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에도 다 이유가 있다 한겨레 동시나무 4
정연철 지음, 안은진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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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쏟아지는 업무와 불쑥불쑥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과 마주하면서 점점 지쳐가던 시기였다. <시인의 말>에 나온 한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동시는 마음을 말갛게 한다.(p4)’. 씹을수록 후텁지근했던 마음이 보송보송해졌다.

시인을 따라 학교에도 가보고, 아이가 되어보고, 아이의 부모님이, 할머니가 되어보았다. 산수유 꽃을 새삼 바라보고, 무릎을 굽혀 작은 봄꽃에 눈길을 주고, 인간이 자연에게 하는 무모한 행위에 화를 내기도 하고, 의인화된 생물들의 정체성을 생각했다. 오래된 더께처럼 밑바닥에 눌러 붙은 마음을 조금씩 긁어냈다.

 

<1, 빵점에도 다 이유가 있다>에서는 학교에서 겪는 일상과 엄마, 아빠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꼴찌라도 주인공이죠.(p33, <주인공>)’를 읽고는 공부는 꼴찌라도 마음만은 일등인 한 아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서른세 가지 아이들 나물 넣고(p34, <비빔반>)’를 읽다가 수업에 들어가니 한 명 한 명의 얼굴에 눈길이 머문다. ‘그렇지, 이 중에서 같은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없지.’ 라 생각하니 따뜻한 곳으로 들고 온 풍선처럼 마음이 쫘악 펴진다. 다름을 틀림이라 여기며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을 향해 화낸 적은 없는지 되돌아본다.

<2, 향기는 덤으로 드립니다>에는 꽃과 식물 등 주로 자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송이송이 / 노란 폭죽이다(p40, <산수유꽃>)’를 읽고 적절한 비유라며 감탄한다. 노란 산수유 꽃에서 고고한 아름다움이 풍긴다는 것은 오래전 디카를 구입하고 접사를 찍으러 돌아다닐 때 알게 된 사실이다. 백제시대 왕관을 연상시킨다 생각한 적은 있지만, 주렁주렁 매달린 자그마한 술에서 불꽃을 떠올리다니! 시인의 통찰력이 놀랍다. ‘땅은 / 당연히 / 모두에게 / 무상급식한다(p42, <제비꽃>)’를 읽고는 세상에 존재하는 공평한 것들을 생각한다. 공기, 하늘, 햇빛... 무상으로 제공되는 자연을 마음대로 가르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인간들의 욕심을 생각한다.

<3, 개구리밥이 개명 신청을 했다>는 주변의 동식물을 의인화하며 인간이 자연에게 하는 행위를 곰곰 생각하게 한다. 달팽이를 밟지 않으려 영광의 상처를 얻은 아이의 고운 심성(p55)에서부터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p62) 원형탈모가 생긴 동네 뒷산(p63)에 이르기까지. 성형수술을 당하는 학교 화단의 향나무(p66)를 보니, 겨울이면 줄줄이 매달린 뜨거운 전구로 그물 옷을 입게 되는 거리의 나무들이 떠오른다.

<4, 할머니는 좋겠네>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을 그린다. 손주들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배어나는 어르신들의 마음을 친숙하고 투박한 구어체로 맛깔스럽게 묘사한다.

 

출장을 갔다가 같이 근무하던 동료를 거의 10년 만에 만났다. 일이 끝나고 주차장으로 같이 걸어가며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부족하지만 가끔 시도 써요.’ 내가 말하자, ‘어멋! 저 시 완전 좋아해요!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은행잎이 태평가도 없이 부채춤을 춘다는 시도 썼잖아요.’ 무척 반가워한다. 우리 과학샘 맞냐며 서로 바라보며 웃는다. 10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어색한 간극이 라는 한 마디로 훅 날아가 버려  ‘1+1=1(p67)’이 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자주 연락하기로 했다. 시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면 충분했다.

 

시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말갛게 보일까. ‘온 마을 온통 하얗게 팩을하고, ‘개밥 그릇도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함박눈>(p52)처럼, 시는, 시인은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이리라. 마음을 세수한 듯했다. 보송보송한 마음의 민낯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간질거리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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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식량 - 인류는 자연환경의 위기에 맞서 어떻게 번성하는가
루스 디프리스 지음, 정서진 옮김 / 눌와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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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대의 거대한 포식자였다던 아노말로카리스’. 발음조차 어색한 이 생물의 존재를 밝히는 과정을 보여주던 다큐멘터리 <생명, 그 영원한 신비>는 교과서 속 세상을 과거의 전부로 받아들이던 내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고생물학은 신비한 발견에 앞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수많은 시간들을 감내해야하는 인내심과의 싸움이었다. 다르구나, 참 많이 다르구나. 화석이란, 화석을 발굴한다는 건 오래된 책장 사이에 눌려있던 마른 나뭇잎 한 장 가뿐히 들어 올리는 일이 아니었다. 단단한 암석을 도자기 다루듯 숨죽이며 다루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광활한 지대에 분포한 버제스 셰일을 페이스트리처럼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일에는 고도의 섬세함이 필요했다.

그 때 알았다. 교과서를 휘리릭 넘기며 휴지 한 장의 무게감으로 무심코 지나치던, 지루하게만 다가오던 수많은 문장들이 얼마나 묵직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가를. 수백, 수천, 어쩌면 수억 년 걸렸을 지도 모를 시간과 누군가의 일생이 담겼을 지도 모를 문장들을 얼마나 가볍게 지나왔던가, 나는. 교과서란 이런 의미에서 얼마나 무거운 책인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어렴풋이 느꼈던 걸까. 한동안 물컹한 느낌을 묵직하게 안고 있었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보통의 인문학 서적은 지식을 전하거나 깊은 사유를 하게 하거나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뜨이게 한다. 소설도 아닌 책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건만 감동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그 이상의 무게감이 마음에 얹혀졌다. The Big Ratchet이라는 책 앞에서 나는 먼지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한쪽으로 굴러가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의식이 휘말려 들어가 지구의 탄생으로부터 지금까지 펼쳐지는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체험하고 온 듯했다. 한동안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20여 년, 듣도 보도 못한 고생물 화석을 탐구했던 끈질기고도 지난한 역사를 다시 마주한 듯 기시감을 느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구름 사이사이로 내려다보았던 지표면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다. 눈금실린더의 최소 눈금보다도 얇은 두께로 꼬불거리던 강물의 줄기, 나뭇잎 크기만 하던 논, 드문드문 보이던 갈색의 땅. 평면으로 이루어진 그림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별 것 아닌 일로 화내고 울고 한숨 짓던 시간들이 구름처럼 흩어졌다. 저 아래에서 아등바등 살던 내 모습이 후 불면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졌다. 넓은 시야로 바라보는 지상의 풍경은 자질구레한 모습들은 감추어버리고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훅 다가와 지그시 내 마음을 눌렀다.

자연환경의 위기에 맞서 끊임없이 번성해온 인류의 문명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을 연상시킨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문명은 옳지도 그르지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다만 이 지구상에서 진화해가는 생명의 일부이다.(p18)’ 식량을 얻기 위한 인류 문명의 역사를 거시적인 안목으로 기록한 책이다. 10장으로 구성된 이야기 안에는 지질시대, 대기와 물의 순환, 별의 진화, 물질의 순환, 지구와 생명의 탄생, 우주와 행성, 자기 조절 시스템, 신체 구조의 변화, 멘델의 유전법칙, 다윈의 자연선택설과 진화, 질소고정, 인의 순환, 부영양화, DNA의 구조 등 지구과학, 화학, 생물학 분야의 학문적 지식이 총동원되어있다. 중학교 과학을 가르치면서 각기 다른 학년과 다른 단원에서 소개하던 내용들이 인류 문명과 식량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줄줄이 꿰어지는 모습은 놀라움 이상이었다. <지식e>를 떠올리게 하는 객관적인 데이터의 끝에는 인류의 노력에 대한 경외심이 느낌표로 매달렸다.

 

뭘 좀 제대로 알고 가르쳤어야 했다. 내 지식의 깊이가 습자지만큼 얕았다는 사실이 어찌나 선명하게 다가오던지. 교과서를 통해 가르쳐왔던 과학적인 지식이 불쑥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다.

광물의 굳기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는 10종의 표준 광물 모스굳기계. 26년째 교과서를 통해 해당 학년을 가르치면서 5번째 광물인 인회석이 무덤가에서 도깨비불로 발견된다는 그 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인이 함유되어있어 인...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변명처럼 말하자면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교사용 지도서에도 나온 적이 없고, 한 번도 그 이름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던 거다.

태양에너지가 지구상 물질 순환의 근원이란다.’ 아마 백 번도 넘게 내 입에서 나왔을 거다. 태양 에너지. 초등학생들도 알 법한, 과학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다. 시험 문제에도 난이도 하의 문제로 출제하곤 했는데.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는 있었을까 싶다. ‘인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태양에너지의 부족이 아니다. 태양에너지를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하는 것이 문제다.(p111)’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태양에너지를 흡수하는 과정을 가리켜 저자는 먹을 수 있는 형태로의 전환이라고 했다. 전환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이제껏 태양 에너지를 먹어왔다는 생각을 하니 느낌이 묘하다.

 

음식도 문화라지만 이 둘의 인과적인 관계를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잉여 식량이 공급되면서 식량 생산이 아닌 다른 활동에 종사하게 된 인간들에 의해 문명이 발달한다. 식량이 문명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우연히 발견된 은 음식과 문화에 혁명적인 불을 지핀다. 날 음식에서 익힌 음식으로 전환되면서 인간의 창의성은 다양한 문명으로 발현된다. 환경의 변화는 인체의 구조 중 학습에 관여하는 뇌의 크기에 변화를 초래하고 이에 새로운 사냥 방식이 발달하면서 문화는 더욱 다양해진다. ‘문화가 유전자를 변형시키고, 유전자가 문화를 변형시킨다.(p75)’

농사를 짓고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닥쳐온 난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은 또 얼마나 놀라운가. 질소와 인을 붙들려는 인간의 치열한 노력은 감탄의 연속이다. 학창 시절에도 배운 비료의 3요소를 이루는 물질들. 왜 하필 그 물질들로 비료를 만들어야 했을까 의심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많은 문명들이 만들어진 근본적인 배경을 알려준다. 뭐든 쉽게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동물의 배설물과 암석 등 자연에서 이 물질들을 찾아내고, 이용 방법을 고민하고, 가축의 힘을 빌리고, 화학적인 거름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종자를 도입하며 농업혁명을 이루어낸다.

식량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시장 문제와 정치 문제도 발생한다. 저장 식량을 이용하는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하던 이들, 식량 생산을 위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아프리카인들, 녹색 혁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민들 이야기를 읽으며 풍요의 시대, 비만의 시대로 불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지구상의 이름 모를 이들을 떠올린다.

 

왜 하필 옥수수가 가축의 사료로 많이 쓰이는가. 우리는 밥을 주식으로 하고 서양은 밀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전과 환경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들의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다.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다윈이 사촌과 결혼을 했기에 근친교배의 단점을 발견하고 걱정을 했다는 일화, 8년 동안 완두콩으로 실험하며 유전법칙을 알아낸 멘델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유전과 진화에 관한 생물학적인 과학사가 등장한다. 유전자 변형 기술과 화학 비료와 화석 연료를 동력으로 하는 기계의 도입으로 수확량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증대된다. 저자는 옥수수, , 대두 등 작물의 번식 방법을 유전학을 기초로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증대된 수확물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메뚜기 떼와 각종 곤충들과의 전쟁은 천연적인 살충제를 넘어 DDT를 탄생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물질과의 전쟁을 하는 중이다. 비만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지방과 설탕과의 전쟁과 더불어.

고대에 동물의 힘을 빌리던 것에서 현대식 기계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조작하는 새로운 방법 중에 시행착오 없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p278~279)’ 당시에는 획기적인 최선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미련하게 왜 그랬을까 여겨지던 사건들이 어떻게든 조금씩 개선되고 해결되는 과정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창의성에서 비롯된 거대한 변화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것이다.(p286)’ 수많은 한계에 부딪혔지만, 그만큼의 해결책을 만들어낸 인간들이 수천 년 동안 축적한 지식과 묵직한 문화들은 암울해 보이는 미래를 향해 희망의 빛을 비추는 듯하다.

 

노트북을 켤 때마다 종종 바뀌는 화면은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오늘은 북극 주변에서 나타난다는 오로라 사진이다. 보라와 청색이 그라데이션 되는 어울림은 사진이 맞을까 싶도록 현실감을 잊게 만든다. 이 책의 표지를 바라본다. 꼭 컴퓨터의 바탕 화면 같다. 간혹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다. 순환의 고리가 끊어져 수시로 나타나는 이상 기후나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빙, 환경오염이 야기하는 섬뜩한 풍경들을 접하면 그 느낌은 더욱 강해진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표지에 나와 있는 풍경들을 컴퓨터 바탕화면에서만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완벽하게 객관적인 글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극단적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저자의 시각이 마음에 든다.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이 다른 방식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p12)’라 말하는 그녀의 사유는 비관적이지도 않고 낙관적이지도 않다. 인류의 발자취를 덤덤히 따라가며 거대한 패턴을 발견하고 묵묵히 그 사실을 기록한다. 지금은 성장하는 시기일까? 위기의 시기일까? 아니면 전환점이 나타나는 시기일까? 판단은 고스란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어느 시점에 있건 저자의 안목을 믿어보려 한다. 톱니바퀴로 돌아가다 성장의 도끼가 내리찍어도 중심축이 바뀌어 다시 천천히 돌아가며 지나온 인류의 12,000년을 믿어보고 싶다.

 

 

*오타

p57, 4째줄 : 평형동물 편형~

p65, 9째줄 : 어울러져 어우러져

p184, 밑에서 6째줄 : 우성과 열성의 법칙 멘델의 논문에는 우성열성의 개념은 있으나 이를 법칙화하지 않았기에 개정된 교육과정에는 우열의 법칙이라는 용어가 삭제되었고, ‘우성과 열성이라 표현된 제목이 교과서에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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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6 1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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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6 1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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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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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펼쳐든 책이다. 희미한 아스팔트 색의 겉표지, 작은 창문으로 남산이 바라다 보이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겉모습이었다. 그냥 좋았다고 표현하기에는 나의 언어가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골목길을 누비고 다닌 기분. 날이 저물도록 볼거리가 풍성한 벼룩시장을 다녀오면 이런 느낌이 들까. 서울에 가서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구경할 때에도 이랬다. 내 마음에 작은 구멍이 뚫려 그 안으로 따뜻하고 달콤한 공기가 불어 들어와 풍성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런 세상도 존재하는구나, 이런 시각도 있구나.

 

20여 년 전쯤이었나, 현미경 연수를 가서 렌즈를 통해 도시락 김을 관찰한 적이 있다. 도시락 김 한 귀퉁이를 떼어내어 받침 유리에 올려놓았다. 별 기대 없이 들여다본 모습은 놀라움 자체였다.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될 정도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손톱 주변에서 떼어낸 작은 피부 조각도, 머리카락도, 작은 꽃가루도, 두루마리 화장지 조각도 렌즈 아래에서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영화 <이너스페이스>의 주인공은 초소형 비행선을 타고 인체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소인국이나 거인국으로 간 걸리버도 일반적으로 보는 것과 다른 세상을 체험한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놀라운 점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영화나 책이나 현미경에서처럼 공간과 건축물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과정이 없었는데도 책을 읽고 나면 전혀 다른 공간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변화는 머리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건축물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전달 매체가 있다. 그것은 비어있는 보이드 공간이다.(p16)’ 이제껏 건물만을 보던 나를 향해 저자는 건물이 만들어내는 공간을 보라고 말을 했다. 열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소주제에 대한 결론은 명확했다. 공식에 대입하여 방정식을 풀어내는 듯 그의 서술에서는 이과적인 후련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여타 문학 작품을 읽은 것보다 묵직한 감동이 나의 감성을 조용히 흔들었다. ‘공간을 크게 느끼게 하려면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해야 하고,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하려면 기억할 사건을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 기억할 사건이 많게 하려면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p291)’ 그의 책이 아주 커다랬다. 연필로 정교하게 그려진 세밀화를 감상한 듯 공간과 건축물과 도시에 대한 상식이 풍성해졌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작가는 건축을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걸까. 물컹한 마음이 이슬방울처럼 매달렸다.

 

건축물을 만드는 과정은 글을 쓰는 과정과 비슷했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건축물이 아니라 장소이다. 장소가 만들어지려면 사람이 모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사람이 모일 목적지가 될 만한 랜드 마크 건물이 필요하고, 사람이 정주할 식당이나 카페가 필요한 것이다.(p280)’ 글을 쓰는 것도 결국 사람의 마음이 모일 장소를 만드는 일 아닌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일기는 나의 마음이, 다른 이에게 읽히는 글은 그들의 마음이 머무는 장소가 되니 말이다. 글 안에 마련한 그루터기나 카페, 혹은 스릴 넘치는 바이킹 같은 공간 안에서 어떤 이는 휴식을, 또 다른 이는 기쁨을, 혹은 그리움을 느낄 지도 모를 일이다.

 

물질이 합쳐져서 나타나는 건축이 궁극적인 목표여서는 안 된다. 그 이후에 만들어져야 하는 아름다운 인간의 삶이 우리 건축가가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목표로 삼아야 하는 지향점이다.(p149)’ 매년 2, 과학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어른이 되어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사람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과학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구나. 건축을 하는 작가 역시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종종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시간의 본질, 시간의 빠르기, 시간이 연상시키는 이미지, 다른 이들과 공유했던 시간들,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영화 필름처럼 펼쳐보곤 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공간에 대한 생각은 깊이 해본 적이 없다. 이런 내게 변화가 일어났다. 공간이 달리 보였다. 전통 한국화에서 여백이 주는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했다. 작가는 공간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더 이상 잉여가 아닌 존재감이다.

건축물 사이로 만들어진 거리를 걸을 때마다, 건축물 안에 소담스럽게 만들어진 공간으로 들어갈 때마다 공간을 서걱서걱 썰면서 지나가는 듯 얼굴에 와 닿는 공기의 질감이 새삼스러웠다. ‘건축물 앞에는 설명서가 없다. 대신 공간이 말을 한다.(p381)’ 공간이 보였다. 공간이 말을 걸었다. 나를 담은 공간이 새롭게 펼쳐졌다.

 

p225, 마지막 줄 : 창의적이 아닌가? 창의적이지 ~

p354, 4째줄 : 꼭대기기에 서면 꼭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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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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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살아지는 거라 생각했다. 저절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처럼 늘 같은 속도로 나아갈 수 있는, 어릴 적 나에게 삶이란 당연한 것이었다. 나이의 배터리가 점점 충전되면서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 걸음을 떼기 힘들던 때도 겪었고, 주저앉아 엉엉 울던 순간도 지나왔다. 늘 산책 같은 걸음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건조하고 재미없는 이미지로 남아있던 동화이다. 삶의 묵직한 의미를 향해 눈길조차 가지 않던 때였으니. 딱 한 번 읽고 책꽂이에 꽂혔다. 천사의 등장과 구두 정도만 토막토막 기억에 남아있던, 밋밋한 맛을 내던 책이다. 구두를 어떻게 했는지 내용조차 희미했다.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생각지 못할 영역이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이 책은 어떤 의미를 안겨줄까. 제목 자체로 느껴지는 무게감이 어릴 때와 달랐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걸까. 인간의 본성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이 담겨 있다. 천사 미하일에게 하느님이 던진 질문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다.(p58~60)’

지금은 21세기이고, 이 작품은 1881년에 쓰였으니 시대에 맞지 않는 이상향 같은 이야기라 여겼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하며. 그러다 며칠 전에 인터넷을 검색하다 가슴 찡해지는 뉴스를 알았다. 서울에서 중고 컴퓨터 장사를 하는 아저씨 부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시골에 계셔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의 집에 컴퓨터를 설치하러 갔다고 한다. 설치가 끝난 아저씨는 돌아가는 길에 학원을 가야할 아이를 차에 태워주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아이가 갑자기 차에서 내려달라고 떼를 쓰더란다. 차에서 바삐 내린 아이는 황급히 근처 건물로 뛰어가더라고. 고개를 갸웃하고 옆 좌석을 보니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 첫 생리였던 거다. 아저씨는 바로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어찌 해야 할지를 의논한다. 필요한 용품을 바삐 챙겨온 부인은 인근 화장실로 들어갔고 나오기 전에 문자로 남편에게 꽃다발을 사오라고 한다. 원래 첫 생리 때에는 아빠가 축하를 해주는 것인데 아이의 아빠는 시골에 있었으니 대신 축하를 해주려는 것이었다. 아이를 할머니에게 데려다준 부부는 컴퓨터 설치비를 더 받았다며 10만원까지 돌려주고 축하의 꽃다발도 건네주었다고. 그 얘기를 전해들은 아이 어머니는 컴퓨터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내내 울기만 했다는 일화이다.

화조차 나지 않는 황당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시멘트 바닥 사이로 생명력을 뿜어내는 자그마한 민들레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사랑이 남아있기나 한 거야 싶다가도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인간의 본성에는 사랑이 있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그 옛날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인류로부터 끊임없이 전해져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행동으로 전해지는 그 짠한 느낌말이다. 인간의 DNA안에는 사랑이라는 유전자도 들어있는 걸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표제작 외에도 몇몇 단편이 실려 있다. 출판사마다 단편의 구성이 다른데 <책만드는집>에서 펴낸 책에는 세 편의 작품이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바보 이반>이다. 한 번씩은 다 읽어보았던 작품들이지만 이번에는 뒤의 두 작품에 눈길이 갔다. 두 작품 모두에서는 인간의 욕심이 배경처럼 흐른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마지막 문장이 남기는 여운은 크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정확히 2미터 가량밖에 되지 않았다.(p96)’ 결국 죽음의 순간에 차지할 수 있는 땅이라고는 자신이 묻힐 공간뿐이건만. 땅을 어떻게 사고 팔 수가 있느냐며 아메리카 원주민이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인간의 일생을 영화 필름에 담아 빠른 속도로 돌리면 그 땅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인, 땅을 소유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욕심인 것을. 지구가 탄생한 이래로 땅은 원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인데 그 위에 사는 인간들이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소설에서는 땅에 대한 욕심을 묘사하고 있지만, 돈이나 다른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인간의 무모한 욕심은 한계가 있는 걸까.

그 순간 머릿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p25)’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 문학동네, 2016.)에 나오는 문장이다. 미국의 생화학자 돌프 M. 바인더 역시 사람의 값어치를 물질적으로 계산하였다. 새 장 한 개 청소할 수 있을 정도의 석회, 장난감 대포 한 방을 쏠 수 있을 만큼의 칼륨, 약 한 봉지 정도의 마그네슘, 성냥 2200개비를 만들 정도의 인, 못 한 개 정도의 철, 설탕 한 컵 분량, 세숫비누 5장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이라나. 물질적으로 환산한 사람의 가치는 이 정도로 보잘 것 없는데.

냉장고가 만들어지면서 인간의 욕심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어차피 내버려두면 썩을 음식이므로 옛날에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먹을 만큼만 남겨두고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배부른 사자는 주변에 먹잇감이 지나가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어차피 잡아봤자 먹지 못하므로 먹잇감을 잡느라 힘을 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간만이 수용할 수 있는 양 이상으로 욕심을 부린다고.

<바보 이반> 에도 욕심에 사로잡혀있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금화를 놀잇감으로 여기고 거들떠보지 않는 이반과 그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번번이 이반을 골탕 먹이는 일에 실패하는 도깨비들을 보면서, 머리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진짜 바보가 누구인가 헷갈리게 된다.

무소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것. 옷장을 휘 둘러본다. 매번 옷을 입을 때마다 입을만한 옷이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 나. 구멍 날 때까지 옷을 입기로 하고 더 이상 옷을 사지 않으리라 결심해도 예쁜 옷을 보면 슬그머니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결국 한 번에 한 벌 밖에 입지 못하는 것을 한 번에 열 벌이라도 입을 것처럼 번번이 욕심이 나는 걸 보면 아직 멀었다 싶다.

 

세월이 지나도 울림을 주고 화두를 던져주는 고전의 힘 앞에서 겸손해진다. 인간이란 각각 다르지만, 아주 깊은 심해로 파고 들어가면 결국 공통된 무엇을 담고 있는 존재 같기도 하다. 사랑이거나 혹은 욕심이거나, 수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글을 통해 말하고 있는 다른 그 무엇이거나. 표층 해수의 온도는 깊이에 따라 다르지만, 심해는 거의 동일한 온도가 유지된다. 인간의 본성에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묵직하게 자리하는 공통적인 빛깔의 그 무엇이 있는 걸까. 몇 백 년 전의 톨스토이가 2018년을 살아가는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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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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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를 그릴 때마다 원점에 주목한다. 가로축의 값이 0일 때 세로축도 0이 되는가. 원점에서 출발하는 그래프도 있지만 애매하게 시작하는 것도 다수이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지점에선가 제로 상태에서 시작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운동하고 있는 물체의 운동을 분석하려면 그래프는 중간부터 그려질 수밖에 없다.

등속직선운동의 그래프를 그릴 때면 웃음이 나온다. 시간-속력 그래프 때문이다. 일정한 속력으로 운동하는 상황이니 그래프는 가로축과 나란한 모양이다. 이 때 원점에서는 순간 이동하듯 뜬금없이 특정 속력을 나타내는 점을 찍어야 한다. 정지 상태에서 운동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은 깔끔하게 편집된다. 그 구간은 등속이 아니니까. 그래프를 설명할 때마다 단서를 붙인다. 어쨌든 출발해서 이미 등속 운동하는 물체의 어느 한 장면을 분석한 것이라고.

소설 쓰는 행위가 다양한 그래프를 그리는 과정이라면 원점을 시작하는 포인트는 작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어디부터를 출발 지점으로 정해 삶의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는 그리는 사람의 몫이니까. 입체적인 삶의 장면을 그래프로 단순화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지만 바라보는 시각에서의 장면은 어차피 평면이니. 우리는 평면으로 이루어진 장면 장면을 모자이크로 짜깁기한 모습을 입체로 상상할 뿐이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수많은 사진들을 모아서 세계 지도를 완성하는 과정처럼.

 

40편의 짧은 소설을 접하면서 2차원 그래프를 떠올린다. 입체적으로 완성된 깔끔한 모습 이전의, 짜깁기하기 전의 초판본을 본 느낌이랄까. 아이돌을 향한 오십대 아저씨의 팬심, 취업을 못한 청년들이 짊어진 일상의 무게, 기혼 여성의 삶과 공간, 자살을 결심한 사내, SNS 안에 투영된 모습과 현실과의 괴리, 반려 동물의 의미, 가족의 상실로 인한 아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에서의 착각, 가장의 역할이 주는 묵직함, 아파트 주민의 이기심, 귀농에의 무모한 도전, 폐교되는 시골 학교, 사회적 강자에 대한 상대적인 비애감, 한국 사회의 자화상 등을 통해 주변의 평범한 삶을 짤막하게 그려냈다. 소설 속 이야기들은 다양하지만 굵직한 테마는 두 가지 정도로 가닥이 잡힌다. 가족과 직업이다.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가 그려진 소설들 중 부모님에 관한 것은 특히 자식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당신들도 부모님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부모님께 어떻게 하고 있나, 늦기 전에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중간 중간에 밀려오는 찡함 위에 얹는다.

직업과 관련된 소설들은 직업을 얻기 위한 청년들의 간절함과 직업을 가졌다 해도 그 고달픔이 자아내는 갈등과 사회적인 장벽을 현실감 있게 그린다. 뉴스에서 종종 접하던 사연들이기에 소설인지 다큐인지 혼동이 될 만큼 씁쓸하다.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중략) 내 땀과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의 땀의 무게가 다른 나라.(p26)’는 먼 나라 이웃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대학 졸업을 반 학기 남겨둔 딸의 일상은 요즘 숨 막히도록 바쁘다. 학원에서 토익과 오픽 준비를 하느라 근 9시간을 영어 공부에 매달린다. 오늘 오후에는 면접용 정장을 사러 함께 옷 가게에 다녀왔다. 구멍 날 때까지 옷을 입으리라 결심한 엄마의 옷장에는 정장 비스무리한 것도 없기에. 50%, 80% 할인된 가격이 그 가격이라니! 이거 할인된 가격인가요? 몇 번이나 묻는다. 36만 원짜리 세트는 핏도 좋고 가볍지만 가격이 마음에 안 들고, 22만 원짜리는 가격은 마음에 들지만 다소 무거운 모양이다. 결국 36만 원짜리로 낙찰을 본다. 딸아이가 매장을 나오면서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에휴!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써야 한다니!” 옷이 문제가 아니라 치열한 취업의 문을 향해 걸어갈 딸내미를 생각하니 안쓰럽고 짠하다. 소설 속 인물의 갈등과 비애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한여름, 은행에서 볼 일을 본 후 문을 열고나올 때 확 끼얹어지는 열기처럼 현실이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느낌이다.

 

웃음이 잔뜩 담긴 소설일 줄 알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제목 역시 뚝 떼어놓고 볼 때에는 오리털 패딩의 모자 털처럼 가뿐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겉표지를 열고 들어가니 의미는 180도 달랐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p26)’ 수많은 좌절과 삶에 대한 쓰라림으로 굳은살처럼 되어버린 표정이었다. 내 아이가 가까운 미래에 이런 표정을 짓게 될까봐 나는 이 문장이 무서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다가 커다란 고통조차 감각할 수 없는 3도 화상을 입을까봐 두렵다.

책 표지의 그림이 <아파트먼트 세르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표지를 보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다. 마음 아프지만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배달원들의 엘리베이터 이용을 금지시키는 아파트 주민들의 이기심은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p143)’라는 답변으로 설명된다. 마음이 차갑고 높고 딱딱한 건물로 화석화되어버린 걸까.

 

소설들의 초반부를 읽을 때에는 뭐 이런 마무리가 있나 싶었다. 쭉 걸어가다 뜬금없이 낭떠러지에 도달한 기분, 도착 지점이 없는 듯해서 찜찜했다. 개운한 카타르시스도 없고 웃기다고 하기도 애매했고, 마냥 슬프지도 않았다. 최규석의 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이 연상되었다. 그런데, 후반부의 한 문장을 읽는 순간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쩐지 자신이 원고지가 아닌 삶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네.(p211)’ 삶 자체가 애매한 대상이므로 그 단편을 담은 소설 역시 애매할 수밖에 없다. 깔끔한 마무리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삶은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주변 사람들을 통과한다. 그것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소설이란 삶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내어 옮기는 작업이니 시작도, 마무리도 어쩐지 어정쩡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소설가란 그가 생각한 시점을 원점으로 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중간 즈음에 그래프 그리기를 멈출 수밖에 없다. 다만 앞으로 그려질 누군가의 소설 속 그래프의 선은 보다 부드럽고 촉촉했으면 좋겠다. 낮은 곳에 있는 삶이 그대로 투영되는 소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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