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
- 가부장을 치유하는 풍요로운 잔치 마당 (p.37~51)
먼저, 소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야겠다. 심청이 살아 돌아와 왕비가 된 이후에 잔치를 열어 아버지 심봉사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모두들 알 터, 그런데 가부장을 치유한다니, 아버지 가부장이 또 중심이란 말인가?
글 맨앞에서 간단히 요약하고 있는 심청 이야기를 따라가며 맥을 한번 짚어보자.
옛날 어느 마을에 심봉사가 살았다. 부부가 살았다,도 아니고 심봉사가 살았다. 그가 주인공이다. 그의 아내는 아기를 낳다가 죽어버렸단다. 어머니의 죽음. 장르를 막론하고 어머니들이 죽는다. 왜? 어느 책에선가 본 적이 있다.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어머니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영웅이 될 수 없다고,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어머니의 존재는 지워져야 하는 거라고. 그러면 우리의 청이는 영웅인가? 남자 주인공이 영웅인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그 차이를 짐작할 수 있다. 청이는 용과 싸우지도 않고 결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모험을 떠나는 게 아니라 바다에 몸을 던진다. 성차별적 서사를 벗어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책의 구절을 보자.
"아내의 죽음이란 심 봉사 내면의 여성성과의 단절이라고 볼 수도 있고 동시에 심 봉사의 외적인 삶에 여성성의 영향이 차단되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여성성이 차단된 심 봉사의 이미지를 현재 우리 남성성 중심의 사회에서 지치고 공허하고 우울한 남성, 혹은 남성성 우위의 사회 전체로 바라본다면 지나친 확대일까?"(35) 응, 지나친 확대야. 아내가 죽었다고 남성 안의 여성성이 차단된다면 결혼하지 않는 남성에게는 여성성이 없는가? 어릴 때부터 아니마, 아니무스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가족과 사회제도의 관습/문화가 문제이지, 곁에 여성이 있고 없고가 아니마 자체를 좌우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남성들도 힘들고 우울한 거 안다. 그러나 개인에게 오로지 가족만이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여성성을 갖지 못한 남성들이 이 사회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내의 죽음을 '심 봉사 내면의 여성성과의 단절'이라 보는 관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여자의 돌봄 없이는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 남자들의 모습,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지나치게 우쭈쭈 해주는 건 아닌가?
청이 젖을 먹어야 하는 아기 때에는 아버지가 젖동냥을 해서 키웠지만(사실 젖동냥도 마음에 안 든다. 소 젖도 있고 염소 젖도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여자들의 젖을 구걸한단 말인가. 아기는 무조건 엄마 젖을 먹고 자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창의력이 없어. 젖 먹여주는 여자들도 그렇다. 남자라 아기를 잘 키우지 못할 거라는 편견을 모두 갖고 있는 건 아닌가? 마찬가지네. 창의력이 없어.) 그 이후로는 심청이 아버지의 생계를 거의 책임진다. 아이가 아버지를 부양하는데 이웃에선 칭송이 자자하단다. 뭐라고?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고 해두자.
이제 심 봉사가 사고를 칠 차례다. 공양미 삼백 석. 그래요 그래요 내 삼백 석 시주하리다, 내 눈만 뜰 수 있다면. 사고치고 어이쿠 어떡하나 고민하는 심 봉사에게 청이가 무슨 일이냐고 여쭙는단다. 이 문장 딱 걸린다. 청이의 감정노동. 털어놓을 용기도 없고 털어놓은 뒤의 상황도 감당하기 싫어 비겁한 남성의 모습, 거기다 "내 기분 알아달라~"고 떼쓰는 모습이 겹쳐진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특히 집안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상대가 어머니든 여자형제이든 아내든 딸이든간에 모든 여성에게, 나는 말하지 않을 테니 니가 알아서 내 감정 챙겨 줘, 그렇지 않으면 화낼 거야. 얼씨구절씨구.
삼백 석 대신 제물로 팔려가기로 한 "청이는 아버지가 혼자서 살아가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앞이 안 보여도 혼자 잘 살 수 있다, 뭐 이런 말 하려는 건 아니지만 청이의 동동거림이 눈앞에 좍 펼쳐지는 듯해서 역시 열이 오르는 문장이다. 게다가 아버지를 위해, 죽으러 가는 날까지 말도 안 한다.
"심청이 아버지를 위하여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몸을 던지는 이미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소극적인 여자아이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강요하는 '효'라는 가치를 수동적으로 답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는 천지가 감동할 희생으로 보아야 할까?"(49) 달리 어쩔 수 있었겠는가? "희생은 선택권이 주어진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판단하는 행위를 의미할 것이다."(49) 그러니까. 청이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삼백 석을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는데 그럴까 말까를 결정하는 단계도 아니고, 행해야 하는 시점에서 어떤 선택권이 있을 수 있나? 수동적이라고도, 희생이라고도 하기 어렵다. 이런 식의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혹시나 청이가 무조건적인 복종 혹은 무비판적인 수용을 했기 때문에 공양미가 시주되고도 심 봉사가 눈을 뜨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심청의 거룩한 희생 뒤에는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규범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자세가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50) 이건 또 무슨 말? 그럼 청이가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적극적으로 죽으러 갔다면! 심 봉사가 눈을 뜰 수도 있다는 이야긴가? 어째서 모든 것이 여성 탓인가? 뭣도 없으면서 네! 바칠게요! 허풍을 떤 심 봉사 탓 아닌가? 딸을 볼모로 삼아 제 눈 뜨겠다는 욕심 탓 아닌가? 처음부터 재물을 바치면 눈을 뜨게 해 준다는 게 어불성설이지. 돈 받고 소원 들어주는 신이 어딨어.
심청은 바다의 연꽃(연꽃은 바다에서 살 수 없는데)을 타고 살아돌아왔고 "임금님은 연꽃에서 나온 청이랑 결혼을 하였다". 아니 그렇게 족보 따지는 임금이 출신도 모르는데 결혼을? 여자는 예쁘고 신비로우면 된다 이 말이지? 여자에겐 모든 행복의 결말이 결혼이구만? 아버지를 위해 제물로 바쳐지고 임금을 위해 결혼대상으로 바쳐지고, 이게 다를 게 뭔가. 아무리 봐도 제물로서의 여성 심청밖에 안 보인다. 연꽃의 종교적 의미는 뭐 알겠으나 어쩔 수 없이 연꽃도 꽃이잖은가. '여성 = 꽃' 이것도 식상한 비유지 말이다. (어째서 상어를 타고 오면 안 되는 건가?) + (구라를 믿은 심 봉사 때문에 죽은 심청이 불쌍해서 바다의 신(옥황상제)이 살려준 것일 수 있는데 결국 남자 때문에 죽고 남자의 손에서 구해져 남자의 손으로 건네지는 형국...)
왕비가 된 심청은 "아버지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공양미를 바치고 죽기까지 했는데 아버지가 눈을 못 떴으면 그건 '개구라'라는 말이잖아. 심청은 정말 아버지를 찾고 싶었을까. 못된 딸 마인드는 1도 없었을까. 그건 혹시 자동 장착된 죄책감 아닌가. 모든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죄 책 감. 죽기까지 했는데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이냐 싶기도 하다.@@ 오로지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그 중 유독 딸)이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는 이런 강요, 그만 보고 싶다.
심청이 맹인 잔치를 연다. 아버지를 만난다. 모두 함께 해피해피! ㅠㅠ
(여기까지 쓰고 집에 있던 심청전 동화책을 찾아 휘리릭 읽고 왔다. 이름이 심학규였지. 사는 곳과 출신도 자세하게 나온다. 처음부터 눈이 안 보인 것도 아니야. 스무 살 무렵에 그랬다는데. 결혼해서도 아내가 생계를 꾸렸고. 중간에 딸 삼겠다는 승상부인이 나오는데 심청이 죽으러 가기 전에 둘이서 나눈 시가 새로이 눈에 띄었다. 시 쓰는 심청! 심청이 도움도 좀 청할 줄 아는 성격이었다면 좋았을 걸. 나누려는 자 있는데 어찌 거부하였느냐.ㅠㅠ 뭐든 혼자서 다 잘 할 수 있다는 건 착각이야. 그리고 뺑덕어미. 이쁜 애는 착하고 못생긴 애는 못됐다는 프레임 여지 없이 나와주시고. 마을 사람들 오지랖 쩔고. 아니 그리고 아버지를 찾으려면 살던 마을로 누군가를 보내면 되지 잔치는 왜 열어? 중간중간 버럭질을 유발한다. 여자들이 하나같이 넓다란 마음을 가졌다. 당연히 그래야지요,를 장착하고 있고. 동화 끝에 덧붙여놓은 말도 가관이다. 뭐니뭐니해도 효도지, 부모에게 어떤 효도를 하고 있는지 모두가 생각해 보아요~~~ㅠㅠ)
심청이 살아돌아온 것을 저자는 '완전한 여성의 탄생'이라고 말한다. 왕도 완성된 인간이라고 말한다. "연꽃으로 태어난 청이는 참 자신의 발견으로 자기 안에 만개한 생명의 힘을 마음껏 발하는, 기쁨과 신비로 충만한 완전한 여성의 탄생을 의미한다. 청이가 왕비가 된다는 표현도 이런 최상의 힘과 아름다움을 성취한 여성이 최상의 아름다움과 힘을 가진 남성을 상징하는 왕과 결합한다는 의미다."(55) 무엇이 '완전한' 여성이고 남성인가? 내가 보기엔 여전히 가부장적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캐릭터들이다. 저자의 말대로 심청이 다시 태어난 완성된 인간이고 왕도 그렇다면(왕은 어째서 완성된 인간인지 도통 이해되지 않지만) 효녀 심청을 다시 만나 눈을 뜨게 된 심학규도 완성된 인간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나? 심청을 다시 만나서 단절된 여성성과 다시 결합하고 어두움이 해결된다고 보는 것은 너무 억지스럽다. 빛 좋은 개살구. 그럼 진정한 여성성을 가지려면 청이처럼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는 말인가. 심학규는 왕비가 된 딸 덕에 여생을 편안히 잘 살았겠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풍요를 제공하는 잔치 마당이란 또다른 권력 과시로도 볼 수 있다. 여전히 굳건하기만 한 가부장제 파티. "지혜의 보고인 옛이야기는 집단 심리의 문제만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결의 실마리도 제공한다."(56) "청이 이야기는 현대인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인 삶의 우울함, 공허함, 외로움, 무의미, 무가치가 극단적인 남성성 위주 사회의 당연한 산물임을 보여 준다. 이런 오랜 눈멂에서 탈피하는 길은 청이라는 만개한 여성성을 다시 얼싸안는 이미지로 제공되었다."(57) 과연 그런가? 여성 혐오가 아니고? 무엇이 해결되었나? 심학규라는 인물은 가부장제의 대표 인물이다. 여성성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 돌봄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존재. 그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남성들의 눈에 가부장적 안경이 달려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없는 남자는 없다. 많은 여자들도 그러하다. 이런 세상에서 진정한 여성성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단순히 옆에 여성이 있다고 남성의 여성성이 채워지리라는 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에 불과하다.
"청이의 희생이나 우리 산천에 즐비한 처녀귀신으로 화한 수많은 어린 딸들의 이야기는 남성성의 원리에만 가치를 매기고 보상하는 편향된 사회에서 여성성이 이토록 쉽게 희생될 수 있다는 여성성의 운명을 보여 준다."(56) 그래서 이런 소설이 나온 것이다. 소설은 정치적 목적을 가질 수 있다. 너희들은 희생하는 존재야. 남편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아버지에 대한 무조건적 효도,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운명이야.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지. 부모(특히 아버지) 공양을 강제하는 유교적 발상의 끝판왕이다.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라고 강요하는, 이런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이 여전히 읽는다. 여성의 희생으로 남성의 이익을 채우는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