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북꾸 에디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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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자주 떠올리는 자연물이 있다. 바다 위로 드러난 순백의 뾰족함 아래, 드러나지 않은 거대함을 가늠한다. 몸체를 지탱하지만, 결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영역 말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바다 밑으로 잠긴 빙하를 인간의 무의식에 비유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나를 지탱하나 결코 의식할 수 없는 영역이니 맥락이 닿는다.

꿈의 해석을 처음 접한 건 20대이다. 오랜만에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내가 좋아했던 것을 떠올린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리라. 당시 매력을 느꼈던 분야는 심리학이다. 자연 과학처럼 실험으로 증명하기에 어려운 면이 많지만, 이 또한 신비주의 연예인을 영접한다고 여긴다.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선물 포장을 벗기는 것만으로 두근거리는 아이가 되어 책장을 넘긴 기억이 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소설판꿈의 해석이다. 프로이트가 언급한 의식, 전의식,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소설로 구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물론 나만의 해석이다. 하루키는 한 존재의 정신 영역 전체를 가시적으로 묘사하려 한 듯하다. 바다 밑에 잠긴 빙산의 부분까지 말이다. 해수면을 기준으로 빙산의 영역을 구분해도 본질은 결국 하나의 덩어리이다. 같은 맥락으로 한 존재는 속성에 따라 구분된 정신세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은 대조적인 두 영역을 상징한다. 첫 번째, 평범한 현실 세계는 의식의 영역이다. 두 번째, 비현실적 세계로 묘사되는 '도시'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두 영역의 경계에는 불확실한 벽이 존재한다.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모양도 바뀌고 견고함도 달라지는 몽환적인 벽이다. 벽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있다는 전의식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출렁이는 바다 밑으로 잠겼다 드러남을 반복하는 빙산의 영역처럼.

처음부터 작가의 빅 픽처가 그려지는 건 아니다. 1부는 10대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에 대한 시적인 묘사로 포문을 연다. 풋풋하고 섬세한 문장이 잔잔한 물결로 흐른다. 소녀를 향한 순수가 고스란히 투영되니 문장을 따라가는 나의 심장도 덩달아 투명해진다. 간결한 시를 느슨하게 풀어나가는 문장이 그림을 그린다. 같은 공간 속에 나란히 앉아 있는 시간, 그들의 세계에는 서로의 이름조차 무의미하다. 기억만이 선명할 뿐이다.

차례 이전에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 쿠블라 칸이 등장한다. 드러나는 심상이 본문의 분위기와 닮아있다. 몽환적으로 그려진 대서사시의 일부. '땅 아래 암흑의 바다'가 무의식의 정체성과 겹쳐진다. ‘도시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소설에는 안개가 스멀스멀 스며든다. 현실의 색채가 흐릿해지고 주인공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든다. 끝까지 읽고 전체적인 얼개를 그려보면 소설의 진가가 드러난다. 모든 퍼즐이 완성되는 순간, 안개가 싹 걷힌다.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일관되게 ''로 서술된 건 심오한 의도가 담긴 설정이다. 이 책 한 권은 주인공의 정신세계 전체를 상징하니 ''는 나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다. 다만 주인공은 하나의 본질을 가진 두 명이다. 한 명은 의식의 영역에 있는 '', 다른 한 명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나이면서 내가 모르는 나, 무의식의 존재를 의식과 구분하여 어떻게 묘사한단 말인가.

공간적 배경에 배치한 인물 설정을 보며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이러한 속성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그림자'를 설정하다니! 나와 떨어지지 않고 늘 함께하지만 온전한 나라고 말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게다가 작가는 그림자를 본체와 분리한다. 그림자와의 분리가 새삼스럽지는 않다. 이미 우리는 피터 팬이 옷장 서랍에 두고 온 늘어진 그림자에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자의 본질이다.

하루키는 그림자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림자는 뒤에서 나를 따라다니는 존재이므로 무의식의 범주에 넣기 쉽다. 작가는 여기에서 반전을 꾀한다. 대다수가 앞을 볼 때 뒤로 돌아 빛을 등진 채 어둠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자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그는 분신인 그림자를 의식의 영역에, 진정한 자아를 무의식의 영역에 배치한다.

 

무심코 하는 행동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나도 몰랐던 모습이 진정한 자아를 반영할 때가 많다. 거짓 표정과 말을 지어내도 무의식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최면 요법으로 진실을 알아내는 이유도 대게는 비슷하리라. 진실이 담긴 공간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마음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종종 멈추어 서서 마음과 꿈과 욕구를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에 진실된 내가 있으므로.

'도시'의 도서관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꿈들이 먼지에 덮인 채 있다. 무의식에 있는 ''의 꿈이기에 그 꿈을 읽을 자격은 내게 있다. ''만이 꿈 읽는 이가 되어 오래된 꿈을 펼쳐볼 수 있다. 소녀는 에게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존재를 알려주고 사라진다. 이윽고 40대가 된 ''10대의 설렘을 주고 사라져 버린 소녀를 찾아 도시로 들어간다. 그곳에 소녀가 있다. 모습은 같지만 ''를 모르는 존재이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식이 필요하다. 첫째,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버리는 것. 둘째, 눈에 상처를 내는 것. 도시로의 입장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 가정해 본다. 그림자를 버리는 건 가식을 버린다는 의미로, 외부 세상을 볼 수 있는 수단을 차단하는 건 올곧게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목적이라 여긴다. 1부의 주체는 그림자를 ''라고 지칭하는 ''이다. 도시에서 불필요한 그림자는 그림자 쉼터에 있다 시간이 흐르면 죽어버린다.

 

분침과 시침이 없는 디지털시계를 사용하면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도시'의 시계에는 바늘이 없다. 시간은 흐르지만, 오직 현재뿐이며 모든 것이 덮어 쓰이고 갱신된다. 흐름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시시각각 시간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하루를 떠올린다. '도시'의 시간을 상상하니 호흡이 점차 느려진다. 너무 빨리 뛰어온 건 아닐까. 산책하는 심장의 속도로 오랜 꿈들을 꺼내어보며 조금은 천천히 걸어갈 수도 있을 텐데.

작가가 묘사하는 도시를 상상하는 동안 나의 시곗바늘은 느려진다. 일상에서 발생했던 불편한 마음이 섬세한 진동으로 잦아들며 마음이 느슨해진다. 하루키 문장의 매력이 이런 모습일까. 억지스럽지 않고 따라가는 이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면모가 있다. 구멍이 송송 뚫린 듯해도 어느 순간 공기층을 머금어 포근하게 목을 감싸는 털목도리 같다. 시적인 표현 역시 책의 무게에 부력으로 작용한다.

이 책을 읽으며 시간의 상대성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첫사랑 소녀에 대한 기억에서 소년의 시간은 멈춘다. 얼핏 사랑이 주를 이루는 듯하지만 작가가 건네는 메시지에는 사랑을 포함한 인간의 삶이 담긴다. 필요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시'에 시곗바늘이 없다는 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작가는 마음속에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 시간도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며 무의식의 영역을 암시한다.

 

1부의 무대는 '도시'이며 주인공은 ''. 내가 도시로 들어오기까지의 배경을 설명하며 현실과 도시가 번갈아 전환된다. 그림자는 아직 정체성을 부여 받기 전이다. 도시로 입장할 때 분리되어 서서히 죽어가던 그림자는 본체를 설득해 탈출을 시도한다. ''는 불확실한 벽 앞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이 도시에 남을 것인가, 저 세상으로 갈 것인가. 결국 ''는 도시에 남겠다는 선택을 하고 그림자만 내보낸다. 새로운 국면의 전환이다.

2부의 무대는 도시 밖 현실 세계이며 주인공은 도시 밖으로 나간 '그림자'. 그는 이제 내가 되어 살아간다. 본체가 도시에서 매일 오래된 꿈을 읽는 동안, 분신인 그림자는 ''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닌 채 ''로 살아간다. 어차피 둘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존재이니. 그는 스스로 그림자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도시의 스위치는 잠시 꺼지고 현실의 전원이 들어온다. 시골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된 ''는 세 명의 인물과 서사를 이룬다. 첫째, 인물이라고 칭하기 애매한 전임 도서관장 고야스 씨의 유령이다. ''는 이미 비현실적인 '도시' 체험자이므로 위화감은 없다. 멘토와 멘티처럼 대화가 오간다. 둘째, 엘로 서브마린 점퍼를 입고 매일 도서관에 드나들며 책을 읽어 치우는 서번트 증후군 소년이다. 셋째, 고야스 씨의 무덤을 들렀다 오는 길목에 있는 카페 주인이다. ''의 마음에 새로운 봄꽃을 피우는 여성이다. 이들 중 나의 시선을 당기는 캐릭터는 앞의 두 존재이다.

 

고야스 씨의 영혼은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서브마린 소년과 먼저 라포를 형성한 사람도 생전의 그이다. 주인공이 그의 무덤에서 한 독백을 듣고 소년은 '도시'를 꿈꾸기 시작한다. ‘서브마린이란 별칭도 잠재적인 사물을 연상하게 만드니 사소한 별칭까지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고야스 씨의 무덤을 찾으면서 카페 주인 여성과의 인연이 시작되니 삶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중심에 죽음의 상징이 있는 셈이다.

죽음 이후 존재의 흩어짐을 생각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동급이며 우주의 에너지는 보존된다니, 육체를 이루고 있던 물질은 분해가 되어 다른 무언가로 변한 다음 흩어질 터이다. 지구 중력장의 영향을 받으며 세상 어딘가를 여행하리라.

영혼도 중력장의 영향을 받을까. 육체처럼 흐트러지거나 다른 무언가로 변할까. 속성이 다르니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우주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까. 문학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령처럼 지구 어딘가에 붙들려 있을까. 혹은 인간의 가청 진동수를 넘어서는 초음파가 존재하듯 가시 범위를 넘어선 형태로 머물고 싶은 장소를 서성이고 있을까.

소설 속 유령의 모습을 보며 예전에 했던 상상을 떠올린다. 영혼의 모습은 육체의 그것과 동일할까. 나의 영혼은 육체와 얼마나 닮아있을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다른 형상을 지닐까.

 

서브마린 소년은 육체와 영혼의 모습이 확실히 다른 듯하다. 3부에는 '도시'로 들어와 주인공과 역할 분담을 하며 꿈을 읽는 소년이 등장한다. 서번트 증후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신규 때 한 아이를 만났다. 교사 이름과 세계의 수도를 기가 막히게 맞추던 아이였다. 나는 다만 지켜볼 뿐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묘한 시선으로. 지금도 주로 지켜보는 일밖에는 할 수 없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시선으로 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소설 속 ''와 소년과의 대화 장면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현실 세계에서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말하지 않던 아이가 '도시' 안에서 주인공 ''와 대화를 나눌 때는 더없이 유려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책을 읽어 탄탄한 의식을 지닌 아이의 영혼은 심지가 굳다. 부족해 보이는 모습은 의식적인 세상에서만 비추어지는 모습이었던 거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주인공에게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마음과 의식은 다른 곳에 있으며 본체나 그림자가 어느 쪽에 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니 분신을 믿는 건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 결국 진짜 '''그림자'가 있는 현실 세계를 향하여 '도시'를 떠난다. 의식과 무의식의 합체를 예상할 수 있는 완벽한 결말이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상대가 나에게는 글이다. 노트북 앞에 앉기 전까지는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 불완전한 문장이 될지라도 그저 한 발을 내딛는 용기를 낼 뿐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과감하게 한 발을 디디면 낭떠러지 건너편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나타나는 장면처럼. 막연한 믿음이 있다. 빈 문서 1을 앞에 두면 무슨 얘기든 털어놓으리라는 것을. 감정의 미세한 울림을 읽고 글을 준비하고 있는 무의식 속의 나를.

책의 내용에 공감하든 아귀가 맞지 않는 듯 삐걱대든 일단 정독한다. 문장이 좋아도, 문장이 좋지 않아도, 모든 문장을 좋아라 하실 문학계의 도깨비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간중간 과속방지턱을 마주친 듯 멈춘다. 책 밖으로 흘러나와 나에게 닿는 문장들을 메모하며 작가의 세상을 걷는다. 나를 통과하여 이윽고 세상에 없던 단 한 편, 나의 글이 흘러나올 때까지.

나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오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보며 종종 전율한다. 내가 제일 잘 나간다는 자만이 아니다. '이런 문장들이 나의 무의식 안에 있었구나'라는 의외의 발견에 가깝다. 무의식의 공간에 혼재되어 있다 적당한 시기가 되어 흘러나오는 문장들이 나는 좋다. 나는 무의식의 나를 가장 알고 싶은 최애의 독자니까. 내가 나비의 꿈을 꾸든 나비가 나를 꿈꾸든, 내가 글이 되든 글이 내가 되든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어차피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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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는 인류 - 인구의 대이동과 그들이 써내려간 역동의 세계사
샘 밀러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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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콜처럼 듣는 노래가 있다. 이 사람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10여 년 전 영상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 공부하듯 그의 영상을 탐독하는 중이다. 풍문으로는 일찍이 들었지만, 전혀 새로운 연예인을 영접한 소녀마냥 요즘 나는 한 사람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는 중이다. 수많은 조회수에 N분의 1로 일조한 인간의 글을 읽고 계신다.

빠른 템포, 강력한 비트에 파워, 파워, 파워, 파워 한 단어만 들리건만 가사 해석을 보니 평범하지 않다. 도입부에 언뜻 지나가는 위버멘쉬의 세계관이 리듬을 타고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자신만의 가치로 나아가는 사람, 삶의 고통을 느끼지만, 매번 자신을 극복하려 애쓰는 사람. 심장에서 빅뱅이 터진 듯 지드래곤은 이렇게 청룡의 해가 끝나갈 무렵에 내게로 온다.

 

생명체에도 빅뱅의 순간이 있었을까. 이미 펼쳐진 상황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온통 상상이다. 까마득한 언젠가 최초의 순간은 분명 존재했으리라. 우주의 탄생이 빅뱅에서 시작되었듯이.

과학에서 우주 탐사는 인류의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며 인간의 본질적인 지적 호기심을 언급한다. 그래, 그냥 궁금하니까. 보이는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도 이런 모습일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할지 그저 궁금하니까.

인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간혹가다 근원적이고도 근원적인 문제를 별생각 없는 듯 툭 질문하는 학생이 있다. 과학적인 매뉴얼을 따라 최초의 생명체까지 거슬러 카더라이론을 말해주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최초의 인류도 근본적인 호기심을 안고 다른 땅을 향해 걸어갔을까. 샘 밀러의 이주하는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류 역사를 중심으로 느린 빅뱅을 재현하듯 이동하는 인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책이다.

인간이 본래 정주성을 추구한다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주라는 안경을 쓰고 인류 역사를 해석한다. 이주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파란만장한 사건 안에 존재하던 이주민의 모습을 세밀한 시선으로 그린다.

작가가 정의하는 이주민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겨간 사람이다. 같은 사람인데도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으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다. 석고상을 데생할 때 각기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처럼.

 

이주민을 떠올리면 유화물감을 섞는 장면이 연상된다. 원주민과 이주민의 문화가 융화되는 장면이 겹쳐서이다. 바로 섞이지 않고 겉도는 시간을 거치다 서서히 섞여 들어가면 융합된 문화가 재탄생하리라.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조차 무의식의 영역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자리한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이주의 이유는 다양하다. 직관적으로는 경쟁자를 피해, 기후 변화로 인하여, 먹이를 찾아서라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여기에 작가는 모험심, 호기심,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본능을 언급한다. 이주가 본능이라니!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DNA에는 이주라는 카테고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거다.

 

한 달여 전, 인류의 DNA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터넷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네안데르탈인들도 탄수화물 좋아했네라는 제목의 뉴스이다. 고대 인류 68명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80만 년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게도 탄수화물을 분해하는 소화 효소인 아밀레이스를 만드는 유전자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탄수화물을 사랑하는 본능이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는 해석이다. 빵을 먹으며 이 글을 쓰는 나의 행동이 꽤 뿌리 깊은 기원을 품어왔다니 묘한 기분이다.

아프리카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인류의 DNA를 상상한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아프리카 땅덩어리의 모양이 인간의 뇌를 닮았다는 우연에 필연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고 싶어진다.

 

언제부터 우리는 기록에 의존하기 시작했을까. ()의 세계는 신비롭다. 언어나 문서가 당연히 없던 과거의 장면,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상상하는 건 그 자체로 매력적인 모험에 뛰어드는 행위이다.

육지 포유류 중 쥐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동물도 그렇게 온 지구를 돌아다니지 않는다던데, 우리의 이동 욕구는 본능적이라고 여겨도 될까.

DNA의 연결성을 인지하니 멸종이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종족이라니! 네안데르탈인과 나까지도 빵으로 연결된 사이인데, 어쨌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작가는 이주에 대하여 언제어떻게보다 그랬을까에 집중한다.

 

야간(Yaghan)족은 초기 이주민 중 가장 멀리 이동한 종족이다. 아프리카로부터 남아메리카의 꼬리 끝까지 걸어서 하늘까지 진출할 기세로 나아간다.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2022년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야간족은 멸종된다. 저자는 혈통보다 문화를 잃는 것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고 말한다.

네안데르탈인, 사피엔스, 유대인, 아메리카 인디언,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아리아인, 로마인, 반달족, 아랍인, 바이킹, 타이노족, 아프리카 노예, 황인종, 시오니스트, 난민, 무지개 부족, 이주 노동자, 멕시코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문화를 상상한다.

수많은 역사와 함께 꽃처럼 피고 지는 다양한 문화를 목도한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1970년대에서 멈추었다고 말한다. 이주민에 대한 지배적인 역사적 인식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권장하기 위한 목적이라 밝힌다.

 

역사적 인식은 자세히 들여다보았으나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전개로 공중에 떠다니는 꽃가루처럼 나의 의식은 방황을 거듭한다. 역사, 인물, 지명이 워낙 많이 등장하여 경이로운 인내심으로 정신없이 검색하다 보니 맥이 끊어진다. 하아. 배경지식 빈곤자의 한계인가.

끝내 지인 찬스를 써서 중학교 사회과 부도를 득템한다.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부교재이다. 인터넷 검색이 이보다 더 디테일할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절뚝절뚝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인내심의 배터리는 바닥이 나고 만다. 맘 편하게 대륙별로 펼쳐서 국가와 대도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질한 시골 지역은 온라인 지식백과와 병행하는 절충안을 택한다. 내용은 역사적 흐름 따위는 무시하고 인상깊은 장면만을 발췌하여 흡수하기로 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프리카인들의 이주에 얽힌 이야기이다. 아메리카로 실어 나르던 전형적인 노예선의 그림을 보니 소름이 돋는다. 무늬인가 싶은 그림은 자세히 보면 사람이다.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그림 위로 인간의 탐욕과 잔인함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화물도 이토록 치밀하게 쌓기는 어려우리라. 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그림 앞에서 전율이 인다. 노예 제도는 부당하다며 글자로만 인지하다 이미지로 보니 갑자기 줌인이 된 카메라 속 영상을 접하는 듯하다.

조선 시대 양반 제도가 등장하는 드라마 장면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였던 순간을 떠올린다. 꽃미남 도령에게나 눈길을 주었지, 마당쇠나 돌쇠는 BGM처럼 당연하게 여기며 그 역시 존귀한 인간임을 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망각 폴더에 담겨있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오랜만에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여러 나라와 도시 이름에 나의 동공은 흔들린다. 무의식 어딘가에는 나라의 위치가 분명 새겨져 있을 텐데. 여행 노선처럼 이주민의 이정표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 답답해진다.

사회과 부도가 새의 날개처럼 좌우로 수십 번 펄럭인다. 세계 전도를 시작으로 서남아시아, 북부아프리카, 유럽, 동남아시아, 남부아시아, 동부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곳곳을 손가락으로 여행한다.

기이한 현상이다. 분명 훑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지명이 정확한 위치를 검색하고 나서 확인하면 다시 보이니. 투명 망토에 가려져 있다 짠 나타나는 것처럼 발견하고도 신기해서 몇 번을 바라본다.

 

발견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목소리가 큰 사람이 권리를 획득하는 걸까. 기실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스의 발견이라고 하기에 애매하다. 이미 그곳에 원주민이 있는데 무인도도 아닌 땅을 발견이라고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세상의 중심은 힘이 있는 자들을 기준으로 정해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북부아프리카 나라들의 경계를 보니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오른쪽 경계처럼 리오그란데강의 굴곡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울퉁불퉁한 땅덩어리를 직선으로 나누었던 정복자들과 그 땅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힘에 밀려 강제적 이주민이 되어야만 했던 삶을 가늠해 본다. 이주 DNA가 본능이라면 그래서 이주가 이루어지는 거라면 그건 자유 의지를 동반하는 행위여야 하건만.

 

남부 아프리카 출신의 쿵족 유목민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왜 농부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세상에 몽곤고 열매가 이렇게 많은데 왜 굳이 심어야 하나요?”라 말했다나.

철새는 자유롭다. 추위를 피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강제성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생명체이다.

냉난방이 안 돼요.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이 상해요. 밤에 게임도 못 해요.” 전기가 없다면 어떤 점이 불편한가라는 질문에 오가던 대답이다. 농사뿐 아니라 문명의 발달 역시 인간을 정주하게 하는 요인이다. 만일 과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본능을 따를까. 따뜻한 곳으로 떠나는 철새처럼 자유로운 이주민의 삶을 살았을까.

 

세상에 떠밀려 반강제적으로 이주했다가 자유 의지로 무장한 채 돌아온 사람의 표정이 이와 비슷할까. <홈스윗홈>의 힘찬 비트에 마음이 들썩인다. 즐거운 나의 집, 원하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지드래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팬이 아니었으면서도 심장에 부드러운 뭉치가 굴러다닌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으로 랩을 쏟아내는 공연 장면을 몇 번이나 재생한다.

우리가 원하는 곳에 살 권리라는 문구는 읽는 것만으로 설렌다. 장소뿐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하는 중력이 끌어당기지만, 도전과 꿈이 새겨진 DNA가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면 나는 자유로이 홈스윗홈을 향해 떠날 수 있으리라. 세계지도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세계를 누벼본다. 손끝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스며든다.

 

 

p87, 각주 : 프랑스 본토를 의미는 ~ 의미하는

p98, 11째 줄: 사슴나 사슴이나

p231, 7장의 제목 중 메이플라워 호클로틸다 호(마지막 노예선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클로틸다 호가 더 적절한 제목이라고 판단됨)

p276, 10째 줄: 바나라시 바라나시

p414, 8째 줄: 뒤쫏는 뒤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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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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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욱! 헛구역질은 계속 나오는데 차가운 감촉의 검은 줄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옆으로 누운 채 눈물, 콧물 질질 흘려가며 영겁의 시간을 견딘다. 이보다 더 찌질할 수 없는 몰골이었을 게 분명하리라. 그토록 길게 느껴지던 시간이 저스트 텐 미닛이라는 사실을 알고 상대성 이론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의무적인 건강 검진만 아니라면 하고 싶지 않은, 위내시경 검사의 기억이다.

제발 그만 들어오라며 자꾸 밀어내는 몸의 반응을 전혀 개의치 않는 부드러운 곡선의 직진이여! ~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순간적으로 몸이 부르르 떨린다. 고통에 소심했던 나는 그전까지 줄기차게 위장 조영 검사를 선택한다. "간접적으로 그림자만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눈물을 머금고 시도한다. 상상 그 이상의 체험은 치과나 산부인과를 제치고 워스트 넘버 원으로 등극한다.

 

이 책을 읽으며 위내시경 검사의 기억이 겹친 이유를 곰곰 생각한다.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던 이물감 때문일까. 내 안을 구석구석 파헤치며 출혈이 발생한 부위를 영상으로 보여주던 장면 때문일까. 고상한 이성으로 포장하려 해도 제어되지 않던 눈물과 콧물의 민망한 흐름 때문일까.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한강 작가의 문장을 마주하며 당황스러웠다. 한 번쯤 떠올려보았던 은밀한 상상을 들킨 듯 가슴이 일렁였다. 그녀의 글은 작정하고 파고들어 오는 내시경의 검은 줄처럼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금기의 풍선을 툭툭 터뜨린다. 외면하고 싶지만, 언제까지 보기 좋은 그림자들만 볼까 싶어 정면으로 도전해 본다. 담담하지만 뜨겁고 붉은 문장이다. 그 안에 담긴 이성은 냉철하고 몽고반점의 푸른 빛에 가깝다. 찌르는 듯한 아픔도 아닌 것이 내내 답답하게 얹혀 거북한 고통이 심장을 파헤친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지닌 연작 소설이다.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 불꽃>의 이야기가 독립된 작품으로 기능하면서 전체적으로 연결을 해도 한 편으로 어우러지는 시리즈물이다. 주인공 영혜와 연결된 가족 구성원의 서사에 각각 핀 조명이 비추어진다.

처음에 차례를 보았을 때는 <채식주의자>를 표제작으로 한 소설집인가 여긴다. 조금 읽다 65쪽 뒤의 여백을 보며 당황한다. 뭐야. 이게 끝? 열심히 달리다 갑자기 낭떠러지를 만난 허탈함. 한참 몰입하던 연극에 갑자기 막이 내려진 기분이랄까. 멍하니 앉아 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을 보다, 남아있는 책장들을 뒤적인다. '영혜'라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한다. 뒤이어 책 표지를 보고 '연작 소설'이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 아직 끝나지는 않았구나. 살짝 안도의 숨을 고른다.

 

<채식주의자>의 주요 화자는 일인칭 관찰자의 시점을 가진 영혜의 남편이다. 영혜는 중간 중간 기울어진 이탤릭체의 독백으로 ''의 마음을 서술한다. 어느 날 꿈을 꾼 영혜는 채식주의를 표방한다. 또한 집안뿐 아니라 사회적인 모임 자리에서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소설은 영혜의 변화로 인한 에피소드를 남편의 시각에서 서술한다.

사회적 통념을 거스르는 사람을 향한 폭력성은 의외로 완고하다. 육식주의와 브래지어 착용을 은연중에 디폴트 값으로 설정하고 이에 반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여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낸다. 같은 인체 구조를 지녔음을 뻔히 알면서도 노브라를 '꼭툭튀'라며 민망해한다. 20대까지는 잘 때까지도 브래지어를 착용했던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시선을 지닌 채 살아왔다. 채식주의자의 반대말은 육식주의자이지만, 우리는 전자에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하여 명명한다. 무슨 대단한 신념이라도 있어야 채식주의를 고수할 수 있는 듯 여긴다.

 

음식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섭취해야 하는 에너지원이다. 의복 역시 몸을 가리고 보호하는 게 일차적인 기능일 터이다. 삶이 각자의 몫인 것처럼 무엇을 먹거나 입든 엄밀하게 말하면 타인이 관여할 영역은 아니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답답해서."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하는 영혜를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다.

채식주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강요와 폭력성은 주위의 냉소와 함께 영혜의 부모를 통해 직접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아버지는 영혜의 뺨을 때리고 억지로 몸을 붙들게 하여 입을 벌리게 만든다. 어머니는 흑염소를 한약이라 속이며 억지로 먹이려 한다. 딸에 대한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감쌌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질적으로는 강요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스스로 몸을 자해하는 행위뿐이다.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상의를 벗은 채 작은 동박새를 이빨로 물어뜯은 듯한 마지막 장면은 세상을 향한 처절한 항변이다.

 

장면이 바뀐 두 번째 이야기의 문을 열고 주춤한다. 엄훠?! 두 손가락을 벌려 눈을 가리는 훼이크를 취한 뒤 그 틈새로 초집중하여 보았을 장면이 듬뿍 들어있는 게 아닌가. 젊었을 때 읽었더라면 은밀하게 몇 번이고 책장을 넘기며 복기했으리라. "옷을 벗어." 크헉!! 순간, 숨을 멈춘 채 흔들리는 나의 동공. 내가 좋아하는 야시시한 문장들이 '여기가 19금 맛집일세'라며 대기를 타고 있다.

<몽고반점>에서 영혜를 관찰하는 이는 형부이다. 비디오 아트를 하는 ''는 아내로부터 처제의 왼쪽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예술적인 영감과 동시에 성적인 욕구를 느낀다. 그는 영혜가 지닌 식물성에 매혹된다. 그녀의 몸에 꽃을 그리고 또 다른 남자 후배의 몸에도 꽃을 그린다. 꽃과 꽃이 만나는 장면을 완성하고 싶었던 그는 결국 다른 화가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려 넣은 다음, 금기의 경계를 넘는다.

 

꽃은 생식 기관이다. 햇살을 향해 야들야들한 꽃잎과 한들한들 바람에 흔들리는 암술과 수술을 대놓고 드러낸다. 누구도 이 장면을 보고 부끄럽다거나 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아담과 이브가 최후의 보루로 나뭇잎 아래 감추었던 부위를 드러내는 장면인데 말이다.

<몽고반점>은 꽃과 인간의 생식을 묘하게 결합한 소설이다. 부분과 전체가 다른 느낌을 준다. 뭉텅뭉텅 끊어서 보면 분명 야릇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면 슬픔과 환희가 어우러진 허무가 배어 나온다. 소설 속 그가 영혜의 몸에 꽃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하면서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느낀 것처럼.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이라는 문장들이 들썩이던 동요를 잔잔하게 만든다. '단단한 고독'이라는 문구에서 고독의 질감을 상상한다.

 

세 작품의 주인공은 과연 영혜였을까. 세 번째 이야기 <나무 불꽃>을 읽으며 관점이 서서히 달라짐을 인지한다. 어쩌면 소설의 주인공은 이 모든 폭력을 지켜보며 거센 파도를 감당해야 했던 영혜의 언니, 인혜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소설의 화자인 '그녀'는 영혜의 언니이자 <몽고반점>에서의 ''의 아내이다. 모든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경계를 뚫고 달려 나간 동생과 남편의 일을 복기하며 그녀는 허무한 물음표를 날린다. '막을 수 없었을까, 만약에 ~였다면'.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다만 견뎌왔을 뿐이라는 문장에 마음이 아프다.

남겨진 사람, 이 모든 일들을 견뎌야 하는 사람, 미쳐버린 동생을 차마 외면할 수 없던 사람, 아이를 두고 죽음을 택할 수도 없는 사람, 훌훌 떠나버릴 자유조차 의무에 박제되어 버린 사람이다. 어쩌면 꿈인지 모른다며 세상을 향해 독백하는 그녀의 담담한 말이 따끔따끔하다.

 

나무가 왜 불꽃일까. 제목을 보며 가졌던 의문이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장에서 풀린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이토록 동물적이면서도 시적인 묘사가 식물을 대상으로도 가능하다니! 몇 번이나 눈으로 더듬으며 감탄한다.

작가 한강에게 식물은 동물만큼이나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인가. <나무 불꽃>에서 영혜가 물구나무를 서며 나무가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고 한 말 역시 식물을 동물인 듯 묘사한 문장이다. 생식 기관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꽤 일리가 있는 발상이다. 뿌리 역시 짧게 갈라진 발가락보다는 길게 뻗을 수 있는 팔 끝, 손가락에 비유하는 게 더 어울리는 듯하다. 축축한 나무껍질의 감촉을 느끼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만났음을 인지하는 작가의 감성이 이런 섬세한 작품을 탄생시켰으리라.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하고 지내왔던 생각들 속으로 작가의 문장들이 위내시경 검사를 하듯 계속 밀려들어와서였기 때문이다. 식물처럼 섬세하면서 집요하게 마음을 결을 더듬었기 때문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야기 속에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무심코 주변에 휘둘렀던 폭력을 되짚어본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했던 시간을 뒤적여본다.

부드러운 곡선이 직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시경 검사를 통해 알았다. 이제는 자고 일어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가 되지만 가끔 그때의 경험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시경 검사를 하듯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는 작가의 문장에서 동물적인 식물의 이중성을 감지한다. 뾰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직선이다. 불현듯 생생하게 떠오를 듯한 감각이다. 따끔거리는 통증 속에서 한 꺼풀 외피를 벗은 나의 영혼이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일까.

 

p11, 밑에서 9째 줄: 친구 들의 친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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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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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녀가 따로 없다. 오른손엔 집게, 왼손엔 밥숟가락을 든 지 30분째다. 집게로 건더기를 포착해 숟가락 위에서 살과 가시를 분리하는 중이다. 군산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도 모자라 광어 서너 네댓 마리를 들통에 손수 고아 광어 지리를 만들어준 초보 낚시꾼. 남은 국물에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말에 어부의 아내로서 본분을 다하는 마음으로 맑은 탕에서 가시를 골라낸다.

늘 그렇듯 시작은 사소하다. 새끼손가락만 한 척추 가시 토막만을 휘휘 골라내고 나머지 잔가시는 입으로 발라내며 먹으면 그만이다. 도구를 들었을 때 한 생각이다. 한데 골라낼수록 더 골라내고 싶은 거다. 완벽주의병이 도지는 바람에 지 발등을 지가 찍어버리는 무모함으로 개고생을 자처한다. 은근한 성취감까지 느끼던 아내는 매의 눈을 장착한 채 장인 정신을 발휘한다. 비루했던 맑은 탕이 추어탕 비주얼로 환골탈태한다.

멀리서 볼 때는 번거로울 가족을 위해 이보다 정성스러울 수 없는 마음으로 가시를 골라내는 가족 사랑의 표본이다. 알고 보면 자기만족을 위해 이루어진 작업일 뿐이다. "당신의 소중한 입을 위해 이토록 정성스레 발라버렸떠염~" 아름다운 멘트로 포장하며 본래 의도를 완벽하게 숨긴다. 삶의 아이러니.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다. 때로는 진실보다 적절한 거리 두기와 결합한 숨바꼭질이 삶에 유용하지 않을까. 사악한 의도가 아니라면.

 

새의 선물은 삶과의 거리 두기를 유지하는 30대 후반의 여성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성장 소설이다. 여섯 살 때 어머니는 자살하고, 아버지가 도망가는 바람에 주인공 진희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란다. 아이는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조숙한 시선으로 자신과 주변의 삶을 관찰한다. 소설은 12세 진희를 일인칭 관찰자로 설정하여 액자를 들여다보듯 1960년대 시골 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묘사한다.

스스로의 삶까지도 관찰하는 아이는 자신을 둘로 분리하여 사고한다. '보여지는 나''바라보는 나'이다. '보여지는 나'가 삶을 이끌어가면, '바라보는 나'는 관찰한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방식으로 삶으로부터 다가오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한다. 얼핏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관점은 오히려 삶 속으로 과감하게 파고 들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바라보는 나'는 담담하게 자신과 얽힌 주변인들의 삶을 묘사한다.

어른 아이는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리 두기로 대상을 바라본다. 주인공 진희의 캐릭터는 MBTI의 전형적인 T 유형이다. 상황 판단이 명확하다. 감정을 개입하지 않고 판사처럼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조함은 때로는 당황스러운 웃음을 유발한다. 몰래 숨기려는 의도는 진희의 레이더에 포착되면 햇빛에 노출되듯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게 오히려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로 작용한다. 뽀송뽀송 마른 빨래를 만지듯 개운한 느낌마저 안긴다.

 

공간적 배경은 한 울타리에 살면서 마당에 있는 빨래 바지랑대를 공유하는 집들이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주인집, 세 들어 사는 장군이네집, 네 칸으로 이루어진 가겟집이다. 마당 중앙의 우물을 둘러싸고 진희, 이모 영옥, 외할머니, 삼촌, 장군이 모자, 최선생님, 이선생님, 광진테라 양복점 부부와 어린 아들, 뉴스타일 양장점 미스 리가 살아간다. 아이는 이들의 서사를 번갈아 펼치며 여성으로서의 삶과 사회적인 부조리를 고스란히 뒤집어 보인다.

시대적 배경에서 중간중간 화석처럼 튀어나오는 낱말이 고리가 되어 번번이 나를 어린 시절로 데리고 간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사물들에 대한 개념이 배경지식으로 장착되어 있으니 2차원 문장이 3차원 동영상으로 머릿속에 재생되는 기현상을 경험한다. 덕분에 훨씬 실감 나는 장면으로 작가가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맛을 음미한다.

국민학교 때 다른 지역에서 전학 온 친구의 소개로 주고받던 펜팔, 3월이면 하얀 달력 종이를 잘라 겉표지를 쌌던 새 교과서, 손 편지, 환경미화 심사, 빨랫줄, 우물, 석유풍로, 형광등에 달린 끈, 가정의례준칙, 다락, 자석 필통, 고무 인형, 빨간 때수건, 송충이, 혼식 검사, 신작로, 연극, 아플리케 스티치, 책받침, 띠기, 책보, 국민교육헌장, 주번, 토요일 등교, 홑청, 요강, 변소, 마당을 제시어로 딸려 오는 먼지 쌓인 기억들이 들썩임을 반복한다.

 

세 들어 사는 집 이야기를 접하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똑같은 전세여도 독채 전세에 살기를 꿈꾸던 시절, 주인집과 공유한 마당이 있던 시절, 아파트에 살아보는 게 꿈이던 시절, 커다란 솥단지에 씻을 물을 데워 사용하던 시절이 스냅 사진처럼 지나간다. 소설 속 집 한가운데 존재하던 우물처럼 그 시절 한가운데 나의 어머니가 있다. 뜨거운 솥단지의 물에 데였던 당신의 모습은 빛바랜 기억 가운데 또렷하다.

시린 새벽 다섯 시를 연탄불에 올리셨다 / 어두운 밤 한껏 품고 출렁이는 물을 담아 / 커다란 솥 한가득 데워 하얀 아침 건네주셨다 // 걸레 꽁꽁 얼던 방안 코끝까지 덮은 이불 / 부스스 눈뜬 아침 모락모락 김 나는 물 / 한 바가지 찬물과 섞어 따뜻하게 세수를 했다 // 뜨거운 물 나르시다 뜨거운 물 쏟아진 날 / 화들짝 부어올라 벌겋던 당신의 발등 / 당신 삶의 쓰라린 물기가 어린 기억에 내려앉아 / 녹지 않는 눈이 되어 가만가만 쌓인 걸까 // 시린 새벽 다섯 시에 하얀 아침 꺼내어본다 / 온수에 손 적시는 계절이 올 때마다 / 당신의 나날들을 종종 그러안는다 / 촉촉해진 눈으로 덴 듯한 심장으로 / 차가운 겨울 아침 뜨거움을 안는다 (제목: 뜨거운 겨울, 2017. 11.)

어떤 기억은 망각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걸까. 방금 한 말도 금세 까먹는데 하물며 국민학교 때의 일이건만 매번 선명하다. 시를 지어 박제를 해도 불쑥 솟구치는 온천물인 양 겨울이면 불현듯 심장 속을 부유한다.

 

춥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연탄불을 때는 아랫목에 앉은 기분이다. 고생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자식의 심장에는 따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온기가 스민다. '인생의 의미는 당신의 선물을 찾는 것입니다.' 파블로 피카소가 말했다던가. 이 책의 제목 '새의 선물'을 보는 순간, 그의 말이 떠오른다. '선물'일까. 완독한 지는 꽤 지났건만 제목과 본문과의 연결 고리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일주일가량을 보낸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전문)

꼴랑 세 줄을 이토록 이해하지 못할 일인가. 자크 프레베르는 왜 하필 프랑스 사람인가. 원문이 영어로 되어 있다면 더듬더듬 해석이라도 시도해 볼 텐데. 그가 지은 시의 제목에서 차용했음을 짐작해도, 차례 이전에 시의 전문이 제시되었어도, 심지어 KBS 뉴스의 인터뷰 글에서 은희경 작가의 설명을 직접 찾아 읽어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건 여전했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방점은 '어린 시절 감옥'에 찍힌다. 해는 해바라기 씨앗을 거절한다. 어린 시절 감옥, 자기가 원하는 것일 텐데도 이를 거부하는 삶의 태도가 주인공 소녀를 담아내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는 답변이다.

 

일주일가량 집착녀 모드를 가동한 결과, 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나는 선물에 방점을 찍고 싶다. 시의 문장을 아무리 곱씹어도 씨앗을 거절하는 상황 같지 않다. 씨앗을 거부한 게 아니라 씨앗이 감옥으로 들어갈 용기를 불러일으킨 계기가 된 건 아닐까.

감옥은 구속의 상징이다. 어린 시절과 감옥의 결합은 불우한 환경을 상징한다. 힘들었던 시절은 떠올리기조차 힘겨운 법이다. 힘든 기억은 종종 트라우마로 남아 어른이 되어서도 그를 괴롭힌다. 무의식의 저변에 가라앉아 있다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떠오른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시 속의 해는 제 발로 그곳으로 들어가 버린다. 끌려 들어간 게 아니라 능동성을 보이는 상황이다.

해를 바꾼 계기는 씨앗이다. 해만 바라보던 해바라기의 꽃잎은 시간이 흘러 다 떨어졌으리라. 멀리서 꽃잎이 사그라드는 것만 보던 해는 절망한다. 한데 씨앗을 받음으로써 다시 해바라기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이는 어린 시절을 마주할 용기로 연결된다.

아주 늙었다는 건 삶이 품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새는 자유롭게 공중을 날 수 있어 자유의 상징으로 비유된다. 삶의 자유가 가져다준 씨앗은 어린 시절에 해를 사랑했던 해바라기가 있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선물'은 예상치 못한 뭉클함이다. 이제는 당당하게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하라는 따뜻한 속삭임이다.

 

새로운 관점으로 책의 내용을 되감기 하니 책의 제목이 내용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된다. 어떤 글이든 작가의 일부는 담겨있으리라. 직접적인 경험이거나 다른 이의 경험을 공감한 것이거나. 시를 포함한 나의 글이 나를 묘사하거나 공감이 되는 드라마 속 인물이나 주변인의 삶을 담아내므로 100% 허구는 아닌 것처럼. 작가의 영혼과 공명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 문학 작품에 제일 먼저 감동하는 이는 작가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이 작품의 원제목이 '연애 대위법'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문학에서 대위법은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 이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연애사가 가장 많이 등장하니 얼핏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사랑보다 삶의 향기가 더 짙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는 것,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건 삶에 대한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거라는 것,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난다는 것,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는 것,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는 것.' 밑줄을 그은 문장들이 한결같이 삶의 과녁을 향한다.

 

삶에 대한 통찰력이 빛나는 문장들이 많다. 작가가 다시 붙인 제목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다. 은희경 작가에게 '새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감히 상상하건대 그녀에게는 작품을 탄생시키기까지 받았던 영감과 경험이 아니었을까.

소설 속 화자의 거리 두기를 통해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마주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용기를 얻었으리라. 여성의 삶과 가부장적인 가정의 모습과 사회적인 시선들을 그려냄으로써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는 통쾌함으로 어떤 이는 다른 길로 걸어갈 힘을 얻었으리라. 혹은 상처 입은 영혼이 이 작품을 계기로 희망을 품게 되었을지 모른다. 새의 선물이 릴레이로 이어지는 상상을 한다.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면 충분히 가능한 예측이다.

나에게 새의 선물은 무엇일까. 삶의 순간순간 많은 선물을 받아왔음을 깨닫는다. 끈끈한 가족애,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삶에 대한 긍정, 돈보다 훨씬 소중한 마음의 풍요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어린 시절에 나는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았다. 궁핍한 가운데 자그마한 책의 숲을 만들어주셨기에 글과 친숙한 벗이 될 수 있었다.

가장 큰 선물은 책을 좋아했던 소녀가 전해준 유전자이다. 이토록 기가 막힌 표현이라니! 자아도취성 문장이 튀어나올 때마다 유전의 영향력을 절감한다. 집착녀 기질에서 파생된 끈기 덕분에 나의 글은 나날이 창대해지는 중이다. 삶의 중력에 끌려들 때마다 글은 몽글몽글한 풍선이 되어 시린 바닥으로부터 나를 떨어뜨려 놓는 선물이 되었다. 풍선 안에는 당신이 불어넣어 주신 뜨거운 숨결이 있다. 나의 삶은 매번 지금처럼 따뜻해진다. 뜨거운 선물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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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 - 우리가 몰랐던 공공미술에 관한 이야기
홍경한 지음, 리모 그림 / 재승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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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니! 조각에 대한 멋진 정의를 들었을 때, 매끈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떠올린다. 바로 그가 이렇게 멋진 말을 한 장본인이라는 걸 아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는다.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구현해 낸 사람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머릿속에만 머물던 이미지를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탄생시키는 예술은 멋진 작업이다. ()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으로 향하는 화살표에 인간의 손길이 있다. 울퉁불퉁한 직육면체 비스므레한 덩어리였을 돌 조각을 그토록 멋지게 깎아내기까지 작가는 얼만큼 땀을 흘렸을까. 상상이 현실로 점차 모습을 드러낼 때, 흐르다 자유롭게 날아간 땀의 양만큼 희열을 느꼈을까.

거리가 3차원 캔버스인 양 돌과 나무와 철과 때로는 상상도 하지 못한 물질들로 거대한 예술을 구현하는 조각가들이 있다.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실사판인 양 거대한 조각상들 아래 소인국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온통 예술로 가득한 공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묻을 예술의 향기를 상상한다.

 

공공 미술은 '거리 곳곳에서 마주하는 조각들'을 말한다. 미술 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 전시기획자인 홍경한은 우리나라에 있는 길섶의 작품 15천여 점 중 38점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그가 작품을 선정한 기준은 심미성을 포함한 예술성, 작품의 가치, 작품에 새겨진 흥미로운 내레이션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조각, 삶과 예술의 하모니, 공공 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 등 3부로 구성하여 이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전시 기획을 하듯 배치한다. 더불어 저자는 큐레이터이자 도슨트 역할을 친절하게 수행한다. 작품에 얽힌 이야기, 조각가들의 의도, 유사한 작품들과 비슷한 맥락의 다른 작가에 대한 안내까지 곁들이니 공공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술 비평가와 칼럼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우리나라 공공 미술의 역사를 톺아보고, 공공 미술의 현재를 진단한다. 일방적인 소통이나 사후 관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공공 미술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통해 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안한다. 나아가 공공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한다.

 

내용 못지않게 눈에 들어오는 건 소개 작품에 대한 드로잉이다. 리모 김현길의 작업을 통해 사진이 수록되지 않은 아쉬움을 뛰어난 그림으로 채운다. 문장에서 언급된 작품과 작가들의 다른 작품의 실물 사진을 모두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읽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완독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 이유다.

조각 예술로 풍성한 일주일을 보낸다. 놀랍도록 실물 이미지와 드로잉의 싱크로율이 일치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덕분에 나의 시간도 수채화로 투명하고 아름답게 채색되는 듯했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생생한 색감이 아쉬운 작품도 보이지만 실물 사진과 대조하는 시간도 재밌고 의미 있었다.

조각의 매력은 역동적이라는 점이다. 2D 작품만 주로 감상하다 3D로 보니 입체가 주는 매력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공간과의 어우러짐, 공간과 주고받는 메시지가 더해진다. 개성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작품들을 보며 책장마다 입체 카드라도 삽입된 듯 공간감을 느낀다. 특히 마음에 들어오는 작품을 보며 나의 취향을 새삼 깨닫는다. 예술가의 시선에 공감하다 보니 내 삶의 무대가 보다 넓어지는 듯하다.

 

속도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감상하며 내 삶의 속도를 가늠하는 시간을 갖는다. 초침의 속도, 분침의 속도, 시침의 속도. 나는 어떤 속도로 살아가고 있을까. 소리 없는 예술 작품이 전하는 공간의 파장을 느끼며 나의 심장은 조금씩 규칙적인 리듬을 찾는다.

심현지의 <물고기>는 색감이 좋다. 커다란 물고기에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색채를 보며 잠시 행복한 동화 속 바다를 상상한다. 서도호의 <카르마>에 대한 해설을 접하고 다시 작품을 본다. 얼핏 보았을 때는 청록색 모기장처럼 보였던 작품이다. 전해져 오는 철학적인 무게감이 마음을 울린다.

저자가 언급한 헨리 무어의 작품 중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누워있는 형상>에서 깔끔한 돌 조각의 매력에 반한다.

노동식 작가의 작품은 부드러운 충격을 준다. 조각의 재료가 솜이라니! 고정관념을 깨뜨린 시도가 경이롭다. 책에 소개된 <민들레 홀씨 되어>는 공들여 쓴 칼럼을 접하는 듯하다. 검색으로 3m 모기향,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오는 장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공간으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연기를 사진을 찍듯 붙들어 놓은 발상에 감탄한다.

 

소개된 내용에 대한 의견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의 부제는 '고철에 담긴 비애와 슬픔의 꽃 한 송이'이다. 한데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작품은 20세기 물질문명 사회가 만들어낸 상처를 담고 있다. 이게 왜 상처인지, '아마벨'이란 제목은 무슨 의미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이해가 된다. 아마벨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19세 소녀이며, 그 비행기의 잔해를 모아 해당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추가되었더라면 '비애와 슬픔'에 대한 이해가 보다 더 깊어지지 않았을까. 작품의 재료가 고철일 수밖에 없는 이유까지 말이다.

둘째, 하우메 플렌자의 작품은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칠드런스 소울>에서는 '각 나라의 고유한 문자를 통해~'라는 문장이 언급된다. 저자의 서술 의도는 나라별 고유 문자를 표현한 예술을 소개하는 듯 보인다. 고유한 문자라면 영어로 된 작품보다는 한글로 제작되었다는 <가능성>이 더 적합해 보인다.

 

책의 구성에 대한 의견도 있다.

첫째, 책 표지 디자인이다. 표지에는 본문에 소개된 작품들이 앞과 뒤에 각각 7점씩 배열되어 있다. 한데 앞표지와 뒤표지의 작품 중 6점이 중복된다. 디자인의 의도는 분명 있을 테니 전문가의 작업에 이의를 제기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직관적인 의견을 적는다. 나라면 작품이 38점이나 되니 각기 다른 작품을 수록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둘째, 새드 엔딩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씁쓸함이 남는다.'이다. 덩달아 그리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마무리를 한다. 저자의 시선은 전체적인 시스템을 총괄하는 입장에 있는 듯하니 수긍이 간다. 날카로운 비판은 필요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여운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다. 보다 희망적인 내용을 마지막에 배열했으면 어땠을까. 그 많은 공공 미술에 참여한 작가들의 마음에는 분명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세상은 분명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미술의 진정한 역할은 삶의 긍정성을 배가하는 데 있다던가. 미술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한다면 덩달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따뜻해지리라 생각한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게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을 안겨준다고 나는 믿는다.

공공 미술 조각가들이 진정으로 원한 건 세상과의 소통이리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말을 걸었던 이들의 마음을 상상한다. 그들의 외침이 조금씩 모여 커다란 울림으로 전해진다. 작품뿐 아니라 주변의 공간까지 조화를 이루면서 파동인 듯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일까. 주변의 바람과 햇살, 희미한 대지의 냄새와 함께 3D의 입체 예술을 느끼고 싶다. 여행의 테마로 잡아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 시선은 나를 향한다.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조각들을 감상하니 삶에 입체감이 더해진다. 공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말을 걸고 싶냐고. 이 글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당신에게 하듯 나는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담아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걸까.

 

 

p127, 밑에서 4째 줄: 토니 오슬로 ~오슬러

p135, 4째 줄: 프리즈마 프라즈마

p144, 밑에서 4째 줄: 전통문화예술중심지 인사동 ~중심 인사동

p271, 7째 줄: 운봉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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