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300여 일간 탄생했던 무수한 나의 파일들이여, 폴더의 노예였던 파일들이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20223월 이래 차곡차곡 정리되었던 정보들이 한순간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 통재라, 오호! 애재라. 파일이여! 파일이여!”

1905,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던 거룩한 애국자의 외침을 이 시점에 떠올릴 일이더냐! <시일야방성대곡>을 부르짖으며 황당신문에라도 싣고 싶은 심정이었다.

 

꿈이라면 좋았을 사건 개요는 이렇다.

-언제: 202212

-어디서: 3학년 1반의 교탁과 전자칠판 사이

-내용: 묵직한 노트북의 자유낙하로 옆구리에 빌붙어 있다 미처 피신 못한 플라스틱 USB, 충격 흡수의 여파로 경추 탈골! 노트북은 찰과상.

운동신경의 반응속도는 그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의 시도들은 유경험자들이 거치는 흔한 단계이다. 몇 번이나 꽂았다 빼기, 해부 후 현실 자각, 파일 복구 업체를 알아보다 예상을 웃도는 가격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며 포기. USB의 거룩한 희생의 대가는 파일 0개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예상 못했던 건 아니다. 손실이나 분실이라도 되면 낭패이니 하드에도 백업받아놓아야지. 노트북 앞에서 생각한 적은 있다. 문제는 생각만 했다는 거다.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발등을 찍은 자, 바로 나다.

침착하자! 계획서 파일은 업무포털에 업로드되어있다. 아쉬운 건 사소한 양식들이다. 실험 실습일지, 실험보고서, 시약 목록 같은 것 말이다. 순식간에 RGB 255,255,255가 된 기억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다행인 건 프리웨어로 주변인들에게 투척했던 흔적이 존재한다는 거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한 나를 눈물 머금고 칭찬한다. 초고속 카메라의 영상을 거꾸로 재생하듯 흩어진 파일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지인이 위로한다.

업무는 거의 마무리되었잖아. 중요한 건 업무포털에서 다운받으면 되고. 학년말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봐.”

맞다. 마무리 업무 파일도 주무 부서에 제출한 상태이니까.

위로 끝에 지인은 한마디 덧붙인다.

근데, J 맞아?”

나의 MBTIINFJ이다. IN은 기분 내키는 대로 달라지지만 FJ는 변하지 않는다. 특히 확고부동한 영역은 J이다.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나는 100%에 가까운 위용을 떨친다. 무척 치밀한 인간⋯⋯...

 

정리의 기본 3단계는 모조리 꺼내기, 분류하기, 재정비하기이다. 염전에서 일하듯 파일 부스러기를 닥닥 긁어모아 다시 폴더를 만들고 정돈하는 중이다.

박웅현은 여덟 단어에서 리처드 파인먼의 말을 인용한다.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 ⋯⋯ 버릴 게 무엇인지 알아내라.’ 잃고 나니 본질이 보인다. 최소한의 필요와 없어도 아쉬울 게 없는 게 구분된다.

USB로 인해 긍정적인 트라우마가 생겼나. 일하다가도 수업 종이 나면 USB 탈착을 잊지 않는다. 수시로 자료를 백업한다. 새로운 USB는 강철 갑옷을 입고 있다. 지나가던 동료가 말한다. “부장님! 단단한 걸로 바꾸셨군요. .. 부러지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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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없는 소리! 친구의 떠남을 명분으로 세운 공부 멈춤 전략이렷다. 무릇 송별회라 하면 풍선 팡팡 색색 종이 부스러기들이 번쩍번쩍 흩날릴 것 같은 BGM이 희미하게라도 묻어있기 마련이건만. 녀석들의 분위기는 결코 송별회의 그것이 아니다.

송별회 해줘야 해요.”

몇몇 녀석들이 다시 합창한다.

“K가 내일 경기도에 있는 시골로 멀리 가요.”

내일 안 와?”

학교 끝나고 가요.”

그럼 내일 하면 되겠네.”

수많은 아이의 밀물과 썰물을 접했던 교사의 사전에 송별회 이브는 없다.

, ~ 오늘은 별의 연주시차 할 차례 군.”

운동하는 K가 진학을 위해 타 시도로 가는 모양이다. 수업하다 힐끗 보니 아이의 표정이 시선 끝에 매달린다.

오늘은 여기까지! 10분 정도 남았는데 송별회 해봐.”

순간 출렁! 공간이 들썩인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A가 벌떡 일어난다.

배경 음악 틀어도 되나요?”

푸하! 들으나 마나 시끌벅적한 음악이리라.

옆 반 방해 안 되게 조그맣게 틀어 봐.”

우리 처음 만났던 어색했던 그 표정 속에~’ 어라? 이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는?

이 노래를 아니?”
그럼요!”

1991년에 발매된 015B<이젠 안녕>을 아는 2007년생이라니! ‘안녕이라는 말을 해 짧은 시간을 뒤로 한 채로~’ 폴 킴의 <안녕>, ‘오래전에 함께 듣던 노래가 발걸음을 다시 멈춰 서게 해~’ 스탠딩 에그의 <오래된 노래>가 연이어 애잔하다.

이런 분위기라면 옆 반 방해가 안 될 것 같다. 슬그머니 앞으로 가서 볼륨을 키운 건 바로 나다. ! 절묘한 타이밍에 싸이님 등장하신다.

이거 이별 노래 맞냐?”

소중했던 내 사람아 이젠 안녕~’ 경쾌한 랩 뒤로 성시경이 <뜨거운 안녕>을 건넨다.

 

평소에는 누운 풀잎이던 녀석들이 주섬주섬 일어난다. 은하의 중심인 듯 K를 향해 사물함 앞쪽으로 하나둘 모여든다. 꼬리 끝에 아쉬움을 매단 혜성들이 오늘의 주인공을 향한다. 반장이 색색의 별들이 꾹꾹 박힌 하얀 우주를 친구에게 건넨다.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의 종이는?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오늘따라 교과서에 광년과 파섹을 열심히 받아 적는 줄 착각해서 미안하다. 교과서는 롤링 페이퍼 받침대였구나.

이별 선물로 받은 듯 인절미 색 벙어리장갑을 낀 아이, 온풍기 빵빵한 교실 안에서 북극곰 털처럼 부슬부슬 한 장갑을 꼭 끼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숙인다. 흐르는 음표 사이로 훌쩍이는 소리가 쉼표처럼 찍힌다.

이별 앞에서 서성이는 영혼들은 몇 방울의 눈물로 금세 젖어버리는 얇은 휴지 같다.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아도 공간을 꽉 채운 채 파도처럼 일렁이며 오가는 마음이 보인다.

 

아이들은 자체로 자신만의 삶을 그린다. 그들의 우주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푸릇한 세상을 난, 너무 작게 보았구나. K의 주변을 빙 둘러싼 충혈된 눈동자들이 물기 아래로 반짝인다, 쉰두 개의 붉은 별처럼.

우주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던가. 별들이 모여드는 맑은 은하를 목격했던 십여 분이 초고속 사진을 재생하듯 흐른다. 별을 보내는 소박한 의식이 몽글몽글한 솜뭉치가 되어 심장 안을 굴러다닌다.



230112 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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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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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지 않는 나이가 있다. 13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장면들로 채워졌던 시간. 무에 그리 힘들었을까. 지금의 시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뚜렷한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건만.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와 잊힌 이유들이 중첩되어 서러운 감정들을 수증기처럼 머금었나.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지 현재의 마음이 과거에 담겼던 감정의 코팅지로 둘러싸인다. 손가락 끝으로 코팅된 비닐을 당기니 살갗이라도 벗겨지는 듯 아리다.

서른 언저리의 내가 눈가에 둔탁한 그림자를 탈피하듯 남기곤 후다닥 되돌아간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 선명해 보이는 선을 따라간다. 이내 끄트머리는 안개 자욱한 길로 이어진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듯 옅은 꼬리를 흘리는 비행운이 된다. 선뜻 잡지도, 깔끔하게 돌아서지도 못한 채 매번 서성이는 오십 대가 현재의 나다.

 

상처는 상처를 여는 열쇠인가. 작가로부터 소설 속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상처의 도미노 끝에 선 듯 덮어왔던 상처가 서서히 틈을 보인다. 소설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점점 투명해지더니 아득한 너머로 어정쩡한 삼십대의 내가 보인다. 다른 상황의 이야기건만 그 안에 담긴 익숙한 파편 몇 조각에 시선이 머문다.

소설밝은 밤은 상처의 외피로 둘러싸인 치유의 이야기이다. 서른둘의 지연과 외할머니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다양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와 그녀들 주변에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은 결혼으로 이어진 관계, 이별, 가족, 죽음, 사회적 배경을 원인으로 각기 다른 상처를 품는다.

주요 시대적 배경에는 백정이 차별받던 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천주교 박해,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담긴다. 그 시대를 건너는 여인들은 위태위태한 음표로 보이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스스로의 삶을 향한다. 치열함을 넘어서는 숭고함을 뿜어낸다.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건 무엇인가. 나의 경우, 관계가 주는 상처가 가장 아팠다. 커다란 아픔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된다. 책에서도 지연과 엄마, 엄마와 외할머니 등 모녀 사이의 뒤틀어진 관계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들의 갈등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와 맞물린다. 작가는 단단하게 꼬여있던 매듭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풀어지는지 밀도 있게 보여준다.

촘촘한 깊이로 스미는 문장에 주춤, 언젠가 심장에 새겼던 서러움을 담은 익숙한 문장들을 보며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멈칫한다. 밝은 밤을 건너는 동안 자주 아프겠구나. 마음에 고여 있던 물기가 철가루라도 된 듯 서서히 눈두덩을 향한다. 눈가가 뜨거워진다. 괜찮아져야만 했던 괜찮지 않은 나를 외면하며 괜찮아진 줄 알던 내가 보인다.

그럼에도 손가락은 새벽까지 이끌리듯 책장을 넘겼다. 외면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작가에게서 온 건지, 소설 속 그녀에게서 온 건지, 이제는 마주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간절함에서 온 건지, 혹은 이 모두의 공명으로 인한 건지 까닭 모를 중력에 이끌리듯 빠져들었다.

 

기쁨이나 즐거움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 반짝이는 햇살을 머금은 감정들은 크고 작은 강물로 존재를 돌다 증발한다. 반면 상처에서 배어나온 물기어린 감정은 찐득하다. 지쳐버린 정맥혈과 같아 스스로 흐르기에는 힘이 겹다. 마음의 혈관에는 거꾸로 흐르지 못하게 해주는 판막이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것은 종종 뒷걸음을 치다 심장 한 구석에 쌓인다. 차곡차곡 접힌 채로 딱딱하게 굳어진다. 일상의 박동이 시작되면 다른 감정의 물결에 가려져 아래로 가라앉는다.

책을 통과하는 내내 열병처럼 이십여 년 전의 나를 앓았다. 이해받지 못한 서러움이, 빛도 소리도 없는 우주공간을 오롯이 혼자 유영하는 듯했던 외로움이,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 원인을 따라가지 못한 채 덩그마니 남아있던 먹먹함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여겨왔던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있던 지층이 되어오니 태풍에 휩쓸린 듯 바닥이 드러났다.

훌훌 떨쳐내고 싶던 감정의 귀퉁이를 여전히 붙들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줄줄 올이 풀린 실오라기를 차마 놓지 못해 습관처럼 손가락에 감고 있었던 걸까.

 

누구나 마음으로 이루어진 행성을 가슴속에 품는다. 마음의 행성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있다. 사랑, 기쁨, 분노, 즐거움, 행복, 슬픔, 아픔, 그리움, 외로움 등이 모여 행성을 만든다. 감정들은 수시로 우리의 안팎을 들락거린다. 찰나로 스치는가 하면 눅진하게 눌러 붙다 영혼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몰랑몰랑한 행성의 크기는 시시각각 변한다. 크기에 따라 다른 중력을 나타내는 행성처럼 마음마다 중력의 크기가 다르다. 다가오는 자극에 반응하며 상황과 사람을 다른 인력으로 끌어당긴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손수건이 다른 이에겐 물에 흠뻑 젖은 거대한 솜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이런 상상을 하면 다른 이의 상처가 조심스럽다.

다른 중력을 지녔으므로 동일한 무게감을 지닌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답했던 소설 속 인물의 행동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된다. 나의 무게감과 당신이나 가상의 인물이 느끼는 그것은 분명히 다를 터이다. 그러니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매번 스스로 다짐한다.

 

밤하늘에는 오래된 과거가 있다. 허블 망원경이 찍은 사진울트라 디프 필드에는 백삼십억 년 전의 우주가 담겨있다던가. 빛의 속도가 유한하기에 지금 내가 올려다보는 별빛은 과거의 별에서 출발했으리라.

밤하늘은 왜 어두운가. 독일의 천문학자 올베르스는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성간 가스와 먼지가 별빛을 가로막아서, 빛의 속도가 유한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빛의 속도보다 우주가 빠르게 팽창해서 등 다양한 인물들이 타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과학적 진위를 떠나 나에게 밤하늘은 위안을 주는 마음의 안식처이다.

낮의 하늘보다 밤의 하늘은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긴다. 과학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십대에도 밤하늘이 그저 좋았다. 잿빛 감정을 담은 채 터벅터벅 걷다가도 문득 올려다보면 나를 둘러싼 공기 위로 까마득한 우주까지 뻗어있는 이불이 부드럽게 마음을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어둠이 품고 있는 별이, 반짝이는 눈물 같은 별이 주는 위안에 서늘한 공간을 걸으면서도 따뜻했다.

 

밤은 어둡다. 어두우니 밤이다. 밝은 밤이라 했을까. 고운 비단으로 지은 옷감인 듯 환한 책표지를 가만가만 어루만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며칠간 밤의 하늘을 자주 쳐다보았다. 먼 하늘에서는 드문드문 별빛이 반짝였다.

별빛은 그 빛이 출발한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온다. 결국 밤하늘을 빛나게 해주는 건 과거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속성을 지니는 건 아닐까. 고통스럽던 과거는 아직까지 내게로 도달하지 못한 별빛이다. 빛으로 다가와 눈으로 스며들어 나와 이어진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고통만을 안겨주지는 않으리라. 외로운 이들에게 위안의 빛으로 점점이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말이다.

작가의 상처가 환하게 빛나는 밤이 된 것도 그녀의 고통이 빛으로 닿았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별빛은 별을 향한 이에게만 보인다.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고개를 들고 눈을 뜨는 건 의지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과거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는 이에게 밤하늘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완전히 밝아진 건 아니다. 과거로 타임 슬립하면 매콤함이 남는다. 들숨과 날숨이 폐로 들락거릴 때 공기는 말끔하게 비워지지 않는다. 나의 삼십 대는 어정쩡하게 폐에 머물던 공기였나. 그래도 새벽에 가까워진 듯 서러움이 덜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실눈으로나마 상처를 마주하려는 마음이 생긴 걸까.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패턴으로 이어지는 줄기로 존재하는가 보다. 밝은 밤의 상처에 기대어 나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상처를 향해 손끝을 내밀어 가만히 더듬어본다. 최은영의 밤이 상처를 향해 한 뼘의 손을 내밀 용기를 건네주었나.

외면한 마음은 거기 그대로 머문다. 매순간 자라는 몸처럼 시간에 끌려가지 않는다. 스스로 보듬어 꺼내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다. 치료를 하려면 상처를 들여다봐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 쓰라린 상처를 건드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금파리를 꺼내어 당신에게도 기꺼이 보여줄 순간이 언젠가는 올 것만 같다. 손끝이 뜨거워진다.


p12, 5째줄: 눈이 기화 → ~ 승화 or 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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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07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만큼 따뜻한 리뷰네요. 축하드려요 *^^*

나비종 2022-10-08 06: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축하의 말씀에 제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날이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romio 2022-10-1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늦었지만, 저도 리뷰를 읽고 잔잔한 여운을 느낌니다,, 저는 오십대 남자지만,,

나비종 2022-10-16 21:21   좋아요 0 | URL
따뜻한 책입니다. 혹시 읽지 않으신 책이면 읽어보세요. 남성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네요.^^
 

맨발의 아이가 신호등 앞에서

시선을 벗어난 양 춤을 춘다.

수요일 오전, 체육복을 입은 채

시간과 공간을 불쑥 찢고 나와

무작정 학교 밖을 향해 내달렸을까.


목적지를 잃은 걸음이 잠시

신호등 앞에서 쉼표로 머무는 동안

아픈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

세상 안에서 세상을 벗어난 듯

파르르 앙상한 손끝이 출렁인다.


경계 모호한 노란불을 닮은 걸음이

위태위태한 삶의 거리로 이어지기까지

숨 차오르는 일상 속 서툰 심장은

초록과 빨간불 사이를 허덕이며

무수한 깜빡임을 반복했으리라.


불현듯 심장에 작은 신호등이 켜진 날

날아드는 유성의 자유를 잠시나마 품었기를.

몇 번이나 망설였을 눈물 고인 신호등이

무심하게 점멸하는 거리의 신호등과 함께

상처 입은 몸부림이 되어 흐늘거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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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왜 공인가교양 체육에서 끝날 줄 알았다대학을 졸업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체육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몸운동이면 운동춤이면 춤도무지 주인 말을 듣지 않는 몸치의 표본이다한데친목 피구라니마스크에 갇히기 전까지 체육은 직장에서도 피구배구족구때로는 듣도 보도 못한 공으로 둔갑해서 지긋지긋한 관절염처럼 나를 쫓아다닌다정말 피!하고 싶다구

 

공과 함께 한 기억 속의 나는 바보스럽기만 하다피구농구배구발야구테니스(...)…. 무슨 노무 구기 종목은 이리 많은지그 중 공 던지기는 공에 대한 흑역사의 정점을 찍는다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체력장 시험 종목구멍 뽕뽕 뚫린 시퍼런 공을 있는 힘껏 던지기만 하면 되었건만이론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멀리 뻗어나가는 45°의 포물선이 왜 실전에서는 적용이 안 된단 말인가마음만은 투포환 선수인 나를 가까이서 목격한 친구는 살며시 다가와 말한다. “공을 왜 땅으로 내리꽂냐?” 5m 간격으로 그려진 거리 라인의 두 번째 칸을 넘어보는 게 원이었던 나는 끝내 평균 5m, 최고 8m의 저질스런 기록으로 학창시절을 마무리한다.

 

동화 소리 질러, 운동장(진형민, 창비, 2015.5.)에서는 막야구부 아이들이 등장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놀고 싶다빈곤의 악순환처럼 반복되던트라우마에 가깝던 공에 대한 거부감이 살살 부는 바람에 걷히는 아침 안개처럼 사라진다. 공을 두려워하기 훨씬 이전의 나를 불러온다친구들을 따라 원피스를 입고 철봉에서 거꾸로오르기를 해도 전혀 민망하지 않던 그 때로어느새 나는 정글짐에 올라 땀을 뻘뻘 흘린다힘껏 달리던 시절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 선을 긋고 사방치기를 하던비석치기를 하던 모습이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두루루 풀린다.

 

진형민 동화 속의 아이들은 탱탱볼을 연상시킨다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발함과 투명함이 공존한다유리처럼 속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쉽게 깨어지지는 않는다차돌 같은 단단함과 맹랑함이 있다천방지축해도 짐짓 당당하고 슬기롭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수학 50점을 맞는 게 평생 소원인 아이들에자신이 속한 팀에 불리해도 아웃!을 외치는 솔직함에어디서든 당찬 모습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푸하! 웃음소리를 따라 찡한 감동이 배어든다. ‘원래 노는 데에는 큰 땅이 필요 없었다.(p143)’ 운동장을 넘어서는 자유가 있는 그들은 노는 것이 뭔지 뭘 좀 아는 놈들이다.

 

나른한 오후, 마스크를 쓴 아이들이 인조 잔디 운동장에서 공을 쫓는다. 교무실 창문을 열고 공을 쫓는 아이들을 좇는다. 뉴스 기사에 따르면 완벽한 운동장은 아직까지 없는 듯하다. 천연 잔디에서는 잔디의 마모와 배수 지연 및 미끄러움이, 인조 잔디에서는 유해 물질이, 친환경적으로 여겨지는 흙에서조차 석면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종종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아이들의 운동장이 아무 걱정 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의 티 없는 마음을 하루 빨리 닮아가기를 바란다.

 

체육을 못했던 아이못했기에 안했고 안했기에 못했던 순환 고리를 맴돌았다. 어쩌면 나는 너무 복잡한 편견으로 체육을 어렵게만 바라봤던 건 아닐까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놀면 되는 거였는데좀 더 재미있게 노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주최 측 줄바꾸기)

운동장에서 놀아본 지가 언제였더라어느덧 운동장에서 마음껏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나. 지나간 시간은 늘 아쉽다마음 한 켠 남아있는마음껏 뛰어놀지 못한 미련이 공처럼 운동장을 구른다추억을 더듬듯 운동장이라도 천천히 밟아보고 싶다.



* 2022. 2. 5. J교단만필 보냄, 2022. 4.15.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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