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몸안의 지식여행 인체생리 - 신비롭고 놀라운 몸의 원리를 찾아 떠나는 호기심 탐험!, 재미있는 교양 과학 산책
다나카 에츠로 지음, 황소연 옮김 / 전나무숲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생물이란 끝도 없이 외워야하는 암기 과목에 불과했다. 해면동물, 환형동물, 편형동물, 극피동물, 절지동물, 강장동물, 연체동물,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균류, 양치식물, 선태식물, 종자식물, 균류, 원핵생물, 원생생물, 고세균, 진정세균... ,, 헝클어진 머릿속을 진정시켜도 방앗간 가래떡 나오듯 희한한 이름들은 줄줄이 이어졌다. 뭔 생물이 이리도 수없이 꿈틀거린단 말인가. 세포 내 소기관들의 명칭은 또 어떤가. 리보솜, 리소좀, 미토콘드리아, 골지체, 중심체, 중심립, 소포체, 방추사, 액포는 그나마 나은 축에 속했다. 아밀라아제(아밀레이스), 리파아제(라이페이스), 펩티다아제(펩티데이스), 말타아제(말테이스), 락타아제(락테이스). 아제 아제 시리즈에서 남아있던 미련의 찌꺼기가 싸악 설거지되었다. 하아, 생물과는 맞지 않아, .

 

생물을 이해과목이라 주장하시는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을 연수 때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대변이 왜 황금색인 줄 아세요?” 내 선입견을 깨뜨려버린 운명의 질문이다. 산소를 잃은 적혈구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쓸개즙이 소화 과정에서 분비되어서 그렇다고 하셨다. 찌꺼기까지 남김없이 활용하는 인체의 신비에 반해버렸다. 몇 가지 사례를 더 들면서 생물 과목의 재미를 어필하신 선생님은 나를 생물 마니아로 포획하는 데 성공하셨다. 아하! 몰입도가 확 높아지면서 전공인 물리보다 더 좋아져버렸으니. 방학 때 연수를 받고 난 후, 수업 시간에 신이 나서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당시 많은 아이들은 내 전공이 생물인 줄 알았다고 했다. 몰랐으니 여기 저기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를 했고, 공부하다보니 점점 더 생물의 매력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여전히 나는 별자리 다음으로 생물 단원을 가르칠 때 가슴이 뛴다.

 

이 책에서 나는 두 번째 운명의 기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휘리릭 넘겨보았을 때에는 교과서 같은 냄새가 풍기더니, 정독할수록 재미있는 거다. “이거 너무 재밌다!” 지나가던 고2 딸에게 말하니, “엄마도 역시 이과 체질이네.” 한다. 어떤 부분은 소설보다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니 이과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과와 이과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배합되었다. 몰랐던 점도 많이 알게 되었다. 씹던 껌이 풍선껌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느낌이랄까. 책을 향해 숨결을 불어넣으니 상식이 확 부풀어 올랐다.

1부는 <인체 생리>로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서 한 번씩은 얕은 지식으로 언급되는 내용들이다. 혈액, 소화, 호흡, 순환, 배설, 내분비, 신경, 감각, 대뇌, 반사, 근육, 피부, 생식 등. 수업 시간에 해당 단원을 가르칠 때 투입하면 살짝 깊이 들어가면서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담겨있다. 두고두고 읽어보려 한다.

2부는 <임상 생리>로 현대 과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줄기세포, 한방치료, , 항생물질, 기생충, 프리온, 외인성 내분비 교란 화학물질, 프리라디칼, 방사선, 전자파 등. ‘과학책 읽어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학업에 대한 의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요즘의 중 3교실에서 매시간 한 쪽씩 읽어주고 싶다.

 

몇 주 전, 어깨 도수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도수 치료>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다.

맨손으로 / 몸을 치료받는다는 것은 / 매번 뭉클하고 / 벅차오르는 일이다 // 금속성의 날카로움이나 / 화학물질의 건조한 치유에는 /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 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든다 // 아픔에 반응하는 몸이 / 정직하게 움츠러들면 / 정성스레 조절되는 / 세심한 강약의 다독임 // 36.5도를 품은 경계가 / 나의 경계와 맞닿을 뿐인데 / 따뜻한 물에 뿌려지는 소금인양 / 나의 고통은 서서히 녹아든다 // 손과 몸 사이 / 그 미세한 간극을 통해 /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 건네어지는 걸까

이 책을 통해 시에서 언급한 존재하지 않는,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아이가 상처를 입었을 때, 엄마가 달려가서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 통증이 누그러진다. 통증은 대뇌에서 감지하는데,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행위가 뇌에서 엔돌핀이라는 물질을 분비시켜, 그 결과 통증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p147~148)’

 

문학은 고전을, 과학은 최신판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발전되고 변화하는 과학계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어 보인다. 아이들에게 종종 말한다. 과학교과서에 실린 지식들은 교과서가 출판되기 직전까지의 진리이지 고정 불변의 것은 아니라고. 이 책이 나온 2003년으로부터 15년이나 지난 책이기에 새로이 발견되었거나 변경되어야 할 지식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일부 번역서에서 보이는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몰입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적혈구의 찌꺼기가 쓸개즙의 형태로 남김없이 활용된다는 점, 사구체에서 걸러진 포도당이 세뇨관에서 재흡수 되어 단 한 분자의 포도당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고, 우리의 몸은 스스로를 소중하게 아끼는 방향으로 시스템화 되어있음을 깨닫는다.

표현방식은 달라도, 지식의 깊이가 세월에 따라 달라지더라도 인체에 대하여 변하지 않는 사실들은 선명하게 존재함을 알았다. 몸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을, 정신 못지않게 소중히 여겨야한다는 것을, 이유 없는 변화는 없으므로 몸이 하는 말에 세심하게 마음을 기울여야함을, 방대한 지식을 훌쩍 넘어 신비한 매력을 지녔음을. 이런 이유로 인체는 세상에 존재하는 감동스런 대상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하려 한다.

 

 

p50, 그림 : 글리세린 글리세롤

p60, 9째줄 : 암모니아로 암모니아를

p99, 1째줄 : 차단하더라고 차단하더라도

p268, 3째줄 : 전자파 전파

p269, 그림과 본문 : 양자 양성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8-12-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죠?
생물이 워낙 문과와 이과적 요소가 섞여 있는 과목이기도 해요 (저, 생물 전공자 ^^).

나비종 2018-12-04 22:54   좋아요 0 | URL
예!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생물의 매력이 흠씬 묻어나는. . 지식이 업그레이드 되었어요ㅎㅎ
 

<제목> 도수치료사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떡 드세요" 들으며 출근길 자동차 시동을 거는 청취자입니다. “떡 드세요와 음악 한 곡 정도 듣는 시간은 자동차 쓰나미가 밀려오기 전이라 직장까지 5분 정도면 도착을 해요. 어쩌다보니 거의 매일 방송을 청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몇 주 전부터 방송을 들으면서 생각했어요. 나도 사연을 보내면 될까? 에이, 저런 건 특별하거나 행운이 많은 사람이나 채택되겠지 하구요. 오늘, 드디어 결심을 했습니다. 제 마음을 전하고 싶은 분이 생겼거든요. 사연을 쓰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망설여져 손끝이 주춤거리지만 그분에 대한 고마움이 제게 용기를 주네요.

 

저는 올해로 오십 세가 되었습니다. 반백에 남들 한다는 거 다 해 보려나 제게도 오더군요. 한 달 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이요. 충돌 어쩌구 하며 무슨 전문용어로 설명해주시던 의사선생님의 친절함에도 불구하고 병명은 도통 못 알아듣겠더라구요. 제 왼팔이 저 하늘의 별을 당당하게 가리킬 그날을 위해, 퇴근 후 정형외과와 물리치료실로 일주일에 서너 번씩 출근하고 있습니다.

 

어깨 주사, 팔 꺾기, 충격파, 전기 치료, 약 등 고통의 나날을 안고 지낸지 3주쯤 지났을 때, “도수치료라는 것을 받게 되었어요. 전문 물리치료사 선생님께서 손으로 통증 부위를 마사지하고 운동시켜주시는 거라더군요. 오늘까지 다섯 번을 받았는데요, 제게는 그 어떤 첨단 기계로 하는 치료보다 훨씬 효과가 있더라구요. 치료가 끝나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저를 맡아주시는 OOO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시도 지었어요. 제목은 <도수치료>예요.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이 환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글에 담아보았어요. ^^;;

 

도수치료

 

 

맨손으로

몸을 치료받는다는 것은

매번 뭉클하고

벅차오르는 일이다

 

금속성의 날카로움이나

화학물질의 건조한 치유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든다

 

아픔에 반응하는 몸이

정직하게 움츠러들면

정성스레 조절되는

세심한 강약의 다독임

 

36.5도를 품은 경계가

나의 경계와 맞닿을 뿐인데

따뜻한 물에 뿌려지는 소금인양

나의 고통은 서서히 녹아든다

 

손과 몸 사이

그 미세한 간극을 통해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가

건네어지는 걸까

 

앞으로 몇 달은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겠지만, 조금씩 당당해지는 왼팔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더라구요. OOO 선생님! 부족한 저의 시가 선생님 손끝의 고단함을 0.1그램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부록으로 배달되는 떡을 직장동료 분들과 기분 좋게 나누어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내주시는 팔 운동 숙제도 부지런히 해 갈게요.

 

 

*2018.11.21. 인터넷 게시판에 사연 올림, 내일 소개된다고 함, 신기하고 재미있음ㅎㅎ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8-11-27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방송인지 알 것 같아요 ^^
그나저나 치료 열심히 받으셔서 불편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수치료 효과가 좋은 것 같더라고요.

나비종 2018-11-27 09:37   좋아요 0 | URL
가끔 들으시는군요. 출근 시간과 맞아들어가서 5분 내외로 듣고 있습니다.
옷을 입고 벗는 데 큰 불편함은 없어졌어요. 초기에만 해도 항상 왼팔 먼저 끼고 오른팔이 거들었거든요.^^;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퇴근 후 시간을 병원에서 많이 보내고 있지만, 몸이 말을 하는 거라 생각하고 성실하게 치료받고 있습니다.^^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은 막연한 것이었다. 길을 걷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어, . 삶에 미련 따위 하나도 없어. 해탈의 가면을 쓴 나는 쿨 한 척 어설픈 말을 번지르르 늘어놓았다.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운 적도 없으면서, 그 순간의 느낌을 디테일하게 상상해본 적도 없으면서 종종 죽음을 입에 올렸다.

수많은 죽음과 삶을 지켜본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기록. 첫 장을 펼쳐드는 마음은 여느 책과 다르지 않았다. 기쁨이나 슬픔, 사랑이나 아픔 같은 감정들과 죽음은 별반 차이가 없는 색깔이었다. 내가 상상해온 죽음은 한없이 쉬운 것이었으므로.

 

흑백의 이미지로 남아있는 30대의 많은 날들이 있었다. 퇴근길에는 무거운 납덩이를 발목에 매달고 또 다른 직장과 다를 바 없는 일터를 향했다. 의무만으로 꽉 매인 24시간. 나에게 집이란 ‘home’이 아닌 ‘house’이였다. 한밤중 아파트 13층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며 어두운 바다와 같은 저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경직된 심장의 아바타였다. 뾰족한 세상의 모서리에 한 발로 서 있는 기분에 혼자 된 장소에서는 자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익숙하지 않은 발걸음인 듯 삶을 한 발 두 발 내딛으며 비틀거렸다. 걸을 때마다 생각했다. 우연인 듯 차에 치이거나 사고가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마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지는 못했다. 운이 없어 의도치 않게 살아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기는 싫었으니. 그저 자연스럽게 나의 삶이 끝나기를 바랐다.

 

부끄럽다, , , 부끄럽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점점 이런 생각이 차올랐다. 꾹꾹 눌러쓴 기록은 단순한 글자의 조합이 아니었다. 피를 토하듯 문장을 토해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수면제를 먹거나 12층에서 추락하거나 목을 매거나 철로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한 사람, 재혼한 남편이나 동거남, 동거녀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 루게릭병이나 담도 암 말기의 사람, 눈에 대못이 박힌 사람에 이르기까지 죽음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수시로 다가왔다. 시간의 화살표 위에 예고 없이 불쑥 다가와 너무도 다양한 방법으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안락사에 대한 갈등, 시신을 바라보며 죽음을 마주하는 의식, 의사로서 가까이해야 하는 수많은 죽음들이 0.1mm펜으로 그린 정밀화처럼 선명하게 묘사되었다. 뚝뚝 떨어지는 시뻘건 피의 비릿한 냄새가 훅 끼얹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죽음이 담겨있는 19편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먹먹하다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느린 무게감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죽음의 동굴을 빠져나오니 2부에는 삶에 담긴 자잘한 유머가 기다렸다. 19편의 이야기를 지나면서 중간 중간 풋 웃음을 터뜨렸다. 치열한 삶에 담긴 유머는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 조각처럼 반짝였다. 죽음의 순간을 기록하면서도 줄곧 삶을 보여주던 그를 생각하니 이조차 물컹하게 녹아들었다.

겉표지에 적힌 부제가 눈에 띈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경계를 마주한다는 것은 경계를 중심으로 양쪽에 존재하는 대상의 온도 차를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땅과 대기의 경계에 있는 인간은 가벼운 공기를 호흡하면서 생명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차가운 우주에서 날아온 유성은 대기권의 경계를 마주한 순간 불에 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맞이할 테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경계를 바라보는 순간은 얼마나 먹먹하게 스며들어올까. 더군다나 경계를 긋는 일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는 인간이라면. 경계를 걷고 있는 이의 고독을 상상했다. 아득하게 깊고 짙푸른 바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살아야 합니다, 꼭 살아야 합니다. 그의 모든 기록은 같은 주제로 점철되었다. 어떠한 사람이 오든 절대 비켜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 스스로 말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이 빨려들 듯 다가온다 하는 사람.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뛰어들어 삶의 끈을 붙잡으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죽음이란 말을 입에 자주 달고 살았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십여 년 간 내가 안고 있던 죽음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절실했고, 20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복기되는 느낌은 눈가를 시큰하게 만드니. 묵직한 강으로 흐르던 시간들을 건너온 지금, 책 안에 담긴 죽음의 사례들을 보며 깨닫는다. 사실 죽음이란 내가 지녔던 마음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길어 올려야하는 심연의 대상이었다. 나의 것은 죽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건 차라리 죽음의 색깔에 가까운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마음에 기대어 그 어느 때보다 살고 싶었던.

 

내 글을 그렇게 읽는 사람이 세상에 한 분 있다.(p315)’ 저자는 후기에서 자신이 쓴 글을 마냥 편하게 읽을 수 없던 어머니를 언급한다. 친정어머니를 떠올리며 공감한다. 작년 봄,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은 적이 있다. 현장에서 제시된 세 가지 주제 중 하나를 택해 두 시간 가량 글을 써서 내는 대회였다. <이팝꽃처럼 솔솔> 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공양주로 일하던 / 어미의 소원은 / 이팝꽃처럼 솔솔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내 새끼 뱃속에 담아 / 배불리는 것이었다 // 부처님 공양하고 / 남은 밥 찐 도시락 / 어느 날 삭아버려 / 축 늘어진 이팝꽃 / 자식은 밥을 버리며 / 철없이 투덜댔다 // 30년 뒤 절 마당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이팝꽃처럼 솔솔 / 지어주고 싶었지 / 버려진 이팝꽃은 / 노모의 마음속에서 / 여전히 뜨겁게 / 피어나고 있었다

며칠 후, 대회 결과가 발표되자 우쭐했다. 자랑스러운 둘째 딸이 쓴 시라며 전화로 한껏 자랑하고 어머니께 메일로 시를 보내드렸다. 한참 지나 친정에 갔을 때 당신은 시를 읽고 우셨다고 했다. 더불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날은 쉬어버린 밥을 버린 하루였는데, 밥을 먹지 못하고 집으로 가져왔던 날들이 종종 있었다 하셨다. 자식에게는 우연히 떠오른 하루가 당신께는 늘 안고 사시던 날들이었던 거다. 내가 가난의 온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은 그런 날들을 통과해서였을 테니 오히려 감사한 경험인 것을.

 

책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동판화를 새기듯 한 자 한 자 쓰인 제목 만약은 없다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만약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의 수이다. 과거를 기억하며 되뇌는 만약은 후회의 다른 말이며, 미래를 상상하는 만약은 발뒤꿈치를 들고 팔을 한껏 뻗어도 닿지 않는 별이다. 우리는 단지 현재만을 절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살아가야 할 뿐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가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나바호 인디언은 이와 관련해서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라고 했다 한다. 여러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등장했던 책이지만 이 모두를 삶이라는 보자기로 묶어 짊어지고 걸어가는 한 사람의 삶이 담긴 책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묵직하면서도 징 했다. 획 하나도 허투루 긋지 않고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내려간 초등학생의 8칸 국어 공책이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불현듯 꾹꾹 내딛고 싶어졌다. 나의 삶을 향하는 발자국을 8칸 국어 공책 속 한 글자처럼 찍고 싶어졌다.

 

*2018.10. J독후감 공모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1-16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8-11-16 23:07   좋아요 0 | URL
하루 하루를 정성껏 살아야 하는데 가끔 나태해질 때가 있어서^^; 그래도 계속 노력을 해야겠지요?

zzakzi 2018-11-1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본 후기 중 가장 멋진 글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비종 2018-11-16 23:10   좋아요 0 | URL
원래의 책에 비하면 제 글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걸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제가 받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는데, 잘 전달되었나 싶어 기분이 좋습니다.ㅎㅎ
 

잃어버린 것이지

잊어버릴 것은 아니다

찾아야 했던 거지

참아야 했던 것은 아니다

눈물 흘려야 했던 거지

눈감아야 했던 것은 아니니

 

세월 지나 잊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차마 목적어를 뱉지 못하고

지킬 수 없었던 자는

지켜볼 수밖에 없던 자는

알아야 하는 거다

안아야 하는 거다

 

차라리 목적어를 삼키고

남겨야 하는 거다

남겨져야 하는 거다

남은 자의 몫인 거다

남겨진 자의 몫인 거다

 

 

* 2018. 10. J시 공모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마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키보드 위에 놓인 양손은 1시간째 멈춰있다. 텅 빈 모니터. 쓰나미 직전, 바닷물이 빠진 해안가처럼 고요하다. 커서만 깜빡이는 모니터와 책 표지에 있는 한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다. 따스한 눈길로 바깥을 응시하는 주름이 깊다. 시선의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것 같아서 목에 걸린 건 아무것도 없는데 숨을 편하게 쉴 수가 없다.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역사나 정치 분야의 뉴스는 당연한 듯 삶에서 걸러졌다. 학창 시절에 근현대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교과서가 유일했다. 그마저 시험이 끝나면 대부분 증발되는 지식에 불과했다. 선택의 영역이라 여겼다. 나와는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라고. 이념이나 사상 따위는 몇몇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태극기를 자신 있게 펄럭이는 어버이도, 피켓을 들고 마주 서는 효녀도 아니지만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사상은 자유이니. 다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마찰음이 문제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움찔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엉거주춤하게 서성인다. 시간이 지나면 들썩이던 마음은 용수철인양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념에 있어 중간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안다. 침묵은 강자에 편승한다는 암묵적인 동의임도 잘 안다. 모르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알면서도 나서지 못하는 소심함에 더욱 쪼그라든다. 스스로 느끼는 불편함이다. 읽어가는 책이 늘어갈수록 팔이 조금씩 반대방향으로 꺾이는 듯하다. 언제쯤이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며 벌떡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까. 소심함을 넘어서는 용기의 임계점은 얼마만큼 일까.
 
이런 나라서 노혁명가의 삶을 마주하고 함부로 뭐라 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무슨 말을 쓸 수 있을까, 나는. 물컹거리는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무슨 말이든 써보려 한다. 심장언저리를 쿡쿡 쑤시는 껄끄러움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역사와 정치에 관한한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관심과 지식을 지녔던 내게 이 책이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를. 390페이지에 담긴 한 인간의 역사가 또 다른 인간을 어떻게 흔들어놓았는지에 관하여. 더듬더듬 움직이는 손가락이 여전히 무겁다.
 
1955년부터 1991년까지 비전향 장기수로 36년이나 투옥되었던, 1920년에 태어나 2010년에 생을 마감한 혁명가 허영철. 그가 2006년까지 구술한 자서전과 인터뷰가 담긴 책이다.
평상시의 속도라면 완독하는 데 몇 주 이상은 걸릴 터였다. 휘리릭 훑어보니 생소한 현대사적 사건들도 만만찮게 등장한다. 재미있는 소설도 아니고 각주도 많은 이 책을 한 달 내로는 읽을 수 있을까. 첫 장을 펼치고 아득했다. 일러두기를 읽는 순간 괜한 우려였음을 알았지만. 자그마한 글씨에서 편집자의 정성이 묻어나왔다. 윤구병 선생님의 솔직한 추천사에 마음이 조금 더 당겨졌다. 그리 번잡스럽지 않게 현대사와 저자의 삶을 바라볼 수 있던 것은 세심한 편집의 역할이 컸다. 나흘 만에 책의 뒷날개를 덮었다.
 
소위 공산주의자가 쓴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좌파라 일컬어지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책은 간혹 접했지만, 작가의 이름 앞에 붙은 비전향 장기수라는 수식어는 선뜻 접근하기 어려운 벽으로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전쟁을 해야 한다며 과격하게 주장하는 내용들로 가득할 것만 같았다. 한동안 책꽂이에만 꽂아놓았다. 가볍게 읽기가 어려웠다.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막연하게 무섭기도 했다.
오랜 망설임을 지나 선입견을 안고 펼쳐든 책이라 더욱 인상적이었던 걸까. 인민, 동무, 공산주의, 노동자, 북한, 빨치산, 전쟁, 당과 같은 낱말에서 이물감을 느꼈지만 내용은 의외로 술술 읽혔다. 낯설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낯설었다. 곳곳에서 배어나오던 따뜻함에 혼란스러웠다. 책에도 온도가 존재한다면 이 책은 36.5도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 이념과 역사의 의미와 자신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보냈다.
 
공산당에 대하여 최초로 썼던 글은 이승복 어린이와 관련된 산문이다. 다니던 국민 학교에서는 매년 반공 글짓기 대회를 열었는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시작하는 문장을 썼던 기억이 있다. 상을 받고 뿌듯했던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체제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반공방첩을 당연한 이념으로 여겼던 시절이었다.
1976년, 국민 학교를 입학했다. 평범한 대한민국의 어린이였던 나에게 공산당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내용은 절대적이었다. 북한 사람들 대부분은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채 거리를 배회하고, 당을 배신하는 사람들은 아오지 탄광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탄압을 받는 줄 알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빨갱이, 공산당은 기다란 총을 들고 군복을 입고 도끼로 사람을 내리치는 악마와 같은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6월 즈음 며칠 동안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서 시내를 통과하는 통학 버스를 타고 다녔다. 1987년이었다. 한참 지나서야 그날들의 의미를 알았다. 기록된 역사로 내 삶 가까이 다가왔던 유일한 경험이었다.
 
교과서 밖에서 근현대사를 접한 기억은 영화 몇 편이 대부분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북한군과도 끈끈한 정이 오갈 수 있음이 낯설었다. 10.26의 역사적 의미도 모른 채 <그 때 그 사람들>을 보았다. 총을 들고 누군가를 죽이는 사람이 무조건 나쁜 줄로만 알았다. 칙칙한 내용은 섬뜩한 이미지로만 남았다. 5.18을 사태로만 알고 있던 내게 <화려한 휴가>는 충격 자체였다. <작은 연못>에서 적나라하게 구현된 전쟁의 참혹함은 한동안 마음에 머물렀다. <동주>에서는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았다.
조금씩 의구심이 일었다. 옳다고 믿어왔던 사회에 이면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뉴스로 보도되는 카메라 밖 세계에 다른 풍경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안다고 생각하는 체제의 모습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허영철의 기나긴 여정을 통해 한국의 역사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사상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올곧게 걸어온 이의 일생은 얼마나 묵직하고 깊은가. 역사와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모습이 <나무를 심은 사람>에 등장하는 양치기 할아버지와 겹쳐진다. 스스로 특별하지 않다 말하는 겸손한 걸음이 존경스럽다.
그의 말처럼 6.25가 북침이냐 남침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구술 역시 주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이니 100% 옳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지배자가 아닌 민중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상에도, 진정한 혁명이란 민중에게서 시작된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바탕에는 사람이 있어왔다는 것을. 말로나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숭고한 영혼의 결이다.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민주주의냐는 상관이 없었다. 이념의 바탕에 무엇이 자리하느냐로 판단할 문제였다.
 
각주와 표에 나온 각종 포고문도 꼼꼼히 읽었다. 본문만큼이나 시선이 갔다.
동일한 역사를 바라보는 남과 북의 시각 차이를 비교하는 각주가 흥미로웠다. 같은 입장을 취할 때에는 반가웠다. 무조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해석에서는 남측의 서술에 마음이 기울 때도 있었고, 북측의 서술이 와 닿을 때도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서와 각 측 대표의 포고문에는 교과서로 접하지 못했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사고의 폭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균형이 맞춰지는 듯 했다.
 
난 이제껏 뭐했나 싶어. 갑자기 한숨 섞인 메시지가 온다. 나이 오십인데 해놓은 게 아무 것도 없어. 우울해하는 친구를 애써 위로하지만 흐물흐물한 화살처럼 설득력이 없다. 이 책을 통해 허영철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연표를 보니 화산대와 지진대와 판 경계가 떠올랐다. 3가지가 표시된 세계 지도를 투명한 OHP필름에 복사하여 겹치면 거의 일치하는 것처럼, 1919년부터 2005년까지의 남북의 한국사와 개인의 연보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그의 삶이 어느 순간부터 역사와 겹쳐져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 역사는 한 번도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역사를 향해 용기 있게 뛰어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릴 때 이산가족상봉 인터뷰가 TV로 중계된 적이 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산당의 탄압을 받아왔다면 그때까지 제대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없어야할 것 같아서였다. 북녘 땅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북한보다 남한의 GNP가 높은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마주이야기에서 했던 그의 답에 여운이 남는다. 잘 산다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안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세계에서 행복 지수가 가장 높다는 부탄을 떠올린다. 경제력이 삶의 모든 면을 대체할 수 없음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사는 걸까.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겠다.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뉴스로 정치면이 북적인다. 그가 살아있다면 역사적인 이 장면을 무어라 표현했을까. 감격에 겨운 가족들이 50년만이다 70년만이라며 울먹인다. 그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몇 십 년 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남과 북을 떠나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일어난 변화이다. 인터넷 뉴스를 꼼꼼히 정독하는 내 모습이 멋쩍으면서도 묘하다.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바라볼 때 사람들에게는 저울이 하나씩 주어진다. 지금 나는 저울의 어느 지점을 붙들고 있나.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점점 균형이 맞추어지는 느낌이다.
 
작가가 언급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이력들을 보며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생각한다. 실화를 근거로 한 영화의 엔딩크레디트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는 기분이다. 역사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구나. 그냥 흘러가는 역사는 한순간도 없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이며 관점을 지닌다고 하워드 진은 말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기록되는 역사는 다만 펜을 쥔 자의 관점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역사도 옳다 그르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역사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삶의 총체라 생각하니 역사의 영역이 확 넓어진다.
 
세상에는 다양한 이념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맞고 사회주의가 틀리다 말하지 못한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이념에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절대적으로 옳은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를 뿐이다. 다가올 미래의 역사에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이념이 정립될지 모를 일이다.
나침반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저마다 다른 위치에서 자침은 다른 각도로 움직일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나침반을 동시에 들고 있는 장면을 상상한다. 자침은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역사나 이념도 이런 것이 아닐까. 제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듯 보여도 결국은 한 곳을 향하게 되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한결 가볍다. 이제는 외면하지 않고 한 방향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중심에 사람이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겠다.


* 2018. 8. H독후감 공모, 동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