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전까지 읽고 있던 책 : <세미나책> 


그전까지 읽고 있던 책 : <Une jeunesse sexuellement libérée (ou presque)> 


이번주 읽어야 할 분량이 있어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하는 책 : <제2의 성 2>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우에노 지즈코) <학교의 슬픔> 


대출해놓고 앞부분만 읽은 책 : <억척의 기원>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대출해놓고 시작도 못하고 연장만 해놓은 책 : <쌀 재난 국가> 


그러고도 또 대출한 책 : <두 개인주의자의 결혼생활> 


읽으려고 책상에 쌓아둔 책 : <마이너 필링스> <이토록 두려운 사랑> 


밀린 책들이 있는데 펼치고 싶은 책 : <혁명의 영점> 


이 와중에 소설을 좀 읽어야 겠다고 부릉부릉. 생각만 부릉부릉. 하면서 삼일을 내리 놀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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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10-14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그 너무 웃겨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티나무님 문어발 독서 완전 응원합니다!!!!!!

난티나무 2021-10-15 00:25   좋아요 0 | URL
태그 뭐라고 썼지 @@ 암튼 문어발은 생각납니다.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10-25 13:16   좋아요 0 | URL
황정은 에세이에서 자기의 독서는 선형적 독서가 아니라 여기서 저기로 넘어가는 방사형 독서라고 ㅋㅋ 저도 읽다가 손 번쩍 들었음. 작가님도? 나도!!!!! 나도요!!!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초보독서중독자로서 서재 돌아다니다 남의 책탑이나 문어발 보면서 언제나 이 생각을 해요. 난 아직 멀었다...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10-26 23:27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 서로의 독서를 보면서 서로 난 아직 멀었다...를 생각한다니 우리 너무 겸손한 거 아니예요? 겸손은 지나치면 안 된다고 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나는 겸손해야 함.ㅠㅠ ㅋㅋㅋㅋㅋ)
 











제2부 현대 여성의 삶 제2편 상황 제1장 기혼 여성

나, 기혼 여성. 23년차.

책을 읽다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결혼하기 전에 내가 이 책들을 읽었다면 나는 결혼하지 않았을까. 가끔 옆지기도 묻는다. 그랬을 거 같냐고. 아마도 그랬겠지. 알고서도 감행한다는 건 모르고 하는 것보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일 테니까. 아니, 알 수 없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해두자. 어쨌든 인간관계나 '연애'의 실상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제도에 대해서도 더 고민했을 것이다. 음 장담할 수는 없겠다. 지금의 나라고 크게 다를까. 앞으로는... 역시 장담할 수 없겠다.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 지금을 살기도 벅차니까. 일단 지금 잘 살고 생각하자. 뭐라니.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결혼을 결정하는 요인은 사랑이 아니다. '남편이란 말하자면 사랑하는 남자의 대용이지, 결코 그 사랑하는 남자는 아니다‘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이런 분리는 조금도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결혼제도의 본질적 성격에서 유래한다. 결혼의 목적은 남자와 여자의 경제적·성적인 결합을 통해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 그들의 개인적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에서는 회교도 공동체에서는 오늘날도 그렇지만 부모의 권위에 따라 선택된 약혼자들은 결혼 당일까지 서로 얼굴도 모르는 경우조차 있었다. 사회적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 개개인이 감정이나 변덕스러운 사랑을 이유로 자기의 삶을 설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분별 있는 계약에서 욕망은 그렇게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침울하고 무디다. 사랑의 신은 사랑 이외의 장소에 머물기를 싫어한다. 결혼처럼 다른 명목으로 이루어지고 유지되는 관계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 결혼에서는 친족관계나 재산이, 우아함이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시된다. 이는 마땅하다. 뭐니뭐니해도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그 이상으로 자손이나 가족을 생각해서 결혼한다.' (《수상록》 제3편 제5장) " 545

"결혼과 사랑의 조화는 대단히 힘든 일이어서 성공하려면 신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우여곡절 끝에 이른 결론이다. 그는 결혼의 모순을 고발하기를 좋아했다.

결혼이란 얼마나 기이한 제도인가! 결혼을 더욱더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행위도 그처럼 결정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이처럼 결정적인 행위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리라.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사랑이나 좋아하는 기분은 자발적인 것이지만 결혼은 하나의 결정이다. 더구나 사랑의 감정이 결혼 혹은 결혼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즉 가장 자발적인 것이 동시에 가장 자유스러운 결정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발성이란 대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신성하고 신중한 판단을 통해 결정되어야 함을 뜻한다. 또한 하나가 다른 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결정은 천천히 뒤에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두 가지가 하나가 되어 대단원을 맞이해야 한다." 552


오 우리는 얼마나 착각을 했던가. 사랑하면(좋아하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째서 변함없이 드글드글한가 말이다. 왜 나(너)와 결혼했냐고 묻는다. 사랑하니까. 정말, 그 이유 뿐이라고? 아니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결혼이라는 제도 앞에서 오로지 상대방을 생각했을 리가 없다. 솔직해지자. 나도 그랬다. 단순히 같이 살고 싶어서 말고, 이러저러한 조건들을 끼워맞춰보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결혼은 그런 것이다. "결혼의 목적은 남자와 여자의 경제적·성적인 결합을 통해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 그들의 개인적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악. 어렴풋하게나마 결혼이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우리는 결혼으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려 하는 것일까? 왜 계속 속고 있는 것일까.




"산업사회는 생산의 영역이든 재생산의 영역이든 모두 '자유방임'이란 이름의 동일한 통제 매커니즘 아래 놓여 있다. ¹


¹ 재생산 영역의 통제 매커니즘은 혼인규칙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근대의 연애결혼이란 이데올로기는 '누구나 자유롭게' 결혼해도 좋다는 원리 아래 이제까지의 규제적인 혼인규칙을 타파했다. 그러나 이 '자유'로운 결혼시장은, 실은 '자유'로운 상품시장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통해서 재생산이 자동적으로 통제되는 또 하나의 '혼인 틀'이었다."

우에노 지즈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p.30

함께 읽고 있는 우에노 지즈코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 밑줄을 그었다. 자유로운 결혼시장. 자유로운 상품시장. 자유라는 이름 아래 나도 모르게 통제되는 사회. 나는 자유롭다, 나의 결정은 자발적 결정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건 좀 많이 괴로운 일이다. 다들 하는 거라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고 하니까, 사랑 다음엔 '자연'스럽게 결혼이지, 이랬던 내 생각이 다 틀려먹은 것이었다는 충격, 은연 중에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배신감, 그런 와중에 내 결정은 100퍼 자발적인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이미 알고 있던 당혹감까지.





"하지만 주부가 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는 한 여성이 이 역할을 준비하고 아이와 남편이 자신의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 무임금상태의 어머니가 시키는 일상적인 훈련과 사회화를 거치며 최소한 20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 경우도 성공은 쉽지 않다. 아무리 훈련을 잘 받는다 하더라도 신혼생활이 끝나고 설거지거리가 쌓인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속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여성은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는 환상을 품고 있는 여성들이 많고, 돈과 안전 때문에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사랑이나 돈은 결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청난 노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힐 때가 이제는 되었다. (몇 줄 생략)

우리는 자본이 우리의 노동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 대단히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본은 여성을 희생하여 진정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거부하고 가사노동을 사랑의 행위로 바꿔 놓음으로써 일거다득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먼저 터무니없이 많은 양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획득했고, 여성들이 이에 거부하는 투쟁을 일으키기는커녕 인생 최고의 일로 가사노동을 추구하게 만든 것이다(마법과도 같은 말 : "그래, 여보, 당신은 천생 여자야"). 동시에 자본은 여성이 남성노동자의 노동과 임금에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남성노동자 역시 통제했다. 그리고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뒤 집에 가면 부릴 수 있는 하녀를 붙여줌으로써 이 통제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여성의 역할은 임금을 받지 않으면서도 행복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노동계급"의 하녀가 되는 것이다."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39~40


실비아 페데리치의 책이 도착해 급히 앞부분을 읽는다. 한없이 인용해야 할 것 같다. 가까스로 인용을 멈춘다.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말들. 오 내 지나버린 가사노동의 시간들이여. 페데리치의 말처럼 가사노동을 '거부'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아무도 돌봄노동이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과 분배가 어떠해야 하는지 아주 조금씩 감이 잡히는 듯하다. 속았다는 기분. 너무 잘 알지. 알면서 애써 숨기고 살려는 감정.





"육체적 사랑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목적도 단순한 수단도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다른 것에 의해 정당화될 수도 없다. 즉 육체적 사랑은 인간의 모든 삶 속에 삽화처럼 끼어들면서도, 또한 자주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자유로워야 한다." 567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보부아르가 말하는 것처럼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랑이다. 육체적 사랑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도대체 우리가 배운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가르쳐주지도 않고 냅다 세상에 집어던져버리는 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 아니냐. 너네 알아서 해. 뭘 알아야 알아서 하지. 지금도 여전히 여자들은 교육 비스무리한 것조차 받지 못한 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늙어간다. 이래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내 몸도 제대로 모르고 평생을 산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 말이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알아야 내 몸 내가 지키고 내 몸 내가 느끼고 보부아르의 말처럼 '자주적인 사랑'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번지르르하게 성을 대상화하는 미디어에서 말해주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섹슈얼리티의 힘은 마치 그동안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그냥 묻어둔 비밀처럼 여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강력한 힘이 지닌 영향력에 대해 과연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거기까지다. 두려움을 가져라. 그런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네게서 ‘그것‘을 가져가지 못하게 해라. 지나치게 쾌락을 탐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선을 넘고 말 것이고 우리는 너를 도울 길이 없을 것이다. 남자를 믿지 마라. 너에게 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이는 누구든 믿지 마라. 우리는 너에게 그걸 설명해줄 수 없으니 그냥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자.

대화 섹스를 화두로 삼지 않는 한 당신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없고, 당신의 여정을 오롯이 혼자서 헤쳐나가야만 한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그냥 사적인 비밀로 간직하고 말자는 마음속의 암시를 우리는 모두 극복해야 한다. 파트너 또는 연인에게만 하는 한이 있어도 당신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섹스에 관한 대화를 할수록 그러한 수치심이 점점 줄어든다."

에이미 조 고다드 <섹스하는 삶>


그러게 말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기본적인 성교육조차 아이들에게 유해하다고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판국에 몸이니 클리토리스니 하면 기절들 하겠지. 한숨. 일단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수치심부터 버리자. 대화를 하면 할수록 수치심이 점점 줄어든다는 위의 말은 옳더라.



"그런데 떠맡다, 사랑한다는 이 두 말은 곧잘 혼동된다. 바로 거기에서 속임수가 나온다. 사람은 자기가 맡은 것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자기의 육체, 자기의 과거, 자기의 현재 상황을 책임지고 맡는다. 그러나 사랑은 타자를 향한, 자기의 존재와 분리된 생명, 목적, 미래를 향한 움직임이다. 무거운 짐 같은 억압된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 인간관계는 직접성만으로 추구된다면 가치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의식 안에서 성찰되어야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의 자유를 해치는 (관계의) 직접성에 빠지는 것을 찬탄할 수는 없다. 부부애라 불리는 애착·원한·증오·구속.체념·대만·위선 등으로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사람들이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이 변명이나 핑계로 쓰이기 때문이다. 우정도 육체적 사랑과 마찬가지이다. 참된 우정이 되려면 먼저 자유를 전제로 해야 한다. " 617


"결혼의 비극은 결혼이 약속한 행복을 여자에게 보증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 그렇다고 결혼이 완전한 행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결혼이 여자를 불구로 만들기 때문이다. 결혼은 여자를 반복과 매너리즘에 떨어뜨려버린다. 여자 일생의 첫 20년은 놀랄만큼 풍요롭다. 여자는 월경·성감(性感)·결혼·모성이라는 경험을 통과한다. 세계와 자기의 운명을 발견한다. 그러나 20세에 가정주부가 되어, 일생 동안 한 남자에게 매이고 아이들을 품에 안으면, 이것으로써 그녀의 삶은 영원히 끝난 것이다. 진정한 행위, 진정한 일은 남자의 특권이다. 여자에게는 그날그날의 살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종종 몸을 녹초로 만들지언정, 결코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한다. 체념과 헌신의 덕을 사람들은 극찬한다. 그러나 여자는 ‘생애 마지막까지 부부 두 사람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몸을 바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덕이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가장 나쁜 점은, 이런 여자의 헌신 자체가 귀찮은 것처럼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눈에는 아내의 헌신이 압박처럼 보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아내의 유일한 정당성의 근거로 그녀에게 밀어붙인 것은 남편이다.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그는 그녀에게 전면적으로 헌신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서로의 의무를 승낙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 의하여, 그를 위하여 살고 있으므로, 같은 것을 그에게 요구한다‘는 소피아 톨스토이의 말은 확실히 반발을 일으킨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실제로 아내가 자기를 위해, 자기에 의해 살기를 요구했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 그렇게 함으로써만 긍정할 수 있는 태도이다. 아내를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그녀의 불행에 자기가 희생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남편의 이중성이다. 침대에서 아내에게 뜨거운 동시에 차갑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남자는 여자가 전적으로 자기를 바치되, 그 무게로 남편을 누르지 않기를 요구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를 지상에 안정시키면서도 자유로이 놓아 둘 것, 날마다 단조로운 반복을 거듭하면서도 권태롭지 않게 할 것, 늘 곁에 있으면서도 귀찮은 존재가 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그는 그녀를 전적으로 소유하기를 원하면서, 자기는 그녀의 소유가 되기를 거절한다. 둘이서 살아가면서 혼자이기를 원한다. 이렇게 남자는 여자와 결혼할 때부터 그녀를 속인다. 여자는 삶을 이어가면서 이런 배신감을 점점 더 크게 느낀다. " 628


속임, 이중성, 배신감. 여성성의 신화. 인용이 너무 길지만 어디서 끊기도 애매하고.







"사랑과 결혼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같은 사기는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가사노동이 완전히 자연화되고 성적인 문제가 되면 다시 말해서 가사노동이 여성의 속성을 띠게 되면 여성 모두는 거기에서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모든 여성은 그 일을 하면서 심지어는 좋아하기까지 해야 한다는 기대 속에 놓이게 된다. 남편이 가사도우미를 두고 정신과 상담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고 다양한 형태의 휴식과 오락을 즐길 수 있다는 사회적 지위 덕분에 가사노동의 일부 또는 전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성들에 대해서도 이 같은 기대가 예외는 아니다. 여성이 한 남성에게 봉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여성 모두가 전체 남성사회와 주종관계를 맺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불리는 것이 비하이고 무시인 것이다. 남편이든 당신의 기차표를 끊어준 사람이든 직장 상사든 간에 모든 남성들은 당신에게 "웃어봐, 자기야, 무슨 일 있어?" 같은 질문을 할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42~43


'사랑과 결혼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같은 사기'. '여성 모두가 전체 남성사회와 주종관계를 맺고 있음'. 틀린 말 하나 없다.

인용구들을 옮기며 다시 읽으니 보부아르는 정말 끝없이 안으로 파고들어갔구나 싶다. 그래서 오히려 거시적 관점이 조금 부족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 다음 챕터는 '어머니'이다. 모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겠다. 신화 팍팍 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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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오 벼룩시장에서 이런 책을! 아 물론 내가 푸코를 읽을 실력은 안 된다.ㅠㅠ 그러나 사다 두면 아이들 중 누구라도 읽겠지.@@ 기욤 뮈소와 마크 레비의 책만 넘쳐나는 벼룩시장에서 정말 뜬금없는 득템. 






















다른 한 권은 지금의 나와 아이들에게 아주 딱 필요하고 유용하리라 생각되는 책이다. (중고등 아이들의 성에 관한.) 저자의 책이 꽤 되는데 한국에 번역된 것이 없다. 이런 책들을 보면 부족한 나라도 번역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 끝까지 읽어봐야 어떤지 알 수 있겠지만 느낌상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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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편소포는 무소식이지만 화요일 띄운 항공소포는 무사히 오늘 아침 도착했다. 후덜덜한 배송비를 지불하고 받은 책은 다음과 같다. 





새 책이든 헌 책이든 현관을 통해 들어오는 책들은 알콜세정을 거친다. 이 중 유일하게 중고로 산 <혁명의 영점>을 닦으면서 펼쳐진 페이지들을 보니 얼른 읽고 싶어 안달이 난다. <제2의성>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고 있는 지금 딱 같이 읽으면 좋을 책 같아보인다. 새 책으로 사도 아깝지 않았을 듯. 종이표지가 있었던 듯한데 사라지고 없고 먼지가 많이 묻었다. 

<여성과 광기>에 덧입혀진 종이표지가 없는 건 마음에 든다. 그러고 보니 100자평 남겼어야 했는데 잊어버렸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목차를 펼쳐보고 아 이런 내용이었지 싶다. <소설의 정치사>가 생각나는. 제목 완전 중요하다는 생각. 제본된 책이 두 권이지만 글자가 커서 다행이다. 

모두 기대되는 책들. 이번주에 소포 올 것을 알고도 전자책 두 권이나 대출해 뒀으니 대책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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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10-0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난티나무님 <다락방의 미친여자>제본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난티나무 2021-10-09 19:31   좋아요 1 | URL
좋으신 이웃님 찬스요!!! ^^

다락방 2021-10-09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의 미친여자라니 진짜 좋은 찬스 쓰셨네요 👍🏻👍🏻👍🏻👍🏻👍🏻

난티나무 2021-10-09 22:09   좋아요 0 | URL
유후!! 😁😁😁
 

사랑이라는 이름의 노동


우에노 지즈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가사노동‘이란 개념의 발견은 사람들의 인식에 커다란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가사=노동‘이란 개념의 성립은 사람들에게 "가사노동도 노동이다" 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이론에서 비롯된 개념이란 장치는 인식이라는 영역의 대전환을 초래했다. 본말이 바뀌어 세계가 새로운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이론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가사노동‘이란 개념이 성립되어 유포되기 이전에는 가사가 ‘노동‘이라고 간주되지 않았다. 가사와 육아에 쫓기는 전업주부인 여성은 비록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더라도 세 끼 밥먹고 낮잠 자는 신분이라고 야유당한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생쥐처럼 부지런히 일하고 있어요."라고 이의를 제기하면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일 축에도 끼지 않습니다" 라고 일축당하기 일쑤였다. "가사는 일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래요"라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가사노동‘이란 개념은 여성에게 이론적인 무기를 제공했다. 가사노동은 비록 돈이 되지는 않더라도 노동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주부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대행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용하며 불가결한 노동인데도 여성에 대해서 아무런 법적·경제적 보상도 하지 않은 채 무권리 상태로 방치한다면 그것은 부당하게 보수를 지불하지는 ‘부불노동(unpaid labor)‘이 된다.
(중략)
‘사랑‘과 ‘모성‘이, 그것에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떠받드는 것을 통해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해 온 이데올로기 장치였다는 사실은 페미니스트의 ‘모성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서서히 드러났다. ‘사랑‘이란 남편의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여성의 에너지를 동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이고, ‘모성‘이란 아이들의 성장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고 간주하여 여성들에게 헌신과 자기 희생을 종용함으로써 여성이 자기 자신에 대한 요구를 억누를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였다. 여성이 ‘사랑‘에 높은 가치를 두는 한 여성의 노동은 ‘가족의 이해‘나 ‘남편의 위로‘에 의해 쉽게 보답받는다. 여성은 ‘사랑‘을 공급하는 전문가이며, 이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핀치와 그로브즈는 여자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배려나 보살핌‘이 ‘사랑이란 이름의 노동(a labor of love)‘에 다름 아님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여성이 집안에서 하고 있는 활동이 이떤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표현된다 할지라도, 여성은 분명히 자신이 직접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대행시킬 수밖에 없는 노동을 하고 있다. 주부는 단지 그것을 ‘사랑‘이란 이름 아래 하고 있는 것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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