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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ㅣ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평점 :
전혀 상관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상관없어보이)는 에피소드 하나.
"엄마 옛날에 코다리조림 했었잖아, 왜, 꽤 자주 먹었던 거 같은데?"
"그랬나? 모르겠네."
"엄마가 코다리 좋아해서 자주 했다고 기억하는데. 나도 좋아했어. 그 왜, 꾸덕하게 꽤 많이 말려서, 먹으면 꼬들꼬들한 식감 나는 거 있잖아."
"맞아맞아. 옛날 코다리는 그랬지. 요즘은 그런 게 없더라. 언니 말하는 건 그거야, 그 꼬들꼬들한 거."
동생이 옆에서 거들지만 엄마는 영 생각이 안 난다고 하고 만다.
엄마의 음식, 엄마의 밥상, 이런 말들에 두드러기가 돋는 요즘이지만 이렇게 가끔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기억에는 엄마가 만들던 음식이 하나 둘 끼어있다. 힘들었던 시절, 엄마는 통째로 기억을 어디다 묻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내가 옛일을 기억 못하듯이. 그러나 그 코다리조림의 맛과 식감은 시간을 초월한다.
짧은 소설을 후루룩 읽어버릴 수 없었던 건 문득 떠오르는 그런 기억들 때문이다. 겹쳐짐. 소설처럼, 엄마가 나를 칼 하나로 키운 것도 아니고 다른 무엇 하나로 키운 것도 아니지만, 비슷한 삶을 산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짐작되는 삶의 모습, 엄마의 말과 마음과 느낌, 딸의 입장과 느낌... 한밤에 읽고 성급하게 별 다섯을 준 이유도 어쩌면 나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 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8)
첫장을 넘기면서 나온 이 구절.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는 말. 써놓으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인데 몸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는 몸, 그 무게와 그 상처... 아득하다. 딸의 입장에서, 또 엄마의 입장에서, 내가 자라고, 아이가 자라고, 그러는 동안 '엄마'는 "'다라이'로 통하는 저 지하 세계에 빠져들지 않으려 버둥대는 것처럼"(15)......
지하 세계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버둥대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내가 보아온 엄마의 방식은, 철저하게 남자를 우위에 두기, 항상 미안해하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기 등 한마디로 '나'가 없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그렇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식들을 먹인 기억이 희미한 것 또한 엄마의 방어기제일 테다. 엄마는 지하 세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먹는다는 것, 먹인다는 것, 그 행위에 대한 생각들. 깊이 생각하지 않는 문제들. 좀은 투박하게, 담담하게 엄마를 생각하는 어투는 지나친 감정이입도 막고 뻔한 서사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뻔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아빠 이야기...ㅠㅠ 어째서 하나같이 비슷한 모양새인가.) 나는 이렇게 담담하게 하지만 제법 날카롭게, 엄마를 쓸 수 있을까, 막연하게 질문하게 된다. 아직도 엄마, 하면 날 세워 비판의 탈을 쓴 비난을 하는 데 머무르고 있으니까.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일지 짐작도 못했었다. 조카 읽히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리즈의 다른 단편도 하나 읽은 적 있는데 그것(제목 안 밝힘)보다 훨씬 좋았다. (뒤늦게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를 샀었다. 아직 안 읽었는데^^;; 거기에 이 <칼자국>이 실려있다고 한다.) 다만, 이런 '엄마 서사'가 그러니까 효도해라 식의 교훈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엄마를 '밥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엄마=집밥'으로 여기는 것은 모든 엄마가 그래서가 아니라 지난 시절 집밥을 했던 사람이 많은 경우 엄마여서일 뿐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당연한 것은 없다.
+ 삽화 불만 (78) : 소설 뒷부분에서 화자가 깎은 사과의 껍질은 '푸른' 색이라고 되어있다. 사과가 푸른 색인지는 뭐 빛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치자. 화자는 칼로 슥슥 사과 껍질을 깎아서 베어문다. 삽화에서 깨물고 있는 사과는 붉은색이다. 뭥미?
+ 시리즈 이름이 '소설의 첫 만남'이다. 별 생각없이 넘겼는데 지금 보니 뭐가 뭐를 만난다는 말인지 헷갈린다. 사람'이' 소설'을' 처음 만나는 것 아닌가요. ~의,를 너무 쉽게 쓴다는 생각.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오랜 세월, 어머니는 뭘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고, 크게 웃고, 또 가끔은 팔뚝의 때를 밀다 혼자 울었다." (51)
"나는 어머니의 뒤태에서 곧 사라져 갈 부족의 그림자를 봤다. 어쩌면 어머니의 말,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사람들 중 더 작은 나라 사람들이 쓰는 그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벵골 호랑이에게는 벵골 호랑이의 말이, 시베리아 호랑이에게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말이 필요하듯. 나이 들어 문득 쳐다보게 되는 어머니의 말.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관광지처럼 곧 사라질 것 같다 예감한다. 대개 어미는 새끼보다 먼저 죽고, 어미가 쓰는 말은 새끼보다 오래되었다. 어머니가 칼을 갈 때면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