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카롱 에디션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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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된 기분이었다. 차라투스트라님은 산에서 내려왔다 동굴로 왔다갔다 500여 페이지를 지나오시는 동안 끊임없이 말하셨건만 내 귀에 캔디도 아니고 내 귀에 경 읽기였던가. 그대 앞에서 나는 왜 이토록 작아졌는지.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 깨달았다. 메타포의 향연이구나. 망했구나. 광활한 뷔페식당에 무모하게 발을 들여놓았구나.

입구에서 갈등했다. 그냥 돌아갈까. 계속 들어가 볼까. 두께에 망설이고, 무려 니체에 망설이고, 무엇보다 초라한 나의 그릇에 망설였다. 간장 종지에 한 솥 끓여낸 곰국을 쏟아 붓는 격 아닌가. 선뜻 표지를 넘기기 어려웠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호흡 크게 하고 첫 장을 펼친 건 부끄럽게도 지적인 허영심 때문이었다. 제목을 들어본 사람은 많아도 정작 끝까지 완독한 사람은 드문 책. 차라투스트라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몇 걸음 더 걸어갈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첫 문장은 바다에 관한 것이었다. ‘더럽혀진 강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오염이 되지 않으려면 바다가 되어야 한다.(p18)’ 가슴이 한껏 넓어지는 듯했다. 문장이 은유하는 의미가 어렴풋이 다가왔다. 신영복 선생님의 바다가 떠올랐다. 강물이 바다를 만나면 바다가 된다는 내용 말이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일단 나에게 익숙한 요리를 골라먹는 것으로 만족하자. 마음을 울린 문장들을 메모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삶과 자신에 대한 고찰이 담긴 문장들이 와 닿았다. 핵심이 되는 한 단어를 말하라면 자기 자신의 주인을 의미하는 위버멘쉬를 꼽고 싶다. 삶의 여정을 동물에 비유한 문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개념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총총히 사막으로 들어가는 낙타처럼, 정신은 자신의 사막으로 총총히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쓸쓸하기 짝이 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곳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p36)’ 사막의 주인을 위버멘쉬라 한다면 나의 삶은 어느 즈음 왔을까. 낙타와 사자의 중간정도일까.

 

적절한 비유들에 소름이 돋았다. ‘가장 높은 것은 가장 깊은 데서 나와 그 높이에 도달한다.(p212)’라는 문장은 지적인 사유의 깊이를 의미한다. 히말라야 산맥을 상상했다. 산맥의 꼭대기에서는 조개 화석이 발견된다. 과거 바다 밑에서 생성된 두터운 퇴적층이 융기하여 만들어진 거대 산맥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크게 자라려면 단단한 바위를 뚫고 단단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p236)’라는 문장은 물질세계의 속성으로 정신세계를 설명한다. 가시적인 세계가 모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양초가 연소하면 물과 이산화탄소가 생성된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바뀌는 화학 변화이다.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자는 언제나 파괴해야 한다.(p83)’라든지, ‘먼저 재가 되지 않고 어떻게 거듭나려고 하는가?(p90)’와 같은 문장들은 화학 변화를 연상케 한다. 원자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원자가 해체되었다 재배열되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도 비슷한 맥락의 파괴가 일어나야 거듭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p159)’ 불을 붙이는 도화선처럼 극복을 위해 필요한 건 용기일 터이다. 결국 철학이란 보이는 세계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는 학문이 아닐까.

 

인문고전의 의미를 톺아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식들이 차려진 뷔페식당의 풍경을 상상했다. 거대한 공간에 들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저마다의 그릇에 담긴 서로 다른 음식들의 조합을. 당신과 나는 이토록 다르다. 한 사람마저도 상황에 따라 매번 덜어가는 음식의 종류와 양이 다르다. 평소의 취향만으로 선택하면 결코 새로운 맛을 알기 어렵다. 원숭이 골처럼 도무지 그 맛을 상상할 수 없는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삶도, 독서도 이와 같다. 인문고전이란 뷔페식당에서의 새하얀 접시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들고 있지만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그 공통된 삶의 본질이 고유성을 거슬러 몇 백 년 이어지는 인문고전의 힘이 되어 나오는 것이리라.

 

종교적사회적철학적 배경 지식의 내공이 있어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책이다. 니힐리즘을 넘어 세계의 본성, 위버멘쉬나 초인, 진리의 본질에 대한 대략적인 냄새는 맡았지만 전체적인 아우트라인을 그리기에는 아직 무리이다. 다른 이들에게 명확히 설명할 자신이 없으니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일단 엄지에서 새끼손가락까지 최대한 찢어본 셈이다. 고통스럽지만 아직 유려한 연주까지는 하지 못하는 초보자처럼.

손가락을 한껏 벌려보았다는 시도 자체로 의의를 찾고 싶다. 어쨌든 이 식당의 출구를 빠져나왔으니. 과장된 어투나 상황에서 종종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던내용 중 입맛에 맞는 몇몇 문장들을 단편적으로 소화시켰다. 화려한 중화 요리 식당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만 먹고 온 셈이다.

매년 이 책을 읽어보려 한다. 무심코 지나쳐왔던 메뉴들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주고 싶다. 점차 업그레이드되면서 내년에는 탕수육을, 이후에는 반월침강까지 도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500여 페이지를 지나오면서 결론으로 남는 한 문장은 인간이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다.(p209~210)’이다. 삶의 의미를 천천히 정리해본다. 안도감이 드는 것은 이미 지나온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다만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일 뿐이다. 두렵지만 설레는 것은 다가올 삶은 온전히 내 의지의 몫이라는 점이다.

변한 건 아직 없다. 여전히 나의 삶은 혼란으로 가득하고 미래에는 아마도 무수히 많은 갈등의 고비들이 넘어야할 허들로 놓일 것이다. 그래도, 가보려 한다. 깨뜨려야 변화할 수 있으니. 나의 삶을 나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 나만의 걸음을 떼어보려 한다. 차라투스트라가 한 말을 따라와 보니 나는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 2019. 8.-9. 2019년 I 독후감 대회, 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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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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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색맹인 사람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인터넷에서는 흑백 사진 속 풍경과 비슷할 거라 한다. 전색맹은 모든 색을 구분하지 못하므로 명암만을 감각한다. 이 세상 누군가는 잿빛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색맹 중 가장 흔하다는 적록색맹은 빨간색과 초록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증상이다. 가까이 있을 때 두 색은 모두 회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모든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미술이나 운전 관련 직업 선택에 제한을 받을 뿐이야.” 수업을 하며 나는 말했다. 다만 불편한 거라며 이해한다는 듯 오만한 말을 뱉어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는 스피노자가 정의한 인간의 감정을 무려 48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48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희로애락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 이 책의 주인공 윤재가 지닌 감정 표현 불능증이다. 아몬드를 닮은 뇌 속 편도체가 발달하지 못해 생기는 병이라고 한다. 전두엽 이상으로 생긴다는 사이코패스는 들어봤어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존재는 생소했다.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의사 요한>의 주인공 요한은 ‘CIPA’라는 병에 걸린 인물이다. ‘CIPA’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각증이다. 뜨거움도 차가움도 그 어떤 고통에도 그의 몸은 반응하지 못한다. 몸에 칼을 대고 수술을 하는 순간조차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주사바늘에도 벌벌 떠는 나는 그런 질병을 품고 사는 이의 마음을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통각을 느끼지 못해 몸을 피하지 않으니 위험하겠다, 그러니 불안하겠다,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즈음 이 책을 읽었다.

아프지 않으면 좋지 않나. 1차적으로 드는 생각이지만 무통각증 환자에게는 일상의 많은 순간들이 생명에 위협을 가한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의 그는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외부자극이 와도 감각하지 못해 피하지 않으니 위태로운 상황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아픈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구나. 아파야 몸의 이상을 발견하고 고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으니.

몸은 몸이고, 마음은 마음이지. 별개라 생각해왔다. 공통적인 속성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드라마와 이 책을 통해 몸과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병이 든다는 것은 몸이 말을 하는 거라 한다. 같은 맥락으로 슬픔이나 괴로움과 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마음이 말을 하는 것이리라. 어서 나의 마음을 돌아보라고. 몸이 느끼는 감각, 마음이 느끼는 감정에는 통증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아프다, 아프다며 몸이 통증으로 말하고, 아프다, 아프다며 마음이 통증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통증이란 언어와 같은 의미인걸까.

 

삶이 힘들 때마다 믿지도 않는 신을 종종 원망했다. 난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이게 그렇게 어렵냐며 투덜댔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p81)’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 문장이다. 이 책 속에는 다르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남들과 비슷하다는 건 뭘까. 사람은 다 다른데 누굴 기준으로 잡지?(p65)’ 평범함이 그토록 도달하기 어려운 가치라면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준도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p9)’라는 문장을 음미해보면, 존재하는 많은 대상들이 마찬가지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윤재의 삶에 뛰어든 곤이는 흔히 말하는 평범한 학생과는 거리가 멀다. 소위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이다.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고 폭력을 행사하고 수업 분위기를 방해하고 어른들에게 반항한다. 학급에 한두 명씩은 있는, 전형적으로 비뚤어진 모습을 보이는 친구이다.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을 때렸던 곤이를 착한 친구라 여기는 윤재의 모습은 교사로서의 나를 많이 돌아보게 한다. 지난 학기에 수업 진행을 방해하며 나를 화나게 했던 몇몇 아이가 떠오른다. 나는 편견의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걸까. 단지 다를 뿐인데 틀린 거라 규정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을까. 모든 아이들을 저마다 다른 들꽃으로 여기며 예뻐했던 20대의 나도 있었는데. 부끄럽다. 언제부터 편견의 벽이 이토록 두꺼운 더께가 되었나.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는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 사건이 발생하던 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해 그녀들을 그저 바라만보는 윤재의 모습은 아수라장이 된 주변 사람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장면에서 나는 주인공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더욱 시선이 갔다. 곤이에게 씌워진 누명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대다수 학생들의 반응도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윤재의 덤덤한 내레이션은 소위 방관자들의 행동과 심리를 도드라지게 묘사한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p218)’ 촌철살인의 뾰족함을 품은 문장이다. 이 문장 앞에 오래 머무르며 종종 방관자의 영역으로 들어갔던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윤재보다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크다 말할 수 있을까. 판단하기 어렵다.

이 책을 20대에 읽었다면 참 독특한 병도 있다며 가볍게 넘어갔을 것이다. 50대에 읽은 이 책은 깊숙이 스며들어 나를 흔들었다. 주인공 윤재와 친구 곤이의 세상과 현실에서 내 앞에 마주앉은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상처 입은 아이들의 언어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에서야 이런 마음인 것이 부끄럽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마음인 것이 다행이다 싶다.

그런 표정을 지어본 경험이 있어야 그런 표정을 짓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비교적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사람마다 감각의 역치가 다르므로 고통을 느끼는 정도 역시 다를 것이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오만한 시각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첫 발령을 받고 이듬해인가 상담했던 아이가 생각난다. 엄마가 절 미워해요. 저 때문에 이렇게 되었대요. 큰딸이었다. 먹먹하게 울먹이던 아이에게 나는 어쭙잖은 조언을 했다. 무늬만 현란한 교과서적인 상담을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20대의 나는 꽤 멋진 말을 해주었다 자만하며 우쭐했다. 얼마나 무모한 오만인지 깨닫지도 못한 채. 지금이라면 조금 더 조심스러운 공감으로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주었을 텐데.

적록색맹을 단지 불편하리라 생각했던 마음도 오만이었다. 1차적인 현상만을 바라보고 내린 판단이었다. 그로 인해 달라질 세상의 풍경과의 싸움, 찬란한 256색상환을 바라보는 것을 평범하다 여기는 사람들의 편견과의 싸움, 쓰러질 것 같은 자신을 부여잡고 살아내야 하는 스스로와의 싸움에 던져진 마음을 배재한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감히 상상할 수 없어 이해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다만 이제는 그가 틀린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사는 것이라며 내가 사는 세상을 향한 것과 동등한 시선을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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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08-21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가장 많이 생각했던건 사람은 모두 다른데 정상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거였어요. 직장에서도 업무의 로직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과, 직원간에 원활한 소통을 더 높게 보는 사람이 서로를 이해못하지만 사실 둘다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정답의 기준으로 살아가요. 그래서 저도 이제는 제 생각과 판단을 무조건 옳다고 여기려 하지 않게되었어요. 제모습도 누군가에겐 평범하지 않을테니까요^^;

나비종 2019-08-21 18:56   좋아요 1 | URL
‘다르다‘란 말이 자주 나오는 만큼 저 역시 다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독후감을 쓰고 개학이 되어 교실에 들어가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전형적인 곤이의 모습과 놀랍도록 싱크로율 100%인 아이들이 각 반에 있거든요. 그 아이들로부터 받아왔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된 느낌이었달까요.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람들을 함부로 단정짓고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성급한 행동인지 깨달아지더라구요. 제 자신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라서 의미가 깊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점을 상대의 매력으로 여기기로 했어요. 그런 면에서 저도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있을 터이니 물감님처럼 매력적인 인간으로 등극하렵니다.^^;
 
내게 무해한 사람 (리커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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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풀을 천천히 만져본 적이 있다. 디지털카메라를 사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접사를 찍을 무렵이었다. 촘촘히 그어진 연두 빛 결을 반대 방향으로 훑어 내렸을 때 손끝으로 까슬까슬한 느낌이 전해졌다. 마냥 부드러우리라는 예상과 달랐다. 묘하고도 생경한 감촉은 뜬금없는 순간에 종종 생각이 났다. 마음이 따끔따끔해지면서 심장에 눈물방울이 몽글몽글 맺힐 때면 세상을 향해 희미한 웃음을 짓던 나는 강아지풀을 떠올렸다. 부드러움과 까슬까슬함을 품은 채 흔들리는 가뿐함. 그 푸르스름한 먹먹함에 나를 겹쳤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아치디이다. 대조되는 상황의 주인공들은 이곳에서 마주쳐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조각들을 덤덤히 꺼내어놓는다. 이야기에 몰입할수록 책에서 튀어나온 감정들이 가까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다. 따끔거렸다. 미세한 칼날에 베어 아린 듯 중간 중간 걸음을 멈추었다. 소설 속 상황 때문인지 그 속에서 발견한 내 모습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여주인공 하민에게서 학창 시절의 나를 본다.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았고 가지 말라는 길은 가지 않았던 나는 대학 다니면서 주말과 휴일이 가장 싫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이틀 동안 과외를 두세 탕씩 뛰면서 학비를 충당하고 집에 돈을 보탰다. 의욕이 없는 대상을 가르치는 일은 삐거덕거리는 나사를 돌리는 행위 같다. 아무리 힘을 주고 돌려봐도 헛돌면서 손끝만 아릿하다. 채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매번 지쳤다. 제대로 이해는 하는지 의심스러운 그들의 나른함이 지겨웠다.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부유함을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 치열한 4년을 보냈다.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p265)’ 남주인공 랄도가 하민을 바라보며 하는 생각이다. 마지막 부분이 눈에 밟혀 마음에 고인 채 맴돌았다.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일하는 건 아니니까. 하루하루를 일하듯 살아오던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매캐한 공기가 가슴으로 훅 끼얹어졌다.

 

하민과 대조되는 인물인 랄도에게 주변인들은 질문을 던진다. 너 왜 여기 있어?(p240, 259, 260, 261, 289, 290)’  이 책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이다. 불교에서의 화두처럼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여기라는 낱말은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너는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 내지는 삶의 과정에서 이 장소에 네가 있는 이유가 무엇이지?’라는 의미가 짙다.

대마초를 하면서 피폐한 삶을 살았던 랄도는 집밖의 삶을 간절히 원했지만 한 달 가까이 방에서 나가지 않기도 한다. 진심을 말하는 것보다는 뻔뻔하고 게으른 사람이 되는 편이 쉬웠다.(p261)’는 사람. 너 왜 여기 있어?’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나갈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고 싶었는데도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그랬으니까(p261)’ 이였다.

첫 번째 과외 집에서 두 번째 과외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종종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 있지? 있고 싶지 않은 공간에 있을 수밖에 없던 어쩔 수 없음이 생각났다. 3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선명한 스냅 사진들이 부레처럼 떠올랐다. 불현듯 코끝이 찡해졌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나는 직장에 들어갔다. 타고난 완벽주의로 인해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는 편이었다. 못 다한 일은 집으로 싸들고 와서 했다. 1순위는 직장 일이었다. 로봇처럼 일하는 간호사였던 하민의 모습에서 또 나를 보았다. 아치디에 와서 그녀가 기르던 여덟 마리의 말들 중 게으른 녀석과 나이가 제일 많은 녀석을 좋아한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일종의 부러움이리라. 게으른 사람이고자해도 천성적으로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 부류다. 부지런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계속 채찍질 당하는 말처럼 마음 불편하게 달리는 것이다. 나를 돌아볼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마냥 달리기만 하는, 그래서 너 왜 여기 있어?’라는 물음조차 해보지 못하는.

스스로를 멈출 수 없었다. 멈춰보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일에 매달려 13여년을 관성으로 달려왔다. 조금씩 속도가 느려진 건 10년 정도 책을 읽고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4년 전 즈음이다. 퇴근 후 나는 커피숍을 다니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시를 지었다. 직장일과 집안일을 숙제처럼 마치고 커피숍으로 향하는 길은 고단한 기쁨이었다. 퇴근하기 위해 출근을 했다. 글을 쓰고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잠수했다가 물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비로소 나는 숨을 쉰다는 느낌을 받았다.

 

늘 배려하는 아이, 양보하는 아이, 욕심 없는 아이였다. 월급을 집안에 보태면서 언니의 결혼자금에도 큰 힘이 되었다. 내가 결혼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친정아버지께서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 두신 이후로 수입에 비해 다소 많은 돈을 부쳐드렸다. 너도 살아야지 친정에 이렇게 갖다 주면 어떻게 하니. 친정어머니께서는 매번 미안해하셨다. 번듯한 호강은 못시켜드리더라도 돈에 구애받지 않고 소소한 일상을 누리시는 기쁨을 드리고 싶었다. 부모님에 대해서 이다음에 잘해드릴 기회는 없을 테니까. 결혼 후에도 여전히 나는 착한 아이였다. 별명처럼 따라다니던 이 말에 착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시선이 점점 글 쓰는 삶을 향한다. 글을 쓰는 동안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자유롭다. 앞으로의 삶은 글을 쓰며 글로 채우고 싶다. 연금이 나올 때까지만 직장을 다닐까. 올해로 28년째면 많이 한 거지. 4년 더 일하다 과연 그만둘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과속방지턱처럼 매번 걸리는 이유가 있다. 부모님께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돈이라도 벌어야 용돈을 마음 편하게 드릴 수 있을 테니까.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p282)’  이 문장이 나를 흔들었다. 고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책을 읽고 새삼 깨달은 사실은 나의 직업이 본성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내가, 아이가 지닌 막무가내의 잔인함에 거부감을 자주 느꼈던 내가, 의욕이 없는 대상을 가르치는 일을 그토록 지겨워했던 내가 중학교 과학교사다. 예전부터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현상과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썩 기발한 방법으로 비유를 하곤 했다. 그래서 잘 가르치는 것이라 착각을 해왔던 거다. 돌이켜보면 단지 표현력이 좋았을 뿐인데. 문과와 이과 성향이 반반이라면 좋아하는 분야와 나의 성향을 조금만 더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옳았다.

교사의 첫 번째 조건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말 잘 듣고 수업 잘 듣고 공부 잘하고 성실한 아이가 예뻐 보이는 것은 누구에게든 마찬가지일터이다. 결핍된 아픈 손가락을 보듬는 마음은 가르치는 기술보다 우선이어야 한다. 나에게 과연 그런 마음이 있을까. 요즘은 자신이 없다. 한때 교실에서 제일 행복했던 내가 며칠 전에는 아이들을 만나러가는 복도를 지나면서 가뭄에 말라비틀어지는 나뭇가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심코 던져진 몇 마디 말로 쉽게 상처받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과 마주보는 시간들이 무거워지는 만큼 즐거움으로 채워지는 가뿐한 순간들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밀려드는 의기소침은 현재진행형이다. 28년 동안 켜켜이 쌓인 더께로 인해 낡아버린 걸까. 처음부터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던 걸까.

 

너 왜 여기 있어? 며칠 동안 마음을 붙들었던 문장이 지금까지 맴돈다. 나는 후각과 같은 삶을 살아왔던 걸까. 자극이 계속되면 순응하여 더 이상 그 냄새를 못 맡는 것처럼 그저 습관처럼 만들어진 결에 맞추어 살아왔던 건 아닐까. <아치디에서>는 나에게 다가온 다른 종류의 냄새였다. 자극적이지도 과격하지도 않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움찔했다. 작가의 문장들이 거울인 듯 관성의 결을 거슬러 나를 향해 걸어 들어왔다. 넌 네 삶을 살 거야.(p298)’ 스스로에게 이 말을 던져본다. 나는 내 삶을 살 수 있을까. 강아지풀처럼 얼핏 부드러워 보이는 문장들이 마음의 작은 솜털들을 건드린다. 나는 내 삶의 결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까슬까슬한 감각에 심장이 간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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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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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바람, 웃음, 농담. 아름답고 무용한 그런 것들을 좋아하던 희성도 죽고, 화초 같은 계집의 치마 끝을 그토록 섹시하게 잡고 그윽한 눈총 뿜뿜 쏘아대던 동매도 죽고, 그거면 됐다는 유진도 죽고, 애기 씨만 불꽃으로 살아났던 작품. 주인공들 대부분이 시간차 몰살을 당했어도 여운이 길게 남았더랬다. 오다가다 스냅 사진 같은 장면만 보았으면서도 충분히 임팩트 있는 뭉클함을 주던 드라마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나니 뜬금없이 떠오르는 드라마. 교집합이 전혀 없는데 대체 어느 부분이? 한참 생각하다 이유를 깨닫는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허무였다. 드라마에서 인상 깊게 등장한 무용한 것이란 말이 겹쳐진 것이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나. 초반에는 파티 작렬하며 남주인공의 정체에 대한 진실게임이 느릿하게 진행되다 등장인물들이 우루루 한군데로 모이더니 그때부터는 폭풍 전개가 이어진다. A가 여주인공이 운전하던 차에 치여 죽고, A의 남편은 남주인공이 그런 줄 알고 권총으로 쏴죽이고 자살한다. 이틀 만에 책을 읽고 나흘을 고민했다. 도대체 책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좋아, 이토록 허망하고 재미없었음을 써봐야겠어. 소설 구성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다. 소설의 관점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분석해보기로 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깔 수 있으니.

 

첫째, 인물을 살펴보았다.

주요 등장인물의 관계를 보면, 개츠비의 첫사랑은 여주인공 데이지, 머틀의 첫사랑은 톰이다. 데이지와 톰, 머틀과 윌슨은 각각 부부이다. 톰과 머틀은 몰래 만나는 사이이고, 개츠비와 데이지는 5년 만에 재회한 후 대놓고 만난다. 조던은 소설 내내 등장하지만 존재감 제로에 허세 쩌는 인물이다. 그녀와 살짝 썸을 타다 마는 닉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이며 개츠비의 위대함을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잠시 등장하는 머틀의 여동생은 언니의 모습을 보고 이런 말을 한다. ‘서로 안 맞는 사람끼리 왜 같이 사냐는 거예요. 내가 저들이라면, 이혼하고 당장 재혼할 거예요.(p48)’ 처음에는 공감했지만 조금 더 생각하니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안 맞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같이 살지 않을 경우보다 다만 1%라도 유리한 점이 있을 거라는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사람만큼 이기적인 존재는 없으니까. 데이지가 톰의 외도를 알면서도 같이 사는 이유는 톰이 자신의 허영을 만족시켜주는 인물이기 때문일 터이다. 머틀 역시 윌슨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거다. 이런 시각으로 판단하면 오로지 맹목적인 인물은 개츠비이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데이지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려고 했고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한 거짓말 역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향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니까.

일반적인 로맨스 소설에서 대부분 여주인공만은 꽤나 그럴 듯하다. 악녀 캐릭터는 서브 여주의 몫이다. 주인공이라면 무릇 비련의 캐릭터이거나 유쾌함을 장착했거나 어떤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도 아름답거나 공감을 끌어내는 인물이다. 한데 이 작품은 핀트가 어긋난다. 이토록 돈 냄새를 좋아하는 존재가 있을까. 개츠비가 보유한 수많은 셔츠들을 보며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라며 흐느끼지를 않나, 개츠비조차 그녀를 가리켜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p151)’라 표현했으리만큼 세속적인 밉상이다. 여타 로맨스 소설과의 차별점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것처럼, 데이지의 허영은 개츠비의 순수함을 드높이는 장치를 한다. 부를 끌어 모은 개츠비와 지향점이 다르다.

데이지의 남편 톰도 만만치 않다. ‘어쨌든 그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을 전부 다 제 입장에서 정당화해버렸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p222)’ 개츠비의 죽음을 도발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머틀의 남편 윌슨이 총을 들고 개츠비를 향해 뛰쳐나가게 만들었으니까.

또한 톰의 말을 그대로 믿고 불끈한 윌슨은 바보다.

관찰자 닉을 작가의 아바타라고 가정한다면 유일하게 밉상이 아닌 인간은 위대한 개츠비이다. 이토록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지질할 수 있을까. 각각의 속성이 지질하다 못해 일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섯 행성들의 등장인물이 연상된다. 권위적인 왕, 자기 칭찬 외에는 듣지 않는 허영쟁이, 술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술을 마시는 술꾼, 5억 개의 별이 모두 자기 것이라는 상인, 1분마다 불을 켜고 끄는 점등인, 자기별도 탐사 못한 지리학자. 독자 입장에서는 한심해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각종 캐릭터들은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심오한 메시지들을 건네준다. 우리가 한심해하는 요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복잡다단한 인간의 속성을 분별 증류한 극단적인 캐릭터이기는 하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심리를 따로 따로 심도 있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작가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둘째, 사건이다.

윌슨과 다툼 끝에 갑툭튀한 머틀이 데이지가 운전하는 차에 치여 죽고, 톰의 발고로 개츠비를 오해해 불끈한 윌슨이 개츠비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어쨌든 주요 인물 셋이 죽고 화자를 제외하면 데이지와 톰, 밉상 부부 둘만 남는다. 허무도 이런 허무가 없다. 허망하기 그지없으나 인생 다 그렇지 뭐라는 흔한 말처럼 삶의 속성을 가장 흡사하게 스케치한 모습이다. 공식에 대입하여 완벽한 X값을 얻어낼 수 있는 수학이 아니라 무한소수로 애매하게 흐드러지는, 갑자기 등장한 Z로 인해 일차방정식에서 순식간에 삼차방정식으로 변모하는, 분모에 0이 등장하여 불능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이토록 허무해 보이는 사건들을 대하는 자세와 해석하는 관점, 그 안에서도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심미안일지도 모르겠다.

개츠비의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들도 숙고할 여지가 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닉은 개츠비의 죽음 이후에 존재감을 강하게 어필하며 인간의 비정함을 그려낸다. 개츠비의 파티에 그렇게나 모여들던 이들이건만 개츠비의 죽음을 알리자 각자 핑계를 대며 장례식을 외면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무정한 단면은 개츠비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셋째, 배경이다.

작가는 대조되는 배경을 마주 보게 함으로써 서로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기득권 세력, 올드머니, 톰과 데이지 부부를 이스트 에그에 배치하고 신흥 부자, 뉴머니, 개츠비를 웨스트 에그에 배치한 다. 서로 다른 세력의 모습은 당시 독자들의 피부에 직접 와 닿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주법의 시대인 1925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술이 금지되던 시기에 주인공 개츠비는 밀주업으로 돈을 번다. 그가 일주일마다 열었던 파티에서는 술이 질펀하게 등장한다. 나는 소설 앞부분에 나오는 파티 장면에서 지루함과 이질감을 많이 느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민감한 이슈였을 터이다. 소설 출간 당시 29세였던 작가로서는 현재를 생생한 배경으로 시대상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검은 마스크 쓰고 두 손 공손히 모으며 TV에 등장하는 각종 인물들과 관련된 배경 정도 되었을까. 그렇다면 영향력의 강도가 상당했으리라.

 

소름이 돋았다. 허술한 것이 아니라 삶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완벽한 구현이었다. 이토록 지질하고 적나라한 욕망과 허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싶은 것을 드러내고 싶었구나. 주제가 선명하다. ! 소설의 3요소가 주제, 구성, 문체인데 주제와 인물, 사건, 배경이 뚜렷하다면 문체는? 문체의 입장에서 소설을 훑어본다. ‘은빛 후춧가루가 뿌려진 별밭(p34)’이라는 비유도 뛰어나고 닉이 말하는 다음의 문장에서는 유머 감각도 보인다. ‘모든 사람은 여러 주요한 미덕 중에서 최소한 한 가지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 경우에는 이것이다 :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정직한 사람들 중 하나다.(p78)’ 섣불리 판단할 게 아니었구나, .

내 취향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공감에는 한계가 있다.(p170)’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가 비판의 대상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p11)’ 무엇이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로 해석되는 이 문장 앞에서 슬그머니 반성을 한다.

작가는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아름답고 무용하지만 맑은 사랑을 위대한이라는 단어로 코팅하고 싶었던 걸까. 개츠비가 동경하며 바라보던 저 멀리 데이지의 집에서 반짝이던 불빛을 그린라이트로 설정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으리라. 레드의 열정도 아니고 옐로우의 질투도 아니고 블루의 우울함도 아닌 나무의 자연 빛을 닮은 그린의 순수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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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07-15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아직 밀린게 있어서 차후에 토론 댓글을 달겠습니다ㅎㅎ

나비종 2019-07-15 23:53   좋아요 1 | URL
네~ 저는 다른 거 읽을 것이 있어서 조금 빨리 읽고 독후감 마무리를 했어요. 어떤 리뷰를 쓰실지 기대하겠습니다.ㅎㅎ

물감 2019-07-30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드디어 다읽었습니다. 휴가랑 겹쳐서 독서가 게을러지네요^^; 안그래도 읽는속도 느린데...ㅎㅎ

개츠비는 보는 사람에 따라 확 갈릴 인물이겠더라구요.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사람이 되거나, 반대로 남의 가정 파탄내는 쓰레기가 되거나.
개츠비 인생이 작가인생과도 닮았던데 그러면 피츠제럴드도 자기가 쫓았던게 뭐였는지 알고 있었다는 거겠죠? 어느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꽃을 피웠지만 그것역시 한 때이고 시들면 다 똑같아지는 허무함을 보았습니다.

맨처음에 아버지가 닉에게 한말도 다양한 해석이 되네요. 저는 중립이 되어 사람을 볼 줄아는 시각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책속에 많은 이들이 뚜렷한 개성과 성향을 갖다보니 한 방향으로만 가려고 하는데 닉은 그렇지않아서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나 합니다.
여하튼 이번 리뷰는 분석력이 엄청나시네요ㅎㅎㅎ공부가 많이 되었어요.
8월은 잠깐 쉬었다 가면 어떨까요? 책도 다시 선정해야겠네요^^

나비종 2019-07-30 11:07   좋아요 1 | URL
7월 안에 해내셨군요.^^

저도 개츠비가 썩 낭만적이고 로맨틱하게 보이지는 않더라구요. 쓰레기...까지는 아니고 음, 약간 집착 쩌는 분리수거용 정도쯤 되겠습니다.^^;
소설이든 시이든 작가로부터 나오는 글은 작가의 삶과 완벽하게 별개일 수는 없나봅니다. 하다못해 SF판타지라도 등장인물의 대사 안에 작가의 삶이 어느 부분은 묻어나는 것 같으니까요.
허무...맞아요. 허무하다못해 허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구요. 쓰읍~

닉이나 그 아버지나 중립의 위치에 서 있다는 말씀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라는 얘기죠. 제가 보기에 완벽한 중립에 서게 되는 사람은 없는 것 같거든요. 조금쯤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게 된다고 봅니다. 중립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볼 때 정도일까요.

쥐어짜내서 리뷰를 썼지만 재미 드럽게 없었어요. 고전의 길이 참, 험난하구나 싶었습니다.ㅎㅎ
동의합니다. 8월은 좀 쉬어요. 다른 책으로 에너지 충전해서 9월에 나물모임 재개장해요. 책은 물감님께서 선정하시면 따라가겠습니다~^^

물감 2019-07-30 11:47   좋아요 0 | URL
중립의 위치를 서는건 지난 과거를 돌이켜볼때란 말, 명언 탄생입니다ㅎㅎㅎ
8월중에 책 선정하겠습니다. 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나비종 2019-07-30 12:20   좋아요 1 | URL
중립에 대한 저의 견해에 공감하신다니 기분 좋은 친구를 얻은 기분입니다.ㅎㅎ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말씀해주세요. 어떤 책이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니 마음 편하게 정해주세요~^^
 

뚜껑을 열자 새하얀 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연탄불 위에 올려진, 작은 밥상 크기는 족히 됨직한 솥단지 한가득 물이 출렁였다. 겨울이면 당신은 매번 하얀 아침을 자식들에게 건네어주셨다.

새벽 5. 눈뜨자마자 어머니께서는 씻을 물을 데우셨다. 방문을 열면 밖이었던 단칸방. 문턱 옆 방바닥에는 꽁꽁 언 걸레가 바삭거렸다. 코끝까지 담요를 덮고 자던 우리 4남매는 서로 먼저 씻으라며 미적거렸다. 수돗가에 놓인 찜통 뚜껑을 열고 찬물 한 바가지를 섞어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사십여 년을 거슬러야 만나지는 기억은 결혼을 하고 물을 데울 필요가 없는 아파트에 살면서 모락모락 연기처럼 희미해졌다. 하얀 아침들이 떠오른 것은 아파트 온수 공사로 며칠 동안 물을 데우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옛날 물을 데우시던 당신만큼 나이가 들어버린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위해 가스레인지로 데운 물을 욕실로 날라야 했다.

새벽 5. 부스스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고 식탁 옆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3일을 보냈다. 퍼뜩 당신의 아침이 떠올랐다.

 

어릴 적의 나는 온수가 나오지 않는 집에 살면서도 따뜻하게 세수를 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의 아침은 당연하지 않았던 당신의 아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 철렁했던 아침도 있었다. 세 들어 살던 그 집과 함께 선명하게 그려지는 장면이다. 물을 데우시던 당신은 솥단지의 물을 찜통에 덜어 나르던 중이셨다. 갑자기 솥단지가 기우뚱하며 발등으로 뜨거운 물이 떨어졌다.

 

벌겋게 부어올랐던 당신의 발등이 기억난다. 열 두 살의 나는 당신의 아픔이 어느 정도였을지 잘 몰랐다. 육체적인 고통만을 어렴풋이 짐작했을 것이다. 사십여 년이 지나 그 때의 어머니보다 더 나이 들어보니 그 날이 점점 또렷한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화상의 쓰라림보다 안간힘을 쓰며 시린 아침을 데워야했던 삶의 쓰라림이 당신을 더 힘겹지 하지 않았을까. 한여름에도 얼어붙어있었을 하루. 새벽 5시는 자식을 향하는 절실함이 시작되는 시간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눈으로 나의 아이를 바라보게 되어서야 나를 생각하던 당신 마음의 언저리를 더듬게 되는 걸까.

 

<뜨거운 겨울>이란 시를 지어 새벽마다 물을 데우시던 모습을 스케치했던 적이 있다. 블로그를 뒤적여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여전히 뜨겁고 아직도 울컥하다. 녹지 않은 눈인 양 꺼낼 때마다 뜨겁게 흘러내리는 기억으로 눈가가 촉촉해진다.

가 접힌 우산이라면 산문은 펼쳐진 우산이다. 맑은 날이면 우산이 접혀있든 펼쳐져있든 상관없지만, 이 생각 저 생각 비처럼 쏟아지는 마음을 담기에는 산문이 좀 더 적절해 보인다. 시에 담았던 마음을 산문으로 옮겼다.

 

글이 품은 당신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의 아침을 곱씹어본다. 참으로 따뜻한 아침을 보냈던 내가,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내가 거기 있다. 그 아침의 기억이 남아있어 정말 다행이다.

내게 아침은 하얀 빛깔이다. 새벽 5시는 뜨거운 아침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들은 사전적인 의미 외에 각기 다른 의미로 심장을 뛰게 한다. ‘아침이란 말이 나에게는 어머니와 겹쳐지듯이. 올해 여든을 넘기신 당신과의 기억을 하나하나 붙들어두고 싶다. 더 이상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 먹먹한 어느 날, 오래된 앨범인 양 두고두고 펼쳐보기 위해 화석처럼 글로 새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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