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마이, 의리적 혈투
2 : 돌아온 외팔이 + 넘버3
내가 살던 동네는 집집마다 마당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국가 주도형 기획 도시여서 대규모 밭을 주택 단지'로 만들었는데 건설사에서 1가구 1자녀 정책에 호응이라도 하듯 1주택 1(라일락)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4월이 오면 마을 전체가 하얀 라일락 군락이 되어 장관이었다. 기획 도시이다보니 집들이 다 고만고만했는데 유독 한 집'만 규모가 컸다. 대부분의 주택이 40평 내외였다면 그 집은 100평 규모였다. 무엇보다 마당 넓은 집이어서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집을 " 형사네 " 라고 불렀다. 집주인이 형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 형사네 " 는 집 전체를 세 놓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새로 온 이웃은 공교롭게도 조폭 두목이었다. 형사가 살던 집에 조폭 두목이 들어온 것이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조폭 두목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서 두 집 살림'을 하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똘마니들이 골목길에 주욱 대기하는 풍경이었다. 영화에서 보는 풍경과 흡사했는데 어린 마음에 꽤 근사해 보였다. 그 남자는 조폭 세계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이 틀림없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이웃인 조폭 두목과 두목의 애인'을 좋아했다. 그들은 주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는데 툭 하면 짜장면이나 군만두 따위를 우리에게 주고는 했다. 여자는 늘 짙은 화장에 미용실에서 갓 다듬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화류계에서 놀던 여자가 분명했다. 밤에 출근을 해서 새벽에 들어오고는 했으니깐 말이다. 나는 짜장면을 허겁지겁 먹으면서 늘 생각했다. " 깡패 짓도 꽤 근사한걸 ! " 그들은 그 집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1년 후,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내가 깡패'를 근사하게 본 이유는 아마도 < 야인시대 > 따위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김두한, 시라소니, 최영의가 주먹만으로 조직을 평정하던 이야기에는 주먹질에 낭만을 부여했으니깐 말이다. 주먹으로 세를 과시하던 건달은 어느새 연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보이 호텔 사건은 조폭史에서 " 주먹 싸움 " 에서 " 칼질 " 로 패러다임이 180도 바뀐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양은, 그가 바로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다. 영화 < 보스 > 는 조양은을 다룬 전기영화인데 그는 이 영화에서 주연도 맡았다. 영화는 토 나올 만큼 개같은 영화'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주연을 맡은 조양은'이 주먹을 휘두르며 제작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 조양은 1인 독재 찬양 영화 " 가 되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바로 송능한'이다. 그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양아치가 어떤 놈인가를 제대로 배웠을 것이다. 그는 후에 전설적 컬트 영화 < 넘버3 > 로 감독 데뷔를 한다
영화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제목은 < 백조 > 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 인 척’ 흉내를 내는 > 속물(들)’을 보고 있다. 조폭 두목은 합법적 경영인 흉내’를 내며 경영선진화 정책을 펴고, 양아치 부하들/박상면’은 애국자 시늉을 내며, 랭보/박강성’은 고뇌하는 시인 흉내를 낸다. 룸살롱 새끼 마담’은 술 마시고, 노래 하고, 춤을 추면서 시인이 되고, 불사파 두목 조필/.송강호’는 불한당 같은 선비 흉내’를 낸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우아한 척'이다. 이들 모리배는 마치 호수에 둥둥 떠다니는 오리배 같다. 1부 제목 < 백조 > 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아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물 속에서 쉴 새 없이 오리발을 우스꽝스럽게 휘져어야 하는 백조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조롱이다. 백조는 물 밖에서는 < 우아 >하지만 물속에서는 < 우스 >운 놈이다. 그것은 꼴통과 꼰대 그리고 좌파인 척하는 우파들의 이중적 태도와 유사하다.
두 번째 장 제목은 < 쌈마이> 다. 이 영화에는 송강호가 연기한 조필이’는 불사파 조직 두목으로 나온다. 아닐 不,에 죽을 死’다. 조직 이름인 불사’라는 표현은 왠지 모르게 음란하다. 불사파를 상징하는 토템 도상인olo 또한 그, 그그그것을 닮았다. 더군다나 조필이라는 이름을 강하게 부르면 좆삐리’ 가 되지 않던가 ? 삐리’는 광대를 따라다니며 재주를 배우는 아이’를 말하는데, 좆과 삐리’가 만나면 어린아이의 작은 성기’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렇다, 불사파 제자들에게 자신을 거대한 후지산, 딱딱한 대물, 오래 가는 양물’이라고 소개하는 조필이는 좆삐리’였다. 백조와 쌈마이’는 한통속이다. 백조가 물 위에서는 우아한 것처럼 보이지만 물 속에서는 죽기살기로 물장구를 치듯이, 조폭으로 상징되는 오야붕 조필이는 알고 보면 코찔찔이 얼라의 그것'이었다.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짓인가. 조필'은 발기해도 3센티미터다.
조필로 상징되는 볼품 없는 허풍’은 전설이 되었다. 현정화와 최영의에 대한 육담’은 근대적 아버지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현정화’로 대표되는 <헝그리 정신 > 과 최영의’로 상징되는 <무뎃뽀* 정신 > 은 학교 운동장에서 월요 조회 시간’이면 머리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훈화 정신이다. 헝그리 정신’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박카스 특유의 미친 신세계이고, 무뎃뽀 정신’은 “불가능은 없다”의 세계이다. 박카스 국토대장정 식 헝그리 정신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고생의 미학’이 아니라 순종의 미학’이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길 위의 날씨는 덥고, 집 안은 시원하다. 부모 말 잘 듣자, 공부 열심히 해서 땡볕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되지 말자, 순종하자, 그러자, 그게 장땡이다. 박카스 참가자들이여, 울먹이면서 이렇게 인터뷰하자 : 엄마, 아빠 사랑해요 !
그것(들)은 박정희 식으로 말하자면 < 악 > 을 닮았다. 라면 먹고 달린 선수가 현정화가 아니라 임춘애’라고 해도, 정답은 현정화’라고 말해야 한다. 틀려도 믿고 따라야 하는 이유는 무조건적 믿음에 의해서만 잘 살아보세, 라는 욕망이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밴츠 몰고, 폼 나게 룸살롱에서 양주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6척 거인 존슨’과 맞짱 뜬 최영의’의 전설적 다구리는 정주영 식 < 깡' >을 닮았다. 그들은 농번기가 되면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풍월가’를 읊거나 사막 한가운데 바벨탑을 짓는 전설적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이지만, 카메라’가 < 틸 다운 >해서 물밑과 땅 밑으로 침투하면 그곳에는 좆나게 휘젓는 오리발의 세계’가 있다. 막걸리 너머엔 날마다 술집 아가씨’를 청와대 아방궁으로 공수하는 이상한 위스키의 세계가 있으며 정주영의 낡은 구두 신화에는 노동운동에 대한 집요한 탄압이 있었다. 그들 상체는 우아한 백조이지만 하체는 우스꽝스러운 오리발’이며, 불굴의 페니스’는 알고 보면 발기해도 3센티미터인 초라한 고추’의 세계이다.
마지막 3부 제목은< 카오스 >다. 영화 속 오리배들은 모두 카오스로 모인다. 카오스’는 룸살롱’ 이름이다. 이곳에는 3류 건달들과 3류 야쿠자와 3류 검사와 3류 시인과 3류 마담은 각자 방에서 놀고 있다. 한국 양아치는 일본 양아치’와 독도를 놓고 신경전 중이다. 그리고 시인과 부인’은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불한당 같은 선비들이 침투하고, 마지막은 형사들이 접수한다. 불이 나간 컴컴한 지하 공간에서, 피아 구별이 불가능한 어둠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 찌르고 죽인다. 이 신랄한 육담과 조크’는 대한민국 세기말’에 대한 독설’처럼 보인다. 감독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썩을 대로 썩었고, 갈 때까지 갔다.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보수에서 꼴통 모두 백조다, 쌈마이다, 넘버 3다, 좆삐리다. 3센티미터다. 말캉말캉하다, 애국가 1절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돌아눕는 남편의 등짝이다. 한 대 차주고 싶은 등짝이다. 어차피 이놈이 저놈이고, 저놈이 이놈’이니 누가 누구를 찌르던 상관없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룸살롱으로 축소된 욕망의 대한민국은 대책이 없다.
혼란 그 자체다. 감독이 원하는 것’은 갱생이기보다는 파멸’인 것처럼 보인다. 감독은 실제로 < 세기말 > 을 찍은 후 홀연히 영화계 은퇴를 선언한 후 이민’을 갔다. 내가 보기엔 이민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처럼 보인다. 영화 < 넘버 3 > 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구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무게 있는 건달 영화’에서 가벼운 양아치 조폭코미디 영화’로 바뀌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자막의 적극적 활용, 콜라주 기법, 입말이 풀어내는 향연’은 코미디 영화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작품이 되었다. 기존의 조폭 영화’가 위악적 남성의 거친 서사’를 다루었다면, 이 영화는 쌩-양아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사랑을 위해서 희생한다거나 가족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식’의 자기 희생 서사’가 배제된다. 왜냐하면 그런 양아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놈’은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사시미 칼’에 윤리가 있던가 ? 눈물이 있던가 ? 사시미 칼’은 윤리적이지도 않으며 로맨스적이지도 않고 영웅적이지도 않다. 사시미는 사시미다. 여러분, 이런 나라에서 열심히 사시미 !(개인적 취향이 담긴 조크다) 감독 송능한’은 로버트 알트만과 쿠엔틴 타란티노 사이’에 있는 듯하다. 그는 한국 영화의 전통 서사’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듯 보인다. < 넘버 3 > 는 유하의 시집 < 무림 일기 > 속 세상과 비슷하다. 대한민국은 좆만한 놈들이 설치는 세계다. 시인 유하는 시집 < 무림일기 > 에서 한국 사회를 싸구려 무협영화 속 중원무림으로 풀어낸다. 이 중원무림에 절대 맹주는 없다. 맹주들이 항상 으름장을 놓곤 하지만 알고 보면 개똥 같은 소리'다. 그들은 " 닭 잡을 힘도 없 " 는 꾀죄죄한 놈들이다. 맹주가 아니라 맹추다. 좆만한 놈들이 무림을 평정하겠다고 설치니, 하는 짓이 가관이다. 시 < 돌아온 외팔이 > 는 얼뜨기 맹추를 양산하는 정글 자본주의 속성을 풍자한다.
응? 살기가...... !
펑펑 비수가 날아오고, 잽싸게 주인공 외팔이가 몸을 날려
내려선 곳은 소림사의 잔디밭, 아차차
'잔디에 들어가지 마시오' 하얀 푯말이 그대로 화면에 비친
웃지 못할 국적 불명 무술 영화
싸구려 제작비에 재미는 시시껄렁해도
어늘한 영상 속에 걸핏하면 나오는, '하산해도 좋느니라'
깊은 산중 사부님의 쩌렁쩌렁한 말 한마디 속에서
문득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발견한다
복수를 위해 남해신검의 제자가 된 지 어언 십오년
비로소 비전의 철학을 배우고 하산하는 외팔이
가는 곳마다 똘마니들이 찌럭찌럭 건들지만
끝끝내ㅏ 검을 뽑지 않는 외팔이
아아 어떻게 배운 팔만사천 검법인가
물 긷고 밥 짓기 삼 년
나무하고 장작 패기 삼 년
빨래하고 아흔아홉 계단 쓸기 삼 년......
피아노 단기 완성!
대입 미술 이 개월 책임 지도!
돈만 내면 즉석에서 흔쾌히 모든 걸 전수해주는,
오늘날의 화끈한 싸부님들 싸부님들
발랄한 제자들은 아무 때나 발랄하게 하산하여
아무 때나 아무 때나 칼을 뽑아 든다
복싱을 배우고 나면 흉기 같은 주먹으로 기껏 아내나 패고
소리를 전수 받으면 뽕짝이나 부르고
무술을 배우면 약장수 아니면 정치 깡패가 되는,
얄밉도록 발랄한 현실의 제자 여루분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재주를 삼가고
귀히 여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무리 황당무계한 삼류 무협영화지만
'하산해도 좋느니라'
백발성성한 사부의 말씀 그 속뜻만큼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안배가 깃들어 있는가
헌데, 만약 내 시의 사부가 있다면?
이놈, 하산은 무슨 얼어 죽을.....
연필만 한 삼 년 더 깎어라
껄껄껄
- 돌아온 외팔이, 전문
" 싸부님들 싸부님들 " 은 " 돈만 내면 즉석에서 흔쾌히 모든 걸 전수해 " 준다. " 물 긷고 밥 짓기 삼 년 / 나무하고 장작 패기 삼 년 / 빨래하고 아흔아홉 계단 쓸기 삼 년 " 을 거쳐야 비로소 사부님으로부터 " 하산해도 좋느니라 " 라는 소릴 듣던 시절과 비교하면 너무 다르다. 정글자본주의는 " 이 개월 책임 지도 " 하에 기술을 전수하여 중원무림에 내놓는다. 이러니 " 아무 때나 아무 때나 칼을 뽑아 " 들고 " 복싱을 배우고 나면 흉기 같은 주먹으로 기껏 아내나 패고 / 소리를 전수 받으면 뽕작이나 부르 " 는 것이다. < 사부님 > 은 없고 < 싸부님들 > 만 넘쳐난다. 영화 < 넘버 3 > 속 모리배들도 모두 싸부들로부터 이 개월 책임 지도 하에 단기 속성으로 무술을 연마한 무림 맹추'들이다. 물론 그들은 맹주라고 우길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