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게'가 사는 집은 패각이다. 연체동물의 몸에서 분비된 석회질이 단단한 조개껍데기를 만드는 것이다. 겉은 딱딱한 각질의 세계이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뼈 없는 무른 몸이다. 뼈 없는 몸이 뼈로 만든 집을 만드는 것이다. 달팽이도 마찬가지다, 우렁도 마찬가지다. 단단한 조가비 속에 사는 것은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짐승이다. 아, 이 위악적 은폐'란 ! 선인장 가시'도 마찬가지다. 가시는 말랑말랑한 몸이 토해 놓은 딱딱한 패각'이다. 그 가시를 가르면 동글동글한 푸른 잎'이 숨어 산다. 그러니깐 날카로운 가시는 푸른 잎이 숨어 사는 방이고, 달팽이 집이며 소라 껍질이다. 이 좁고, 날카로우며, 위협적인 가시 안에서 사는 넓고, 부드러우며, 촉촉한 잎이라니. 아, 이 위악적 삶의 세계란 !
- 패각과 가시, 2011년 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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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방 벽'에 그린 그림, 술병 사이로 지나가는 건 지렁이'다.
내 옷은 달팽이의 껍데기'다.
지렁이의 시
그저 온몸으로 꿈틀거릴 뿐, 나의 노동은
머리가 없어 그대 위한 기교는 알지 못한다
구더기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만들지만
내 땀 다 짜내어도 그대 입힐 눈물
한 방울일 수 없어
햇살 한 잎의 고뇌에도 내 몸은 하얗게 마르고
天刑이듯, 그대 뱉는 침 벗삼아 내 울음
알몸 한 벌 지어 오직 꿈틀거림의 노래를 들려주겠다
이 세상의 모든 빛,
그대 사랑에게 겸허히 먹히어 주겠다
나를 지킬 무기는 없어
비록 어둡고 음울한 습지에 숨어 징그러운
몸뚱이끼리 얽혀 산다 해도 어둠은 결코
적소(謫所)가 아니다 몸뚱이가 흙을 품고 있는 한
우리 암수의 성기가
사흘 밤 사흘 낮을 몸 섞는 풍요로운 꿈으로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하는 몸짓으로
그대의 땅을 은밀히 잉태하고 있는 한
- 김신용, 시선집 [ 버려진 사람들 ]
나는 여자들에게 매력 없는 수컷'이었다. 키는 작고 얼굴은 컸다. 설상가상 공부도 못했고 집도 가난했다. 한마디로 별 볼 일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 뇌 > 가 고장이 나서 엉뚱한 짓을 자주 하고는 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꼰대들을 향한 반항심'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진은 아니었으나 일진과 친하게 지냈다. 내가 내 주먹을 " 원 펀치 쓰리 강냉이 " 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깍두기였다. 일진의 보호를 받는 깍두기였다. 고등학교 때 내 별명이 대학생이었다. 아이들이 보충수업을 위해 아침 7시에 등교할 때, 나는 10시나 11시쯤에 학교에 갔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느닷없이 밖으로 나가 운동장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는 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뇌가 고장났으므로. 아이들은 자유로운 내 등하교 시간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듣고 싶은 과목만 들었다. 듣기 싫은 과목은 듣지 않았다. 교실 대신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체육 시간에는 교실에서 잠을 잤다. 처음에 나를 대학생'이라고 한 사람은 고2 담임이었던 ○○○ 수학 선생'이었다. 때려도 때려도 반응이 없으니 화가 난 선생이 소리쳤다. " 니가 대학생이야 이 새끼야. 골라서 수업 듣게 ? " 그 이후, 아이들은 나를 대학생이라고 불렀다. 내가 수업 시간에 답답해서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해바라기를 하면 다른 반 교실에서도 그 모습을 창문 밖으로 보며 수근덕거렸다. 도대체 저 녀석은 뭐하는 녀석일까 ? 아버지가 이 학교 이사장이라도 되는 걸까 ? 그렇다, 나는 전교생들에게 초미의 관심 대상이었다. 나름 사랑받고 자란 몸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자에게는 매력 없는 수컷이라는 점이었다. 매력을 떠나서 여자들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기 일쑤였다.
미팅'에 나가면 폭탄 역할 하기 딱이었다. 고상한 문학 모임에서는 스티븐 킹이 셰익스피어'보다 훌륭하다고 해서 욕을 먹었고, 문학판을 기웃거리고 싶어하는 애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권혁웅과 남진우를 존나게 까서 문학소녀들에게 욕을 먹었다. 왜냐하면 자기 학교 교수였으니 말이다. " 곰곰발, 짜져 등신아 ! 호호호. " 나름 동성들에게 사랑받고 자란 몸인데 이성들에게 무시를 당하니 몸 둘 바를 몰랐다. 꼬이는 것은 수컷뿐. 수많은 게이들이 나를 흠모했지만 나는 천성이 색기 있는 풍각쟁이'여서 여자의 젖가슴이 좋았다. 수컷들, 밤꽃 냄새 풍기는 놈들에게 질려버린 몸이다. 동성애자이건 이성애자이건 사내새끼'라면 재수없었다. 지금도 나는 수컷들이 징그럽다. 어찌 그리 멍청한지.... 짜져, 등신들아 ! 어쩌자고 신은 내게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많지만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운명을 주었을까 ?
그때부터 몸치장을 과하게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내 패션은 그렇게 탄생했다. 명동을 지나가면 가끔 패션 잡지 사진 기자들 눈에 띄어서 길거리 패션 카탈로그에 실리기도 했다. 3개월 구독권과 부록 따위를 줬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길거리 패션 캐스팅이 3번 정도 된 것을 보면 독특한 패션이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과하다는 데 있다. 귀걸이를 하고, 에스닉풍 목걸이를 차고 다녔다. 처음에는 목걸이 한 개를 차고 다녔는데 이제는 기본이 3개 이상은 차고 다녀야 했다. 팔찌도 양쪽에 하고, 반지를 10개까지 끼고 다닌 적도 있다. 이 정도면 패션이 아니라 < 세상에 이런 일이 > 에 나올 만했다. 광우병 촛불 집회 때는 찢어진 청바지에다가 아트 슈피겔만의 걸작 만화 < 쥐 > 를 본떠서 쥐가 불타는 그림을 그리고 시위현장에 나간 적도 있다. 페루의 치요 모자를 쓰고,
이상한 사진가방을 들고, 목걸이를 네 개나 주렁주렁 차고, 무색 라운드티'에다가는 유성 매직으로 " 쥐새끼는 가라 ! " 라거나 " MB정권 웃으면서 코 판다, 개새들아 ! " 라고 썼으니 전경들이 보기에는 인상에 오래 남았을 것이다. 가끔 나를 알아보는 전경도 있는 듯했다. 눈빛이 그때 그 새끼 아니야 ? 라는 눈빛이었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 패션'이었다. 사실 이러한 패션은 테러'에 가까웠다. 내게는 자랑스러웠으나 누군가에게는 내 패션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보다 못한 어떤 이가 나에게 말했다. " 거지 패션의 선두주자 " 라고 말이다. 옷을 멋지게 입고 다녀서 여자들을 " 다자빠뜨려 " 할려고 했는데 과해서 그만 거지'가 된 것이다. 과유불급이란 소리가 있지 않은가 ? 과하면 부족함만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옛날에 하던 패션의 10% 정도만 하고 나간다. 얼굴에 문신을 하려고 했던 계획은 접기로 했다.
가만 보면 비싼 옷은 화려하지 않다. 디자인은 대부분 기본적 패턴에서 약간의 변형을 줄 뿐 기본에 충실하다. 반면 싸구려 옷은 화려하다. 옷이 화려하다는 것은 디자인이 과하게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패션이 와사비'처럼 자극적이었던 이유는 싼 옷'만 샀기 때문이었다. 동대문이나 도떼기시장 가서 옷을 사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시바 ! 하지만 후회하지 않으련다. 나는 삐에로 같은 내 키치적 패션 감각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 비싼 생선일수록 요리를 할 때는 자극적인 양념을 섞지 않는 법이다. 싱싱한 대구 생선은 별다른 밑간 없이 소금만으로도 맛을 낼 수 있듯이, 비싼 옷이 기본적 패턴에 충실한 이유는 고급 원단으로 승부를 걸기 때문이다. 반면 비린내가 심한 생선일수록 독한 양념으로 비린내를 지우듯, 싸구려 옷은 싸구려 원단을 감추기 위해서 색이 점점 화려해지고 디자인이 과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라는 인간은 원단 자체가 싸구려였다. 별 매력 없는 놈이어서, 비린내를 지우기 위해서, 독한 양념을 뿌렸고 색을 과하게 썼다. 그것은 보호색이었다. 뼈 없는 무른 몸으로 태어난 달팽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흙빛으로 위장한, 딱딱한 껍데기 속에 숨듯, 나는 무른 몸을 숨기기 위해 딱딱한 척하는 인간이었다. 나라는 인간과 침대에서 뒹군 적 있는 여자는 안다. 내 속살이 달팽이 같다는 사실 말이다. 하여, 친구여 ! 와사비 같은 내 패션에 돌을 던지지는 마라. 내가 입은 것은 옷이 아니라 달팽이의 껍데기'였다. 구더기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만들었지만 내 몸은 날개를 만들지도 못하는 지렁이'였다.
덧.
생각해 보니, 내가 지렁이 그림을 꽤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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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사이로 지나가는 지렁이 : 나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말하련다. 지렁이를 키운 적 있다. 환경 단체'에서 지렁이 아파트를 분양하는 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지렁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징그러워서 만지지도 못했는데 키우다 보니, 아이구야.... 이렇게 예쁜 놈들도 없다. 고슬고슬하게 싸는 똥조차 예쁘더라. 키우다 보면 지렁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함에 빠지고 만다. 지렁이는 피부가 워낙 약해서 지렁이를 사람 손 위에 얹어놓으면 화상을 입기도 한다. 참... 이 벽화 이름은 < 안녕, 밤이여 ! >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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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꽃 사이로 지나가는 지렁이 : 한때 열심히 지렁이 그림을 그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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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기월식 때 지나가는 지렁이 : 사진이 짤려서 잘 안 보이는데 맨 아래에 나비 애벌레와 지렁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지렁이가 화려한 나비를 보고 나도 크면 나비처럼 될 거라며 희망을 품자 왼쪽에 있는 나비 애벌레가 콧방귀를 뀐다. " 야, 이 멍청아 ! 너는 날개조차 만들지 못하는 지렁이일 뿐이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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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아지풀 사이로 지나가는 지렁이 : 일종의 잔혹 그림 동화'라고 할까 ? 털복숭이 강아지풀과 벌거숭이 지렁이가 친구가 되어 같이 여행을 떠난다. 강아지풀은 털이 없는 지렁이가 부럽고, 지렁이는 털이 많은 강아지풀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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