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0731/pimg_749915104880911.jpg)
오래 전, 여행을 떠났다.
1. 거제 편
친애하는 이웃 한 분이 여행담을 재미있게 올려서 그 글을 보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개똥이 많은 유럽 거리'보다는 아시아 오지'를 찾아 떠나는 분인데, 그 여장부 같던 성격도 고산병 앞에서는 맥을 못추는가 싶다.산소 마스크에 의지해서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은 거라. 당신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 씐나는 여행이었어요 ! " 했다면 시큰둥했을 것이다. 으하하하. 그녀의 글'을 읽다가 문득 나도 여행담'을 재미있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 세계 각국 > 이라는 타이틀 대신 국내 여행기'이다. 통영 거제'에 머문 시간은 4개월 남짓'이다. 원래는 고로쇠'가 나오는 3월 말에서 4월 중순'( 2월 말에서 3월 중순'인가.. 헷갈린다. ) 까지 거제에 머물며 일'을 할 생각이었으나 내가 머문 집 어머니( 서울역에서 알게 된 형'의 어머니다. ) 가 내가 떠나는 날이 되면 늘 우시는 바람'에 보름, 보름, 보름을 연기하다가 결국 그리 되었다.
어머님은 나이 칠순으로 허리'가 기억자'로 구부정한, 말 그대로 시골 꼬부랑 할머니'였고, 아버님은 경상도 남자 특유의 기골이 장대한 어른이셨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버님 밥상에는 날마다 굴비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말로만 듣던 영광 굴비'다. 살림이 넉넉한 집안'이라고는 하지만 그 비싼 영광 굴비'를 온가족이 365일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밥상에서는 암묵적 동의가 침묵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식구들은 아무도 그 굴비에 손을 댈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지금 이 고백을 하자니 벌써부터 얼굴이 붉어지지만 나는 그 사실을 정말 몰랐다. 굴비가 그렇게 맛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영광 굴비가 아버님에게만 올리는 진상'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그 진상을 탐했으니 그야마로 진상이었다. 나는 아버님과, 아... 경쟁적으로 굴비를 탐했으니 조선 시대였다면 사형'이 아니었을까 ? 거제도 형님'도 태어나서 단 한번도 건드리지 못했다는 굴비의 몸통을 나는 찌른 것이다. 그 사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칠순이 훌쩍 넘은 아버님은 일본 후쿠시마 저 먼 곳에서 온듯한 히피 청년에게 손수 굴비 살을 뜯어서 내 밥 위에 올려주셨다. " 맛있나 ? 마이 묵어라 ! " 짐승들 사이에서 먹이를 나누는 것은 동료애의 표현이니, 아마도 아버님이 내 밥 위에 굴비 살을 뜯어 올려놓으신 것은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표현이셨을 것이다. ( 거제도 형이 서울에서 고생할 때 내가 이 형을 보살핀 덕을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부잣집 막내였던 형은 식당밥을 못 먹겠다며 투덜대길래 집에 데려와 삼겹살 몇 번 구워주거나, 함께 장을 봐서 집에 돌아와 함께 요리를 했다는 거짓말이고 내 어머니에게 부탁을 해서 종종 초대를 하고는 했다. 그 사실을 거제 부모님에게 과장되게 말한 모양이었다. ) 사실 나는 그 굴비가 조기'인 줄 알았다. 식당에서 신물이 나도록 먹던 그 조기 말이다. " 여기 조기는 맛있네요. 쩝쩝 ! 식당에서 먹을 때는 쩝쩝 ! 맛이 없어서 안 먹고는 했는데 말이죠. 쩝쩝. 비린내도 하나도 안나고. 쩝쩝. 여기 조기는 크네요. 쩝쩝..... "
아버님은 칠순이 넘은 나이셨지만 청년 못지 않은 힘을 가지고 계셨다. 40킬로 고로쇠 물통을 들고 산 밑을 내려오면 하늘이 노랗게 보였으나 아버님은 땀 한 방울 흘린 적 없다. 아버님과 종종 팔씨름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발랑 뒤로 넘어가고는 했다. 연기가 아니라 정말 힘이 장사였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4개월을 보냈다. 개구리가 울고, 비가 온 다음 날에는 도로에 개구리가 자동차에 깔려서 수백 마리가 죽었다. 그 비린내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고로쇠 체취가 다 끝나갈 무렵, 어머님은 늘 내가 머문 사랑채에 오셔서 나를 보내는 게 서운하다는 소리를 하셨다. 그리고는 늘 우셨다. 고생만 시켰다는 둥, 며칠 머물면서 거제도 구경도 하고, 맛난 해물도 해주겠다고 하셨다. 그 눈물이 아름다워서 나는 보름을 더 보냈고, 약속한 날이 되어서 배낭을 싸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사랑채로 오셔서 군고구마를 내오며 우셨다. 그렇게 2개월은 어머님과 함께 보냈고, 60마리가 넘는 굴비'를 과감하게 건드렸다.
어느 날, 어머님이 아침에 다시 찾아오셨다. " 아가, 힘든 부탁하나 해도 되나 ? 우리 부부 사진 좀 찍어도고. 갈 때 되지 않았나. 영정 사진 부탁한데이 ! " ( 사투리를 흉내 낼 수가 없어서 엉터리 사투리를 선보이니 통영 사투리에 능한 분 있으면 덧글로 남겨주시기 바란다. ) 어머님은 한 시간 동안 몸 치장을 하셨다. 그 사이, 아버님은 양복을 차려입고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시며 주문을 하셨다. 내가 아버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 어머님하고 같이 찍으셔야죠 ? " 그 소리에 아버님은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 뭐하러 같이 찍노 ! 죽을 때 훈자 죽어삘 낀데, 독사진 찍어야지. 가족 사진은 마이 찍었다. 영정사진은 독사진이라. 참 재밌제 ? 가족 사진 아무리 많이 찍어도 결국 죽을 땐 독사진이 필요한 기라. 그기 인생 아니겠노. " 아버님은 제일 먼저 대문 앞 명패 옆에 서서 찍기를 원하셨다. 무뚝뚝한 표정이었으나 어떤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버님이 이곳저곳을 돌며 사진을 찍을 무렵 어머님이 나타나셨다.
한복을 입고 나오셨는데 그 모습이 내 눈에는 슬펐다. 아름다움과 죽음이 겹쳐지면 비장해지는 법이다. 어머니는 이곳저곳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찍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무너졌다. 나를 완벽하게 무너뜨린 곳은 장독대'였다. 어머니는 기억자로 구부러진 몸으로 내 손을 잡더니 집 뒤에 놓인 장독대로 나를 끌고 갔다. 정오가 지난 오후 2,3시'였다. " 여기 이 시간엔 볕이 잘 든다. 아가, 내 여기서 사진 하나 찍어도고. 할베 보니 대문 앞 명패 앞에서 찍어달라고 했제 ? 내는 여기가 좋다. " 서른 개 남짓한 장독대'에 어머니는 의자를 끌고 와 앉으셨다. 작고, 작고, 작은 몸이었다. 그때 난 울음이 터졌다.
뷰파인더'를 통해 본 어머님은 늙은 여인이 아니라 한 개의 항아리'처럼 보였다. 그러니깐 나는 인물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풍경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었다. 아, 그때 알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산과 바다와 나무 그리고 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저 수많은 옹기들. 짜고 맵고 독한 것을 품고 살아가는 옹기들. 간장은 옹기에 오래 담길수록 단내가 난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몸으로 숨을 쉬어 독한 것을 내보낸 결과이다. 사진 속 어머님은 옹기'였다. 쉴 새 없이 찍었다. 100컷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떠나던 날도 어머님은 우셨다. 우리 언제 또 보노 ? 어머님은 지병이 있으셨고 늘 아프셨다. 나는 다음 해 여름이 되면 꼭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지키지 못했다. 몇 년 후 거제도 형으로부터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 후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릴 들었을 때 첫 번째로 들었던 생각은 그 많은 항아리'들이었다. 자세히 세어보면 하나가 더 늘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나는 거제도에서 100마리가 넘는 귀한 굴비를 건방지게 먹었고, 살아서 숨을 쉬며 말을 하는 예쁜 항아리'를 만나기도 했다. 구부러진 항아리가 말을 하다니 ! 거제는 아름다운 곳이다.
2. 군산 편
군산은 볼것이 거의 없다. 특별한 유적지도 없다. 고군산군도나 선유도가 군산시'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냥 동떨어진 섬'일 뿐이다. 남해 푸른 바다'를 생각하며 군산 서해 바다'에 갔다가는 그 짙은 흙빛 탁류'에 기겁을 할 것이다. ( 그리고 철새도래지'도 있다만 이곳에서 시간에 맞춰 철새떼를 보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 군산 사람들은 서해 바다'를 똥물'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공장이나 회사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80년대 풍경이 고스란히 재현되었고, 일제 시대 건물들도 눈에 띠었다. 젊은 사람들은 군산을 지겨워했다. 모두 이곳을 빠져나가길 원했고, 남겨진 사람들은 대부분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었다. 나는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살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 얼음맥주집 > 때문이었다. 얼음이 잔뜩 담긴 파란 플라스틱 통'에 맥주를 넣어 테이블 아래 놔두었다. 따로 시킬 필요가 없다. 먹고 싶으면 테이블 아래 놓인 얼음 통을 열어서 맥주를 꺼내면 되니깐 말이다. 안주 값은 없다. 맥주 3병에 만 원이고, 소주 1병은 오천 원이었다. 소주 3병을 마셔야 만 원이었다. 안주값이 없으니 혼자 만 원만 내면 배가 터지도록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안주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풍부했다. 온갖 해산물이 무제한적으로 나온다. 심지어는 고등어조림도 나오고 갈치 조림도 나온다. 종종 병어회'도 나온다. 대기업들이 착한 가격 운운하는데 여기 안주 인심에 비하면 그들 대기업의 설레발은 병심 같다.
나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1년 365일 < 얼음맥주집 > 을 찾았다. 하루에 한두 끼면 되니, 집에서 음식을 하는 것보다 이곳에서 사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구멍가게에서 맥주 3병에 프링글스 하나면 이미 만 원을 넘지 않던가 ? 쉬지 않고 찾아가니 단골'이 되었다. 나는 항상 맥주를 마셨는데 안주로 고등어조림이 나오면 밥을 달라고 했다. 그러면 주인은 내 테이블에 앉아서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환갑을 바라보는 두 자매'가 장사를 하는 가게는 내가 오면 늘 백숙 한 마리'를 내오고는 했다. 안주에는 없는, 개별적으로 파는 백숙이어지만 내가 오면 늘 백숙'을 내오셨다. 자매 가운데 큰 언니'는 욕을 잘했는데 항상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 여기 군산 사내 놈들은 다 뱃놈이어서 시커멓고, 우락부락한당께. 승질은 을메나 지랄 같어. 뱃놈 밥 먹듯 한다고 말이제, 산더미 같은 밥 먹고, 남아도는 힘 어디다 쓰것남 ? 밤 되면 지 마누라 엉덩이 만지는 기 낙이제. 흐메, 스무 살 꽃다운 나이로 시집 와서 날마다 밤마다 괴롭히는데 못 살 것드라. 새벽부터 시어미 지랄하고, 낮에는 성질 급한 남편이 때리고, 밤에는 괴롭히는데 날마다 눈물 바다였제. 흐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야 ? 우리 예술하는 총각 보소. 어쩜 이리 피부 곱소 ! 양놈처럼 허연 남자가 좋더라, 난... 내 젊었으면 이 총각에게 시집 간다 ! "
이 욕쟁이 할머니의 편애'에 몇몇은 불편한 심기를 고백하기도 했다. " 아니 차별도 적당히 해야제. 저 총각에게는 백숙 내고, 우린 만날 완두콩 삶은 것만이오 ! "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내 주량은 딱 맥주 3병이었다. 맥주에 백숙 하나 먹어봐라. 아무리 더 마시고 싶어도 배가 불러서 먹질 못한다. 나는 돈 만 원 내고 백숙'에 게장까지 먹고 가는 게 늘 미안해서 맥주 3병을 더 시키고는 했다. 그리고는 병뚜껑을 다 딴 채로 일어나서 계산을 하고는 했다. 나중에는 일부러 딴 맥주 3병 값을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에는 타협점을 보았다. 3병은 따지 않고 집에 가져가는 것이었다. 집으로 가져가는 맥주 3병에 대해서도 욕쟁이 큰 언니'는 병 당 2000원 씩만 받으려고 했으나 내가 한사코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맥주 3병에 만 원을 지불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얼음맥주'은 50대 여주인이 운영했는데 꽤 매력적인 얼굴과 육감적인 몸매, 특히나 창을 잘했다. 절창에 가까웠다. 이 집은 늘 50대 남자들로 바글바글했다. 홀로 산 지 꽤 되었던지라 흑심을 품고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술 장사 하다보면 이런저린 일이 생기는 법, 여주인은 속이 상할 때면 늘 나를 불렀다. 내가 가면 혼자 있었다. 손님들이 주는 맥주를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면 그 시간에는 취하는 법. 여주인은 내가 가면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취하면 내 옆에 앉아서 내 허벅지'를 만지고는 했다. 내가 가게를 정리하고 술값이라도 내려고 하면 화를 내고는 했다. " 내가 그깟 매상 올리기 위해 자네를 불렀당까 ?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이오 ? 아니면 진짜 몰라서 모르는 것이오 ? 응 ? 왜 내 맘 모르는 척한당께 ? "
이후 이 주인은 물장사'를 접고, 은파 유원지에 있던 카바레'를 접수했다. 말 그대로 카바레'다. 천장에 알록달록한 커다란 알전구'가 어두컴컴한 공간에 빛을 쏘면 무대 위에서는 요상한 분위기가 연출이 되었다. 오픈 하고 나서 여주인은 나를 초대했다. 내가 간 날을 기억한다.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이었다. 밖은 봄날이었으나 안은 캄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바레는 지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은 < 얼음맥주집 > 에서 팔던 것보다 비쌌다. 아주 작은 맥주 한 병에 5000원이었고 과일 안주는 3만 원이었다. 여주인은 손님이 원하면 무대에 올라 춤을 추었다. 그 춤이 지루박인지 차차인지는 잘 모르겠다. 술에 취한 남자들은 여주인 품에 안긴 것만으로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 지금 판단하건대, 춤 신청이 들어온다고 해서 무조건 춤을 췄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비싼 안주를 주문하면 서비스 차원에서 손 잡고 한번 땡겼던 것 같다. )
그 표정은 어린애와 같았다. 여주인의 커다란 젖가슴은 남자를 갓난이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가끔은 진짜 춤꾼이 나타나 춤을 신청하고는 했다. 중절모에 백구두는 이미 그가 고수란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춤 한 번 신청하오 ! 그게 끝이었다. 다른 사내들과는 달리 여주인을 건드려보겠다는 수작이 보이지 않았다. 사무라이도 그렇다. 칼 솜씨 좋은 사무라이'는 말이 없다. 사무라이'란 말로 자신의 솜씨를 말하지 않고 칼로 말하나. 일 획'으로 자신을 증명할 뿐이니 말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아, 저 여주인의 육감적 몸매. 엉덩이가 실룩거릴수록 카바레 안은 정적이 흘렀다. 오직 연주 음악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카바레를 열고 나서도 여주인은 계속 내게 연락을 하곤 했다. 여주인은 항상 취해 있었고 내가 술값을 계산하려고 하면 화를 내며 똑같은 말을 하고는 했다. " 내가 매상 땜시 자넬 부른 줄 아나 ? " 결국 나는 늘 이 여주인에게 공짜를 술을 얻어먹은 셈이었다. 그 많은 술값을 갚지도 못하고 나는 군산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