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과 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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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터는 한때 나와 애증의 관계였던 나턀야 님의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미니멀포스터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30분 정도 또닥거리다가 만든 작품 같습니다만, 인간성은 별로입니다....
고등학생 때 < 모비 딕 > 을 읽었다. 범우사'에서 나온 책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청소년용 축약본'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분량'에 지쳐서 나가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에이해브 선장'이 모비 딕'과 목숨을 건 나흘 간의 사투와 소설인지 사전인지 헷갈리게 만든 고래학'이 지리멸렬하게 나열되어서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었던 기억이 전부다. 독서란 잊기 위해서 읽는 행위'라지만 세부적인 줄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기본적인 줄거리마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스티븐 킹 단편집 < 스켈레톤 크루 > 에 삽입된 " 안개 " 라는 소설을 읽다가 " 안개는 짙은 백색이었다 " 라는 문장에서 문득 이 소설이 허먼 멜빌의 < 모비 딕 > 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충 200페이지'가 넘는 < 안개 > 는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장편에 가깝다.
그런데 킹은 이 정도 분량은 장편이 될 수 없다고 보는 듯하다. 270페이지 분량인 < 스탠 바이 미 > 나 3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 우등생 > 이란 작품도 그냥 올망졸망한 2편과 함께 묶어서 " 사계 " 라는 소설집 한 권'으로 출간하는 것을 보면 킹은 확실히 양심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단편 하나를 쓰는 데에도 온갖 폼을 잡으며 징징거리는 한국 작가들은 < 사계 > 라는 소설집을 장편소설 네 권으로 출간해서 인세에 욕심을 냈을 것이 분명하다. 킹이 < 유혹하는 글쓰기 > 에서 고백했듯이 돈을 벌기 위해서 소설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좋아서 쓰다 보니 돈을 번 것뿐이다. 하지만 킹은 돈만 밝히는 속물은 아니었다. < 쇼생크 탈출 > 이란 걸작 소설 판권을 당시 애송이였던 프랭크 다라본트에게 조건없이 단돈 1달러에 판 것을 보아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후에 로브 라이너는 프랭크 다라본드에게 이 소설 판권을 250만 달러'에 팔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다라본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스스로 이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는 < 벽 속의 여인 > 이란 학생 영화를 통해 킹과 인연을 맺은 후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을 거쳐 < 미스트 > 까지 연출하게 된다. 영화 < 미스트 > 는 마치 물안개가 자욱한 망망대해'에서 좌표를 잃고 표류 중인 배'에서 펼쳐지는 잔혹극 같다. 그리 생각하면 이 영화는 존 휴스턴이 56년도에 만든 걸작 < 백경 > 에 대한 엉뚱한 리메이크'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개는 백경에 대한 은유이고, 안개에 둘러쌓인 슈퍼마켓은 포경선 피쿼드 호'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그렇다, 슈퍼마켓'은 동력을 잃고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난파선이요, 슈퍼마켓 주차장에 주차된 차들은 구명선'이다. 또한 안개'는 얼굴이 없다는 점(얼굴이 없다는 것은 결국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다는 것)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백경'에게 느꼈던 공포와 비슷했다.
" 향유고래의 경우에는 이마에 본래 갖추어진 고귀하고 위대한 신 같은 위엄이 너무 크게 확대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자연계의 어떤 생물을 볼 때보다 훨씬 강력하게 신성과 그 무서운 힘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향유고래의 이마에서 어느 한 점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목구비가 하나도 뚜렷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눈, 코, 귀 , 입도 없고 얼굴도 없다. 향유고래에게는 전정한 의미의 얼굴이 없다. 주름투성이 이마가 넓은 하늘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것은 보트와 배와 인간의 운명을 품고 묵묵히 아래로 내려가 있다. " ( 모비 딕, 79장 )
영화 < 타이타닉 > 이 " 암초 " 라는 거대한 괴물 때문에 벌어진 재난 영화'라면 < 미스트 > 는 " 안개 " 라는 거대한 괴물 때문에 좌초된 재난 영화'라 할 수 있다. 거대한 것은 늘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고래를 눈앞에서 정면으로 본 사람은 흰 덩어리'만 볼 뿐 전체를 볼 수가 없다. 눈, 코, 입이 보이지 않으니 저 흰 덩어리가 머리인지, 배인지, 옆구리인지 모른다. 그저 거대한 흰 덩어리가 전체를 가득 채울 뿐이다. 마찬가지로 < 안개 > 에서 슈퍼마켓에 갇힌 주민들이 느끼는 공포 또한 안개라는 거대한 흰 덩어리'다. 안개는 얼굴을 숨겼다기 보다는 거대해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다는 측면에서 더욱 공포스럽다. < 모비 딕 > 또한 거대한 고래'를 통해 숭배와 공포 사이를 오고간다. 그것은 악마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 해양 모험 소설'은 화자인 이슈메일과 식인종 퀴케그'를 통해 기독교와 이교도의 문제를 다루는데 이슈메일은 식인종인 퀴케그를 통해 자유롭고 건강한 영혼을 본다. 이슈메일이 보기에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절실한 기독교인인 스타벅'이 아니라 이교도인 퀴케그'이다. < 안개 > 또한 광신주의로 빠져버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두 작품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이 소설의 주제는 명확하다. " 안개'보다 두려운 것은 인간'이다 ! " 그래서 주인공 데이비드와 일행은 인간 속에 숨는 것이 아니라 안개 속에 숨는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젊은 시절, 학생들에게 작문 수업을 가르쳤던 스티븐 킹'이 만신전에 오를 < 모비 딕 > 을 읽지 않고서 " 백색 공포 " 에 대한 소설을 썼을 리는 없다. < 모비 딕 > 에서 에이헤브 선장은 작살을 던져 고래를 명중시키지만 오히려 그 작살 줄에 목이 감겨서 죽게 되는데,
이와 유사한 장면'이 < 안개 > 에서도 반복된다.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을 주민 몇몇이 안개에 쌓인 슈퍼마켓을 탈출하려고 하는데 데이비드'는 무리 가운데 한 명의 허리에 빨래줄을 묶어 밖으로 내보낸다. 그런데 그 장면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무리 온갖 변명거리를 대서 킹을 옹호하려고 해도 이 장면은 확실히 엉뚱하다. 바로 그 장면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 손에서 술술 풀려 나가던 줄이 갑자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줄을 풀어 내는 동안, 아버지가 그레고리 팩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 모비 딕 > 을 보여 주겠다며 부룩사이드로 데려갔던 때가 떠올랐다. 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152 ) " 이 문장을 읽다 보면 왜 스티븐 킹이 무리하게 " 밧줄 " 설정을 삽입시켰는지를 알 수 있다.
< 모비 딕 > 에서 밧줄'은 매우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갑판장 스타벅이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에 저항하며 돗대의 줄을 끊어버리자 돗대 끝에서 푸른 불꽃이 번쩍거리는 공전 현상이 일어나는데 에이헤브 선장은 이 현상을 흰 고래가 나타날 징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에이헤브 선장은 작살로 고래를 명중시키는데 고래가 작살을 몸속에 품은 채 물속으로 도망치자 작살 줄이 빠르게 물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때 선장은 작살 줄에 목이 감겨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범선'이란 하얀 천과 밧줄의 세계가 아니었던가 ! 추측이지만, 스티븐 킹은 흰 덩어리인 안개 ( moby dick'은 말 그대로 거대한 놈'이란 뜻이다 ) 가 흰 고래'에 대한 은유였음을 말하고 싶어서 이 장면을 삽입시켰을 것이 분명하다. 안개 속으로 스멀스멀 들어가던 줄은 어느 순간 미친듯한 속도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마치 에이헤브 선장이 작살 줄에 목이 묶여서 눈 깜짝할 사이에 물속으로 빨려들어갔듯이 말이다. 이처럼 < 모비 딕 > 과 < 미스트 > 는 닮은 점이 많다. 누군가는 이 주장이 억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영미 문학의 만신전에 오른 클래식 고전을 이런 잡식성 대중 소설과 엮으려는 속내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킹이 < 모비 딕 > 을 교과서 삼아 이 소설을 썼다는 점이지 이 소설이 < 모비 딕 > 에 버금가는 소설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소설 < 모비 딕 > 은 에이해브 선장과 흰 고래'가 벌이는 나흘 간의 사투를 다루었고, 소설 < 안개 > 또한 나흘 간의 사투를 다룬다. " 이 글은 7월 23일 새벽 1시 15분에 쓰고 있는 것이다. 모든 참극의 출발점이 된 폭풍이 끝난 지 겨우 4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 239 ) "
스티븐 킹은 알래스카에서도 냉동고를 팔 위인'이다. 바다에서 벌어지는 < 포경선 대 고래 > 의 사투는 킹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 슈퍼마켓 대 안개 > 의 사투로 삐(B)스럽게 각색된다. < 그린 마일 > 에서 이니셜 J.C 로 등장하는 거대한 흑인 죄수 는 자세히 보면 예수의 기적을 모티브로 했다. J.C는 Jesus Christ'의 약자'다. 그리고 미친 간호사인 애니 월크스'에게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제공해야지만 그날그날을 살아갈 수 있는 소설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 < 미저리 > 는 < 천일야화 > 에서 아이디어를 훔쳐서 b스럽게 만들어낸다. 아, 킹'이야말로 닥치는 대로 흡수 통일'하려는 소설-기계'다. 이 하이브리드적 b급 감수성'이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든다. 그러니깐 그는 줄거리'를 새롭게 창조한다기 보다는 이미 존재했던 무수한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먹어치우는 잡식'에 탁월한 작가'다. 잡식이라고 표현하니 킹'에 대한 예우는 아닌 것 같아 수정한다. 그는 통섭의 대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