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책 - 세미나 시작부터 발제문 쓰기까지, 인문학공부 함께하기
정승연 지음 / 봄날의박씨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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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성격(혹은 성향)을 한두 마디 단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닫는다. 나는 첫만남에 무척 긴장을 하고 낯을 가리지만 일단 친해지고 나면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이 말이 흘러나와 내가 나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그럴 땐 꼭 실수를 해서 밤마다 이불킥을 한다. 이런 실수를 쿨!하게 넘겨야 하는데 그걸 여적 못해서 끌어안고 산다. 때로는 엄청 소극적이면서도 또 어떤 때엔 적극적으로 보이는 때도 있다. 지금은 내 성격을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성격, 그 중 공부에 대해 아니 독서에 대한 나의 성격을 생각한다. 

그동안 책을 헛읽었다,는 생각은 작년부터 들었다. 학교를 다닐 때나 어학원을 다닐 때처럼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야만 했던 때를 제외하면 어려운 책을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돌이켜보면 드문드문이라도 무언가를 쓰기는 썼다. 읽었고 썼지만 제대로 한 적이 거의 없다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평가한다. 글자들을 뛰어넘고 속독을 하는 버릇도 이제야 얼추 고쳤다. (페미니즘 책들이 나에게 준 또다른 선물!) 조금씩 어려운 책을 접하게 되고, 읽고 난 후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써내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런 만큼 책 읽기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바람은 커지고(잘 읽어야 잘 쓸 수 있으니까), 뭔가 치열하게(이런 모호함이라니) 독서모임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다. 블로그 이웃의 글에서 이 책을 보고 도움이 될 것 같아 바로 구입했다. (공부하기는 싫어하면서 열공하는 모임을 하고 싶다는 열망(?)은 왜 생기는 것인지. 그러니까 내 독서 성향도 역시 한가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다른 탐구 대상이다. 모순이야 모순.) 


세미나,라는 단어는 친숙하다. 내가 해본 적은 없어도 들어본 적은 많다. 주로 학자들과 넓은 강당이 떠오르는 것은 드라마 때문이겠지만. 세미나가 뭐하자는 것인지도 이제야 알게 된 걸 보면 내 삶은 정말 세미나란 녀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런 웅장하고 엄숙한 대규모 세미나가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세미나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이제야 안다. 실제로 이름을 붙이지 않아 그렇지 생활 속에서 세미나 비슷한 걸 해본 경험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말이 길었다. 그러니까 나도 세미나 할 수 있다, 이 말이다. 독서모임에서도 가능하다, 이 말이다. <세미나책>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책을 제대로, 깊이 읽고 싶다고? 그럼 일단 '잘'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해. 그럴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야. 라고 쓰니 식상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구체적인 방법을 여기 다 쓸 수도 없고 그러면 스포일러 되니까 안 하겠다. 이런 말 나도 하겠네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이 다 책을 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ㅎㅎ (간혹 정말정말로 이런 책은 #@!#$#!&#^&***((^$#$%%  싶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그런 책들 다들 보신 적 있죠?) 


내가 궁금했던 혹은 잘하고 싶었던 것은 '발제문' 쓰기다. 책을 읽고 글을 쓰려면 질문을 떠올려야 하는데 그 질문이 늘 1차원적이라 조바심이 났다. 물론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는 1차원적 질문밖에 할 수 없다. 그러니 결국 늘 결론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읽어라. 많이 읽어라. 깊이있게 읽어라.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책을 통해 힌트를 얻는다. 독서와 글쓰기 책들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혼자 책을 읽기만 해서는 발전이 없거나 느리다는 것. 예전에는 혼자 읽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싶었다. 이젠 발전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마침 다정한 이웃님이 강독(형식의) 모임을 권유하셔서, 하고 있는 다른 독서모임들도 있는데, 덥석 손을 잡았다. 앞에서 성격 이야기를 했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컴퓨터 카메라를 켜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엄청난 도전이기도 하다. 음독으로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 역시 나에게 없는 경험이다. 강독 형식의 세미나가 읽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책에 나온다. 다양하게 책을 읽는 방법을 탐구하기에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또 만나게 되는 행복은 당연히 함께 온다.) 


발제문으로 시작해서 모임 이야기로 끝날 뻔 했다. 그러니까 발제문. 며칠 전에 학술 회의를 줌으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세미나책> 을 실전 영상으로 보는 것 같았다! 논문을 쓴 교수님들이 내용 발표를 하고 그 논문을 미리 읽은 또다른 교수님들이 발제문을 준비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한정된 시간 탓에 빠듯하게 진행이 되긴 했지만 발제문은 저렇게 쓰는 것이구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당장 읽은 책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나는 발제문을 쓰게 되려면 엄청나게 연습을 해야 겠구나,도 싶었다. 그러나 좌절하지는 않으련다. 누구나 처음은 있다. 책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질문하라고. 원래 세미나는 내가 깨지려고 하는 거라고. 그걸 통해 배울 수 있는 거라고. 맞는 말씀. 창피해하면 배울 수 없다. 


" '나는 잘 모르겠다'는 말이라도 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모르겠다는 말을 붙여 가면 되니까요. 더 나아가서 이해가 안 가는 이유까지 설명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무엇을, 왜, 어떻게 '모르겠다'는 진술 자체가 세미나에서는 아주 중요한 발언이 됩니다. 세미나 팀원 전체가 달라붙을 만한 '문제'를 던지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입을 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할 말을 못 찾겠어서 입을 열 수 없다면 '할 말'을 찾지 마시고, '모르겠다' 싶은 문제를 찾으시면 됩니다. 전체를 다 모르겠다 싶으면 그중에서 특히 더 모르겠는 걸 찾아야 합니다. 어떤 걸 모르는지 모르겠다 싶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알겠다 싶은 걸 찾아야 합니다. 거기가 출발점입니다." (171) 


(위 구절을 치다 보니 문득,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가 있을 때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할 말을 못 찾겠어서 정적이 흐를 때의 난감함,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일 때의 조급함, 그럴 때 있지 않나 왜. 실전에 응용해 봐야 하겠다.) 


세미나를 잘 하는 법, 질문하는 법, 준비하고 진행하는 법, 유의점 등등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말도 하는 이 책은(가만 책이 말을 하는 것인가?) 그래서 한편으로 위로가 되기도 한다. 다만 "공부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실전 응용. 모르겠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 인생 공부를 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게 또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 않나? 지금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릴 시간이 내게는 있다. 누군가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수 있다. 그리고 간혹 비문은 아닌데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드는 문장들이 있(는 듯하)다. 딱히 잘못된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별 하나를 뺀다. - 그래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 


읽고 있는 어려운 책 중 하나인 우에노 지즈코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오늘 아침에 펼쳤다. 와 어렵다.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싶다. 아무래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글자만 읽을까 까지도 생각하다가 모르는 것 질문하기, 질문에 질문을 덧붙여 나가기, <세미나책>의 이런 말들을 떠올리며 꾸역꾸역 다시 글자들을 읽었다. (책에서 권하는 '목차 쓰기'도 제까닥 해보았다.) 다음번에 다시 읽을 때 분명 나는 더 잘 이해하게 될 거야 최면을 걸며, 지금 안 되면 다음에, 다음에 안 되면 또 그 다음에. 


*사족 : 제까닥,이라고 쓰면서 맞춤법 맞나 검색했더니 '제꺼덕'의 북한어,라고 나온다. '제꺼덕'이라고 써야 하나 보다. 몰랐다.^^;; (+ '제꺼덕'과 '재까닥' 둘 다 표준어라고 한다.) 


"읽은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입으로 말할 때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마 ‘말‘로 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도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걸 깨달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의 말로 읽은 것을 다시 전달하면서 알지 못했던 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불균형은 바로 이어지는 다른 사람과의 토론 속에서 어느 정도 해소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해소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이 어디서 막혔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지요. 바로 그게 공부의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 P66

"세미나를 한다는 건 그동안 읽어 왔던 ‘책‘을 ‘텍스트‘로 바꾸는 것이고, ‘독자‘였던 자신을 ‘해석자‘로 바꾸는 겁니다. 능동적 읽기인 셈이죠." - P98

" ‘세미나‘는 결국 ‘질문‘에 ‘질문‘을 덧붙여 나가는 공부 형식입니다." - P176

"사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어떤 텍스트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이렇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지식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공부‘가 단지 아는 것을 쌓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을 늘려 가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말하기가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느는 것도 분명히 있는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훨씬 정교해진다는 점입니다. 당연합니다. 세미나를 통해서 내 말의 한계를 지속적으로 실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말이 닿을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점점 더 잘 알게 됩니다. 그걸 보면 모든 인문학 공부는 결국 자신에 대한 공부로 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더 많이, 더 자주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자신의 무지가 매우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 P178

"그렇게 보면 누가 나보다 더 잘 알고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점에서 그의 ‘해석‘이 좀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뿐이니까요. 공부는 보다 넓고 긴 지평에서 보면 그와 나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물론 그 시점에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요.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모두 ‘공부‘ 앞에 평등합니다. 저마다 조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에는 우리 모두, 역사상의 유명한 사상가, 철학자들까지 포함한 우리 모두, 결국에는 이 세계와 이 세계 안에서의 삶을 배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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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27 02: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난티님!! 나도 난티님하고 같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 되었지만,, 흑흑
근데요, 사람의 성격을 몇 마디로 말하기 힘든 건 사실인데, 지금까지 양파처럼 하나하나 보게 되는 난티님의 성격(?)은 제게 아주 가깝게 느껴져요. 좋아요. 하핫(저처럼 말 못하고 일차원적 적인 사람 또 못 보셨죠???😅😅😅)

난티나무 2021-10-27 03:59   좋아요 2 | URL
멋진 라로님이 멋지다고 말씀해주시니 저도 끝갈 데 없이 좋은 이 마음~ 샬랄랑~~~~~ㅎㅎㅎㅎ
양파 같다고 하시니 (양파 좋아요!) 다 까고 아무것도 안 남지 않도록 발 밑에 흙을 잘 깔아두어야 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헤헷~

다락방 2021-10-27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학창시절 공부를 되게 안하고 못했거든요. 공부 잘하는 사람 너무 멋져! 하고 동경하였지만 제가 공부를 하진 않았어요. 저는 왜그렇게 공부를 안한건지.. 그시절 어른들이 공부도 때가 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라고 말할 때 귓등으로도 안들었는데, 아아, 저는 몰랐습니다. 제가 삼십대 중반이 되어 페미니즘 책 파고들고 강연 찾아 들으러 다닐지는요. 그렇게 열심히 읽고 듣고 다니면서 와, 학교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내 학력이 바뀌었을텐데...라는 생각을 수천번 했어요. 더불어, 공부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지 않나 싶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사람이 인생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총량이 있는데 제 경우엔 10대 20대에 그걸 안해가지고 30대부터 미친듯이 쏟아붓게 된거죠. 어쨌든 제 삶에서 공부의 양은 주어져 있으니까요.

저는 난티나무 님의 어린시절도 학창시절도 알지 못하고, 사실 이렇게 알라딘에서 뵙는게 전부라 아는 게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있을텐데, 지금 제가 이렇게 보는 난티나무 님은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공부하실 것 같아요. 제 경우가 공부총량의 법칙이 작용한 것이라면 난티나무 님의 경우는 공부에 재미를 붙이신 것 같달까요.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재미를 붙이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하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계속 읽고 쓰고 다양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난티나무 님을 이자리에서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난티나무 2021-10-27 18:20   좋아요 0 | URL
우왓 페이퍼급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공부를 잘 하고 싶었지만 잘 하지 못했습니다. 켁. 방법을 몰랐어요. 지금도 모르긴 하지만. 필요성은 완전 느끼는데 말이죠, 문제는 제가 공부란 걸 하기 싫어한다는...ㅠㅠ 책은 계속 읽을 것 같은데 그 안에서 뻗어나가는 여러 가지의 철학이나 정치학이나 역사나 기타등등 알아야 하는 것들 있잖아요? 그런 공부를 하게 될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락방님 댓글을 읽으면서 진짜 내가 공부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흉내를 내고 싶어하는 건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보부아르님도 ‘해방‘ 부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던데 이거 내 이야기 아닌가 싶어 찔리기도 했고요. 좀더 탐구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하하.
지금이 공부할 때다, 라는 말을 저도 제 아이들에게 하는데... 하아... 그걸 모르는 게 10~20대인 걸까요? 느무 안 하는 거죠.ㅠㅠ 어쩌면 그 나이는 공부하기에는 너무 어린 게 아닐까요? 30대 들어서야 뭔가 공부라는 걸 느끼면서 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런 생각이 막 드네요.ㅎㅎㅎ 뭐 지금의 나도 하기 싫은 공부가 아이들에게는 오죽하겠습니까. ^^;;;;;;;

수이 2021-10-2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냥 찰싹 언니 곁에 달라붙어서 놀래요.

난티나무 2021-10-27 18:22   좋아요 0 | URL
같이 ‘놀자‘! ㅋㅋㅋ 놀면서 공부하는 방법 좀 연구해 봅시다.ㅎㅎㅎㅎㅎ
 
[eBook]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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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용 요약 없는 감상문.


최은영 소설만 읽으면 우는데 어김없이 이번 소설도 그렇다. 시작은 8% 지점, 할머니와의 재회 장면이다. 딱히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무덤덤한 만남, 그 무덤덤함 속에 깔린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장편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넘어가는 페이지와 함께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린다. 이른 아침 일어나지 않은 채 책을 읽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다. 눈물을 닦다가 페이지를 넘기고 눈물을 흘리고 손으로 닦고, 페이지를 넘기고. 그렇게 끝까지. 


어째서 이 여자들은 이렇게 정이 넘쳐 흘러서. 어째서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옛날에도 지금에도. 남자들이 없는 세상, 존재하지만 다른 세상에 서 있는 남자들. 고되고 슬픈 삶을 사는 여자들. 풀어내지 못한 감정들. 서로를 알아서, 알아봐서, 고통스럽지만 서로를 끌어안는 여자들.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그러나 그런 연대도 실은 기만이 어느 정도 깔린 것은 아닌가, 문득. 혈연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 관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납득해보려고 발버둥친 결과는 아닌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그 거리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혹은 거리 따위 개나 줘버려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여자는 여자가, 여자를 여자가, 다독이고 쓸어주고 안아주고 그래야 하는지. 그걸 제대로 못하는 여자는 또 어찌해야 하는지. 어째서 남자는 늘 없는지. 없어도 괜찮은지. 차라리 없는 게 나은지. 


엄마의 엄마의 엄마... 요즘 읽는 페미니즘 책들에도 그렇고 연달아 읽은 소설들에도 그렇고 엄마, 딸, 할머니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그 사이에는 죽음이 있다. 가끔 생각한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보고 싶다고,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있을 때 잘하라고 하는데. 나는, 나도 그런 말 하게 될까. 엄마 보고 싶다고 울까. 솔직히 지금으로선 장담하지 못하겠다. 때론 나라는 인간이 한없이 냉정하구나 싶기도 하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후회가 되는 것은, 엄마나 할머니와 나눈 대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은 기억의 조작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을 지워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신기하리만치 남아있는 기억이 없다. 어쨌든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고 기억한다. 할머니는 너무 먼 곳에 살았고 이젠 세상에 없다. 엄마도 멀리 살았고 지금도 멀리 산다. 이젠 만나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야지. 어릴 땐 어땠는지, 할머니는 어땠는지, 결혼하면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어릴 땐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엄마가 기억하는 엄마를 이야기해 달라고 해야지. 그러면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나를 얼마쯤은 건져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이기적인 딸의 속마음. 엄마도 엄마를 얼마간은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화. 다만 감정적으로 싸우지 말 것. 더이상의 상처는 반사. 


100자평에 썼지만 마지막에 나에게 떠오른 말은 "우리들의 밝은 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밤은 밝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 

(밑줄긋기를 앞부분밖에 하지 못했다. 빌린 책은 이미 반납했다. 뒷부분은 이야기에 빠져 읽었나 보다.) 

"난 혼자가 편해."
내가 엄마에게 해줄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엄마가 온전히 내 편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리라는 희망 같은 것을 나는 포기했다. 그와 이혼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입은 상처보다도 이혼당하고 혼자가 될 사위를 신경썼다.
‘나는 너는 걱정이 안 돼. 그런데 그 약한 애가 나중에 자살이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7%

"아빠는 너 이혼한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하더라."
엄마가 무심하게 말했다.
"자기 딸이 쪽팔리는가 보지."
"그래도 너희 아빠 같은 사람이 없어."
"그래?"
"아무리 그래도 아빠는 아빠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 이혼을 결심한 내게 아빠가 한 말이었다. 나보다 사위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아빠의 모습은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다. 아빠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기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8%

"어떤 분이셨어요?"
"누구? 우리 엄마?"
"네."
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에 내내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냥……"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봤다. "보고 싶지."
할머니는 내가 마치 할머니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입가에 힘을 줘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 11%

그 말에 군인 둘이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남편이 없는 여자아이를 원하는 거였다. 그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도 군인들이 혼인하지 않은 여자아이들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부모들은 고작 아홉 살, 열 살밖에 안 된 딸들을 흔인시켰다. 그게 딸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에게 ‘주인‘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 13%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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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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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시기를 여자들이 비틀비틀 건너간다. 사람마다 너무 다 다른 그들 개인의 역사는 차츰 변한다. 차오르는 고름을 짜내며, 깊은 상처를 한 땀씩 느리게 꿰매가며, 그렇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함께 함‘의 공간에 선다. 그러므로 우리의 밤은,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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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투쟁 -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부터 삶의 보호까지 아우또노미아총서 71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음, 이영주.김현지 옮김 / 갈무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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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부터 삶의 보호까지'이다. 

가사노동은 지금까지 수없이 논의되어왔고 그런 논의들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도 단어만 듣고도 어 그거, 하게 되었지만, 과연 우리는 가사노동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으며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어떤 의미인지, 남성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 실상과 본질을 충분히 구체적으로 말했는지,를 묻게 된다. 매번 여성의 '집안일'과 남성의 '바깥일'이 다르지 않고 남자도 똑같이 힘들다는 말을 들을 때, 그 다름을 어떻게 설명하고 표현해야 할 지 아득하기만 하다. 이 책의 한 구절을 옆지기에게 톡으로 보냈다가 본의 아니게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가사노동에 관한 구절)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문장 사이 거리를 온몸으로 느껴버렸다. 하나하나의 문장을 가지고 오래 이야기해야 했다. 이 거리는 평소 내가 가사노동의 분배와 재정립에 대해 생각할 때 뭔가 석연치 않다고 느꼈던 지점이기도 한 것 같다. (이전 페이퍼에서 나의 부족함이라고 썼었다. 일치한다.)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러니까 내가 아직 납득하지 못했거나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혼 계약의 '사랑과 관계된'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는, 가사노동을 이루는, 어떤 임금도 주어지지 않는 엄청나게 긴 노동 시간과 끝없는 과업들을 설명할 수 없다. - p.483 후주 부분의 문장.) 명쾌하게 짚어주는 책을 읽고 싶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혁명의 영점>을 다음주쯤 받을 것 같고 우에노 지즈코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을 예정인데 이 두 권이 좀 도움이 될지. (쉽다고 생각했던 저자의 글은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의 글은 처음이 아닌가 싶고, 이탈리아 페미니즘 운동 이야기도 처음이다. 그러고 보면 이탈리아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우리 나라 역사도 모르는데 오죽하랴. 반성반성. 미국, 영국, 프랑스 아닌 나라의 페미니즘 이야기를 읽으니 새로웠다고 해야 할까. 투쟁이 있었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투쟁이 승리한 결과를 보고 듣는 게 중요하다는 달라 코스따의 말은 옳다. 돌봄이나 재생산과 이민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눈이 번쩍 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중반부터 계속 이어지는 토지 문제, 환경 문제가 크게 와닿았다. 며칠 전 본 다큐멘터리가 어쩔 수 없이 계속 떠올랐다. 이미 몇십 년 전부터 우려했던 환경파괴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자연재해라 불리는 가뭄, 홍수, 산불, 지진 등의 횟수는 상상 이상으로 늘었고 각종 재해의 소식이 연이어 뉴스를 타고 흘러넘친다. 자연재해가 아니라 이제는 인재다. 지구의 온도는 점점 올라가서 한쪽에서는 땅이 마르고 한쪽에서는 땅이 잠긴다. 꺼지지 않는 불이 산들을 집들을 사람들을 집어삼킨다. 따뜻해진 바다에서는 이미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해조류나 생선을 먹을 수 없게 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 출산 후 미역국을 끓여먹는 것이 당연한 우리 나라에서 미역이 사라진다면? 실제로 바다에서는 감태와 같은 해조류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성게를 먹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건 어떤 것 한두 가지를 먹고 못 먹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저자의 말처럼, 농사 지을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바다가 죽는다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소름이 돋았다. 개인적인 노력이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전세계의 협동이 필요한 일이고 거시적 정책이 필요한 일이다. 내 집은 괜찮다고, 내 나라는 괜찮다고, 어떻게 안심할 것인가? 환경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 어째서 욕심은 환경을 외면하는가.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글들은 통렬하면서, 지금의 현실에 고개를 떨구게 한다.  


<페미니즘의 투쟁>은 페미니즘 책이다. 읽은 후에 왜 환경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페미니즘이 연결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겁이 많고 소심한 개인인 나는 이 거대하고 암울한 환경파괴문제(와 여기에 얽힌 수많은 갖가지 문제들 역시)에 어떻게 맞설 수 있는지, 그럴 흉내나 낼 수 있을지, 방법을 알 수 없다. 거대한 문제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 가능할지, 어떻게 가능할지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기껏해야 거리 시위에 나갈 준비를 하'(p.41)는 사람으로 살면 되는가. 내가 만드는 투쟁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드는 투쟁의 마당에 발만 담그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 것인가. 핑계 같지만 아직 나도 나를 제대로 모른다고 말해 두자. 



* KBS 다큐인사이트에서 최근에 방영한 [붉은 지구] 4부작 영상을 첨부한다. 유튜브에서 '붉은 지구'로 검색해서 볼 수 있다. 








발전과 저발전을 한 단면으로 하는 자본주의 발전을 전체적으로 설펴보면, 우리가 자본주의 발전의 대가를 계속 지불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발전의 대가는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 P197

선진국 혹은 조금 덜 선진화된 국가의 시민들은 타인을 빈곤에 빠뜨리고 뿌리째 뽑아 쫓아내는 이런 유형의 사업에 자기도 모르게 돈을 댄다. 더욱이 그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기부금은 자신과 타인의 목에 부채라는 훨씬 더 무거운 맷돌을 매단다. - P238

그래서 나는 투쟁은 물론이고 투쟁이 거둔 승리를 사람들이 잘 아는 게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투쟁이 거둔 승리를 잘 알면, 자본은 전능하다는 자명해 보이는 사실이 힘을 잃고, 곧 닥쳐올 가장 높은 수준의 발전을 덜 신뢰하게 된다. - P239

살 수 있는 것이 독극물뿐이라면 임금이 무슨 소용인가? - P244

식량은 기본적인 인권이다. 왜냐하면 식량은 모든 권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권리, 즉 다른 모든 권리를 좌우하는 생명권의 토대이기 떄문이다. (중략) 요컨대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살지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즉 살아남기 위한 해결책을 먼저 찾아내지 않고서는, 그 밖에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모두 생존 문제에 종속된다. - P378

아주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어떤 여성도 임금이 없는 재생산 노동에 대항하는 투쟁을 가족의 안녕을 해치는 데까지 끌고 가진 않는다. (중략) 여성들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기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지점까지 가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이는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투쟁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하는 한계이다. (중략) 따라서 삶과 노동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조건을 달성하려면, 사안을 다른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말하자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모든 거짓된 해결책을 거부하겠다는 윤리적 다짐을 한 주체들이 협력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 P398

청색 혁명이란 새우 양식이 주를 이루는 산업화된 수산 양식업을 말한다. 이 양식 유형은 인도뿐만 아니라 수많은 열대 국가에 자리 잡았다. 소비자들이 주로 선진국에 거주하는데도 이 양식 유형이 원칙적으로 개발도상국에 자리 잡은 이유는, 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산업화된 새우 양식은 ‘먹튀‘ 산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보통 그 개발 지역을 바로 벗어나야 할 정도로 생태계가 황폐해지거나, 양식에 타격을 주는 전염병의 확산 혹은 시장 수요의 가변적인 속성 때문에 도중에 그만두고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 P425

현재 이탈리아는 토양의 유기물 함량이 1% 미만으로, <유럽환경청>은 이탈리아를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으로 분류했다. - P445

미국, 아르헨티나, 캐나다에 이어 중국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유전자 변형 식품(주로 형질전환 쌀)을 많이 생산하는 국가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조제 보베는 "유전자 변형 식품 생산은 소농 2억5천만을 없애고 싶어 하는 중국 정부의 현행 논리와 일치한다"며, "하지만 소농들을 어디로 보내야 하나? 유전자 변형 식품 생산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고 말한다. (- 후주) -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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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28 2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300 쪽 남짓 읽고 있는데 토지 문제에 열변을 토하는 마리아로사에 고개 끄덕이고 있어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결국 거기가 아닌가 싶고요. 이 리뷰 참 좋아요, 난티나무 님. 감정적 동요도 얼마나 컸을까 짐작해 보게 되네요.

난티나무 2021-09-28 23:09   좋아요 0 | URL
감상에 불과한 글에 좋다고 해주시는 다락방님! 이 책을 읽으며 건진 큰 물음이 하나 있어 보람찬! 읽기였습니다!^^
 
[eBook] 엄마에 대하여
한정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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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을까 궁금했다. 엄마에 대하여. 엄마라는 존재와 딸인 나의 존재. 단순한 줄 알았으나 한없이 복잡하고, 비슷한 줄 알았으나 끝없이 다른, 딸들과 엄마들의 관계, 연결과 그 사이의 괴리. 실려있는 모든 단편들에서 이 존재들 각각이 스스로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본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 다른 엄마라는 존재를 본다. 그래서 좋았다. 사회가 엄마라는 존재에게 요구하는 틀에 박힌 정형성이 모든 엄마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 중의 착각이다. 거기에 나를 억지로 끼워맞추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들은 모두, 가짜다. 


한정현 [결혼식 멤버]

고정관념은 가라. 역사와 사회를 엮어서, 계층과 차별을 묶어서, 그렇게 하나하나 건드리는 게 좋았다. 당당해서 좋았다. 대체 누구에게 미안해해야 한단 말인가. '나와 결혼한다'는 말이 훅 다가왔다. 우뚝 서는 느낌. 그리고 슬퍼졌다. 내 결혼식에도 동생의 결혼식에도 올 수 없었던 나의 엄마가 떠올라서. 


*** 

"오, 굉장히 웃기는 남자들이군요.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은 충분히 멋있어요, 누구하고도 사랑할 수 있을 만큼이요."
내 말에 여자분이 조금은 웃었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두 분. 나, 사실은 내일 나랑 결혼해요! 김수현 드라마 보셨나요? 배종옥이 맡은 첫째 딸처럼 되고 싶어요. 내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사람이요!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사는 그 첫째 딸 말이에요!"
주인 할머니는 "아이고 그거 다 드라마지, 현실이냐 어디. 여자가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너는 입만 다물면 완벽하다고 면박 주는 게 남자 놈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래, 남자보단 너랑 결혼하는 게 낫다" 하시면서주말 연속극으로 채널을 맞춰주더군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대중문화를 연구했던 것도, 그러니까 가령 내가 덩리쥔이나 김치켓 시스터즈, 모리타 도지 같은 사람을 좋아했던 것도 여성으로서의 당당한 모습에 마음이 끌린 게 아니었을까 하는 것 말이에요. 그런 생각 끝에는 그 여성분의 자신과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는 펑리수를 결혼식 선물로 건네달라 하였어요. 마음으로는 항상 그 여자분의 결혼식 멤버이니까요..
이걸 왜 말해주고 싶었을까요. 글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국가와 가족은 참 비슷합니다. 한 명의 권력자와 그에 순응해야만 하는 피지배자. 그리고 그 구조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사람들이 겪는 따가운 시선과 불이익들과 같은 것 말이지요. 그런가 하면 국적과 결혼도 엇비슷하지요. 국적은 나를 증명하는 가장 명백한 방법이고 누군가에겐 결혼도 사랑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대만인이자 일본인이며 한국에서 오래 살았던 나의 간극을, 당신을 두고 떠나간 나의 어떤 마음을 절대 다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이 말이 나를 이해해달란 말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웨딩 세리머니에 오지 않아도 당연히 좋습니다. 다만…… 나는 말이에요. 이 메일을 드디어 쓰기로 결심한 순간들엔 어쩌면 내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었어요. 뭐랄까요. 귀하와 내가 생물학적이 아니더라도, 국적이 아니더라도, 국가가 정한 가족 관계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끝없이 이어지고 반복되는 어떤 틈새에서 연결되고 있다고요. 이 메일은 결국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조우리 [그때도 지금도 우리는] 

동성애에 기겁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 딸의 결정과 신념을 무시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 그것은 결국 경험이 해낸 일이 아닐까.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느끼는, 경험. 그러나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어떤 자식이라 해도, 성적 성향과 상관없이 그 삶의 많은 부분과 전체가 걱정인 것은 나도 다르지 않다. 대범해지고 싶다. 



김이설 [긴 하루] 

유순 언니, 장씨랑 헤어져요. 언니 스스로와 결혼해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함 아닐까요. 그 솔직함으로 소통하는 것 아닐까요.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불안이다. 할머니-엄마-딸로 이어지는 기구함들. 불안과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인 유순언니,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아직은 홀로 서지 못하는 듯해 아쉬우면서도, 삶이 노동에 짓눌린다면,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다면, 그 땐 나고 너고 없이 그저 노동에만 목매달게 되지 않나, 그럴 땐 어떡하나,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순 언니, 이제 그만 스스로와 결혼해요. 딸이 저를 갈아넣으며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자기는 왜 전부 갈아넣으며 살아요. 이제 그만. 



최정나 [놓친 여자] 

작가의 말처럼 '과했다'. 그러나 정말 과했을까.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제대로'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세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큰 뚝심이 필요한지. 아이들의 '연애' 앞에서 부모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요즘 가볍게 읽을 수만은 없었다. '놓친' 여자가 사라진 건 어떤 의미일까, 잘 모르겠다. 



한유주 [우리 만남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훑으며 아 뭐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열린 결말, 특히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소설 어디선가 읽은 것 같아. 



차현지 [핑거 세이프티] 

언제까지 엄마를 탓해야 할까. 엄마도 사람이고 힘들었고 모든 것을 견뎌야 했음을 알게 되었어도 원망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쩔 수 있었을까? 어째서 '가정폭력'은 이처럼 흔한가. 남의 집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은가. 일부의 경우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비슷하게 일어난다면 그건 가정사가 아니라 사회문제라고 했지 않나. 이 '사회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토론해야 하는지를 생각케 한다.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보여주면서, 아 또야 같은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

"어떤 사건은 영영 쓰지 못할 것 같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수천 번 빌었던 일들. 상태를 기록한다고 해서 증상이 해결될 일은 없을 터. 그리고 나는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쓰지 않는다. 쓴다고 해서 사건으로부터 벗어난 적도, 벗어날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엄마에 대해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건 축복이다."

(작가 노트 중에서) 

***


나도 엄마에 대해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축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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