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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문학계의 아이돌 급 스팸 왕자님을 영접할 시간이 왔다! 읽기도 전에 내용이 드라마 속 장면처럼 그려지지만 결코 읽어보지는 못한 작품이다. 드루 와, 드루 와~ 나는 만반의 준비가 되었었단 말이다.
거대한 쓰나미급 감동을 받을 준비를 마쳤던 나는 일주일 후, 마지막 껍데기를 덮으며 거대하게 휑한 갯벌을 바라본다. 진공의 본문을 지나 책 두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해설의 망망대해를 건너 18쪽에 달하는 작가 연보를 기어 나온다. 결국 갯벌이 품고 있을 수많은 생명체를 발견하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대부분의 리뷰를 작성할 때면 나는 주된 느낌을 중심으로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어간다. 그다지 감동받지 못한 책의 리뷰를 쓸 때, 나의 뇌는 분석 모드를 가동한다. 이 책은 후자이다. 다각도로 석고상을 관찰하듯 작품을 돌아본다. 이런 이유로 일관된 글의 줄기는 없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세상은 넓고 별의별 인간은 드넓게 포진해있으니.
굳이 원서를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지만 생각을 고이 접는다. 원어민 선생님 앞에서는 매번 과묵한 인간의 탈을 쓰게 되는 나는 원문을 읽어도 당연히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 왕의 비리를 알게 된 덴마크 왕자 햄릿의 복수를 그린 5막의 희곡이다. 복수가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희극이나 본인을 포함한 8명이 몽땅 죽으니 결론적으로 비극이다. 양날의 검으로 상대를 찌른 상황이다.
처음으로 줄거리를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더라. 워낙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무덤덤한 건 감정이 무뎌진 탓일까. 어쨌든 내용으로 인한 감동은 일지 않았다.
선왕인 형을 죽인 현왕의 비리를 폭로하는 수단으로 연극을 택하는 장면을 보니 영화 <왕의 남자>가 떠오른다. 그 영화에서도 풍자 수단으로 마당극을 이용한다. 연산군과 장녹수를, 탐관오리의 비리를, 연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에 가담한 선왕의 여자들이 차례로 대상이 된다. 심리치료에서도 역할극을 활용하니 동양이나 서양이나 간접적인 상황 재현은 오랜 역사를 지닌 듯하다.
연극 공연 시 현왕의 반응 여부로 선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악한다는 설정에는 인간의 양심이 살아있다는 전제가 있다. 만일 현왕이 소시오패스였다면 어땠을까. 본인이 감행한 살인이 연극으로 재현되어도 아무 동요 없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셰익스피어는 인간 존재의 근본을 그리 포악하다 보지 않았던 거다.
연극 대본이니 대략적인 줄거리를 파악하기는 쉽다. 다만 희곡의 특성상 전후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으니 디지털적인 대사를 연결하여 꿰는 건 독자의 몫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그가 하는 말과 행동, 다른 이의 평가를 종합하여 짐작해야 한다. 오필리어의 아버지의 대사처럼 간접적인 것들을 통해 직접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것(2막 1장)이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판단이 모호한 건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햄릿은 말한다. 원래 좋고 그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우리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2막 2장)이라고.
배우 겸 작가로 활동했던 셰익스피어는 마트료시카처럼 연극 안에 연극을 삽입한다. 연기를 대사에, 대사를 연기에 맞추라거나 연극의 목표는 거울을 들이대서 자연을 비추는 것(3막 2장)이라는 문장을 통해 연기와 연극에 대한 신념을 드러낸다.
말과 관련된 대사에는 심오한 삶의 철학이 내포된다. 말이란 말하기 전까지만 자신의 것(3막 2장)이라고, 내 말은 하늘로 날아오르나 생각은 지상에 남으니 생각 없는 말이 결코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다(3막 3장)고 말한다.
등장인물의 대사 곳곳에서 삶을 통찰하는 문장이 눈에 띈다. 날카로운 통찰력이 드러난 부분 중 세 군데를 인상적으로 보았다.
첫째, 햄릿은 자신이 건네준 피리를 불지 못하는 동창생에게 말한다. 이 작은 악기 속에는 음악도 많고 훌륭한 음도 들어 있지만 자네는 그것을 소리 나게 못하고 있다(3막 2장)고. 악기는 상징적인 대상이다.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독이 되고 약이 되는 모든 요소에 적용할 수 있겠다.
둘째, 쓰지 않는 손이 감각은 더 예민한 법(5막 1장)이라는 문장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관련된 일화를 들은 기억이 있다. 작성한 원고를 한 달 정도 서랍에 넣어두고 잊어버리다 시간이 지나 다시 펼쳐보면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또렷하게 눈에 띈다는 이야기이다. 평소 접해보지 않았던 분야의 작품을 만나는 사람이 그 장르에 익숙한 이와는 다른 각도로 작품을 바라보는 경우나 여행 후 집으로 돌아오면 자신이나 일상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기분도 비슷한 맥락이리라.
셋째, 햄릿의 대사 중 죽음을 해탈한 듯 보이는 대사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무얼 두고 떠나는지 알 수 없으니 일찍 떠나는 걸 아쉬워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5막 2장)는 말이다.
교과서를 선정할 때 쓰는 방법이 있다. 출판사는 달라도 성취기준은 동일하니 같은 내용의 소단원을 동시에 펼쳐놓고 비교하는 것이다. 단원별 정체성은 존재하지만 짧은 시간에 장단점을 분석할 수 있다. 알라딘 국내 도서 검색어로 ‘햄릿’을 입력하여 첫 페이지에 나오는 4개의 출판사를 임의로 선정한다. 책 소개에도 등장하는 문장들이니 굳이 스포일러는 아닐 듯하다. 두 가지 요소를 비교하기로 한다.
첫째, 같은 문장, 다른 표현이다. 홍보 문구로 겉표지에 종종 등장하는 3막 1장의 문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과 이후의 문장에 대한 번역본을 비교해본다.
(문학동네)
살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어느 것이 더 숭고한 정신인가, / 변덕스러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허용하는 것일까, / 아니면 파도처럼 몰려오는 많은 고난에 대항하여 / 물리치는 것일까. 죽는 것은 잠자는 것, / 그뿐이다.
(민음사)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 자는 것뿐일지니,
(창비)
이대로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 어느 쪽이 더 장한가, 포학한 운명의 /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으로 받아내는 것,? / 아니면 환난의 바다에 맞서 무기 들고 / 대적해서 끝장내는 것? 죽는 것-잠드는 것, / 그뿐.
(열린책들)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 아니면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까지 대적하여 /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 죽어서 잠을 잔다. 이게 전부란 말인가? 그래 전부야.
알파벳 다음으로 기본 단어에 속하는 ‘be’가 이토록 심오할 일인가. 번역자마다 해석이 분분하니. 문외한으로서는 어떤 해석을 수용할지 몹시 난감하다. 원문은 저리도 단순하며 심지어 운율이 느껴지는 데 말이다.
삶과 죽음으로 볼 것이냐, 존재론적으로 볼 것이냐, 상황의 수용 여부로 볼 것이냐. 전후의 내용을 살펴보면 햄릿이 자살을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숙부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살인 여부를 말하는 것 같지도 않다. 있음이나 없음으로 보는 시각은 뒷문장과 괴리감이 느껴진다. 아버지유령으로부터 들은 죽음과 치정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느냐 맞서서 복수를 감행하느냐의 갈등 상황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위의 4가지 중 나의 취향에 가까운 건 ‘창비’의 번역이다. 내용상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간결한 문체가 마음에 든다. 아쉽게도 내가 읽은 번역본은 취향과 가장 거리가 있는 산문체였던 듯하다.
둘째, 분량 비교이다.
본문은 창비(202쪽) < 민음사(208쪽) < 열린책들(212쪽) < 문학동네(224쪽),
해설은 민음사(12쪽) < 열린책들(24쪽) < 창비(27쪽) < 문학동네(98쪽),
작가 연보는 민음사(6쪽 이내) < 창비(7쪽) < 열린책들(12쪽 이내) < 문학동네(18쪽) 순이다.
고전문학은 시리즈로 출간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도서 뒷부분은 출판사의 발간 도서를 소개하는 페이지로 할애되곤 한다. 이런 이유로 작가 연보의 마지막 페이지가 도서의 마지막 페이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직접 읽은 문학동네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 출판사의 작품은 추정치를 적었다.
분량이 작품의 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판본의 차이는 있겠으나 동일 작품에 대한 번역이 산문적인가, 운문적인가 정도는 유추가 가능하다. 창비는 운문적인 본문에 자세한 해설을 더한 듯 보인다. 문학동네는 단연코 산문적이다. 영어능통자라면 단어와 문장이 세세하게 곁들여진 친절한 해설이 보다 깊숙하게 흡수되었으리라. 내게는 본문보다 통과하기 어려운 허들이었지만.
작가 연보는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꾸역꾸역 읽느라 토 나올 뻔했다. 갑갑한 심정에 (1589: 헨리 6세 1부),(1600~1601: 햄릿)과 같은 형식으로 출간 연도와 작품명만을 발췌하여 짝을 지어 정리하니 어느 정도 흐름이 파악된다. 25년 간 37편의 희곡이라니! 최소 1년에 한두 작품씩 창작한 셈이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다작인가. 작가 연보를 구성할 때 작품의 출간 연도와 작가의 삶을 구분하였더라면 그나마 읽기가 수월하지 않았을까. 우리 역사와 세계사를 대비하여 수록하듯 세 칸의 표로 나누어 ‘연도-작품-개인사’를 기재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라는 거냐.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희곡인데다 시적이라는 데서 원인을 찾는다. 연극 대본은 배우에 따라 다른 뉘앙스로 재현이 가능하며 ‘시’라는 문학 장르는 해석의 폭이 크다는 데 있다.
‘To be or not to be’라는 문장에서는 매력적인 대구의 리듬이 보인다. 과학으로 말하면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가 적용된 문장이다. 간간이 언급되는 원문으로 판단컨대 그의 문장은 시적인 요소가 짙다. 라임을 맞춘 랩의 가사를 보는 느낌이다. 번역자의 주석으로 짐작하면 시적인 대사와 동음이의어의 풍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외국어 번역으로 원문의 라임을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시적인 생명력의 숨이 죽은 듯하다.
극작가에게서 출발한 의도가 극본을 해석한 배우의 의도를 거친다. 구전된 내용을 받아들여 옮긴이의 의도, 영문을 해석한 번역자의 의도, 번역본을 해석하여 리뷰를 작성하는 독자의 의도를 향해 흘러간다. 수많은 해석과 의도를 거치는 동안 최초의 창작자의 의도가 얼마나 변질되었을까.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 조상의 DNA 릴레이처럼 본질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면 좋았을 텐데. 작가냐 배우냐 번역자냐 독자냐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