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놀이와 현시창.

 

 

Million Dollar Baby by Maria Ka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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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반성

 

 

 

 

 

 

 

 

 

 

 

 

 

 

 

 

세헤라자데, 살기 위해서는 밤마다 이야기'를 속삭여야 하는 박복한 여자. 그녀에게 있어서 침묵은 곧 죽음이 아니었던가. 침묵의 본질이 정지라면 세헤라자데의 수다는 생의 지속'이다. 시지푸스가 구르는 돌을 계속 정상에 올려놓는 형벌이라면, 세헤라자데'는 계속 이야기 / 소설'을 말해야 하는 형벌을 가진 여자다. 천일야화( 1001日 야화 ) 는 1000일 동안의 이야기'가 아니라 1001일 동안의 이야기'다. 엄밀히 말하자면 천일(일)야화'인 셈이다. 여기서 0'이라는 아라비아의 숫자가 완성을 의미한다면, 1'은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깐 < 1001'= 1000 + 1' >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1000 and 1 > 이다. 1000'으로 완성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다시 1부터 시작해야 한다. 겹치는 데자뷰, 그렇다 ! 시지푸스'가 연상된다.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으면 다시 바닥으로 구르는 돌'을 다시 정상으로 올려야 하는, 반복이라는 형벌'을 간직한 시지푸스' 말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반복을 동일증식'이라고 말하고, 들뢰즈'는 반복에 따른 미세한 차이'를 발견한다. 복제는 원본과 동일하면서 동시에 동일하지 않다. 누군가는 이것을 변주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원본 없는 복제'라고 지시하며, 또 누군가는 실존적 균열'이라고 말한다.

 

 

 


 

 

 

 

 

북촌방향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에게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라고 알려준다. 빨간 바탕에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타이틀'은 70년대에나 쓰던 타이포그라피'다. 하지만 관객들은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홍상수가 지금까지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게릴라 방식'으로 영화를 찍을 것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흑백 화면과 펜/pan 그리고 성급한 줌인 효과'는 복고'라기보다는 오히려 초창기 무성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홍상수의 이 영화를 복고적 취향'으로 이해했다면 잘못 판단한 것이다. 홍상수는 공지영 식 후일담'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와 감독의 관계, 창작자와 창착품의 관계, 나아가 영화 서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북촌방향'을 보면서 내내 내 머리속'에서 맴돈 것'은 천일야화' 와 시지푸스 신화'였다.북촌방향'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반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재생은 원본과는 조금씩 다르다. 관객은 어느 순간 < 틀린 그림 찾기 > 의 재미에 푹 빠진다. 홍상수는 지금 영화적 서사1의 변주'를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 북촌방향 > 은 세헤라자데'처럼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감독 자신의 시지푸스적 운명'에 대한 고백이다. 단언하건대, 섣부른 감'이 있지만2, 북촌방향'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홍상수 영화 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남을 것이다. 그가 에릭 로메르'를 벗어나 우디알렌 쪽'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초기작'들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데뷔작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과 < 강원도의 힘 > 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를 호명하고,

 

 

< 오, 수정 > 에서의 인사동 고갈비집'를 배경으로 찍은 만취' 장면은 일종의 초기작에 대한 자기반성과 화해3'처럼 보인다. ( 실제로 홍상수의 분신인 영화 속 성준'과 김의성이 분한 중원'은 이 영화를 통해 화해한다. 성준'이 중원을 이야기하면서 < 착한 사람 > 이라고 말할 때, 이 울림은 홍상수가 김의성'에게 하는 고백으로 중첩된다. 홍상수는 영화를 빌려서 고백을 한 셈이다. ) 그리고는 그의 영화를 거론할 때마다 따라붙는 일상성'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혹은 준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긋지긋해진 것일까 ?

 

 

다시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세헤라자데가 임금에게 들려주는, 280편의 이야기'는 정말 각기 다른 이야기일까 ? 다작의 작가로 알려진 조르주 심농'이 300여편의 소설'을 쓴 것을 보면 인간의 한계'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심농은 300편의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1편의 소설'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쓴 것'에 불과하다.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전부이니깐 말이다. 그러니깐 이야기의 원형' 은 하나인데 각기 다른 살인과 죽음이 300' 개인 것이다.

 

 

세헤라자데' 또한 한 가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말한다는 측면에서 <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 고주망태'에 가깝다. 하지만 ( 이 부분이 중요하다 ! ) 임금은 이 여자의 주사'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에게는 어제의 이야기와 오늘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들린다.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 그것은 바로 < 반복과 변주' > 에 답이 있다. 어제의 악당은 칼잡이'이지만 오늘의 악당은 소매치기'다. 그리고 내일의 악당은 사기꾼'이 될 것이다. 세헤라자데'는 이런 식'으로 살짝 레퍼토리'를 바꾼다. ( http://myperu.blog.me/20115635317 )

 

영화 북촌방향'에서 홍상수는 영화감독'을 세헤라자데와 시지푸스 같은 운명을 동시에 가진 자'라고 말한다. 창작'이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원형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서 이야기를 재배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몇 가지 팩트, 그러니까 몇 가지 논픽션을 가지고 수많은 픽션'을 만들어낸다. 영화 북촌방향'에서의 이야기 뼈대'는 몇 개 없다. 고척동과 만취 만담 그리고 거리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은 이 허술한 몇 개의 아이디어'만 가지고, 반복과 변주를 통해서 든든한 동앗줄'을 만든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하나의 원형이 어떻게 반복되고 변형되어서 재생되는가를 지켜보게 된다. 관객은 똑같은 레퍼토리'를 보며 낄낄거린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을 감지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웃음기'가 사라진 유준상의 불안한 얼굴'이다.

 

 

이것은 일종의 희비쌍곡선'이다. 그는 시지푸스를 통해서 창작의 고통을, 그리고 세헤라자데를 통해서 창작의 무한한 변주의 방식'을 본다. 영화 만들기'란 고통 속의 희열'이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그는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고 느긋하게 낡은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데 이 여유만만'한 자포자기'는 그 어느 영화보다도 새롭고 경이롭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확실히 홍상수의 새로운 출발점이다.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여기에는 낡은 자' 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성찰이 엿보인다. 그래서 그랬을까 ? 우디알렌이 뉴욕의 밤 풍경을 잡아내고, 히치콕이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아름답게 창조했듯이, 홍상수는 서울의 눈 내리는 풍경을 포착한다. 흑백으로 처리된, 느릿느릿 내리는 눈은 묘하게 슬프다. 어느 시인은 말했다. 빠른 것'은 슬프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느린 것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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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은 둥글고 작다. 공의 지름은 약 7cm이고 방망이의 지름도 7cm. 안타란 공의 중심과 방망이의 중심이 만날 때 발생하게 되는 물리적 변화이다. 그렇다면 지름이7cm인 방망이와 지름이 7cm’인 공이 서로 부딪치기만 하면 다 안타가 될까 ? 그건 아니다. 방망이가 야구공 위쪽을 때리거나 아래쪽을 때리면 땅볼이나 높이 뜬 볼이 된다. 방망이로 공을 때렸다고 해도 그라운드를 향해 날아간 공 중 7,80%는 아웃이다. 다 잘못 맞은 것이다. 안타란 두 개의 중심이 정확하게 만나야 한다. 안타가 될 수 있는 충분 조건, 바로 1cm 영역 안에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1cm 두께의 검정 유성펜으로 방망이 중심에 선을 긋고 빨간 유성펜으로는야구공 중심에 선을 그었다고 가정하자. 안타란 검은 선과 빨간 선이 만날 때 안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A급 투수가 공을 던지면 평균 150km’ 속도로 날아간다. 그러니깐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0.5초 이내에 포수 글러브에 도착하는 것이다.

, 공이 날아오고 있다고 치자. 가까이 올수록 눈에 익는다. 공이 포수 근처에 오자 비로소 공의 구질을 간파한 타자는 방망이를 힘껏 휘두르지만 백이면 백 헛 스윙을 당하고 만다.당신은 이미 공은 포수의 글러브 안에 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방망이를휘두르는 한물간 타자를 보게 될 것이다. 타율이 좋은 타자는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난 지 0.25초 안에 공이 어느 지점으로 떨어질 것인지를 미리 예측해야 한다. 직구인가, 커브인가? 슬라이더, 스크루볼, 너클, 싱커, 스핏? , 간단하다. 0.25초 안에 일곱 경우 중 하나를 간파하면 된다. 그 다음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낙차. 지금 날아오는 공은 분명 포수 근처에 오면 뚝 떨어질 것이다. 그걸 예측하면 된다. 간단하다. 그 다음은 좌우폭이다. 저 공은 분명 왼쪽으로 5도 각도로 휘어져 들어올 것이다. 마치... 내 페니스의 휘어진 각도와 비슷하군. 좋아,커피 한 잔 마시고 천천히 생각하자고. 그리고는 x y좌표가 만나는 지점을 설정한 후 허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 이 모든 생각을 0.25초안에 생각해야 한다. 커피도 마시면서 !

결론은 이렇다 : 150km로 날아오는 공을 0.25초 만에 위치를 간파하여 방망이 중심을 야구공 중심에 맞히면 안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150km’ 속도로 날아오는 유리구슬을 연필로 휘둘러서 정확히 맞추는 꼴이다. 가능한가? 엄밀히 말하면 야구는 말이 되지 않는 경기다. 그러니깐 안타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현상이다. 오히려 안타는 비정상적인 놈이 우연히 휘둘렀다가 안타를 때린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안타는 실패가 낳은 결과물인 셈이다. 한 마디로 야구란 그지깽깽이 같은 스포츠다. 나는 그런 야구를 좋아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러브레터'까지.

 

야구라는 스포츠는 묘하게멜로 드라마를 닮았다. 보통 3할 타자는 좋은 타자의 기준이다. 3할이란 10번 타석에 나가서 3번 성공하고 7번 실패한 경우를 말한다. 타자와 투수와의 싸움에서 타자는3 7의 성적을 올리는 꼴이다. 겨우 세 번 이긴 것이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메이저리그에서 3할 타자라면 연봉 30억은 된다. 그것이 바로 3할의 진실이다. 실패, 실패, 실패, 또 실패 다음에 성공이다. 말 그대로 야구는 실패를 좋게 대우하는 스포츠다. 맬로 드라마도 마찬가지다.맬로 영화를 찍는 감독은 두 남녀에게 자주 실패할 것을 권한다. 그들이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감독은 좋아서 미친다.

멜로 영화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할수록 좋은 서사가 나온다. 김영하는 멜로를 어긋남의 서사라고 정의한 후, 시니컬하게 오다가다/가다오다 다 만나면 그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라고 말한다. 명쾌한 해석이다. 왕가위의< 중경삼림 > < 타락천사 > 는 만날 듯, 만날 듯, 만날 듯하다가 만나지 못해서 관객들에게 염불을 선사하는 영화. 그렇다, 멜로란 길이 어긋나고, 혹은 오해 때문에 헤어져 만나지 못하거나, 천생 배필을 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빌어먹을 시간 때문에 주인공보다 항상 간발의 차이로 일찍 떠나는 (개같은) 공항 비행기가 등장하는 장르. 얄밉게도 머리 위로 보이는 그 비행기가 그 비행기다. 소갈머리 없기로 유명한 유인촌이 멜로의 주인공이었다면, 뛰고 또 뛰라는 감독의 주문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찍지 마, 찍지 마! 승질 뻗쳐서 증말 !”

교통 상황은어떤가 ?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하겠다는데 그날따라 도로는 지랄이 풍년이다. 정말...... 동정 없는 세상이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면 참 싸가지 없는 도로. 어찌 되었든, 그들은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해서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딱 한 번은 운명적으로 성공한다.두오모 성당에서 우연히 만나거나, 주유소 혹은 전철 안에서 다시 만난다. 드디어, 만난 것이다. 만날 듯, 만날 듯하다가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드디어 만난 것이다. 그것은 허공을 향해 생각없이 휘두른 방망이와 허공을 향해 생각없이 던진 공이 우연찮게 정확하게 만나는 것이다.

로맨틱 멜로 영화 < 네 번의 장례식과 한 번의 결혼식 > 연애야구학 개론으로 풀자면 < 네 번의 헛 스윙과 한 번의 안타 > 정도 되겠다.이 영화에서 장례식이 뜻하는 것은 자신의 짝을 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보고 있으나 보지 못한 것과 같다. 남자와 여자는 장례식에서 네 번 만나지만 상대방이 자기 미래의 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만났으나 만나지 못한 것이요, 보았으나 보지 못한 것이다. 결국 네 번의 실패 끝에 한 번 성공하는 것이다. 이렇듯 실패란 당신에게 나쁜 결과만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해리와 샐리가 만나서 백년해로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반복되는 실패 때문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또 헤어졌지만, 될 놈들은 만나게 되어 있다. 그 장소가 두오모 성당이건, 피카디리 극장 앞이건, 해안가 레스토랑이건, 주유소이건 말이다. 그때 비로소 연인은 모든 것을 용서하리라. 얄밉게 머리 위에 떠서 날던 대한항공 747과 그날따라 교통 사고를 낸 아반떼서울 라 3021의 운전자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해요 !

 

인생은 한 방이야! ” 라고 말하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채플린 같은 사람은 절대 인생은 한 방이야,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보게, 젊은이 ! 한 방 때문에 성공한 사람은 한의사 밖에 없다네. 그런데 만날 한 방, 한 방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사람은 누구인지 아나? 바로 내 조크에 웃지 않는 사람이라네. 한방 때문에 성공한 사람은 한의사요, 라고 말할 때 웃음이 한 방 터져야 하거든. 명심하게 ! 성공한 사람은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일세. 허허허. 오호츠크해 돌고래, 오감보쉼빠빠는 슈풍크 오빠야. 이봐! 목석 같은 자네. 이 문장을해석하려고 하지 말게나. 오호츠크해 돌고래가 왜 웃긴 놈인지에 대해서 해석하지 말란 말일세.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 인생은 한 방 >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허풍을 믿고 싶다. 한 방 때문에 인생 망친 사람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이 말에는 어떤 간절함이 있다. 이 말은 수없이 되풀이되는 실패에 대한 자기 변명이 되겠지만 그래도 믿으련다. 인생은 구 회 말 투 아웃부터다. 닝기미. 조또. 4타수 무 안타면 어떠랴. 멋지게 재기하리라. 네 번 다 사랑에 실패하면 어떠랴.첫눈에 반하는 운명적 사랑이 어디선가 쥐새끼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 150km로 날아오는 좌완 투수의 돌직구를 멋지게 때려서 중견수 담장을 훌쩍 넘기는 홈런을 만들리라. 우우 하던 관중을,와와 하게 만들 것이다. 그라운드를 느긋하게 뛰며 우레와 같은 함성에 취해보리라. 비록 3연속헛 스윙으로 물러난다 한들, 그게 어디 내 탓인가 ? ... 너희들 탓이다. 도대체 8번 타자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말이다.

하여튼, 한 방 !

 

 

 

 

+ 번외 이야기

멜로드라마가 별/ 서사라면 에로영화와 포르노는 처음부터 통/ 하는 서사. 이들은 대부분 어긋남 없이 첫눈에 보고 반하고, 섹스를 한다. 누군가가 멜로와 에로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거든 당당하게 말하라. 멜로는 세 번 만나고 세 번 헤어지는 서사이고, 에로는 세 번 만나고 세 번 하다가 헤어지는 서사이며, 포르노는 세 번 만나고 세 번 하다가 다시 세 번 더 하는 서사라고 말이다. 로멘틱과멜로가 하고 싶어도 질질 끌다가 마지막에 하는 영화라면, 에로는 시작하자마자 하다가 끝에 가서는 질려서 배우가 하지 않는 장르이고, 포르노는 시작하자마자 하다가 끝에 가서는 질려서 관객이 외면하는 장르이다. 60분 풀 버전의 포르노 영화를 보고 싶은 부분만 찾아서 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는 사람은 딱 두 부류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거나 혹은 안타깝게도 리모콘이 없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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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여, 울어도 좋아요!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내 초로의 가을에, 상처라는 말은 남세스럽다. 그것을 모르지 않거니와, 내 영세한 필경은 그 남세스러움을 무릅쓰고 있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김훈, 풍경과상처

김훈의 정의에 의하면 <풍경> 은모두 <상처>. 그러므로 그의 풍경은 생채기다, 고름이다, 전치 5, 상해, 골절, 타박, 손상이며, “아파, 죽겠어 !”. 그는 풍경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픔-다운 것을 본다. 김훈의 즉물적 사고는 냉정하지만 동시에 뜨거운 감성을 갖는, 위악의 냄새가 난다. 나는 설악산 아래 모텔에서 일 년을 살았다. 봄에는 상춘객들로 모텔 객실이 만원이었고, 여름에는 해수욕장을 찾아온 피서객으로 붐볐으며, 가을에는 단풍과 겨울에는 설경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붐볐다. 하지만 나의 객실을 노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바닷물에 발을 담근 적이 없고, 단풍 구경을 한 적도 없으며 산정상에 오른 적도 없다. 산중턱 양지 바른 곳에 앉아서 한 여자를 기다렸으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도록 여자는 오지 않았다. 그해 이른 봄에 폭설이 내렸다.

 

 


 

 

누군가 나에게 <풍경> 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고 하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풍경이란 느리게 볼 때 비로소 보이는 투명한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굴참나무 아래에서 오랫동안 한 여자를 기다리다가, 어느 날 그 나무를 유심히 바라보게 됐다. 대한민국 야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다. 하지만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나무이기도 했다. 나무를 만졌다, 스무 살 여자의 젖가슴처럼 포근했다. 나무가 살아온 날들은 나무의 키보다 더 오래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은 바로 그 나무에 대한 이야기다.

여자의 이름은 <젤소미나> . 그녀는 바보다. 사탕과 금화 중 어떤 것을 가지겠니, 라고 물으면 냅다 둘 다 가져서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는 하지만, 젤소미나는 바보가 맞다. 왜냐하면 서커스 유랑 극단의 으라차차 차력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착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으며, 무뚝뚝하며 거칠다. 안소니 퀸이 연기한 차력꾼는 한 마디로 나쁜 남자다. 젤소미나는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바보처럼! 영화 줄거리는 다들 아시리라. 차력꾼은 바보를 몰래 버리고 떠난다. 그가 보기엔 이 여자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쓸모없는 잡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훗날, 이곳 저곳을 떠돌던 차력꾼은 어느 마을에서 낯익은 노랫소리를 듣는다. 젤소미나가 늘 부르던 그 노래다. 사이렌의 노래에 홀린 어부처럼, 그 소리를 찾아간 차력꾼은 낯선 아낙네가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목격한다. 젤소미나 ?! , 그래요. 그 여자 이름이 젤소미나였던 것 같네요. 단발머리에 눈이 동전처럼 동그란 처녀였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고 했어요. 그러다 병이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요. 하여튼 그 여자는 늘 이곳에 앉아서 이 노래를 부르고는 했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는 후회가 밀려오면 술을 마신다. 그리고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비를 건다. 사람들이 이 사내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바닥에 내팽개친다. 풀썩!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먼지가 날린다. 이 클리쉐는 만국공통어인 모양이다. 남자는 초라한 여자를 생각하며 운다. 파도 소리는 더욱 쓸쓸하다. 위로란 행복한 자의 기만이 아니던가? 우리는 그저 한 남자의 통곡에 통감할 뿐이다.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를 위로하지 마라.

나이가 들면 나무가 좋아진다. 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예쁜 꽃술로 유혹하지 않아도, 나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우리가 나무의 풍경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느리게 오랫동안,나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남자가 통곡하는 까닭은 꽃을 보느라, 단풍을 보느라, 숲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한 그루 나무의 소박한 풍경을 놓쳤기 때문이다. 남자는 깨닫는다. 여름에는 그늘이 되어 주고, 겨울에는 장작이 되어 주며, 마지막은 그루터기가 되어 준다는 사실. 그는 나무를 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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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5 22: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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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5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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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내가 하루키'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의 부르주아적 근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만 골라서 좋아한다는 점도 큰 몫을 차지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문학적 취향을 자랑하고는 했다. < 해변의 카프카 > 에서 카프카가 그렇고, < 1Q84 > 에서의 조지 오웰'이 그렇다. < 1Q84 > 에서 Q'는 일본어로 큐( 9 )'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작품을 조지 오웰에게 헌사한 것이다. 주접이다. 솔직히 말해서 부르주아적인 하루키가 프롤레타리아적인 조지 오웰'을 동경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번 미운 놈은 뭘 해도 밉다. 르포 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인 <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은 영국 광부들을 밀착 취재한 기록'이다. 이 작품은 르포이면서 동시에 부르주아였던 자신에 대한 참회록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부르주아'였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 카탈로니아 찬가 > 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 1984 > 를 통해 공산주의자'를 혐오하는 반공주의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식민주의자'에 대한 혐오였다. 그 스스로가 인도 식민지의 경찰 간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증오는 뼈저린 자기 반성인 것이다. 그는 전형적인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한국의 김수영 시인처럼 말이다. 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조지오웰은 셰익스피어'보다 위대하다. 내가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는 신이라면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조지 오웰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바라본 거대 악'은 식민주의'였다. 내가 봉준호 감독의 < 살인의 추억 > 을 보면서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조지 오웰이었다.

 


 

 

 

미국 백작으로부터 온 편지 !

 

 

1. 향숙이는 정말 예뻤을까?

향숙이는 예뻤다. 소소리바람에 볼이 발그댕댕해지면 물오른 복숭아처럼 보기 좋았다. 가슴도 제법 커서 아이 넷은 어미의 젖만으로도 무럭무럭 키울 수 있을 만큼 풍만했고젖꼭지도 지우개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처럼 크고 곧고 말캉해서 보기에 좋았다. 백광호는 향숙이 생각을 할 때마다 어릴 때 놀이동산에서 먹던 솜사탕을 떠올리고는 했다. , 저 아름다운 젖가슴 ! 만지면 터질 것 같은 저 작약. 백광호는 향숙이 생각을 하면 자주 아랫도리가 근질거리면서 오줌이 마려웠다. 그런 향숙이가 죽었다. 그래도...... 이 동네에서 향숙이가 제일 예쁘다- (고 백광호는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관객은 향숙이를 본 기억이 없다. 향숙이가 영화 속에 등장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백광호가 취조실에서 과거를 회상할 때에도 나는 향숙이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향숙이는 논 수로 안에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죽은 모습이 전부였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향숙이는 예뻤다고 하니 예쁜 것만은 분명한 모양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토록 마음 착하고 예쁜 향숙이를 잔인하게 죽였을까, 누가?

 

2. 식스팩 없는, 80년대 남자 이야기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수컷의 무능에 대한 이야기. 울타리 속의 양들은 울타리 밖의 들짐승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국가에서 파견된 양치기 개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농장을 감시하지만 아무 소용 없다. 괴물은 수컷들의 무능을 조롱하듯 좀더 잔인한 방식으로 힘 없는 양들을 할퀸다. 5년 동안 9명이 잔인하게 죽었고, 2건의 모방 범죄가 발생했다. 손과 발은 희생자의 스타킹이나 브래지어로 포박당했고, 입에는 돌멩이를 넣은 스타킹에 재갈이 물렸으며, 눈은 팬티로 가려졌다. 그리고 희생자의 질 속엔 온갖 것들이 삽입되어 있었다. 복숭아 9조각, 포크, 숟가락, 연필, , 우산......

감독은 시골 형사 박두만과 서울 형사 서태윤의 얼굴을 빌려 무능과 속죄에 대한 고해성사를 한다. 특히 박두만으로 분한 송강호의 얼굴은 백 마디 대사보다 물오른 표정 하나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봉준호의 인물 클로우즈업은 달리와트랙킹을 이용한 히치콕의 그것보다 우아하지는 않지만 종종 그것보다 강렬할 때가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배우의 얼굴은 희생자에 대한 죄의식으로 가득하다. 진심을 담은 얼굴은 일종의 프레스코 벽화와 같다. 수컷의 무능은 곧 울타리 속 자기 새끼를 지키지 못한 초라한 아버지의 무능으로 전이되고, 영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에서는 대한민국 자체의 무능으로 확대된다. 우리는 범인을 잡아놓고도 범인을 증명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과학적) 장치가 없음을 목격한다. 희생자의 옷에 묻은 괴물의 정액 유전자 감식을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미국에서 우편이 발송되기만을 기다리는 무능한 경찰서 내부의 풍경을 본다. 사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유전자 감식 결과가 용의자인 박해일의 유전자와 동일한가, 가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조건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죄수를 처형하기 위한 미국의 승낙이다. 그 사이 꽃다운 여중생이 마지막 희생자가 된다. 희생자의 질 속에는소녀의 가방 속 필통에 있던 필기구들이 꽂혀 있다. 그러니깐 이 영화에서의 마지막 희생자는국가의 무능이 죽인 참사. 더군다나 사건이 발생한 11 15일은 공교롭게도 민방위 훈련 등화관제의 날이었다. 국가의 강압적 지시에 의해 각 관공서와 상점 그리고 가정집에서 불을 끄고 상가의 셔터를 닫을 때 죄 없는 여중생은 무참히 죽는다. 소녀는 한 줄기 빛도 보지 못한 채, 춥고, 어둡고, 서러운, 동정 없는 세상에서 천천히 죽어 간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국가는 이 소녀의 죽음에 대해명백하게 유죄. 어둠 속 괴물은 국가가 친절하게 마련한 어둠/등화관제속에서 한 소녀를 농락한 것이다. ( 실제로 여중생은 등화관제가 있던 11 15일에 희생당한다. )

 

 

3. 미국으로부터 온 편지

도대체 그토록 기다렸던 < 미국으로부터 온 편지 > 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 ? 왜 우리는 손 놓고 미국의 메시지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기차 터널 앞 격투 장면에서, 우리는 분노에 찬 김상경이제우스의 판결 없이 살인자의 머리에 총을 겨루며 처형을 거행하려는 순간을 지켜본다. 이때 그토록 기다리던 편지마침내도착한다. 처형은 잠시 미루어진다. 물론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메시지 <혐의 없음, 사건 종결> 이다. 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다. 미국의 메시지는 곧 법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충격적 결과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들 믿으랴.제우스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선고 앞에서 당황한다. 거역할 것이냐, 순종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

이때 갑자기 어두운 터널에서 기차가 튀어나오면서 무능한 두 남자와 한 명의 용의자를 양쪽으로 가른다. 기차는 아버지의 두 번째 메시지. ( 기차가 남근에 대한 은유라는 사실은 개나 소나 다 안다! 많은 영화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기차가 등장한다. ) 제우스는 기차의 형상으로 변하여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첫 번째 메시지가 사건 기각이라면, 두 번째 메시지는 첫 번째 메시지를 어길 경우에 따른 무시무시한 응징이 있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경고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바로 어둠 속 터널 안으로 도망가는 용의자를 향해 형식적으로 터널 속 허공을 향해 쏘는 세 방의 총 소리. 그렇게 함으로써 형사는 상징적 처형을 감행한다.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억울하고, 더럽고,치사하고, 분통이 터지고, 미치겠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죽은 희생자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허공을 향한 총 소리가 죽은 자의 넋을 달래기 위한 조총 소리처럼 들린다.그것은 김상경이 죽은 자에 위해 마련한 위령제.

 

4. 그래도 향숙이는 예쁘다.

향숙이는 예뻤다. 상고 졸업해서 읍내 은행 직원이 되었다. 돈을 꼬박꼬박 모아서 아버지 백내장 수술비를 마련했으며, 어머니에게는 대용량 냉장고도 사 드렸다. 향숙이는 얼굴이 예쁘고, 심성이 고왔으며, 더군다나 가슴도 예뻐서 많은 남자들의 청혼 대상이었다. 향숙이가 결혼하는 날 백광호는 울었다. 결혼한 그녀는 잘생긴 아들과 어릴 때부터 남다른 가슴 발육을 보인 딸을 두었다. 나이 마흔 하나에 아파트 한 채를 샀고, 그날 그 동안 고생한 것들을 생각하며 가족과 함께 울었다. 그 밤엔 남편과 달콤한 섹스를 했고, 그 후에도 행복하게 살았다. 그녀가 그날 괴물에게 희생당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향숙이의 죽음과 백광호의 자살이다. 어쩌면 우리는 향숙이의 불행과 백광호의 자살에 대해 모두 공범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단 한번도 본 적 없지만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 향숙이는 참, 예쁘다. 안 봐도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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