되는 부분들을 가져와본다.
"내가 열심히 도와줬는데 고마워하지도 않거나, 주든지 말든지 하거나, 나아지는 게 없으니까 더 내놓으라고 나오면 원조를 할까요, 안 할까요? 끊어버려요. 자기가 원하는 태도를 보여줘야 된다는 건데, 이게 일종의 대상화인 거죠." (384)
이런 거 흔히들 느끼지 않나.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너는 왜 나한테 '이만큼' 하지 않아?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상대가 누구든 주는 만큼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 서운한 감정, 그건 기대를 했기 때문에 생긴다. 기억하자, 대상화. 그건 '성적 대상화'에만 쓰는 단어가 아니었다. "이 대상화라는 건 실제로 그 집단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설명할 권리를 안 주면서 그들이 어떻다고 다 말하는 거예요. 그들이 말하려고 하면, '조용히 해. 내가 대신 말해줄게. 너는 이런 사람이야' 하는 거요." (383)
"(미국인이 한국에 와서) 그런데 그들이 한국어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 봤어요? "제가 한국까지 왔는데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해요. 미안합니다" 이런 말 안 하잖아요?" (387)
경우는 아주 살짝 다를 수 있으나, 나는 '프랑스어 잘 못 해. 미안해.' 이런 말 가끔 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대체로 '너 되게 잘하는 거야.' 로 응수한다. 웬만큼 눈치껏 말을 알아들으니 그렇게 보인다. 나는 내가 어느 정도로 프랑스어를 못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학부모들의 대화에 끼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 자리에서 절대로 끼어들지 못하는 내 모습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다. 단순히 '언어'를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는 사실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 또한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아무튼, 언젠가부터 조금 당당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말을 배운 것도 아닌데 말 잘 못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 (라고 말하면서 아주 많이 찔린다. 훨씬 더 나이 많은 분들도 외국어 공부에 열심이고 잘 하는 사람들 많아서.) 여기에 적응 잘 하고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니.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고 했지만 나 같을 수도 있는 거다. 그냥 인정. 그러고 나니 아주 조금 마음이 편하다.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이나 잘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도 습관병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게 만들다니, 이 책 땜에 아주 미치겠다.
"차이를 분열로 만드는 건 차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 너희들 탓" (391)
알려고 하지 않는 자(들). 설득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가 한참을 다퉜던 기억이 난다. "저는 이거 정말 싫어요. 왜 가르쳐야 되는지 모르겠어요."(386)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지! 우월성! 그거였다.
"내가 가진 일반의 지위에서 내려와서 나를 주변화된 지위나 특수화된 존재로 만드는 작업을 하라는 거예요." (395)
내 위치를 생각해 보게 되는 지점. 나는 소수자이고 약자이지만, 이성애자(아직은 혹은 지금은)이고 소위 빈곤층은 아니다.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지점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내게도 특권이 있다. 때로 선생님들의 말씀은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일 때가 많다. 중심을 잃지 말자는 정도로 새기고.
" '여자로 태어난 게 너무나 억울하다' '내가 여자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차별 안 당했을 텐데'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 자체가 여성 비난인 거죠. 그 자체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의 정의를 공유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게 나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거잖아요.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 차이 나는 집단의 사람들이 자기 역량을 키워야 하는데, 쉽지 않은 거죠." (397)
다짐. 저런 말 비스무리한 것도 하지 말아야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여성 비난/혐오'를 해왔을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야 되나요? 이해를 만들어내도 되잖아요. 경험을 만들어내도 되잖아요. 서로 원자적 개인으로서 공유된 경험의 방식으로만 그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399)
신선한 질문이자 평소의 고민.
"우리가 흔히 정신, 이성이라고 하면 신체랑 구별되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저는 이런 사고가 가진 문제가 또 뭐라고 보냐면, '모든 인간은 생각한다'라고 가정한다는 거예요. 저는 여기에 크게 반대합니다." (414)
그러니까, 삶은 일종의 '습관'이다. 하루의 일과에서 생각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몸에 박힌 대로 살아간다. 따라서 고정관념으로 뒤범벅인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 정말 기가 막히게 딱 들어맞는 표현 아닌가.
" '야, 화내지 말고 조용히 조곤조곤 이야기해' '울지 말고 이야기해' '네 말을 잘 전달하려면 화도 내지 말고 울지도 말고 냉정해져야 돼' " (418)
열불 난다. 이런 말 안 들어본 여자가 있을까? 난 절대로 화를 내지 않지, 하는 사람 물론 있겠지. 최근에도 어디에선가 봤다. 나도 화를 잘 내지 않는 축에 속했었다. 그것이 '좋은 성격'인 줄 알았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면 말보다 눈물이 앞서 나왔다. 화를 낼 수 있는 여건이 아예 차단되었다. 화를 내고 큰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저런 말을 또 듣는다. 화가 나는데 화도 내지 말고 살라니, 그런 법이 어디 있나. 바락바락 화를 낸다. 여자가 화를 내는 것을 남자들은 참지 못한다. 그들은 참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가 '대들면' 그건 자신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일이라 배웠기 때문에, 자존심이 뭔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 '쟤가 나랑 비슷하기 때문에 싫다'라는 거예요." (423)
누군가가 몸서리치게 싫을 경우 대체로 그 사람과 나는 닮은꼴일 확률이 높다는 말을 예전부터 들었다. 그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닌가 보다. 싫어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가끔 그 말을 떠올리며 나는 도대체 왜, 걔의 어떤 면이 나랑 닮아서 싫었던 건가 생각해볼 때가 있다. 미스터리.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가 보다.
"내가 받는 차별은 내가 가진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소멸할 수 있다는 거예요." (426)
차이를 인정한다. 이 일은 매우 어렵다. 이 부분 읽으면서 '어려운 일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까짓 거 그리 어려울 건 또 뭔가. 그냥 인정. 나는 너와 달라. 차이가 있지. 그냥 난 지금 이래.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나도 내 나름 장점이 많거든. 너네가 나를 인정 못하는 건 너희 문제지. 이렇게 한번 읊어본다.
"원래 그런 종자라는 게 있다면 절대 안 바뀌죠. '아, 나는 영원히 안 바뀔 거야' 그러면 뭣하러 분석을 하겠어요." (434)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변하기 무척 어렵지만 변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변화를 바라지 않는 마음만이 굳건할 뿐.
"같은 경험을 하면 연대한다는 말에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왜? 우선, 같은 경험도 없고, 모든 경험이 같지도 않죠. '같은 경험이 우리를 연대하게 할까?' ...... 그 경험에 대한 해석의 이해가 연대를 만드는 거지, 경험이 바로 연대를 만든다는 건 대단한 착각이에요." (434~435)
전적으로 동의한다. 같은 경험은 없다. 모든 경험이 같지도 않다. "원래 한결같고 똑같은 게 있나요? 그래서 자매애'들'이겠죠. 자매애라는 단수의 이름이 아니라." (436~437)
"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 (438)
이 한 문장이 가지는 의미들. 대부분이 생각하는 문장. 나 또한. 그러나 나는 얼마나 엄마처럼 살지 않았는지, 그랬다고 말할 수 있나? 아니. "가부장제와 공존할 수 있다는 환상"(403)은 떨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나는 엄마처럼 되지 말아야지,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나는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거야', 아이도 잘 키울 거야, 엄마처럼 하지 않을 거야, 엄마처럼, 엄마처럼... 수없는 다짐들은 결국 가부장제의 벽을 넘지 못했다. 벽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다짐만 했다. 환상. 더 적합한 표현은 없다.
" '운다'라는 건 나약해지는 게 아니라 사실은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방식일 수 있어요. 나약해서 우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개방적일 수도 있는 거예요. 직면하기 때문에 보이는 태도일 수도 있는 거예요. ...... 직시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용기거든요." (448)
다른 책 어디선가 눈물이 많다는 것(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같기도 하고...)은 그만큼 트라우마가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위로가 되진 않았다. 툭 하면 우는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트라우마가 있다는 말인지? 다른 사람의 감정에 쉽게 이입하는 사람은 사기를 당할 확률도 높다고 한다.(이건 또 어디서 들었지?) 나약한 게 아니라 개방적이고, 공포에서 해방되는 방식, 직면하려는 태도... 여자의 눈물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또 있나 싶다. 위로다. 공감의 눈물, 슬픔의 눈물, 아픔의 눈물, 기쁨의 눈물까지 모두 사랑하기로 한다. 사실 난 내 눈물과 감성이 좋다. 진즉부터 좋았다. (눈물부터 쏟아서 화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만 어케 좀, 달라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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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타자는 말할 수 있는가? 이제 이 타자는 그림자로 있지 않습니다. 반영하는 에코의 목소리 혹은 단일한 목소리가 아니라, 다성악polyphonic의 목소리들로 공명하는 철학의 목소리입니다. 이렇게 철학의 타자라 불린 목소리들은 타자, 차이를 역량으로 삼아 울려퍼집니다. 그리고 이 목소리들 속에서 페미니즘과 철학은 때때로 불협화음을 내면서, 결코 하나로 모아지지 않으면서,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목소리를 증식하며 더 많은 목소리들로 말해질 것입니다." (452,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