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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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냄새는 나무 냄새를 닮아서 좋다. e북보다는 만질 수 있는 종이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닿을 수 없는 우주인 듯 까마득한 디지털 말고 손끝으로 느껴지는 나무의 감촉을 좋아한다. 편안하게 책을 둘러볼 수 있는 서점이라는 공간이 이래서 좋다. 서점에서 책과 책 사이를 거닐면 숲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편안하다. 서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이제는 동네에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처음부터 완성된 건축물로 둘러싸인 공간은 없다. 기초공사를 하고 기둥을 세우고 자재와 자재를 연결하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물리적인 공간이 만들어진다. 건축자재가 만드는 공간이 물리적이라면, 공간이 담고 있는 정서는 화학적이다. ‘몸이 긍정하는 공간,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공간,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공간’. 내게 이런 공간이 있던가. 황보름 작가는 이런 공간을 소설에 담는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탁 트인다.

공간의 정체성은 물리적인 요소와 화학적인 요소와의 시너지로 결정되는 듯하다.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의 케미가 조화로운 공간은 따뜻하면서도 향긋하다. 책에 소개된 킨(Keane)의 앨범 <호프스 앤드 피어스>를 찾아 들어본다. 산책하듯 책 속을 걸어간다. 나무 냄새가 나는 공간으로 둘러싸인 상상을 한다. 첫 장을 넘겼을 뿐인데 마음이 느른해진다. 시선도 마음도 모든 감각이 이완된다.

 

소설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는 작가가 꿈꾸는 화학적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서점을 매개로 등장인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개개인의 삶에 담긴 마음의 공간이 변화하면서 그들 사이의 관계로 채워지는 공간을 완성한다.

일에 지친 주인공 영주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휴남동 서점을 만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에 지친 사람들이다. 사람에 지치고, 관계에 지치고, 사회에 지치고, 삶에 지쳐있다. 이들은 말없이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면서 마주 선 존재 그대로를 긍정해준다. 작가는 이들 사이의 대화와 심리변화를 통해 일과 글과 삶의 본질에 접근한다.

좋은 책에 대한 소설 속 정의가 마음에 남는다. ‘삶을 이해한 작가가 쓴 책, 작가의 깊은 이해가 독자의 마음을 건드린다면, 그 건드림이 독자가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좋은 책이라고. 작가가 엄청난 내공으로 삶을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누가 삶의 모든 면모를 이해하겠는가. 100년 가까이 오랜 시간을 걸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흘러가는 광대한 우주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말하려 한다. 적어도 글쓰기와 일하기와 인간관계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여 애틋하기까지 한 작가의 마음이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나의 심장을 뛰게 하였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을 때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다른 세계로 여행을 온 것 같아 마냥 신이 난다는, 자신만의 정서에서 벗어나 타인의 정서에 다가가게 해줘서 소설이 좋다는 주인공을 보며, 소설의 매력을 생각한다. 예전의 나는 소설이란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어서, 잡을 수 없는 허상을 향해 시선을 준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있었다.

소설은 허구다. 한데 소설이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때를 종종 만났다. 소설 속 이야기가 다가와 내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그 순간 종이에 새겨져 있던 평면적인 문장은 생명력을 얻는다. 꿈틀거리는 현실이 되어 나를 통해 살아난다. 소설을 현실로 구현하는 건 이런 면에서 독자에게 달려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관점이 서서히 달라졌다.

이야기 속 이야기.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책 안에 담긴 책들에 대한 소개가 자연스레 소설 속 등장인물의 서사와 연결되어서 좋았다. 소설과 책 소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기분이다. 점점 이야기가 좋아진다. 결국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한 게 아닐까. 나의 이야기이거나 당신의 이야기이거나 혹은 나와 당신의 사이에 있는 이야기이거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러니한 건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색채가 자신과 얼마나 닮아있는가에 따라 저마다 공명하는 걸까.

 

거울 보듯 나를 자꾸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다. 나의 일과 나의 글, 주변인들과의 관계, 현재와 미래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었다. 즐겨보던 프로그램이 끝나면 마음이 리셋되는 것 같다는 주인공의 생각에서 내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계속 삶을 리셋하고 싶은 욕구가 표출된 걸까.

스펙을 쌓는 과정을 단추에 비유한 내용에 마음이 아프다. 단추는 있는데 끼울 구멍이 없다는 말에 깊은 공감이 가 고개를 끄덕인다. 포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벗어나겠다는 선택을 한 것 뿐이라는 말이 멋지다. 무기력이 느껴지지 않아서, 주체적인 삶을 향한 굳은 심지가 보여서이다.

통제 가능한 시간 안에서만 과거, 현재, 미래를 따질 것,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존재할 것,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사는 삶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게 더 맞다는 내용에서 힘을 얻는다. 짐이 무거우면 잠시 내려놓거나 덜어내면 된다. 감당할 만큼의 짐만 들고 걸어가면 되는 거다. 감당하지 못할 짐을 아등바등 움켜쥐고 있는 건 욕심이 아닐까.

희망을 얘기하는 작가의 시선이 좋다. 단춧구멍이 없는 옷에 대한 해답을 이렇게 제시할 줄 몰랐다. ‘옷을 바꿔 입었지. 그런데 그 옷에는 구멍이 먼저 뚫려 있더라. 구멍에 맞게 단추를 만들었더니 잘 꿰졌어.’ 순간 코끝이 찡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거나 똑같은 단추를 지니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나에게 이쁜 단추를 나만의 스타일로 달고 다니면 그만이다.

 

마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이리도 담백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야하지 않으면서 설레는 느낌이 뭉클하다. 두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부드럽게 다가온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내게 좋은 기와 안 좋은 기를 구별한다고 한다. 간혹 까닭 모를 느낌이 오가는 걸 보면 맞을 때도 있는 듯하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둘 사이에는 바람이 흐른다. 마음의 결이 일치하면 투명한 흐름이 만들어져 기분 좋게 출렁인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삶에는 마법이 걸린다. 넘기 어렵던 산이 후 불면 날아가는 먼지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든다. 향긋한 비눗방울 안에 들어간 듯 둥둥 마음이 가벼워진다.

책 읽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시간이요. 우리가 책 속을 걷는 거 같아요.” 출장 후 잠시 들른 초록의 산책길에서 함께 걷던 동료가 봄 햇살을 닮은 표정으로 말한다. 좋은 사람이 주변에 많은 삶이 성공한 삶이라는 책 속의 문장이 고리처럼 연결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 나의 에너지와 공명을 일으켜 삶의 불꽃을 활기차게 되살려주는 사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사람. 좋은 사람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상상만 해도 행복감을 준다.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집 안에 있는 물건의 70%가 불필요한 물건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 나는 정리 삼매경에 빠져있다. 아름다운 쓰레기를 조금씩 정리하는 중이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내일도 쓰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쓸 것 같아 자리를 차지하던 물건이 의외로 많다. 지금 쓰지 않고 내일도 쓰지 않을 거면, 그 언젠가도 쓰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잘 산다는 건 잘 정리하면서 사는 거라는 걸. 두려워서, 눈치 보여서, 후회할까 봐 정리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 소설 속 대화를 떠올리며 물건을 정리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속성이 있는 듯하다. 사람이 물건은 아니지만, 전화번호 주소록을 정리하면서 비슷한 속성을 본다.

오늘 연락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연락할 것 같아 남겨두었던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오늘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내일은 연락하고 싶을까. 아마도 나의 삶은 전화번호를 삭제하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한결 가뿐해진다.

가족과 함께 할 때 불행하다면, 한 번 가족이라고 해서 계속 가족일 필요는 없다는 문장이 후련하다. 삐걱거리는 가족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의무감과 사회적인 시선에 묶여 스트레스를 받던 지인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므로 지금 할 일은 오늘 연락하고 싶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는 것.

 

해를 바라보며 퇴근하는 것이 소원이던 나날이 있었다. 주섬주섬 퇴근 후까지 일이 이어지던 시절이다. 꾸역꾸역 모여들던 일에 질식해버릴 듯했다. 일에 깔려 소진되는 듯하여 종종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을 그리 열심히 했던 걸까.

나만 힘들면 된다는 생각이 잘못이었다. ‘일하는 재미는 적당한 일의 양에 달려있다는 것, 일이 사람을 소진시키면 안된다는 것, 남을 위해 일하는 순간에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일은 밥 같은 거였어요. 매일 먹는 밥. 이제 소박한 밥을 정성스레 먹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를 위해서요.’ 누구보다 힘들면 안 되는 대상의 1순위, 의미 있는 일의 기준점은 나여야만 했다.

퇴근 후의 시간으로 하루의 무게중심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나의 낮은 밤을 위해 존재한다. 집에까지 일을 가져오고 일이 남으면 잠이 오지 않았건만. 요즘은 퇴근 후에는 학교 일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한다. 처음에는 어색하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만의 시간이 좋아서,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낮의 시간은 견딜 만한 것이 되었다.

만조는 하루 중에서 해수면이 가장 높아지는 때이다. 나의 만조는 퇴근 후 커피숍에 앉아있는 시간이다. 하루 중 이 시간만 확보하면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는 문장에 맞장구를 친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라는 말에도 공감하며.

 

자주 가는 커피숍의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쪽지와 두부 과자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모습을 보고 많은 걸 배웠다고, 나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멋있으시다고. 그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퇴근 후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시를 쓰고 교재 연구를 했을 뿐인데.

나의 행동과 일상이 누군가에게 바라볼 수 있는 무언가를 줄 수도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비언어의 효과는 언어보다 영향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직한 파도로 직진해선 바라보는 사람의 심장에 닿는 듯하다.

어떤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문장에 공감한다. 나에게 쪽지를 건네었던 학생도 결국 나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 삶을 들여다본 셈이 아닌가. 서로 다른 종교라도 최상의 경지에서는 하나로 이어지는 것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에 대해서도 비슷한 속성이 적용되나. 계속 대상을 향해 걸어가다 마주치게 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 한 사람이니까.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음악을 하든, 예술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나를 바라보기 위함이 아닐까.

책 속에 나오는 꽤 많은 문장을 따라 적었다. 등장인물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옮겨 적은 글씨를 바라보며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책은 기억이 아니라 몸에 남는다던가. 나의 몸 어딘가에 남아있을 문장이 마음의 외투가 된 듯 든든하다.

 

문장은 글로 만든 화살이다. 다른 이의 심장을 향하는 화살은 정확한 과녁을 가리켰을 때 비로소 시위가 당겨져 날아간다. 그리곤 찌르르 심장을 울린다. 이 책의 많은 문장이 나에게 그러했듯이. 내 생각과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마주쳤을 때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작가님과 작가님의 글은 얼마나 닮았나요?’ 문장을 보는 순간 찔끔한다. 나의 글은 얼마나 나와 싱크로율을 보이는가. ‘작가의 목소리라는 여섯 글자도 며칠 동안 마음 언저리를 맴돈다. 좋은 문장이 목소리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는 문장에 공감한다. 나의 글에는 나의 목소리가 담겼는가. 다른 이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재미없는 앵무새가 되는 순간은 없는가. 매 순간 경계하며 문장을 쓰리라 다시금 마음을 다진다.

주인공 영주는 유럽의 독립서점을 둘러보고 와서 책방의 정체성을 정립한다. 모든 책방이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개성은 책방을 운영하는 주인에게서 나온다는 점, 개성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용기라는 점, 주인의 용기가 손님에게 가닿기 위해 필요한 건 진심이라는 점.

글에도 적용해본다. 글에도 자신만의 색채가 필요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색채를 만드는 건 진심을 담은 올곧은 용기이리라. 이런 문장을 만들고 싶다. 나만이 쓸 수 있는 창조적인 글을 이 세상에 꺼내 보이고 싶다. 나의 문장을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설렌다.

 

대형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면 서툰 문장이어도 실제보다 괜찮은 책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정반대에 속한다. 발행인과 편집자가 동일인이다. 독립서점인 휴남동 서점처럼 독립출판사 느낌이다. 추천 글도 없고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다른 책 광고도 없다. 이런 유형의 책이 좋다. 겉표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온전하게 작가의 문장으로만 채워진 책 말이다.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 살짝 소름이 돋는다. 보고 싶은 문장들이 눈앞에 마술 글씨처럼 나타나서 이리도 공감이 갔던가. 나도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출발선에서 대기하는 달리기 선수처럼 가슴이 뛰었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물음에 결론을 내지 못했던 답을 발견한다. 진심을 담아 쓴 글이 누군가의 심장을 울린다면 그게 바로 작가라는 것을. ‘솔직하고 정성스럽게’. 제대로 잘 쓴 글을 정의하는 황보름 작가를 보며 글을 쓰는 마음을 정돈한다.

산들바람 부는 대청마루에 앉아 담백하고도 정성스레 차린 밥상을 받은 기분이다. 상추, 풋고추, 된장찌개, 쌈장, 오이와 밥공기에 묻은 밥풀까지 긁어먹은 다음 누룽지에 숭늉까지 마신 듯 개운하다. 작가가 만든 공간을 지나오니 멋진 화살을 만들고 싶어진다. 나만의 문장으로 만든 화살을 들고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공간을 둘러보는 상상을 한다. 홀가분하면서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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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 -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그림 하나, 시 하나
신현림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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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예술분야를 아우른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한 가지로도 일품요리로서 충분하지만, 어울리는 두 장르는 밥과 반찬인 듯 조화롭다. 예술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생각한다. 그림과 시는 분명 다른 장르이지만 표현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지도 모른다. 색과 색의 경계선을 구분 지을 수 없도록 채색한 스푸마토 기법의 <모나리자>처럼 내면세계를 그린다는 시각에서 보면 경계가 허물어진다.

작은 박물관 하나를 통째로 선물 받은 느낌이라는 이해인 수녀, 한 편 한 편의 글들이 주파수를 제대로 맞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한 점 잡음 없이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는 황인숙 시인, 미술은 말이 그친 자리에서 피어난다는 박영택 미술평론가의 추천 글을 보니 마음속에 설렘이 피어난다. 작가의 세계관을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한다. 자신이든 남을 위해서든 영혼의 쓸모 때문에 시를 쓰는 거라는 생각에 공감하며 이제부터 읽을 책의 분위기를 상상한다.

우리들은 무언가와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 이어짐이 사람과 사람일 때 더없이 따스하다는 서문의 문장이 모닥불처럼 온기를 준다. 명화와 시 속에서 깊고 뜨겁게 숨쉬기를 바란다는 그녀의 의도대로 책 장의 징검다리를 그런 호흡으로 건널 수 있을까.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는 그림과 시의 콜라보이다. 작가의 젊은 시절을 데워주었던 그림과 시를 연결한 에세이다. 책의 제목처럼 주 무대는 다섯 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진 미술관이다. , 절망, 사랑, 고독, 위로 등 다섯 가지 주제에는 정서의 색채별로 나열된 그림과 시가 매칭 된다.

수록된 시의 종류는 다양하다. 화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감성과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 시가 연결되기도 하고, 동 제목의 시가 놓이기도 한다. 그림과 시를 양팔저울에 놓고 질량을 잰다면 그림 쪽으로 중심이 기운다. 시는 그림이 등장하는 순간에 흐르는 BGM 효과를 낸 달까. 작가가 고흐와 브뢰헬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이 두 화가의 작품은 두 점씩 수록되어 있다. 그림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사소한 요소에도 드러난다. 화가에 대해서는 출생과 사망이 표기되어있지만, 시인에 대해서는 푸시킨과 도연명을 제외하고는 이름만 실려 있다.

한적한 시골에 자그마한 미술관을 짓고 수집한 그림을 전시한 큐레이터가 우연히 들른 나그네에게 소장품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장면을 상상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책이다. 한 작품 한 작품을 지날 때마다 작가가 계속 말을 거는 듯하다. 나는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나는 이 작품에서 슬픔을 보았는데 당신에게도 그게 보이나요? 하고.

 

노랑, 분홍, 카키, 스카이블루, 보라색. 각 장을 시작하는 페이지의 색깔이다. 간지처럼 끼워진 색깔의 장을 다섯 손가락에 끼워 한꺼번에 바라본다. 조화를 이루는 파스텔 톤의 무지개가 떠올라 마음이 안정된다.

그림 한 쪽, 시 한 쪽에 더해진 짤막한 해설은 대부분 한 쪽을 넘지 않는다. 그림과 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 판단한다. 작가는 그림과 시를 연결 짓는 것으로 8할의 역할을 한다. 예술이 뿜어내는 향기를 호흡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때문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호흡을 멈추게 된다. 여운을 음미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어준다. 한 점의 작품에 네 쪽씩 할당된 느낌이랄까. 그림--작가-독자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김정희의 <세한도>에 숙연해지는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가 연결되며 누구나 인생의 세한도가 하나쯤은 있을 거라는 작가의 멘트가 이어진다. 그저 버틸 수밖에 없는 날들, 춥고 곤궁한 날들을 언급하는 말에 대학교 2학년 즈음의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식당 서빙을 하다 쓰러져 주방의 뒷방에 누워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날이다. 그때가 50대 어머니의 세한도가 아니었을까. 나의 세한도는? 그저 버틸 수밖에 없었던 30대 정도였던 듯하다.

 

칸딘스키의 <푸른 하늘>과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앞에서 오래 서성인다. ‘마음은 미래에 살고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라는 문장이 따스하다. 그림에 담겨 꿈틀거리는 대상에게서 자유로운 생명체가 연상된다. 마음이 산뜻해진다. 언젠가는 날아오를 수 있다며 토닥토닥 부드러운 깃털 같은 위로를 준다. 드넓은 하늘의 색채와 어우러지면서 풍선처럼 둥둥 미래의 행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편안해진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 없는 / 그런 길은 없다 // 나의 어두운 시절이 / 닮은 여행을 하는 / 모든 사랑하는 이들에게 / 도움 될 수 있기를’. 나의 글이 시의 문장과 같기를 바라며 베드로시안의 <그런 길은 없다>에 나오는 문장에서 위안을 받는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볼 때마다 설렌다.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쾅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중략)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중략)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언제 이토록 두근거리는 시를 쓸 수 있을까. 넘사벽의 시 앞에서 잠시 부러워한다.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정갈해진다. 산다는 건 번잡한 물건들, 온갖 감정의 피로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단순함에 그 본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해설에 공감한다. 요즘 물건을 하나둘씩 정리 중이다. 미련이 묻은 아름다운 쓰레기를 간택할수록 속이 시원해진다. 몸과 마음이 별개가 아니듯 감정도 마찬가지인가. 단순함에 깃든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낀다. 과학자들도 이런 심정으로 자연현상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겠지.

골비츠의 그림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는 보는 순간 전율이 인다. 흑백의 선들이 꿈틀거리면서 어머니의 절망을 뿜어낸다. 선의 음영만으로 이리도 절절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니! 파울클레의 그림 <황금물고기>는 빛나는 햇살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고흐의 붓 터치가 좋다. <자고새가 있는 밀밭><별이 빛나는 밤>.

클림트의 <키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감상의 목적으로만 곁에 두는 아이템이다. 모든 날들이 좋았던 도깨비님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그저 좋다. 지인들에게 어필한 결과, 꽂지도 않는 머리핀, 쿠션, A4용지만한 종이액자그림, 2단 우산, 3단 우산, 머그컵을 선물 받아 소장중이다. 아이돌 굿즈를 모으는 심정이 이와 비슷할라나.

 

깊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처럼 읽히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림인 듯 생생한 풍경을 펼쳐 보여주는 시도 있었다. 화가와 연결되며, 시인과 연결되며, 작가와 연결되며, 때로는 과거의 나와 연결되며 따스한 시간을 호흡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흔들림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모든 예술은 자체로 경이로움이다. ‘어떤 시는 / 우주만큼 / 크다 // 어떤 / 그림은 / 연인만큼 / 다정하다는 뒤표지의 문구처럼 예술작품 너머의 마음들과 연결되다보니 한동안 잊고 있던 나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림들을 보니 사진과의 차이점이 보인다. 사진도 빛과 구도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 장르이지만 그림은 내면세계를 보다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인 듯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을 연결하고 때로는 영혼의 안팎을 한꺼번에 겹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새로운 풍경을 보면 상쾌한 공기가 스며들어와 숨을 한껏 들이마시게 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가슴이 답답하다는 건 고인 물처럼 꼼짝없이 마음이 정체될 때 그렇다. 차라리 한껏 흔들리고 나면 의외로 쉽게 정리될 때가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예술작품을 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새로운 그림이나 글이나 음악은 가슴을 향해 이색적인 숨결을 불어넣어주니까. 예술작품은 그렇게 한껏 우리를 흔들어놓으며 영혼을 데워주는 게 아닐까.

 

 

p58 그림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의 색채: 보라색파란색

p15, p182의 작가 이름: 쿠스타프 클림트구스타프~

p269 1: 산모통이산모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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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식물상담소 - 식물들이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
신혜우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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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짚은 어르신인양 시들시들하다가도 좋아하는 환경을 만나면 금세 청춘 모드로 돌변해버리는 존재. 식물만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교감하는 대상이 있을까. 거대한 녹색 날개를 펼친 공작새처럼 창밖에서 하늘거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커피숍의 2층에 있는 이 자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다. 글을 쓰다 간간이 고개를 들면 초록빛이 바로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햇살이 묻은 양 군데군데 노랑이 눈에 띈다. 머지않아 갈색비가 내리면 겨울잠을 자겠지.

동물이 직진의 삶을 살아간다면 식물은 원형의 삶을 반복한다. 극서의 열대지방이나 극한의 냉대지방에서는 삶의 방식이 다르겠지만 나는 사계절 속에서 살아가는 다이내믹한 식물들이 좋다. 새눈이 트고 잎이 자라고 꽃을 피우다 잎을 떨구고 다시 삶을 준비하는 과정은 인간의 일생의 축소판 같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식물의 삶은 반복된다.

삶의 사이클을 품은 채 몇 천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는 나무를 보면 경외감을 느낀다. 장수하는 거북이나 여타 동물들도 인간의 수명을 넘어선다지만 식물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하는 듯싶다. 어쩌면 식물은 그 옛날 진시황도 이루지 못한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이웃집 식물상담소는 식물을 사랑하는 식물학자의 에세이다. 식물학자라면 당연히 식물을 사랑하는 게 아니냐고? 모든 학자가 연구대상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냉철하게 학문적인 대상으로만 보거나 그 분야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신혜우 작가에게 식물은 더불어 살아가는 친구에 가깝다. 객관적인 독자로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중간 중간에 그려진 식물 그림 몇 장만 보면 절로 알게 된다. 작가의 마음이 투영된 그림에 초코파이 CF가 겹쳐진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진다. 화가이기도 한 그녀의 그림에서 애정이 물씬 풍긴다.

4개의 부로 들어가는 각각의 출입문에는 덩굴처럼 그려진 표지 그림의 변주가 있다. 1부는 열매, 2부는 꼬투리와 꽃, 3부는 단풍과 잎, 4부는 무로 돌아간 식물과 다시 초록 잎이다. 오른쪽과 왼쪽 아래 부분의 그림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알아채며 섬세한 표현력에 미소를 짓는다.

겉표지에 드러난 첫 인상은 결이 고운 아름다움이었다. 따스하고 잔잔한 동화를 연상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서문> 직전에 그려진 도깨비쇠고비였다. 말라비틀어진 이파리를 어찌나 정성스레 그려놓았던지. 이 책에서는 아름다움을 넘어 흙냄새, 땀 냄새를 맡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이 맞았다. 그림에 끌려서 들어갔다가 내용에도 못지않은 매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책의 제목처럼 이 책에는 식물을 소재로 하여 찾아온 사람들과 상담한 이야기가 주로 담겨있다. 그들의 대화는 식물로 시작하여 삶으로 마무리된다. 소재가 식물일 뿐이다. 상담에서 오고가는 주된 정서는 대상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다.

사랑에 바르고 틀린 게 있겠냐마는 과도한 사랑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식물은 우리에게 잘못된 사랑의 결과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과하게 물을 주었을 때 썩어가는 뿌리로, 과하게 편안한 장소에서는 아름다운 꽃을 절대 피우지 않는다.

집에만 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는 식물을 보며 나의 똥 손을 탓했으며 꽃이 피지 않아도 원래 그러려니 했다. 집에 놔두었다가는 말라비틀어질 거라는 생각에 식물을 위한답시고 아파트 화단 한 구석에 슬그머니 심어둔 적도 있다. 추운 바깥에서 얼어 죽으리라는 걸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원래 더 자랄 수 있는 열매 식물이 많다는 작가의 말에 주춤한다. 맞지 않는 환경에 머물 때, 식물은 시크한 초록만을 반복한다. 근근이 버티다 삶을 마감한다. 생명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삶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꽃이 피지 않을 때는 이유가 존재함을 언제부터 잊고 있었을까.

 

신혜우 작가의 글에서는 풀 냄새가 느껴진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같기도 하고 연약한 듯 보이면서도 강한 내면이 보인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글쓰기를 목표로 한다는 작가의 말이 따스한 이불 같다. 나의 글로 누군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책에서는 어린이 상담자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과의 대화를 보며 교육의 본질을 생각했다. 적합한 환경에서는 모든 식물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한다. 아이들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는 게 교육의 본질이니까. 이제껏 나는 얼마나 그들에게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던가. 식물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생각이 많아졌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에 작가는 좋아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어떤 일이나 대상을 좋아하는 게 자연스럽고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두 갈래 길에서 굳이 한 가지를 억지로 선택하려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 접힌 꿈은 언젠가 다시 펼치면 된다고, 접힌 채로도 더 멋진 무엇이 될지 모른다며 긍정적인 희망을 품게 만들어준다. 화가와 식물학자.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하지 않은 작가는 결국 독자에게 두 가지를 다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책을 선물한다.

 

책을 읽으며 철렁했던 건 절화에 대한 언급이다. 뿌리가 잘린 식물이 살아갈 수 없다는 건 조금만 더 생각하면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을. 잘린 꽃이 한 번도 살아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문장이 새삼스러웠다.

꽃집을 지나치다 뿌리가 잘린 꽃을 보면서도 예쁘다는 생각만 해왔다. 관점의 차이가 놀라웠다. 식물을 가까이에 둔 사람의 시선에는 꽃이 그렇게 보이는 거였구나. 식물을 인간이라 상상하며 절화에 대입하니 섬찟하다. 하얀 빛과 연두 빛이 어우러진 소국을 좋아하는데 이제부터 어찌해야 하나 갈등이다. 알고 나서도 마냥 모르는 듯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숟가락일까요, 젓가락일까요. 단감 씨앗을 버리기 전에 상담 샘께서 물으신다. 그게 뭔 소리예요? 여유 있게 미소 지으신 샘은 감 씨를 반으로 가르신다. ! 숟가락 모양의 배가 보인다. 싹이 터서 장차 식물로 자라날 부분을 라고 한다. 교과서에 그려진 종자의 구조를 실제로 처음 보았다.

종자의 구조를 얼마나 많이 가르쳤던가.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느껴져 살짝 무안했다. 감 씨가 반으로 갈라진다는 사실을 새삼 인지한 순간 찌르르 전율이 일었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듯 학문적인 식물과 생명체로서의 그것을 인지한다는 건 분명 차이가 있으리라.

 

식물은 가구가 아니다. 꽤 오랜 시간, 은연중에 식물을 화장대나 침대와 별반 다름없는 사물로 인식해왔다. 식물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숨을 쉬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하늘거리는 초록 색종이로 만든 조형물정도랄까.

주방 창가에서 키우는 몇몇 식물들이 있다. 화분 안의 식물이 살아있는 생명이라 인지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설거지를 하는데 식물이 숨을 쉰다는 사실이 확 다가오는 거다. 엉뚱하게도 말이 없는 친구처럼 나를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데 희한하게도 생각이 바뀐 시점부터 서서히 식물들이 생기를 찾아가는 듯했다. 새끼 손톱만한 분홍빛이나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보랏빛이 주방 창가에서 흔들거리기도 했다. 갈색으로 다 말라비틀어지는 잎을 보아도 절망하지 않게 되었다. 그럴 때가 되었음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다시 연둣빛 잎을 보여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가 왜 시든 식물을 그렸는지 이해가 되었다. 식물은 정형화된 이론이 아니라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실제임을 알았던 게 아닐까. 생명으로서의 자연스러움은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있지 않음을. 검버섯이나 주름진 얼굴에 시간과 햇살과 바람과 우주의 기운이 고인다는 사실을.

 

 

p140, 2째줄: 대게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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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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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탐하는 늙음의 이야기. 소설 파우스터의 모티브는 괴테의파우스트이다. 회사 메피스토를 매개로 젊음을 구매하는 노인들이 삶을 조종당하는 젊은이들과 삼각구도로 연결된다. 회사에서 젊은이들의 뇌에 몰래 심은 칩이 안테나 역할을 하며 그들의 경험을 노인들의 장치에 전송한다. 노인들이 안마 의자에 헬멧과 같은 장치를 장착하면 젊은이들의 시각, 청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노인들은 자본과 권력을 이용해 의도적인 상황을 만들고 젊은이와 가까운 인물들을 포섭하여 모바일 애완견을 키우듯 젊은이의 삶이 흘러가도록 조종한다.

젊음을 착취하는 노인들을 파우스트’, 젊음을 빼앗기는 청년들을 파우스터라 칭한다. 소설은 파우스터가 파우스트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을 연다. 주인공이 야구선수라 용어가 생소하여 하나하나 검색해야 했지만 문장의 흡인력은 낯선 허들을 부드럽게 지나도록 만든다. 쫓고 쫓기는 두뇌싸움과 그들의 밀당이 블록버스터급 영화처럼 마지막까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묵직한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책이다. 탄탄한 구성과 두께의 중압감을 넘어서 진공청소기 같은 전개가 펼쳐진다. 무방비한 상태로 이런 책을 만나면 한동안 멍하다. 탁월한 문장력과 속도감이 느껴지는 내용에 압도당한다. 참 좋았다며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 의욕적으로 노트북 앞에 앉는다.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편은 아니건만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나의 문장에 주눅이 든다. 며칠 만에 후다닥 읽어놓고선 멈칫거리기를 반복하니 리뷰는 보름이 넘도록 진척이 없다.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읽었을 때도 비슷했다. 그나마 짧은 분량에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그린 이야기라 낄낄대면서도 뭉클한 느낌을 가까스로 적었건만. 생과 사로 이어진 길목에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늙음이라는 심오한 주제라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걸까. 고민 끝에 늙음이 끄집어낸 신변잡기스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하기로 한다. 끝내 소설의 깊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를 인정한다.

 

요즘 자꾸 예뻐지는 인간이 있다. 이미 충분하여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는 필요 없건만 30년은 더 젊어 보인다는 경이로운 말까지 듣는 지경에 이른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 나비종의 글을 몇 번 접해보면 이 인간이 종종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사실을 절로 알게 될 테니. ‘젊다예쁘다는 동의어가 아니라고? ~ 젊음은 자체로 아름다움임을 몇 십 년 후의 당신은 절감하리라. 사회성 멘트 10년을 DC 한다 해도 찬란한 청춘으로 돌아간 듯 마음이 통통 튄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퇴행성관절염에 고지혈증에 만성위염의 삼재를 짊어진 노인 모드였기에 최근의 변화는 자체로 경이롭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일상을 되감기한다.

첫째, 듣는 음악이 변했다. 이용권의 기한이 만료되는 바람에 연장과 신상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잠시 예전에 저장했던 음악을 듣고 있다. 30대 때 듣던 노래들이다. 재생될 때마다 각각의 음표는 지나간 장면들을 매달고 넘실거린다. 서툰 모습 그대로도 의미 있고 눈부시던 시절로 종종 타임 슬립 했다.

둘째, 입던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 옷을 입던 모습이 떠올랐다.

셋째, 아이들이 타지에 나가는 바람에 타발적 신혼부부모드가 되었다. 새삼스러운 어색함에서 조금씩 나아간 한 발의 효과가 서서히 쌓임의 미학을 펼치는 중이다. ‘사이좋은 부부 코스프레가 반복되니 코스프레가 빠져버렸다.

넷째, 몇 가지 일들이 BGM으로 깔리니 새삼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희끗한 소금이 올라와 축 늘어진 미역 줄기 같았던 모발 모발. 퇴근길에 불쑥 미용실에 들렀다. 어둑해질 때까지 텅 빈 위를 감당한 보람이 있었다. 볼륨 매직 셋팅으로 다시 부활했다.

다섯째, 이 여세를 몰아 지난 주말에는 몇 년 만에 26년 지기의 집에 놀러갔다.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 속상했던 에피소드, 예전에 함께 했던 추억들이 이틀 동안 우리를 둘러쌌다. 말줄임표와 침묵이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간들. 에너지를 완충하고 회춘이 되어 컴백했다.

 

몸이 변하면 마음이 변하는 걸까, 마음이 변하면 몸이 변하는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처럼 애매하다. 둘 다 명제를 증명할만한 사례가 어느 정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체중으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며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 다이어트 성공으로 삶이 180도로 바뀌었다는 경험담은 몸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진 예이다. 실체인 몸은 즉각적으로 변화를 만들거나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마음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몸의 변화는 발현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이 예뻐진다든가 마음이 즐거우면 표정이 온화해지는 것처럼 주로 얼굴을 통해 약간의 변화만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은 이러한 편견을 가볍게 깨뜨린다. 1979, 미국 하버드대의 심리학과 엘렌 랭어 교수는 70~80대 노인 8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한다. 20년 전의 환경을 재현한 고립된 공간을 노인들에게 제공한 다음,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집안일을 직접하고 생활하도록 주문한다. 1주일 만에 나타난 결과는 놀랍다. 마음만 청춘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그들 모두는 시력, 청력, 기억력, 지능, 악력 등 신체 나이가 50대 수준으로 변화한다. EBS<황혼의 반란> 에서도 왕년의 스타 5명을 대상으로 1주일 간 비슷한 컨셉으로 시간 여행을 한 결과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 BBC<더 영 원스>라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보여줬다고 한다.

시간을 되감기한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들을 검색해보았다. 수긍이 가는 해석이 눈에 띈다.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거다. 시간을 거슬러가는 과정에는 매번 함께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들과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최근 나의 젊음이 발현되기 전에도 오랜 친구와의 푸릇한 대화의 시간이 있었음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젊음과 늙음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니 독자에 따라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다. 젊은이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의지에 의한 주체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지리라. 노인의 입장이라면 자유의지를 젊은이에게 투영하여 젊음을 맛보려는 삶이 마음에 남을 터이다. 그렇다면 나는? 50대는 애매하다. 젊음과 늙음 사이를 서성이는 어정쩡한 경계랄까.

나는 후자의 입장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파우스트로서의 삶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표면적으로는 파우스트가 파우스터를 노예인 듯 조종하지만 이는 실체 없는 거품처럼 허무하고 안쓰럽다. 대리만족하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나의 것이 아닌 젊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나. 스스로의 근육 없이 번듯한 목발에 의지하는 걸음으로 언제까지 갈 수 있는가.

책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몽환적인 표지 그림이다. 복잡한 나뭇가지 아래 인간들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림자 작가라는 나현정 작가의 명칭이 생소하여 다른 작품을 찾아본다. 흑백의 뒤엉킨 선들이 시선을 붙든다. 컬러감보다 무채색이 어울리는 작품 세계를 지닌 작가이다. 갈수록 무채색에 끌린다. RGB 0,0,0255,255,255 사이의 그러데이션이 인간의 섬세한 감정을 재현하는 것 같아서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 역시 무채색 못지않게 섬세하니 책의 내용에 적절한 그림이다.

몸과 마음은 본디 하나라서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며 나만의 결론을 내린다. 무엇이 먼저인지 구분 없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몸이 젊어지면 마음이 젊어지고 마음이 젊어지면 몸이 젊어지는 변화가 이어지니까. 그 둘은 쌍방향의 화살표 사이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삶의 흐름을 만드는 지도 모른다.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삶의 배터리가 줄어드는 것이리라.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는 건 과거에 얽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찬란했던 에너지의 불씨를 되살린다는 의미이다. 몸과 마음은 온전한 나의 것이어야만 삶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모두 아직 늦지 않았다. 마음이 늙을 때 육체는 마음에 동조하여 사그라지는 지도 모르니.

 

p109, 밑에서 8째줄: 움켜진 움켜쥔

p322, 밑에서 9째줄: 모르겠군요.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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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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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지 않는 나이가 있다. 13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장면들로 채워졌던 시간. 무에 그리 힘들었을까. 지금의 시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뚜렷한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건만.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와 잊힌 이유들이 중첩되어 서러운 감정들을 수증기처럼 머금었나.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지 현재의 마음이 과거에 담겼던 감정의 코팅지로 둘러싸인다. 손가락 끝으로 코팅된 비닐을 당기니 살갗이라도 벗겨지는 듯 아리다.

서른 언저리의 내가 눈가에 둔탁한 그림자를 탈피하듯 남기곤 후다닥 되돌아간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 선명해 보이는 선을 따라간다. 이내 끄트머리는 안개 자욱한 길로 이어진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듯 옅은 꼬리를 흘리는 비행운이 된다. 선뜻 잡지도, 깔끔하게 돌아서지도 못한 채 매번 서성이는 오십 대가 현재의 나다.

 

상처는 상처를 여는 열쇠인가. 작가로부터 소설 속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상처의 도미노 끝에 선 듯 덮어왔던 상처가 서서히 틈을 보인다. 소설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점점 투명해지더니 아득한 너머로 어정쩡한 삼십대의 내가 보인다. 다른 상황의 이야기건만 그 안에 담긴 익숙한 파편 몇 조각에 시선이 머문다.

소설밝은 밤은 상처의 외피로 둘러싸인 치유의 이야기이다. 서른둘의 지연과 외할머니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다양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와 그녀들 주변에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은 결혼으로 이어진 관계, 이별, 가족, 죽음, 사회적 배경을 원인으로 각기 다른 상처를 품는다.

주요 시대적 배경에는 백정이 차별받던 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천주교 박해,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담긴다. 그 시대를 건너는 여인들은 위태위태한 음표로 보이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스스로의 삶을 향한다. 치열함을 넘어서는 숭고함을 뿜어낸다.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건 무엇인가. 나의 경우, 관계가 주는 상처가 가장 아팠다. 커다란 아픔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된다. 책에서도 지연과 엄마, 엄마와 외할머니 등 모녀 사이의 뒤틀어진 관계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들의 갈등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와 맞물린다. 작가는 단단하게 꼬여있던 매듭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풀어지는지 밀도 있게 보여준다.

촘촘한 깊이로 스미는 문장에 주춤, 언젠가 심장에 새겼던 서러움을 담은 익숙한 문장들을 보며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멈칫한다. 밝은 밤을 건너는 동안 자주 아프겠구나. 마음에 고여 있던 물기가 철가루라도 된 듯 서서히 눈두덩을 향한다. 눈가가 뜨거워진다. 괜찮아져야만 했던 괜찮지 않은 나를 외면하며 괜찮아진 줄 알던 내가 보인다.

그럼에도 손가락은 새벽까지 이끌리듯 책장을 넘겼다. 외면할 수 없는 흡인력이 작가에게서 온 건지, 소설 속 그녀에게서 온 건지, 이제는 마주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간절함에서 온 건지, 혹은 이 모두의 공명으로 인한 건지 까닭 모를 중력에 이끌리듯 빠져들었다.

 

기쁨이나 즐거움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 반짝이는 햇살을 머금은 감정들은 크고 작은 강물로 존재를 돌다 증발한다. 반면 상처에서 배어나온 물기어린 감정은 찐득하다. 지쳐버린 정맥혈과 같아 스스로 흐르기에는 힘이 겹다. 마음의 혈관에는 거꾸로 흐르지 못하게 해주는 판막이 없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그것은 종종 뒷걸음을 치다 심장 한 구석에 쌓인다. 차곡차곡 접힌 채로 딱딱하게 굳어진다. 일상의 박동이 시작되면 다른 감정의 물결에 가려져 아래로 가라앉는다.

책을 통과하는 내내 열병처럼 이십여 년 전의 나를 앓았다. 이해받지 못한 서러움이, 빛도 소리도 없는 우주공간을 오롯이 혼자 유영하는 듯했던 외로움이,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 원인을 따라가지 못한 채 덩그마니 남아있던 먹먹함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여겨왔던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있던 지층이 되어오니 태풍에 휩쓸린 듯 바닥이 드러났다.

훌훌 떨쳐내고 싶던 감정의 귀퉁이를 여전히 붙들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줄줄 올이 풀린 실오라기를 차마 놓지 못해 습관처럼 손가락에 감고 있었던 걸까.

 

누구나 마음으로 이루어진 행성을 가슴속에 품는다. 마음의 행성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있다. 사랑, 기쁨, 분노, 즐거움, 행복, 슬픔, 아픔, 그리움, 외로움 등이 모여 행성을 만든다. 감정들은 수시로 우리의 안팎을 들락거린다. 찰나로 스치는가 하면 눅진하게 눌러 붙다 영혼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몰랑몰랑한 행성의 크기는 시시각각 변한다. 크기에 따라 다른 중력을 나타내는 행성처럼 마음마다 중력의 크기가 다르다. 다가오는 자극에 반응하며 상황과 사람을 다른 인력으로 끌어당긴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손수건이 다른 이에겐 물에 흠뻑 젖은 거대한 솜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이런 상상을 하면 다른 이의 상처가 조심스럽다.

다른 중력을 지녔으므로 동일한 무게감을 지닌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답했던 소설 속 인물의 행동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된다. 나의 무게감과 당신이나 가상의 인물이 느끼는 그것은 분명히 다를 터이다. 그러니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매번 스스로 다짐한다.

 

밤하늘에는 오래된 과거가 있다. 허블 망원경이 찍은 사진울트라 디프 필드에는 백삼십억 년 전의 우주가 담겨있다던가. 빛의 속도가 유한하기에 지금 내가 올려다보는 별빛은 과거의 별에서 출발했으리라.

밤하늘은 왜 어두운가. 독일의 천문학자 올베르스는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성간 가스와 먼지가 별빛을 가로막아서, 빛의 속도가 유한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빛의 속도보다 우주가 빠르게 팽창해서 등 다양한 인물들이 타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과학적 진위를 떠나 나에게 밤하늘은 위안을 주는 마음의 안식처이다.

낮의 하늘보다 밤의 하늘은 강한 인력으로 나를 당긴다. 과학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십대에도 밤하늘이 그저 좋았다. 잿빛 감정을 담은 채 터벅터벅 걷다가도 문득 올려다보면 나를 둘러싼 공기 위로 까마득한 우주까지 뻗어있는 이불이 부드럽게 마음을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어둠이 품고 있는 별이, 반짝이는 눈물 같은 별이 주는 위안에 서늘한 공간을 걸으면서도 따뜻했다.

 

밤은 어둡다. 어두우니 밤이다. 밝은 밤이라 했을까. 고운 비단으로 지은 옷감인 듯 환한 책표지를 가만가만 어루만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며칠간 밤의 하늘을 자주 쳐다보았다. 먼 하늘에서는 드문드문 별빛이 반짝였다.

별빛은 그 빛이 출발한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온다. 결국 밤하늘을 빛나게 해주는 건 과거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속성을 지니는 건 아닐까. 고통스럽던 과거는 아직까지 내게로 도달하지 못한 별빛이다. 빛으로 다가와 눈으로 스며들어 나와 이어진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고통만을 안겨주지는 않으리라. 외로운 이들에게 위안의 빛으로 점점이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말이다.

작가의 상처가 환하게 빛나는 밤이 된 것도 그녀의 고통이 빛으로 닿았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별빛은 별을 향한 이에게만 보인다.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고개를 들고 눈을 뜨는 건 의지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과거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는 이에게 밤하늘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완전히 밝아진 건 아니다. 과거로 타임 슬립하면 매콤함이 남는다. 들숨과 날숨이 폐로 들락거릴 때 공기는 말끔하게 비워지지 않는다. 나의 삼십 대는 어정쩡하게 폐에 머물던 공기였나. 그래도 새벽에 가까워진 듯 서러움이 덜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실눈으로나마 상처를 마주하려는 마음이 생긴 걸까.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패턴으로 이어지는 줄기로 존재하는가 보다. 밝은 밤의 상처에 기대어 나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상처를 향해 손끝을 내밀어 가만히 더듬어본다. 최은영의 밤이 상처를 향해 한 뼘의 손을 내밀 용기를 건네주었나.

외면한 마음은 거기 그대로 머문다. 매순간 자라는 몸처럼 시간에 끌려가지 않는다. 스스로 보듬어 꺼내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다. 치료를 하려면 상처를 들여다봐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 쓰라린 상처를 건드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금파리를 꺼내어 당신에게도 기꺼이 보여줄 순간이 언젠가는 올 것만 같다. 손끝이 뜨거워진다.


p12, 5째줄: 눈이 기화 → ~ 승화 or 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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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07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만큼 따뜻한 리뷰네요. 축하드려요 *^^*

나비종 2022-10-08 06: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축하의 말씀에 제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날이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romio 2022-10-1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늦었지만, 저도 리뷰를 읽고 잔잔한 여운을 느낌니다,, 저는 오십대 남자지만,,

나비종 2022-10-16 21:21   좋아요 0 | URL
따뜻한 책입니다. 혹시 읽지 않으신 책이면 읽어보세요. 남성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