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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는 인류 - 인구의 대이동과 그들이 써내려간 역동의 세계사
샘 밀러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23년 7월
평점 :
나이트콜처럼 듣는 노래가 있다. 이 사람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10여 년 전 영상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 공부하듯 그의 영상을 탐독하는 중이다. 풍문으로는 일찍이 들었지만, 전혀 새로운 연예인을 영접한 소녀마냥 요즘 나는 한 사람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는 중이다. 수많은 조회수에 N분의 1로 일조한 인간의 글을 읽고 계신다.
빠른 템포, 강력한 비트에 파워, 파워, 파워, 파워 한 단어만 들리건만 가사 해석을 보니 평범하지 않다. 도입부에 언뜻 지나가는 ‘위버멘쉬’의 세계관이 리듬을 타고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자신만의 가치로 나아가는 사람, 삶의 고통을 느끼지만, 매번 자신을 극복하려 애쓰는 사람. 심장에서 빅뱅이 터진 듯 지드래곤은 이렇게 청룡의 해가 끝나갈 무렵에 내게로 온다.
생명체에도 빅뱅의 순간이 있었을까. 이미 펼쳐진 상황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온통 상상이다. 까마득한 언젠가 최초의 순간은 분명 존재했으리라. 우주의 탄생이 빅뱅에서 시작되었듯이.
과학에서 우주 탐사는 인류의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며 인간의 본질적인 지적 호기심을 언급한다. 그래, 그냥 궁금하니까. 보이는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도 이런 모습일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할지 그저 궁금하니까.
인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간혹가다 근원적이고도 근원적인 문제를 별생각 없는 듯 툭 질문하는 학생이 있다. 과학적인 매뉴얼을 따라 최초의 생명체까지 거슬러 ‘카더라’ 이론을 말해주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최초의 인류도 근본적인 호기심을 안고 다른 땅을 향해 걸어갔을까. 샘 밀러의 『이주하는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류 역사를 중심으로 느린 빅뱅을 재현하듯 이동하는 인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책이다.
인간이 본래 정주성을 추구한다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주’라는 안경을 쓰고 인류 역사를 해석한다. 이주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파란만장한 사건 안에 존재하던 이주민의 모습을 세밀한 시선으로 그린다.
작가가 정의하는 ‘이주민’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겨간 사람이다. 같은 사람인데도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으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다. 석고상을 데생할 때 각기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처럼.
이주민을 떠올리면 유화물감을 섞는 장면이 연상된다. 원주민과 이주민의 문화가 융화되는 장면이 겹쳐서이다. 바로 섞이지 않고 겉도는 시간을 거치다 서서히 섞여 들어가면 융합된 문화가 재탄생하리라.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조차 무의식의 영역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자리한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이주의 이유는 다양하다. 직관적으로는 ‘경쟁자를 피해, 기후 변화로 인하여, 먹이를 찾아서’라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여기에 작가는 ‘모험심, 호기심,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본능’을 언급한다. 이주가 본능이라니!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DNA에는 ‘이주’라는 카테고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거다.
한 달여 전, 인류의 DNA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터넷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네안데르탈인들도 탄수화물 좋아했네’라는 제목의 뉴스이다. 고대 인류 68명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80만 년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게도 탄수화물을 분해하는 소화 효소인 아밀레이스를 만드는 유전자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탄수화물을 사랑하는 본능이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는 해석이다. 빵을 먹으며 이 글을 쓰는 나의 행동이 꽤 뿌리 깊은 기원을 품어왔다니 묘한 기분이다.
아프리카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인류의 DNA를 상상한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아프리카 땅덩어리의 모양이 인간의 뇌를 닮았다는 우연에 필연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고 싶어진다.
언제부터 우리는 기록에 의존하기 시작했을까. 무(無)의 세계는 신비롭다. 언어나 문서가 당연히 없던 과거의 장면,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상상하는 건 그 자체로 매력적인 모험에 뛰어드는 행위이다.
육지 포유류 중 쥐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동물도 그렇게 온 지구를 돌아다니지 않는다던데, 우리의 이동 욕구는 본능적이라고 여겨도 될까.
DNA의 연결성을 인지하니 ‘멸종’이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종족이라니! 네안데르탈인과 나까지도 빵으로 연결된 사이인데, 어쨌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작가는 이주에 대하여 ‘언제’나 ‘어떻게’ 보다 ‘왜’ 그랬을까에 집중한다.
야간(Yaghan)족은 초기 이주민 중 가장 멀리 이동한 종족이다. 아프리카로부터 남아메리카의 꼬리 끝까지 걸어서 하늘까지 진출할 기세로 나아간다.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2022년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야간족은 멸종된다. 저자는 혈통보다 문화를 잃는 것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고 말한다.
네안데르탈인, 사피엔스, 유대인, 아메리카 인디언,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아리아인, 로마인, 반달족, 아랍인, 바이킹, 타이노족, 아프리카 노예, 황인종, 시오니스트, 난민, 무지개 부족, 이주 노동자, 멕시코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문화를 상상한다.
수많은 역사와 함께 꽃처럼 피고 지는 다양한 문화를 목도한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1970년대에서 멈추었다고 말한다. 이주민에 대한 지배적인 역사적 인식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권장하기 위한 목적이라 밝힌다.
역사적 인식은 자세히 들여다보았으나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전개로 공중에 떠다니는 꽃가루처럼 나의 의식은 방황을 거듭한다. 역사, 인물, 지명이 워낙 많이 등장하여 경이로운 인내심으로 정신없이 검색하다 보니 맥이 끊어진다. 하아. 배경지식 빈곤자의 한계인가.
끝내 지인 찬스를 써서 중학교 사회과 부도를 득템한다.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부교재이다. 인터넷 검색이 이보다 더 디테일할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절뚝절뚝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인내심의 배터리는 바닥이 나고 만다. 맘 편하게 대륙별로 펼쳐서 국가와 대도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질한 시골 지역은 온라인 지식백과와 병행하는 절충안을 택한다. 내용은 역사적 흐름 따위는 무시하고 인상깊은 장면만을 발췌하여 흡수하기로 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프리카인들의 이주에 얽힌 이야기이다. 아메리카로 실어 나르던 전형적인 노예선의 그림을 보니 소름이 돋는다. 무늬인가 싶은 그림은 자세히 보면 사람이다.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그림 위로 인간의 탐욕과 잔인함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화물도 이토록 치밀하게 쌓기는 어려우리라. 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그림 앞에서 전율이 인다. 노예 제도는 부당하다며 글자로만 인지하다 이미지로 보니 갑자기 줌인이 된 카메라 속 영상을 접하는 듯하다.
조선 시대 양반 제도가 등장하는 드라마 장면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였던 순간을 떠올린다. 꽃미남 도령에게나 눈길을 주었지, 마당쇠나 돌쇠는 BGM처럼 당연하게 여기며 그 역시 존귀한 인간임을 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망각 폴더에 담겨있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오랜만에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여러 나라와 도시 이름에 나의 동공은 흔들린다. 무의식 어딘가에는 나라의 위치가 분명 새겨져 있을 텐데. 여행 노선처럼 이주민의 이정표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 답답해진다.
사회과 부도가 새의 날개처럼 좌우로 수십 번 펄럭인다. 세계 전도를 시작으로 서남아시아, 북부아프리카, 유럽, 동남아시아, 남부아시아, 동부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곳곳을 손가락으로 여행한다.
기이한 현상이다. 분명 훑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지명이 정확한 위치를 검색하고 나서 확인하면 다시 보이니. 투명 망토에 가려져 있다 짠 나타나는 것처럼 발견하고도 신기해서 몇 번을 바라본다.
발견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목소리가 큰 사람이 권리를 획득하는 걸까. 기실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스의 ‘발견’이라고 하기에 애매하다. 이미 그곳에 원주민이 있는데 무인도도 아닌 땅을 발견이라고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세상의 중심은 힘이 있는 자들을 기준으로 정해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북부아프리카 나라들의 경계를 보니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오른쪽 경계처럼 리오그란데강의 굴곡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울퉁불퉁한 땅덩어리를 직선으로 나누었던 정복자들과 그 땅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힘에 밀려 강제적 이주민이 되어야만 했던 삶을 가늠해 본다. 이주 DNA가 본능이라면 그래서 이주가 이루어지는 거라면 그건 자유 의지를 동반하는 행위여야 하건만.
남부 아프리카 출신의 쿵족 유목민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왜 농부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세상에 몽곤고 열매가 이렇게 많은데 왜 굳이 심어야 하나요?”라 말했다나.
철새는 자유롭다. 추위를 피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강제성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생명체이다.
“냉난방이 안 돼요.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이 상해요. 밤에 게임도 못 해요.” 전기가 없다면 어떤 점이 불편한가라는 질문에 오가던 대답이다. 농사뿐 아니라 문명의 발달 역시 인간을 정주하게 하는 요인이다. 만일 과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본능을 따를까. 따뜻한 곳으로 떠나는 철새처럼 자유로운 이주민의 삶을 살았을까.
세상에 떠밀려 반강제적으로 이주했다가 자유 의지로 무장한 채 돌아온 사람의 표정이 이와 비슷할까. <홈스윗홈>의 힘찬 비트에 마음이 들썩인다. 즐거운 나의 집, 원하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지드래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팬이 아니었으면서도 심장에 부드러운 뭉치가 굴러다닌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으로 랩을 쏟아내는 공연 장면을 몇 번이나 재생한다.
우리가 원하는 곳에 살 권리라는 문구는 읽는 것만으로 설렌다. 장소뿐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하는 중력이 끌어당기지만, 도전과 꿈이 새겨진 DNA가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면 나는 자유로이 홈스윗홈을 향해 떠날 수 있으리라. 세계지도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세계를 누벼본다. 손끝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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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7, 각주 • : 프랑스 본토를 의미는 → ~ 의미하는
p98, 11째 줄: 사슴나 → 사슴이나
p231, 7장의 제목 중 ‘메이플라워 호’ → 클로틸다 호(마지막 노예선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클로틸다 호’가 더 적절한 제목이라고 판단됨)
p276, 10째 줄: 바나라시 → 바라나시
p414, 8째 줄: 뒤쫏는 → 뒤쫓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