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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안개 낀 날, 회색빛 거리를 걷는 듯 불확실한 시야 속에서 눈에 띄는 무엇이든 찾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분위기. 입맛에 맞지 않는 고급 음식을 맛본 느낌이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감이 오는데 이런 식의 전달 방식, 나와는 맞지 않는다. 수분이 덜 마른 종이 탈을 쓴 기분이랄까. 채 마르지 않은 종이와 풀 냄새가 뒤섞여 텁텁하고 건조한 냄새가 나는 내용이다. 읽는 내내 걸쭉하고 질척한 것이 느린 속도로 서서히 흘러내려 마음 바탕에 깔렸다. 답답한 묵직함을 안고 소설을 읽었다.
파랑새를 찾아 헤매다 결국 출발지로 터벅터벅 돌아온 동화 속 주인공인양 마지막까지 갔다가 처음으로 되돌아오니 결론처럼 첫 문장이 선명한 마침표를 찍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p9)’ 작가는 세상의 빛과 먼지와 어둠과 습기를 묻히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삶의 허무를 전하고 싶었을까.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p76)’ 혹은 어딘가에 잠시라도 새겨져있을 삶의 짧은 흔적이 주는 의미를 말하고 싶던 걸까.
지워진 기억을 좇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서를 찾아가는 주인공. 어릴 때 하던 스무고개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주인공을 따라 걷는다. 주인공이 만난 이들 대부분은 무언가를 그에게 건네어준다. 상자에서 꺼낸 사진이나 책, 작은 단서가 적힌 종이 등. 소설 곳곳에는 주소나 전화번호, 건물, 장소가 등장한다. ‘건물들도 거리의 폭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는 빛이 달랐었고 다른 무엇이 대기 속에 떠돌고 있었다......(p170)’ 잠시나마 그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있다. 삶의 흔적들은 그를 스쳐간 물건 곳곳에 의미로 새겨진다. 물감 묻힌 붓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별 의미 없는 선을 긋는 것처럼. 기억을 복기하여 도화지를 펼치면 그 순간의 냄새, 빛, 소리 등이 그대로 재현된다.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한다. ‘그녀는 어느 길을 따라왔을까? 왼쪽으로 왔었을까, 오른쪽으로 왔었을까? 나는 그것을 카페의 주인에게 물어보는 것을 잊어버렸다.(p140~141)’ 그에게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방향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의 그녀가 걷던 길이었기에 특별한 경로로서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뇌에 새겨진 흔적들도 어쩌면 이토록 사소하게 보여 지는 기억들의 집합 아닐까. 그 때 그가 입었던 옷의 색깔이라든지, 흩날리던 머리칼에서 풍겨 나오던 향기라든지, 함께 듣던 유행가라든지. 작은 기억들이 보석처럼 박혀 지치고 힘든 삶의 순간에 떠올라 반짝이며 위안을 주는.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p262)’ 작가가 말한 허무 속에서도 나는 의미를 찾고 싶다. 삶은 물론 맑은 물이 아니다. 오염되어 혼탁해진 폐수와도 다르다. 적당히 뿌연 빛깔로 묵직하게 흘러가는 강물로 삶을 정의해보려 한다. 맑은 강물로 시작했다가 곳곳에서 유입되는 타인의 삶과 마주친 흔적들이 함께 흘러가는 것. 삶과 삶이 마주 본 순간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의미 있는 흔적으로 남으리라 믿는다. 잊히더라도 어딘가에는 부유물로 남아 내 안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줄 것이라 믿는다.
<후기>
콘스탄틴 폰 위트에서 어쩐지 기분이 쎄하더니 게이 오를로프에서 무너졌다. 인물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이런! 분명 한글로 된 책인데 당최 내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과속방지턱들은 이노무 이름들이었다.
종이를 펼쳐놓고 볼펜을 들었다.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왔다. 한 명 한 명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기록을 하고 관계도를 그려나갔다. 이 인간은 요 인간의 할아버지, 이 인간들은 친구 사이, 얘네들은 연인, 저 인간은 간지처럼 사이사이 끼워지는 탐정. A4용지를 빽빽이 메운 이름들을 보며 점점 인내력의 배터리는 방전이 되어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그래도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이라니 참아보기로 했다.
‘콘스탄틴 폰 위트, 기 롤랑, 폴 소나쉬체, 장 외스퇴르, 스티오파 드 자고리에프, 조르주 사셰, 조르지아제, 게이 오를로프, 갈리나, 키릴 오를로프, 이렌 조르지아제, 장 피에르 베르나르디, 월도 블런트, 러키 루치아노, 하워드 드 뤼즈, 존 길버트, 장 심티, 마벨 도나위, 프레디 하워드 드뤼즈, 클로드 하워드, 로베르, 앙드레 빌드메르, 페드로 맥케부아, 루비로사 포르피리오, 오르주 스테른, 주비아 시라노, 지미 페드로 스테른, 레옹 반 알엔, 드니즈 쿠드뢰즈, 알레그 드 브레데, 장 미셀, 망수르, 호이닝겐 후네, 알렉 스쿠피, 자크, 드 스베르, 카안 부인, 키릴, 보브 베송, 앙이 위베르누아, 조르주, 자클린, 앙드레 카를, 캉팡 부인, 프리부르...’
이 안에 기억 잃고 그 기억 찾아가는 주인공 한 명 있다.
차라리 우리나라 이름이면 나았을까. ‘이종혁, 송중기, 안재현, 양세종, 공유,...’ 이런 식이면 얼마든지 흐뭇하게 상상하며 읽었을 지도 모를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