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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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욱! 헛구역질은 계속 나오는데 차가운 감촉의 검은 줄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옆으로 누운 채 눈물, 콧물 질질 흘려가며 영겁의 시간을 견딘다. 이보다 더 찌질할 수 없는 몰골이었을 게 분명하리라. 그토록 길게 느껴지던 시간이 저스트 텐 미닛이라는 사실을 알고 상대성 이론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의무적인 건강 검진만 아니라면 하고 싶지 않은, 위내시경 검사의 기억이다.

제발 그만 들어오라며 자꾸 밀어내는 몸의 반응을 전혀 개의치 않는 부드러운 곡선의 직진이여! ~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순간적으로 몸이 부르르 떨린다. 고통에 소심했던 나는 그전까지 줄기차게 위장 조영 검사를 선택한다. "간접적으로 그림자만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눈물을 머금고 시도한다. 상상 그 이상의 체험은 치과나 산부인과를 제치고 워스트 넘버 원으로 등극한다.

 

이 책을 읽으며 위내시경 검사의 기억이 겹친 이유를 곰곰 생각한다.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던 이물감 때문일까. 내 안을 구석구석 파헤치며 출혈이 발생한 부위를 영상으로 보여주던 장면 때문일까. 고상한 이성으로 포장하려 해도 제어되지 않던 눈물과 콧물의 민망한 흐름 때문일까.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한강 작가의 문장을 마주하며 당황스러웠다. 한 번쯤 떠올려보았던 은밀한 상상을 들킨 듯 가슴이 일렁였다. 그녀의 글은 작정하고 파고들어 오는 내시경의 검은 줄처럼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금기의 풍선을 툭툭 터뜨린다. 외면하고 싶지만, 언제까지 보기 좋은 그림자들만 볼까 싶어 정면으로 도전해 본다. 담담하지만 뜨겁고 붉은 문장이다. 그 안에 담긴 이성은 냉철하고 몽고반점의 푸른 빛에 가깝다. 찌르는 듯한 아픔도 아닌 것이 내내 답답하게 얹혀 거북한 고통이 심장을 파헤친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지닌 연작 소설이다.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 불꽃>의 이야기가 독립된 작품으로 기능하면서 전체적으로 연결을 해도 한 편으로 어우러지는 시리즈물이다. 주인공 영혜와 연결된 가족 구성원의 서사에 각각 핀 조명이 비추어진다.

처음에 차례를 보았을 때는 <채식주의자>를 표제작으로 한 소설집인가 여긴다. 조금 읽다 65쪽 뒤의 여백을 보며 당황한다. 뭐야. 이게 끝? 열심히 달리다 갑자기 낭떠러지를 만난 허탈함. 한참 몰입하던 연극에 갑자기 막이 내려진 기분이랄까. 멍하니 앉아 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을 보다, 남아있는 책장들을 뒤적인다. '영혜'라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한다. 뒤이어 책 표지를 보고 '연작 소설'이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 아직 끝나지는 않았구나. 살짝 안도의 숨을 고른다.

 

<채식주의자>의 주요 화자는 일인칭 관찰자의 시점을 가진 영혜의 남편이다. 영혜는 중간 중간 기울어진 이탤릭체의 독백으로 ''의 마음을 서술한다. 어느 날 꿈을 꾼 영혜는 채식주의를 표방한다. 또한 집안뿐 아니라 사회적인 모임 자리에서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소설은 영혜의 변화로 인한 에피소드를 남편의 시각에서 서술한다.

사회적 통념을 거스르는 사람을 향한 폭력성은 의외로 완고하다. 육식주의와 브래지어 착용을 은연중에 디폴트 값으로 설정하고 이에 반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여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낸다. 같은 인체 구조를 지녔음을 뻔히 알면서도 노브라를 '꼭툭튀'라며 민망해한다. 20대까지는 잘 때까지도 브래지어를 착용했던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시선을 지닌 채 살아왔다. 채식주의자의 반대말은 육식주의자이지만, 우리는 전자에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하여 명명한다. 무슨 대단한 신념이라도 있어야 채식주의를 고수할 수 있는 듯 여긴다.

 

음식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섭취해야 하는 에너지원이다. 의복 역시 몸을 가리고 보호하는 게 일차적인 기능일 터이다. 삶이 각자의 몫인 것처럼 무엇을 먹거나 입든 엄밀하게 말하면 타인이 관여할 영역은 아니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답답해서."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하는 영혜를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다.

채식주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강요와 폭력성은 주위의 냉소와 함께 영혜의 부모를 통해 직접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아버지는 영혜의 뺨을 때리고 억지로 몸을 붙들게 하여 입을 벌리게 만든다. 어머니는 흑염소를 한약이라 속이며 억지로 먹이려 한다. 딸에 대한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감쌌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질적으로는 강요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스스로 몸을 자해하는 행위뿐이다.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상의를 벗은 채 작은 동박새를 이빨로 물어뜯은 듯한 마지막 장면은 세상을 향한 처절한 항변이다.

 

장면이 바뀐 두 번째 이야기의 문을 열고 주춤한다. 엄훠?! 두 손가락을 벌려 눈을 가리는 훼이크를 취한 뒤 그 틈새로 초집중하여 보았을 장면이 듬뿍 들어있는 게 아닌가. 젊었을 때 읽었더라면 은밀하게 몇 번이고 책장을 넘기며 복기했으리라. "옷을 벗어." 크헉!! 순간, 숨을 멈춘 채 흔들리는 나의 동공. 내가 좋아하는 야시시한 문장들이 '여기가 19금 맛집일세'라며 대기를 타고 있다.

<몽고반점>에서 영혜를 관찰하는 이는 형부이다. 비디오 아트를 하는 ''는 아내로부터 처제의 왼쪽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예술적인 영감과 동시에 성적인 욕구를 느낀다. 그는 영혜가 지닌 식물성에 매혹된다. 그녀의 몸에 꽃을 그리고 또 다른 남자 후배의 몸에도 꽃을 그린다. 꽃과 꽃이 만나는 장면을 완성하고 싶었던 그는 결국 다른 화가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려 넣은 다음, 금기의 경계를 넘는다.

 

꽃은 생식 기관이다. 햇살을 향해 야들야들한 꽃잎과 한들한들 바람에 흔들리는 암술과 수술을 대놓고 드러낸다. 누구도 이 장면을 보고 부끄럽다거나 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아담과 이브가 최후의 보루로 나뭇잎 아래 감추었던 부위를 드러내는 장면인데 말이다.

<몽고반점>은 꽃과 인간의 생식을 묘하게 결합한 소설이다. 부분과 전체가 다른 느낌을 준다. 뭉텅뭉텅 끊어서 보면 분명 야릇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면 슬픔과 환희가 어우러진 허무가 배어 나온다. 소설 속 그가 영혜의 몸에 꽃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하면서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느낀 것처럼.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이라는 문장들이 들썩이던 동요를 잔잔하게 만든다. '단단한 고독'이라는 문구에서 고독의 질감을 상상한다.

 

세 작품의 주인공은 과연 영혜였을까. 세 번째 이야기 <나무 불꽃>을 읽으며 관점이 서서히 달라짐을 인지한다. 어쩌면 소설의 주인공은 이 모든 폭력을 지켜보며 거센 파도를 감당해야 했던 영혜의 언니, 인혜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소설의 화자인 '그녀'는 영혜의 언니이자 <몽고반점>에서의 ''의 아내이다. 모든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경계를 뚫고 달려 나간 동생과 남편의 일을 복기하며 그녀는 허무한 물음표를 날린다. '막을 수 없었을까, 만약에 ~였다면'.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다만 견뎌왔을 뿐이라는 문장에 마음이 아프다.

남겨진 사람, 이 모든 일들을 견뎌야 하는 사람, 미쳐버린 동생을 차마 외면할 수 없던 사람, 아이를 두고 죽음을 택할 수도 없는 사람, 훌훌 떠나버릴 자유조차 의무에 박제되어 버린 사람이다. 어쩌면 꿈인지 모른다며 세상을 향해 독백하는 그녀의 담담한 말이 따끔따끔하다.

 

나무가 왜 불꽃일까. 제목을 보며 가졌던 의문이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장에서 풀린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이토록 동물적이면서도 시적인 묘사가 식물을 대상으로도 가능하다니! 몇 번이나 눈으로 더듬으며 감탄한다.

작가 한강에게 식물은 동물만큼이나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인가. <나무 불꽃>에서 영혜가 물구나무를 서며 나무가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고 한 말 역시 식물을 동물인 듯 묘사한 문장이다. 생식 기관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꽤 일리가 있는 발상이다. 뿌리 역시 짧게 갈라진 발가락보다는 길게 뻗을 수 있는 팔 끝, 손가락에 비유하는 게 더 어울리는 듯하다. 축축한 나무껍질의 감촉을 느끼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만났음을 인지하는 작가의 감성이 이런 섬세한 작품을 탄생시켰으리라.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하고 지내왔던 생각들 속으로 작가의 문장들이 위내시경 검사를 하듯 계속 밀려들어와서였기 때문이다. 식물처럼 섬세하면서 집요하게 마음을 결을 더듬었기 때문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야기 속에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무심코 주변에 휘둘렀던 폭력을 되짚어본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했던 시간을 뒤적여본다.

부드러운 곡선이 직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시경 검사를 통해 알았다. 이제는 자고 일어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가 되지만 가끔 그때의 경험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시경 검사를 하듯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는 작가의 문장에서 동물적인 식물의 이중성을 감지한다. 뾰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직선이다. 불현듯 생생하게 떠오를 듯한 감각이다. 따끔거리는 통증 속에서 한 꺼풀 외피를 벗은 나의 영혼이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일까.

 

p11, 밑에서 9째 줄: 친구 들의 친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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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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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녀가 따로 없다. 오른손엔 집게, 왼손엔 밥숟가락을 든 지 30분째다. 집게로 건더기를 포착해 숟가락 위에서 살과 가시를 분리하는 중이다. 군산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도 모자라 광어 서너 네댓 마리를 들통에 손수 고아 광어 지리를 만들어준 초보 낚시꾼. 남은 국물에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말에 어부의 아내로서 본분을 다하는 마음으로 맑은 탕에서 가시를 골라낸다.

늘 그렇듯 시작은 사소하다. 새끼손가락만 한 척추 가시 토막만을 휘휘 골라내고 나머지 잔가시는 입으로 발라내며 먹으면 그만이다. 도구를 들었을 때 한 생각이다. 한데 골라낼수록 더 골라내고 싶은 거다. 완벽주의병이 도지는 바람에 지 발등을 지가 찍어버리는 무모함으로 개고생을 자처한다. 은근한 성취감까지 느끼던 아내는 매의 눈을 장착한 채 장인 정신을 발휘한다. 비루했던 맑은 탕이 추어탕 비주얼로 환골탈태한다.

멀리서 볼 때는 번거로울 가족을 위해 이보다 정성스러울 수 없는 마음으로 가시를 골라내는 가족 사랑의 표본이다. 알고 보면 자기만족을 위해 이루어진 작업일 뿐이다. "당신의 소중한 입을 위해 이토록 정성스레 발라버렸떠염~" 아름다운 멘트로 포장하며 본래 의도를 완벽하게 숨긴다. 삶의 아이러니.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다. 때로는 진실보다 적절한 거리 두기와 결합한 숨바꼭질이 삶에 유용하지 않을까. 사악한 의도가 아니라면.

 

새의 선물은 삶과의 거리 두기를 유지하는 30대 후반의 여성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성장 소설이다. 여섯 살 때 어머니는 자살하고, 아버지가 도망가는 바람에 주인공 진희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란다. 아이는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조숙한 시선으로 자신과 주변의 삶을 관찰한다. 소설은 12세 진희를 일인칭 관찰자로 설정하여 액자를 들여다보듯 1960년대 시골 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묘사한다.

스스로의 삶까지도 관찰하는 아이는 자신을 둘로 분리하여 사고한다. '보여지는 나''바라보는 나'이다. '보여지는 나'가 삶을 이끌어가면, '바라보는 나'는 관찰한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방식으로 삶으로부터 다가오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한다. 얼핏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관점은 오히려 삶 속으로 과감하게 파고 들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바라보는 나'는 담담하게 자신과 얽힌 주변인들의 삶을 묘사한다.

어른 아이는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리 두기로 대상을 바라본다. 주인공 진희의 캐릭터는 MBTI의 전형적인 T 유형이다. 상황 판단이 명확하다. 감정을 개입하지 않고 판사처럼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조함은 때로는 당황스러운 웃음을 유발한다. 몰래 숨기려는 의도는 진희의 레이더에 포착되면 햇빛에 노출되듯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게 오히려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로 작용한다. 뽀송뽀송 마른 빨래를 만지듯 개운한 느낌마저 안긴다.

 

공간적 배경은 한 울타리에 살면서 마당에 있는 빨래 바지랑대를 공유하는 집들이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주인집, 세 들어 사는 장군이네집, 네 칸으로 이루어진 가겟집이다. 마당 중앙의 우물을 둘러싸고 진희, 이모 영옥, 외할머니, 삼촌, 장군이 모자, 최선생님, 이선생님, 광진테라 양복점 부부와 어린 아들, 뉴스타일 양장점 미스 리가 살아간다. 아이는 이들의 서사를 번갈아 펼치며 여성으로서의 삶과 사회적인 부조리를 고스란히 뒤집어 보인다.

시대적 배경에서 중간중간 화석처럼 튀어나오는 낱말이 고리가 되어 번번이 나를 어린 시절로 데리고 간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사물들에 대한 개념이 배경지식으로 장착되어 있으니 2차원 문장이 3차원 동영상으로 머릿속에 재생되는 기현상을 경험한다. 덕분에 훨씬 실감 나는 장면으로 작가가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맛을 음미한다.

국민학교 때 다른 지역에서 전학 온 친구의 소개로 주고받던 펜팔, 3월이면 하얀 달력 종이를 잘라 겉표지를 쌌던 새 교과서, 손 편지, 환경미화 심사, 빨랫줄, 우물, 석유풍로, 형광등에 달린 끈, 가정의례준칙, 다락, 자석 필통, 고무 인형, 빨간 때수건, 송충이, 혼식 검사, 신작로, 연극, 아플리케 스티치, 책받침, 띠기, 책보, 국민교육헌장, 주번, 토요일 등교, 홑청, 요강, 변소, 마당을 제시어로 딸려 오는 먼지 쌓인 기억들이 들썩임을 반복한다.

 

세 들어 사는 집 이야기를 접하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똑같은 전세여도 독채 전세에 살기를 꿈꾸던 시절, 주인집과 공유한 마당이 있던 시절, 아파트에 살아보는 게 꿈이던 시절, 커다란 솥단지에 씻을 물을 데워 사용하던 시절이 스냅 사진처럼 지나간다. 소설 속 집 한가운데 존재하던 우물처럼 그 시절 한가운데 나의 어머니가 있다. 뜨거운 솥단지의 물에 데였던 당신의 모습은 빛바랜 기억 가운데 또렷하다.

시린 새벽 다섯 시를 연탄불에 올리셨다 / 어두운 밤 한껏 품고 출렁이는 물을 담아 / 커다란 솥 한가득 데워 하얀 아침 건네주셨다 // 걸레 꽁꽁 얼던 방안 코끝까지 덮은 이불 / 부스스 눈뜬 아침 모락모락 김 나는 물 / 한 바가지 찬물과 섞어 따뜻하게 세수를 했다 // 뜨거운 물 나르시다 뜨거운 물 쏟아진 날 / 화들짝 부어올라 벌겋던 당신의 발등 / 당신 삶의 쓰라린 물기가 어린 기억에 내려앉아 / 녹지 않는 눈이 되어 가만가만 쌓인 걸까 // 시린 새벽 다섯 시에 하얀 아침 꺼내어본다 / 온수에 손 적시는 계절이 올 때마다 / 당신의 나날들을 종종 그러안는다 / 촉촉해진 눈으로 덴 듯한 심장으로 / 차가운 겨울 아침 뜨거움을 안는다 (제목: 뜨거운 겨울, 2017. 11.)

어떤 기억은 망각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걸까. 방금 한 말도 금세 까먹는데 하물며 국민학교 때의 일이건만 매번 선명하다. 시를 지어 박제를 해도 불쑥 솟구치는 온천물인 양 겨울이면 불현듯 심장 속을 부유한다.

 

춥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연탄불을 때는 아랫목에 앉은 기분이다. 고생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자식의 심장에는 따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온기가 스민다. '인생의 의미는 당신의 선물을 찾는 것입니다.' 파블로 피카소가 말했다던가. 이 책의 제목 '새의 선물'을 보는 순간, 그의 말이 떠오른다. '선물'일까. 완독한 지는 꽤 지났건만 제목과 본문과의 연결 고리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일주일가량을 보낸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전문)

꼴랑 세 줄을 이토록 이해하지 못할 일인가. 자크 프레베르는 왜 하필 프랑스 사람인가. 원문이 영어로 되어 있다면 더듬더듬 해석이라도 시도해 볼 텐데. 그가 지은 시의 제목에서 차용했음을 짐작해도, 차례 이전에 시의 전문이 제시되었어도, 심지어 KBS 뉴스의 인터뷰 글에서 은희경 작가의 설명을 직접 찾아 읽어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건 여전했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방점은 '어린 시절 감옥'에 찍힌다. 해는 해바라기 씨앗을 거절한다. 어린 시절 감옥, 자기가 원하는 것일 텐데도 이를 거부하는 삶의 태도가 주인공 소녀를 담아내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는 답변이다.

 

일주일가량 집착녀 모드를 가동한 결과, 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나는 선물에 방점을 찍고 싶다. 시의 문장을 아무리 곱씹어도 씨앗을 거절하는 상황 같지 않다. 씨앗을 거부한 게 아니라 씨앗이 감옥으로 들어갈 용기를 불러일으킨 계기가 된 건 아닐까.

감옥은 구속의 상징이다. 어린 시절과 감옥의 결합은 불우한 환경을 상징한다. 힘들었던 시절은 떠올리기조차 힘겨운 법이다. 힘든 기억은 종종 트라우마로 남아 어른이 되어서도 그를 괴롭힌다. 무의식의 저변에 가라앉아 있다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떠오른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시 속의 해는 제 발로 그곳으로 들어가 버린다. 끌려 들어간 게 아니라 능동성을 보이는 상황이다.

해를 바꾼 계기는 씨앗이다. 해만 바라보던 해바라기의 꽃잎은 시간이 흘러 다 떨어졌으리라. 멀리서 꽃잎이 사그라드는 것만 보던 해는 절망한다. 한데 씨앗을 받음으로써 다시 해바라기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이는 어린 시절을 마주할 용기로 연결된다.

아주 늙었다는 건 삶이 품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새는 자유롭게 공중을 날 수 있어 자유의 상징으로 비유된다. 삶의 자유가 가져다준 씨앗은 어린 시절에 해를 사랑했던 해바라기가 있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선물'은 예상치 못한 뭉클함이다. 이제는 당당하게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하라는 따뜻한 속삭임이다.

 

새로운 관점으로 책의 내용을 되감기 하니 책의 제목이 내용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된다. 어떤 글이든 작가의 일부는 담겨있으리라. 직접적인 경험이거나 다른 이의 경험을 공감한 것이거나. 시를 포함한 나의 글이 나를 묘사하거나 공감이 되는 드라마 속 인물이나 주변인의 삶을 담아내므로 100% 허구는 아닌 것처럼. 작가의 영혼과 공명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 문학 작품에 제일 먼저 감동하는 이는 작가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이 작품의 원제목이 '연애 대위법'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문학에서 대위법은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 이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연애사가 가장 많이 등장하니 얼핏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사랑보다 삶의 향기가 더 짙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는 것,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건 삶에 대한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거라는 것,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난다는 것,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는 것,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는 것.' 밑줄을 그은 문장들이 한결같이 삶의 과녁을 향한다.

 

삶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문장들이 많다. 작가가 다시 붙인 제목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다. 은희경 작가에게 '새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감히 상상하건대 그녀에게는 작품을 탄생시키기까지 받았던 영감과 경험이 아니었을까.

소설 속 화자의 거리 두기를 통해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마주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용기를 얻었으리라. 여성의 삶과 가부장적인 가정의 모습과 사회적인 시선들을 그려냄으로써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는 통쾌함으로 어떤 이는 다른 길로 걸어갈 힘을 얻었으리라. 혹은 상처 입은 영혼이 이 작품을 계기로 희망을 품게 되었을지 모른다. 새의 선물이 릴레이로 이어지는 상상을 한다.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면 충분히 가능한 예측이다.

나에게 새의 선물은 무엇일까. 삶의 순간순간 많은 선물을 받아왔음을 깨닫는다. 끈끈한 가족애,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삶에 대한 긍정, 돈보다 훨씬 소중한 마음의 풍요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어린 시절에 나는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았다. 궁핍한 가운데 자그마한 책의 숲을 만들어주셨기에 글과 친숙한 벗이 될 수 있었다.

가장 큰 선물은 책을 좋아했던 소녀가 전해준 유전자이다. 이토록 기가 막힌 표현이라니! 자아도취성 문장이 튀어나올 때마다 유전의 영향력을 절감한다. 집착녀 기질에서 파생된 끈기 덕분에 나의 글은 나날이 창대해지는 중이다. 삶의 중력에 끌려들 때마다 글은 몽글몽글한 풍선이 되어 시린 바닥으로부터 나를 떨어뜨려 놓는 선물이 되었다. 풍선 안에는 당신이 불어넣어 주신 뜨거운 숨결이 있다. 나의 삶은 매번 지금처럼 따뜻해진다. 뜨거운 선물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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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 - 우리가 몰랐던 공공미술에 관한 이야기
홍경한 지음, 리모 그림 / 재승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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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니! 조각에 대한 멋진 정의를 들었을 때, 매끈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떠올린다. 바로 그가 이렇게 멋진 말을 한 장본인이라는 걸 아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는다.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구현해 낸 사람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머릿속에만 머물던 이미지를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탄생시키는 예술은 멋진 작업이다. ()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으로 향하는 화살표에 인간의 손길이 있다. 울퉁불퉁한 직육면체 비스므레한 덩어리였을 돌 조각을 그토록 멋지게 깎아내기까지 작가는 얼만큼 땀을 흘렸을까. 상상이 현실로 점차 모습을 드러낼 때, 흐르다 자유롭게 날아간 땀의 양만큼 희열을 느꼈을까.

거리가 3차원 캔버스인 양 돌과 나무와 철과 때로는 상상도 하지 못한 물질들로 거대한 예술을 구현하는 조각가들이 있다.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실사판인 양 거대한 조각상들 아래 소인국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온통 예술로 가득한 공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묻을 예술의 향기를 상상한다.

 

공공 미술은 '거리 곳곳에서 마주하는 조각들'을 말한다. 미술 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 전시기획자인 홍경한은 우리나라에 있는 길섶의 작품 15천여 점 중 38점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그가 작품을 선정한 기준은 심미성을 포함한 예술성, 작품의 가치, 작품에 새겨진 흥미로운 내레이션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조각, 삶과 예술의 하모니, 공공 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 등 3부로 구성하여 이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전시 기획을 하듯 배치한다. 더불어 저자는 큐레이터이자 도슨트 역할을 친절하게 수행한다. 작품에 얽힌 이야기, 조각가들의 의도, 유사한 작품들과 비슷한 맥락의 다른 작가에 대한 안내까지 곁들이니 공공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술 비평가와 칼럼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우리나라 공공 미술의 역사를 톺아보고, 공공 미술의 현재를 진단한다. 일방적인 소통이나 사후 관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공공 미술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통해 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안한다. 나아가 공공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한다.

 

내용 못지않게 눈에 들어오는 건 소개 작품에 대한 드로잉이다. 리모 김현길의 작업을 통해 사진이 수록되지 않은 아쉬움을 뛰어난 그림으로 채운다. 문장에서 언급된 작품과 작가들의 다른 작품의 실물 사진을 모두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읽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완독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 이유다.

조각 예술로 풍성한 일주일을 보낸다. 놀랍도록 실물 이미지와 드로잉의 싱크로율이 일치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덕분에 나의 시간도 수채화로 투명하고 아름답게 채색되는 듯했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생생한 색감이 아쉬운 작품도 보이지만 실물 사진과 대조하는 시간도 재밌고 의미 있었다.

조각의 매력은 역동적이라는 점이다. 2D 작품만 주로 감상하다 3D로 보니 입체가 주는 매력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공간과의 어우러짐, 공간과 주고받는 메시지가 더해진다. 개성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작품들을 보며 책장마다 입체 카드라도 삽입된 듯 공간감을 느낀다. 특히 마음에 들어오는 작품을 보며 나의 취향을 새삼 깨닫는다. 예술가의 시선에 공감하다 보니 내 삶의 무대가 보다 넓어지는 듯하다.

 

속도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감상하며 내 삶의 속도를 가늠하는 시간을 갖는다. 초침의 속도, 분침의 속도, 시침의 속도. 나는 어떤 속도로 살아가고 있을까. 소리 없는 예술 작품이 전하는 공간의 파장을 느끼며 나의 심장은 조금씩 규칙적인 리듬을 찾는다.

심현지의 <물고기>는 색감이 좋다. 커다란 물고기에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색채를 보며 잠시 행복한 동화 속 바다를 상상한다. 서도호의 <카르마>에 대한 해설을 접하고 다시 작품을 본다. 얼핏 보았을 때는 청록색 모기장처럼 보였던 작품이다. 전해져 오는 철학적인 무게감이 마음을 울린다.

저자가 언급한 헨리 무어의 작품 중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누워있는 형상>에서 깔끔한 돌 조각의 매력에 반한다.

노동식 작가의 작품은 부드러운 충격을 준다. 조각의 재료가 솜이라니! 고정관념을 깨뜨린 시도가 경이롭다. 책에 소개된 <민들레 홀씨 되어>는 공들여 쓴 칼럼을 접하는 듯하다. 검색으로 3m 모기향,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오는 장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공간으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연기를 사진을 찍듯 붙들어 놓은 발상에 감탄한다.

 

소개된 내용에 대한 의견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의 부제는 '고철에 담긴 비애와 슬픔의 꽃 한 송이'이다. 한데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작품은 20세기 물질문명 사회가 만들어낸 상처를 담고 있다. 이게 왜 상처인지, '아마벨'이란 제목은 무슨 의미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이해가 된다. 아마벨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19세 소녀이며, 그 비행기의 잔해를 모아 해당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추가되었더라면 '비애와 슬픔'에 대한 이해가 보다 더 깊어지지 않았을까. 작품의 재료가 고철일 수밖에 없는 이유까지 말이다.

둘째, 하우메 플렌자의 작품은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칠드런스 소울>에서는 '각 나라의 고유한 문자를 통해~'라는 문장이 언급된다. 저자의 서술 의도는 나라별 고유 문자를 표현한 예술을 소개하는 듯 보인다. 고유한 문자라면 영어로 된 작품보다는 한글로 제작되었다는 <가능성>이 더 적합해 보인다.

 

책의 구성에 대한 의견도 있다.

첫째, 책 표지 디자인이다. 표지에는 본문에 소개된 작품들이 앞과 뒤에 각각 7점씩 배열되어 있다. 한데 앞표지와 뒤표지의 작품 중 6점이 중복된다. 디자인의 의도는 분명 있을 테니 전문가의 작업에 이의를 제기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직관적인 의견을 적는다. 나라면 작품이 38점이나 되니 각기 다른 작품을 수록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둘째, 새드 엔딩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씁쓸함이 남는다.'이다. 덩달아 그리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마무리를 한다. 저자의 시선은 전체적인 시스템을 총괄하는 입장에 있는 듯하니 수긍이 간다. 날카로운 비판은 필요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여운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다. 보다 희망적인 내용을 마지막에 배열했으면 어땠을까. 그 많은 공공 미술에 참여한 작가들의 마음에는 분명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세상은 분명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미술의 진정한 역할은 삶의 긍정성을 배가하는 데 있다던가. 미술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한다면 덩달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따뜻해지리라 생각한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게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을 안겨준다고 나는 믿는다.

공공 미술 조각가들이 진정으로 원한 건 세상과의 소통이리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말을 걸었던 이들의 마음을 상상한다. 그들의 외침이 조금씩 모여 커다란 울림으로 전해진다. 작품뿐 아니라 주변의 공간까지 조화를 이루면서 파동인 듯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일까. 주변의 바람과 햇살, 희미한 대지의 냄새와 함께 3D의 입체 예술을 느끼고 싶다. 여행의 테마로 잡아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 시선은 나를 향한다.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조각들을 감상하니 삶에 입체감이 더해진다. 공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말을 걸고 싶냐고. 이 글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당신에게 하듯 나는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담아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걸까.

 

 

p127, 밑에서 4째 줄: 토니 오슬로 ~오슬러

p135, 4째 줄: 프리즈마 프라즈마

p144, 밑에서 4째 줄: 전통문화예술중심지 인사동 ~중심 인사동

p271, 7째 줄: 운봉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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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스님 지음 / 정토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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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 걸터앉은 집 뒤편에는 절이 있었다. 공양주로 일하시던 어머니 덕분에 절 문턱을 뒷마당인 듯 자연스럽게 드나든다. 일요일마다 여는 어린이 법회에도 언니, 동생들과 종종 참여한다. '귀의'가 뭔지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 '삼귀의', 제목의 의미조차 이제야 알았더라도 리듬과 가사 만은 익숙한 '사홍서원', 문장의 의미도 모른 채 뭐 준다 길래 260'반야심경'을 송두리째 외웠던 경이가 우수수 딸려 나온다. 뭘 받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지금도 툭 치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 구구단인 양 튀어나온다.

의미를 몰랐어도 상관없다. 그 공간을 마주했던 선명한 감각의 기억으로 충분하다. 밟을 때마다 달가닥거리던 절 앞 마당의 자갈 소리, 소리만큼이나 은은하게 풍기던 법당의 향냄새, 약수터에서 졸졸 흘러나오던 시원한 물맛, 마당을 둘러싼 초록들이 사락사락 햇살을 비비던 풍경. 그 안에는 잿빛 몸뻬를 입고 분주하시던 광명화 보살님, 나의 어머니가 있다. 종교는 없지만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이유에는 어릴 적 경험의 영향이 크다. 공간에 깃든 평화로움과 청량한 고요로 둘러싸인 질감이 어린 나는 그저 좋았다.

 

불교의 시작. 원점이 되는 분은 어떤 생을 살았을까.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은 경전 기록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삶과 말씀을 재조명한 책이다. 법륜 스님은 서문에서 저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분의 삶을 통해 지금 여기 우리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간간이 일화로 들었던 부처님의 말씀보다 이 세상에 계시는 법륜 스님의 말씀을 훨씬 많이 들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유튜브에서 스님의 <즉문즉설>을 찾았으니까. 본질을 꿰뚫는 직설에 속이 후련했다. 지금 하는 고민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상담자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무슨 답변을 하실지 예측이 될 지경이다.

내게 부처님은 아직 멀기만 한데 스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분은 어떤 느낌일까. 575쪽의 지면은 한 사람의 모든 삶과 사상을 담기에는 좁을 터이다. 법륜 스님은 이 좁은 공간으로 어떤 장면을 들여보내셨을까. 신적인 존재에 더 근접했을 듯한 '붓다' 앞에 '인간'이란 말이 붙으니 새삼 낯설다. 두근거리는 호기심으로 환한 빛을 연상케 하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두어 장을 넘기니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좌상이 시선을 붙든다. 목차에 도달하기도 전에 주춤한다. 무릇 부처님의 모습이란 석굴암에 고고하게 앉아 계시는 뽀샤시하면서도 근엄한 본존불이 디폴트였단 말이다. 앙상한 붓다라니! 이질적인 사진 앞에서 잠시 멍해진다.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읽지도 않은 고전의 요약본을 알 듯 어설픈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생로병사, 고행 중 찝쩍대는 악마의 유혹 같은 일화 말이다. 어째서 물음표를 던져보지 않았던가. 고행의 과정을 지났다면 육신의 살이 붙어있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일 터인데. 뱃가죽이 등가죽에 들러붙었다는 문장을 가시화한 듯 생생하다.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습이라 더 인상적이다.

이름도 붙어있지 않은 불상의 정체가 궁금했다. 덕분에 인터넷에 올라온 수많은 불상의 사진을 구경한다. 단식 고행을 하던 해탈 전의 모습이고 작품명은 '고행상(Fasting Buddha)'임을 알았다. 파키스탄의 라호르 박물관 소장본이 유명하며 이를 본떠 수많은 고행상이 만들어진다. 이 책에 수록된 불상은 문경의 정토수련원에 있는 것으로 인도에서 제작해서 들여왔다고 한다. 정토출판에서 출간한 책이니 굳이 출처를 표기할 필요가 없었나 보다.

 

서장에서는 인도의 사상과 역사를 소개한다. 인도 역사에는 전통적인 계급 세습 제도인 '카스트'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원전 1300년 정도를 시원으로 본다는 기록이 많으며 공식적으로는 1950년에 폐지되었다. 무려 3,250여 년간 존속되어 온 제도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분류도에는 위로부터 제사장인 '브라만', 무사나 왕족인 '크샤트리아', 평민인 '바이샤', 노예인 '수드라'가 차례로 분포한다.

충격적인 건 여기가 바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발아래에는 거대한 지하 세계가 있다.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라 불리는 '달리트'는 닿아서는 안되는 계급 밖의 사람들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꼬꼬무 카스트에는 이들보다 더한 존재가 있다. 인구 등록조차 되지 않는 '불가시천민(Unseeables)'이다. 다른 이가 보아서는 안 되니 밤에 이동하고 이동 흔적을 지우고 다니며 목에 방울까지 매달았다고 한다.

출생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정해지는 제도라니! 누구의 잘못도 아닌 염색체 이상 증후군처럼 말이다. 고려와 조선의 양반 제도뿐 아니라 미국에도 노예 제도가 있었음을 떠올린다. 세계 여러 나라 계급의 역사는 검색할수록 짙은 씁쓸함을 남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수직으로 줄 세워서 지배하려는 건 인간이란 종의 타고난 본성인가.

 

태어나보니 노예로 정해진 삶은 가늠해 본다는 말조차 조심스럽다. 이토록 불합리한 제도의 그물이 옭아맨 세상에서 불평등으로 인해 그들에게 쏟아졌을 고통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안도감만 삼킬 뿐이다. 시험용으로 외웠던 학창 시절의 '카스트'에 고통 따위는 없었건만. 아무런 감흥 없이 밍밍한 껍데기만 잠시 넣었다 뱉고 금세 잊어버린 셈이다.

부처님의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로 깨달음 이후에는 '석가모니'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카스트 계급은 크샤트리아로 왕족 출신이다. 소위 금수저이시다.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안다." 드라마 <스토브 리그> 주인공의 대사다. 이 문장을 떠올리며 부처님의 위대한 점을 발견한다. 냉철한 자아 성찰에 따른 현실 직시이다. 그분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스스로 3루타를 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깨닫는 데 머무른다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닐 터이다. 부처님은 망설이지 않고 3루를 떠나 1루로 거슬러 가신다. 고통이 공기처럼 머무는 곳, 매 순간 고통을 호흡하는 이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이 평범한 인간은 알았다 하더라도 이게 웬 횡재냐며 모른 척 머물렀을 텐데.

 

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가치 기준과 생활 관습이 결정되며 한 사람의 인격은 환경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스님 말씀에 동의한다. 이런 이유로 비슷한 상황이 되면 흘러간 일부 역사가 반복되는 패턴을 보이는 걸까.

환경은 인간의 내재적 성향을 발현하게 만드는 스위치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스위치를 켜려면 일단 환경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파도가 두려워 항구에만 정박한 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환경에 자유 의지가 결합 되면 잠자고 있던 불성이 화르르 타오르리라. 불교의 목적은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하니 야! 너두!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탄생과 성장, 출가, 고행과 성도, 전도의 개시,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 위대한 열반에 이르기까지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가 걸어간 삶의 여정과 사상을 천천히 따라간다. 부처님의 여정을 각 장의 앞부분에 지도와 함께 나타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약간 있다. 도시, 나라, 강 등 거쳐가신 경로를 여행기의 노선처럼 보고 싶었다. 생소한 지명이 언급될 때마다 부록에 나온 고대 인도의 16대국 지도를 펼쳐보았지만 몇몇 도시나 중요 나라 외에는 그분의 행적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부록에 붓다의 연표를 수록해 80년간의 삶을 정리해 주신 점은 좋았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 부록의 '찾아보기'를 낱말 뜻으로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찾아보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이름이나 도시에 대한 설명은 본문 아래에 각주로 달아서 보다 깊은 이해를 돕고 말이다. 어차피 산스크리트어는 '데바다하''데바닷타'나 도통 발음이 비슷해서 그게 그거 같았다. 찾아보기의 배열이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으니 본문을 읽을 때마다 뒷면을 들춰보기는 어려웠다. 지명이나 인명은 그러려니 하고 여기에 의문이 가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그 외의 요소들에 있었다. 기본적인 명사나 서술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 보니 책장이 더딘 걸음으로 넘어갔다. 스님의 해설에 언급되는 내용도 있으나 불교 관련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 수시로 인터넷을 검색하여 어학 사전이나 위키 백과를 찾았다. '수계사, 사미, 시봉, 보살행, 화현, 용화, 방일함, 예경, 탐사, 반열반, 사자후, 사견, 탐착, 외호하다, 사뢰다, 반야, 제불보살, 가람, 맑히다, 증장, 청수, 자양하다, 사라나무, 팔부대중, 전단나무버섯'. 최근 이틀 동안의 검색어 목록이다. 덕분에 다소 깊이 있는 공부가 된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불교 공부를 하는 학생의 자세로 새로운 낱말을 배우는 듯 겉모습만 익숙한 몇몇 단어의 진정한 의미도 배운다.

 

첫 번째,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내가 제일 잘 나가' 가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었던 거다. 더군다나 아()에서 ''의 범위가 1인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였다니! 인간이 우주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인간 해방 선언을 몰라본 무지몽매한 눈이 트인다.

두 번째, '공양'이다. 사실 '공양'에 대하여 삐딱한 시선을 가져왔다. 차마 말로 뱉지 못한 생각이다. 스스로 음식을 구하지 못하고 어째서 다른 이의 음식을 달라고 하는가. 매번 석연치 않은 마음이었지만 그 어떤 책에서도 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 내가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걸까. 많은 이들은 이를 당연하다 여기는 걸까.

드디어 이 책에서 답을 얻는다. 다른 이에게 나의 먹을 것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구나. 공양은 나의 것을 나눔이로구나. 나의 몸을 만들 음식을 나누는 것, 결국 나를 나누는 수행인 셈이다.

세 번째, '자비'이다. 무조건적인 이해나 용서가 아니라 보다 큰 의미가 있음을 배운다. 고통에 동참하여 모든 아픔을 함께하고 모든 즐거움을 함께 나누려는 자세, 대등한 관계에서의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기희생이다. 자비의 의미를 공부하며 그 예시로 적절하게 언급할 수 있는 보살님 한 분을 떠올린다.

 

스님은 이 책에 친절하고 맑은 거울을 가져다 놓으셨던 걸까. 세상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보고 이제껏 잘못 알고 있던 세상의 이치를 배우며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본다. 부처님에 대한 세세한 일대기라 짐작하고 문을 열었는데 부처님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법륜 스님께서는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셨음을 깨닫는다.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왔나.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번 한적이 없었(feat. 어머님께)'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삶은 자잘한 계기를 몇 번 건네면서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알려준다. 지금 나의 주인은 나다. 또한 나만 소중한 게 아니라 당신도 소중한 사람임을 알아야 함을 마음에 새긴다. 한 장 한 장의 책장이 거울인 듯 나를 비춰본다. 삐져나온 머리카락도 정돈하고 표정도 보고 지나온 나와 걸어갈 나를 상상한다.

실천을 강조하는 불교 교리를 기준으로 놓고 보니 말로만 떠드는 사람,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잔잔한 마음을 품고 찾아보니 제대로 보지 못했던 몇몇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증발이 되어 사라지기라도 한 듯이.

 

부처님이 지혜와 자비를 갖추신 분이라면, 보살님은 지혜를 구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생애에 담긴 가르침을 따라가며 기시감을 느낀다. 인간은 오직 그 행위에 의해서만 그 성품이 결정된다고 했던가.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신 훌륭한 조교가 가까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절의 스님께서 어머니께 '광명화 보살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을 때, 우리 식구는 너무 거창한 이름이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빛나는 꽃이라니! 게다가 보살님이라니! 노모의 은빛 머리칼이 점점 빛을 낼수록 스님의 혜안에 나는 종종 감탄한다.

어머니께 용돈을 드릴 때마다 대부분의 돈이 물건으로 페이백 되어 돌아온다. 명절 때마다, 생일 때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시험이나 소소한 삶의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 주변에 많은 것들을 베푸신다. "없이 살아서 그렇지 내가 돈 쓰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꽃처럼 피어나는 어머니의 웃음에 "니 엄마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나 모르겠다." 덩달아 구르는 아버지의 웃음소리. 당신으로 인해 나는 나눔의 삶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근접 사진을 보듯 목도하였으며 고통스러운 현실은 반드시 지나가리라는 긍정 마인드를 품게 되었다.

 

몇 개의 단어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연결되어 심장 깊은 데에 놓인다. 나에게는 ''이 그런 부류에 속하는 단어다. -공양--공양주-어머니. 시간과 공간과 감각의 무게 중심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갈 때 불현듯 툭! 첫 번째 단어에 진동이 전해진다. 쓰러지는 도미노를 촬영한 동영상을 거꾸로 재생하듯 연결 고리가 줄줄이 되살아난다.

7년 전의 5월도 그랬다. 야외에서 개최되는 글짓기 대회에 참여한 날이다. 두 시간 안에 '이팝꽃이 피면'이라는 글제로 작품을 제출하는 미션을 받는다. 밥을 닮은 이팝꽃을 떠올리는 순간, 뺨에 닿는 바람이 참 부드럽다고 생각한 순간, 카테고리의 단어들이 후두둑 눈앞에 펼쳐진다.

'공양주로 일하던 / 어미의 소원은 / 이팝꽃처럼 솔솔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내 새끼 뱃속에 담아 / 배불리는 것이었다 // 부처님 공양하고 / 남은 밥 찐 도시락 / 어느 날 삭아버려 / 축 늘어진 이팝꽃 / 자식은 밥을 버리며 / 철없이 투덜댔다 // 30년 뒤 절 마당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이팝꽃처럼 솔솔 / 지어주고 싶었지 / 버려진 이팝꽃은 / 노모의 마음속에서 / 여전히 뜨겁게 / 피어나고 있었다 (제목: 이팝꽃처럼 솔솔)'

가난의 고통은 당신 덕분에 예술로 피어난다. 대회에서 얻은 결과로 나는 글을 계속 써나갈 용기를 얻는다.

 

글을 쓸 때마다 종종 이 시를 언급한다. 시를 짓던 그날의 두 시간이 파일에 저장된 동영상처럼 꺼낼 때마다 생생하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의 가슴은 뜨겁다. 어머니가 담긴 글은 매번 그렇다. 따끔거리면서도 글 안에 새기면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희열이 느껴진다.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 통역사처럼 문장이 흘러나온다. 글을 쓰는 현재의 모습을 한 손으로 잡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면 고통의 바람이 불어왔던 순간마다 당신이 빛의 꽃으로 피어있다. 덕분에 함께 하는 고통 속에서 덜 춥고 덜 외로웠다.

"몇 달을 점심때마다 곰국 먹는 거, 질리지 않니?" 취업을 준비하는 곰국 마니아에게 묻는다. "엄마! 엄마는 매일 먹는 밥이 질려?" 글 속의 어머니는 이런 의미일까. 매일 먹는 새 밥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존재 말이다.

석가탄신일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 부른 건 그분이 오시기를 바랬던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미 내 곁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보살님이 오셨던 건지도 모른다. 부처님, 불경, 스님, 절을 떠올리면 이 모든 배경을 뚫고 나의 공양주, 광명화 보살님이 은은한 햇살처럼 심장을 비춘다. 연기설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내 곁에 머문 보살님과 몇십 년의 삶을 공유하는 행운을 누렸던 걸까.

p54, 본문 첫째 줄, p55, 밑에서 2째 줄, 3째 줄, p91, 밑에서 10째 줄: 아승지 아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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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리커버 에디션)
무라세 다케시 지음, 김지연 옮김 / 모모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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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골목이 있는 길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바퀴를 따라 삼십 여 년 전의 기억이 묻어 나는 길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대학 병원 뒤 허름한 주택가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다. 널찍한 주차장이 나오는가 하면 커다란 건물과 신축 빌라들이 즐비하다. "여기 어디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20대의 발자국이 그렇게 많이 찍힌 거리이니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정도는 몸이 기억할 법도 한데. 깔끔하게 정비된 동네가 신도시인 양 낯설다.

"엄마, 여기께 살았었어?" 그때의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이가 뒷자리에서 묻는다. ". 근데 너무 많이 변했네." 가족 식사 후 들른 커피숍이 예전에 살던 동네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수석에서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분주하게 풍경을 스캔한다. "에이, 못 찾겠다." 결혼 전에 살았던 친정집 찾기를 포기한다. 고대 유적지인 양 집터라도 보고 싶었지만 발견하기가 만만치 않다. GG를 선언하자마자 차는 과거의 골목길을 빠져나와 현재의 대로를 달린다.

 

달리는 기차가 들어오는 기차역 풍경이 책 표지를 넘어 앞 뒷면의 날개까지 이어진다. 일러스트의 색감이 좋다. 자그마한 체구에 봄날 여리여리한 꽃잎 같은 겉모습을 지닌 책이다. 불빛을 받으니 낮의 공간을 채우는 별이라도 내려온 양 무늬가 반짝인다. 첫 느낌은 화사한 봄이지만 선뜻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제목의 문구 때문이다. 죽음의 상징일까. 희망 없는 삶만큼 묵직한 단어라 샤랄라한 마음으로 펼쳐볼 수 없었다.

어둠의 아우라가 예상되는 책을 굳이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웃 나라이기는 해도 외국 소설이니 우리 정서와 잘 맞을까 의구심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책을 눈앞으로 데려오고 이틀 만에 완독했으며 바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걸 보면 이건 차라리 운명일까. 몇 주에 걸쳐 책을 읽고 다시 그만큼을 고민해야 느낌이 정리되는 편이건만 기다렸다는 듯이 손끝으로 글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보통의 기다림은 그 자체로 희망을 내포한다.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하므로. 오면 좋고, 오지 않더라도 욕심을 내려놓으면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안타까운 상황은 대상의 부재로부터 온다. '있다'에서 '없다'로 전환되는 순간은 얄궂게도 예고라는 게 없다. 한순간에 훅 다가온다. 사랑하는 이를 마음에 품은 이는 이런 이유로 종종 긴장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무라세 다케시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뒤늦은 회한으로 가슴 아파할 상황은 당신이나 나에게도 예외로 빗겨가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함께하는 지금은 더없이 소중한 순간이다.

 

이 소설은 기차 탈선 사고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령 열차에 올라타서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약혼자를 잃은 여자, 아버지를 잃은 아들,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잃은 소년, 열차를 운전한 기관사를 잃은 아내 등 4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커다란 틀은 옴니버스식인데 각각의 이야기에는 나머지 에피소드 속 등장인물이 조금씩 얼굴을 비추며 연결된다.

판타지 설정이 이질적이지 않아 현실처럼 전개가 자연스럽다. 옮긴이의 주석이 해당 페이지에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읽어왔던 상당수의 책이 주석을 맨 뒤에 부록처럼 수록해 놓아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왔다 갔다 책을 들춰보는 일이 반복되면 맥이 끊겨서이다. 소설은 작가가 펼쳐 놓은 흐름을 따라가는 장르이니 동시통역사를 옆에 둔 것처럼 바로 확인하여 몰입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했다.

 

감정이입이 되어 몰입한 에피소드는 2화와 4화이다. 매번 책을 거울삼아 나의 삶을 비춰보는데 두 이야기가 현재 상황과 가장 근접해서인 듯하다.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의 관계, 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서야 그와의 관계를 돌아보며 아파한다. 유령 기차는 그들의 회한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판타지적인 장치이다.

유령 기차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4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죽은 이가 승차했던 역에서 타야 하며, 피해자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열차가 사고 지점을 통과하기 전에 미리 내리지 않으면 자신도 죽게 된다. 마지막으로, 죽은 이를 만난다고 해서 현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죽은 이와 대화를 해볼 한 번의 기회만을 얻을 뿐이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더라도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제대로 된 이별을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아들의 관점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묘사한 2화에서는 직업의 의미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다룬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던 아들은 직장에서의 불합리한 처우에 밀려나 몇몇 임시직을 전전하다 칩거 생활을 한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후 당신의 흔적을 찾던 그는 변변치 않아 보였던 아버지의 일이 베푸는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평소 당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따라가며 비로소 커다란 사랑의 테두리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유령 기차에서 만난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넨 말이 인상적이다.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느끼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것, 삶에서 해답을 가르쳐주는 건 컴퓨터나 로봇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의 부모님과 아이들을 떠올린다. 이제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자식을 향한 마음을 헤아리는 나를 발견한다. 몇 년 뒤의 퇴직 이후에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면 좋을까 상상해 본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더욱 커질 터이다. 두려움과 용기는 같은 말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정박한 배는 부서질 염려가 없다 하던가. 바다에 나가 파도와 맞서며 항해하지 않는 배를 ''라 부를 수 있을까. 바다를 동경하며 항구에만 머무는 안전한 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이제는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치열했던 시기를 지나오면서 지쳤던 마음을 다독이면서 마음이 기뻐하는 일을 하며 나머지 시간을 걸어가고 싶다. 그 시작에는 분명 글이 함께 하리라. 나의 외로움과 슬픔과 아픔을 품고 함께 내 삶을 걸어온 나의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글은 분명 나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과도 연결되리라 믿는다. 그때까지 이렇게 책을 읽고 느낌을 정리하며 조금씩 닻을 올리고 싶다. 바다로 항해할 내일을 꿈꾸며.

 

내일도 오늘처럼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리라 생각했던 아내에게 오늘 아침은 남편의 얼굴을 보는 마지막이 된다. 사고 기차를 운전했던 기관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다룬 4화를 따라가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린다. 운전하기 좋은 대로를 두고 굳이 골목길로 핸들을 돌렸던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쪽으로 한 번 가보자 얘기한 적 없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도 나와 함께 한 시간을 다시 꺼내어 보고 싶었을까. 하루의 아쉬운 이별이 찰랑거리던 순간들을, 함께 걷던 그 거리를, 삼십여 년을 훌쩍 타임 슬립하여 재연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지. 말로 표현하기보다 은근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소한 순간들이 조각조각 되살아나더니 퍼즐 판을 향해 자리를 잡는다.

 

당신이 운전을 가르쳐주던 주차장 근처의 커피숍에서 나와의 추억을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 근처 주차장이 아래위 이중이라, 언덕에 올랐다 출발하는 연습을 했지. 코스도 분필로 그려가면서 연습하고." 운동 신경이 연합 신경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여자친구를 만나 개고생을 했던 남자. 결국 그녀의 손에 운전면허증을 쥐어준, 그 어려운 걸 해낸 사람이다.

"여기가 적당했던 거야?" "엄마 옛날 집 근처라 데려다주기 좋아서." "한 번은 순찰 도는 경찰들에게 걸린 적도 있었지. 엄마가 무면허인 상태였으니까." "오호! 그래서?" 무용담을 듣는 듯 아이들의 눈이 반짝인다. 경찰은 내 기억에 없는 인간이다. 그런 적이 있던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당신은 어찌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말하고 있을까. 차마 나는 기억 나지 않는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미소 지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을 잊고 살았던 걸까. 얼마나 많은 일들을 우리는 함께 지나왔던가. 사소한 오해와 원망들이 먼지처럼 쌓여 보석 같은 장면들을 가리고 있었나. 더께를 한 꺼풀씩 벗기는 마음으로 당신이라는 책을 읽는다. 몇 년 전만 해도 당신이 나의 글에 들어오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늘 같은 모습과 행동으로 머물고 있던 당신을 요즘에야 제대로 본다. 흐릿했던 마음의 거울이 점점 닦여가는 중일까.

밀대로 청소하는 당신이 안방에 오면 침대에 냉큼 올라가서 말한다. "구석구석 닦아주세요, 구석구석.(의역: 당신이 좋아요.)" 정말 문까지 뒤집고 구석구석 밀고 가는 당신에게 농담처럼 말을 건네는 순간이 나는 재밌다. 외출하려는 당신에게, "포도당과 과당과 신선한 비타민을 섭취하고 싶어요.(의역: 포도 사다 줄래요?)" 돌아오는 당신의 손에 꽃다발인 듯 포도송이가 들려있다. 흑백만 보이던 삶에 환한 빛이 켜진 듯 색깔로 물든 삶이 반짝인다, 이런 사람인 당신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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