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도망치다시피 집을 떠나 강원도 속초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영화 속 파이란처럼 그곳에서 1년을 혼자 버텼다. 춥고 배 고팠다. 첫사랑은 아니지만 첫눈에 반한 여자와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0년 연애 끝에 헤어졌다. 첫눈에 반했던 그 여자 생각을 하며 동명항 방파제 앞 가게에서 밖을 바라보면 대설 특보'가 내려진 방파제가 보였다. 첫눈에 반한 여자와 폭설이라...... 어쩌면 나는 그 유배지'에서 파이란처럼 헤어진 정인'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강재처럼 저렇게 방파제에서 통곡 한 적이 있다. 노무현의 노제'를 다녀와서 동명항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방파제에 앉아서 통곡을 했다. 비단 노무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노무현의 죽음 때문에 서글펐다. 이 양가적 감정을 당신은 모르리라. 그래서 그랬을까 ? 영화 속 파이란의 손끝, 파란 정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약속이 있었으나 계속 잠만 잤다.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결정을 했다. 오랜 고민이었다. 결정을 하고 나니 환해졌다. 최승자 시인의 시'처럼, 터널은 끝에 가서야 환해진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 끝에 가서야 환해진다는 시인의 말, 요즘 계속 생선 가시'처럼 걸려 있다.
- 파이란, 3이라는 숫자 中
변호인 : 밥의 힘으로 일어서야 하는, 어떤 숭고한 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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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각 두 개의 얼굴 : 어제 나는 민주노총이 짓밟힌 줄은 전혀 몰랐다. 버스 기사'가 광화문에서 정차하지 않고 우회해서 돌아간다는 사전 고지를 하길래 고개를 갸우뚱했다. 버스 안에서 자꾸 송강호의 저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 쏟아내도 통속이 되지 않는 저 배우는 배우가 아니라 귀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집에 왔을 때, 뉴스를 통해 전두환의 사위인 윤상현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았다. 팥죽 먹었냐는 인사말이 내 목에 걸렸다. 영화 속 송강호는 노동자의 밥줄을 염려하는데, 윤상현은 노동자의 밥줄 따위는 신경 안 쓴다는 웃음이다. 묘한 대조'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아무런 연민 없이 웃는, 저 환한 웃음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쾌해서 내내 헛헛했다. 저 웃음은 헛것'이다. 귀신과 헛것'은 다른 것이다. 귀신은 무겁고 헛것은 가볍다. 무게의 있고 없음'이 귀신과 헛것을 나눈다.
아침 인사'이자 첫인사는 대부분 " 안녕하세요 ? " 로 시작한다. 그리고 점심이 되면 또 한번 안녕하냐고 묻기가 그래서 그냥 " 식사하셨어요 ? " 라고 묻는다. 전설적인 펑크 롹 뺀드 < 삐삐밴드 > 는 「안녕하세요」 라는 노래에서 " 식사하셨어요. 별일 없으시죠 ? " 라고 묻는다. 카메라를 향해 침을 뱉은 불온한 밴드'치고는 지나치게 예의바르다. 하지만 " 동방예의지국 " 어쩌구저쩌구할 때 이 예의가 그 예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진심을 담은 인사'가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 형식적인 인사이니 그/그녀가 밥을 먹었든, 안 먹었든 관심은 없지만 형식상 던지는 꾀죄죄한 관심'일 뿐이다. 자신의 좆끝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첩이 낳은 자식이라며 호부호형을 허하지 않은 홍길동 아버지인 양반-먹물-꼰대-어르신 연대'가 장악한 세상이니 이런 꾀죄죄한 안부조자 묻지 않는다면 양반-먹물-꼰대-어르신 연대로부터 싸가지에 밥 말아먹을 놈'이라는 소리 듣기 딱이다. ( 됐고 ! )
안부를 묻는다는 측면에서 < 안녕하다 > 과 < 밥을 먹다 > 는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안녕과 밥은 뿌리글'이거나 한 뿌리에서 나온 갈래 글'일 것이다. 고대 대자보 " 모두 안녕하십니까 ? " 라는 말은 곧 " 모두 식사하셨습니까 ? " 라고 고쳐 써도 된다. 나 혼자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다냐 ? 라는 속뜻이다. 안녕하지 못하다는 말은 결국 밥 앞에 평등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안녕하냐고 물은 다음 밀양 송전탑, 비정규직, 철도 노조에 대한 근심을 이야기한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오천 만 대한민국 국민 중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말은 곧 밥 앞에서도 평등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동일 근로 환경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안녕하지 못하다. 대한민국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은 밥 앞에 평등하지 않다.
< 살인의 추억 > 에서 송강호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면서도 괴물의 멱살을 잡으며 " 밥은... 먹고 다니냐 ? " 말한다. 이 영화의 주제는 바로 " 괴물도 밥은 먹는다. " 다. 그렇다, 짐승 같은 인간'도 밥은 먹어야 산다. 죄를 묻되, 적어도 밥그릇은 차지 말아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생각이 송강호로부터 밥은 먹고 다니냐는 엉뚱한 대사를 치게 만든 것이다. 밥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비록 빌어먹는 거지라고 해도 그들은 밥을 먹을 권리가 있고, 괴물이라고 해도 밥을 먹을 권리가 있다. 사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말은 계룡산 꼭대기 구름 바위 위에서 뜬구름잡는 머털도사의 헛소리'다. 그래서 벼슬아치들은 그 알량한 박애'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용서한 것일까 ? 한국인이 원수를 배부르고 등 따습게 만든 꼬락서니를 보면 대한민국 벼슬아치들은 노벨평화상을 1000000000번은 받고도 남을 것이다. 저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 죄를 미워하면 그 사람도 미워해야 한다. "
다만 죄를 미워하되 밥그릇은 차지 말아야 한다. 밥은 먹고 다니냐, 라고 말하던 그가 다시 밥'에 대해 묻는다. 영화 < 변호인 > 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글자'인 단어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눈, 코, 귀, 입, 손, 발, 좆, 숨, 물 그리고 밥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절대적 요소라는 측면에서 보면 숭고하기까지 한 단어이다. 만약에 송강호가 박해일에게 밥 대신 " 사탕은 먹고 다니냐 ? " 라고 말했다면 다 된 밥에 코 빠질 뻔했다. 반면 한 글자 단어에 비하면 두 글자 단어'는 부차적인 요소에 해당된다. 사랑과 미움 따위의 감정 단어가 두 글자인 이유는 살기 위해 목구멍을 넘겨야 하는 한 글자 단어들에 비해 사치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다. 불교에서 말하는 삶은 < 겨우의 삶 > 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요구하는 삶도 겨우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부처와 예수는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성인이 아니라 같은 말을 하는 성인'이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한 글자'면 충분하다는 것'이 바로 < 겨우 - 살이 > 이다. 겨우-살이'가 처량스럽고 궁색하며 꾀죄죄하게 느껴진다면 먹물 꼰대처럼 멋지게 꾸밀 수도 있다. 최소주의적 삶'은 어떤가 ? 요즘 유행하는 A,B,C를 섞어서 미니멀리즘적 삶'은 어떤가 ? 다 같은 말이다. 입을 수 있는 < 옷 > 이면 충분하다. < 옷 > 대신 < 루. 이. 비. 통 > 이라는 네 글자를 탐하는 순간, 당신은 속물이 되는 것이다. < 변호인 >에서 송강호는 돈만 밝히는 속물'이다. 돈 많이 버니 좋은 것이다. " 뭐니 뭐니 해도 머니 많이 버니 좋은 것 아니겠니 ? " 그는 < 집 > 이라는 한 글자 단어를 버리고 < 아파트 > 라는 세 글자'로 만들어진 곳으로 이사를 간다. 가장 꼭대기 윗층으로 말이다. 그는 돈을 통해서 고졸'이라는 꾀죄죄한 콤플렉스'를 해소하고 신분 상승을 한 의지의 한국인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 사' 字 로 끝나는 유망 직종에 근무하는 변 ! 호 ! 사 ! 다. 그런 그가 ~士'를 버리고 ~人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국밥집 아들'을 변호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士(벼슬아치 사)를 버리고 같은 눈높이로 사람(人)을 바라본다. 군화발에 퍼렇게 멍든 육체 앞에서, 그 무수한 어린것들 앞에서, 같은 눈높이로 묻는 것이다. " 밥은 먹고 다니냐.... " < 국밥 > 은 비빔밥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하나로 담는 그릇이다. 음식에도 < 겨우 > 라는 철학적 접근이 가능하다면 국밥이야말로 한 글자 미니멀리즘이다. 함민복의 시 < 눈물은 왜 짠가 > 에서 시인의 노모'는 설렁탕 주인을 불러 국물이 짜다며 뽀얗고 말간 육수를 더 달라고 부탁한다. 노모의 속내는 가난한 아들에게 더 많은 국물을 주기 위해서이다. 투가리'라는 그릇 속에 담긴 국과 밥을 삼키면서 시인은 말한다. 눈물은 왜 짠가....
누군가 말했다. 송강호의 연기는 마치 사자후를 토해내는 것 같다고 말이다. 이 말에 동의한다. 송강호는 배우라기보다는 차라리 귀신에 가깝다. < 밀양 > 에서의 송강호 연기가 절제의 미학이었다면, < 변호인 > 은 눈물을 쏟아내는 신파의 미학에 가깝다. 송강호의 연기가 놀라운 지점은 이 " 쏟아내는 " 과잉 연기'가 통속적 파토스로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미덕이며 아우라'다. 영화는 웃음과 눈물 사이를 잘 타고 넘는다. 다만 눈물이 흔하다 보니 절제미'는 떨어진다. 하지만 송강호의 연기'는 이 모든 것을 무마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의 뿌리는 노무현일 것이다. 밥을 먹는 목적은 계급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침대에 편안하게 눕기 위해서 밥을 먹는 놈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나서 일터로 나가기 위해 밥을 먹는 놈이다. 송강호는 일어나기 위해 밥을 먹는 놈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민주화를 위해 싸운 송강호'가 재판을 받는 씬'이다. 법정은 그를 보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부산 지역 변호사는 士를 버리고 人을 얻어 변호인 자격으로 법정에 앉아 그를 지지한다. 판사가 공동 변호인 명단'을 부른다. 그 호명에 따라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난다. 이 장면은 영화 < 죽은 시인을 위한 사회 > 에 나오는 그 감동적인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송강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변호인의 직립을 바라보다가 울듯 말듯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된다. 적어도 침대에 편히 눕기 위해서 밥을 먹지 말자는 다짐.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일어날 힘을 얻기 위해 밥을 먹은 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 숭고한, 어떤 직립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노무현을 생각할수록 자꾸 이명박을 생각하게 만든다. 살리에르, 모짜르트의 천재성과 대중적 사랑을 질투했던 인물. 나는 이명박과 살리에르가 자꾸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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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는 민주노총이 짓밟힌 줄은 전혀 몰랐다. 영화를 보고 나서 버스에 오르는데 버스 기사'가 광화문에서 정차하지 않고 우회해서 돌아간다는 사전 고지를 하길래 고개를 갸우뚱했다. 버스 안에서 자꾸 송강호의 저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 쏟아내도 통속이 되지 않는 저 배우는 배우가 아니라 귀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살풀이였다. 그리고 집에 왔을 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뉴스를 통해 한때 전두환의 사위였던 윤상현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았다. 그가 방긋 웃으면서 내뱉은 팥죽 먹었냐는 인사말이 내 목에 걸렸다. 영화 속 송강호는 노동자의 밥줄을 염려하는데, 윤상현은 노동자의 밥줄 따위는 신경 안 쓴다는 웃음이다. 국밥과 팥죽, 묘한 대조'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아무런 연민 없이 웃는, 저 환한 웃음이 헛헛해서 쓸쓸했다. 저 웃음은 헛것'이다. 귀신과 헛것'은 다른 것이다. 귀신은 무겁고 헛것은 가볍다.
무게의 있고 없음'이 귀신과 헛것을 나눈다.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단지 외로운 자일 뿐이다. 하지만 헛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있다. 정작 두려운 존재는 귀신이 아니라 껍데기가 전부인 헛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