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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역사를 다룬 개론서나 영화의 역사를 다룬 개론서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다. 그는 24개의 사진기를 이용하여 달리는 말을 연속적으로 촬영하는데 성공한다. 최초의 연속 사진이다. 이 연속사진을 환등기로 영사하면 최초의 동영상이 된다.
말의 이름도 기록에 남아 있다. 이름은 샐리 가드너, 암말이다. 그렇다면 말 위에 올라탄 기수의 이름은 ? ........ 없다.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그 어떤 기록도 없다. 말 이름도 기록된 마당에 기수 이름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질문은 " 알고도 모른 척하는 능청 " 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흑인은 동물(샐리 가드너)보다 가치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조던 필 감독이 연출한 << 놉,2022 >> 은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영화적 도구로 활용하는 조던 필은 무명의 흑인 기수에게 이름을 부여하면서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지워진 흑인 선조의 발자취를 탐험한다.
흑인 기수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흑인에게 개인의 서사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서다. 고유의 이름이 부여되면 캐릭터에 생명력이 만들어지고, 그 캐릭터의 개성과 이미지가 생성된다. 남성 중심의 백인 주류는 그것이 못마땅하다. 이름 없음 ㅡ 전략은 여성에게도 적용된다. 현대의 주류 상업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다(벡텔 테스트를 통과한 현대 영화는 많지 않다). 그들은 다방 아가씨이거나 접대부, 여의사, 여선생, 여류시인, 동네 아줌마 그리고 피해자1,2,3,4,5,6,7,8로 등장한다. 이처럼 비주류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욕망은 주류의 욕망이다.
그들은 최대한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를 지연시킴으로써 비주류의 존재를 투명 인간으로 취급한다. 내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를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뫼르소 재판 과정에서 카뮈는 “ 아랍인 한패가 담배 가게 진열장 앞에 기대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우리를 마치 돌이나 죽은 나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라고 묘사했지만 인격체를 비인격체(돌, 나무)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주체는 사실 뫼르소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시선의 주체가 전이된 것이다. 쉬운 저잣거리 입말로 풀어서 설명하자면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
평소, 뫼르소는 아랍인을 돌이나 나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기 때문에 지레짐작으로 아랍인도 자신을 비인격체로 바라볼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 이방인 >> 에서 죽은 피해자는 " 아랍인 " 이라는 단어로 스물다섯 번이나 등장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이름이 호명되지는 않는다. 카뮈가 애써 아랍인의 이름을 삭제한 이유도 어쩌면 대상을 비인격화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뫼르소의 이유 없는 살인이라는 기존의 가설은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싸움을 말리는 도중에 발생한 우발적 총격이라는 말도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 왜냐하면 우발적 격발 이후에 뫼르소는 " 굳어버린 몸뚱아리 위에 ㅡ " 네 방을 더 쏜다.
뫼르소가 굳어버린 몸뚱아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아랍인의 죽음을 확신한 것 같은 데에도 불구하고 뫼르소는 죽어서 굳어버린 몸뚱아리 위에 네 번의 총격을 더 가한다. 죽이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이는 네 발의 총성을 두고 과연 우발적 격발이라 할 수 있을까 ? 그것은 어쩌면 잠재된 무슬림 혐오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 아니었을까 ?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것처럼 제국주의 시대에 집필된 서구 문학 정전들은 반드시 제국주의에 대한 의식적 정당화를 내포하고 있다. << 이방인 >> 을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뫼르소가 아니라 굳어버린 몸뚱아리로 그 어떤 발언권도 얻지 못한 채 죽어간 아랍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