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스님 지음 / 정토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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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 걸터앉은 집 뒤편에는 절이 있었다. 공양주로 일하시던 어머니 덕분에 절 문턱을 뒷마당인 듯 자연스럽게 드나든다. 일요일마다 여는 어린이 법회에도 언니, 동생들과 종종 참여한다. '귀의'가 뭔지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 '삼귀의', 제목의 의미조차 이제야 알았더라도 리듬과 가사 만은 익숙한 '사홍서원', 문장의 의미도 모른 채 뭐 준다 길래 260'반야심경'을 송두리째 외웠던 경이가 우수수 딸려 나온다. 뭘 받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지금도 툭 치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 구구단인 양 튀어나온다.

의미를 몰랐어도 상관없다. 그 공간을 마주했던 선명한 감각의 기억으로 충분하다. 밟을 때마다 달가닥거리던 절 앞 마당의 자갈 소리, 소리만큼이나 은은하게 풍기던 법당의 향냄새, 약수터에서 졸졸 흘러나오던 시원한 물맛, 마당을 둘러싼 초록들이 사락사락 햇살을 비비던 풍경. 그 안에는 잿빛 몸뻬를 입고 분주하시던 광명화 보살님, 나의 어머니가 있다. 종교는 없지만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이유에는 어릴 적 경험의 영향이 크다. 공간에 깃든 평화로움과 청량한 고요로 둘러싸인 질감이 어린 나는 그저 좋았다.

 

불교의 시작. 원점이 되는 분은 어떤 생을 살았을까.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은 경전 기록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삶과 말씀을 재조명한 책이다. 법륜 스님은 서문에서 저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분의 삶을 통해 지금 여기 우리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간간이 일화로 들었던 부처님의 말씀보다 이 세상에 계시는 법륜 스님의 말씀을 훨씬 많이 들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유튜브에서 스님의 <즉문즉설>을 찾았으니까. 본질을 꿰뚫는 직설에 속이 후련했다. 지금 하는 고민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상담자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무슨 답변을 하실지 예측이 될 지경이다.

내게 부처님은 아직 멀기만 한데 스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분은 어떤 느낌일까. 575쪽의 지면은 한 사람의 모든 삶과 사상을 담기에는 좁을 터이다. 법륜 스님은 이 좁은 공간으로 어떤 장면을 들여보내셨을까. 신적인 존재에 더 근접했을 듯한 '붓다' 앞에 '인간'이란 말이 붙으니 새삼 낯설다. 두근거리는 호기심으로 환한 빛을 연상케 하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두어 장을 넘기니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좌상이 시선을 붙든다. 목차에 도달하기도 전에 주춤한다. 무릇 부처님의 모습이란 석굴암에 고고하게 앉아 계시는 뽀샤시하면서도 근엄한 본존불이 디폴트였단 말이다. 앙상한 붓다라니! 이질적인 사진 앞에서 잠시 멍해진다.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읽지도 않은 고전의 요약본을 알 듯 어설픈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생로병사, 고행 중 찝쩍대는 악마의 유혹 같은 일화 말이다. 어째서 물음표를 던져보지 않았던가. 고행의 과정을 지났다면 육신의 살이 붙어있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일 터인데. 뱃가죽이 등가죽에 들러붙었다는 문장을 가시화한 듯 생생하다.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습이라 더 인상적이다.

이름도 붙어있지 않은 불상의 정체가 궁금했다. 덕분에 인터넷에 올라온 수많은 불상의 사진을 구경한다. 단식 고행을 하던 해탈 전의 모습이고 작품명은 '고행상(Fasting Buddha)'임을 알았다. 파키스탄의 라호르 박물관 소장본이 유명하며 이를 본떠 수많은 고행상이 만들어진다. 이 책에 수록된 불상은 문경의 정토수련원에 있는 것으로 인도에서 제작해서 들여왔다고 한다. 정토출판에서 출간한 책이니 굳이 출처를 표기할 필요가 없었나 보다.

 

서장에서는 인도의 사상과 역사를 소개한다. 인도 역사에는 전통적인 계급 세습 제도인 '카스트'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원전 1300년 정도를 시원으로 본다는 기록이 많으며 공식적으로는 1950년에 폐지되었다. 무려 3,250여 년간 존속되어 온 제도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분류도에는 위로부터 제사장인 '브라만', 무사나 왕족인 '크샤트리아', 평민인 '바이샤', 노예인 '수드라'가 차례로 분포한다.

충격적인 건 여기가 바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발아래에는 거대한 지하 세계가 있다.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라 불리는 '달리트'는 닿아서는 안되는 계급 밖의 사람들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꼬꼬무 카스트에는 이들보다 더한 존재가 있다. 인구 등록조차 되지 않는 '불가시천민(Unseeables)'이다. 다른 이가 보아서는 안 되니 밤에 이동하고 이동 흔적을 지우고 다니며 목에 방울까지 매달았다고 한다.

출생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정해지는 제도라니! 누구의 잘못도 아닌 염색체 이상 증후군처럼 말이다. 고려와 조선의 양반 제도뿐 아니라 미국에도 노예 제도가 있었음을 떠올린다. 세계 여러 나라 계급의 역사는 검색할수록 짙은 씁쓸함을 남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수직으로 줄 세워서 지배하려는 건 인간이란 종의 타고난 본성인가.

 

태어나보니 노예로 정해진 삶은 가늠해 본다는 말조차 조심스럽다. 이토록 불합리한 제도의 그물이 옭아맨 세상에서 불평등으로 인해 그들에게 쏟아졌을 고통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안도감만 삼킬 뿐이다. 시험용으로 외웠던 학창 시절의 '카스트'에 고통 따위는 없었건만. 아무런 감흥 없이 밍밍한 껍데기만 잠시 넣었다 뱉고 금세 잊어버린 셈이다.

부처님의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로 깨달음 이후에는 '석가모니'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카스트 계급은 크샤트리아로 왕족 출신이다. 소위 금수저이시다.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안다." 드라마 <스토브 리그> 주인공의 대사다. 이 문장을 떠올리며 부처님의 위대한 점을 발견한다. 냉철한 자아 성찰에 따른 현실 직시이다. 그분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스스로 3루타를 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깨닫는 데 머무른다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닐 터이다. 부처님은 망설이지 않고 3루를 떠나 1루로 거슬러 가신다. 고통이 공기처럼 머무는 곳, 매 순간 고통을 호흡하는 이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이 평범한 인간은 알았다 하더라도 이게 웬 횡재냐며 모른 척 머물렀을 텐데.

 

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가치 기준과 생활 관습이 결정되며 한 사람의 인격은 환경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스님 말씀에 동의한다. 이런 이유로 비슷한 상황이 되면 흘러간 일부 역사가 반복되는 패턴을 보이는 걸까.

환경은 인간의 내재적 성향을 발현하게 만드는 스위치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스위치를 켜려면 일단 환경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파도가 두려워 항구에만 정박한 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환경에 자유 의지가 결합 되면 잠자고 있던 불성이 화르르 타오르리라. 불교의 목적은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하니 야! 너두!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탄생과 성장, 출가, 고행과 성도, 전도의 개시,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 위대한 열반에 이르기까지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가 걸어간 삶의 여정과 사상을 천천히 따라간다. 부처님의 여정을 각 장의 앞부분에 지도와 함께 나타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약간 있다. 도시, 나라, 강 등 거쳐가신 경로를 여행기의 노선처럼 보고 싶었다. 생소한 지명이 언급될 때마다 부록에 나온 고대 인도의 16대국 지도를 펼쳐보았지만 몇몇 도시나 중요 나라 외에는 그분의 행적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부록에 붓다의 연표를 수록해 80년간의 삶을 정리해 주신 점은 좋았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 부록의 '찾아보기'를 낱말 뜻으로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찾아보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이름이나 도시에 대한 설명은 본문 아래에 각주로 달아서 보다 깊은 이해를 돕고 말이다. 어차피 산스크리트어는 '데바다하''데바닷타'나 도통 발음이 비슷해서 그게 그거 같았다. 찾아보기의 배열이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으니 본문을 읽을 때마다 뒷면을 들춰보기는 어려웠다. 지명이나 인명은 그러려니 하고 여기에 의문이 가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그 외의 요소들에 있었다. 기본적인 명사나 서술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 보니 책장이 더딘 걸음으로 넘어갔다. 스님의 해설에 언급되는 내용도 있으나 불교 관련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 수시로 인터넷을 검색하여 어학 사전이나 위키 백과를 찾았다. '수계사, 사미, 시봉, 보살행, 화현, 용화, 방일함, 예경, 탐사, 반열반, 사자후, 사견, 탐착, 외호하다, 사뢰다, 반야, 제불보살, 가람, 맑히다, 증장, 청수, 자양하다, 사라나무, 팔부대중, 전단나무버섯'. 최근 이틀 동안의 검색어 목록이다. 덕분에 다소 깊이 있는 공부가 된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불교 공부를 하는 학생의 자세로 새로운 낱말을 배우는 듯 겉모습만 익숙한 몇몇 단어의 진정한 의미도 배운다.

 

첫 번째,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내가 제일 잘 나가' 가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었던 거다. 더군다나 아()에서 ''의 범위가 1인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였다니! 인간이 우주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인간 해방 선언을 몰라본 무지몽매한 눈이 트인다.

두 번째, '공양'이다. 사실 '공양'에 대하여 삐딱한 시선을 가져왔다. 차마 말로 뱉지 못한 생각이다. 스스로 음식을 구하지 못하고 어째서 다른 이의 음식을 달라고 하는가. 매번 석연치 않은 마음이었지만 그 어떤 책에서도 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 내가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걸까. 많은 이들은 이를 당연하다 여기는 걸까.

드디어 이 책에서 답을 얻는다. 다른 이에게 나의 먹을 것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구나. 공양은 나의 것을 나눔이로구나. 나의 몸을 만들 음식을 나누는 것, 결국 나를 나누는 수행인 셈이다.

세 번째, '자비'이다. 무조건적인 이해나 용서가 아니라 보다 큰 의미가 있음을 배운다. 고통에 동참하여 모든 아픔을 함께하고 모든 즐거움을 함께 나누려는 자세, 대등한 관계에서의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기희생이다. 자비의 의미를 공부하며 그 예시로 적절하게 언급할 수 있는 보살님 한 분을 떠올린다.

 

스님은 이 책에 친절하고 맑은 거울을 가져다 놓으셨던 걸까. 세상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보고 이제껏 잘못 알고 있던 세상의 이치를 배우며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본다. 부처님에 대한 세세한 일대기라 짐작하고 문을 열었는데 부처님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법륜 스님께서는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셨음을 깨닫는다.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왔나.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번 한적이 없었(feat. 어머님께)'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삶은 자잘한 계기를 몇 번 건네면서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알려준다. 지금 나의 주인은 나다. 또한 나만 소중한 게 아니라 당신도 소중한 사람임을 알아야 함을 마음에 새긴다. 한 장 한 장의 책장이 거울인 듯 나를 비춰본다. 삐져나온 머리카락도 정돈하고 표정도 보고 지나온 나와 걸어갈 나를 상상한다.

실천을 강조하는 불교 교리를 기준으로 놓고 보니 말로만 떠드는 사람,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잔잔한 마음을 품고 찾아보니 제대로 보지 못했던 몇몇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증발이 되어 사라지기라도 한 듯이.

 

부처님이 지혜와 자비를 갖추신 분이라면, 보살님은 지혜를 구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생애에 담긴 가르침을 따라가며 기시감을 느낀다. 인간은 오직 그 행위에 의해서만 그 성품이 결정된다고 했던가.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신 훌륭한 조교가 가까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절의 스님께서 어머니께 '광명화 보살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을 때, 우리 식구는 너무 거창한 이름이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빛나는 꽃이라니! 게다가 보살님이라니! 노모의 은빛 머리칼이 점점 빛을 낼수록 스님의 혜안에 나는 종종 감탄한다.

어머니께 용돈을 드릴 때마다 대부분의 돈이 물건으로 페이백 되어 돌아온다. 명절 때마다, 생일 때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시험이나 소소한 삶의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 주변에 많은 것들을 베푸신다. "없이 살아서 그렇지 내가 돈 쓰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꽃처럼 피어나는 어머니의 웃음에 "니 엄마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나 모르겠다." 덩달아 구르는 아버지의 웃음소리. 당신으로 인해 나는 나눔의 삶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근접 사진을 보듯 목도하였으며 고통스러운 현실은 반드시 지나가리라는 긍정 마인드를 품게 되었다.

 

몇 개의 단어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연결되어 심장 깊은 데에 놓인다. 나에게는 ''이 그런 부류에 속하는 단어다. -공양--공양주-어머니. 시간과 공간과 감각의 무게 중심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갈 때 불현듯 툭! 첫 번째 단어에 진동이 전해진다. 쓰러지는 도미노를 촬영한 동영상을 거꾸로 재생하듯 연결 고리가 줄줄이 되살아난다.

7년 전의 5월도 그랬다. 야외에서 개최되는 글짓기 대회에 참여한 날이다. 두 시간 안에 '이팝꽃이 피면'이라는 글제로 작품을 제출하는 미션을 받는다. 밥을 닮은 이팝꽃을 떠올리는 순간, 뺨에 닿는 바람이 참 부드럽다고 생각한 순간, 카테고리의 단어들이 후두둑 눈앞에 펼쳐진다.

'공양주로 일하던 / 어미의 소원은 / 이팝꽃처럼 솔솔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내 새끼 뱃속에 담아 / 배불리는 것이었다 // 부처님 공양하고 / 남은 밥 찐 도시락 / 어느 날 삭아버려 / 축 늘어진 이팝꽃 / 자식은 밥을 버리며 / 철없이 투덜댔다 // 30년 뒤 절 마당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이팝꽃처럼 솔솔 / 지어주고 싶었지 / 버려진 이팝꽃은 / 노모의 마음속에서 / 여전히 뜨겁게 / 피어나고 있었다 (제목: 이팝꽃처럼 솔솔)'

가난의 고통은 당신 덕분에 예술로 피어난다. 대회에서 얻은 결과로 나는 글을 계속 써나갈 용기를 얻는다.

 

글을 쓸 때마다 종종 이 시를 언급한다. 시를 짓던 그날의 두 시간이 파일에 저장된 동영상처럼 꺼낼 때마다 생생하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의 가슴은 뜨겁다. 어머니가 담긴 글은 매번 그렇다. 따끔거리면서도 글 안에 새기면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희열이 느껴진다.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 통역사처럼 문장이 흘러나온다. 글을 쓰는 현재의 모습을 한 손으로 잡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면 고통의 바람이 불어왔던 순간마다 당신이 빛의 꽃으로 피어있다. 덕분에 함께 하는 고통 속에서 덜 춥고 덜 외로웠다.

"몇 달을 점심때마다 곰국 먹는 거, 질리지 않니?" 취업을 준비하는 곰국 마니아에게 묻는다. "엄마! 엄마는 매일 먹는 밥이 질려?" 글 속의 어머니는 이런 의미일까. 매일 먹는 새 밥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존재 말이다.

석가탄신일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 부른 건 그분이 오시기를 바랬던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미 내 곁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보살님이 오셨던 건지도 모른다. 부처님, 불경, 스님, 절을 떠올리면 이 모든 배경을 뚫고 나의 공양주, 광명화 보살님이 은은한 햇살처럼 심장을 비춘다. 연기설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내 곁에 머문 보살님과 몇십 년의 삶을 공유하는 행운을 누렸던 걸까.

p54, 본문 첫째 줄, p55, 밑에서 2째 줄, 3째 줄, p91, 밑에서 10째 줄: 아승지 아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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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리커버 에디션)
무라세 다케시 지음, 김지연 옮김 / 모모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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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골목이 있는 길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바퀴를 따라 삼십 여 년 전의 기억이 묻어 나는 길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대학 병원 뒤 허름한 주택가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다. 널찍한 주차장이 나오는가 하면 커다란 건물과 신축 빌라들이 즐비하다. "여기 어디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20대의 발자국이 그렇게 많이 찍힌 거리이니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정도는 몸이 기억할 법도 한데. 깔끔하게 정비된 동네가 신도시인 양 낯설다.

"엄마, 여기께 살았었어?" 그때의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이가 뒷자리에서 묻는다. ". 근데 너무 많이 변했네." 가족 식사 후 들른 커피숍이 예전에 살던 동네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수석에서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분주하게 풍경을 스캔한다. "에이, 못 찾겠다." 결혼 전에 살았던 친정집 찾기를 포기한다. 고대 유적지인 양 집터라도 보고 싶었지만 발견하기가 만만치 않다. GG를 선언하자마자 차는 과거의 골목길을 빠져나와 현재의 대로를 달린다.

 

달리는 기차가 들어오는 기차역 풍경이 책 표지를 넘어 앞 뒷면의 날개까지 이어진다. 일러스트의 색감이 좋다. 자그마한 체구에 봄날 여리여리한 꽃잎 같은 겉모습을 지닌 책이다. 불빛을 받으니 낮의 공간을 채우는 별이라도 내려온 양 무늬가 반짝인다. 첫 느낌은 화사한 봄이지만 선뜻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제목의 문구 때문이다. 죽음의 상징일까. 희망 없는 삶만큼 묵직한 단어라 샤랄라한 마음으로 펼쳐볼 수 없었다.

어둠의 아우라가 예상되는 책을 굳이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웃 나라이기는 해도 외국 소설이니 우리 정서와 잘 맞을까 의구심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책을 눈앞으로 데려오고 이틀 만에 완독했으며 바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걸 보면 이건 차라리 운명일까. 몇 주에 걸쳐 책을 읽고 다시 그만큼을 고민해야 느낌이 정리되는 편이건만 기다렸다는 듯이 손끝으로 글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보통의 기다림은 그 자체로 희망을 내포한다.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하므로. 오면 좋고, 오지 않더라도 욕심을 내려놓으면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안타까운 상황은 대상의 부재로부터 온다. '있다'에서 '없다'로 전환되는 순간은 얄궂게도 예고라는 게 없다. 한순간에 훅 다가온다. 사랑하는 이를 마음에 품은 이는 이런 이유로 종종 긴장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무라세 다케시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뒤늦은 회한으로 가슴 아파할 상황은 당신이나 나에게도 예외로 빗겨가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함께하는 지금은 더없이 소중한 순간이다.

 

이 소설은 기차 탈선 사고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령 열차에 올라타서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약혼자를 잃은 여자, 아버지를 잃은 아들,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잃은 소년, 열차를 운전한 기관사를 잃은 아내 등 4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커다란 틀은 옴니버스식인데 각각의 이야기에는 나머지 에피소드 속 등장인물이 조금씩 얼굴을 비추며 연결된다.

판타지 설정이 이질적이지 않아 현실처럼 전개가 자연스럽다. 옮긴이의 주석이 해당 페이지에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읽어왔던 상당수의 책이 주석을 맨 뒤에 부록처럼 수록해 놓아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왔다 갔다 책을 들춰보는 일이 반복되면 맥이 끊겨서이다. 소설은 작가가 펼쳐 놓은 흐름을 따라가는 장르이니 동시통역사를 옆에 둔 것처럼 바로 확인하여 몰입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했다.

 

감정이입이 되어 몰입한 에피소드는 2화와 4화이다. 매번 책을 거울삼아 나의 삶을 비춰보는데 두 이야기가 현재 상황과 가장 근접해서인 듯하다.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의 관계, 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서야 그와의 관계를 돌아보며 아파한다. 유령 기차는 그들의 회한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판타지적인 장치이다.

유령 기차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4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죽은 이가 승차했던 역에서 타야 하며, 피해자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열차가 사고 지점을 통과하기 전에 미리 내리지 않으면 자신도 죽게 된다. 마지막으로, 죽은 이를 만난다고 해서 현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죽은 이와 대화를 해볼 한 번의 기회만을 얻을 뿐이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더라도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제대로 된 이별을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아들의 관점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묘사한 2화에서는 직업의 의미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다룬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던 아들은 직장에서의 불합리한 처우에 밀려나 몇몇 임시직을 전전하다 칩거 생활을 한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후 당신의 흔적을 찾던 그는 변변치 않아 보였던 아버지의 일이 베푸는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평소 당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따라가며 비로소 커다란 사랑의 테두리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유령 기차에서 만난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넨 말이 인상적이다.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느끼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것, 삶에서 해답을 가르쳐주는 건 컴퓨터나 로봇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의 부모님과 아이들을 떠올린다. 이제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자식을 향한 마음을 헤아리는 나를 발견한다. 몇 년 뒤의 퇴직 이후에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면 좋을까 상상해 본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더욱 커질 터이다. 두려움과 용기는 같은 말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정박한 배는 부서질 염려가 없다 하던가. 바다에 나가 파도와 맞서며 항해하지 않는 배를 ''라 부를 수 있을까. 바다를 동경하며 항구에만 머무는 안전한 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이제는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치열했던 시기를 지나오면서 지쳤던 마음을 다독이면서 마음이 기뻐하는 일을 하며 나머지 시간을 걸어가고 싶다. 그 시작에는 분명 글이 함께 하리라. 나의 외로움과 슬픔과 아픔을 품고 함께 내 삶을 걸어온 나의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글은 분명 나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과도 연결되리라 믿는다. 그때까지 이렇게 책을 읽고 느낌을 정리하며 조금씩 닻을 올리고 싶다. 바다로 항해할 내일을 꿈꾸며.

 

내일도 오늘처럼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리라 생각했던 아내에게 오늘 아침은 남편의 얼굴을 보는 마지막이 된다. 사고 기차를 운전했던 기관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다룬 4화를 따라가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린다. 운전하기 좋은 대로를 두고 굳이 골목길로 핸들을 돌렸던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쪽으로 한 번 가보자 얘기한 적 없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도 나와 함께 한 시간을 다시 꺼내어 보고 싶었을까. 하루의 아쉬운 이별이 찰랑거리던 순간들을, 함께 걷던 그 거리를, 삼십여 년을 훌쩍 타임 슬립하여 재연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지. 말로 표현하기보다 은근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소한 순간들이 조각조각 되살아나더니 퍼즐 판을 향해 자리를 잡는다.

 

당신이 운전을 가르쳐주던 주차장 근처의 커피숍에서 나와의 추억을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 근처 주차장이 아래위 이중이라, 언덕에 올랐다 출발하는 연습을 했지. 코스도 분필로 그려가면서 연습하고." 운동 신경이 연합 신경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여자친구를 만나 개고생을 했던 남자. 결국 그녀의 손에 운전면허증을 쥐어준, 그 어려운 걸 해낸 사람이다.

"여기가 적당했던 거야?" "엄마 옛날 집 근처라 데려다주기 좋아서." "한 번은 순찰 도는 경찰들에게 걸린 적도 있었지. 엄마가 무면허인 상태였으니까." "오호! 그래서?" 무용담을 듣는 듯 아이들의 눈이 반짝인다. 경찰은 내 기억에 없는 인간이다. 그런 적이 있던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당신은 어찌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말하고 있을까. 차마 나는 기억 나지 않는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미소 지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을 잊고 살았던 걸까. 얼마나 많은 일들을 우리는 함께 지나왔던가. 사소한 오해와 원망들이 먼지처럼 쌓여 보석 같은 장면들을 가리고 있었나. 더께를 한 꺼풀씩 벗기는 마음으로 당신이라는 책을 읽는다. 몇 년 전만 해도 당신이 나의 글에 들어오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늘 같은 모습과 행동으로 머물고 있던 당신을 요즘에야 제대로 본다. 흐릿했던 마음의 거울이 점점 닦여가는 중일까.

밀대로 청소하는 당신이 안방에 오면 침대에 냉큼 올라가서 말한다. "구석구석 닦아주세요, 구석구석.(의역: 당신이 좋아요.)" 정말 문까지 뒤집고 구석구석 밀고 가는 당신에게 농담처럼 말을 건네는 순간이 나는 재밌다. 외출하려는 당신에게, "포도당과 과당과 신선한 비타민을 섭취하고 싶어요.(의역: 포도 사다 줄래요?)" 돌아오는 당신의 손에 꽃다발인 듯 포도송이가 들려있다. 흑백만 보이던 삶에 환한 빛이 켜진 듯 색깔로 물든 삶이 반짝인다, 이런 사람인 당신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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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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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나에게 별은 하늘하늘한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 별과 행성에 관한 백과사전을 몰입하며 펼쳐보곤 했다. 교과서 밖 지식에 관심이 간 건 천체 분야가 유일했다. 토성의 고리가 꼴랑 세 개라는 지식이 버젓이 담겨있었어도 교과서를 벗어난 미지의 세계는 어린 가슴을 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큰개자리의 알파 별 '시리우스'는 중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하던 별이다.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을 따라 쭉 내려가 수시로 내 마음의 원픽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잊고 있었다. 내가 별을 참 좋아하던 아이였다는 사실을.

20대의 나에게 별은 분홍분홍한 로망이었다. 반은 허세로 구입한 과학 잡지 '뉴턴'에도 고화질의 천체 사진이 많이 등장했다. 사진만 몇 번 들썩이다 일 년 정도 지나 자연스레 관심 밖으로 퇴출되었지만, '뉴턴'과의 첫 만남도 선명한 성단과 성운 사진이었다. 종이계의 비단인 듯 좌르르 광택이 흐르는 사진을 넘겨보던 손끝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또렷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가슴에 남아있는 로맨틱한 인간마냥.

 

로망에 현실의 바람이 불어온 건 30대이다.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옆 라인의 것을 이용하라며 잠시 아파트 옥상 문을 개방했던 날의 일이다. 당시 꼭대기 15층에 거주하던 나는 새벽이 되기를 호시탐탐 노리다 옥상에 슬그머니 올라간다. 도시의 밤하늘은 어떤 시각에 고개를 쳐들든 도통 음침해지지 않으니 만나기 힘든 기회가 온 셈이다. 오른손에는 손전등을, 왼손에는 동그란 별자리판을 창과 방패인 양 움켜쥐고 드디어 옥상으로 출정하는 나. 오리온자리 발치에 얌전히 앉아 있는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을 때의 전율이란!

더없이 좋았다, 환경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귀신보다 사람의 무서움을 알기에 그제야 현실이 피부에 와 닿는다. 으슥한 어딘가에서 불쑥 무언가 나타날 것 같았다. 게다가 손전등으로 별자리판을 비춰보며 돌리다 보니 새벽의 한기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새벽에 겨울철 다이아몬드의 고도가 높았으니 늦가을 정도였던 듯하다. 정확한 날짜나 시각은 기억나지 않지만 눈 속에 담겼던 밤하늘만큼은 파랑파랑한 현실과 함께 인화한 사진인 듯 선명하다.

 

심채경의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로망과 현실을 동시에 알려주는 천문학자의 에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별이 아니라 별을 보는 '사람'이다. 별을 보는 사람에 관한 단짠단짠의 글이다. 천문학자라고 낭만적으로 별만 바라보는 것은 아님을 작가는 자신의 삶에 비추어 조곤조곤 서술한다. 대학의 비정규직 행성과학자로서의 어려움과 그 길을 걷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준다. 아이의 엄마로서 마주하는 현실의 무게를 솔직한 일화로 소개한다. 천문학 분야의 사회적 이슈에 관한 의견도 피력한다.

천문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3부에서 특히 시선이 가는 건 고대 문헌에 기록된 천문 관측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오감만으로 그토록 정밀한 관측이 가능했던 걸 보면 지적인 능력은 시간에 비례해서 발달하는 건 아닌 걸까. 작가가 말처럼 우주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뿐이니까.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며 중간중간 공감도 하면서 나의 삶에 천체가 스며 들어오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여정이 좋았다.

 

우주의 A부터 Z까지를 총망라했다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관한 글 앞에서는 움찔한다. 심채경 작가처럼 나 역시 몇 년째 그 책이 책꽂이에 우아하게 꽂아만 놓았기 때문이다. 오다가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책등만 쳐다봐 왔다. 존재 자체로 우주의 비밀이 적힌 책을 득템한 듯 뿌듯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책 표지를 넘길 정도의 궁금증은 아직 없는 상태다.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대작을 성급하게 영접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우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히듯 첫 장을 펼치고 싶다.

이소연 박사의 이야기가 담긴 '최고의 우주인'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불합리성을 짚어주는 칼럼을 보는 듯하다. 다른 이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는다. '창백한 푸른 점'은 고독한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잠시 고개를 돌린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지구를 지칭한다. 언젠가 내 곁을 떠나게 될 나의 아이가 겹쳐진다. 엄마로서의 저자의 마음에 공감하며 조만간 다가올 미래를 상상한다. 허전하지만 아름다우리라.

 

"내 원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오. , , ,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빅3 남자주인공 중 하나인 김희성의 말이다. 나머지 두 명도 매력적이지만 가장 눈길이 간 사람은 김희성이다. 이름부터 내 취향이라. 빛날 희(), 별 성()이라니!

프롤로그에서 작가의 문장을 읽으며 위 대사를 떠올린다.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그녀.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을 동경한다는 그녀.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는 문장과 닮아있는 작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에필로그에서도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고, 삶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안갯속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글을 썼다. 그래서 '어떤' 책이 되긴 되었다'는 솔직한 문장 앞에서 별빛 같은 마음이 묻어 나온다. 모든 별이 그렇듯 뜨거운 열정을 품은 마음이다.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진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일정을 만나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하던 나는 100%에 근접하는 J.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그날의 스케줄을 대략 머릿속으로 짜 놓는다. 계획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할 일을 정해 놓은 시각에 무슨 일이건 숨어있다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그게 은근히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한데 이 책에서 섭동에 관련된 현상을 읽으면서부터 요즘은 되레 그 갑툭튀를 기다리게 된다. '섭동'이란 천체의 궤도에 교란을 주는 자잘한 인력들을 말한다. 행성들의 궤도는 섭동으로 인해 매끄러워지지는 않지만 커다란 주 궤도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고유한 결이 유지되는 것처럼. 나 역시 우주 안에 있는 우주의 일부라 그런 걸까.

그게 신기하면서도 경이롭다. 삶의 섭동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똑같은 순간을 맞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오늘은 어떤 변수로 내 삶의 궤도가 변할까. 종이에 박제되어 있던 성도가 머리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이 심장 위로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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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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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쓸 때마다 집 짓는 상상을 한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과 파편적 생각을 건축 자재인 양 '빈 문서 1'의 집터에 가져다 놓는다. 유리창, 나무판, 벽돌, 철근을 닮은 글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어울리는 자리를 찾는다. 기둥을 세우고 벽을 연결하고 문장의 방을 만든다. 출입문과 창문도 끼워 넣는다. 작가가 제공한 건축 재료에 내가 가진 것을 더한다. 글로 만드는 집이다. 몇 번이고 서성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허문다.

완성된 집을 보듯 한 권의 책을 본다. 수많은 집을 구경하다 꿈을 꾸게 만드는 집도 만난다. 평면에 박제된 감성을 공간으로 생생하게 펼쳐주는 집이다. 펼치면 크리스마스트리나 산타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서는 3차원 입체 카드를 건네받는 느낌이다. 밋밋하던 공간에 공기 이상의 의미가 다채롭게 담긴다. 공간의 개념이 확장된다. 낯선 설렘으로 두근거린다.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그 안의 사람은 많은 영향을 받는다. 유현준 작가의 글을 접하면서 공간과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건축에 대한 글로 이런 느낌을 받을 줄이야. 건축은 놀라우면서도 조심스러운 작업인 듯하다. 인간을 담는 공간을 구현하는 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건축가들은 자연과학적 기술력에 인문학적 소양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건축에 접근해야 하리라. 단순히 물질로 만든 구조물이 아니라 무형의 공간을 유형의 공간으로 변화시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접했을 때 받았던 생소한 느낌이 떠오른다. 한동안 내가 사는 도시의 거리를 지나면서 건물과 그 주변을 해석하는 작가의 문장을 얹어보았다.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는 한결 친숙해진 시선으로 건축물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20명의 건축가가 기획한 30개의 건축물을 소개하는 책이다. 몇몇 건축물은 작가의 전작에서 소개된 건축이라 익숙한 모습에 반가움이 앞선다. 그가 이 책에 수록할 건축물을 선택한 기준은 명확하다. 창의성이 담겨있는지 여부이다. 작가는 새로운 생각을 보여주는 건축물에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유현준의 관점을 따라 그와 시선을 일치시키고 소개된 건축물을 바라본다.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미술관의 작품을 관람하듯 건축물에 담긴 창작자의 향기를 보다 깊이 들이마신다.

창작물에는 의도가 담겨있기에 창작물을 통해 인간을 알 수 있다. 마야 유적을 보며 고대인들의 문화를 가늠하듯 인공물은 창작자와 그가 담고자 하는 인간을 대변한다. 건축물은 건축가의 의도를 만나 유일한 정체성을 지닌 대상으로 탄생한다. 인간을 감싸 안는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은 건축물과 공명하며 삶을 이어간다.

 

무심코 지나치던 건축물들을 떠올린다. 건축에 담긴 예술성이 이제야 조금씩 보인다. 책 안에 소개된 건축물들은 여행의 이유로 삼아도 될 만큼 흥미롭다. <인문 건축 기행>이라는 책 제목에 걸맞게 책의 구성은 여행 맞춤형이다. 건축물을 테마로 하는 여행안내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리라 여기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건축물이 세워진 장소별로 구성된 목차이다. 작가는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 등 크게 세 군데의 대륙으로 구분하여 해당 건축물을 소개한다. 둘째, 여행지를 소개하듯 대륙별 지도에 각 건축물의 위치를 표시한다. 전체적인 여행 코스를 계획하기 편하게 만들어 준다. 셋째, 각 장의 마지막 부분에 건축 연도, 건축가, 위치, 주소, 운영 시간, 휴관일 등 개관을 소개하여 세부적인 시간 계획의 수립을 돕는다. 넷째, 각 장의 도입 부분에 그려진 건축물 일러스트와 중간중간의 평면도, 단면도, 조감도 등 도면으로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 집의 평면도를 그리는 과제를 했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방학 숙제였던 '탐구 생활'이라는 책자 안에 있던 과제다. 창문, 미닫이문, 여닫이문 등 간단한 건축 기호가 나오는 내용이었다. 대문 열고 들어가면 주택 오른쪽에는 주인집이 살았다. 우리 집은 주택 왼쪽에 있는 방 하나, 그 옆에 붙은 부엌이 전부였다. 당시 나는 매우 간단하다며 웃는다. 날 일()자를 닮은 네모 하나만 그리면 되었으니까.

씻는 곳은 부엌문 옆에 있는 야외였으니 그리지 않는다. 수도꼭지 한 개는 초등학교 건축 기호에 없었다. 방에는 미닫이문과 창문 하나, 부엌에는 앞뒤로 여닫이문을 그려 넣는다. 부엌 뒷문을 열고 몇 걸음 걸어가면 화장실이 있다. 여기서 살짝 주춤한다. 주인집과 공용인데 이걸 넣어야 하나. 잠시 갈등하던 초딩. 우리도 사용하니까 퍼즐 판에서 튕겨져 나간 조각인 양 조금 떨어진 거리에 쪼끄만 네모와 여닫이문 하나를 그려 넣는다.

 

이사 다녔던 많은 집은 꽤 오랜 기간 내가 그렸던 평면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집은 그저 비바람이나 눈보라, 추위 등 자연 현상을 피하기 위해 존재하는 구조물 이상은 아니었다. 선사 시대의 움집이나 식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처럼. 생존을 위한 목적에 예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 삶 가까이에 머물던 건물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혼 이후 살던 집은 모두 아파트이고 직장 역시 학교이니 말이다. 평수가 비슷하면 우리 집이나 남의 집이나 구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교 건물도 규모만 다르지 네모네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네모난 집에서 네모난 직장으로 양방향 화살표를 따라 살아온 셈이다. 이런 이유로 유현준 작가가 소개한 건축물들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 걸까. 정형화된 모양에서 벗어난 다각형과 비정형화된 곡선의 향연은 홀로그램을 보는 듯 몽환적이었다.

 

그런 데서 삶이 가능할까. 마음 한구석 의구심을 품고 건축물을 들여다본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서 건축물의 필요성을 동시에 충족하도록 건축 자재를 변형한다는 건 얼마나 세밀한 작업일까. 더군다나 모래로 만드는 두꺼비집처럼 공간을 비워야 하는 작업이니 말이다. 손을 쑥 빼도 허물어지지 않도록 이리저리 무게 중심을 맞춘다는 건 정교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니 만만치 않은 일이리라.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를 현실 세계에 구현하는 건 어나더 레벨의 차원이다. 모형으로 시뮬레이션한다고 해도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변수는 무한에 가깝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한다는 건 얼마나 과감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가. 세상에 없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니 작가의 말처럼 건축가는 발명가가 맞다.

 

새로운 공간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세 가지 사회적 실험이 등장하는 인터넷 영상이 생각난다. '소셜 컨트롤'이라는 제목으로, 공간에 변형을 주어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일정 속도로 운전하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도로를 만들어 과속을 줄이고, 식욕을 억제하는 파란색으로 우아한 분위기의 식당을 꾸며 과식을 억제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비트박스 계단이다. 계단 양 끝에 센서를 달아 비트박스 소리가 나게 만든 결과, 계단 옆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기존의 피아노 계단은 여럿이 이용하면 음이 섞여 오히려 소음으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비트박스 계단은 여럿이 이용해도 주변 사람들까지 즐겁게 만들어 주며 자발적으로 여러 번 오르내리게 되니 건강과 즐거움을 모두 만족시키는 발상이다.

 

비슷한 맥락이리라.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건축물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눈으로 사진을 찍으며 때로는 감탄하고, 뭉클한 마음으로 새로운 시도의 결과물을 구경했다.

건축 재료의 변화로 디자인의 변화를 시도하거나 재료 자체의 성질을 이용한 건축, 중력을 이겨야 한다는 건축의 본질을 보여준 건축, 기하학을 잘 사용한 건축, 권위를 깨는 비대칭 공간으로 사람을 자연스럽게 품어주는 성당, 주변 환경과 빛을 잘 이용한 종교 건축, 화목하게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복층 세대, 정치 이념을 구조로 보여준 국회의사당, 자연과 협업하며 대화의 상대로 이용한 건축, 파격적인 상상을 현재 기술을 이용해 실현하는 방법을 개척한 건축, 고정 관념을 깬 미술관, 제약으로 발생한 문제 해결의 답을 디자인으로 바꾼 건축, 땅의 특징에 적합한 맞춤형 건축, 주변의 좋지 않은 에너지까지 전환하는 건축 등이 빛처럼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수많은 건축물을 보면서 나를 품었던 공간을 떠올린다. 몇몇 집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househome을 번갈아 가며 들락거리던 기억이 난다. househome의 차이점을 들어보았는가. 전자는 물리적인 구조물을 의미한다. 후자는 보다 더 확장된 개념으로 감정적인 요소까지 포함한다고 한다.

단칸방에 살던 시절, 여름과 겨울을 고스란히 받아냈지만 종종 떠올리면 그리움이 묻은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면 그때의 공간은 home이었다. 결혼 후, 방이 세 칸이나 되었어도 무거운 심장으로 오갔던 시간들이 머문 공간은 house였으리라.

주어진 상황에서 공간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건 버리기와 정리하기.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면서 서서히 물건을 버리기 시작했다. 정리를 시도하니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이 글을 쓰는 스터디 카페에서 집을 떠올리면 마음에 안정감이 드는 걸 보면 나는 분명 home에 거주하는 자다.

 

집을 소유한다는 건 집이 감싸고 있는 공간에 대한 사용권을 얻는 것과 다름 아니다. 어느 공간이든 마음대로 마음을 누일 수 있는 장소에 나의 시간을 누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만의 공간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예술이 깃든 건축의 관점에서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전문가로서 소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해 나가는 저자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언젠가 공간의 아름다움이 뿜어내는 빛을 눈으로 받아들이는 날이 올까. 작가 유현준의 시선에 빙의해서 건축물을 바라보다 나만의 시각으로 공간과 건축물의 조화를 해석하는 어느 일상이. 그런 날을 기록하는 나의 글은 입체 카드인 양 생생한 건축물을 닮아있을까.

 

 

p487, 주석 5: 직사각형이 고 ~이고

p488, 3째 줄: 계 단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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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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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질척 장마가 시작을 알리던 날, 빗물과 36.5도의 컬래버로 그들이 탄생한다. 나의 최애 운동화를 장악한 채 드러누워 있는 그들을 꾸깃꾸깃 신문지 몇 장으로 물리칠 수 있으리라 착각한 순간도 있다. 호시탐탐 상시 대기 중이던 생명체의 위력을 얕잡아 본 잘못이 크다. 신문지를 시작으로 균류와의 사투가 시작된다.

1단계 신문지 공격이 실패하자 2단계 손빨래를 시도한다. 뽀득뽀득 쓱싹쓱싹, 세탁기 탈수, 바지걸이에 한 짝씩 매달아 거실에서 우아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는 빨래 건조대에 건다. 선풍기 모가지를 상모처럼 돌린다. 완벽한 세팅이었다. 주룩주룩 비요일을 지나면서도 얼추 건조되었으니. 노동의 보람을 느끼며 잠시 뿌듯해 하였으나... 이런 된장같은 경우를 보았나! 말끔한 비주얼에 꼬리꼬리한 스멜은 반칙이지. 백기를 든 나는 자본에 굴복한다.

3단계 남편의 단골 세탁소에 맡긴다. 나흘 후 복귀했지만... 끈질긴 꼬리꼬리가 꼬리처럼 들러붙어 있다. 5천원이 무색하게도 굳건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터덜터덜 패잔병이 된 나. 괜스레 뾰족해진 화살이 운동화 딜리버리를 향한다. 꼬리꼬리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맡겼다는 말에 "맡기면서 냄새가 난다고 얘기 좀 하지." 푸념한다.

그날 밤, 아침저녁으로 남편 등에 발라주던 연고를 슬그머니 모른 척하는 소심한 복수를 한다. 거울 앞에 앉아 지난 며칠간을 냉철해진 이성으로 돌아보는 지금, 과녁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한다. 나 대신 운동화를 맡겨준 당신에게 고마워하며 여전히 운동화를 점령하고 있는 균류를 향했어야 함을. 내 운동화가 그렇게 좋은 거니.

 

<파견자들>은 균류와 비슷한 속성을 지닌 외계 생명체와 인간과의 소통을 다룬 SF 소설이다. 미래의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그들은 범람체로 불리며 놀라운 속도로 지상을 점령한다. 그들은 부분이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신경망으로 존재한다. 대가리도 없고 팔다리도 없고 곰팡이의 균사처럼 복잡한 연결망을 이룬 채 접촉하는 생명체를 흡수하면서 뻗어나간다. 결국 인간들은 지하로 내몰린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겉표지의 강렬한 색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노랑, 빨강, 초록빛이 어우러진 꽃을 닮은 식물들. 빛깔은 화사한데 분위기는 기괴하다. 어쩐지 느낌이 쎄하다. 살랑살랑 꽃향기가 퍼지는 게 아니라 짙고 습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듯 음산하다. 음지 식물이 양지로 나오면 이런 분위기가 날까. 아니, 아니, 음지 식물이라 일컫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다. 그렇다고 양지 식물이라 여기기에는 극히 축축하다. 음지와 양지 모두를 차지한 채 사방으로 뻗은 몸을 척 걸쳐 놓은 무법자를 떠올린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가운데 그려진 꽃이 낯설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꽃으로 알려진 '타이탄 아룸'이다. 3m 정도, 무게 100kg가량, 꽃이 필 때 36도의 열을 발산하며 1km까지 악취를 퍼뜨린다는 거대한 꽃 말이다. 무슨 내용의 이야기일까. 껍질만으로 알맹이를 상상해본다. 내용과 연관된 그림일 텐데. , 제목 <파견자들>과 그림의 연결 고리는 뭘까.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당혹한 설렘을 안고 김초엽이 만든 세상의 문을 연다.

 

소용없으리라 짐작이 가면서도 세탁소에 전화를 시도한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돌아온 답변은 허탈하다. "요즘 장마철이라 그런가 보네." "그러게요. (그래서 전문점에 의뢰한 거 아닙니까.)" "햇빛에 한 번 널어보세요." "...(그럴 거면 왜 맡겼을까요.)" "다음에는 좀 더 신경 써서 해드릴게요."".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혹시나 싶어 전문가가 흘린 멘트에 기대어 햇빛에 다시 널어본다. 하아. 내가 왜 그랬지. 비리비리한 장마철 햇빛에 근육질 파워를 기대한 내 잘못이 크다. 꾸리꾸리로 창대해지려는 꼬리꼬리, 너를 어쩌냐. 균류에게 화를 낼 수 없는 헛헛한 마음을 안고 재야에 떠도는 민간요법을 미친 듯이 줍줍한다. '운동화 냄새, 장마철 운동화, 운동화 세탁, 운동화 냄새 제거...' 운동화를 주인공으로 '냄새''세탁' 검색어의 미세한 변주가 시작된다. 햇빛, 삶기, 락스, 과탄산소다, 베이킹소다, 식초 등 살상 무기로 알려진 비방이란 비방은 죄다 끌어모은다.

삶았다가는 세균을 보내고 너덜너덜을 얻는다는 경험담이 눈에 띈다. 운동화 접착제가 열기에 녹는다나. 과탄산소다를 사용한 운동화 사진엔 노리끼리한 얼룩이 보인다. 꼬리꼬리를 보내고 그 자리에 냄새로 들어앉는다는 락스, 이미 실패한 햇빛 등은 탈락. 베이킹소다-식초의 정예 부대만 엄선한다. 적절한 분량 따위는 없다. 성에 찰 때까지 콸콸챱챱 물에 부은 다음, 하룻저녁을 잠재운다.

 

'파견자들'은 지상을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정예 부대다. 인간이 정착할 지상의 장소를 탐색하거나 범람체를 물리칠 방법을 연구한다. 감염되어 광증을 일으키거나 그들에게 흡수되지 않기 위해서는 저항성이 강해야 한다. 체력적으로도 막강한 지구력이 필요한 직업이라 몇 단계 시험을 통과해야 입문할 수 있다. 이미 파견자의 교관인 이제프 파로딘과 파견자를 꿈꾸는 정태린이 주인공의 양대 산맥이다. 여기에 범람체 덩어리인 ''이 가세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호기심을 자극하여 매 장면, 전개 방향에 궁금증을 얹는다. 읽다 멈추어도 다시 재생을 시작할 때 이전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서사가 펼쳐지는 속도는 빠르지 않건만 몰입감 있게 진행되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균류가 퍼지듯 소설 내용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갈증이 일어 물을 찾는 인간처럼 틈만 나면 책을 찾았다.

한 번 꽂히면 나의 머릿속은 온통 그것으로 가득 찬다. <파견자들>을 읽는 동안, 균류를 연상케 하는 범람체와 균류에게 공격당한 운동화 생각이 연결되어 나의 뇌를 점령한다. 더군다나 운동화는 논픽션 당면 과제이므로 운동화의, 운동화에 의한, 운동화를 위한 시스템 모드로 생각이 변환된다. 모든 감각 정보가 운동화를 해결하기 위한 연결망으로 흘러 들어간다. 리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승전 운동화다. 당신은 지금 뇌 안에 운동화 뭉치가 굴러다니는 인간이 쓴 '운동화--운동화--운동화' 형식의 리뷰를 읽는 중이다.

 

주인공 '태린'의 뇌 안에는 범람체인 ''이 굴러다닌다. 이제프를 포함한 어른들은 연구소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비윤리적 연구를 시도한다. 범람체를 아이들에게 주입한다. 성장하는 인간의 뇌 안에서 범람체와 인간의 신경 세포가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분석하는 실험이다. 더불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광증에 대한 저항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본다. 태린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이제프를 동경하며 파견자가 되어 그녀와 함께 활동할 미래를 꿈꾼다.

범람체는 표면 진동과 분자의 확산으로 세상을 감지하고 소통하는 존재다. 말소리를 내지 않아도 된다. 인간과는 다른 감각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셈이다. 인간은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며 많은 정보를 시각으로 받아들인다. 눈만 뜨고 있으면 세상은 존재 자체로 시각의 대상이다. 반면 눈을 감으면 순간적으로는 세상의 스위치가 꺼진다. 점자 알아보기 활동을 한 기억이 난다. 시각을 감각 하지 못하면 청각이나 피부 감각 등 다른 감각이 민감해진다던가. 미각, 후각 등을 더해 다섯 가지 감각을 떠올리며 소설에 등장하는 생소한 감각을 바라본다.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다른 방식의 감각이 가능하리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신경 세포의 기본 단위인 뉴런이 감각된다니! 작가가 창조한 새로운 관점에 평범한 정의들이 허물어진다. 상상의 범위가 대기권을 넘어 우주 방향으로 보다 확장된 듯한 기분이다. '너는 나를 기억하는 대신 감각할 거야.'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문장을 향한 물음표가 서서히 느낌표로 변한다.

 

한 몸을 공유하는 두 개체. ''인 인간 태린의 뇌 안에는 ''인 범람체 솔이 자리한다. 저자 김초엽은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독자에게 건넨다. 두 개의 자아가 공존하는 게 가능할까. 이제프를 비롯한 어른들의 답은 명확하게 '아니오'. 그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기획한다.

범람체들은 접근하는 대상들을 흡수하며 균류의 모양새로 빠르게 영역을 확장한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지상의 풍경과 쓰레기 매립 장소가 겹쳐진다. 몇백 년 지나야 겨우 분해가 된다는 고분자 화합물 덩어리가 점점 쌓여가는 지역 말이다. 수잔 시마드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에 나오는 균근 연결망과 영화 <아바타>를 둘러싼 몽환적인 분위기가 담긴 필터를 끼운 듯 비슷한 느낌이 점점 진하게 뿜어져 나온다.

인간이 떠난 지표면에서 인간이 없던 원시 지구 초기의 모습을 상상한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각종 환경 데이터가 막연함을 선명함으로 바꿔 놓는다. 인간이 지상에서 살 수 없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급해진다.

인터넷 뉴스로 NASA의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보면서 상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화성을 넘어 우주 공간으로 자유롭게 영역을 넓혀나가는 미래가 올까. 머리 위 방향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인류만 상상하다 지상으로부터 추방되어 땅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접하니 두려움이 살짝 엄습한다. 소설로 박제된 풍경이 미래의 어느 날, 소설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땅속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파견자들은 범람체에 대한 파괴자가 되고자 한다. 일부 감염이 된 인간들을 이용하여 거대한 연결망으로 존재하는 범람체를 전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두 개체의 특성을 모두 지닌 태린은 파견자가 아닌 전달자로 활동한다. 그녀는 솔과의 소통을 통해 범람체와 공존하는 삶을 모색한다.

, , 나의 운동화는 그런 삶을 모색하지 않을 테다. 균류에 의해 운동화에서 쫓겨나 샌달을 전전하고 있는 나의 발바닥에게 옛 터전을 찾아주고 싶단 말이다. 마른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기상 정보를 입수한 나는 출근 준비 전에 꼬리꼬리를 소환한다. 두 번의 세탁 코스를 마친 나의 아가는 비주얼만은 이미 백발 오브 백발이다.

이번에는 헹구기만 시도한다. MSG로 퍼퓸샴푸퓨어브리즈를 짜 넣은 다음 휘휘 헹궈준다. 탈수하고 다시 바지걸이에 걸어 앞 베란다의 빨래 건조대에 넌다. 햇빛이 이노무 잔당들을 싹 쓸어가길, 바람이 새로운 공격자를 후 날려버리길 바란다.

퇴근 후,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베란다로 돌진한다. 흐읍~! 스멜이? ?? 살짝 아리까리하다. 다시, 흐읍! ............ 균류의 끈질긴 생명력을 뤼스펙하는 경험치만 추가한다. 하아. 도대체 왜! 신문지-손빨래(feat. 빨래 비누)-세탁소-햇빛-담갔다 헹구기(feat. 베이킹소다+식초+샴푸). 그동안의 개고생 코스가 다시보기로 주루룩 풀린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BGM으로 깔린다.

 

이쯤 되면 한 번 해보겠다는 거다. 나는 균류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다시 검색 모드를 가동한다. 베이킹소다를 훌훌 뿌려서 나의 아가를 경극 배우로 만들어서 햇빛에 넌다. 해바라기 딜리버리가 되어 오전에는 뒷베란다에 놓았다가 오후가 되자 앞베란다로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엔? ............ 나노 단위 운동화 입자에까지 침투한 듯 깊은 맛이 우러나는 곰국인 양 후각을 자극하는 존재감이란!

, , 빡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원인을 분석해 보자. 온갖 명약을 쳐발쳐발콸콸 들이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패배했을까. 잠시 과학자 모드를 가동시킨다. ? 틈새시장의 틈을 발견한다. 명약의 효험을 맹신한 나머지 화학 공격만을 시전했던 거다. 빡빡쓱쓱 물리 공격으로 협공을 시도하기로 한다.

베이킹소다, 식초, 세제에다 은둔 생활을 하던 2016년산 운동화 크리너까지 발굴한다. '2016'에서 살짝 멈칫했지만 광표백에 소취 작용이라는 문구를 보고 없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동원한다. 성화 봉송 주자로 빙의하여 결연한 표정으로 운동화 솔을 치켜들고 전장으로 향한다. 동그란 목욕 의자에 앉아 초심으로 돌아가서 내 옷보다 더 구석구석 손빨래를 한다. 마지막 헹굼물에 식초를 풀어 혹시나 남아있을 세제 찌꺼기 잔당을 몰살시킨다. 헌 수건으로 정성껏 감싸서 세탁망에 넣은 다음 세탁기로 탈수한다. 이번 건조의 포인트는 속도전이다. 헤어드라이어로 살짝 말리고 신문지를 구겨 넣어 물기를 더 흡수시킨 다음, 바지걸이에 걸어 선풍기 상모를 돌린다.

 

지상에서 늪처럼 퍼져있는 범람체로 흡수된 인간의 몸은 분자 단위로 분해된다. 얼핏 인간이 잡아먹히는 듯 보이지만 외계 생명체가 보는 관점은 다르다. 다만 다른 형태로의 변이가 일어나 다른 형태의 삶으로 진입하는 거라고. 소설은 범람체가 흡수한 인간들의 자아가 여전히 그 집단 안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런 식으로 범람체는 파이를 키우면서 영역을 넓혀간다. 그들은 개별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지닌다. 가상의 존재이지만 어찌 보면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특성이다. 인간 역시 개별적이면서도 인드라망처럼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말이다.

주인공 태린과 범람체 솔의 공존 상황이 아주 뜬금없는 설정은 아니다. 우리의 몸 안에도 수많은 균류가 존재하고 있을 테니. 다만 균류에게도 자아가 존재한다는 창의적인 발상이 이처럼 매력적인 이야기로 탄생한다. 또한 내가 이 작품에서 높이 평가하는 점은 존재 차원에서 관점의 전환을 시도했다는 거다. 인간 안에 균류가 포함된 현재 상황을 뒤집어 지상을 점령한 균류 안에 인간이 흡수되는 상황을 설정했으며 공간적 배경 역시 지상과 지하를 뒤집어 인간을 지하에 배치한 점이다.

바라보는 세상이 보다 넓어진 느낌이다. 더욱 섬세하게 쪼개져서 감각을 자극하는 세상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선풍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보송보송한 운동화를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얼핏 향긋한 냄새가 희미하게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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