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홀딱 빠졌다. 이름 때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기하게도 강원도의 지명은 모두 시적인 느낌을 간직했다. 물치항이라는 그 말이 주는 느낌이 좋아서 물치항에 갔고, 양양이라는 그 순한 어감'이 좋아서 양양을 찾았다. 아야진도 마찬가지였다.반면 통리는 김혜순 시인의 < 트레인스포팅 > 을 읽다가 왠지 모르게 그 이름이 마늘처럼 아려서 통리를 찾아갔다. 이름이 예뻐서 버스터미널에서 우발적으로 고른 행선지였다. 속초에 터를 얻을까 하고 찾아간 곳은 터앝에 잡초 무성한 빈집'이었다. 전에 살던 세입자는 시한부 선고 받고 요양차 이곳에 머문 30대 서울 남자였다고 한다. 오기였을까 ? 시한부라는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을까 ? 그는 2년 치 월세를 일시불로 미리 셈을 치른 후 혼자서 터앝을 가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머문 기간은 4개월이 전부였다고. 쓸쓸히 죽어갔다고. 그러니깐 그 빈집은 여전히 죽은 자가 세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집을 소개한 노인이 말했다." 사람 손때 묻은 흙'은 용케 알아. 주인 없으면 제멋대로 자라지. 사랑 받지 못한 아이들처럼 ...... " 노인의 말에 문득 코멕 매카시가 쓴 < 모두 다 예쁜 말들 > 에 나오는 문장이 떠올랐다. 흉터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고, 과거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그 빈집은 그 사내의 흉터였다. 사랑 받지 못하고 웃자란, 잡초 무성한 터앝도 그가 남긴 흉터'였다. 쪽창에서 바라본 터앝은 자꾸 그가 살아온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407143 섹스는 끝이 막힌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일 中
비평이냐 사평'이냐
비평의 사전적 의미는 "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 " 으로 되어 있다. 반면 서평은 " 책의 내용에 대한 평 " 을 뜻한다. 그러니깐 비평가는 텍스트'에 집중해야 하고, 서평가는 책이라는 상품 가치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두루두루 평한다. 여기에는 책 만듦새'를 비롯하여 각종 자질구레한 것들을 둘러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비평가는 집 설계도를 보는 것이고, 서평가는 만들어진 집을 보는 것이다. 수압은 좋은가 : 수도꼭지를 돌려보기도 하고, 방음은 잘 되어 있나 : 바닥을 두들겨보기도 한다. 만약에 이 과정에서 하자'가 있으면 시공사에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좋은 책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인 경우는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드러내도 이상할 거 없다. 그런데 그 말을 비평가가 말하면 노골적인 것이 된다.
비평가가 책 만듦새를 넘어 책 판매량까지 걱정하며 글을 쓰게 되면 꼴사나운 풍경이 연출된다. 꼴사납다는 표현이 그렇다면 오지랖이라고 해두자. 하여튼 비평이 서평에 가까우면 안 되고, 서평 또한 비평 흉내를 내면 안 된다. 그들은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라 이란성 쌍둥이'다. 그런데 대형 출판사 문예지를 끼고 열심히 활동하는 문학평론가들은 비평의 사전적 의미'조차 잘 모르는 것 같다. 덕담은 넘쳐나는데 비판은 없다. 당연한 현상이다. 출판사로부터 청탁을 받고 글을 쓰니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그러니 덕담이 팔 할이다. 문학평론가에게 있어서 출판사를 자신의 밥그릇에 밥 숟가락 떠다 줄 손님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게임은 종료된다. 죽비소리가 없으니 요즘 비평은 허튼소리'가 된다. 허튼소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걸레 스님 아닌가 ! 그렇다면 허튼소리만 하는 비평가는, 아 ! ( 문학평론가들이 모두 그렇다는 소리가 아니다. 독고다이 전투형 문학평론가도 많다. )
언제부터인가 비평이 대형 출판사의 홍보부대로 전락한 이후부터는 비평가가 쓴 비평을 믿지 않는다. < 두근두근 내 인생 > 에 쏟아진 극찬에 질려버렸다. 평론가는 출판사 눈치만 살살 살피고, 문단에서 뜨고 싶은 신출내기 소설가와 시인은 평론가 눈치만 살살 살피고, 독자는 책 말미에 부록처럼 끼워진 비평문이나 추천사가 출판사의 홍보 문구였다는 사실을 모른 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고착되니 정작 조명받아야 할 작품은 조명을 받지 못한다. 문단에 거리를 두는 작가는 잊혀진다. 홍보의 생명은 구라와 허세에 있다. 수많은 부동산 관련 광고 전단지'를 보라. " 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 라고 써 붙인 광고 전단지는 알고 보면 우사인 볼트'처럼 뛰어야 가능한 판타스틱한 거리'이다.
광고 전단지만 보면 역세권이 아닌 곳이 없다. 역 하고는 상관이 없는 내가 사는 달동네 집도 어느새 도보로 10분 거리'가 되어 있다. 그러니 당연히 비평가의 평론을 믿지 못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평론집'보다는 서평집'에 믿음이 간다. 깊이가 없을 것이란 우려는 지나가는 방동사니'에게 주자. 서평이란 원래 깊이가 없다. 그것이 전제'다. 그러나 깊이가 없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식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먹는 애피타이저가 주 요리'보다 짜고, 맵고, 달고, 심지어는 웅숭깊은 맛까지 선보인다면 그것은 식전 요리로써의 자격이 없다. 애피타이저의 기본은 슴슴한 맛'이다. 서평가가 비평가 비평문 흉내를 낸다고 조사 하나하나를 분석해서 작품을 해부한다면 그것은 서평도 아니고 비평도 아닌 만평이 된다. 스피노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고 말이다.
서평이란 깊게 파기 위한 전단계, 즉 넓게 파기'에 해당된다. 이 작업을 두고 깊이가 없으니 읽을 필요 없다고 하면 곤란하다. 비평가가 비평문에 허튼소리만 작작하면 짜증나지만, 서평은 서평가가 딴소리'를 자주 할 수록 재미있다. 예를 들어 헤밍웨이의 < 노인과 바다 > 에 대한 서평을 쓰다가 느닷없이 메이저리그 만년 하위팀 플로리다 말린스'에 대한 이야기로 빠진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다. ( 말린스(Marlins) 가 청새치라는 뜻이고, 구단주가 청새치 낚시광'이었다는 사실은 헤밍웨이와 닮은 구석이 있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플로리다'에서 청새치 낚시를 즐겨 했다. ) 독자가 서평을 읽는 이유는 < 제품 사용 후기 > 를 통해 좋은 상품을 고를 수 있는 정보를 얻으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 밑줄 " 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막연한 연정을 서평가가 시원하게 그 느낌을 묘사할 때가 바로 서평집을 읽는 맛이 난다.
김혜자'였으면 " 그래, 이 맛이야 ! " 라고 외쳤을 것이다. 타자의 문장에서 내가 친 밑줄을 발견하는 것은 쾌락'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평가가 갖추어야 할 재능이다. 내가 김혜순의 < 트레인스포팅 > 이란 시를 읽고 나서 무작정 " 통리 역 " 으로 떠났듯이, 곽재구 시 < 사평역에서 > 를 읽고 무작정 사평역을 가기로 했던 적이 있다. 내가 톱밥 난로로 덥혀진 대합실'이라는 그 웅숭깊은 서정에 끌려서 그곳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 사평역에서 > 란 시 때문이 아니라 그 시에 대한 어느 비평가의 비평문 때문이었다. ( 그가 서평가였는지 비평가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비평가라 적어둔다. ) 그 비평문은 일반적인 비평문처럼 딱딱하지 않았다. 어쩌면 비평가에게는 단점이 될 수 있는 지나친 감성이 묻어난 글이었는데, 그 글을 읽고 나면 사평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는 이 비평문을 위해 사평역을 답사했으리라.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생생한 풍경과 풍광을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 사평역 " 이란 존재하지 않는 역이다. 그러니깐 엄밀히 말하면 평론가가 묘사한 그 생생한 기시감은 가짜인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이 호객 행위에 돌을 던지랴 ! 내가 < 사평역에서 > 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 사평역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그 글 속에 " 밑줄 " 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비록 신파에 가까운 비평 때문에 속았으나 여전히 그 " 사평 " 에 대한 비평, 혹은 그 서평이 좋은 글이라는 것을 믿는다. 요즘 평론은 인간적인 맛이 없다. 칭찬은 하는데 속에서 우러러나오는 그런 칭찬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 하나도 안 늙었네 ! "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믿지 마시라. 당신 늙었어. 지금의 비평은 생생한 맛이 없다. 죽은 글 같다. 그런 평론은 아무리 분석이 날카롭다고 해도 말 그대로 死評 이다. 김현의 평론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분석이 예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문학에 쏟은 사랑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하여튼, 요즘 평론 ! 엿이나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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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이지만 혹여 이 글 제목 < 비평이냐 사평이냐 > 에서 사평'을 서평에 대한 오타이거나 비평 문화에 대한 신랄한 은유로써 死評'이라고 지레짐작하신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냥 " 사평 " 이다. 임철우와 곽재구에게는 존재하지만 지도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사평역 말이다. 사실 아름다운 존재는 사라진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