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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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나에게 별은 하늘하늘한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 별과 행성에 관한 백과사전을 몰입하며 펼쳐보곤 했다. 교과서 밖 지식에 관심이 간 건 천체 분야가 유일했다. 토성의 고리가 꼴랑 세 개라는 지식이 버젓이 담겨있었어도 교과서를 벗어난 미지의 세계는 어린 가슴을 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큰개자리의 알파 별 '시리우스'는 중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하던 별이다.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을 따라 쭉 내려가 수시로 내 마음의 원픽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잊고 있었다. 내가 별을 참 좋아하던 아이였다는 사실을.

20대의 나에게 별은 분홍분홍한 로망이었다. 반은 허세로 구입한 과학 잡지 '뉴턴'에도 고화질의 천체 사진이 많이 등장했다. 사진만 몇 번 들썩이다 일 년 정도 지나 자연스레 관심 밖으로 퇴출되었지만, '뉴턴'과의 첫 만남도 선명한 성단과 성운 사진이었다. 종이계의 비단인 듯 좌르르 광택이 흐르는 사진을 넘겨보던 손끝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또렷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가슴에 남아있는 로맨틱한 인간마냥.

 

로망에 현실의 바람이 불어온 건 30대이다.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옆 라인의 것을 이용하라며 잠시 아파트 옥상 문을 개방했던 날의 일이다. 당시 꼭대기 15층에 거주하던 나는 새벽이 되기를 호시탐탐 노리다 옥상에 슬그머니 올라간다. 도시의 밤하늘은 어떤 시각에 고개를 쳐들든 도통 음침해지지 않으니 만나기 힘든 기회가 온 셈이다. 오른손에는 손전등을, 왼손에는 동그란 별자리판을 창과 방패인 양 움켜쥐고 드디어 옥상으로 출정하는 나. 오리온자리 발치에 얌전히 앉아 있는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을 때의 전율이란!

더없이 좋았다, 환경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귀신보다 사람의 무서움을 알기에 그제야 현실이 피부에 와 닿는다. 으슥한 어딘가에서 불쑥 무언가 나타날 것 같았다. 게다가 손전등으로 별자리판을 비춰보며 돌리다 보니 새벽의 한기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새벽에 겨울철 다이아몬드의 고도가 높았으니 늦가을 정도였던 듯하다. 정확한 날짜나 시각은 기억나지 않지만 눈 속에 담겼던 밤하늘만큼은 파랑파랑한 현실과 함께 인화한 사진인 듯 선명하다.

 

심채경의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로망과 현실을 동시에 알려주는 천문학자의 에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별이 아니라 별을 보는 '사람'이다. 별을 보는 사람에 관한 단짠단짠의 글이다. 천문학자라고 낭만적으로 별만 바라보는 것은 아님을 작가는 자신의 삶에 비추어 조곤조곤 서술한다. 대학의 비정규직 행성과학자로서의 어려움과 그 길을 걷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준다. 아이의 엄마로서 마주하는 현실의 무게를 솔직한 일화로 소개한다. 천문학 분야의 사회적 이슈에 관한 의견도 피력한다.

천문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3부에서 특히 시선이 가는 건 고대 문헌에 기록된 천문 관측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오감만으로 그토록 정밀한 관측이 가능했던 걸 보면 지적인 능력은 시간에 비례해서 발달하는 건 아닌 걸까. 작가가 말처럼 우주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뿐이니까.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며 중간중간 공감도 하면서 나의 삶에 천체가 스며 들어오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여정이 좋았다.

 

우주의 A부터 Z까지를 총망라했다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관한 글 앞에서는 움찔한다. 심채경 작가처럼 나 역시 몇 년째 그 책이 책꽂이에 우아하게 꽂아만 놓았기 때문이다. 오다가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책등만 쳐다봐 왔다. 존재 자체로 우주의 비밀이 적힌 책을 득템한 듯 뿌듯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책 표지를 넘길 정도의 궁금증은 아직 없는 상태다.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대작을 성급하게 영접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우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히듯 첫 장을 펼치고 싶다.

이소연 박사의 이야기가 담긴 '최고의 우주인'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불합리성을 짚어주는 칼럼을 보는 듯하다. 다른 이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는다. '창백한 푸른 점'은 고독한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잠시 고개를 돌린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지구를 지칭한다. 언젠가 내 곁을 떠나게 될 나의 아이가 겹쳐진다. 엄마로서의 저자의 마음에 공감하며 조만간 다가올 미래를 상상한다. 허전하지만 아름다우리라.

 

"내 원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오. , , ,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빅3 남자주인공 중 하나인 김희성의 말이다. 나머지 두 명도 매력적이지만 가장 눈길이 간 사람은 김희성이다. 이름부터 내 취향이라. 빛날 희(), 별 성()이라니!

프롤로그에서 작가의 문장을 읽으며 위 대사를 떠올린다.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그녀.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을 동경한다는 그녀.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는 문장과 닮아있는 작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에필로그에서도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고, 삶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안갯속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글을 썼다. 그래서 '어떤' 책이 되긴 되었다'는 솔직한 문장 앞에서 별빛 같은 마음이 묻어 나온다. 모든 별이 그렇듯 뜨거운 열정을 품은 마음이다.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진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일정을 만나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하던 나는 100%에 근접하는 J.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그날의 스케줄을 대략 머릿속으로 짜 놓는다. 계획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할 일을 정해 놓은 시각에 무슨 일이건 숨어있다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그게 은근히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한데 이 책에서 섭동에 관련된 현상을 읽으면서부터 요즘은 되레 그 갑툭튀를 기다리게 된다. '섭동'이란 천체의 궤도에 교란을 주는 자잘한 인력들을 말한다. 행성들의 궤도는 섭동으로 인해 매끄러워지지는 않지만 커다란 주 궤도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고유한 결이 유지되는 것처럼. 나 역시 우주 안에 있는 우주의 일부라 그런 걸까.

그게 신기하면서도 경이롭다. 삶의 섭동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똑같은 순간을 맞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오늘은 어떤 변수로 내 삶의 궤도가 변할까. 종이에 박제되어 있던 성도가 머리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이 심장 위로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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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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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쓸 때마다 집 짓는 상상을 한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과 파편적 생각을 건축 자재인 양 '빈 문서 1'의 집터에 가져다 놓는다. 유리창, 나무판, 벽돌, 철근을 닮은 글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어울리는 자리를 찾는다. 기둥을 세우고 벽을 연결하고 문장의 방을 만든다. 출입문과 창문도 끼워 넣는다. 작가가 제공한 건축 재료에 내가 가진 것을 더한다. 글로 만드는 집이다. 몇 번이고 서성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허문다.

완성된 집을 보듯 한 권의 책을 본다. 수많은 집을 구경하다 꿈을 꾸게 만드는 집도 만난다. 평면에 박제된 감성을 공간으로 생생하게 펼쳐주는 집이다. 펼치면 크리스마스트리나 산타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서는 3차원 입체 카드를 건네받는 느낌이다. 밋밋하던 공간에 공기 이상의 의미가 다채롭게 담긴다. 공간의 개념이 확장된다. 낯선 설렘으로 두근거린다.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그 안의 사람은 많은 영향을 받는다. 유현준 작가의 글을 접하면서 공간과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건축에 대한 글로 이런 느낌을 받을 줄이야. 건축은 놀라우면서도 조심스러운 작업인 듯하다. 인간을 담는 공간을 구현하는 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건축가들은 자연과학적 기술력에 인문학적 소양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건축에 접근해야 하리라. 단순히 물질로 만든 구조물이 아니라 무형의 공간을 유형의 공간으로 변화시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접했을 때 받았던 생소한 느낌이 떠오른다. 한동안 내가 사는 도시의 거리를 지나면서 건물과 그 주변을 해석하는 작가의 문장을 얹어보았다.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는 한결 친숙해진 시선으로 건축물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20명의 건축가가 기획한 30개의 건축물을 소개하는 책이다. 몇몇 건축물은 작가의 전작에서 소개된 건축이라 익숙한 모습에 반가움이 앞선다. 그가 이 책에 수록할 건축물을 선택한 기준은 명확하다. 창의성이 담겨있는지 여부이다. 작가는 새로운 생각을 보여주는 건축물에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유현준의 관점을 따라 그와 시선을 일치시키고 소개된 건축물을 바라본다.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미술관의 작품을 관람하듯 건축물에 담긴 창작자의 향기를 보다 깊이 들이마신다.

창작물에는 의도가 담겨있기에 창작물을 통해 인간을 알 수 있다. 마야 유적을 보며 고대인들의 문화를 가늠하듯 인공물은 창작자와 그가 담고자 하는 인간을 대변한다. 건축물은 건축가의 의도를 만나 유일한 정체성을 지닌 대상으로 탄생한다. 인간을 감싸 안는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은 건축물과 공명하며 삶을 이어간다.

 

무심코 지나치던 건축물들을 떠올린다. 건축에 담긴 예술성이 이제야 조금씩 보인다. 책 안에 소개된 건축물들은 여행의 이유로 삼아도 될 만큼 흥미롭다. <인문 건축 기행>이라는 책 제목에 걸맞게 책의 구성은 여행 맞춤형이다. 건축물을 테마로 하는 여행안내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리라 여기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건축물이 세워진 장소별로 구성된 목차이다. 작가는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 등 크게 세 군데의 대륙으로 구분하여 해당 건축물을 소개한다. 둘째, 여행지를 소개하듯 대륙별 지도에 각 건축물의 위치를 표시한다. 전체적인 여행 코스를 계획하기 편하게 만들어 준다. 셋째, 각 장의 마지막 부분에 건축 연도, 건축가, 위치, 주소, 운영 시간, 휴관일 등 개관을 소개하여 세부적인 시간 계획의 수립을 돕는다. 넷째, 각 장의 도입 부분에 그려진 건축물 일러스트와 중간중간의 평면도, 단면도, 조감도 등 도면으로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 집의 평면도를 그리는 과제를 했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방학 숙제였던 '탐구 생활'이라는 책자 안에 있던 과제다. 창문, 미닫이문, 여닫이문 등 간단한 건축 기호가 나오는 내용이었다. 대문 열고 들어가면 주택 오른쪽에는 주인집이 살았다. 우리 집은 주택 왼쪽에 있는 방 하나, 그 옆에 붙은 부엌이 전부였다. 당시 나는 매우 간단하다며 웃는다. 날 일()자를 닮은 네모 하나만 그리면 되었으니까.

씻는 곳은 부엌문 옆에 있는 야외였으니 그리지 않는다. 수도꼭지 한 개는 초등학교 건축 기호에 없었다. 방에는 미닫이문과 창문 하나, 부엌에는 앞뒤로 여닫이문을 그려 넣는다. 부엌 뒷문을 열고 몇 걸음 걸어가면 화장실이 있다. 여기서 살짝 주춤한다. 주인집과 공용인데 이걸 넣어야 하나. 잠시 갈등하던 초딩. 우리도 사용하니까 퍼즐 판에서 튕겨져 나간 조각인 양 조금 떨어진 거리에 쪼끄만 네모와 여닫이문 하나를 그려 넣는다.

 

이사 다녔던 많은 집은 꽤 오랜 기간 내가 그렸던 평면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집은 그저 비바람이나 눈보라, 추위 등 자연 현상을 피하기 위해 존재하는 구조물 이상은 아니었다. 선사 시대의 움집이나 식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처럼. 생존을 위한 목적에 예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 삶 가까이에 머물던 건물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혼 이후 살던 집은 모두 아파트이고 직장 역시 학교이니 말이다. 평수가 비슷하면 우리 집이나 남의 집이나 구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교 건물도 규모만 다르지 네모네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네모난 집에서 네모난 직장으로 양방향 화살표를 따라 살아온 셈이다. 이런 이유로 유현준 작가가 소개한 건축물들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 걸까. 정형화된 모양에서 벗어난 다각형과 비정형화된 곡선의 향연은 홀로그램을 보는 듯 몽환적이었다.

 

그런 데서 삶이 가능할까. 마음 한구석 의구심을 품고 건축물을 들여다본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서 건축물의 필요성을 동시에 충족하도록 건축 자재를 변형한다는 건 얼마나 세밀한 작업일까. 더군다나 모래로 만드는 두꺼비집처럼 공간을 비워야 하는 작업이니 말이다. 손을 쑥 빼도 허물어지지 않도록 이리저리 무게 중심을 맞춘다는 건 정교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니 만만치 않은 일이리라.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를 현실 세계에 구현하는 건 어나더 레벨의 차원이다. 모형으로 시뮬레이션한다고 해도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변수는 무한에 가깝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한다는 건 얼마나 과감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가. 세상에 없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니 작가의 말처럼 건축가는 발명가가 맞다.

 

새로운 공간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세 가지 사회적 실험이 등장하는 인터넷 영상이 생각난다. '소셜 컨트롤'이라는 제목으로, 공간에 변형을 주어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일정 속도로 운전하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도로를 만들어 과속을 줄이고, 식욕을 억제하는 파란색으로 우아한 분위기의 식당을 꾸며 과식을 억제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비트박스 계단이다. 계단 양 끝에 센서를 달아 비트박스 소리가 나게 만든 결과, 계단 옆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기존의 피아노 계단은 여럿이 이용하면 음이 섞여 오히려 소음으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비트박스 계단은 여럿이 이용해도 주변 사람들까지 즐겁게 만들어 주며 자발적으로 여러 번 오르내리게 되니 건강과 즐거움을 모두 만족시키는 발상이다.

 

비슷한 맥락이리라.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건축물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눈으로 사진을 찍으며 때로는 감탄하고, 뭉클한 마음으로 새로운 시도의 결과물을 구경했다.

건축 재료의 변화로 디자인의 변화를 시도하거나 재료 자체의 성질을 이용한 건축, 중력을 이겨야 한다는 건축의 본질을 보여준 건축, 기하학을 잘 사용한 건축, 권위를 깨는 비대칭 공간으로 사람을 자연스럽게 품어주는 성당, 주변 환경과 빛을 잘 이용한 종교 건축, 화목하게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복층 세대, 정치 이념을 구조로 보여준 국회의사당, 자연과 협업하며 대화의 상대로 이용한 건축, 파격적인 상상을 현재 기술을 이용해 실현하는 방법을 개척한 건축, 고정 관념을 깬 미술관, 제약으로 발생한 문제 해결의 답을 디자인으로 바꾼 건축, 땅의 특징에 적합한 맞춤형 건축, 주변의 좋지 않은 에너지까지 전환하는 건축 등이 빛처럼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수많은 건축물을 보면서 나를 품었던 공간을 떠올린다. 몇몇 집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househome을 번갈아 가며 들락거리던 기억이 난다. househome의 차이점을 들어보았는가. 전자는 물리적인 구조물을 의미한다. 후자는 보다 더 확장된 개념으로 감정적인 요소까지 포함한다고 한다.

단칸방에 살던 시절, 여름과 겨울을 고스란히 받아냈지만 종종 떠올리면 그리움이 묻은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면 그때의 공간은 home이었다. 결혼 후, 방이 세 칸이나 되었어도 무거운 심장으로 오갔던 시간들이 머문 공간은 house였으리라.

주어진 상황에서 공간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건 버리기와 정리하기.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면서 서서히 물건을 버리기 시작했다. 정리를 시도하니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이 글을 쓰는 스터디 카페에서 집을 떠올리면 마음에 안정감이 드는 걸 보면 나는 분명 home에 거주하는 자다.

 

집을 소유한다는 건 집이 감싸고 있는 공간에 대한 사용권을 얻는 것과 다름 아니다. 어느 공간이든 마음대로 마음을 누일 수 있는 장소에 나의 시간을 누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만의 공간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예술이 깃든 건축의 관점에서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전문가로서 소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해 나가는 저자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언젠가 공간의 아름다움이 뿜어내는 빛을 눈으로 받아들이는 날이 올까. 작가 유현준의 시선에 빙의해서 건축물을 바라보다 나만의 시각으로 공간과 건축물의 조화를 해석하는 어느 일상이. 그런 날을 기록하는 나의 글은 입체 카드인 양 생생한 건축물을 닮아있을까.

 

 

p487, 주석 5: 직사각형이 고 ~이고

p488, 3째 줄: 계 단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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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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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질척 장마가 시작을 알리던 날, 빗물과 36.5도의 컬래버로 그들이 탄생한다. 나의 최애 운동화를 장악한 채 드러누워 있는 그들을 꾸깃꾸깃 신문지 몇 장으로 물리칠 수 있으리라 착각한 순간도 있다. 호시탐탐 상시 대기 중이던 생명체의 위력을 얕잡아 본 잘못이 크다. 신문지를 시작으로 균류와의 사투가 시작된다.

1단계 신문지 공격이 실패하자 2단계 손빨래를 시도한다. 뽀득뽀득 쓱싹쓱싹, 세탁기 탈수, 바지걸이에 한 짝씩 매달아 거실에서 우아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는 빨래 건조대에 건다. 선풍기 모가지를 상모처럼 돌린다. 완벽한 세팅이었다. 주룩주룩 비요일을 지나면서도 얼추 건조되었으니. 노동의 보람을 느끼며 잠시 뿌듯해 하였으나... 이런 된장같은 경우를 보았나! 말끔한 비주얼에 꼬리꼬리한 스멜은 반칙이지. 백기를 든 나는 자본에 굴복한다.

3단계 남편의 단골 세탁소에 맡긴다. 나흘 후 복귀했지만... 끈질긴 꼬리꼬리가 꼬리처럼 들러붙어 있다. 5천원이 무색하게도 굳건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터덜터덜 패잔병이 된 나. 괜스레 뾰족해진 화살이 운동화 딜리버리를 향한다. 꼬리꼬리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맡겼다는 말에 "맡기면서 냄새가 난다고 얘기 좀 하지." 푸념한다.

그날 밤, 아침저녁으로 남편 등에 발라주던 연고를 슬그머니 모른 척하는 소심한 복수를 한다. 거울 앞에 앉아 지난 며칠간을 냉철해진 이성으로 돌아보는 지금, 과녁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한다. 나 대신 운동화를 맡겨준 당신에게 고마워하며 여전히 운동화를 점령하고 있는 균류를 향했어야 함을. 내 운동화가 그렇게 좋은 거니.

 

<파견자들>은 균류와 비슷한 속성을 지닌 외계 생명체와 인간과의 소통을 다룬 SF 소설이다. 미래의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그들은 범람체로 불리며 놀라운 속도로 지상을 점령한다. 그들은 부분이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신경망으로 존재한다. 대가리도 없고 팔다리도 없고 곰팡이의 균사처럼 복잡한 연결망을 이룬 채 접촉하는 생명체를 흡수하면서 뻗어나간다. 결국 인간들은 지하로 내몰린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겉표지의 강렬한 색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노랑, 빨강, 초록빛이 어우러진 꽃을 닮은 식물들. 빛깔은 화사한데 분위기는 기괴하다. 어쩐지 느낌이 쎄하다. 살랑살랑 꽃향기가 퍼지는 게 아니라 짙고 습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듯 음산하다. 음지 식물이 양지로 나오면 이런 분위기가 날까. 아니, 아니, 음지 식물이라 일컫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다. 그렇다고 양지 식물이라 여기기에는 극히 축축하다. 음지와 양지 모두를 차지한 채 사방으로 뻗은 몸을 척 걸쳐 놓은 무법자를 떠올린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가운데 그려진 꽃이 낯설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꽃으로 알려진 '타이탄 아룸'이다. 3m 정도, 무게 100kg가량, 꽃이 필 때 36도의 열을 발산하며 1km까지 악취를 퍼뜨린다는 거대한 꽃 말이다. 무슨 내용의 이야기일까. 껍질만으로 알맹이를 상상해본다. 내용과 연관된 그림일 텐데. , 제목 <파견자들>과 그림의 연결 고리는 뭘까.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당혹한 설렘을 안고 김초엽이 만든 세상의 문을 연다.

 

소용없으리라 짐작이 가면서도 세탁소에 전화를 시도한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돌아온 답변은 허탈하다. "요즘 장마철이라 그런가 보네." "그러게요. (그래서 전문점에 의뢰한 거 아닙니까.)" "햇빛에 한 번 널어보세요." "...(그럴 거면 왜 맡겼을까요.)" "다음에는 좀 더 신경 써서 해드릴게요."".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혹시나 싶어 전문가가 흘린 멘트에 기대어 햇빛에 다시 널어본다. 하아. 내가 왜 그랬지. 비리비리한 장마철 햇빛에 근육질 파워를 기대한 내 잘못이 크다. 꾸리꾸리로 창대해지려는 꼬리꼬리, 너를 어쩌냐. 균류에게 화를 낼 수 없는 헛헛한 마음을 안고 재야에 떠도는 민간요법을 미친 듯이 줍줍한다. '운동화 냄새, 장마철 운동화, 운동화 세탁, 운동화 냄새 제거...' 운동화를 주인공으로 '냄새''세탁' 검색어의 미세한 변주가 시작된다. 햇빛, 삶기, 락스, 과탄산소다, 베이킹소다, 식초 등 살상 무기로 알려진 비방이란 비방은 죄다 끌어모은다.

삶았다가는 세균을 보내고 너덜너덜을 얻는다는 경험담이 눈에 띈다. 운동화 접착제가 열기에 녹는다나. 과탄산소다를 사용한 운동화 사진엔 노리끼리한 얼룩이 보인다. 꼬리꼬리를 보내고 그 자리에 냄새로 들어앉는다는 락스, 이미 실패한 햇빛 등은 탈락. 베이킹소다-식초의 정예 부대만 엄선한다. 적절한 분량 따위는 없다. 성에 찰 때까지 콸콸챱챱 물에 부은 다음, 하룻저녁을 잠재운다.

 

'파견자들'은 지상을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정예 부대다. 인간이 정착할 지상의 장소를 탐색하거나 범람체를 물리칠 방법을 연구한다. 감염되어 광증을 일으키거나 그들에게 흡수되지 않기 위해서는 저항성이 강해야 한다. 체력적으로도 막강한 지구력이 필요한 직업이라 몇 단계 시험을 통과해야 입문할 수 있다. 이미 파견자의 교관인 이제프 파로딘과 파견자를 꿈꾸는 정태린이 주인공의 양대 산맥이다. 여기에 범람체 덩어리인 ''이 가세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호기심을 자극하여 매 장면, 전개 방향에 궁금증을 얹는다. 읽다 멈추어도 다시 재생을 시작할 때 이전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서사가 펼쳐지는 속도는 빠르지 않건만 몰입감 있게 진행되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균류가 퍼지듯 소설 내용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갈증이 일어 물을 찾는 인간처럼 틈만 나면 책을 찾았다.

한 번 꽂히면 나의 머릿속은 온통 그것으로 가득 찬다. <파견자들>을 읽는 동안, 균류를 연상케 하는 범람체와 균류에게 공격당한 운동화 생각이 연결되어 나의 뇌를 점령한다. 더군다나 운동화는 논픽션 당면 과제이므로 운동화의, 운동화에 의한, 운동화를 위한 시스템 모드로 생각이 변환된다. 모든 감각 정보가 운동화를 해결하기 위한 연결망으로 흘러 들어간다. 리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승전 운동화다. 당신은 지금 뇌 안에 운동화 뭉치가 굴러다니는 인간이 쓴 '운동화--운동화--운동화' 형식의 리뷰를 읽는 중이다.

 

주인공 '태린'의 뇌 안에는 범람체인 ''이 굴러다닌다. 이제프를 포함한 어른들은 연구소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비윤리적 연구를 시도한다. 범람체를 아이들에게 주입한다. 성장하는 인간의 뇌 안에서 범람체와 인간의 신경 세포가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분석하는 실험이다. 더불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광증에 대한 저항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본다. 태린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이제프를 동경하며 파견자가 되어 그녀와 함께 활동할 미래를 꿈꾼다.

범람체는 표면 진동과 분자의 확산으로 세상을 감지하고 소통하는 존재다. 말소리를 내지 않아도 된다. 인간과는 다른 감각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셈이다. 인간은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며 많은 정보를 시각으로 받아들인다. 눈만 뜨고 있으면 세상은 존재 자체로 시각의 대상이다. 반면 눈을 감으면 순간적으로는 세상의 스위치가 꺼진다. 점자 알아보기 활동을 한 기억이 난다. 시각을 감각 하지 못하면 청각이나 피부 감각 등 다른 감각이 민감해진다던가. 미각, 후각 등을 더해 다섯 가지 감각을 떠올리며 소설에 등장하는 생소한 감각을 바라본다.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다른 방식의 감각이 가능하리라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신경 세포의 기본 단위인 뉴런이 감각된다니! 작가가 창조한 새로운 관점에 평범한 정의들이 허물어진다. 상상의 범위가 대기권을 넘어 우주 방향으로 보다 확장된 듯한 기분이다. '너는 나를 기억하는 대신 감각할 거야.'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문장을 향한 물음표가 서서히 느낌표로 변한다.

 

한 몸을 공유하는 두 개체. ''인 인간 태린의 뇌 안에는 ''인 범람체 솔이 자리한다. 저자 김초엽은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독자에게 건넨다. 두 개의 자아가 공존하는 게 가능할까. 이제프를 비롯한 어른들의 답은 명확하게 '아니오'. 그들은 또 다른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기획한다.

범람체들은 접근하는 대상들을 흡수하며 균류의 모양새로 빠르게 영역을 확장한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지상의 풍경과 쓰레기 매립 장소가 겹쳐진다. 몇백 년 지나야 겨우 분해가 된다는 고분자 화합물 덩어리가 점점 쌓여가는 지역 말이다. 수잔 시마드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에 나오는 균근 연결망과 영화 <아바타>를 둘러싼 몽환적인 분위기가 담긴 필터를 끼운 듯 비슷한 느낌이 점점 진하게 뿜어져 나온다.

인간이 떠난 지표면에서 인간이 없던 원시 지구 초기의 모습을 상상한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각종 환경 데이터가 막연함을 선명함으로 바꿔 놓는다. 인간이 지상에서 살 수 없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급해진다.

인터넷 뉴스로 NASA의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보면서 상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화성을 넘어 우주 공간으로 자유롭게 영역을 넓혀나가는 미래가 올까. 머리 위 방향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인류만 상상하다 지상으로부터 추방되어 땅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접하니 두려움이 살짝 엄습한다. 소설로 박제된 풍경이 미래의 어느 날, 소설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땅속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파견자들은 범람체에 대한 파괴자가 되고자 한다. 일부 감염이 된 인간들을 이용하여 거대한 연결망으로 존재하는 범람체를 전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두 개체의 특성을 모두 지닌 태린은 파견자가 아닌 전달자로 활동한다. 그녀는 솔과의 소통을 통해 범람체와 공존하는 삶을 모색한다.

, , 나의 운동화는 그런 삶을 모색하지 않을 테다. 균류에 의해 운동화에서 쫓겨나 샌달을 전전하고 있는 나의 발바닥에게 옛 터전을 찾아주고 싶단 말이다. 마른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기상 정보를 입수한 나는 출근 준비 전에 꼬리꼬리를 소환한다. 두 번의 세탁 코스를 마친 나의 아가는 비주얼만은 이미 백발 오브 백발이다.

이번에는 헹구기만 시도한다. MSG로 퍼퓸샴푸퓨어브리즈를 짜 넣은 다음 휘휘 헹궈준다. 탈수하고 다시 바지걸이에 걸어 앞 베란다의 빨래 건조대에 넌다. 햇빛이 이노무 잔당들을 싹 쓸어가길, 바람이 새로운 공격자를 후 날려버리길 바란다.

퇴근 후,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베란다로 돌진한다. 흐읍~! 스멜이? ?? 살짝 아리까리하다. 다시, 흐읍! ............ 균류의 끈질긴 생명력을 뤼스펙하는 경험치만 추가한다. 하아. 도대체 왜! 신문지-손빨래(feat. 빨래 비누)-세탁소-햇빛-담갔다 헹구기(feat. 베이킹소다+식초+샴푸). 그동안의 개고생 코스가 다시보기로 주루룩 풀린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BGM으로 깔린다.

 

이쯤 되면 한 번 해보겠다는 거다. 나는 균류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다시 검색 모드를 가동한다. 베이킹소다를 훌훌 뿌려서 나의 아가를 경극 배우로 만들어서 햇빛에 넌다. 해바라기 딜리버리가 되어 오전에는 뒷베란다에 놓았다가 오후가 되자 앞베란다로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엔? ............ 나노 단위 운동화 입자에까지 침투한 듯 깊은 맛이 우러나는 곰국인 양 후각을 자극하는 존재감이란!

, , 빡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원인을 분석해 보자. 온갖 명약을 쳐발쳐발콸콸 들이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패배했을까. 잠시 과학자 모드를 가동시킨다. ? 틈새시장의 틈을 발견한다. 명약의 효험을 맹신한 나머지 화학 공격만을 시전했던 거다. 빡빡쓱쓱 물리 공격으로 협공을 시도하기로 한다.

베이킹소다, 식초, 세제에다 은둔 생활을 하던 2016년산 운동화 크리너까지 발굴한다. '2016'에서 살짝 멈칫했지만 광표백에 소취 작용이라는 문구를 보고 없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동원한다. 성화 봉송 주자로 빙의하여 결연한 표정으로 운동화 솔을 치켜들고 전장으로 향한다. 동그란 목욕 의자에 앉아 초심으로 돌아가서 내 옷보다 더 구석구석 손빨래를 한다. 마지막 헹굼물에 식초를 풀어 혹시나 남아있을 세제 찌꺼기 잔당을 몰살시킨다. 헌 수건으로 정성껏 감싸서 세탁망에 넣은 다음 세탁기로 탈수한다. 이번 건조의 포인트는 속도전이다. 헤어드라이어로 살짝 말리고 신문지를 구겨 넣어 물기를 더 흡수시킨 다음, 바지걸이에 걸어 선풍기 상모를 돌린다.

 

지상에서 늪처럼 퍼져있는 범람체로 흡수된 인간의 몸은 분자 단위로 분해된다. 얼핏 인간이 잡아먹히는 듯 보이지만 외계 생명체가 보는 관점은 다르다. 다만 다른 형태로의 변이가 일어나 다른 형태의 삶으로 진입하는 거라고. 소설은 범람체가 흡수한 인간들의 자아가 여전히 그 집단 안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런 식으로 범람체는 파이를 키우면서 영역을 넓혀간다. 그들은 개별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지닌다. 가상의 존재이지만 어찌 보면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특성이다. 인간 역시 개별적이면서도 인드라망처럼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니까 말이다.

주인공 태린과 범람체 솔의 공존 상황이 아주 뜬금없는 설정은 아니다. 우리의 몸 안에도 수많은 균류가 존재하고 있을 테니. 다만 균류에게도 자아가 존재한다는 창의적인 발상이 이처럼 매력적인 이야기로 탄생한다. 또한 내가 이 작품에서 높이 평가하는 점은 존재 차원에서 관점의 전환을 시도했다는 거다. 인간 안에 균류가 포함된 현재 상황을 뒤집어 지상을 점령한 균류 안에 인간이 흡수되는 상황을 설정했으며 공간적 배경 역시 지상과 지하를 뒤집어 인간을 지하에 배치한 점이다.

바라보는 세상이 보다 넓어진 느낌이다. 더욱 섬세하게 쪼개져서 감각을 자극하는 세상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선풍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보송보송한 운동화를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얼핏 향긋한 냄새가 희미하게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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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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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와 등장인물, 심지어 주제까지 너무나 잘 알지만 막상 읽어본 적은 별로 없는 문학 작품. 나에게 '고전'은 이런 의미였다. '읽고 싶다'가 아니라' 읽어야 하는데'에 가까웠던 책. 당위성은 절실하나 자발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니 고전을 읽어내느라 고전한다. 학창 시절의 심장에는 감동의 물결이 출렁일 틈이 없었다. 광활한 삶의 의미를 담기에 나의 그릇은 좁은 데다 경직되어 있었다.  

한데 시험으로부터 탈출하니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를 영접한 기분이다. 우주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다 별을 마주치면 이런 느낌일까. <데미안>,<오만과 편견>,<노인과 바다>,<프랑켄슈타인> 등 고전 소설을 뒤늦게 읽으며 생경한 느낌을 안는다. 스스로의 동기로 별의 중력에 끌리니 설렘이 깃든다.

인스턴트 식품인 양 시험 공부용 요약본만 휘리릭 맛보던 순간을 벗어나니 비로소 작품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이 느껴진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온 삶의 경험치가 마음을 보다 유연하게 확장시킨 걸까. 몇몇 고전 소설을 읽으며 슈퍼마켓 매대 위에 누워있는 식자재 대신 생명력을 뿜어내는 실체를 마주하는 듯한 경이를 품는다.


이 책은 고전 소설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실제로 읽어본 사람보다 풍문으로 명성을 들은 이가 많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전. 나 역시 <돈키호테>를 읽어본 적은 없다. AI, ChatGPT가 일상으로 빠르게 침투하는 시대에 17세기 복고풍의 제목 앞에서 주춤한다. 첨단 미래가 휘몰아치는 마당에 과거를 답습하는 게 의미가 있나.

책 표지에 보이는 비디오 가게 간판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니 얼핏 <응답하라 시리즈>와 겹친다. 추억을 말하는 내용인가. 성급한 가설을 앞세우니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살짝 식상하다. 이거 다 아는 맛 아냐. 워~ 워, 어설픈 편견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세상은 넓고 같은 소재로 펼칠 수 있는 이야기는 무한대로 발산하거늘.

작가는 <돈키호테>의 자유, 모험, 정의(正義), 꿈 같은 요소를 이 작품에 접목한다. 등장인물 역시 돈키호테, 산초, 둘시네아, 로시난테 등에 대응하는 인물들을 설정한다. 30세에 방송국 PD를 그만두고 엄마가 사는 대전으로 온 주인공 솔이 유튜브 채널 '돈키호테 비디오'를 개설하여 15세 때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추억을 만들어주던 돈 아저씨를 찾는 과정이 흡인력 있게 그려진다. <돈키호테>의 21세기판 리메이크 버전이랄까.


뒷부분의 '감사의 글'을 먼저 읽는다. "계속 쓰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어찌나 든든한지. 2013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적어도 격년에 한 번, 2019년 이후에는 매년 책을 출간한 저자의 약력을 책날개에서 본다. 꾸준함이 주는 신뢰와 함께 뭉클함이 번져온다.

그의 소설 <파우스터>를 읽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불편한 편의점>시리즈에서는 톡톡 튀는 재치에 반했다면 <파우스터>는 어나더 레벨 상상력으로 감탄을 안겨준 작품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도 읽어본 적이 없다. 주입식 교육 현장에서 살아온 덕분에 주제부터 등장인물, 줄거리까지 착실히 꿰고 있을 뿐이다.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했다는 말에 원작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파우스터>의 매력에 폭 빠져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번 추천을 했다. 실감나게 상황을 묘사하며 서사를 이끌어가는 글의 힘에 반했다. 머지않아 꼭 일어날 미래인 것만 같았다. 2D로만 접하던 장면을 3D 입체 영상으로 감상한 듯 생생했다. <나의 돈키호테>에서도 작가의 필력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김호연의 작품은 매번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든다. 드라마나 영화인 듯 장면과 장면 사이의 쉼표가 명확하며 읽다 보면 영상으로 동시에 재생이 되는 듯하다. 이야기의 흡인력이 상당해서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초반에는 영화 '시네마 천국'이 떠오른다. 비디오 가게, 석유 난로, 예전 영화 등 소설에 등장하는 풍경들에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삶의 흔적들이 펼쳐진다. 익숙한 대전의 동네명이 추억을 끌어온다. 예전에 가졌던 것과 놓친 것을 생각한다. 그 옛날 아픔을 꺼내 보이던 친구를 떠올린다. 보이는 것보다 사물이 가까이 있다는 볼록 거울이라도 마주친 듯 훅 다가오던 느낌이 소환된다. 친정 엄마의 반찬을 맛보는 순간처럼 몇십 년을 거스르는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소설 '어린 왕자'도 떠오른다. 여러 행성을 거치며 왕, 가로등 소등인, 학자 등을 만나는 것처럼 학원장, 학원강사, 출판계 및 영화계 종사자, PD 등의 삶을 돌아가면서 서술한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업계의 모순, 자본주의와 결합한 인간의 본성을 날카로운 풍자와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돈키호테에서 산초로, 다시 세르반테스로. 돈 아저씨는 결국 돈키호테를 창작한 작가인 세르반테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산초에서 돈키호테로. 솔이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 책은 두 주인공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 역시 글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고 있으리라. 그처럼 몰입감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이가 고전 소설을 모티브로 한 소설을 시리즈로 창작한다면, 고전에 대한 관심이 덩달아 높아지지 않을까. 리메이크 곡으로 원곡이 재조명되는 것처럼 말이다. 원작은 자체로도 이미 훌륭하여 몇 세기 동안 읽히는 것이지만, 두 작품을 비교하는 건 또 다른 재미로 신선할 듯하다. 윈윈 리메이크랄까. 나의 리뷰 역시 당신을 이 책으로 끌어당기는 윈윈 리메이크가 되기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계속 생각 중이다. 지인들이 퇴직 후 글을 쓰면 되겠다, 책은 안 내냐며 가볍게 말하면 비슷한 무게로 웃어 넘긴다. 사실 책을 내는 데 회의적이다. 현실적으로 독서 인구가 많지 않을 뿐더러 보험 상품을 팔 듯 지인에게 강매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퇴직 후 인생 2막이 열리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이어갈까.


이야기에는 몰입감과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 약간의 미스터리와 상큼한 디저트처럼 뿌려지는 반전까지. 에필로그를 읽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는다. 주어인 '나'의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와 본문 내내 '나'였던 솔이 대신 돈 아저씨가 등장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나의 돈키호테'는 서로 다른 인물을 지칭하게 된다.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설정이라 판단한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이 책에 등장하는 멋진 문장들 중에서 내 마음의 원픽은 '인간은 서로에게 매개체' 라는 문장이다. 돈키호테 비디오도, 솔이도, 돈 아저씨도, 다른 인물들도 서로 얽히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소설 밖에서도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이 소설이 매개체가 되어 나에게 손을 내민다.

마침표가 되기보다 쉼표가 되겠다는 솔이처럼 삶은 문장 부호의 나열인 듯하다. 나는 지금 어떤 문장 부호를 통과하고 있을까. 누군가에게 '나의 돈키호테'라 불릴 순간을 위하여 지금은 내 삶의 모험을 시작할 순간인가. 돈키호테를 열정으로 바꾸어 발음해본다. 나의 열정, 내 삶의 열정... 어쩐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들썩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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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2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김혜남 지음 / 메이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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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반사에 가깝다. 책을 읽을 때마다 리뷰를 작성하는 건. 나에게 읽기와 쓰기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세트로 작용한다.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왜 꼭 리뷰를 쓰는가. 마음의 물속을 들여다본다. 일렁임이 고요해지니 깊숙이 숨겨진 의도가 수면으로 떠오른다.

나의 행위를 이끌어온 이유를 이제 알겠다. 나를 알고 싶었구나.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치여 브라운 운동을 하는 꽃가루처럼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다니고 싶지 않았구나. 원하는 방향을 향해 나의 자유 의지로 삶을 확장하고 싶은 바람이 컸음을 깨닫는다.

그럴싸한 포장지를 벗기면 나의 리뷰는 철저히 나의 심장을 향한다. 많은 사람을 위한다든지 사회에 뭔 이바지를 하고 싶다는 거창한 사명 의식 같은 건 없다. 연고를 바르듯 붕대를 감듯 살아오면서 받아온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자가 치유하는 개인적인 과정일 뿐이다, 실은.

책이 의도하는 방향과 다른 엉뚱한 목적지에서 마침표를 찍곤 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뷰는 나를 위한 재구성이므로. 이 책이 그런 책이었나요? 그런 책이었을리가요. 철저히 제 위주로 뽑아낸 악마의 편집인 거죠. 작가에게서 오징어를 받은 셀프 닥터 쉐프는 당당하게 건더기를 제거하고 오징어 향 첨가 요리를 만들어버린다.


악마의 편집을 위해서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A4 용지 절반 크기의 이면지와 펜을 준비한다. 책을 읽다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을 만나면 종이에 옮겨 적는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의견도 같이 메모한다. 완독을 하면 나의 원픽으로만 이루어진 메모 문장들을 정독한다.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요리한다. 결국 쭝얼거리고 싶은 생각을 글로 적는 셈이다. 종종 만들어지는 에세이스러운 리뷰에서 작가의 문장은 단지 거들 뿐이다.

예외인 책들도 있다. 작가와 나의 목적지가 같을 때이다. 이 책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 딱 나네!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은 당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이라니! 부제에도 마음이 동한다. 정신분석 전문의가 분야 관련 내용을 적은 책이니 문체만 요상하지 않으면 실망스럽지는 않으리라. 메모 분량이 늘어 12포인트 크기의 글자로 12장을 채웠을 때 예감한다. 악마의 편집이 그다지 필요 없으리라는 것을.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은 삶에서 본질적인 고민을 안게 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행동 지침이 기록된 책이다. 저자 김혜남은 각각의 상담 사례를 예로 들어가며 이정표를 제시한다. 30여 년 동안 사람들을 치료한 경험과 스스로의 삶을 통해 깨달은 사실을 서술한다. 사례 별로 등장하는 아무개 씨의 삶과 나와의 교집합을 발견한다. 심리 상담을 받는 내담자가 된 듯 저자의 말을 경청한다.


<스페셜 에디션을 펴내며>와 <Prologue,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면>에 저자가 하는 말의 핵심이 있다.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매달리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 지금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 세상과 사람들을 온몸으로 부딪혀 보라는 것,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는 당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단단한 인생을 만들어줄 거라는 것이다.

저자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쓸데없이 많은 정보를 모으는 데 힘 빼지 말고 가장 중요한 기준을 네 가지 정도로 줄일 것, '저걸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부터 버리고 선택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애쓸 것, 최악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답이 보인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니 뭐라도 시작해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고의 대표적인 패턴에도 공감한다. 첫 번째, 나는 실패자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흑백 논리이다. 두 번째, 좋은 결과는 우연이고 나쁜 결과는 내 탓이라 생각하며 의미를 확대 혹은 축소하는 경우이다. 세 번째,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사고의 오류에 근거하여 부정적인 자기상을 만드는 경우이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실수를 했을 때 그에게 해 줄 말을 당신 자신에게 해 주라는 말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나는 걱정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앞의 문장이 과거형이라는 점이다. 소심이 디폴트라 온전한 대범을 장착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지금은 걱정이 많이 줄었다. 걱정 해소와 관련된 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문장이 눈에 띈다. 걱정의 40%는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 30%는 이미 일어난 일, 22%는 사소한 일,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4%만이 우리가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저자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팁을 소개한다. 첫째, 통제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부터 구분하는 것이다. 둘째, 불안은 결코 나를 해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셋째,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하라는 것이다. 명확하고 확고한 선택으로 결정을 내리는 순간, 걱정의 50%가 사라지고 결정을 실천에 옮길 때 40%가 사라진다는 내용에 후련함을 느낀다.

선택에 대한 멋진 문장도 만난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의 선택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이 한 말이라고 한다. 음미할수록 멋지다. 두려우면서도 적극적인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잘못을 하거나 사건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에 대한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 섬세한 차이가 삶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만들어내리라. 


날카로운 화살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문장에서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현자스러운 이가 타인이 하는 말을 화살로 비유하며 이런 말을 한다. 말의 화살은 당신의 근처에 떨어지지만 직접 당신의 심장을 뚫지는 못한다고. 굳이 화살을 주워서 심장에 꽂는 사람은 그 말을 곱씹으며 속상해 하는 당신 자신이라고. 화살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지만 그 내용을 되새기며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한 시간들이 있다.

모든 감정은 옳다는 문장을 보며 나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감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는 말, 일에 대한 비판을 당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을 천천히 보듬는다. 감정 표현법에도 귀를 기울인다. 나는 ~ 라고 느낀다고 말할 것, 격한 상태에서는 공명 현상을 일으키므로 가급적 표현을 삼가할 것, 감정에 충실하되 감정을 너무 믿지 말 것을.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문장에 담긴 냉철함을 본다. 화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 6가지를 메모한다. 먼저 숫자부터 셀 것,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것, 화를 낸 이유는 사실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 화났을 때는 어떤 결심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 화내는 것을 내일로 미루어 보라는 것, 인생에서 사람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저자의 문장을 지나며 그와의 관계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는다. 가까워지는 것이 거절당하는 것보다 더 두려울 수 있다는 것, 가깝다는 이유로 나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 것, 친밀해지고 싶다면 상처 입을 각오부터 할 것,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순간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경청'이란 상대방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 들어 있는 마음을 이해하는 작업이라는 말에 코끝이 시큰하다. 방금 그가 건넨 말 너머에 있는 마음을 본다. 당신, 이걸 알아주기 바라는 구나. 말의 껍질을 벗기고 한 뼘 더 들어가니 마주 선 이의 마음이 보인다.

숨을 고를 시간을 만들 것,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에 비판하지 말 것,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감춰진 감정을 헤아려 볼 것, 보디 랭귀지에 더 주목할 것,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만 질문할 것,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는 양해를 구할 것, 듣는 것을 즐길 것, 결정적인 순간에만 말할 것을 타인을 대하는 8계명으로 여기고 마음에 새긴다.

화목한 가정은 싸움이 없는 집이 아니라 싸워도 금방 화해하고 풀 수 있는 집이라는 말, 슬픔을 나누는 방법은 그저 곁에 같이 있어주면서 손을 꼭 잡아 주거나 가만히 안아 주거나 등을 토닥여 주면서 같이 슬퍼해 주면 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바꿀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삶, 잠시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냥 나만 챙기는 삶,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저자가 그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불완전했던 과거를 소환한다. 이상적인 풍경이 다가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버티고 또 버텼던 순간들이 스친다. '결코 완벽한 때는 오지 않는 법입니다.' 저자의 문장 앞에서 멈칫한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바라는 삶을 유예하며 나를 질질 끌고 왔던 건 짐을 내려놓을 용기가 부족했던 까닭임을.

과정으로서의 삶은 완벽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때까지, 그때까지만을 바라지만 '그때'는 오지 않는다. 그때를 좇는 내가 늘 그때보다 뒤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생각하라는 저자의 권유는 이런 이유로 가장 현명한 처방이다. 42세에 파킨슨 병 진단을 받고 그로부터 22년을 걸어온 저자가 삶을 대하는 적극적인 태도에 깨닫는 바가 크다.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따른다는 말, 우리 모두는 자연 치유력을 갖고 있다는 말에서 힘을 얻는다. 마음이 서서히 정리된다. 정리의 본질은 나를 기준으로 중요도를 판단하여 물건들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감정이든 관계든 재배치를 해본다. 영화 <곡성>에 나온다는 대사처럼, "뭣이 중헌디?" 스스로 질문한다. 예전보다 기준이 명확해지니 답을 내리는 마음이 후련하다.


말을 하는 것과 듣는 게 별개일 때가 많다. 타인을 향하는 말은 수학에서의 여집합과 같다. 내 입에서 나오면서도 나를 제외한 마음을 향한다. 한쪽 방향 화살표처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음원과 마주 서야 한다. 고요한 장소에서 타인의 말을 듣는 좋은 방법은 책을 마주하는 거다. 낯선 문장을 거울인 듯 마주 보는 순간, 글은 타인의 말이 되어 나의 마음으로 흘러든다.

작가의 말을 따라간다. 그녀의 목소리를 모르니 마음속으로 천천히 읽는다. 낯선 저자의 문장이 담담하게 심장을 울린다. 글로 말하는 친구를 눈앞에 데려온 듯한 기분이다. 영혼의 속도에 맞춰 문장과 함께 시간을 걸어간다. 막연하던 생각이 실체로 구현된 문장들을 본다. 방금 요리한 반숙 계란을 톡 터뜨리는 순간처럼 따뜻한 노른자가 느리게 흘러나온다.

가랑비처럼 젖어드는 글자에 기대어 며칠을 보낸다. 수많은 글자들이 모닥불을 피우는 나뭇가지라도 되는 양 마음에 서서히 온기를 전한다. 그동안 나, 많이 지쳐있었구나. 온종일 정신없이 일하다 침대에 눕는 순간 그제야 피곤했음을 깨닫는 사람처럼 뒤늦게 마음을 살핀다. 눅눅한 습기가 배어드는 줄도 모르고 안개 자욱한 길을 걸어왔을까. 점점 보송보송해지는 느낌이 뭉클하면서도 그저 좋다.


p17, 2째 줄:   : → : : (콜론 하나 빠짐)

p224, 4째 줄: 아니 하는 만 못한 → 아니 하느니만 못한

p240, 밑에서 3째 줄: 밀려vv설 → 밀려v설(띄어쓰기)


* 개인적인 아쉬움

p12~14, 프롤로그의 파킨슨병 관련 문장과

p14, 30대 관련 문장이

각각 p80~82, p289~290의 본문 내용과 중복된다.

저자의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프롤로그가 조금 짧았아도 괜찮지 않았을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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