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직은 뜨거운 햇빛 아래 거리를 다리 아프도록 돌아다니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돈 없으면 (거의) 아무것도 못하는 세상인 건가. 당연하게 들리는 말을 또 몸으로 느끼는. 24시간 무제한 교통권을 갖고 있음에도 걸어야 할 이유는 있었고 넘쳐나는 사람들로 피곤한 몸은 휴식을 원했다. 휴식, 휴식, 휴식. 나는 돈이 없다, 고로 돈을 쓸 수 없다,의 망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나, 혹은 돈 쓰는 건 사치,라는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나, 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판단력 상실 상태의 나, 혹은 하나를 마시더라도 괜찮은(?) 걸 마시겠다는 일념을 지우지 못하는 나. 이러한 이유로 간혹 보이는 까페에 안착하지 못했다. 똥멍충이. 








의지력 하나로 돌아다니다가 겨우 문 닫기 이십 분 전 까페의 소파에 앉았고 건강음료라 할 만한 신선한 과일채소주스를 마시면서. 이거 하나에 만 원이네. 두 잔에 이만 원이네. 내가 정말 '돈 없는' 여행자면 여기 앉아서 이걸 마실 수 있을까? 아무리 다리가 아프고 목이 말라도 거리의 벤치에 앉아 가장 싼 1.5리터 크리스탈린 물을 마시겠지. 슈퍼에서 사서. 혹은 저렴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여기 앉아 잠깐의 호사를 누릴 수도 있으려나? 그건 돈 7유로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마음의 문제인 건가, 가치관의 문제인 건가, 잠시 헷갈리기도. 아니, 여행이라는 것을 하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잖아 싶기도. 







'밖'에서 먹으며 돌아다니는 일에 드는 돈을 계산해 본다. 얼마나 많아야 이것저것 재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쓰면서 다닐까 어이없는 질문도 해가면서. 끝이 없지 않을까, 옆지기가 말한다. 그렇다, 세상은 이미 그렇게 바뀌었다. 돈이면 (대체로) 뭐든 다 되는 세상. 반대로 돈이 없으면 (대체로) 뭐든 안 되는 세상. 할 수 없는 세상.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도 한켠에 있어서 (대체로)라고 쓰고. 계산에 혀를 내두른다. 잠깐 현타가 왔으나 얼른 잊기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처럼 여행을 상상할 수 없는 삶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셋째 날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에 잠깐, 반나절의 혼여를 상상했다. 이따 오후까지 따로 다니자. 점심도 각자 해결하고 만나자. 혼자 딱히 갈 곳은 없지만 옆에서 말거는 사람 없이 까페 테라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로망 역시 배부른 소리로 들릴 것을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 달리 무슨 의미를 부여할 만큼 특별하거나 한 일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잠깐 그렇게 책으로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 또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고 나는 그럴 수 있다. 실제로 앞으로의 둘여행에서 각자 다니기는 지향해야 할 바라고 옆지기와 의견나눔도 한 터이다. 나에게 여행이란, 먹고 마시고 중간중간 책 보고, 이게 다인 것같다. 유명 스팟 안 가도 상관없고 역사 유적 안 봐도 상관없고 누가 살았던 누가 갔던 그런 데도 관심 없(진짜? 보부아르랑 사르트르가 묵었다는 호텔에는 가보고 싶은뎅)고 그냥 거리의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관찰하는 것, 난 그런 게 좋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다. 내가 트러블로 여기니 트러블이다. 약간이라고 했지만 완전,이라고 해도 될. 암튼 생각의 계기가 되었고 계속 생각을 했고 결정을 했고 그리고 말도 했고. 그래서 만족. 격렬하게 혼자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아무도 나에게 말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24시간 함께 있는데 여행도 같이 가서 어쩌냐는 말에 그러게요 할 때, 분명 둘이 하는 여행의 장점도 크지만 그래도,라고 생각할 때,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 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나에게 돈을 써야 겠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서. 물론 나는 책을 사대는 것으로 나를 위한 돈을 쓰고 있지만.ㅋ 그래서 며칠 전에도 책을 샀지만.ㅋ 그건 그거고. 그건 죽기 전까지 계속 할 일이고.ㅋ 빠리만큼 크지 않고 번잡스럽지 않고 완전 관광핫스팟만 제외하면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도시, 이곳에 곧!!! 혼자 호캉스를 하러 와야 겠다. 책 몇 권 챙겨서 내 맘대로, 나가도 좋고 안 나가도 좋은, 여행을 하러 와야 겠다. 말 거는 사람 없는 시간을 만들어봐야 겠다. (근데 집에서 자판 두드리는 지금도 말 거는 사람 없기는 해... 또르르...) 나 한번도 프랑스에서 나를 위한 호캉스 해본 적 없다. 이제 좀 해도 되지 않겠나? 꼭 돈 많아야 하는 거 아니잖아? 어차피 럭셔리 호텔에는 못 가. 아 자꾸 변명하려고 함. 끝내야지. 









+ 여행 비용을 생각하며 마신 비싼 건강주스는 젠장맞게도 너무 맛있었다. 

+ 제목의 여행비용은 여행의 비용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데, 돈 말고 다른 부분 충분히 드러나지 않아 조금 아쉽긴 하다. 좀더 내밀한 이야기가 필요함. 

+ 사진 속 주말 여행 도시 : L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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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9-12 19: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혼자하는 여행은 사치스러운 기분이 드는것 같아요. 혼여를 하기위해 감내해야할것들이 때로 많다는 생각 때문인지. 흑백으로 보는 리옹 풍경 매력있네요. 사진까지 잘 찍으시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2-09-12 23:44   좋아요 1 | URL
어째서 그럴까요. 혼자 하는 여행은 사치,라는 생각도 어쩌면 우리 여자만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드네요? 1인가족이 아니라서 더 조건이 많은 걸까요? 음 이것도 좀더 생각을 해봐야 겠어요.^^
폰카가 구려서 아예 흑백으로 찍으니 나은 것 같더라고요. 헤헷

2022-09-12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12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2-09-12 2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그냥 거리의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관찰하는 것… 에서 제가 기립박수칩니다ㅋㅋㅋㅋㅋ 저도 이런 여행을 지향합니다. 커피숍에 앉아서 책 읽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기요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2-09-12 23:47   좋아요 0 | URL
아 동지를 만나는군요! 여행 취향 동지~^^
어째서 여행지에서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갈까요?ㅋㅋ 어디 느긋하게 앉아있을 시간이 @@
담에 혼자 가서 꼭 멍때려 보겠어요!!!!

얄라알라 2022-09-12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고 마지막에서야 느꼈는데요

난티나무님의 이 여행 소묘는 흑백 사진과 딱 어울리는 것 같아요. 컬러가 아닌 흑백..^^근데 마시신 건강 쥬스 색깔만큼은 궁금합니다 ㅎ

난티나무 2022-09-12 23:51   좋아요 1 | URL
헤헷 어울린다니 좋아요~^^
주스 색 음 뭐라 할까요, 그니깐 사과 베이스에 약간의 열대과일과 생강즙과 또 허브 뭐더라? 까먹었 ㅎㅎㅎ 아무튼 그런 거여서 색은 화사하고 청량하고 아주 밝은 오렌지빛? 찐한 아이보리? 하하 에렵네요.^^;;

책읽는나무 2022-09-1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사색적인 여행 에세이집 같은 글입니다.
제가 딱 좋아하는 난티님의 글입니다.^^
저도 어제 오늘 <작은 아씨들> 드라마를 보면서 ‘돈‘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었어요.
건강쥬스 한 잔 마시는 것으로도 풍족하게 썼다고 생각할 수 있고, 책 몇 권 더 사면 부자가 된 듯하여 분명 기쁜데...통장잔고를 보면 어? 부자가 아니네??? ㅋㅋㅋ
그런데 또 난티님 글 읽으면서 부자가 별 건가? 이런 삶이 절로 부유해지는 삶 아닌가?싶네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책 사겠다는 포부!!
이미 부자세요ㅋㅋㅋ

난티나무 2022-09-13 22:38   좋아요 1 | URL
통장잔고 ㅠㅠ 안 볼랍니다.....ㅎㅎㅎㅎ
그러니까 돈이 있어도 못 하는 게 세상에는 아직 있다, 고 생각하고 살려고요. 돈 많다고 행복이 그만큼 오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ㅋㅋㅋㅋ
그럼 부자인 저는 또 책을 둘러보러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
 















* 2장 내용과 감상 정리 


2장에서는 국가와 여성의 관계, 국가페미니즘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이를 위해 국가와 폭력의 상관성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 언급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를 예전에 읽으면서 과연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와 더불어 국가의 '존재'에 대해 잠깐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인으로 한국의 국적을 가지고 프랑스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위치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하는데 시민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인종, 계층, 젠더, 그밖의 조건들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실감하며 산다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국가의 시민이 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존재들 사이에는 틈새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적, 시민권, 영주권 등을 얻어 국가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인간대접을 받으려고 열심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에하라의 저항은 웃음을 유발하는 사치스러운 놀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50) 그러니까 우에하라는 일본인이고 일본 국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땅에서 그렇게 '사치스러운 놀이처럼' 보이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셈이다.(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우에하라가 그러고 있을 동안 그의 아내는 돈을 벌었을 확률이 높다.) 프랑스인이 아니고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지 않은 나는 여전히 이 사회 이 국가에서 이방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살려면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한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 이방인이지만 이 국가에 '충성'하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돈을 벌어 세금을 낼 수 있는지를, 기타등등 기타등등. 증명하지 못하면 협박을 받는다. 못해? 그럼 너네 나라로 돌아가. 나는 선거권을 가진 프랑스 국민이 아니므로 '사치스러운 놀이'를 할 수 없다. 추운 겨울날 아침, 체류증 갱신을 위해 이민국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줄서서 두 시간을 기다린다. 굴욕적이라 느끼지만 하라는 대로 한다. 나에게 프랑스라는 국가는 무슨 의미인가?


("근대 민주주의는 한편에서 법적 수준의 평등을 실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소수자 집단을 재생산해왔다. 이러한 기술은 법이 아니라 지식 권력에 의존한다. 배제의 원리가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실현되는 대상은 비시민 이주민 집단이다. 이들은 국가의 영토에 거주하지만, 국가법의 외부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여기에 다른 소수자 집단과 이주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국적nationality이 근대 시민성 모델의 핵심인 이상, 국가의 법이 국적 없는 인간을 평등한 권리의 주체로 인정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이주민은 결코 포괄될 수 없고, 오로지 배제의 대상만 되는 특수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박이대승,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중에서) 아침에 읽고 있던 책에서 이 구절을 발견했다. 좀 이해가 간다.)


두번째 챕터 '국가법 이전 혹은 너머의 여성'에서는 국민일 수 없었던 여성, 국가법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모성을 기반으로 한 보살핌의 윤리에서 우월성을 찾았던 페미니즘이 남녀평등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면서 봉착하게 된 문제를 언급한다. "차이와 평등이라는 페미니즘의 의제 또한 현실적, 이론적인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남녀평등은 남녀의 능력에 차이가 없으므로, 여자도 남자처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평등의 논리는 남성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그런 보편적인 가치로 여성이 닮아가는 것이다. 남녀평등을 지향한 결과 모두 하나의 성이 되는 값비싼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남성이 됨으로써 동일성을 자기복제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인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남성과 평등한 능력을 인정받아서 제도로 편입한다는 것은 국가의 가치를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럴 경우, 차이의 정치에 바탕하여 여성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주장하기 힘들어진다. 제도적인 문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면, 공적인 정치의 장 안에서 여성특유의 차이를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57) 성별간 평등을 주장하는 것, 정치의 장에서 여성정치인들이 보여지는 모습, 얼마간 남성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는' 위치에 있는 여성들, 에 대해 의구심이나 불편함을 가졌던 이유가 이것인가 싶다. 페미니즘은 성별간의 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런 '국가페미니즘(국가와 협상, 보호기능에 의존하면서 변화 가능성 탐색 - 국가페미니즘 (좁은 의미의 관료화/제도화된 페미니즘 포함) -> 여성권익보호를 위해 정부의 여성 관료가 되는 것을 의미)'이 한국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가 세번째 챕터의 내용이다. 국가에 복종함으로써 소멸을 자초했다는 관점. 예를 든 단체는 여성개발원(현 여성정책연구원)이다. 어용, 관변 페미니즘의 국가페미니즘으로의 대체. 핑계 같지만 모든 역사에 취약해서 1980년대의 정치사에도 까막눈이지만 여성단체가 어떻게 변화해갔는지를 간략하게 알 수 있었다. 이런 변화과정은 여성운동의 딜레마("여성운동을 위해 여성운동을 무력화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다는 점"(61))를 보여주기도 한다. "...MB정권의 출범을 위한 인수위에서 정부부처통폐합대상으로 가장 만만한 여성가족부를 들고 나온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여성가족부와 여성단체를 제외하고는 보건복지부와의 통폐합을 아쉬워하는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63) 10년도 전에 씌어진 글인데 현 세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릇된 역사를 그대로 반복하는 일은 후퇴다. 지금 한국은 갑절로 후퇴 중이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지금은 폐지(2015년)된 '간통법'으로 여성과 국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진실은 아무리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반복되면 경이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도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런 아름다움에 무감각해지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그런 현상을 습관화라 하고,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 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 부른다."(63) 매번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며 살 수는 없지만 가끔은 똑같은 아름다운 경치에도 감탄하게 되듯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그런 경이로움이 가능하면 좋겠다. 그러자면 열린 마음, 적당한 거리, 방기되지 않는 자유와 의무,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불륜은 불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면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한 핑계라고 프로이트는 분석한 바 있다. 그 '어떤 것'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인생의 끝에서 마주치게 될 죽음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욕망이 불륜을 꿈꾸도록 만드는 '특별한' 사유가 된다. 이 경우 불륜은 죽음과 허무를 지연시키는 아름다운 유혹으로 포장된다. 프로이트의 분석이 빈말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67) 저자가 예로 드는 무수한(!) 남성작가들의 작품에서는 프로이트의 분석이 일견 맞을 수 있겠다. 그러나... 애인이나 결혼동반자가 있을 때의 '불륜'이 어째서 윤리적이지 못한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무엇이 윤리인가, 무엇이 사랑인가, 이런 질문부터. 일평생 한사람만을 '사랑'하고(그 사랑 지속될 리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하고) 그 사람과만 섹스하는 것이 윤리적인가? 내 애인, 내 결혼동반자, 라는 개념이 그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사랑 없는 섹스는 범죄로 간주했고, 사랑 없는 결혼은 부끄러워해야 할 비윤리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도처에 편재한 사랑은 엄청난 축복으로 간주되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면 배우자와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만 허용된다. 사랑의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배우자라는 한 사람에게만 영원히 유지되는 감정도 아니다."(67) 우리는 결혼 제도와 '바람 피우는 것, 불륜', 에 대해 지나친 잣대를 들이댄다. (주로) 이성애에 있어 신체접촉을 너무도 중요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섹스가 사랑이라고 믿어서이기도 하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이기도 하다. 성별 불문, 요즘 시대엔 바람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들 한다. 이것이 단순히 육체적 욕망만을 좇는 결과가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불륜에의 욕망을 법으로 막는 것은 인권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폭력적이다. 국가가 그 기원에서부터 폭력적이라면 그런 국가에게 여성들이 간통법 등을 통해 보호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간통죄를 민사도 아니고 형사 처벌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행복권, 성적 자기결정권을 알아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 큰 국가 가부장에게 가서 남편/아내를 혼내주고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가부장적인 국가에게 호소하여 금기를 계속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금기를 풀어나가는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69) 이렇게 되려면 사회경제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는 법안이 여러 방면에서 강화되어야 한다.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갈 길은 먼데 정치판은 쑥대밭이다...


+ 인용

"불륜의 플롯은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를 협소한 의미의 가족관계(남편과의 불화, 시댁과의 갈등 등)로 환원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가족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런 방식의 불륜의 플롯은 '가족은 해체되었다'는 소문을 무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며 이를 통해 가족 해체에 대한 근거 없는 위기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륜의 플롯은 표면적으로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남편과 아내라는 협소한 의미의 가족 단위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전체와 개인의 삶, 그리고 정체성을 구성하는 상상적 구조와 정치적 구조의 토대이다. 따라서 가족 이데올로기를 봉건적 속성으로 치부하는 담론은 가족을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로 스스로를 가치 절하시켜 여성 문제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다. 또한 가족을 자본주의적 모순의 층 속에서 생산/재생산이라는 경제적 모순의 차원에서 탐구하거나 가족 이데올로기를 계급 모순의 한 발현태로 해명하려는 시도 역시 권력 관계의 상상적 모델로서 작동하는 '가족'의 메커니즘을 해명할 수 없다."(권명아,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중에서)



그리 길지 않은 2장을 읽으면서 많은 질문을 던진다. 한국에서 멀리 있다는 이유로 어찌 보면 조금은 객관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요즘은 매우 자주) 한국의 세태가 부끄럽고 때로는 (특히 누가 욕하려 할 때) 편들고 싶은 마음이 든다. 뿌리깊이 박힌 '민족'주의 때문일까.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 국가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인 나에게 국가는 지금 어떤 의미인가. 나는 국가에 무엇인가. 국가에 대한 환상은 어떻게 해야 깨어질 수 있는 것일까.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남성화'되지 않고 행위주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추상적인 질문들을 어떻게 하면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까.


+ 막 던져보는 질문 


* "많은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여성이 무슨 억압을 받는다고 그래'라고 하면서 오히려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거론한다."(62) "가부장적인 한국사회가 보기에 여성들은 차별받는 집단이 아니라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집단이다."(63)

-> 이 책이 씌어진 10여 년 전에도 이랬다. 지금도 그렇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한방에 깨부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정말 현실인가 싶을 때도 있다.


*"사실 일부일처제는 남성을 길들여 가정화(혹은 가축화domestication)하려는 여성들이 이루어낸 하나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64) -> 동의하는지? 이 관점에서 일부일처제를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참고 : 초판 1쇄와 초판 3쇄 책의 문장이 다르다. 내 책은 초판 3쇄. 3쇄가 1쇄보다 더 강경...?)


* '불륜'에 대한 지금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단어를 대체할 새로운 단어가 있다면? 대체해야 하나? 없애야 하는 단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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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7 21: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0년전의 현실이나 지금의 현실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현실을 옹호하려는 이상한 논리들은 더 많아지고 더 강경해진듯요.
저는 저기 남쪽으로 튀어 처음 읽었을 때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아 국가 역시 이런식으로 유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구나라는걸 막 실감나게 느꼈달까요?
물론 난티나무님 말씀대로 그가 일본에 살고있는 일본 국민이기 때문에, 또 진짜로 생계는 아내가 다 해결해주기 때문에라는 단서가 붙었지만요. ^^

난티나무 2022-09-08 19:17   좋아요 2 | URL
맞아요, 거꾸로 가고 있는... ㅠㅠ
어쩌면, 인터넷 가상공간이라는 곳이 더 큰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어요. 생각만 하던 것들을 가감없이 쏟아내도 아무렇지도 않은 공간...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이 쏟아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렇게 보면 원래 그렇게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그런 분위기에 여러 모로 쉽게 편승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있는 시대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상한 논리들이 부각되기 좋은 조건이기도 하죠...

소설은, 맞아요. 저도 비슷했어요.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런지^^ 좀더 비판적인 입장이 될 것 같기는 합니다.ㅎㅎㅎ
 

돈 버는 '번듯한' 직업이 없는 것? 부끄럽지 않다.

일정하게 출퇴근하는 직장이 없는 것? 부끄럽지 않다.

세금신고서에 0이라고 적는 것? 부끄럽지 않다.

공공기관서류의 직업란에 '주부'라고 적는 것? 이건 얼마전까지도 좀 부끄럽고 싫었다. 왜? 사회가 주부를 바라보는 시선, 나 역시도 그 시선으로 나를 보았으니까.

부끄럽지 않다는 말은 딱 그만큼의 무게만을 가진다. 부끄럽지 않다고 해서 당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도 '네가 옳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부끄러운 줄 알아'가 일반적이다. 사회는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한다. 가끔 이런 생각들이 어떤 장면으로 상상되어 한꺼번에 몰려올 때 몸서리치게 세상이 무서워진다.


프랑스 생활 20여년 만에 구직사무소(?)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에게 주는 보조금이 많은 나라, 소득별로 지급금액이 나누어지고, 권리를 누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리체제에 들어가려면 증명해야 하는 것이 많은 나라.(어디든 그러하겠지.) 보조금 중 한 가지가 얼마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계속 받으려면 일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공무원이 말했다. 그 의지를 증명하라 했다. 나온 돈은 얼마 되지 않는데 기준금액보다 단 1유로가 더 나오는 바람에 관리대상으로 들어갔고 직원이 붙었으며 복잡한 서류처리과정이 시작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사회적 약자인 나는 시키는 대로 직업상담소에 이름을 올리고 상담을 받았다. 곧 쬐맨한 개인사업자 등록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사실상 구직을 위해 이름을 올린 건 아니고 보조금 지급관리를 위한 절차라 상담직원도 내 이력과 원하는 직장을 대충 입력하기 시작했는데, 전공이 무엇인지 묻고는 한국어교사,라고...ㅋㅋㅋ 이 좁은 시골에 한국어교사 구하는 데(학교)가 어딨...ㅎㅎㅎ 그 와중에, 이름을 올린 사실 하나만으로 지역교통수단과 전국박&미술관 등을 무료로 혹은 대폭할인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 외에도 아마 '혜택'이 더 있을 것이다.) 처음엔 잠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라. 기차 75% 할인은 거주지 근방으로 한정된다. TGV 등을 제외한 그 지역 기차에만 적용되는 할인이다. 너는 되도록 빨리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지역으로 여행가지 말고 거주지 근방에 있어. 일을 해서 돈을 벌어 기차표를 사도록 해. 네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기는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한다. 적게 버는 자, 장거리이동도 하지 말라! 경험 기회의 억압.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미술관 관람은 반대의 경우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가까운 중소도시의 박/미술관은 이미 무료인지 오래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미술관 무료면 뭐해요? 가는 데 돈 드는데요? 기차비만 드나요? 잠은요? 식사는요? 사람은 기본욕구(의식주)충족이 안 되는 상황에 놓일 때 시야가 좁아진다. 오직 생존만이 목표다. 이렇게 되면 시간과 노력이 모두 생존에 투입된다. 오 자본주의!     


박물관 전시를 보기 위해 서류를 챙겼다. 매표소에서 '증명'하면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직원은 서류의 내가 신분증의 나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한다. 티켓에는 '구직자'라는 문구와 함께 0€가 찍혔다. 표를 받아드는데 미묘했다. 규정당하는 기분.


전시를 보고 나와서 옆지기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지기는 직원이 무료티켓 끊는 우리를 좀 부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일하고 있는 자와 일하지 않으면서 전시를 보러 온 자. 그 사이의 간극. 나는 생각이 달랐다. 과연 그럴까? 직원이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이라고 하고, 꼬박꼬박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고, 일년에 한 달 휴가를 가고, 그래도 일 없는 우리를 부러워하겠니. 그 직원은 오히려 우리를 한심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직업상담소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우린 실제로도 그렇지만 서류상으로도 저소득층의 사람들인 거야. 쉬고 있다고 말로 할 때보다 글자로 찍혀 나올 때 우리는 더 확실하게 규정당하는 거지.


물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저것은 또다른 삶, 내가 뭐라고 판단하고 잣대를 들이밀 일이 아니라는 생각.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직장을 찾고 있는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별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없을 수 있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생각일 수도 있고.

그러나... 자기가 내는 세금이 외국인/이민자 밑으로 다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아무렇지도 않은 시선을 건넬 수 있을까? 정부보조금으로만 생활하는 프랑스인들도 얼마나 많은데? 저소득층을 위한 모든 제도는 사회적 규정짓기로 존재한다. 국가의 관리와 통제. 네가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해라!

(+ 옆지기의 아무렇지 않은 당당함과 나의 생각의 차이는 또 젠더의 문제인가 싶어진다. 왜 나는 부러워할 거라는 생각을 털끝만치도 하지 않았지?)


시선의 문제. 나의 위치.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고 하층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나를 어떤 허상의 위치에 놓고 사는 것은 아닌가.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이런.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과 달라, 나는 저렇지는 않아, 합리화의 언어로 포장한 시선을 은연중에 내비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다르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 시선에 이미 차별이 들어있지 않나. 확실하게 선을 그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이기 때문에 은연중에 장착해버리는 열등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구직사무소에서 메일이 왔다. 매달 너의 상황을 업데이트해라. 직장을 구하는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보여라. 사업자등록을 했다면 알려라. 한 통이 더 왔다. 너의 체류증 만료일이 다가오네? 갱신한 체류증 갖고 와. 일하려면(정부 돈 받으려면) 체류증 있어야 되니깐.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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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6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외국에서 산다는건 자신의 출신 국가에서 사는 것과는 다르게 신경쓰이는 면이 많겠죠.
며칠 안되는 기간 여행만 갔다와도 집가까운 랜드마크 이런거 보이면 갑자기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지는 기분인데요. 어디에서 살든 내가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것을 요구하는건데 괜히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거기에 다른 자괴감이 끼어들기도 하고.... 사는건 이렇게 어디에서든 쉽지 않네요.
그래도 글로벌 시대잖아요. 지구 모두가 우리의 고향인걸요. 밥 맛있게 먹고 힘내요. 역시 우울할 땐 밥이 최고!!! ^^

난티나무 2022-09-07 04:03   좋아요 2 | URL
맞아요 바람돌이님. 어디나 힘든 점이 있고 삶은 쉽지 않죠..
저녁에도 밥을 배부르게 먹고 아직 안 꺼져서 ㅎㅎㅎ 훅훅거리고 있습니다.
우울하지 않아요.^^ 우울해지려고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가끔 하는 생각들이고요. 이런 생각이 생활을 이루고 있어서 ㅋㅋ
그래도 맛난 거 찾아댕겨야죠. 저는 식당 밥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푸핫
 

인간과 비인간, 법적 인간과 권리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밑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물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민주주의적 법체계를 상상해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 종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 내용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동물 종과 느끼지 못하는 동물 종 사이로 이동한다. 인간 범주는 단지 확장될 수 있을 뿐,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둘째, 고통을 느끼는 동물 종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법적 인간 개념의 외연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편의상 우리를 "우리 인간" 인간 범주에 새롭게 포괄된 동물을 "동물-인간"이라고 부르자). 그럼 동물을 자기 행위의 책임을 지는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간주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인간이 동물-인간을 죽이는 행위는 물론, 동물인간이 다른 동물인간을 죽이는 행위도 살인으로 처벌해야 한다. 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을 죽이는 건 여전히 허용될 것이다. 더 나아가 동물-인간의 참정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권리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정치적 삶에 참여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별 인간은 정치적 참여를 통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정한다. 이러한 민주적 참여에서 배제된 존재는 결코 자율적 인간의 지위를 온전하게 획득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상상해보면, 근대정치체제가 전제하는 존재론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유지하면서 동물을 법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동물을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별 관심이 없지만, 태아가 법적 인간이라는 주장은 진지하게 토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모든 자율적 인간은 태아가 성장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아가 법적 인간이냐는 질문을 깊이 탐구해보면, 동물을 법적 인간으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것과 거의 같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된다. 일단 태아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줄 아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다. 합리적 판단에 기초해서 자신의 의지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행위의 책임을 지는 권리와 의무의 주체라고 할 수도 없다. 흔히 태아를 "잠재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잠재적이라는 것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태아의 경우에도 인간으로 인정하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드워킨은 이렇게 질문한다.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로대 웨이드 판결에도 불구하고, 주 법률은 태아를 생명권의 주체인 법인격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물론 가능할 것이다. 기업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듯이, 심지어 나무를 법인격으로 보는 법체계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단, 법이 나무를 인간으로 규정했다면, 나무를 베는 행위를 살인으로 처벌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법은 일관성과 체계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15 마찬가지로 태아를 법적 인간으로 인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인정될 수 없다. 출생의 배경이 무엇이든 살아 있는인간을 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라고 해서 태아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다. 또한 태아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해도 임신중단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 인간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해서 그를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

다. 물론 모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태아의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 극단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은 사실상의 차원에서는 임신중단과 같을 수 있겠지만, 권리상의 차원에서는 결코 임신중단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가진 두 명의 인간이 신체적으로 결합해 있고, 둘 중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체를 살리기 위해태아를 희생하는 경우, 그리고 태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체를 희생하는 경우는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의학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법률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 조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법체계를 구축하려면, 임신중단 말고도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태아가 자연유산되었을 경우, 인간이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한 것과 동일한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난임 여성이 체외 수정을 시도할 때 다태아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선택적 유산을 시행하는데, 이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이미 착상된 태아를 유산시키는 것은 살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6 한국의 민법과 형법은 각각 출생 시점과 진통이 시작된 시점을 기준으로 태아와 인간을 구별하는데, 이런 기준도 다 바꿔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씩 검토하다보면, 태아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은 많아도, 태아를 인간으로 분류하는 법체계를 구축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왜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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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사고 싶은 책,이라고 썼다. 사놓고 안 읽는 책이 너무 많아서 쭈글쭈글. 















몸문화연구소 <자연문화와 몸> 

'몸문화연구총서'라는 이름을 달고 시리즈로 나오고 있나 보다. 이 책은 번호가 14인데 시리즈 총 12권이라고 나온다. 다른 몸 이야기 책들도 관심이 간다. 그런데 이 시리즈 책들 너무 인기 없는 것 아님? 여기에라도 좀 넣어둬야 겠다. 책은 안 읽었지만 그래도 되겠지? 다 보고 싶은데? 

















































(북플에 자꾸 책이 붙어 나와서 그어보는 밑줄. 이 선도 북플에서는 안 보임.ㅋ)




















김은정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부제 :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젠더·성의 재활과 정치

저자는 영어로 책을 썼고 미국에서 이 책으로 수상을 했다고 한다.(2017 전미여성학학회 앨리슨 피프마이어상과 2019 미국 아시아학학회 제임스 B. 팔레이즈상)  그래서 옮긴이(강진경, 강진영, 자, 자매?)가 있다. 벌써 흥미롭고. 


책소개: 

장애와 질병이 있는 몸의 현존을 부정하고 반드시 재활하고 극복해야 할 ‘치유’의 대상으로 여기며 폭력적으로 서사화해 온 한국의 역사, 정책, 제도, 문화 텍스트 등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미국 시러큐스대학교 여성/젠더학과와 장애학 프로그램 부교수 김은정의 저서로,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2017 전미여성학학회 앨리슨 피프마이어상, 2019 미국 아시아학학회 제임스 B. 팔레이즈상을 수상하며 학계와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를 다룬 소설, 영화, 신문 기사, 정책 문건, 활동가의 글 등을 텍스트 삼아 ‘치유’를 명분으로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삶을 파괴하는 ‘폭력’을 들여다보고 사회적·정치적 맥락 안에서 분석함으로써, 장애와 질병에 관한 사회적 경험과 문화적 재현의 다른 상상력을 제안한다. 「심청전」, 「노처녀가」, 「백치 아다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당신들의 천국』, <만종>, <꽃잎>, <팬지와 담쟁이>, <수취인불명>, <오아시스>, <핑크 팰리스> 등 고전에서 현대까지의 서사와 기념우표, 광고, 사진 등의 시각적 이미지를 망라해 여성주의 장애학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장애학적 문화 비평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국가주의가 장애의 문화적 재현, 관련 정책, 사회운동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저자 특유의 정교한 논리와 세심한 언어로 살필 수 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체체파리의 비법, 늠 좋아가지고! (아직 다 못 읽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단편선이라고 하니 혹!!! 이건 또 얼마나 재밌을까? 
















SF 명예의 전당 2 : 화성의 오디세이 

이 책은 주디스 메릴의 단편이 실린 단일한(ㅋ) 책이다. 주디스 메릴은 어디에 나오느냐. <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이다. 거기 나온 소설들 간단하게 목록을 작성 중인데(조금 기다리셔유) 주디스 메릴 단편을 읽어보고 싶어서 검색했더니 번역본은 온리!!! 이것밖에 없다. '오로지 엄마만이' 한 편. 종이책은 일시품절이고, 전자책으로 살까.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합리성> 

부제 :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에세이 

이거 어디서 보고 담아놨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험험. 그린비 프리즘총서 40, 이 책모양 어디서 본 듯하다 했더니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가 이 시리즈였다. 대박 어려웠는데 음. 이 책도 왠지 그럴 것같아. 비싸기도 하고.@@ 그린비 이 시리즈 책들 포스가 장난아님. 제목만 봐도 그래. 

















사라 아메드 외 <정동 이론> 

순전히 정동,이라는 걸 잘 이해 못하겠어서 마침 읽던 책들에 사라 아메드가 자꾸 보여 검색해봤다. 설명만 읽고는 뭔지 감이 안 잡히는 개념이라. 사라 아메드의 글이 있다는 이유로 보관함에 넣었으나 목차 매우 흥미롭고. 왠지 막 재밌을 거 같은데 어렵기도 하겠지? 갈무리 아프-꼼 총서 라는데, 여기 세 권 다 정동 책이다. 궁금궁금. 다 읽어보고 싶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사고 싶어 하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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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2-09-02 2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라 아메드 안 그래도 읽어야지 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마주하니 담아가겠습니다 :)

난티나무 2022-09-03 06:02   좋아요 1 | URL
비타님 전번에 <행복의 약속> 읽으신 거 봤어요. 저도 읽어보려고요, 사라 아메드.^^

얄라알라 2022-09-02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ㅎ 사라 아메드

난티나무님, 감히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저도 깜짝 놀랐어요. 포스팅 읽으며..

몸문화 연구소 하도 이름이 특이해서 예전에 뒤져본 적이 있었는데 ^^ 사라 아메드 마냥

난티나무 2022-09-03 06:05   좋아요 1 | URL
또 통했네요, 얄라알라님과~^^
이렇게 우연이 겹치면 되게 신기하고 기분 묘하죠?
그리고 관심사가 비슷해서 더 자주 일어나는 듯해요.ㅎㅎ
<자연문화와 몸>에 읽고싶어요 한 분도 아마 얄라알라님이었던 듯?^^

거리의화가 2022-09-03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은 저도 예전에 찜해둔 책이었는데 아직도... 시작을 못했네요ㅠㅠ 이런 책이 한 두권이 아니라서...ㅋㅋㅋ
몸문화연구소 시리즈는 놀랍네요! 이런 책은 관심받기 쉽지 않은 분야라 책을 얼마 찍어내지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저도 몇 권 찜해갑니다~ㅎㅎㅎ

난티나무 2022-09-03 18:46   좋아요 0 | URL
치유… 찜해두신 분들 많은 것 같더라고요. 거리의화가님도 찜!
몸시리즈 문장들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읽고 싶은 내용이던데 책소개 아래가 다 너무 깨끗…ㅎㅎㅎ 이럴 땐 한국책도서관이 매우 아쉽습니다. 도서관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단발머리 2022-09-03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라 아메드 찜하고 갑니다. 저는 처음 보는 책들이 많아서 눈이 휘둥그레 @@

난티나무 2022-09-03 18:49   좋아요 1 | URL
전 사라 아메드 한 권도 읽은 게 없어요 ㅎ 조만간!!! 엄청 인용 많이 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