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타주’라는 미술표현기법이 있다. 긁어내기 기법으로 ‘스크래치’로도 불리는. 도화지에 여러 색깔의 크레파스를 칠하고 진한 색으로 전체를 덧칠한 다음 칼이나 나무젓가락 같은 도구로 표면을 긁어내면 처음에 칠한 바탕의 여러 빛깔이 다시 드러나게 된다.
소설집『황금 비늘』에서 나는 ‘그라타주’를 떠올렸다. 아홉 편의 단편 소설 속에 펼쳐진 다양한 삶들은 여러 빛깔이지만 환하게 드러나지 않고 어둠 속에 숨은 채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소설 『엄마의 탄생』에 나오는 말처럼‘보이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p9) 삶이다. 너무도 선명하게 존재하지만 거대한 장막과도 같은 사회 시스템에 가려져 자세히 둘러보지 않으면 자칫 보이지도 않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진실을 저자는 부드러운 펜으로 조용하고도 조심스럽게 긁어낸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 가슴 속에 아린 기억 한 두 가지 쯤은 있으리라. 그런데, 뭐랄까. 소설 속의 삶들은 가슴 속에 새겨진 ‘아픔’이라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품고 있는 것도 모자라 삶 자체가 아픔이 되는 깊이가 있다 할까. 감히 어쭙잖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묵직함이 담겨져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저자의 흑백사진들과 시에서 볼 수 있는 분위기가 날 것 그대로 담겨있는 소설들. 너무나 느리게 펼쳐지기에 삶을 관통하며 갈라진 손톱 끝까지 보일 정도로 적나라하다.
저자는‘세상을 흑과 백으로 단순하게’(p7) 바라본다고 하지만 소설 속에서 흑백 사진처럼 서술된 삶들은 수많은 채도로 존재하므로 섬세할 수밖에 없는 복잡함이 있다. ‘언어의 절제’와 ‘여백의 미’를 깨우치고 ‘문학의 수묵화’를 꿈꾸고 있다는 저자가 ‘느림’과 ‘비우기’를 거듭하며 도달한 곳은 ‘낮은 지붕, 낮은 사람’이다. 가장 하찮게 보이지만 바다처럼 많은 것을 품고 있으며, 나무의 뿌리처럼 생명의 근원이 되는.
<금반지>는 장돌뱅이 아버지의 그림자가 담긴 장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칠순 기념으로 칠십 년 만에 처음으로 받았던 금반지를 잃어버린 아버지. 손녀딸의 금반지를 녹여서 만든 것이기에 더더욱 조바심 내며 찾으려는 과정은 ‘옻칠한 밥상처럼 번들번들하게 얼어붙은 빙판길이 시내버스의 발목을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는’(p17~18)것처럼 위태위태하다. 결국 밝혀진 사실을 목도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금반지 하나 때문에 ‘마치 내다 버린 사과 궤짝처럼 처량’(p19)하다.
동네에 있는 L슈퍼의 인터넷 주문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VVIP고객님이 되어버린 나. 덕분에 퇴근길 들르곤 했던 전통 시장과의 거래가 거의 끊어졌다. 연말정산이나 전통시장 상품권으로 시장 이용을 권장한다고는 하지만, 장꾼들이 장돌뱅이 숫자보다 적은 풍경은 특히 날이 궂은 겨울이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수요일마다 아파트 정문 근처에 열리는 장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장을 보며 핫도그 등 주전부리를 사먹던 소소한 재미를 언제부터 잊어버리고 살았던가.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시장을 찾던 일상은 동네 슈퍼를 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편안함에 떠밀려 점점 사라져가는 모습들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인 듯 허전하다.
속옷 장수 에어 메리가 내뱉는 말투에서는 걸러내지 않는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온다. 그녀의 욕설에서 상스러움보다 후련함이 느껴지는 것은 웃음 띤 위선으로 가려진 세상을 향한 솔직한 외침 때문일까.
<황금 비늘>은 굴다리 옆에 간판조차 없이 생선을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옻칠한 밥상처럼 번들거리는 것이 <금반지>에서는 빙판길이더니, 생선 가게에서는 ‘석양을 가리기 위해 지붕 끝에 매달아 둔, 때가 절은 국방색 천막’(p40)이다. 그것은‘썩은 생선 내장이 말라붙은 것처럼 물곰팡이가 피어난 슬레이트 지붕’(p40)과 더불어 그들의 삶이 담겨진 풍경과 어딘지 닮아있다.
‘어쨌거나 가오리를 홍어라고 한 것이 가짜를 속여서 판 죄가 된다면, 그렇게 따지고 들자면, 도대체 이 장터에서 가짜 아닌 것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중략) 가짜는 장터에서 사라져야 하는 거야. 응? 알겠냐구. 가짜를 파는 사람도 사라져야 한다구. 씨팔. (중략) 설사 장터에 깔린 수많은 장물들이 가짜라 해도 사람은 가짜가 아니다.’(p62) 그래, 사람은 가짜가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사람과 그들의 삶이 어찌 가짜일 수 있단 말인가.
생선 비늘처럼 장터에서 떨어져나가는 나리 엄마지만,‘생선 비늘 같은 굳은살이 박이도록 빠짐없이 바다 생선들을 만져보았던’(p48) 그녀는‘다만 늙었기에 장터를 떠날 뿐이지 가짜라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p62) 소설 『은교』에 나오는 말,‘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p250~251)처럼.
제목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리꽂힌 황혼 줄기에 빛나던 조기 비늘처럼, 사회의 어두운 장막이 걷힌다면 그들의 진짜인 삶도 황금빛으로 빛나지 않을까.
<진주조개잡이>는 바뀐 세상에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나전칠기 기술자의 이야기이다. ‘손바닥 전체에 누룽지 같은 굳은살이 박이도록’ 자개장을 만들었던 영복은 솥단지에 들러붙었던 누룽지가 떨어져나가듯 직장으로부터 분리된다.
‘세상이 바뀌어야지. 이게 어디 우리 같은 놈 살라는 세상이냐?’(p80) 비정규직이 절반이 넘는 세상, 그나마 불안정한 직장이라도 다니고 있는 게 어디냐며 부러움을 사는 세상이다. ‘버스 안에서 아내와 주고받은 세상은 무서웠다. 여차하면 발목이 날아가는 지뢰밭 같았다.’(p91) ‘그것은 낡은 아파트의 외벽처럼 죽죽 갈라 터진 삶의 균열이었다.’(p92) 점점 설 곳을 잃어가는 삶들이 무겁고 또 무섭다.
<그물>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우리 식구 중에 나만 병신인 줄 알아? 나만 절름발인 줄 아느냐고! (중략) 남의 식당에서 끙끙대다가 명절에나 집에 오는 큰언니는 뭐, 병신 아니야? 친정도 모르고 사는 엄마는, 엄마는 나하고 다를 줄 알아? 외가도 없는 우리는 또 어떻고. 도대체 우리 집안에 정상인 사람이 누가 있어!’(p119)라 절규하는 막내의 말에‘부서지고 무너진 폐허 속의 풍경처럼’(p120) 가족들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흡사 갇혀 있던 견고한 그물로부터 탈출한 물고기 떼같이 모두들 긴장의 눈빛을 휘둥휘둥 밝혀두고만 있었다. 그것은 캄캄한 심연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그 무엇의 완전한 탈출을 기다리는 눈빛 같기도 했다. ’(p121) 소설 속 가족의 균열은 장손 집안에 아들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을 캄캄한 심연 속에 가둔 것은 무엇일까. 세상으로부터 뿌리 깊게 박혀진 인식과 내일을 걱정해야하는 불안정한 삶이 가족이라는 따뜻한 말을 그물과 같은 올가미로 둔갑시킨 것일까.
<칼자국>은 역 주변 골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는 게, 걸어서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 같아. 어둡고 답답하고 두렵고.’(p143) 낮에는 기차역 매표소에서, 밤에는 술마당에서 일하는 수빈은 이 지긋지긋한 T골목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다.
‘여긴 세상의 끄트머리야. 바닥이라고.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어. 끄트머리? 야, 강수빈. 너, 꼭 딴 동네 사람같이 말한다. 여기가 세상인 줄 몰라? 세상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라고.’(p151)‘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외치셨다는 부처님의 말처럼 누구든 그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인데 그곳을 끄트머리로 인식하는 삶이 바늘 끝에 찔린 듯 아리다.
‘뜨더라도 골목 사람들 무시하지 마라. 나처럼 물장사를 하든, 돼지 뼈를 삶든, 가랑이를 벌리든 코피 터지게 열심히 산다. 이 바닥에 살다 보면 누가 누구를 무시하는 게 얼마나 같잖은 일인 줄 아니? 여기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남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아. 남을 등쳐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든, 돈푼이나 있다고 꼴값하는 눈먼 놈들이든 서로서로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해.’(p151)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삶이거늘. 나를 돌아보고 은연중에 그런 풍경들을 무시했을 지도 모를 내 마음을 뒤적여본다.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 칼자국이 오늘, 여기까지 나를 끌고 왔는지 모른다. 골목을 드나들며 흔들릴 때마다 허벅지 근처에서 시큰거리던 그 통증이.’(p153) 그래도 나는 감히 그 통증이 그들의 삶을 빛나게 하고 일으켜 세워 줄 또 다른 의지의 근원이 되리라 믿는다.
<거인의 방>은 아홉 평짜리 원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502호 ‘호미 할머니의 등은 주워 든 비닐 조각이나 시금치 이파리같이 폭삭 젖어 있었다. 우산살처럼 접힌 등 때문이었다. (중략) 그 굽은 허리춤에 밀가루를 뒤집어쓴 곶감처럼 호미 할머니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p159~160) 사람의 몸은 그들의 삶과 점점 닮아져만 가는 걸까. 할머니를 묘사한 모습에 궁핍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돈 이만 원이면 우리 철민이 지금 먹이는 우유, 두 배는 고급으로 먹일 수 있다고요. 거인도 될 수 있는 돈이란 말입니다. (중략) 그럼 우리 원룸이 거인의 집이라는 말이야? (중략) 집은 무슨 집? 방이지. 원룸 뜻도 몰라? (중략) 그렇다면, 거인의 방?’
몇 만 원에 동요하는 이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고급 우유와 유기농을 찾으며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들은 아직도 연탄을 떼며 겨울을 넘기고, 그 연탄 몇 장조차 아쉬워 추운 몸을 부비며 살아간다.
‘이런 부실 공사를 한 놈들이나 그것을 눈감아 주고 준공 승인을 해준 놈이나 다 마찬가지로 썩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쭈그려 앉아 모기에 뜯기는 것 아닙니까? (중략) 더 이상 이것저것 말씀드리지 않아도 우리가 힘을 합쳐 무엇을 해야 되는지 다들 아실 겁니다.’(p195)
구름 입자 백만 개가 모여 하나의 빗방울을 만들어내듯이 같은 마음으로 뭉치면 ‘거인의 방’을 ‘거인의 집’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집이 바뀌지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마주 잡은 손의 온기라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는 저자가 지은 동명의 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이다.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그들의 삶은 ‘낚싯줄 같은 바람’ 끝에 매달린 듯하다. ‘욕망이란 게 인간의 본능적인 것일진대 무엇이 불온한 욕망이라는 것인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불온하다는 것인지.’(p205) ‘여자를 택하고 커밍을 피한 삶이 과연 정당할까요.’(p220) 아직도 동성애자를 보는 시각이 그리 달갑지 않다.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그래서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성별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닐 텐데. 다수에 속하지 않는다 해서 소수의 삶이 외면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 새는/ 국립대전현충원 제15묘역 육군 하사 서격춘의 묘와/ 육군 상병 서한원의 묘 사이로 내려앉았다/ 폭설에 간신히 발목만 파묻힌 채// 어디로 갈 것인가/ 두어 번 방향을 바꾸며 두리번거리던 그 새는/ 해군 상병 연준모의 묘를 향해 뒤뚱뒤뚱 걷다가/ 푸드덕 눈을 털고 날아올랐다// 얼어붙은 주검과 주검 사이 내려앉은/ 그 새는/ 이만 개의 화강암 비석을 숲으로 여겼을까/ 폭설 속 저 붉고 푸른 이만 개 원색의 조화(造花)가 꽃인 줄 알았을까// 새의 무게만으로도 저렇듯 선명한 발자국을 본다// 십 년 전의 추억과 일 년 전의 추억 사이에/ 떠난 사람과 돌아온 사람 사이에 내려앉아 뒤뚱거리는/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길까/ 어디쯤에서 날아올라야 하는 걸까// 어디선가 이명처럼 새가 울고/ 새 울음 내려앉는 비석들 사이/ 얼어붙은 발자국/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시가 나는 참 좋았다. 물론 저자의 심오한 마음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뭐랄까, 토막토막 나온 시를 연결하여 읽어 내렸을 때, 멀리서 날아온 피구 공을 한순간에 덥석 안아 받은 듯 뭉클한 느낌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시는 소재를 넘어 내 삶의 모습과 방향을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길까, 어디쯤에서 날아올라야 하는 걸까’하는 질문이 한동안 마음속을 돌아다녔다.
<즐거운 초상>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찾아나서는 판화가의 이야기이다.
유족들의 모습에서 ‘웃는 바위’를 본 근상은 ‘아픔과 소외를 표현하되 직설 대신 은유와 역설로 담아내자’(p234)고 결심한다.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초상이 즐거웠으면 싶다. (중략) 장례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지금보다 좀 더 가볍고 즐거웠으면 한다. 아버지, 여기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죠. 이제 편히 떠나세요. (중략) 즐거운 초상, 웃는 상주. 그게 꼭 고인에 대한 불손이고 경박한 풍습이랄 수만은 없지 않은가.’(p238) ‘어머니, 하고 부른 다음, 임종의 순간처럼 깊고 고요한 묵언의 대화를 나누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삶을 반추하는 동안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그 눈물 끝에, 살그머니 웃으면 안 될까. 평생을 모셨고, 평화롭게 떠나셨으니, 이제 좀 웃어도 되지 않을까.’(p249)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몇 번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죽음의 절차를 보는 새로운 시각이 살짝 충격적이었달까. 팔십을 바라보시는 부모님, 상상하기 싫지만 언젠가는 내게도 당신들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오리라.‘있을 때 잘하라’는 말을 머릿속에 심어두고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아직은 울음 끝이라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데.
‘저 일몰의 깊이는, 환상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중략)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비현실인지. 자동문 밖인지 안인지. 빈소인지 접견실인지. 침묵인지 소음인지.’(p239)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일몰을 뒤로 하고 내게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낮과 밤의 경계가 애매한 시간을 뜻하는 말이다. 삶의 끝이 죽음이라면, 죽음의 순간은 삶인가 죽음인가. 24시이면서 0시가 되는 밤 12시처럼, 삶과 죽음이란 언제 생각해도 경계가 모호해지는 혼란을 가져다준다.
<붉은 섬>은 사람들 사이에 섬처럼 떠있는 또 다른 사람이 중년의 시간을 지나가는 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아는 덴 그렇게 많은 게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p285) 누구? 응. 아는 사람. 흔히 지나치듯 하는 이 말을 곱씹어본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 말한 그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진짜 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걸까 하고.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이, 직업, 학력 같은 형식 말고,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무슨 생각으로 삶을 바라보고 있는지 내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반대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내면을 관통하는 무엇을 보게 된다면 몇 시간을 본 사이라도 아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떠나온 길을 보면 아득하고 돌아갈 곳을 생각하면 까마득한 바다 한복판의 섬’(p286) 때때로 느껴지는 공허한 느낌이 나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아서 소설 속 인물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나무들도 인간처럼 중년이 있다. 나무들도 갈등을 겪는다……. 인간이든 나무든 그들의 중년은 다 같이 미와 추의 양면성을 지녔는데…….’(p274)
‘생각해보면 사람들마다 섬 하나씩 품고 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공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그래서 나 혼자 소유하기를 절실히 원했던 그 공간들이 실은 외딴섬 같다는 생각입니다.’(p281)
그래, 섬이었던 거다. 중년의 후반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시간 속으로 간혹 날아드는 외로움은 섬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자유를 안게 되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내게 있어 섬과 같은 공간은 글을 쓰는 이 곳, 이 순간. 글을 쓰는 동안 나의 사유는 어디로든, 누구에게든 날아갈 수 있으므로. 비록 발은 땅을 디디고 있지만, 고개를 들면 언제든 끝없이 열려있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책장을 덮고 멍하니 겉표지를 바라본다. 처음 펼칠 때만해도 보이지 않던 배 한 척이 눈에 띈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는 바다를 향하고 있는 등대 같기도 한 것이 있다. 배와 등대 사이 오른쪽 중간 즈음에 떠있는 구조물도 보인다. 빛과 어둠, 그리고 그 경계. 나는 어디에 설 것인가. 나의 글은 어디를 향해 날아가 앉을 것인가.
바다와 하늘이 합쳐진 공간이 황금 비늘처럼 빛난다. 그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어둠이 묵직하다. 저자가 소설을 통해 그려낸 ‘사람의 흑백 풍경’이 담겨있을 것만 같은 공간이다. ‘소설로서는 욕을 먹어도 사람의 기록으론 욕먹지 않기를 바란다.’(p8)는 저자의 말이 마음으로 깊이 파고든다.
‘그라타주’는 프랑스어로 ‘긁어 지우기’나 ‘마찰’이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어둠 속에 희끗희끗 보이는 삶을 긁어보고 싶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찰은 오롯이 긁어내는 자가 감내해야 할 몫이다.‘그라타주’처럼 긁어내어 환하게 만들고 싶다. 아니, ‘만든다’는 표현은 어쩐지 적절치 않다. 보잘 것 없는 나의 글을 도구로 ‘드러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어둠 속에 있는, 어둠에 가리워진 삶들이 처음부터 어둠은 아니었으므로.
*사족
1. 인원 수의 합이?
p257, 가이드는 패키지 여행객이 모두 열일곱 명이라 했는데,
서울 가족 3명, 광주 가족 4명, 수원 직장 동료 8명, 대학생과 충주 아주머니와 아저씨 3명.
모두 합치면 18명이다.
2. 문장이?
p281 9번째 줄, ~젖어 있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