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no.6
문화촌 공원 그림자 사교 클럽.
바닥에서 뒹군 모양이었다. 헛구역질이 나서 눈을 뜨니 공원이었다. 내 인생이 그렇지, 뭐. 나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여 ! 나를 부랑자라고 판단하지 마시길.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은 것뿐이니깐 말이다. 가만히 누워서 눈을 뜬 채 보니 내 옆에는 벚꽃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가끔 바닥에 눕는데 너는 항상 바닥에 눕는구나 !그 생각을 하니 그림자가 안쓰러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보니 그림자가 2차원 평면이 아닌 3차원 입체감으로 보였다. 어라 ?! 그림자에 높이가 있는 것이었다. 아이고, 술에 너무 취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니 풍경도 빙글빙글 돌았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생각이 났다. 그림자를 껴안아 보았다. 그림자였지만 왠지 포근했다. 나는 외로웠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귀신인 모양이었다. 귀신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외롭지는 않을 터였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 머리가 지끈 아팠다.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그림자. 그래, 그림자 !해가 뜨자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후 다시 그곳을 찾았다. 벚꽃나무 그림자는 그곳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림자를 자세히 보니 진짜 그림자가 아니었다. 내 예감이 맞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세팅을 하고, 얼굴과 손도 검은 색으로 분칠한 여자였다. 그것은 일종의 위장이었다. 그림자로 위장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세상에 이런 일이 ! 만날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직장 생활이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가자미’처럼 바닥에 납작하게 누운 그림자를 깨웠다. 그림자가 일어났다. 검게 칠한 얼굴의 윤곽은 희미했으나 여자임에는 분명했다. 내가 말했다.
“ 직장 생활이 힘든가 봐요 ?“
“네에, 전 아이들을 가르쳐요. 교사에요 !“
“ 그렇군요. 그런데 왜 집도 없이 공원에서 노숙 생활을 하시죠 ?“
“재작년에 안양천변이 장마 때 물에 잠겨서 떠내려갔어요.
그래서 이렇게 그림자 생활을 한답니다. “
“ 아... 집이 떠내려갔다는 말씀이죠 ?“
“ 아뇨. 안양천변이 떠내려갔어요 !“
“ 어떻게 하천이 떠내려갑니까 ?“
“ 그야 저도 모르죠. 하여튼 하천이 떠내려갔으니 집도 같이 떠내려갔겠죠.“
“그러니깐 집이 떠내려갔다는 말씀이잖아요. “
“ 아니죠. 하전이 떠내려갔다니까요. 호호호. “
“ 하하하. “
“ 호호호. “
“그림자로 살아가는 분들이 많은가요 ?“
“ 저기, 그네 옆에 있는 갈참나무 그림자 보이시죠 ? 저 분은 기러기 아빠에요. 대기업에 다니지만 애들 유학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죠. 등골이 휘어서 집도 팔아버리고 저렇게 그림자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
그네 옆에서 그림자 흉내를 내며 납작 엎드려 있던 남자가 우리의 대화 소리를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겸연쩍은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깜짝 놀랐다. 그림자가 부스스 움직이며 일어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나 ! 나는 그 동안 그림자인 척하는 사람들에게 깜빡 속은 것이다. 여자는 계속 말했다. “ 저기 가로수 그늘 흉내를 내는 사람이 누군지 아시나요 ? 바로...... 가수 이문세’에요. 회사 하나 차렸는데 망했다고 하더군요. 쉿, 이건 절대 비밀이에요. 연애인이잖아요. 자존심이 무척 세요. “여자의 손짓을 따라가니 가로수 그림자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격하게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 저도 이 공원에서 그림자로 살 수 있나요 ?“ 여자는 내 말을 듣고는 나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이때 쓰레기통 그림자를 흉내 내던 남자가 기지개를 켜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 아따, 시부럴. 알콩달콩별사탕 놀이 하오 ? 아직도...... 모르것소 ? 뭐, 여긴 아무나 들어온다요 ? 그림자에게도 자격이란 거시 있는 거시지라. 생각 안 나요 ? 아저씬 작년 저 아카시아 나무에 목을 매 자살을 했단 말이오. 경찰차 와불고, 119 와불고, 그날따라 바람도 불고, 난리도 아니었지라. 으메, 으찌나무섭던지 ! 여태 자신이 죽은 귀신이란 것도 모르셨소,잉 ? 형씨, 저길 보시오 !“ 나는 쓰레기통 그림자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엔 그림자가 없었다.
“ 우리에게도 불문율이란 것이 있지라. 사령의 혼이 깃든 나무엔 그림자 집을 안 짓는다요. 으메, 저곳이 명당이었지, 명당 ! 형씨가 목 매 죽기 전에 내가 살던 곳 아니오. 참말로 징허요. 형씨 땀시 내가 이로코롬쫓겨나서 쓰레기통 연기나 하는 거 아니것소. 내가 왕년에 명품 사극 전문 배우 아니었소. 엑스트라 세계에서 나 모르면 간첩이지라. “ 쓰레기통 그림자의 말에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벚꽃이 그만하라고 쓰레기통에게 손짓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 귀신 주제에 뭔노무 스카프로 멋을 낸다요. 멋 내면 뭐 허요, 치맹적 매력의 소유자면 뭐 허요. 투명인간 같은 우리들 눈에나 보이지, 일반 사람 눈에는 보이기나 허것소 ? 당신 같은 귀신이나 우리 같은 그림자는 이 사회의 투명인간이오. 잉여인간일 말이오 ! 내가 당신같은 귀신이면 불알 두 쪽 당당히 내불고 돌아다녀 !“
쓰레기통 그림자가 툴툴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네모난 금속 쓰레기통이 놓인 자리에 가더니 몸을 둥글게 말아 그림자가 되었다. 다른 그림자에 비해 힘들어보였다. 하루 종일 몸을 말아 그림자가 되어야 하다니. 그가 내게 보인 적개심이 이해가 갔다. 아카시아 나무 그림자로 살았으면 지금보다는 편한 삶이었으리라. 아카시아 나무를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그날이 생각날 것도 같았다. 바람 불면 흔들렸을 내 몸을 생각하니 울음이 쏟아졌다. 여자가 나를 위로했다. “그래요. 당신은 오래 전에 죽었답니다. 하지만 슬퍼 마세요. 자, 내 몸 안으로 들어오세요. “ 여자가 내 옷을 벗겼다. 나는 금새 알몸이 되었다. 이때 몇몇 사람이 공원을 지나갔으나 소리를 지르거나 도망치지는 않았다. 다만 걸음이 빨라진 것 같았다. 그렇구나, 유령이구나. 나는... 보이지 않는 유령이구나.
나는 여자의 검은 구멍 속으로 숨었다. 촉촉하고, 따스하며, 부드러웠다. 젖가슴 또한 생각보다 컸다. 젖가슴만 큰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전체적으로 몸이 컸다. 나는 바닥에 누웠고 여자가 나를 덮었다. 벚꽃 그림자가 뚱뚱해졌다. 쓰레기통 그림자가 우리의 정사를 훔쳐보더니 한 마디 했다. “으메, 씨브럴 !치맹적 매력의 소유자는 죽어서도 인기가 하늘을찌른당가. 좋아서 좋것네. 좋아서 좋것어.음메좋것어. 시브럴, 오지게 허네. “ 쓰레기통 그림자는 또 다시 툴툴거렸다. 하지만 나는 너그러웠다. 이미 죽은 귀신이었으므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못된 귀신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공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벚꽃나무 그림자가 뚱뚱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누가 그림자에게 관심을 보일까, 어느 누가 밑바닥을 이해할까. 그때였다. 엄마와 함께 지나가던 사내아이’가 벚꽃나무 그림자를 보더니 말했다. “ 엄마, 저 나무 그림자가 다른 날보다 뚱뚱해졌어! 저 나무도 엄마 아빠처럼 밤에 레슬링 했나봐 ?엄마는 밤에 옷 홀딱 벗고 아빠랑 레슬링 하면 뚱뚱해지잖아. 아기 나왔잖아. 저 나무도 레슬링 했나 ?“ 엄마는 아들의 따귀를 때리며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벚꽃나무 그림자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위장을 지우고 화장을 하니 여자는 제법 예뻤다. 내가 옷을 입으려고 하자 쓰레기통이 소리쳤다. “ 아따, 시부럴 ! 유령이 뭔 놈의 패션이오. 훌라당 벗고 사시오 !“ 그 말에 여자도 동조했다. “ 그래요, 당신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벌거벗는 자유는 죽은 자의 특권이에요. 저도 유령이 되면 이 놈의 브래지어’ 벗고 다니고 싶어요. 얼마나 불편한지 아세요 ? 더 자요. 아무도 당신의 달콤한 잠을 깨울 사람은 없으니깐. “ 여자가 내 입에 키스를 했다. 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눈을 뜨니, 나를 깨운 사람은 경찰이었다. 경찰 옆엔 중년의 여자가 있었다. 내가 발딱 일어서자 여자는 연신 어, 어머 어머머머머 라며 고개를 외면했다. 내가 보이나 ?! 그럴 리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유령이므로 !투명인간이므로 ! 경찰이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 주민 신고를 받고 나왔습니다. 다 큰 어른이 이게 뭡니까 ? 어서 옷을 입으세요 ! 당신을 공공장소 음란죄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
을 정도의 중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오. 어서 옷이나 입으시구려. “ 경찰 옆에 있던 여자는 외면하는 척하면서 계속 나의 남근을 쳐다보았다. 소나무 훈제로 노릇노릇 구운 독일 소시지가 생각나리라. 크고, 쫀득쫀득하며, 알싸한 그런 맛. 먹고 싶겠지. 쳇, 쳐다보라지 ! 난 유령이라고. 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난 유령이야. 내가 보이기는 하나 ?“ 내 말에 경찰이 짜증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이 양반이 제정신이 아니구만 ! 당신이 유령이면 난 브르스윌리스요!!!! “ 이때 화장실 옆에 놓인 쓰레기통 그림자가 마구 흔들렸다. 쓰레기통은 웃음을 참느라 엎드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아차차. 그림자들이 날 골탕 먹였구나. 쓰레기 같은 자식과 벚꽃(벗고) 나를 품은 여자의 합작품이구나. 이문세도 웃음을 참느라 미세하게 그림자가 떨렸다.얼굴이 화끈거렸다.
두 손으로 그곳을 가렸지만 어디 포크로 소시지’를 가릴 수가 있던가 ? 부끄러워서 동동거렸다. 속았구나 ! 내가 동동거릴수록 쓰레기통은 거의 웃음을 통제할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울음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도 지나치면 고통이 된다. 안다, 다 안다. 나도 웃음이 나왔다. 난 유령이 아니었다. 멋지게 속았다 ! 나는 경범죄로 벌금 10만 원을 내고 풀려났다. 그날 밤 벚꽃나무 그림자는 내 사연을 듣고는 깔깔거리며 박장대소 했다. 멀리서 쓰레기통이 웃는 소리도 들렸다.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가 깊게 벤 웃음소리였다. 징허게 웃었다. 그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갈참나무도 웃었다. 가로수도 웃었고, 벤치도 웃었다. 문화촌 공원 간판 입석도 웃었다. 그리고 벚꽃도 신나게 웃었다.
정말 유쾌한 여자였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공원 그림자들과 친해졌다. 쓰레기통과도 친해졌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명품 쓰레기통 그림자 연기를 칭찬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 연기에 혼신을 다했다. 그는 서울시 소유 금속 쓰레기통보다도 더 네모 반듯한 그림자를 연기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로수 이문세 씨와도 친해졌다. 술에 취하면 기분이 좋아진 이문세는 노래를 부르고는 했다. “ 가로수 그늘 아래에 서면 / ...... /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 가을 창가에 기대어 보네 / 이렇게도 아름다웠던...... /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여인 / 우, 우우우우우.......“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아카시아 나무 그림자가 되었다. 달의 위치에 따라서 방향을 정한 후 눕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위치는 광원에 따라서 달라지니깐 말이다. 내 마음대로 방향을 정할 수는 없었다. <일정한 방향으로 누웁시다 !>문화촌 공원 그림자 클럽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그렇다고 모두 다 같은 방향으로 눕는 것은 아니었다. 은행나무 그림자는 예외였다. 우리가 모두 동남쪽으로 누울 때 은행나무 그림자는 가끔 동남쪽으로 누웠다. 은행나무 그림자는 대부분 북서쪽으로 누웠다. 과학자의 눈으로 보자면 그것은 해괴한 일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광원에 따라 그림자는 일정한 방향으로 지는 것이아닌가 ! 하지만 이 해괴한 일에 대하여 의심을 품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남은, 그림자가 되지 않은, 투명인간이 되지 않은, 바닥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림자가 된 자에 대하여, 투명인간이 된 자에 대하여, 바닥이 된 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무도 그림자와 바닥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 빌어먹을..... 이런 신파는 개나 줍시다. 다시 명랑으로 돌아옵시다. 은행나무 그림자를 연기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 검은 리트리버’였다. 온몸이 검은 색이라 달리 분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눕기만 하면 되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였다. 언제부터인가 공원을 떠돌던 개는 그림자가 되었다. 개는 낮에도 공원에 남아서 북서쪽을 바라보고는 했다. 바람이 불면 코를 씰룩거렸다. 옛집 생각이 간절한 모양이었다. 나는 벚꽃나무와 결혼하였다. 그림자끼리 결혼한 세계 최초의 커플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쓰레기통은 여전히 말이 많았고, 가수 이문세가 연기하는 가로수 그림자는 여전히 우울해 했다. 그리고 기러기 아빠인 갈참나무도 변함없이 가족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직장 일을 끝내면 바로 문화촌 공원으로 왔다. 그는 제일 먼저 화장실에 가서 양복을 벗고는 검은 타이즈로 갈아입는다.
그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였다. 내 시선을 의식한 듯 그가 말했다. “ 바닥엔 별별 것이 다 있습니다. 별 빼고는 다 있지요. 둥근 돌, 모난 돌, 작은 돌, 큰 돌...... 그중에서 항상 모난 돌이 이렇게 몸에 박힙디다. 자식은 모난 돌입니다. 그게 아버지의 운명 같습니다. 내가 공원 모퉁이 갈참나무 그림자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가족들은 알고 있을까요 ? 모르죠. 알아서도 안 됩니다. " 그는 검은 구두약으로 자신의 얼굴을 칠했다. 그는 분장을 마치고는 갈참나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었다. 모난 돌에 상처 입지 말라고 힘차게 바닥을 쓸었다. 쓰레기통 그림자가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아따, 징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