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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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땅으로 돌아오는 발바닥처럼. ‘외로움이란 매순간 이렇게 나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푹 꺼지는 싱크 홀처럼 언젠가, 아마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을까. 인간은 원래 고독한 거야. 많은 철학자와 작가들의 잠언과도 같은 말도 별반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 것이 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바라볼 때와는 확연히 다르니까. 거리가 확보된 관찰은 시각적인 효과만을, 조금 더 가까워진다면 후각적인, 손을 뻗는다면 외피의 감촉만을 느낄 뿐이다. 옷을 직접 입는 것은 내피를 온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촉각은 이런 면에서 마음으로 가장 빠르게 스며든다. ‘외로움이 감각되는 자극의 일종이라면 아마 촉각으로 감지되는 것이리라. 적당한 슬픔이 고인 축축함과 공허함으로 바싹 말라버린 푸석거림과 스스로의 체온만으로 데워진 몸과 옷의 미세한 간극을 선명하게 느끼는.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낯선 풍경의 공기를 전하는 여행 산문집이다. 작가의 발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으로 남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여행이란 본디 외로워지는 일이니까.(p225)’ 글에서 채도가 다른 작가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언젠가는 혼자 여행을 하고 말거야. 막연히 꿈꾸곤 했다. 여행의 결론이 외로워지는 거라면, 지금도 근근이 버거운 외로움을 걸어가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비 내리는 바닥에 흘러내린 기름을 보듯 어지러워졌다. 약간의 거부감이 들어앉아 그의 문장들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마음이 계속 겉돌았다.

 

내 외로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것은 그것을 안고 디뎌야할 발걸음의 방향이었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운 물체를 손에 올려놓고 어찌해야 할지 방황하는 과정이랄까. 마지막 부분에서 따뜻한 빵과 같은 온기를 주는 답을 찾았다. <사진으로 다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란 제목의 글에서였다. ‘포토샵이 사진의 노출을 보정하듯 기억은 과거에 대한 판단을 보정한다. 좋았던 시절은 더 또렷하게, 나빴던 시절은 더 흐릿하게 혹은 그 반대로. 그제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바라보느냐, 더 나아가서 어떻게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p235)’

 

<모든 게 끝났으니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라는 마지막 글을 보자 작가가 이 산문집을 쓴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건 여행의 목적에 관한 생각이었고, 이제껏 그가 말했던 수많은 여행지에서의 경험은 하나의 점으로 모아졌다. 이 책은 여행지의 풍광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었다.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하게 하는 출발의 호루라기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걸.(p255)’,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때 나도 바뀐다.(p256)’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일 수밖에 없다. 외로움을 감당하는 것도. 지구라는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 아니라 기준점을 바꿔야하는 일이었다.

 

-저 산의 높이가 얼마나 될 것 같아?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꼭대기를 가리키며 친구가 물었다.

-글쎄, 한 구백 몇 미터?

인터넷으로 산의 높이를 검색해본 친구가 감탄한다.

-역시, 과학 쌤!

-그냥 감으로. 한라산 높이가 1,950m이라니까 그것보다는 훨씬 낮을 테니 대충 찍은 거야. 근데 참 놀라워. 저게 1킬로미터 가까이 된다니.

-높이의 기준이 여기부터가 아니니까 보정을 한다면 그보다는 낮겠지?

!!! 잠시 잊고 있었다. 모든 산의 높이는 해발고도라는 사실을. 우리가 서 있던 장소는 기준점으로부터 다소 높은 곳이었으니 나의 감은 엄청나게 빗나간 셈이다.

 

나만의 이야기를 보정해가는 과정에도 외로움은 늘 바탕화면처럼 깔리며 나를 당길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여행이란 그 기준점을 다소 높여줄 수 있는 썩 괜찮은 방법이라 말하고 싶다. 여행이란 외로움을 보정하는 과정이라고. 중력처럼 당기는 외로움을 그나마 견디며 걸어갈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건조해보였던 보정이란 낱말이 위안으로 다가온다. 실제로는 그다지 높지 않다며, 바라볼만 하다며, 조금씩 쉬면서 올라가다보면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높이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의미를 품은 채. ‘여행이란 말이 중력처럼 나를 당긴다는 느낌이 들자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졌다.

 

 

p105, 9째줄 : 타시오 타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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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괴짜 생물 이야기
권오길 지음 / 을유문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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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공간에 가두면 나중에 한계를 확장해주어도 뛰는 높이가 높아지지 않는다는 벼룩의 이야기. 가능성을 발휘할 영역을 제한하지 말라는 비유로 많이 등장한다.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아이들의 가능성을 나의 좁은 생각으로 가두어두면 안되지. 창의성이 특히 강조되는 과목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이야기였다.

연수를 받으면서 들었던 코이의 이야기는 놀람을 넘어 충격이었다. 벼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관상어의 일종인 이 물고기는 사는 장소에 따라 몸의 크기가 달라진다나. 한데 달라진다고 하기에는 변화의 폭이 엄청나다. 어항 속에서 자라면 5~8cm, 연못에 풀어놓으면 15~25cm, 넓은 강물에서는 90~120cm 정도로 자란다고 하니. !!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느낌표가 심장 한가운데로 찍힌 듯 찡한 감동조차 일었다.

 

둘러보면 세상은 온통 놀라움 투성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 몸에서 이유 없이 일어나는 작용은 없어 보인다. 몸을 이루는 기관과 조직, 세포들의 생리를 살펴보면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적혈구의 시체가 똥오줌의 색을 결정하는 빌리루빈으로 바뀌는 현상으로부터 몸 안의 물질들은 수시로 변화무쌍하게 변신한다. 모든 활동은 생명 유지를 위한 목적을 향한다.

빈대와 이 조차 인간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는 존재로 등극한다. 흔히 볼 수 있거나 잘 안다고 착각했던 생물들의 매력이 새삼스럽다. 동식물과 균류, 하다못해 세균에 이르기까지 생존을 위한 치열함은 크기나 구조의 복잡성을 망라한다. 재미 이상의 경외감이 느껴진다.

이 책의 매력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생물학적인 전문 지식과 저자의 연륜 깊은 경험담이 조화롭다. 생명에 대한 사유와 더불어 삶을 고찰하게 된다. 빠른 속도로 읽히다가도 삶을 돌아보면서 잠시 읽기를 멈추게 만든다. 상황을 묘사할 때의 비유나 저자의 문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풍성한 상식과 이야깃거리를 많이 건네주는 책이다.

 

<사람은 모두 평발로 태어난다> 를 읽고 나서는 내 발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마사지해주고 싶어졌다. ‘아름다운 손은 기꺼이 남을 잡아주는 손, 다정히 남을 잡아 주는 손이 아닐까.(p62)’ <손가락을 꺾으면 소리가 나는 이유> 에 나오는 이 문장 앞에서 생물학적인 손이 아닌 행동하는 손을 생각했다.

생명을 키우고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모든 농부를 존경한다. <식물의 소리 없는 전쟁, 타감 물질> 에서는 농사나 나무 키우기는 한마디로 기다림이다.(p215)’ 라는 문장에서 농부로서의 삶에 묻은 인고의 시간들을 다시금 가늠해보았다. <미기후를 이용하는 생물들의 지혜>에서는 정녕 삶이 버겁고 팍팍하여 힘겹고 지겹다 싶으면 겨울 밭가에 나가 보라.(p222)’ 는 문장에 위안을 받았다.

과학 지식에 대한 견해가 평소의 내 생각과 일치하는 문장을 발견했을 때에는 반가웠다. ‘과학은 뱀 같아서 절대로 뒷걸음질을 못 하고 앞으로만 움직이는데 숨 가쁘게 내닫는 과학의 발전 속도에 맞추다 보면 어김없이 어제의 이 오늘의 거짓이 되고 마는 일이 쌔고 쌨다.(p88)’ 수업시간에 자주 말했었다. 지금 배우는 지식은 교과서가 편찬될 때까지의 진실이라고. 우리는 과학을 배우면서 항상 ?’ 라는 질문을 놓으면 안 된다고.

 

앎의 한계는 어느 만큼일까. 이 책을 통해 생물에 대한 앎의 크기가 커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코이 물고기가 떠올랐다. 어항만 했던 상식의 폭이 연못으로 무대를 옮긴 듯 했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폐에 한껏 신선한 공기가 들어차는 느낌을 안겨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내일은 먼저 코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내가 먼저 틀을 깨고 넓어져야 하리라.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는 앎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p11)’ 는 노학자의 겸손한 말을 떠올리며 넓은 강물로 옮겨간 코이를 상상해본다. 한껏 확장된 존재의 자유를 가늠하자니 문득 벅차오른다.

 

p42, 밑에서 6째줄 :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밀리미터인 직육면체에 ~ 정육면체에

p120, 9째줄 : 들어난 드러난

p140, 밑에서 3째줄 : 있는 데 있는데

p148, 밑에서 2째줄 : 들어나지 드러나지

p149, 3째줄 : 채칠 수 재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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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 김제동의 헌법 독후감
김제동 지음 / 나무의마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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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잘 모른다.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책을 따라가 보니 우리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무는 글들이었구나 싶다. 굳어진 공기 밥처럼 딱딱하고 말라 보이는 헌법에, 저자는 물을 한껏 붓고 끓여서 부드러운 죽으로 만들었다. 헌법이 친숙하게 다가왔다. 갖가지 비유와 유쾌한 묘사로 헌법을 제대로 소개한 책이다.

메인보다 주변에 눈길이 머물 때가 있다. 횟집에서의 계란찜이나 새우튀김, 동양화에서의 여백, 드라마에서의 애드 립, 영화에서의 씬스틸러처럼. 작은 제비꽃 같은 요소들이 마음을 제대로 훔칠 때, 흘러나온 여운은 향기처럼 주변을 맴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는 이런 의미로 내 곁에 머물렀다.

 

저자는 헌법을 읽으면서 감동적인 문학작품 같았다고 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나는 그에 대한 독후감에서 감동적인 문학작품의 향기를 맡는다. 중심 못지않게 주변 내용이 매력적이다. 서정적인 에세이집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의미 있는 문장들이 많다. 심플한 만화처럼 그려진 배경그림 역시 내용과 잘 어우러져 조화롭다. 글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다.

튼실한 내용에 익살이라는 튀김옷을 입혀 바삭 요리한 책. 술술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점이 좋았다. 특히, 간간이 끼워진 속지처럼 등장하는 시들이 마음에 들었다.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p160~161)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읽어도 고개가 수그러지면서 나를 돌아보게 했다. 이옥자 할머니의 나도 쓸 수 있어(p162~163)는 전문 시인 못지않게 치명적인 깨달음을 주었다. 글과 삶이 일치하는 글에서 나오는 투박한 진솔함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집 앞에 꽃이 가득 피었네. 놀러 안 오나?

지난 금요일 퇴근 후, 친구에게 다녀왔다. 맛있는 것도 먹고, 벚꽃도 실컷 보고, 손 붙잡고 산책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다리 아플 정도로 걷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사진 속에서 내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내 주변엔 맛있는 게 없더니 거기 다 있었네.

-예쁜 꽃, 오징어 먹물 리조또, 호숫가 산책길. 다 좋은 사람이 없으면 좋지가 않아. 멀리 와서 놀아줘서 고마워.

 

인생 사진 건졌다더니 카카오 톡 프로필 사진을 바꿔놓은 친구. 표정이 꽃보다 화사하다. 벚꽃이라는 시를 지어서 친구에게 보냈다.

-따뜻하고 예쁜 시네. 난 요새 마음이 시린데.

-나도 그렇다네, 친구.

-왜 마음이 시려?

-..이 좋은 봄날에..외로워서 그러지 뭐

-그러게. 사람은 외로움이 문제네. 좋은 시 고마워. 시인 친구 있어서 좋다.

시인이라 불려도 부끄럽지 않은 사이, 외롭다 말해도 불쌍해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줄 수 있는 사이, 갑자기 뜨끈한 박하사탕 하나 삼킨 것 같다.

-자주 연락할게..너무 외로워하지마, 친구..

 

책을 읽으며 나무에 새겨진 진갈색 인두 자국처럼 마음에 새겨졌던,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가 떠오른다. 두고두고 음미하고 싶어서 코팅하듯 전문을 싣는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가 기대는 데가 많은데/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p133~135)

울컥한다. 불완전한 존재끼리, 부족한 친구끼리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장면을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져서. 우리,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생각하니 그 자체만으로 감동이어서.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괜찮은지 살펴보고, 이야기 들어주고, 관심을 기울여주고, 어떻게 하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챙겨봐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 나에게도 반드시 그런 사람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p295)’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문장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헌법에 들어있는 그 많은 내용들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우린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일거다. 헌법이란, 소중한 존재들이 서로 기대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들이 버섯 주름들처럼 촘촘히 적인 따스한 위안일 거다.

친구에게 <비스듬히>를 보내주어야겠다. 이렇게 비스듬히 서로 기대며 살아가자고. 언젠가는 나도 이런 시를 써서 너에게 보내주겠다고. 다시 시를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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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간을 위한 철학
로버트 그루딘 지음, 오숙은 옮김 / 경당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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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랬구나,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 나는. “지난달에는 친정 부모님을 뵈었는데요, 영정사진을 뽑아서 액자까지 끼워놓으셨다고 좋아하시더군요. 저는요, 마음이 울컥하면서 찡하던데요.”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이 생전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스르르 풀려나온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그 연세 되시면 많이들 준비하세요. 여유롭게 준비하실 수 있는 것도 행복한 거거든요. 갑자기 가시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 어머니는 나이 육십에 찍으셨다가 올해 팔십 되어서 다시 찍으셔야겠다고 하셨어요. 이십년 전이라 너무 오래 되셨다고. 살아계신 분들이 찍는 사진은 장수사진이라고들 하세요.” 이십년도 넘게 렌즈 너머로 희끗희끗한 세월을 지켜보았을 터이다. 그의 말이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토닥인다. 한결 편안해진다.

 

여권 사진을 찍었다. 동네를 왔다 갔다 하며 스쳐보았던, 횡단보도 건너 바로 앞 건물 2층에 있는 사진관이다. “여권 사진 찍으러 왔는데요.” “저기 거울 보시고 매만져보세요.” “필요 없어요. 그냥 찍어도 되어요.” 운전면허증 갱신도 해야 하고, 여권 만료 기일도 다가왔기에 겸사겸사 사진이 필요했다. 해외여행을 갈 생각도 갈 돈도 없지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적어도 조그만 수첩 쪼가리가 문턱으로 걸리는 황당한 상황은 없어야하니까.

이건 그냥 놔둘게요. 커다란 점이 없어지면 안 되니까.” “다른 것도 괜찮아요. 다 손질 안하셔도.” 씨익 웃는 사진사님, “달리 전문가겠어요. 티 안 나게 예뻐지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가 내 얼굴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을 조금씩 지우는 동안, 나는 그가 찍은 시간들을 천천히 구경했다. 독특하게도 매년 찍은 그의 가족사진이 열댓 장 걸려있다. 아기 때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귀엽고 영특해 보이는 아들이 부모님을 양쪽에 두고 맑게 웃는다. 이 녀석은 아버지의 공간에 올 때마다 참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숨표처럼 집게에 집혀 한 장 한 장 가볍게 매달려 흔들렸다. 사진사란 시간을 붙드는 직업인가.

 

짧은 시간에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자식을 키우는 교육관에 대하여, 늙음에 대하여, 부모님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나이 듦에 대하여, 미래 직업에 대하여, 독서의 중요성에 대하여, 교육 체제에 대하여. 그의 오른손은 마우스를 쥔 채 열심히 클릭 질을 하였고, 역시 숙련된 전문가라 대화는 대화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계속 하실 거죠? 저 나중에 영정사진 찍으러오게요.” 굳이 내 나이를 묻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빛으로 그려온 몇 십 년의 시간들이 묻지 않아도 나이를 가늠하게 만들어준 걸까. “방금 찍으신 거로도 해드릴 수 있어요. 예쁘게.”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그가 농담을 한다. “이건 너무 영하잖아요. 더 나이 들면 올게요.” 15분 남짓 되었을까. 웃음이 구르던 시간에 많은 대화가 담기니 물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양 시간이 길게 늘어지는 듯했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대학교 다니면서 처음 들었을 때, 놀라우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운동계에서 가능한 일이라니까. 사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론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아까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리적인 영역에서는 가정이 필요하다지만 심리적인 영역에서만큼은 가정을 뛰어넘어 체험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15분의 짧은 시간이 한 시간 정도의 느낌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지루한 수업 시간은 한없이 길고, 재미있는 드라마는 순식간에 후딱 끝나버리는 걸 보면 시간의 상대성은 진리라고 할만하다.

나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지루해서 길게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들로 채워진 시간들로 인해서 말이다. 하루의 마침표에 행복 마크가 선명하게 찍히는 날이 점점 많아진다.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매번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정에 굶주려 마음이 배고픈 시간들도 있지만, 이제는 시간을 떠먹는 숟가락을 들 만 한 힘은 생긴 것 같다. 스스로 기특해하는 중이다. 일종의 회복 탄력성이랄까.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도 하기 전에 퇴근하고 싶어진다. 직장일이 싫다기보다는 퇴근 후 커피숍에 와서 온전히 누리는 나만의 시간이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몇 시간 되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점이 자주 나의 몸을 이끈다. 시간과 공간과 나를 소유한다는 생각으로 자주 벅차다. 시간에 끌려가는 삶을 살던 내가 요즘은 시간을 끌고 가는 느낌으로 지낸다. 현재의 주인이 된 기분이다.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크기가 곧 시간 속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크기이다.(p61~62)’ 같은 기온이라도 주변 상황에 따라 체감 온도가 다르듯이 예전에 비해 한껏 늘어난 시간을 체감한다.

 

종종 걸음을 멈추고 30대의 시간을 생각한다. 더듬어보는 것조차 몸서리치게 싫지만 이제는 덤덤하게 돌아볼 만큼 단단해졌다. 그 때,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옆 자리에 앉았던 50대의 동료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본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 것 같아요. 조금만 꾸민다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울 나이인데.” 무표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36세의 나. 모든 것을 시작하기에 많이 늦어버렸다는 체념 가득한 시간이었다. ! 30대 중반에 많이 늦어버렸다는 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눈부신 시기였던 지도 모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을 지나왔건만 어리석게도 그 때의 현재를 누리지 못했다.

물리적인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의 진정한 문제는 시간의 성격에 있다기보다는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으며,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방식에 있다.(p25)’ 당시의 나는 나이든 시선으로 젊은 시간을 바라보았고, 51세인 지금 보내는 시간보다 오히려 더 짧고 어두운 시간을 보냈던 거다. ‘현재를 기억할 만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라.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당신 삶의 현재 시기에 무엇이 중요한지 날마다 검토하라. 그렇게 하는 사이 당신의 시간은 풍요로워질 것이다.(p49)’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심리가 시간이 풍요로워질 기회를 앗아가면서 메마르고 앙상한 나뭇가지와 같은 시간을 만들어냈을까.

 

시간을 철학적으로 낱낱이 파헤친 에세이다. 공평한 듯 보이지만 이것만큼 불공평한 것도 없는, 거대한 강물처럼 묵직하게 흐르다가도 무서울 정도의 민감성을 드러내는,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한, 사람마다 다른 길이를 경험하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부피감을 드러내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관찰하게 된 시간의 속성이다.

시간이 들어갈 자리에 사랑이나 이란 말을 대신 넣어도 어색하지 않을 문장들이 곳곳에 있었다. ‘행동하지 않는 것에도 똑같이 결과가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적 내용에 책임이 있는 만큼 우리의 시간적 공백에도 책임이 있다.(p120)’사랑하는 이를 향하는 마음의 공백이나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공백에도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공백에 대한 책임이라... 공백은 행동에 대한 여집합이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그림이 다르게 나타나니, 그리지 않은 여백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말은 맞다.

시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을 따라가면서 사람들의 시간과 나의 것을 비교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질 시간을 훑어보았다. ‘시간이라는 예술품의 전신상을 감상한 듯 뿌듯했다. 나의 시간을 어떻게 디자인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글을 쓸 때마다 자주 하는 고민에 대한 명쾌한 답을 발견한다. ‘당신이 쓰는 것이 읽을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지 마라. 대신 쓸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라.(p200)’ 읽는 행위를 상상하면 다양한 독자들을 상상해야 하므로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쓰는 행위로 관점을 바꾸면 주체자인 나로부터 출발하는 생각이라 훨씬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1차적으로는 스스로 물어보고 가치가 있다면 바로 시작할 수 있으니.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로 확장된다면 기쁨이 더해질 터이다.

그런 삶을 소망하는 건 이미 그런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p65)’ 한 때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삶이다. 퇴근하면 몸이 신 김치처럼 늘어진다. 물리적인 나이가 많아진 지금은 더군다나 나날이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30대보다 덜하다. 마음으로만 원하다가 한 발자국 내딛게 되었고 자꾸 걷다보니 원하는 삶에 가깝게 걸어가고 있었다.

책을 읽고 느낌을 쓰고, 일상을 글로 표현하고, 마음을 시로 그려내는 삶이 나는 행복하다. 풍성한 글을 위해 조금씩 다양한 경험을 시도한다. 슬쩍 가보지 않은 길로 걸어가 보는 소심한 모험을 해본다. 시간을 누린다는 느낌으로 나머지 삶을 채울 수 있다면 족하겠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굳이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제는 나의 시간을 누려보련다.

 

야간자습을 마치고 고3 딸내미가 들어온다. “삐까, 삐까~! 여권 사진을 찍었어.” “어디 봐봐. 이건 웬 얼룩이야?” “그건 커다란 점이라 지우면 티 나서 안 된대. 전체적으로 봐. ! 니네 엄마는 이렇게 생겼어.” “거짓말하지 마.” 1초도 망설이지 않은 리액션이다. “. 조금밖에 수정 안했단 말이야.” 3의 냉철한 눈썰미는 조금의 시간 단축도 허용하지 않지만 정말 조금밖에 수정 안했다.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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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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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는 분홍빛이, 살의를 띤 사람에게서는 노란빛이 보인다. 다른 이의 감정을 색채로 볼 수 있다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웹 소설이다. 공허함, 슬픔, 기쁨 같은 감정들이 보랏빛, 파란빛, 초록빛 등 각양각색의 빛을 낸다는 설정이다. 그녀는 선명하게 보이는 색채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렌즈를 끼고 다닌다. 감추려하는 감정들을 볼 수 있다니 편하고 재미있을 법도 한데 가까운 이의 감정이 보인다고 상상하면 그녀의 행동에 공감이 된다. 작가는 어떻게 감정이 보인다는 발상을 했을까.

이 책을 읽다보니 그 웹 소설이 떠오른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 줄로 연결되는 순간, 삶이 바뀐다.(p112)’ 는 문장에서 김중혁 소설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작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한 줄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다. 소설집에 실린 8편의 소설들은 전혀 다른 색채를 띠며 독특한 개성으로 빛난다. 옴니버스 구성인 양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품고 있는 단편들이다.

 

그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감각 기관과 상응하는 자극의 개념이 파괴된다. 소리는 귀와, 빛은 눈과, 냄새는 코와, 감촉은 피부와, 맛은 혀와 연관된 자극이라는 고정상식이 연결고리를 풀고 다채로운 조합의 순서쌍으로 탄생한다. 소리에서 냄새가 나고, 빛에서 감촉이 느껴지는 듯 착각에 빠진다. 생각이 유연해진다. 세상에서 내게로 다가오는 자극들이 새삼 신선한 맛을 낸다.

앞뒤 맥락을 떠나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p104)’ 는 문장에 공감한다.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평범한 요소들이 조합 방식에 따라 독특함으로 만들어진다. 악기와 도서관이라는 흔한 낱말이 결합되어 <악기들의 도서관>이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제목이 만들어진 것처럼. 소리와 나무가 결합되면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소리의 열매를 빚어내고(p64)’ , 음악과 연기가 결합되면 세상의 어떤 음악이 나를 관통한 다음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p35)’

 

음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깊다. 애착을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으리라 여겨지는 내용과 사유들이 내내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왜 어떤 것은 소리이고 어떤 것은 음악일까.(p31)’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무엇이 소리와 음악을 구분 짓는가. 소리에도 높낮이가 있고, 세기가 있고, 음색이 있다. 대화 소리라면 가사도 있으니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규칙적인 박자 정도 되겠다. 우리 몸에서도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심장 박동과 숨소리가 있음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생명과 닮은 소리를 음악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음악이 유난히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음악이 어느 순간 확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여러 날 똑같은 노래를 듣다가도 하나의 음이 마음에 느낌표를 찍기도 한다. 음악과 마주하는 순간의 마음에 따라 공감과 무감각의 낙차가 크다. 그 이유를 심장에서 찾는다. 감정에 따라 심장박동이 달라지면 음악과 공명을 일으키는 주파수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음악을 주제로 한 독특한 이야기들이 탄산수처럼 톡톡 튀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엇박자 D>이다. 22명의 음치들이 부르는 노래들을 리믹스 시킨 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은 곁들여진 하나의 문장과 함께 심장과 공명을 했다. ‘목소리가 겹치지만 절대 서로의 소리를 해치지 않았다.(p281)’ 라는 문장이다. 음악이 들리는 듯, 장면이 보이는 듯, 다양한 감각들이 한꺼번에 자극되며 뭉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음악이 담긴 도서관을 둘러본 기분이었다. 스릴러 넘치는 긴장감을 품고 고양이 발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는 음악으로, 찡한 휴머니즘으로 따끈한 빵 냄새를 풍기는 음악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의지가 대나무처럼 곧게 뻗어 나오는 음악으로, 순수한 열정으로 선명하게 붉은 음악으로, 담백한 두부 맛이 나는 음악으로 책을 읽는 순간순간이 BGM의 바다로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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