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것과 純'한 것.
문학사상사'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잡은 것은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다. 잘 키운 스타 하나'가 연예 기획사 전체를 먹여살리는 것과 같다. 한때 하루키는 문학사상사가 심혈을 기울인 울트라 슈퍼스타'였다. 마음의 양식인 책을 논하는데 느닷없이 생긴 꼴'을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책 만듦새'가 박색이어서 사고 싶지 않은 것들이 동문선과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책들이다. ( 잠시 샛길로 빠지자 ! 출판사 동문선 표지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마분지를 뜯어다가 페이지로 활용한 듯한 두꺼운 종이 재질은 제본에 사용된 종이 종류가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든다. 농담이 아니라 종이학을 만들기엔 두껍고 딱지를 만들기엔 딱이다, 딱이다, 딱이다. 대다나다 ! )
" 발간 후 20년간 지속적인 베스트셀러 " 라는 띠지 광고를 사용하는 < 상실의 시대 > 는 유감스럽게도 디자인은 변함이 없다. 좋게 말하면 꿋꿋하고 나쁘게 말하면 방치'다. 신경 안 써도 알아서 잘 팔리니 굳이 판매 전략따위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눈 코 입도 그리기 싫어서 실루엣만 그려넣은, 이 촌스러운 디자인'은 < 해변의 카프카 > 에서도 그대로 쓰인다. 마치 지우개를 사용해서 사람 모양으로 지운 것 같다. 이 정도 실력을 선보이려면 초등학생의 미적 감각이라면 충분하다. < 해변의 카프카 > 라는 책'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제 13장 " 절대 고독의 세계 " 에서 주인공은 텅 빈 도서관 열람실에서 나쓰메 소세키 소설을 읽고 있다.
그는 소세키 전작'을 읽을 요량으로 전집'에 도전하는 것이다. 나는 이 < 13장 > 을 읽으면서 꽤나 오랫동안 웃었다. 페이지 열댓 정도 되는 분량에서 사용된 단어를 보면 일본 소설이 아니라 서양 소설 같다는 착각이 든다. 샌드위치, 훈제 연어와 크레송, 슈베르트, 로드스타, 와인'이라는 단어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 ① 커피포트에 담은 블랙 커피를 머그잔에 따라 마시 " 며 스포츠카를 몬다. " ② 브레이크와 엑셀을 교대로 밟는 횟수가 많아지고, 기어가 세컨드와 서드 사이를 왔다갔다 " 하며 운전을 하는데 " ③ 오른손은 핸들 위에, 왼손은 짧은 시프트놉 위에 있다 " 는 문장을 보면 반은 일본어와 반은 영어'다. 전형적인 보그 병신체'다 !
나는 하루키 문장을 볼 때마다 장근석이 작성한 싸이월드 미니 홈피 글이 생각난다." 르망에서의 레이싱은 내게 큰 익사이팅한 흥분감을 주었고, 테라스에 누워 앙드레 가뇽의 연주를 플레이하는 것를 들으며 마신 와인은 나를 은은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파리에 간다면 한 손에는 와인병을 들고 다른 손에는 뉴스페이퍼를 들고 샹젤리제 스트리트 거리를 워킹하며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라고 샤우팅하며 외치고 싶다 " 길거리에서 병나발 부는 풍경을 이렇게 근사하게 묘사하는 (장)근석이의 근성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다. " 글로리 오브 영광 " 이다. 내가 하루키 문장과 장근석 문장이 닮았다고 우기니 하루키 팬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차이도 크다.
당시 장근석은 철없을 때 쓴 글인 반면 하루키는 철들고도 그렇게 쓴다 ! 아이구야, 맙소사......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자꾸 덜 익은 열무김치에 고추장 넣고 비빈 비빔밥 생각이 간절하다. 사람들은 하루키 소설 문장을 무국적 글쓰기'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잡것, < 雜 > 이다. 하여튼 문학사상사 책 표지 디자인은 하루키 문장만큼이나 구리고 후지다.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소세키의 대표작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와 민음사에서 출간된 같은 책을 비교 평가'하면 답이 나온다. 그 고양이가 그 고양이이나 어째 그 고양이가 그 고양이와는 다르다. 문학사상사 표지 주인공은 고양이가 아니라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해태' 같다. 내게는 출판사 < 문학사상사 >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인 반면,
출판사 < 범우사 >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콜린 윌슨'이다. 그가 24살 때 쓴 < 아웃사이더 > 는 압도적 걸작'이었다. 변변한 학벌이 없는 그가 24살에 작성한 이 평론집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가 앙리 바르뷔스의 < 지옥 > 을 이야기하면서 인용한 문장이 좋아서 나는 이 문장을 아이스크림도 아니면서 달달 외우고는 했다. " 나는 이렇다 할 재능도 없고 이룩해야만 할 사명도 없으며, 반드시 전달하지 않으면 안될 감정도 없다. 나는 가진 것도 없으며 무엇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있다. " 아내가 예쁘면 처가댁'을 향해 절을 한다고 했던가 ?! 범우사에서 출간된 책들도 디자인이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양서'를 많이 보유했던 성실한 출판사'로 기억하고 있다. 종종 헌책방에서 일반적인 판형보다 약간 작은 범우사 책을 발견하게 되면 짝사랑했던 옛 애인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데이비드 린의 < 아라비아의 로렌스 > 를 볼 결심을 하게 된 이유도 < 아웃사이더 > 때문이었다. 어찌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T.E 로렌스에 대한 칭찬을 했던지 안 보고는 못 견딜 지경이 되어 결국 추운 겨울에 < 아라비아의 로렌스 > 를 보게 되었는데, 아.... 시부랄 !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 거울 > 과 함께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로렌스가 쓴 < 지혜의 일곱 기둥 > 도 때마침 출간되었기에 미리 사두었었다. 이래저래 < 아웃사이더 > 를 길라잡이 삼아서 책에서 다룬 책을 찾아서 읽었다. 그런데 젊은 듣보잡 콜린 윌슨의 벼락 같은 성공'은 문학판 꼰대들에게 제대로 찍힌 모양이었다.
못 배운 놈이 쓴 글이 배운 놈이 쓴 글보다 월등히 훌륭한 성과물을 냈으니 꼰대들 심기가 불편했으리라. 꼰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쪼잔한 복수가 고작. < 아웃 사이더 > 이후의 작품들에 대하여 그들은 철저하게 콜린 윌슨을 무시했다. 콜린 윌슨이 못 배웠다고 무시당한 케이스였다면, 한국에는 무학에 가까운 김기덕'이 배운 놈들에게 무시당했다. 그것 외에도 둘은 묘하게 통하는 부분이 있다. 콜린 윌슨 또한 김기덕처럼 살인과 섹스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콜린 윌슨의 이상한 행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내 수중에 콜린 윌슨이 쓴 책은 한 권도 없다. 공교롭게도 그가 쓴 책을 사람들에게 빌려주었는데 한 권도 회수하지 못한 까닭이다. 내 친구들아,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 메시지를 잘 들으렴 !
" 개새끼들앙, 내 책 빌려갔으면 얼렁 돌려줘라 ! " 읽은 책을 다시 사야 한다는 것이 찜찜해서 계속 미뤘으나 적어도 < 아웃사이더 > 는 구매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일단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여러 책을 한꺼번에 구매할 요량으로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제 우연히 하루키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려고 책장을 뒤지다가 그만 < 아웃사이더 > 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 신기했다.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분실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책장 모퉁이에 얌전히 꽂혀 있다니. 지금 < 아웃사이더 > 를 읽고 있는 중인데 여전히 끝내준다 ! 콜린 윌슨이 내린 아웃사이더에 대한 정의는 " 헛것 " 을 보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아웃사이더는 너무 깊게 너무 많은 것을 본다.
인사이더'가 가시적 영역 안에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본다면, 아웃사이더는 비가시적 영역에 떠도는 무수한 헛것'들을 본다. < 광인 > 은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이다. 롤랑 바르트는 < 사랑의 단상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는 한결같이 나 자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치는 것이다. 나는 변하지 않기(consiste) 때문에 미치는 것이다. " 광인이란 헛것을 보는 존재인데 롤랑 바르트적 시선으로 보자면 정상적인 존재는 잡것 雜'에 가깝고, 비정상적인 존재는 본질 純'에 가깝다. 변하지 않는 존재가 광인'이다. 그들은 비가시적인 것들과 대화를 하고 바라본다. < 헛것 > 이야말로 비가시적 영역의 대표적 존재가 아닐까 ? 아웃사이더'라는 제목을 내 식대로 정하자면 " 시력이 징허게 좋은 녀석들 "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