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ㅣ 식물은 무섭다 ?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관객이라면 봉준호가 감독한 영화 마더‘라는 제목이 머더’의 숨은 뜻이라는 사실을 쉽게 간파했을 것이다. 이 은유는 은유라고 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속보이는 직유이다. 그러니깐 영화 속 어머니는 살인하는/머더 어머니/마더‘이다. 동시에 양육과 사냥을 겸하는 암수한몸’이다. 아니다, 정정하겠다. 사냥 영역으로 확장하는 모호한 암컷‘이라고 쓰겠다. 각자의 성-역활'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겪으면서 서로 섞인다. 사실 김혜자'라는 배우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선 배우이다. 신경쇠약직전의 배우' 이다. 다만 우리가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영화 마요네즈'에서 보여준 김혜자의 연기'는 불안한 눈빛, 신경질적인 얼굴 근육의 떨림, 그리고 병적으로 연약한 목소리'는 뭔가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를 관객에게 전이시켰다. 전무후무한 배우였다. 어쩌면 전설적인 베티 데이비스'의 악녀 역'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던 그녀가 영화 마더'에서 기괴한 - 엄마 역을 연기했다. 봉준호, 그는 늘 탁월하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약재상'이다. 각 식물의 뿌리, 열매, 잎을 분류하고 보관하는 곳으로 그녀는 온전히 식물의 영역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니깐 이곳은 식물의 서지학'이라 불릴 만한 곳이다. 하지만 동시에 식물의 시체안치소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식물의 사생활'은 뒤집어 보면 놀라울 정도'로 폭력적이다. 자신의 몸에 치명적인 독'을 품은 것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의 독성이다. 흔히 우리가 잿물이라고 하는 독 ( 마시면 죽는다. ) 은 식물의 죽은 몸인 재에서 추출된 성분이 아니었던가 ?

 

입 구에서, 뿌리 근' 까지 : 김혜자는 아들 원빈의 섭취에서 배설까지의 전 과정을 관찰, 기록, 처방한다. 이 장면에서 아들은 보약'을 마시면서 담벼락에 소변'을 본다. 그러자 여자는 아들의 배설되는 구멍'을 유심히 바라본다. 口에서 根 ( 아무래도 이 글을 읽는 당신, 이 한자 모를 것 같다. 뿌리 근‘이다. ) 까지 ! 어머니는 순환의 이상 유무’를 체크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수상한 모자‘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은밀한 부분을 볼 수 있는 시선의 자유는 곧 우월적 신체 소유권자-들이다. 우리가 아우슈비츠 와 미 포로수용서에서의 이라크 포로 학대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자는 노예의 벌거벗은 신체'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녀는 그동안 헌신적으로 남편 없이 외아들'을 돌본다. 어화둥둥, 내 새끼. 어화둥둥, 내 새끼 ! 엄마에게 있어서 아들 도준은 온실 속 화초다. 아들에게 물을 주자 물은 곧바로 뿌리'를 통과한다. 아들의 뿌리 ( 아들의 뿌리'를 곧이곧대로 한자로 표기하자면 남근/男根이다. ) 가, 촉촉하게 물에 젖는다 !! ! 입에서 똥구멍까지, 섭취에서 배설까지 신속하게 진행되는 이 순환은 동물의 소화 기관'이 없을 때에만 가능한 설정이다. 말 그대로 아들은 온실 속 화초이다. 어쩌면 그녀는 아들의 소화 기관을 제거했는지도 모른다. ( 아들의 고백으로 밝혀지지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독초제'를 먹여서 장기를 불태운다. 28살의 아들이 5세의 지적 수준에서 성장이 멈추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 수상하다. 이들의 관계. 바로, 이 지점. 라캉을 인용하자면 얼룩'이다. 틈이며 균열이다. 뭔가 꼬였다는 뜻'이다 !

 

빗금 친 아버지 A ,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아들 : 남편 역'을 담당하는 28세의 아들'은 사실 5세 전후로 성장'을 멈춘 상태'이다. 구순기와 항문기 사이에 놓여있는 존재'이며 발기하지 않는 페니스를 가진 존재이다. 딱딱한 존재가 아니라 물컹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 마더에서의 모자 관계는 성관계는 없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보면 어느 순간 서편제의 플롯과 얽힌다. 서편제에서는 아버지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딸을 눈을 멀게 하지만 영화 마더'에서의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아들의 성장을 멈추게 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어머니는 강제로 아들의 성장'을 멈추게 했을까 ?

 

 

프로이트는 욕망의 삼각형'에서 그 관계망'을 아버지 - 어머니 - 아들'로 설정했다. 처음부터 딸'은 배제되었고 프로이트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여성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 알 수 없는 nothing'이었다. 그러니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처음부터 여성이 배제된 텍스트'였다. 어머니'라는 지위, 즉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 안에서만 여성은 분석되어졌다. 완전하지 않은 텍스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영화 마더'는 오히려 위의 욕망의 삼각형'에서 아버지'를 빗금 친다. 아버지의 자리를 부재 중'으로 남겨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자 모자 관계'는 기괴하게 엮인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원빈은 엄마와 떡친 아들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수상한 관계'다. 김혜자는 남편의 자리'에 원빈을 놓고, 원빈은 애인의 자리에 김혜자를 놓는다. 성-관계'가 있었는가, 없었는가'는 의미가 없다. 서로 빈 자리를 채웠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그들은 서로의 욕망을 채운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성 관계의 유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렇듯 관계의 지정학이 오류를 범하자 문제는 심각해진다.

 

▷ 죽음의 저장소 , 건초 약재상 : 이곳은 죽은 식물/여성-들의 집합소다. 다만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살육장과는 다를 뿐이다. 빅-마더 김혜자는 작두로 식물의 목을 자른다. 울대 없는 성대'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쏟아진다. 그러니깐 김혜자는 식물들의 목을 자르는 도살업자 - 괴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종 살인’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녀는 사냥 영역으로까지 확장하는 모호한 여성‘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동물 가면'을 숨긴 채 식물-되기'를 재현하고 있거나 식물성을 버리고 동물-되기'를 준비하는 길짐승'이다. 하, 수상하다. 처음부터 그녀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 영화 에이리언과 괴물' : 이 영화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것은 디자이너 기거가 창조한 남근을 닮은 에이리언'이 아니라, 그 알'들을 품은 저 거대한 동굴'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두려움의 본질은 날뛰는 괴물의 실체'가 아니라 장소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품은 한강 철교의 내부'다. 그렇다면 이 동굴/내부'의 은유는 무엇일까 ? 정답은 여성의 거대한 자궁'이다. 불임에 대한 남성 컴플렉스'는 생산의 공간인 자궁'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다. 사실 세상의 모든 괴물은 여성형'이다. 거대한 자궁에 대한 경외'다. ( 위의 이미지와 이 스틸사진은 기분 나쁘도록 닮았다. )

 

 

 

리플리 ! 당신, 배 배배배배배 배신이야. " : 지금까지의 영화이론은 공포영화에서의 괴물의 실체'를 남성'이라고 규정지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공포영화는 괴물-남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괴물-여성'이 사회 전체'를 상대로 히스테릭을 부리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괴물 영화 혹은 난도질 영화에 나오는 공격자의 공통점은 가면이다. 이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데 이 가면'은 모두 자신의 얼굴과는 다른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깐 가장 무시무시한 가면을 쓴 괴물일수록 가면 속의 얼굴은 선량한 얼굴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을 공격하는 괴물 / 공포영화 속 남성'은 사실 남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가면을 쓴 여성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 모든 괴물은 여성이다. 에이리언3'에서 시고니 위버'를 공격하는 퀸 에이리언의 행위는 여성 주인공을 공격한다기보다는 여성성을 스스로 거세한 주인공을 응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머리를 삭발하는 행위'는 곧 남자와 섹스하지 않겠다는 맹세이며, 생산 주체의 포기 선언'이다. 퀸 에이리언'이 리플리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 당신 배. 배,배,배,배, 배신이야 ! "

 

 

 

 

이 영화에서 주인공 마더'는 얼핏보기엔 자신의 모성 역활'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세상에나 ! 이 영화를 지극한 모성애'로 이해하다니, 내가 보기엔 그 정반대'다. 이 영화는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이며 영역 가로지르기'에 대한 재미있는 보고서다. 그녀는 아들과의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식물에서 동물-되기'를 이행 중에 있는 괴물'이다. 퀸-에일리언'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김혜자의 성 역활 바꾸기'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식물성을 버리고 동물성'을 연기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알레고리'가 바로 초원이다. 여기서 초원은 일종의 경계'이다. 자아와 이드'의 경계이며, 문명과 금기의 경계이고, 식물과 동물의 경계, 생과 사의 경계 그리고 이곳과 저곳의 경계이다. 그녀가 이 초원을 가로지른다는 행위는 넘어서면 안 되는 영역으로의 월담 행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넘어서면 절대 안 되는 영역이다. 김혜자는 이 영역을 가로지름' 으로써 동물이 된다.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영화 " 캐리 " 는 여성 생산성/ 거대- 자궁 '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잘 묘사한 영화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사춘기 소녀의 생리'로 시작해서 돼지 피를 뒤집어쓴 소녀의 모습으로 끝난다. 캐리의 몸이 생산의 주체'( 생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뭐, 다 아는 이야기지만 ! ) 가 되자 남성 사회는 생리를 시작한 사춘기 소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때가 가장 건강한 자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 피'를 뒤집어쓴 캐리의 얼굴은 생리하는 오프닝 이미지와 겹치면서 생리하는 여성 성기'를 떠오르게 한다. 캐리는 이빨 달린 여성 성기, 바기나 덴타타'이며 메두사의 얼굴이다. 생리혈이 흘러 넘친다는 측면에서 캐리는 대-생산자'이며 초월자'이다. 메두사 신화의 핵심은 메두사의 얼굴을 보면 딱딱하게 굳는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메두사의 얼굴'을 여성 성기'로 보았다. 왜냐하면 남성들은 메두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 돌덩이'가 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딱딱하게 굳는 현상'을 페니스의 발기'로 보았고, 메두사의 얼굴을 여성 성기'로 이해했다. 캐리의 얼굴을 본 순간 수컷인 당신은 죽는다.

 

 

피 흘리는 여성 얼굴 이미지'는 마더'에서도 차용된다. 피 묻은 얼굴'은 폐경이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는 증거와 함께 섹스 할 수 있는 여자, 나아가 생산의 주체자'임을 나타낸다. 그렇다, 그녀는 아직 생리하는 여자'이다. 설명했다시피, 피흘리는 얼굴 혹은 생리하는 메두사'는 불완전한 여성의 몸이 생산-주체'가 되어 완전한 몸으로 재탄생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김혜자는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하여 문아정'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이 행위'는 일종의 과거로의 여행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라. 21 세기 대한민국에서 쌀을 얻기 위해 몸을 판다는 것, 상당히 오래된 매춘 아닌가 ? 화폐 거래가 아닌 곡물 물물교환이라는 점이 오래전 과거형임을 암시한다.

 

감독은 동시대성으로 두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사실은 옛날옛적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이다. 자, 여기서 이야기는 재미있어진다. 김혜자가 마주친 것은 바로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깐 문아정'은 김혜자의 과거형'이다. 이쯤에서 영리한 독자'는 김혜자의 정체'를 간파했을 수도 있다. 김혜자 그 여자는 문아정 이 여자의 유령이다. 그러니깐 김혜자는 누명 쓴 아들의 진짜 범인을 찾아나서는 게 아니라, 자신을 죽인 진짜 범인'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 그녀는 nothing 이다. 영화 마더'는 남성사회가 창조해낸 모성 신화'의 허구를 폭로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김혜자는 자상한 어머니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성관계를 맺는 어머니, 나아가 가짜 아들-들과 관계'를 맺는 어머니'를 연기한다.

 

그녀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해서 폐경'을 미룬 여자이며, 동시에 유사 아들-들의 욕망을 위해서 자리에 눕는 퍼블릭 우먼'이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아들과 섹스하는-여자, 나아가 창녀'로 명명하는 순간 가부장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그러자 빗금 친 존재인 대상 A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복귀한다. 감독은 교묘하게 현재와 과거의 영역'을 하나의 공간 속에 가두어두고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 7박8일 : 눈물겨운 어머니의 모험담 " 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 한 여자의 일생 " 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더'를 연기하는 김혜자'는 문아정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지금 문아정을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범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는 중이다. 김혜자의 어릴 적 이야기가 바로 문아정'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귀환, "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 " : 고물상은 고장난 기계들의 무덤이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돌아와서 오이디푸스 욕망-기계'를 다시 가동하려고 한다. 이 기계'가 작동되면 아버지의 자리'를 넘보던 어머니와 아들'은 응징되리라. (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고장난 보일러 기계'는 오이디푸스 욕망 기계이다. 이제 그가 이 기계를 작동시키면 혼돈은 질서를 찾을 것이다. ) 그가 전화를 거는 순간 여자'는 남자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친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견고해진다. " 씹새끼,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 "


 

약재상과 고물상'은 죽은 것들을 저장하는 곳'이란 측면에서 서로 닮았다. 어머니의 영역으로 대표되는 약재상이 죽은 식물들의 저장고라면, 아버지의 영역으로 상징되는 낡은 기계-들'은 고장 난 기표들의 저장고'다. ( 시작 글, 서두를 보라 ! ) 그리고 버려진 잡동사니를 쌓아둔다는 의미에서 이 두 영역은 모두 의식 너머의 영토에 속한다. 문아정의 핸드폰 또한 같은 의미에서 동일하다. 핸드폰은 부모와 성관계를 맺는 ' 아이의 은밀한 영역 ' 이다.

 

 

약재상의 약초, 고물상의 고장 난 기계, 주인을 잃은 핸드폰 속에 저장된 죽은 메모리'는 모두 자아와 충동하는 이드'이다. 이들은 ( 죽은 식물/ 죽은 기계/ 정지된 핸드폰 ) 모두 the old 이지만 다시 재생될 수 있는 질긴 생명력을 가진 존재이다. 죽었지만 다시 재활용되는 존재'이다. 프로이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 억압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이다. 아버지 라이오스의 생환'은 아들을 범한 이오카테스'의 목을 조여온다. 그녀가 고물상 주인으로 변신한 라이오스 왕'을 죽인 이유는 아들이자 애인인 오이디푸스'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어찌 되었든, 김혜자'는 아들과 관계 맺는 어머니이면서, 남편을 죽인 아내이고, 마을 남정네들과 관계 맺는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다. 그녀는 팜므파탈이며, 바기나 덴타타이고, 메두사의 얼굴'이다. 이 영화'는 어머니의 성에 대한 도발적 질문이다.여자는 어머니'가 되는 순간 여성에서 무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자발적 선택이기보다는 아버지의 법이 정한 강제성'에 가깝다.

 

 

 

 

 

 


 

 

 

 

번외 ㅣ

 

 

1. 식물은 무섭다.

 

잿물'을 먹은 짐승은 죽는다.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마시면 식도'가 타서 죽는다.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는 독약이다. 옛날에는 자살을 할 때 크기가 넓은 잎에 양잿물 가루'를 넣어서 쌈'처럼 먹었다고 한다. 목구멍이 타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어머니와는 먼 친척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라움보다는 묘하게 슬펐다. 무서운 독이다. 그런 잿물'은 식물을 태워서 만든 재'로 우려낸 물'이란다. 어쩌면 식물은 동물보다 무섭다. 사실 알고보면 성대 없는 꽃대'는 무시무시하다. 영화 마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 약재상'은 그녀 고유의 영역'이다. 김혜자는 죽은 식물'을 우려서 만든 즙/보약'으로 아들을 키운다. 이 행위는 아들을 짐승에서 식물-되기'로의 변신을 바라는 마더의 욕망이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식물의 뿌리'를 태우는 제초제'로 아들의 소화 기관을 모두 태운다. 그러자 아들'은 물을 마시자마자 바로 뿌리( 말 그대로 남근'이다. )로 흡수되어 배출된다. 그러자 아들은 온전히 어머니의 영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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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 점프'를 하다 :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허구'다.

 

 

언캐니는 프로이트'의 주요 개념이다. un-canny의 독일어'인 un-heimlich'에서 un-은 접두사로 형용사, 부사, 명사에 붙어서 " 반대, 부정 " 을 뜻한다. 우선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heimlich의 뜻을 알아야 한다. < heim > 은 < house > 다. 집'이란 뜻이다. 이 세상에 집'보다 편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 ! 낡은 쇼파'에 누워서 리모콘으로 티븨를 보며 사타구니'를 긁을 수 있지 않은가 ! 똥구멍을 긁는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 그래서 heimlich 은 " 편안함, 익숙한, 친숙한 " 이라는 뜻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접두사 un-이 붙어서 < 기괴한 > , < 두려우면서 동시에 낯선 ( 것, 곳 ) > , < 악마적이면서 소름끼치는 것(곳) > 으로 확장된다. 그러니깐 heimlich와 unheimlich는 서로 상극이다. 반대말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heimlich 는 편안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 알 수 없는 > , < 위험한 >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어'는 반대말이면서 비슷한 말'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반의어/는 곧 동의어/同義語'라는 사실을 유추해 낸다. < 反 = 同 > 라는 황당한 공식'을 주장한다. uncanny와 canny는 같은 뿌리다 ! 프로이트는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김삿갓'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한 놈'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 주장'은 맞는 말이다. 로보트'를 바라보는 현대인의 심리'는 정확히 " 언캐니 " 개념과 부합한다.  

 

인간을 닮은 초기 로보트 아시모'를 볼 때 사람들은 이 로보트에 깊은 호감'을 드러낸다. 하는 짓이 얼마나 귀엽나 ! 하하하, 호호호. 여기서 사람들이 이 로보트'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유는 인간 흉내를 내는 로보트'가 장난감처럼 어설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로보트의 외양이 점점 인간을 닮아가면 호감은 급격하게 불쾌함'으로 변한다. 인간과 로보트의 구별이 모호해지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실사 인형'이다. 인간과 똑같이 생긴 인형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다 ! 바로 이 감정이 언캐니'다.  

 

우리가 인간을 닮은 로봇이나 인형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매우 익숙한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다. 기괴함'이라는 심리 상태의 중심에는 " 익숙한 " 이 자리잡듯이 말이다. 우리가 귀신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귀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더 나아가 그 귀신은 내가 알던 사람일 때 더 두렵다. 아빠와 단 둘이 사는 사춘기 여고생이 집에 왔더니 처음 보는 여자'가 자신이 엄마라며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상황은 담임 여선생이 자신을 엄마'라고 주장할 때이다. 그렇지 않은가 ?  

 

영화 < 번지 점프를 하다 > 는 " 언캐니 " 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이병헌'은 어느 날 자신이 쓰고 있는 우산 속으로 들어온 이은주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멜로라는 장르는 어긋남'이 기본'이다.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은주는 이병헌을 만나러 가는 길에 교통 사고'로 죽는다. 그 아픈 트라우마'가 서서히 잊혀질 때인 십 몇 년 후, 교사'가 된 이병헌은 제자에게서 익숙한 클리쉐와 오브제'를 목격하게 된다. 그것도 남자 제자에게서 말이다. 십 몇 년 전에 그녀가 좋아했던  쇼스타코비치  왈츠는 제자의 핸드폰 벨 소리로 환기 되고, 숟가락과 젓가락에 대한 농담은 제자의 질문과 겹쳐진다. 그리고 그녀가 아끼던 라이터는 제자가 가지고 있다. 최민식이 교사 역을 연기했다면 " 너, 누구야 ? " 대신 " 누구냐, 넌 ?! " 이라고,  보다 마초적으로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병헌은 혼란에 빠진다. 이 지점에서 잘난 척 한 번 하고 넘어가자 ! 제자'의 에티튜드'는 죽은 애인의 에티튜드와 겹친다. 그러니깐 제자의 에티튜드는 자꾸 익숙한 것에 대한 데자뷰'를 만들어낸다. 낯익은 것이다. 어쩌자고 저 새끼는 내 죽은 애인을 모방하는 것일까 ? 더군다나 불알 달린 수컷이 아니었던가 ! 결국 제자가 재현해내는 낯익은 행위는 이병헌에게는 매우 낯선 행위'가 된다. canny에서 uncanny를 목격하는 것 !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서사 구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내용은 SF 소설인 < 솔라리스/ 램 > 에서도 다룬다. 끝내주는 소설이다 ! ) 이 영화는 죽은 여자가 남자 제자로 환생한다는, " 아, 어쩌란 말이냐 ! " 류의 엇나간 퀴어 멜로의 형태를 취했지만, 사실은 언캐니'에 대한 이야기'다.  

 

첫눈에 빠진 사랑은 본질적으로 위험한 허구'다. 당신이 첫눈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처음 본 남자에게 끌리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얼굴이지만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닮은 사람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이미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1 ) : 실험 참가자에게 다양한 이성 사진'을 보여준 후 가장 매력적인 사진 한 장'을 뽑으라고 한다. 여기엔 함정이 하나 있다. 10장의 사진 중 한 장은 실험 대상자인 얼굴을 포토샵으로 약간 수정해서 성별'만 바꾸어 놓는다. 물론 실험 대상자'는 이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실험 결과에서 그들은 가장 매력적인 이성 사진으로 누구를 선택했을까 ? 놀라지 마시라. 거의 대부분은 자기 얼굴을 수정한 얼굴을 뽑았다. " 음... 그러니깐, 음... 그게.. 딱히 예쁘지는 않은데... 음, 그게.. 에헴.. 흠흠. 그냥... 편안한 얼굴이어서 좋아요 ! "  그렇다, 그들은 도발적이며, 섹시하고,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뽑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보았는데 잘 생각은 안나는, 그냥 평범한 이성의 얼굴을 선택한다. 자기 얼굴이라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이처럼 첫눈에 호감을 가지는 이성'은 뭔가 언캐니'적인 존재다. 어디서 본 익숙한 얼굴이지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심장이 뛴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이 심장이 뛴다는 사실을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괴하고, 두렵기 때문에 심장이 뛰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사랑 때문에 뛰는 심장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  

 

실제로도 이런 실험이 진행된 적이 있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2 ) : 두 개의 실험군을 준비한다. A 상황은 는 남녀가 처음 만나는 미팅 장소'로 카페를 선정하고, B는 구름다리 같은 위험한 장소를 미팅 장소'로 선정해서 두 집단 간에 퍼지는 이성 호감도'를 조사하는 것이다. 결과는 위험한 미팅 미션을 수행한 B에서 서로 호감도가 높았다. 그 이유는 심장과 뇌'가 서로 따로 놀기 때문에 그렇다. 구름다리 위에서 만난 남과 여'는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인데, 뇌는 이 사실을 사랑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결국 B 집단에서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두려움 때문에 발생한 착각이다.   

 

이처럼 사랑은 본질적으로 언캐니'이면서 동시에 자기애적 성향이 강하다. 영화 < 올드보이 > 에서 이우진/유지태와 누이인 이수아/윤진서'가 나른한 오후에 과학실에서 벌이는 근친상간' 장면은 기이할 정도'로 자기애'적이다. 영화 속 캐릭터 이수아'는 병적일 정도로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 그녀는 남동생과 근친상간'을 하면서도  거울로 자신의 황홀한 얼굴'을 바라본다. 결국 이 쾌락은 1인칭적 욕망이 만들어놓은 자위행위'이다. 스스 로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수음'이다. 그녀 이름인 수아는 혹시 秀我'가 아닐까 ? 아름다울 수에, 자기 아 ! 이 이름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자기애/ 나르시소스'가 된다. 나르시소스'가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반해서 우물에 빠져 죽는 것처럼, 이수아는 다리 아래 물 속에 빠져 죽는다. 심지어 죽는 그 순간에도 수아는 동생 목에 걸려 있는 카메라로 아름다운 자기 얼굴을 찍고는 강에 빠져 죽는다.   

 

영화 제목 < 번지 점프를 하다 > 는 꽤 의미심장'하다. < 번지점프 > 는 두려움을 의미하고,  < ~ 하다 > 는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을 의미한다. 서로 상이하게 다른 영역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사랑은 동의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바닥으로 뛰어내릴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 108번 올빼미 뛰어내릴 수 있습니까 ? " 라고 군대 훈련소 조교가 외칠 때  당신은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 " 108번 올빼미 하 ! 강 ! 준 ! 비 ! 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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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분서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 킹의 몸값 > 은 아직 읽지 않았다. 읽을 예정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읽지도 않은 채 미리 쓰는 리뷰'이다. 사실 이 리뷰는 소설에 대한 글이 아니라 구로자와 아끼라가 감독한 < 천국과 지옥 > 에 대한 생각'이다. 이 영화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별점 체크'는 이 영화에 대한 기록'이다.

 

 

 


 

 

 

 

 

천국과 지옥

 

 

현대인이 가지는 고전'에 대한 선입견 가운데 하나는 < 고리타분 > 할 것이란 속단'이다. 하지만 고전이 가지는 생명력'은 재미'다. 재미있는 작품이 오래 사랑 받아서 고전'이 되는 것이다.  E.M 포스터가 쓴 아기자기한 연애 소설'을 읽다가 보면 고전의 힘은 결국 재미'란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 모든 작품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 ! ) 고전 영화에 대한 선입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평론가들이 뽑은 걸작 고전 영화는 재미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먼저 한다. 물론 평론가들이 뽑은 작품 중에는 재미없는 걸작들이 수두룩하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 의하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영화'만큼은 재미있다.

 

< 숨은 요새의 세 악인 > 은 헐리우드 모험 액션 영화의 기준이 되었다. 조지 루카스가 고백했듯이 < 스타워즈 > 는 < 숨은 요새의 세 악인 > 에서 영화적 서사를 노골적으로 차용했다.  스필버그가 만든 < 레이더스 > 시리즈도 알고 보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에 대한 오마쥬라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 < 7인의 사무라이 > 는 남성 밀리터리 액션 영화의 바이블 같은 작품이다. 후에 루카스와 스필버그'는 아키라의 영화 제작'을 후원하게 된다. 헐리우드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에게 전하는 " 감사의 뜻 " 이다.

■  평론가들은 구로자와 아키라'보다는 오즈 야스지로'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만 감독의 입장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수많은 감독들이 구로자와 아키라'를 경배했다. 브라보,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에게 영광 있으라 !

 

< 천국과 지옥 > 은 패러독스와 윤리적 딜레마'를 다룬다. 구두 회사 중역인 주인공은 아이를 유괴한 범인으로부터 몸값으로 3000만 엔'을 지불하라는 협박 전화를 받는다. 마침 그에게는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마련한 5000만 엔 수표가 있다. 하지만 회사 지분 인수 자금으로 마련된 돈을 몸값'으로 지불할 경우 주인공은 파산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느 부모가 아이가 유괴되었다고 하는데 돈이 아깝다고 망설이고 있을까 ? 이것저것 생각할 틈이 없다. 지구는 독수리 오 형제'가 구하지만 아이는 내가 구한다 ! 공부는 못해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그런데 일이 묘하게 꼬인다.

 

납치된 아이'는 주인공의 아들이 아니라 집에서 일하는 집사의 아이'였던 것이다. 그러니깐.... 실수로 아이'가 바뀐 것이다. 이 기막한 반전을 감독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쑥 꺼내놓는다. 반전에 대한 그 어떤 암시도 없다. ( 지금 생각하니... 암시'가 있기는 했다. )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란 뜻이다. 부성애'를 다룬, 뻔한 납치 활극'은 갑자기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선과 악에 대한 세계를 다룬다. 주인공 곤도는 ( 소설에서는 " 더글라스 킹 " 이다. )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이 한숨'은 고약하다. 왜냐하면 범인은 계속 몸값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돈을 주지 않으면 아이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안도가 이 협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집사의 아들은 결국 곤도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위험에 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결과의 원인은 결국 곤도가 가진 부 () 때문이다.

 

자,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 이제 당신은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서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납치된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라 집사의 아들이다. 다행이다, 내 알 바 아닌가 ? 윤리적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몸값을 지불하면 지금까지 쌓았던 모든 부와 명예'는 한순간에 추락한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인간이란 이타적일까, 이기적일까 ? 영화는 시작부터 돌 직구'를 날리면서 시작한다.

 

아키라 감독은 이 장면을 실내극처럼 꾸몄다. 1시간 동안 실내에서만 진행되는 무대극은 오로지 거실에서만 이루어지는데 거실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브레히트의 연극 무대처럼 텅 비어 있는 것이다. 무대 위 오브제는 전화와 커튼이 전부다. 하지만 감독은 이 빈약한 소품으로 기막힌 서스펜스를 창조한다. 커튼'은 주인공이 처한 심리 상황'을 잘 전달한다. 주인공은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커튼 앞에 서 있다. 마음의 문(커튼)을 열 것인가, 아니면 닫을 것인가 ? 자신이 선택할 결정은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것일까, 옳지 않은 것일까 ? 커튼을 열면 빛은 들어오고 닫으면 실내는 어두워진다. 양심을 위해 커튼을 젖힐 것인가, 아니면 재산을 위해 이웃의 비참을 위하 커튼을 닫을 것인가. 하루에도 열두 번, 생각이 바뀐다 ! 천국(빛)과 지옥(어둠)이 교차한다. 그것은 마치 주인공이 처한 마음 같다.

 

연극 무대처럼 진행되는 전반부는 지루할 틈이 없다. 정교하게 세팅된 카메라 동선과 오랜 팀 워크로 짜여진 배우들의 동선은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교차하며 화면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절제된 탱고와 같다. 카메라 동선이 남성 무희'라면 배우들의 동선은 여성 무희 같다. 남성 무희가 절도 있게 발을 뻗어 앞으로 나아가면 여성 무희는 뒤로 절도 있게 한발짝 물러난다. 그런가 하면 뱀장어들처럼 비비꼬이다가도 어느 순간에 마술사의 매듭처럼 순식간에 풀린다. 이 세련된 움직임은 이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었다. 이 < 실내극 > 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만든 < 로프 > 를 연상케 한다. 늙은 뱀처럼 움직이는 카메라'는 우아하다 :  빠른 것은 경쾌하지만 느린 것은 우아하다.

 

그런가 하면, 후반부는 < 실외극 > 이다. 전반부가 다분히 연극적 상황극'이라면, 후반부는 형사들의 고군분투를 다룬 다큐멘타리적인 성격이 강한 현장극'이다. 감독은 자극적인 기교를 버리고 사건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을 무뚝뚝할 정도로 묵직하게 보여준다. 영화와 소설을 모두 보거나 읽은 사람'이 전한 말에 의하면 전반부는 원작에 충실하고 후반부는 일본의 상황'에 맞게 영화적 각색'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용이 약간 바뀌었다 해도 성격은 87분서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미덕에 충실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묵직하고 담담한 추적'은 87분서 경찰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리얼리티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  한국 영화 < 파괴된 사나이 > 는 < 천국과 지옥 > 에서 나오는 그 유명한 인질 교환 장면을 그대로 베낀다. 결과는 예상대로 흘러간다.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아우라를 얻을 수는 없다. < 파괴된... > 은 그 유명한 장면을 그저 그런 장면'으로 연출한다.

 

< 본 시리즈 > 와 같은 현란한 추적'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밋밋한 추적극이 될 수도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기막한 반전이나 화려한 액션'에 익숙한 장르 소설 독자'라면 에드 맥베인의 < 87분서 시리즈 > 는 따분할 수가 있다. 하지만 자극적인 양념으로 범벅이 된 비빔 냉면'만 먹다 보면 담백한 모밀 국수의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 천국과 지옥 > 은 우아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소설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구로자와 아끼라'는 평범한 것을 걸작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물론 그는 좋은 원작을 골라내는 매서운 눈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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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사악하다.

  

< 멜랑콜리아' > 라는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 " 다가온다 " 라는 동사가 밋밋해서 상황 파악이 안 된다면 " 돌진한다 " 라고 정정하자. 일주일 후면 지구는 행성과 충돌하여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이번에는 " resetting"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 nothing " 인 상태가 된다.  < 인류 > 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 지구 > 라는 행성 자체가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신이 깜짝 이벤트로 준비한 " 노아의 방주 " 따위는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지구 종말 일주일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 ? 죽기 전에 해야 할 것'을 작성해 보자. ① 최고급 호텔'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밤을 보낸다. ② 제비집 요리와 불도장 그리고 거위 간 요리'를 주문한다. ③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는다 ④ 기타 등등......

하지만 이러한 버킷 리스트'는 한갓 희망사항에 불과할 것이 뻔하다. 당신은 최고급 호텔에 투숙할 수도 없고, 제비집 요리'는커녕 그 흔한 닭똥집 요리'조차 구경도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는데 어느 미친 놈이 일터에 나와서 일을 할까 ? 그러므로 통장에 남은 돈을 펑펑 쓰다가 죽겠다는, 웃으면서 코 파며 잇힝 하는 버킷 리스트'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럴 땐, 차라리 무라카미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 현명할 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과나무를 심는 대신 자위'를 할 것이 분명하다. " 미안해, 아야코 양 ! 당신의 섹스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겠어. 난... 조용히 < 심슨가족' > 을 보면서 자위나 하겠어. " 결국 이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딱히 없다. 

지구 멸망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은 < 그날 > 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에 떨며 아름다운 지구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못한 죄책감을 호소하지만 쾌활한 멜랑콜리인 내가 상상하는 < 그날 > 은 꽤나 명랑'하다. 누군가에게 마지막 일주일'은 봄 방학' 같지 않을까 ?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는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공부를 잘하는 놈이나 못하는 놈이나 달콤한 휴식이 되고, 암 환자들은 신이 내린 결정에 대하여 겉으로는 내색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웃으면서 코 팔 것이다. " 나만 억울하게 죽는 게 아닌 게야.... 히히히 ! "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리 아쉬울 것 없다. 동일 환경 동일 노동에서 받는 대가'는 정규직의 절반이니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은 21세기 新 홍길동'이다. 서자'다.

희망이 거세된 노동만큼 힘든 것도 없다. 乙은 희망이 없다. 귀신을 잡는 해병대'와 (갑에게) 멱살을 잡힌 乙'의 공통점은 ? 영원하다는 점이다. 한 번 < 해병 > 은 영원한 해병이듯이, 한 번 < 을 > 은 영원한 을'이다. 그리고 뚱뚱한 여성들이여 ! 그날이 다가오면 다이어트'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지구 종말 시계는 44사이즈를 위해서 死死( 죽을 각오로 굶는 )하는 당신을 잠시나마 구원할 것이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아...... 좋아 ! 칼로리 제로 다이어트 콜라는 개나 주고 오리지날 코카콜라를 마시자 ! 일주일 후면 모든 것은 사라지나니 비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인류 멸망'을 비극으로 보는 관점은 지극히 편협한 시각이다. 인류의 멸망은 오히려 지구 생태계에 두 번 다시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폐허가 된 아스팔트에서 고사리가 필 때 지구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많은 사람을 죽이면 전사가 되듯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재난이 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으면 신이 내린 한 수'가 된다. 나라면 < 그날 > 사랑하는 사람과 콘돔이 필요 없는 섹스를 하겠다 ! 지구가 불타 사라지기 전에 먼저 정염에 불타 죽으리라. 젖가슴을 욕심껏 움켜쥐고 거칠게 입 맞추리라. 평소 짝사랑하던 사람을 찾아가 고백을 해도 좋을 것이다. 상대가 거절하면 어떠랴 ! 퇴짜 맞고 돌아오는 길에 분풀이로 종로 3가 8차선 도로에다 똥을 싸도 좋다. 행운이라는 것은 신이 평소에 편애하던 놈들에게 내리는 선물이지만 죽음은  모두에게 내리는 평등이다.

영화 < 멜랑콜리아 > 는 " 그날 " 을 다룬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 그날 > 이 아니라 < 그녀 > 에 대한 이야기'다.  행성과 지구 간의 충돌'은 곁가지 서사' 에 불과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 여성 멜랑콜리와 히스테리'에 대한 보고서 > 이다. 영화는  " 1부 저스틴 "에 대한 이야기와 " 2 부 클레어 " 에 대한 이야기로 나뉜다. 결혼 피로연의 주인공인 저스틴은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다. 신부의 무관심과 무기력은 결국 파혼으로 끝을 맺는다. 그 어느 누구도 멜랑꼴리한 저스틴'(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 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울증'이란 타자에 대한 공격을 멈추는 대신 화살의 촉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형태이다. 자신에 대한 징벌이 우울증'이다.

슬픔을 사람들과 나누면 애도'가 되지만 슬픔을 버리지 못하고 혼자서 속으로 간직하면 우울'이 된다. 그러니깐 우울이란 슬픔을 나누지도 못하고 소화시키지도 못한 체증 상태'다. 목구멍에 걸린 것인 생선 가시가 아니라 멜랑콜리'다. 저스틴'은 내부의 문제에 몰입하다 보니 외부(타자)에게 관심을 두지 못한다. 이 우울증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이 무관심은 곧 무기력'을 동반한다. 불면과 기면 그리고 체증에 따른 식욕 감퇴와 구토가 이어진다. 프로이트는 마지막까지 여성이라는 성'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어서 쩔쩔맸는데 그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nothing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책임이 아니다.  그가 보기에 여자는 알 수 없는, 아...... 그런 존재'다. 앞이 캄캄한 구멍'이다.

반면 클레어'는 동생과는 달리 타자와 맺는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한다.  화려한 결혼 피로연'은 부르주아인 클레어의 욕망과 겹친다. 그녀는 결혼 피로연'이 성공적으로 치뤄지기를 간절히 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생을 위한 따스한 배려와 근심 같지만 사실은 부르주아의 과시적 이기와 사려 깊은 욕심'일 뿐이다. 저스틴이 내부의 문제 때문에 " 멜랑꼴리 " 하다면, 클레어는 우울증을 앓는 동생의 모습이 피로연 참석자들에게 들통날까 봐서 " 히스테리 " 에 빠진다. 우울증에 걸려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던 클레어'는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할수록 불안에 빠진다. 궁극에 다다를수록 클레어는 이성을 잃고 저스틴은 오히려 차분히 이성을 찾는다.

이 지점에서 저스틴과 클레어는 겹친다. 클레어가 보이는 이상 불안 증세(2부)는 저스틴이 앓던 증후(1부)와 비슷해 보인다. 이처럼 멜랑콜리와 히스테리는 유사해 보이지만 닮은 만큼 다르다. < 멜랑콜리 > 는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원망에 따른 자기 징벌과 포기에 가깝지만 < 히스테리 > 는 욕망하는 대상에 대한 신경질적인 공격과 불완전한 집착에 가깝다. 두 자매는 본질적으로는 유사 형질을 가지고 있지만 계급에서 차이'를 만든다. 그들은 유사한 불안에 시달리지만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잃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저스틴과 부와 명예를 잃어버리기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부르주아인 클레어'는 무기력하게 종말을 지켜볼 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평등인가 !

나는 극중 저스틴의 대사에 공감한다. 지구는 사악하다. 없어져도 된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은 니체의 망치'다. 망치로 지구를 부순다.

 

 

 

 

+

이 영화는 추석 연휴 기간 동안 < 한국 영상 자료원 > 에서 상영하기에 보았는데 필름 영사 방식이 아닌 디지털 영사 방식이었다.  아, 개같은 디지털 영화들 ! 디지털 상영은 작은 모니터를 극장 스크린으로 옮긴 것에 불과해서 영화를 보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필름 특유의 색감과 스크레치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프레임과 소음을 디지털 영화는 재현이 불가능하다. 디지털 영화가 선명한 화질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필름'은 디지털'이 가지지 못한 영역을 구축한다. 필름 상영은 디지털 상영보다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  필름 상영으로 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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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2013-12-2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라스폰 트리에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미리 나쁜 일이 다가올 것을 예상하는 사고 때문에 평소보다 더 침착해지는 스타일이라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보니 감독=클레어. 2부 보며 클레어 뭥미?!하다 이해가 좀갔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5 14:01   좋아요 0 | URL
오호, 트리에'가 그런 성향이 있군요. 사실 전 트리에'를 별로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가 확실히 미학적 측면에서는 굉장한 감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베스트 10 목록 : 21세기여, 조까라 !

 

 

           

 

 

망년회'가 다가오면 술 마시는 것 다음으로 흔한 것이 바로 베스트10 목록'이다. 올해도 2013년 영화 베스트 10 목록을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자면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다. 올해 내가 일반 극장에서 본 개봉 영화'는 < 마스터 > 와 < 카운슬러 > 가 전부였다. 그러니깐 1년 동안 멀티플렉스 극장'을 간 경우가 2번이 전부라는 말이다. 한때 밥 먹듯이 영화를 보았고, 한때 영화 때문에 밥을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영화에 대한 열정을 접었다. 하지만 시네마떼끄'는 자주 다녔던 것 같다. 나는 21세기가 간절히 원했던 조용필'이 아니었기에 21세기 영화를 경멸했던 것 같다. " 21세기여, 조까라 ! " 당신이 그래티비'에 열광하고, 미스터 노바디'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할 때 나는 시네마떼끄에서 50년대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낙원동 그 비루한 저잣거리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그 근처 순댓국을 먹고는 했는데 솔직히 고백하면 돼지 비린내 때문에 반만 먹다가 나온 적이 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순댓국을 먹는 행위는 사실 오기에 가까웠다. 축구를 보면서 맥주를 마셔야 일을 끝낸 것 같은 느낌이 들듯이, 낙원동 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보면 왠지 5000원짜리 순댓국을 먹으며 낮술을 마셔야 될 것 같은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정성일이 영화에 대해서 주접을 떨 때마다 점점 영화와 멀어졌던 것 같다. 내가 그의 영화 평론집 < 언젠가 영화는.... > 을 읽고 나서 느꼈던 감정은 뻔뻔함'이었다. 영화에 대한 그의 갈망은 내가 보기에는 노망처럼 보였다. 영화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 그럴 일은 없다. 영화는 길고양이 한 마리에거 깨끗한 물 한 모금 주지 못한다. 영화가 수작을 거는 시대는 끝났다. 영화는 딜도'와 다르지 않다. 딜도가 3초의 오르가슴을 위해서 맹렬하게 덜덜덜 떤다면, 영화 또한 클라이막스를 위해 2시간 동안 덜덜 떨 뿐이다. 알딸딸한 기분에 쓴다. 아, 취해서 더는 못 쓰겠다. 그 전에 써두었던 글을 복사하겠다. 1위는 < 마스터 > 이고 2위는 < 카운슬러 > 다. 역순이어도 상관없다. ( 멜랑콜리아는 올해 영상원에서 보았다. ) 4위부터는 알라딘에 작성한 영화 리뷰 중 추천을 많이 받은 순이다.

 

 

 

1. 마스터 ㅣ 완전'하지 않은 존재는 안전'하지 않은 존재다.  ★★★★

 

< 마스터 / 폴 토마스 앤더스 감독 작품 > 이 불친절한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은 호아킨 피닉스와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연기가 큰 몫을 했다. 특히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프레디 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마른 장작에 불을 지피울 때 타오르는 화려한 불꽃 같은 연기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젖은 장작을 태울 때 스멀스멀 쏟아지는 매케한 연기 같은 연기'를 하는 배우가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로버트 드니로가 선보이는 광기 어린 연기'보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조용히 읊조리는 조용한 연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600와트 출력인 스피커 앞에서 록큰롤'을 듣다가,  나이가 들면 싸구려 6와트짜리 트렌지스터 라디오 모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듣는 것과 비슷한다.  호아킨 피닉스는 광기 어린 연기와 조용한 연기 사이를 오간다. 

 

축 내린 어깨, 불편한 걸음, 비뚤어진 입'은  흑백 고전 영화 < 노스페라투 ( 1922 年 ) / 무르나우 > 에 나오는 흡혈귀'를 연상시킨다. 그는 외상후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퇴역 군인이며 흡혈귀'가 된 히스 레저(조커)다. 알콜중독자인 프레디 퀼'이 직접 제조한 마법의 술'은 사실 알코올이 아니라 피'다. 그는 피 같은 술로 허기'를 채우는 뱀파이어'다. 마스터인 랭케스터'가  떠돌이인 프레디 퀼이 주조'한 술(피)를 함께 나눠 마시는 순간 그들은 혈맹으로 맺어진 유사 부자 (父子)이거나 피로 맺은 굳은 맹세를 한 형제가 된다. 가족애와 형제애는 이 영화 전체를 사로잡는 아우라'다.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 서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된다. 이 영화에서 가족애는 신과 인간으로 확장이 될 수도 있으며 형제애는 동성애적 코드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의 서사가 불친절한 이유이다. 너무 딱 부러지는 줄거리'는 < 촌 > 스럽지 않은가 ?

 

내 개인적 취향을 고려한다면  : 이 영화를 동성애적 코드로 읽으면 랭카스터와 프레디의 관계는 < 도라와 프로이트 >의 관계와 유사하다. 마스터인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프로이트'이고, 환자인 호아킨 피닉스'는 신경쇠약 직전인 도라'를 연기한다. 프레디는 완전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안전하지 않은 존재이다. 마스터는 신앙이라는 힘으로 이 불안정한 존재'를 치유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 상담 치료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환자인 프레디'는 치료 과정에서 마스터인 랭카스터'를 사랑하게 된다. 환자가 품은 대상이 상담자인 랭카스터'에게 전이된 경우이다. 이 상담치료는 중단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도사린다. 이 상담 심리 치료는 환자의 전이와 함께 마스터의 역전이'가 함께 작용했기에 실패한 치료가 된 것이다. 프로이트가 환자(도라)의 전이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의사인 프로이트의 역전이 때문에 실패했듯이 말이다. 

 

마스터'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랭카스터'는 완전한 인간이다. 그는 창조주이다. 신이며 동시에 작가'이다. 하지만 완벽한 존재인 그는 결국 실패하게 된다. 바위처럼 변하지 않는, 불안정한 존재 앞에서 그는 울먹인다. 그리고는 스스로 깨닫는다.  우리는 둘 다 실패한 존재'다. 이 담담한 실패'를 다룬 마지막 장면을 감독은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 변하지 않는다. > 실패를 경험한 者가 나중에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을 화려한 변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성공은 변화'가 아니다. < 의지 > 와 < 존재 > 는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 있고, 의지가 약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성공에 대한 의지의 세기'일 뿐이지 존재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조폭 두목이 신을 영접하고 나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변신했다는 서사'를 1%도 믿지 않는다. 본성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영화 < 마스터 > 는 " 인간이라는 매우 쓸쓸한 불변성 " 에 대해 말한다. 모든 인간은 가변이 아니라 불변'이다. 실패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낙천적인 사람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라고 말한 " 측은지심 " 은 타자의 실패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가질 때 발생한다. 반면 " 피도 눈물도 없는 " 태도는  실패에 대해 무자비한 마음이다. 영화 마스터'는 < 불변과 실패 > 에 대해서 말한다. 실패한 자가 실패한 자를 위로한다. 문태준 시인의 아름다운 문장을 훔치면 "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내는 " 것이다. 그것은 같은 존재에 대한 지지'이며, 동시에 낙담이다. 그리고 계급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프레디 퀼은 변하지 않았기에 실패한 피조물이고, 마스터 랭카스터'는 피조물을 변화시키지 못했기에 그 또한 실패한 창조주'다. 인간은 실패한 존재다. 그렇기에 신도 실패한 주체다.

 

 

 

 

2. 카운슬러 ㅣ 연민이 배제된 공정함 !  ★★★

 

 

시나리오'는 영화를 만든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 아무리 뛰어난 시나리오'라고 해도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한다면 < 디워 >보다 좋은 시나리오'라고 할 수는 없다. LA 다저스 중간 계투 요원인 벨리사리오 투수가 형편없는 구질로 구원은커녕 승리'를 날려먹는다고 해도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투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메이져리그'에서 선수로 뛸 수 있다는 것은 상위 1% 이내일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시나리오가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영화로 만들어지는 작품은 1%다. " 디워 시나리오 " 도 알고 보면 " 벨리 시나리오 " 같은 상위 1% 실력에 포함되는 메이져리그 선수 급'이다. 사실 문자로 작성된 시나리오'는 재미가 없다. 숙련된 배우의 입말'이 붙어야 생기'가 나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밍숭맹숭하다.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 카운슬러 >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아는 한, 코맥 매카시'보다 대사'를 멋지게 치는 작가는 보지 못했다. 그가 쓴 소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는 서사'는 물론이고 대사'가 숨이 막힐 정도로 뛰어났다. 힙합 정신'으로 말하자면 라임과 플로우'가 좋았다. 호흡이 짧은 대사'는 압축미를 살린 잠언록 같았다. 그는 잔인한 대사'일수록 아름다운 문장을 뽑아내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뛰어난 소설가가 헐리우드에 입성해서 시나리오를 썼다가 망신 당하는 꼴을 수없이 본 사람들은 코맥 매카시가 스릴러 영화 시나리오를 직접 쓴다고 했을 때 걱정을 했지만 나는 그가 성공하리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시나리오를 쓸 때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소설가는 기본적으로 대사보다는 서술에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나리오 대사'를 쓴다고 했으나 사실은 " 서술 형태로 쓰여진 대사 " 를 선보인 것이다. 그러니 배우들이 대사를 칠 때 입에 짝짝 붙기는커녕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도는 것이다. 하지만 코맥 매카시는 소설가이면서도 시나리오 작가'보다 대사를 잘 치는 보기 드문 소설가'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시나리오를 직접 쓴다고 했을 때 환호를 보냈다. 어쩌면 이 시나리오 작업은 차기작으로 대사로만 이루어진 소설을 쓰기 위한 워밍업( 준비 작업' )일지도 모른다.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이 이룩한 문학스타일'을 고집한 적이 없다. 하루키가 하루키 스타일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우려먹는다면 코맥 매카시는 매 작품마다 전작과는 다른 형식을 선보였다. < 로드 > 를 읽고 나서 < 핏빛 자오선 > 을 읽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두 거장이 만났다. 코맥 매카시가 시나리오를 쓰고 리들리 스코트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다. 각 분야에서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는 고집 쎈 두 노인'이 만났으니 수직적 관계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혐업이요, 통섭이지 한쪽이 군림하는 작업 스타일이 될 수는 없다. 이 협업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겠지만 한쪽 기'가 세서 기울어지면 어설픈 결과를 얻게 될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 카운슬러 > 는 리들리 스코트 감독이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나리오 작가인 코매 매카시'만 눈에 띄는 영화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파스빈더도 아니고 리들리 스코트도 아닌 코맥 매카시였다. 코맥 매카시에 대한, 코맥 매카시에 의한, 코맥 매카시를 위한 영화'였다. 내 눈엔 당신만 보이더라.

 

영화가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좋다는 소리'도 아니다. 하지만 나쁘지도 좋지도 않으니 결론은 나쁘다는 소리이다. 오리지날에 대한 각색이 필요한데 리들리 스코트는 우직하게 원작을 따랐다. 그는 코맥 매카시와 작업하면서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를 뛰어넘는 걸작 스릴러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코맥 매카시'가 워낙 강렬하다보니 연출에서 눌린 맛이 난다. 자기 스타일이 분명한 리들리 스코트 감독'이 자신이 내야 할 목소리를 죽였다는 것은 감이 떨어졌다기보다는 코맥 매카시에 대한 예의 때문인 것 같다. 리들리 스콧 감독도 코맥 매카시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가 된 듯 싶어 웃음이 났다. 나이가 드니 서로 의지한다고나 할까 ? 하지만 영화 내용은 무시무시하다. 코맥 매카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악인은 사실은 운명을 결정하는 신'에 가깝다. 판사 ( 핏빛 자오선 ) , 시거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 ( 카운슬러 ) 는 악인이 아니라 인간이 행한 악덕을 심판하기 위해 다가오는  검은 상복을 입은 저승사자'와 같다.

 

< 카운슬러 > 는 탐욕이 부른 권선징악'을 다룬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비참을 다룬다. 운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은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에게 의지하기 위한 힐링'일 뿐이다. 신은 무자비한 존재도 그렇다고 자비로운 존재도 아니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가여삐여겨 한글을 맹글었지만 신은 인간을 가여삐여기지 않는다. 연민이 배제된 공정함, 그것이야말로 운명이라는 이름의 신'을 규정할 수 있는 정의'다. " 카운슬러 " 라고 불리우는 타락한 변호사가 마약 운반 작전에 개입되는 순간, 운명'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된다. 이 진행 과정에서 연민과 변명 그리고 탄식과 반성 따위가 만들어내는 휴머니즘은 없다. 그것은 마치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60초 후에 터지는 시계 폭탄과 같다. 누르는 순간 이미 60초 후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 

 

수열은 한치의 오차 범위 없이 진행된다. 1,2,3,4,5...... 그리고는 초침이 60초를 지날 때 예정대로 폭발할 것이다. 종이에 쓰여진 비문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심장에 새겨진 비문'은 고칠 수 없다. 잘못 쓴 문장을 고칠 수 없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구겨서 버리고 다시 쓰는 것이다. 영화 속 ○○○○은 무자비하다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자'이다. 영화 < 카운슬러 > 는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냉정'을 다룬다. 가차없다.

 

 

 

 

번외 ㅣ2012년에 개봉한 영화를 2013년 영상원'에서 보았다. 2013년에 본 개봉 영화'가 없어서 4위부터는 알라딘에 쓴 영화에 대한 글로 대체한다. 추천 수'다.

 

 

 

3. 멜랑콜리아 ㅣ 지구는 사악하다.

  

< 멜랑콜리아' > 라는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 " 다가온다 " 라는 동사가 밋밋해서 상황 파악이 안 된다면 " 돌진한다 " 라고 정정하자. 일주일 후면 지구는 행성과 충돌하여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이번에는 " resetting"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 nothing " 인 상태가 된다.  < 인류 > 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 지구 > 라는 행성 자체가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신이 깜짝 이벤트로 준비한 " 노아의 방주 " 따위는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지구 종말 일주일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 ? 죽기 전에 해야 할 것'을 작성해 보자. ① 최고급 호텔'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밤을 보낸다. ② 제비집 요리와 불도장 그리고 거위 간 요리'를 주문한다. ③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는다 ④ 기타 등등......

하지만 이러한 버킷 리스트'는 한갓 희망사항에 불과할 것이 뻔하다. 당신은 최고급 호텔에 투숙할 수도 없고, 제비집 요리'는커녕 그 흔한 닭똥집 요리'조차 구경도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는데 어느 미친 놈이 일터에 나와서 일을 할까 ? 그러므로 통장에 남은 돈을 펑펑 쓰다가 죽겠다는, 웃으면서 코 파며 잇힝 하는 버킷 리스트'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럴 땐, 차라리 무라카미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 현명할 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과나무를 심는 대신 자위'를 할 것이 분명하다. " 미안해, 아야코 양 ! 당신의 섹스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겠어. 난... 조용히 < 심슨가족' > 을 보면서 자위나 하겠어. " 결국 이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딱히 없다. 

지구 멸망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은 < 그날 > 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에 떨며 아름다운 지구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못한 죄책감을 호소하지만 쾌활한 멜랑콜리인 내가 상상하는 < 그날 > 은 꽤나 명랑'하다. 누군가에게 마지막 일주일'은 봄 방학' 같지 않을까 ?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는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공부를 잘하는 놈이나 못하는 놈이나 달콤한 휴식이 되고, 암 환자들은 신이 내린 결정에 대하여 겉으로는 내색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웃으면서 코 팔 것이다. " 나만 억울하게 죽는 게 아닌 게야.... 히히히 ! "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리 아쉬울 것 없다. 동일 환경 동일 노동에서 받는 대가'는 정규직의 절반이니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은 21세기 新 홍길동'이다. 서자'다.

희망이 거세된 노동만큼 힘든 것도 없다. 乙은 희망이 없다. 귀신을 잡는 해병대'와 (갑에게) 멱살을 잡힌 乙'의 공통점은 ? 영원하다는 점이다. 한 번 < 해병 > 은 영원한 해병이듯이, 한 번 < 을 > 은 영원한 을'이다. 그리고 뚱뚱한 여성들이여 ! 그날이 다가오면 다이어트'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지구 종말 시계는 44사이즈를 위해서 死死( 죽을 각오로 굶는 )하는 당신을 잠시나마 구원할 것이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아...... 좋아 ! 칼로리 제로 다이어트 콜라는 개나 주고 오리지날 코카콜라를 마시자 ! 일주일 후면 모든 것은 사라지나니 비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인류 멸망'을 비극으로 보는 관점은 지극히 편협한 시각이다. 인류의 멸망은 오히려 지구 생태계에 두 번 다시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폐허가 된 아스팔트에서 고사리가 필 때 지구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많은 사람을 죽이면 전사가 되듯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재난이 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으면 신이 내린 한 수'가 된다. 나라면 < 그날 > 사랑하는 사람과 콘돔이 필요 없는 섹스를 하겠다 ! 지구가 불타 사라지기 전에 먼저 정염에 불타 죽으리라. 젖가슴을 욕심껏 움켜쥐고 거칠게 입 맞추리라. 평소 짝사랑하던 사람을 찾아가 고백을 해도 좋을 것이다. 상대가 거절하면 어떠랴 ! 퇴짜 맞고 돌아오는 길에 분풀이로 종로 3가 8차선 도로에다 똥을 싸도 좋다. 행운이라는 것은 신이 평소에 편애하던 놈들에게 내리는 선물이지만 죽음은  모두에게 내리는 평등이다.

영화 < 멜랑콜리아 > 는 " 그날 " 을 다룬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 그날 > 이 아니라 < 그녀 > 에 대한 이야기'다.  행성과 지구 간의 충돌'은 곁가지 서사' 에 불과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 여성 멜랑콜리와 히스테리'에 대한 보고서 > 이다. 영화는  " 1부 저스틴 "에 대한 이야기와 " 2 부 클레어 " 에 대한 이야기로 나뉜다. 결혼 피로연의 주인공인 저스틴은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다. 신부의 무관심과 무기력은 결국 파혼으로 끝을 맺는다. 그 어느 누구도 멜랑꼴리한 저스틴'(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 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울증'이란 타자에 대한 공격을 멈추는 대신 화살의 촉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형태이다. 자신에 대한 징벌이 우울증'이다.

슬픔을 사람들과 나누면 애도'가 되지만 슬픔을 버리지 못하고 혼자서 속으로 간직하면 우울'이 된다. 그러니깐 우울이란 슬픔을 나누지도 못하고 소화시키지도 못한 체증 상태'다. 목구멍에 걸린 것인 생선 가시가 아니라 멜랑콜리'다. 저스틴'은 내부의 문제에 몰입하다 보니 외부(타자)에게 관심을 두지 못한다. 이 우울증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이 무관심은 곧 무기력'을 동반한다. 불면과 기면 그리고 체증에 따른 식욕 감퇴와 구토가 이어진다. 프로이트는 마지막까지 여성이라는 성'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어서 쩔쩔맸는데 그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nothing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책임이 아니다.  그가 보기에 여자는 알 수 없는, 아...... 그런 존재'다. 앞이 캄캄한 구멍'이다.

반면 클레어'는 동생과는 달리 타자와 맺는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한다.  화려한 결혼 피로연'은 부르주아인 클레어의 욕망과 겹친다. 그녀는 결혼 피로연'이 성공적으로 치뤄지기를 간절히 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생을 위한 따스한 배려와 근심 같지만 사실은 부르주아의 과시적 이기와 사려 깊은 욕심'일 뿐이다. 저스틴이 내부의 문제 때문에 " 멜랑꼴리 " 하다면, 클레어는 우울증을 앓는 동생의 모습이 피로연 참석자들에게 들통날까 봐서 " 히스테리 " 에 빠진다. 우울증에 걸려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던 클레어'는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할수록 불안에 빠진다. 궁극에 다다를수록 클레어는 이성을 잃고 저스틴은 오히려 차분히 이성을 찾는다.

이 지점에서 저스틴과 클레어는 겹친다. 클레어가 보이는 이상 불안 증세(2부)는 저스틴이 앓던 증후(1부)와 비슷해 보인다. 이처럼 멜랑콜리와 히스테리는 유사해 보이지만 닮은 만큼 다르다. < 멜랑콜리 > 는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원망에 따른 자기 징벌과 포기에 가깝지만 < 히스테리 > 는 욕망하는 대상에 대한 신경질적인 공격과 불완전한 집착에 가깝다. 두 자매는 본질적으로는 유사 형질을 가지고 있지만 계급에서 차이'를 만든다. 그들은 유사한 불안에 시달리지만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잃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저스틴과 부와 명예를 잃어버리기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부르주아인 클레어'는 무기력하게 종말을 지켜볼 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평등인가 !

나는 극중 저스틴의 대사에 공감한다. 지구는 사악하다. 없어져도 된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은 니체의 망치'다. 망치로 지구를 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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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1 0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1 05:25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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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마스터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네요... 카테고리 영호관을 클릭하면 나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1 05:25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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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마스터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네요... 카테고리 영호관을 클릭하면 나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1 05:25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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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마스터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네요... 카테고리 영호관을 클릭하면 나옵니다...

에피큐리언 2013-12-21 0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까꿍.
이동진은 열심히 분류해놨던데요. 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1 05:26   좋아요 0 | URL
그분이야 직업이니 당연히 해야지요. 전 요즘 영화보는 맛을 잃었습니다.

새벽 2013-12-21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남쪽으로 튀어,랑 애마부인, 저 글들은 못봤던 글 같은데 읽어봐야겠네요.

저도 ***님께 설문 메일을 받았는데... 저야 케이블, VOD로 지난 영화만 챙겨보는 처지이니...
저 역시 앙케이트에 응하질 못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1 12:02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아마 언젠가 읽으신 글일 겁니다.
저도 극장은 못 가고 케이블에서만 가끔 보는지라 참여하고 싶지만
참여할 수가 없네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