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신조 ㅣ 하늘에서 비가 내리니, 신이 그를 돕다.

 

 

8. 두보 시선 +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春夜喜雨(춘야희우)

 

                     杜甫(두보)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반가운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봄이 되니 내리네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둡고
江船火燭明(강선화촉명)  강 위에 뜬 배는 불빛만 비치네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새벽에 붉은 빛으로 젖은 곳을 보니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금관성이 꽃으로 겹겹이 덮여 있네
 

 

好雨(호우)는 때맞춰 내리는 단비'를 뜻한다. 비'는 계절에 따라 이름이 각각 다르다. < 목비 > 는 봄철 모내기 할 무렵에 한목 오는 비이고, < 잠비 > 는 여름철에 내리는 비를 뜻한다. 옛날에는 농경 사회'였으니 여름에 굵직하게 거세게 퍼붓는 " 자드락비 " 가 내리면 일을 못하니 방에서 낮잠을 잔다고 해서 ' 잠비 ' 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속담 가운데 " 가을비는 떡비 " 라는 말도 있다. 잠비와 같이 비가 오면 일하러 나가지 못하게 되니 " 집 안에서 넉넉한 곡식으로 떡이나 해 먹고 지낸(네이버 국어사전) " 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밖에도 가랑비, 달구비, 먼지잼, 보슬비, 부슬비, 이슬비, 비꽃, 여우비, 웃비, 소나기, 자드락비, 채찍비, 단비 등이 있다. 어느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했던가 ?

 

비는 계절에 따라 그 이름이 각각 다르고, 비 오는 양이나 형태에 따라서도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도 다르다. 단비'는 계절, 강우량, 형태에 영향을 받는다기보다는 간절히 원할 때 내리는 비'에 부여된 이름이다. 봄 가뭄에 내리는 비도 단비요, 무더울 때 내리는 비도 단비'다. 개인적으로 퇴근 무렵 내리는 겨울비'가 내게는 단비'다. 술 한 잔 하기 좋은 비다.  비와 관련된 낱말이 많다는 사실은 농경사회에서 비'가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엇보다도 때맞춰 내리는 단비는 반가운 손님과 같았으리라. 그래서 한국인은 " 비가 내린다 " 라고도 표현하지만 " 비가 온다 " 라고도 표현한다. 특히 단비일 경우는 단배가 내린다는 표현보다는 단비가 온다고 표현한다. 그렇다, 단비는 내리는 게 아니다 오는 것이다 !  

 

두보의 < 춘야희우 > 는 " 단비 " 에 대한 시'다. " 好雨 " 은 " 時節 " 을 안다. 마치 덕이 있는 사람이 仁을 알아보듯이 말이다. 그래서 " 當春乃發生 / 봄이 되니 내 " 린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번역이 못마땅하다. " 봄이 되니 내리네 " 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 봄이 되니 찾아왔네 " 라고 해야 더 운치가 있지 않을까 ? " 隨風潛入夜 /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 에서 < 入 > 은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방향성이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 판단'이다. 됐고 ! 두보는 봄밤에 봄비가 오는 풍경을 본다. 봄이 오니 봄비가 찾아오고, 봄비가 오니 물비린내를 맡은 꽃이 활짝 피기 시작한다. 겹겹이 덮여 있다. 허진호 감독이 만든 < 호우시절 > 이라는 영화 제목은 바로 " 好雨知時節  " 에서 빌려왔으나 아쉽게도 영화는 시적이기는커녕 가장 지루한 영화'였다.

 

반짝이는 데뷔작 이후, 그는 계속 밋밋한 작품들만 쏟아내서 이제는 그가 만든 영화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영화 < 봄날은 간다 > 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 라고 달달하게 물었을 때, 나는 속으로 " 바보야, 문제는 사랑이 변한다는 거야 ! " 라고 외쳤다. 허진호는 몰라서 순진한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까부는 것일까 ? 모를 일이다. 이재용이 감독하고 배용준, 전도연, 이미숙이 연기한 <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 라는 영화를 보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 천하의 소문난 오입쟁이 선비'를 돕는 장면이 나온다. 내용은 다들 아시리라. 배용준은 1%다. 잘생긴 얼굴에 명문가의 후손. 더군다나 그림에 능하고 언변에 능했으니 흠잡을 데 하나 없는 귀족'이다. 비주얼도 되는데 실력도 갖추었으니 그 아무리 견고한 의자라 해도 그 앞에서는 모두 다 자빠진다. 그에게 섹스는 게임'이다.

 

람 심리'란 준다고 하는 놈은 싫고, 싫다고 하는 놈에게는 끌리는 법 아닌가 ? 그는 명문가 과부인 숙부인 정씨(전도연)을 자빠뜨릴 계획을 꾸미지만 전도연 역시 호락호락 넘어갈 여자가 아니다. 숙부인 정씨는 26년 동안 단 한번도 자빠진 적이 없다. 하지만 포기할 그가 아니다. 그는 비 오는 궂은 날씨에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새 비는 그쳤으나 옷은 홀딱 젖었으니 초라하기 그지없다.  물론 여자는 거절한다. 남자가 하늘을 보며 나즈막히 말한다. " 부인의 마음을 알았소. 이만 돌아가리다. 그런데 하늘을 보니 다시 비가 올 것 같구려...... " 그때 때마침 비가 온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그리 야박하게 내쫒는 건 예의가 아닌지라 여자는 그에게 " 사랑채 " 를 내주었으나 그만 " 사랑 " 을 나누게 된다. 天佑神助(천우신조)란 말을 살짝 뒤집어서 天雨神助라 할 만하다. 하늘에서 때마침 비가 오니 신이 오입쟁이를 돕는지라......

 

이로써 27년 간 단 한번도 쓰러진 적이 없었던 튼튼한 의자는 다 자빠져서서 후대에 " 품행이 심히 방탕하고 난잡하며 정조 관념 또한 너덜하여 실제로 존재했을까 싶은 의자 " 가 되었다.  천하의 오입쟁이 남자가 전한 말에 의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 오, 가슴 ! " 에 도달했다고 한다. 남자에게 있어서 그날 내린 비는 " 호우 " 요, 단비'다. 비록 그 단비'로 인하여 비극적 결말을 맞았지만 말이다. 옛말에 " 가라고 가랑비 오고, 있으라고 이슬비 온다 " 는 말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눈치없는 객이 집에 가지 않고 밤새 술이나 마실 요량이니 주인이 꾀를 내어 밖을 보며 " 가라고 가랑비 온다 " 고 말한다. 그러자 엉덩이가 무거운 손님이 " 예끼, 이 사람아 ! 이게 어디 가랑비오. 있으라고 이슬비 오는구만...... " 고 농을 친다는 우스개.

 

아마도 바람둥이 선비가 숙부인 정씨 집을 찾아갔을 때 내린 비는 이슬비'였던 모양이다. 그날, 그는 숙부인 정씨 집에서 열흘을 머물렀으니 말이다. 나도 열심히 마음 수양을 하여 남들에게 가랑비가 아닌 이슬비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오늘의 일기는 여기서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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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4-04-0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농경사회인 우리에겐 비님이 오시는 거죠. 저는 주요한의 빗소리 라는 시를 참 좋아합니다. 주요한 하면 불놀이만 떠올리는데 대학1학년 땐가 무심코 집어든 "실천문학" 잡지에 실려 있는 이 시를 보고 좋아서 한참을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지요. 그래서 비만 오면 이 시가 생각납니다. 주당들은 비를 좋아하기 마련이죠. 술을 부르는 비님 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02:49   좋아요 0 | URL
주요한의 무슨 시인데 그럽니까 ? 알려주세요....

samadhi(眞我) 2014-04-08 10:17   좋아요 0 | URL
빗소리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우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낱같고
볕에서도 봄이 흐를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우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시어가 참 고와서 창호바른 방문 너머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다정한 손님같이" 라는 부분에선 막 설레고.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11:04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다정한 손님 같이라.....
확실히 한국인은 비를 반가운 손님이라 생각한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다 > 라는 표현을 썼겠지요.
이 시 좋은데요. 허허허...
카스테라게 우유에 촉촉하게 녹는 느낌입니다.

새벽 2014-04-08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天雨神助... :)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봤던 허진호 감독 영화 중 [호우시절]이 있었어요.
그 영화 속 비와 이 영화 속 비가 너무 다르다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02:49   좋아요 0 | URL
이 글에서도 호우시절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ㅗㅁ곰손 2014-04-0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취이~~


ㅎㅎㅎㅎ


잘자라 곰발..
(아니다, 낮이니깐 )잘 살아라 곰발.. ㅋㅋ

아, 글고보니 너한테 잘살아,란 말 무진장 많이한듯ㅋㅋㅋㅋㅋㅋ

음.. 그건

정말 너가 잘살았음 해서야. ^-^!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11:45   좋아요 0 | URL
아니 대낮부터 취하고 있어 !
하긴 새벽에 일하고 낮에 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낮에 술 마시는 시간이기는 하지.
하지만 적당히 마셔라. 만취는 좋지 않아. 그냥 알딸딸이 좋긴 한데
이게 잘 안 되지. 알딸딸할 때가 바로 진짜 술을 간절히 원하게 되거든...ㅎㅎㅎㅎㅎㅎ

곰곰손 2014-04-08 12:5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뭬얏?
적당히마시라늬? 넌 니나 잘해라!
ㅋㅋㅋㅋ

잘자~사랑스런곰발탱이야!!

아맞다,나..맥카시 이제야 읽는다.
그르게.. 참 좋다 이사람도.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14:13   좋아요 0 | URL
매카시 좋지. 건조한 문체가 좋아.
헤밍웨이와 존스타인벡을 섞고 여기에 뭔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좀 허세가 보이기도 하면서, 또 유머 감각이 있단 말이야.
내게는 유머감각이 있는 것처럼 보여...
노인을 위한 나라.. 봐바... 끈내주잖아.
하여튼, 알탈탈할 때까지 마셔 ! 술은 좋은 거야.....

뚜뚜루 2014-04-0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사실 '봄날은 간다'에 큰 감흥이 없었엉쇼. 되게 밋밋하고 퍽퍽하다는 느낌이었는데.. 화면이 촌스러워서 그런 건지요. 아무튼 '봄날은 간다'는 그렇다 쳐도 허진호의 후기작들도 보는데 정말 별로더라고요... 음..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18:34   좋아요 0 | URL
뭐 나쁘지는 않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호들갑스럽게 좋은 영화라고도 할 수 없는,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영화들이 후기작들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허진호의 한계인 듯합니다.

수다맨 2014-04-09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캔들은 배용준과 전도연이 하는(!) 장면이랑 맨 마지막에 첩으로 들어온 여자가 정실되는 부분만 생각나네요. 그다지 재미는 없었는데 묘한매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9 10:56   좋아요 0 | URL
아, 맞다. 첩이 나중엔 정실이 되죠 ? 자막 오를 때 에피소드에서 말이죠.
이 영화 원작이 소설 위험한관계입니다. 존말코비치가 출연한 영화도 있죠.
전 둘 다 재미있더라고요.

다만 이 영화에서는 규방 디자인을 너무 근사하게 다뤘어요.
 

 

 

 

 

 

 

 

 

 

 

 

 

 

 

 

 


 

 

 

 

 

질병과 속도.

 

7 : 오감도 + 초록 물고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히트상품은 나폴레옹과 백화점'이다. 몽마르세, 쁘랭탕처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백화점이 이미 180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니 백화점은 프랑스가 발명한 발명품이 틀림없다. 이러한 방식이 미래 사회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란 사실을 간파한 이는 그 유명한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 아케이드 프로젝트 > 란 책을 쓰기도 했다. 백화점의 전신이 바로 아케이드'다. 백화점에서 선보인 제품 진열 방식'은 획기적이었다. 사전 식 배치가 아닌 카테고리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백화점은 가나다라 순으로 배치를 하던 방식을 과감하게 던지고 비슷한 제품끼리 끼리끼리 모아서 진열을 했다. 예를 들면 3층 전체를 큰 카테고리를 패션으로 묶은 후, 여기서 다시 중간 카테고리엔 남성 의류와 여성 의류로 분류하고 여기에 작은 카테고리로 악세서리, 피혁 제품 따위로 나누는 방식이다.

 

말 그대로 수백 켤레의 구두를 한 공간 안에 몰아넣어서 진열하는 방식'이다.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방식이 익숙한 풍경이지만 당시에는 스펙타클이었다. 무엇보다는 이러한 진열 방식은 소비자가 직접 다양한 상품을 비교 평가할 수 있어서 알뜰한 소비가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 끼리끼리 모아서 상품을 진열 방식은 도리어 과소비를 부추길 수 있다. 당신은 비교 평가가 가능하기에 알뜰한 소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비교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에 과소비하게 된다. 백화점 내 공간 안에 상품을 나열할 때 동일한 가격대인 상품만을 진열하지는 않는다. 만 원짜리 시계가 있는가 하면 일 억짜리 시계도 있다. " 아이쇼핑 " 이라는 흔한 말이 있듯이 눈요기'는 공짜다. 만 원짜리 시계를 보다가 십만 원짜리 시계를 보면 만 원짜리 시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런 식으로 결국에는 일 억짜리 시계를 구경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애초에 만 원짜리 시계를 살 결심을 지킬 수 있을까 ? 아마, 당신은 처음 가졌던 소비 계획을 버리고 십만 원짜리 시계나 이십만 원짜리 시계를 고른 후 일 억짜리 시계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으니 과소비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착각이다. 당신은 애초 계획과는 달리 구 만원을 초과한 상태다. 내가 이 지점에서 하고 싶은 말은 끼리끼리 모아두면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며 경쟁한다는 점이다. 조폭 영화'가 주는 교훈은 정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초록은 동색이라거나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말도 안되는 말이 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는 점이다. 이제는 한국 식 장르'가 되어버린 대표적 조폭 영화들 : 비열한 거리, 넘버3, 신세계, 범죄와의 전쟁, 초록 물고기'는 그놈이 그놈인 놈들끼리 모이면 서로 편이 되기는커녕 편을 가르며 치열하게 싸우는 군상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깐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조직 구성원들은 서로 비교 평가를 하며 배신을 때릴 뿐이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뭉쳤지만 목표는 모두 다르다. 조폭이란 인간 불량품들만 진열한 점포의 세계'이다. 그들은 주먹으로 세를 불리겠다는 필요에 의해 의리 따위로 뭉치지만 속내는 조직 내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이상은 시 < 오감도 > 에서 비슷한 놈들끼리 좁은 공간에 몰아넣은 후 모더니즘적 증후'를 읽어낸다.

 

 

13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第1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2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3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4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5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6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7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8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9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10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11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12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13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13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1人인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1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13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이상, 오감도 시 제 1호.

 

 

우선 이 시는 포화 상태에 따른 폐소 공포를 다룬다. 시인 이상은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생략해서 좁은 공간 안에 갇힌 아해들의 호흡 곤란을 표현한다. 골목은 포화 상태로 인하여 숨을 쉴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 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는 모두 13음절로 되어 있는데, 이는 시인이 13인과 13음절을 의도적으로 짜맞춘 것처럼 보인다. 제 13의 음절은 빡빡히 박혀서 숨을 쉴 수 없는 형국이다. 이 형국은 과밀도 공간 안에서의 개체수 실험을 위해 유리 상자 속에 투입된 실험 쥐'와 같은 꼴이다. 이 이미지는 공장식 양계사육장 혹은 유대인들을 강제로 벌거벗겨서 가스실에 몰아넣는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킨다. 이 과정에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로 분열된다. 193년대가 파시즘이 창궐했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이 시 또한 파시즘적 공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파시즘은 파쇼에서 유래되었는데 원래 이 말은 묶음, 결속, 단결'을 의미했다) 

 

이 시에서 중요한 핵심어는 疾走(질주)에서 [疾 : 병 질'] 이라는 한자'다. 疾은 < 疒 > 은 병에 걸려서 병상에 드러누운 형국 안에 < 矢 : 화살 시 > 가 합쳐진 글자'다. 원래는 " 화살에 박힌 상처 " 를 의미했으나 넓은 의미로 쓰여서 민첩하다는 뜻과 함께 질병, 괴로움, 불구자, 해치거나 해롭게 하다, 불길하다, 증오하다, 미워하다, 시기하다의 뜻을 내포하게 되었다. 그러니깐 이 민첩한 속도는 경쾌한 속도가 아니라 불길하며 불행한 속도'다. 골목에 갇힌 아이들은 빠르게 공포가 전염된다. 시인 이상은 < 오감도 > 라는 시를 통해 질병과 속도에 대한 공포를 읽는다. 이 속도는 불길하다. 영화 < 초록 물고기 > 에서 순수했던 막동이는 끼리끼리 모인 좁은 영토 안으로 편입되는 순간 순수를 잃어버린 채 쏜살같이 악에 전염된다. 뒷골목은 건달들이 구역을 빼앗기 위해 다투는 " 막다른 골목길 " 이다.

 

그곳은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 빠꾸 " 가 불가능한 세계'다. 오로지 앞으로 " 疾走 " 해야 한다. 발을 빼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한국 식 깡패 느와르의 법칙이다. 막동이는 자의 반 타의 반 이 싸움에 개입된다. 그는 스스로 거세(손을 부러뜨리는 행위)함으로써 다른 수컷들과는 달리 " 자리 " 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배태곤에게 그것은 감동적인 충성 서약'이었다. 그는 그렇게 비열한 거리 안으로 빠르게 스며든다. 막동이는 부러진 손가락이 다 낫기도 전에 보스의 신임을 얻어 호위무사'가 된다. 하지만 깡패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토록 빠른 안착은 완벽한 실패를 위한 달콤한 장치에 불과하다.  불행했던 자가 그보다 더한 곤경에 빠지면 < 비극 > 이 되지만  행복했던 자가 행복을 잃어버리게 되면 지난날을 < 반성 >하는 계기가 된다. 

 

토마스 샤츠는 <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 에서 슈레이더의 " 필름 느와르를 특징 짓는 7가지 반복적인 테크닉 " 을 소개하면서 필름 느와르가 " 물에 대해 거의 프로이트적인 집착이 있다 " 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물의 대체자는 거울, 창문, 그 외 반사하는 물체들이다. 이 영화에서도 막동이는 자주 거울을 본다. 봄/seeing'은 괴물로 변하고 있는 이중적 자아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결과'이다. 제목 < 초록 물고기 > 가 암시하듯이 막동이는 남성이 지배하는 불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물이 지배하는 세계'다. 영화 속 막동이 가족이 아버지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불이 아버지가 지배하는 세계라면 물은 어머니가 관할하는 장소'다.

 

그가 꿈꾸는 소망은 온가족이 버드나무집에 모여 작은 식당을 차리는 것이다. 버드나무가 냇가 근처에서 자라는, 물을 좋아하는 나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마당 깊고 지붕 낮은 집은 물 위에 지어진 집이다. 그렇기에 초록 물고기를 쫒는 막동이는 물 밖으로 나와 뭍에서 숨을 쉴 수 없는 존재'다. 도입부에 해당하는 기차 안 장면에서 몇몇 무리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막동이가 물에 젖은 스카프를 얼굴 전체에 덮는데 그는 물 냄새를 맡아야 힘과 용기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그가 처할 미래의 암울한 복선을 암시하게 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칼에 찔려 죽어가는 막동이는 자동차 앞유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죽어간다. 그가 내쉬는 한숨은 고스란히 유리창에 반영되어 뿌연 입김'을 남긴다.

 

이 유명한 장면에서 막동이는 칼에 찔려 죽는다기보다는 뭍으로 나온 물고기가 숨을 쉬지 못해 죽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물고기처럼 간절하다.

 

 

 

 

 

 


 

 

 

덧.

 

영화 좋다, 정말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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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퀸 2014-04-06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야. 자기 전에 본 거라 잠깐만 볼려고 하는데 멈춰지지가 않네요 ㅋㅋ 좋네 좋네. 5분 봤는데도 왜 좋지 ㅋㅋ
지금 유명한 배우 다 나오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6 08:30   좋아요 0 | URL
데뷔작하면 좀 어설프지만 아마츄어적 감성으로 이해하는데
이 작품은 매우 촘촘해요. 연기는 물론이고 시나리오 자체가 매우 튼튼할 뿐더러
연출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저도 집 앞에 있는 나무가 무슨 나문가 볼려고 봤다가 맙소사 그냥 다 봐버렸습니다.
버드나무더군요. 옛날 물가에 흔이 있던 나무였는데 요즘은 냇가가 없어서 그런가
보기 힘든 나무죠. 제가 버드나무를 참 좋아하는데요. 아쉬워요.
바람불면 버드나무 흔들릴 때 정말 멋있거든요. 그 소리도 함께..
굴구보니 달콤한인생에 나오는 나무도 버드나무군요....

수다맨 2014-04-06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창동이 본디 사회적 느낌이 강한 소설들을 썼던 사람이라 그런지 스토리를 전개하는 능력이나, 군데군데 주제의식을 심어 놓는 솜씨가 참 탁월한 듯합니다. 오아시스나 박하사탕 같은 영화도 탁발했죠.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만드는 단수가 참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의 시를 이렇게도 해석할 여지가 있군요. 그의 시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상이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확실히 듭니다. 어중간하게 전위적인 모습 보이고 평단이랑 교묘하게 타협하는 몇몇 작가들과 다르게, 이상은 정말로 실험의 극단까지 가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게 진짜 전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6 16:26   좋아요 0 | URL
저는 이창동이 서사에 강하고 이미지에는 약할 줄 알았는데 데뷔작치고가 아니라 데뷔작부터 이미 능수능란하네요. 어떤 아마츄어적 느낌이 전혀 없어요. 사실 그 전 감독들은 조감독을 오래 거친 후 입뽕했는데
이 사람은 제가 알기론 몇 년 안 했어요. 거의 안 한거죠. 영화 만들겠다고 해서 그냥 촬영 현장 경험 한 번 한게 전부일 겁니다. 그러니 조감독 생활은 아예 안했다고 보는 게 맞죠. 하여튼 대단한 감독입니다. 유하 감독돠 어찌 보면 이창동과 비슷하기는 한데 실력 차이가 어마어마하네요. 이 영화 보다가 문득 비열한 거리가 생각나서 보았는데 차이가 확 나서 그냥 보다가 말았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0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창동 정말 좋아요^^ 저는 우리나라 감독 중 이창동이랑 봉준호가 제일 좋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02:52   좋아요 0 | URL
빙고 ! 이저 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좋아합니다. 근데 박찬욱은 너무 서구적인 느낌이 나서 요즘은 좀 실망입니다만....


samadhi(眞我) 2014-04-08 13:0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박찬욱까지 좋아라~ 했다가 뺐어요. 금자씨부터 그런 냄새가 나더니 박쥐부터는 너무 가더라구요. 제가 이해수준이 딸려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문학과 예술은 사회참여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주의라서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11:01   좋아요 0 | URL
오, 저와 비슷하군요. 저도 금자씨부터 뭔가 지나치게 오버한다는 느낌이 들더니 박쥐부터는 막나가는 느낌이 들어서 그의 영화가 좀 거북스럽게 다가옵니다. 잘난 척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나 할까요. 뭐 그런 느낌...
차이밍량이 이런 소릴 했습니다. "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에 걱정하는 영화이고, 좋은 영화는 자신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다. "

새벽 2014-04-08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왜 사람들이 레오 깨락스 [소년 소녀를 만나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그런 영화들 보고 최고의 데뷔작이라고들 하잖어요.
외국영화 중 최고의 입봉작이라면 아무래도 [시민 케인]일테고...
우리나라에선 [초록 물고기]가 아닐까 합니다.
참, 이 영화 나왔을 때 곰곰발님 싫어하시는 정성일 평론가가 엄청 까댔었죠.
허우샤오시엔의 화법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참내. 시대를 관통하는 가족이야기에 호젓한 변두리집에 큰 나무 몇 그루 나오면 다 허우샤오시엔인지...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02:48   좋아요 0 | URL
소년... 과 네 멋대로... 이건 뭐.... 전설적 데뷔작 아니겠습니까.. 허허...
초록물고기 다시 보고 정말 깜짝 놀랏습니다. 그땐 어릴 때 봐서 잘 몰랐는데
이거 다시 보니 놀랄 만한 데뷔작이네요. 오, 놀라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키노 잡지 뒤졌더니 키노 직원들이 뽑은 그해 한국 영화 베스트 텐 목록에 7위 밖에 안 줬더군요.
그래서 이상하다 했는데 정성일이 깠군요... ㅎㅎㅎㅎㅎㅎ
정성일이 사실 초록 물고기가 깐 게 아니죠. 오아시스도 존나 깠어요...
내가 알기로는 뭐 영화 같지도 않다고 했나,...아마 그랬을 거임니다.
정성일 지적 들으니 그런 것 같기는 해요. 허우샤오시엔적이긴 합니다만..ㅎㅎㅎㅎㅎ
아니 이런 서사는 보편적인 거잖아요. 베낀 게 아니라 보편적인 거....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비극적 사랑을 다룬 영화는 모두 섹스피어를 카피한 건가요 ?
하여튼 개똥 같은 소리를 정성일은 참 잘하죠. 잘나서 만든 영화가 카페느와르...
솔직히 그 영화 보고 토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 말이 없는 것들.

 

6 : 아, 입이 없는 것들 + 섬

 

 

 

 

 

결핍은 욕망을 낳기에 절식은 포식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야기한다. 내가 연애에 실패했을 때, 이별 후에 오는 것은 슬픔, 상실, 후회 따위가 아니라 공교롭게도 코카콜라'였다. 하루 평균 뚜껑 달린 코카콜라를 일곱 개나 마셨다. 심지어는 1.5리터 대용량 코카콜라를 3병이나 마신 적도 있었다. 코카콜라 탄산 알갱이는 입 속으로 들어오면 느닷없이 피라냐로 변해서 혓바닥을 가차없이 물어뜯었다. 이 알싸한 고통은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 " 처럼 따가웠다. 이 고통은 독한 말을 쏟아냈던 입,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했던 입, 바람이 전했던 흉흉한 소문을 덧대어서 다른 이에게 즐겁게 속삭이던 입'에 대한 자기 징벌에 가까웠다(고 설레발을 쳐본다). 나는 구순기 고착형 인간'이었다.

 

그때부터 말수가 적어지기 시작했다. 개봉 영화'를 보는 횟수가 적어지는 대신 고전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말이 많은 우디 알렌 토키 영화보다는 말이 전혀 없는 찰리 채플린 무성 영화'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점점 조용한 영화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조용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 거울 > 이라는 영화는 인간이 말이 없어지면 몸짓이 얼마나 우아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아, 말이 없는 것들 !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전문

 

 

" 저 꽃들은 " 초라하다. "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 " 작은 꽃은 금세 어두워진다. 이성복은 꽃을 "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엔 < 꽃 > 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슬픈 존재'다.  자유로운 잿빛 새와는 달리 꽃은 박힌 못'처럼 갇혀 있다. 꽃을 가두는 존재는 바로 " 꽃나무 " 이고, 그 꽃나무를 가두는 존재는 뿌리'다. 뿌리는 꽃나무를 가두고, 꽃나무는 가지를 가두고, 가지는 끝에 꽃을 피운다. 비유를 들자면 꽃은 물 위에 뜬 배이고, 뿌리는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물 밑바닥으로 내린 닻이다. 하지만 이 징역은 운명과 같아서 꽃은 뿌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말라 죽는다. 입이라는 기관이 없는 꽃은 뿌리가 입이다. 그러므로 낙화는 자유를 얻는 동시에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허무한 자유 의지'라 할 수 있다. 

 

입이 있는 것들은 위에서 먹이를 섭취해서 밑바닥으로 쏟아내지만 입이 없는 것들은 아래에서 섭취해서 위로 쏟아낸다.  역설적이게도 입이 있는 것'이 아래로 쏟아내는 것은 더러운 똥이지만 입이 없는 것이 위로 쏟아내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 꽃 > 은 꽃나무가 먹고 남은 것을 쏟아낸 결과'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 섬 > 은 입은 있으나 말이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기덕은 이 영화로 페미니즘 진영쪽 영화평론가들에게 살인에 가까운 독설을 들어야 했고 < 나쁜 남자 > 에서 정점'을 찍었다. 김기덕을 향한 비판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롱과 경멸에 가까웠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력과 강간 장면을 여성에 대한 조롱과 경멸로 읽었고 똑같은 방식으로 감독에게 되돌려 주었다. 

 

김기덕을 비판하던 평론가들은 이 가학성'을 " 김기덕의 정신병적 취향 정도 " 로 이해했고, 가족 중에 가족력(정신과 치료를 받은)이 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기상천외한 평론을 남발하는 이도 있었지만, 김기덕(영화)보다 더 폭력적인 이는 김기덕을 공격한 페미니즘 진영쪽 영화평론가들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문학과 미학적인 면에서 두루 성공한 작품이다. 낚시터 주인은  말수가 적은 여자가 아니라 말이 없는 여자'다. 有口無言인 여자는 인간이기보다는 人魚에 가깝다. 그녀는 물을 지배한다.  영화 < 섬 > 은 이성복이 시 < 아, 입이 없는 것들 >에서 다루는 세계와 유사하다.  닻에 고정된 부표(집)는 뿌리에 의해 고정된 꽃이다. 부표는 꽃이고 닻은 뿌리'이다. 꽃이라고 하기에 어두운 영화라면 물풀'이라고 하자.  

 

사람을 죽여서 경찰을 피해다니는 것으로 추측되는 남자는 저수지 위에 외따로이 떠 있는 노란색 부표(집)로 숨어들지만 사실 그 행위는 자기 징벌에 가깝다. 닻에 고정된 부표로 숨어든다는 사실은 " 살아가는 징역 " 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좌대는 완벽한 1인용 감옥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스스로 징역살이를 자처하는 꼴이다. 그는 몸속에 내재된 동물성을 거세하기 위해 입 속에 낚시바늘을 삼켜 스스로 " 입이 없는 것(식물성) " 이 된다. 이 행위는 일종의 성전환'이다.  어쩌면 여자 또한 그 옛날에 낚시 바늘을 삼켜서 입이 없는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상처 입은 < 입 > 은 무엇인가를 삼킬 때마다 "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 " 처럼 "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 그는 말을 잃어 풀이 된다. 

 

영화는 물 속에 내렸던 닻을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뿌리에서 떨어져나간 부표는 흘러간다.  자유에 대한 열망일까 ? 아니면 죽음에 대한 욕망일까 ? 뿌리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측면에서 그 행위는 자살에 가까운 상징적 몸짓이다. 페미니즘 평론가들은 낚시 바늘로 찌르고 칼로 도려내는 장면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이 상처가 아름답다. 말이 없는 여자가 떠나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자궁 속에 낚시 바늘을 넣어 줄을 당겨 외마디 비명을 질렀을 때, 나는 그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 아파야지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이 불쾌한 소리는 사이렌이 감미롭게 부르는 노래는 아니지만 묘하게 나를 감동시켰다. 뼈아픈 통증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소리를 만들어서 떠나는 배를 붙잡는, 이 처연한 절규에 그 누가 돌을 던지랴.

 

이 세상 모든 꽃나무는 상처에서 꽃을 피운다. 꽃 진 자리'에서 다시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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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4-05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이런 표어를 봤습니다. '책은 문화의 뿌리이자 꽃이다.' 이 문장이 단기적 맥락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선호하는 장기적 맥락의 의미가 담긴 '책의 문화의 씨앗이자 열매이다.'로 바꿔 생각했습니다. 이로써 순환의 고리를 연결했죠.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5 14:33   좋아요 0 | URL
열매가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꽃 진 자리에 열매가 자라더군요.

곰곰손 2014-04-05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꽃진 자리에 열매가 자란다는 말 조타.
피운 꽃이 진다는건 정말 슬픈일일꺼야
근데 그자리에 열매가 맺인다면
또 그만한 구원이 없겠지..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6 08:31   좋아요 0 | URL
꽃 진 자리에 열매가 열리는 법이지.
상처에서 열매가 자라는 거 아니겠냐.

samadhi(眞我) 2014-04-07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낚싯줄 집어넣는 장면은 소름이 돋아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으..... 김기덕 영화는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이 제일 좋았어요. 그것도 사실은 무척 잔인하기도 했지만 정말 아름다웠죠. 영화가 끝나도 일어설 수 없었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8 02:51   좋아요 0 | URL
점 이 섬'이 제일 좋아요. 김기덕 영화는 후기작으로 갈쑤록 뭔가 좀 타협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쓸쓸하비다.
낚시줄 넣는 장면은 정말 끔찍하죠. 저도그 부분에서는 섬찟합니다.
이때 김기덕은 인간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순해진 거 같습다. 스티븐 킹 처럼 말이죠.
킹도 요즘 작품들은 말랑말랑해요..
 

 

 

 

 

 

 

 

 

 

 

 

 

 

 

 

 

 

 


 

 

 

 

 

 

내 안의 너

 

5 : 슬픈 게이 + 달콤한 인생

 

 

 

 

김지운 감독의 영화 < 달콤한 인생 > 은 느와르 멜로 영화‘이다. 표면적으로는 부하가 보스의 여자를 사랑해서 의리 없는 전쟁이 시작되는 것으로 설정되었지만 사실 보스가 부하에게 보낸 여자‘는 히치콕이 즐겨 사용하는 " 맥거핀 " 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맥거핀'이란 언제나 서사를 끌고 가는 강력한 오브제가 아니었던가. < 여자 > 는 아무 의미도 없는 nothing에 불과하지만 " 아버지가 소유한 영토 " 에 편입되는 순간 그것은 강력한 금기taboo가 된다. 이제 그녀는 " 건들면 (아버지에게) 혼나는 대상 " 이 되었다. 그녀는 판도라의 상자'이며 동시에 에덴 동산의 사과나무'다. 아버지(보스)는 사과꽃 필 무렵 아들에게 수수께끼 상자를 선물하며 에덴 동산을 떠난다. 아들은 이 유혹을 견딜 수 있을까 ? 

 

이 영화가 느와르 장르 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자가 맡은 역할은 "악녀 / 팜므 파탈 " 이다. 악녀는 남자를 파괴하기 위해 존재한다. 아들이 여자 옷고름 같은 선물용 리본을 풀어헤쳐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순간 아버지는 쏜살같이 돌아오리라. 그런데 이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들은 아버지가 남기고 간 선물을 풀어헤쳐 금단의 열매를 따먹지는 않는다. 그냥 단순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악녀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거나 그 흔한 키스 씬 하나 없지 않았나 ? 아들은 유혹에 빠진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가 흔들린 것은 여자가 아니라 여자가 연주하는 첼로 곡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제거하기 위해 돌아온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여자를 본다. 어쩌면 보스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두목과 부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이 영화는 " 느와르 퀴어 멜로 무비 " 다. 영화 초반부 보스가 부하를 바라볼 때, 그 나긋나긋한 눈빛을 보라. 그리고 부하인 이병헌이 보스인 김영철 앞에서 조심스레 몸단장을 하는 몸짓을 보라. 두목과 겸상할 때, 이병헌의 황홀한 표정은 어떤가 ? 지아비를 섬기는 자태 고운 조강지처 같다.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 다만 성관계’가 없을 뿐이다. 이 사랑은 영원할까 ? 문득 보스는 부하의 사랑을 시험하고 싶다. 그래서 두목은 부하 앞에 아름다운 여자’를 보낸다. 이 유혹을 이긴다면 두 남자 간 굳은 맹세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하지만 부하는 유혹에 빠졌다(고 보스는 판단한 모양이다). 그 순간 부하는 유혹에 빠진 파계승‘으로 전락한다. 말 그대로 사랑과 전쟁’이다. 이병헌이 혈투 끝에 드디어 만난 김영철에게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 왜 그랬어요 ? ” 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그 말은 마치 “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을 의심했나요 ? ” 라는 절규처럼 들린다.

 

그렇다, 그들은 서로에게 화가 났다. 두목은 부하가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한눈판 것에 대해 화가 났고, 부하는 보스가 자신의 사랑을 의심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때 사랑했으나 치정’으로 끝나는, 질투에 눈이 먼 치정극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이병헌이 검은 유리창을 거울 삼아 샤도우 복싱‘을 하는 시퀸스’인데 그는 유리창에 비친 사내‘를 보고 웃는다. 남자가 남자에게 보내는 웃음치고는 상당히 유혹적이다. 토마스 샤츠는 <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 에서 슈레이더의 " 필름 느와르를 특징 짓는 7가지 반복적인 테크닉 " 을 소개하면서 필름 느와르가 " 물에 대해 거의 프로이트적인 집착이 있다 " 고 지적한다. 여기서 물의 대체자는 거울, 창문, 그 외 반사하는 물체들이다.

 

< 달콤한 인생 > 또한 물(자기 모습을 반사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호텔 바 내부는 " 물의  이미지 " 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온통 반사되는 것투성이'다. 이병헌은 호텔 바 어디에 서 있어도 반사된 자신을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병헌은 밤이 스며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며 황홀해 한다. 이 자기애'는 영화의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채호기는 < 슬픈 게이 >  연작에서 게이를 " 페이스-오프 "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보이는 얼굴은 내것이 아니다.

 

손바닥에 너의 두 눈

내 눈을 빼고 그걸 끼운다.

코와 입 귀를 지우고

너의 코와 입 귀를 덮는다.

머리카락을 뽑고

너의 머리카락을

씌운다.

내 얼굴은 사라지고

거울 속에 비친 네 얼굴

웃는다 너처럼.

너무나 생생한 예전의 너의 미소

그걸 흉내낸다.

내 생각이 너의 생각이도록

반복하고 반복한다.

너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냐.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거지.

 

                        - 슬픈 게이, 부분.

 

" 너의 두 눈 / 내 눈을 빼고 그걸 끼 " 우거나 내 " 머리카락을 뽑고 / 너의 머리카락을 / 씌운다. " 이로써 " 내 얼굴은 사라지고 " 대신 " 거울 속에 비친 네 얼굴 " 만 남는다. 채호기에게 있어서 게이는 분열적이며 다중적 존재'다. 게이는 < 더블 > 이다. 그것은 기만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몸짓'이다. 영화 속 이병헌이 밤이 스며든 거울을 보며 샤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은 < 슬픈 게이 > 를 연상시킨다. 그 또한  " 거울 속에 비친 네 얼굴 " 을 보며 " 웃는다 " 이  미소는 일종의 " 흉내 " 다. 게이는 " 내 몸이 / 내게 맞지 않 " 은 외투를 입은 자다.

 

내 몸이
내게 맞지 않다.

몸에 갇혀
끙끙거리는
나 아닌
몸 속에
다른 이의
애타는
목소리.

덜컹거리는 몸에 실려
나의 일생을 떠메고 가는
잘못 입은 너의
몸의
쓸쓸한 뒷모습.

—채호기, 「게이 4」 전문

 

그는 외투를 벗어 알몸을 보여주고 싶지만 동성애는 사회적 금기'다. 그래서 게이는 슬픈 운명을 가졌다. 내 안에 너 있다. 겉은 < 너 > 인데 속은 < 나 > 다. 혹은 그 반대도 성립된다. 동병상련일까 ? 겉인 < 너 > 는 < 나 > 가 안쓰럽고, < 나 > 는 애써 태연한 척 밝게 웃는 < 너 > 가 애처롭다. 김지운 영화에서 " 동성애적 감성 " 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 달콤한 인생 > 에서 이병헌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스승에 잠에서 깨어나 울고 있는 제자를 보며 묻는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럼 왜 우느냐 ? 달콤한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달콤한 꿈'이란 무엇일까 ?

 

스승은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나뭇가지도 아닌 마음이라 했으나, 사실  가지를 흔들리게 만든 주체'는 뿌리 때문이다. 뿌리가 없는 티끌은 흔들리지 않고 날아갈 뿐이다. 부러진 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리던가 ? 오직 깊게 박힌 존재만이 흔들린다. 자유로운 것은 뿌리가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행복한 자는 뿌리'가 없는 자'이다. 인간은 사회가 인간에게 부여한 고정된 역할 놀이 때문에 힘들어한다. 슬픈 게이는 뿌리(마음)은 여성인데 가지(몸)은 남성이거나 뿌리는 남성인데 가지는 여성인 자다. 그래서 그들은 흔들린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렇게 흔들리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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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퀸 2014-04-0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지운 감독의 유일한 걸작. 누가 김지운 감독 좋아하냐 물어보면 다른 모든 영화를 안 좋아하는데 이 영화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4 09:39   좋아요 0 | URL
빙고 ! 저도 김지운 감독의 유일한 걸작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이 영화 때문에 계속 실망하면서도 김지운 영화를 보지만 이 영화보다 잘빠진 후속작을 만들지는 못하더군요. 여기까지가 그의 한계인 듯......

수다맨 2014-04-0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철 씨 연기를 참 잘 하는데 왠지 스크린으로 보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최수종/정보석 같은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저만한 포스나 느낌이 나오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죠.
이 영화를 보스와 부하의 사랑 얘기로 보는 것도 굉장히 흥미롭네요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4 12:50   좋아요 0 | URL
독보적이죠. 김지운이 김영철을 기용했다는 것은 탁월한 안목입니다.
최수종, 정보석... 전, 이 두 양반 대한민국에서 연기 제일 못하는 사람으로 뽑습니다.
특히 최수종 표 연기... 아주 질색임.....

samadhi(眞我) 2014-04-0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병헌이 화장실 거울을 보며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하는 장면이 인상깊었죠. 그 대사가 양파의 "달콤한 인생" 노래 중간에 나와서 더욱 기억이 나요. 하필 그 대사가 나오는 음악을 다운 받는 바람에^^ 그 음악을 들으며 이병헌처럼 그 대사를 치곤 했었죠. 저도 이 영화 때문에 김지운 감독을 좋아해서 후속작도 괜찮겠거니 믿고 봤다가 그 영화만 잘만든 거구나 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4 12:49   좋아요 0 | URL
느와르 영화는 본질적으로 이중적 자아'를 담습니다. 이 이중성을 담기 위해서는 반사되는 물의 이미지'만큼 좋은 것도 없죠. 화장실 장면도 그렇고 말이죠. 느와르가 본질적으로 성적 불균형을 담는다고 토마스 샤츠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이 영화는 그런 불균형을 다룹니다. 그래도 수작 여러 편 있는 것보다는 걸작 하나 있는데 감독으로써는 뿌듯할 겁니다... ㅋㅋㅋ
 

 

 

 

 

 

 

 

 

 

 

 

 

 

 

 

 

 

 

 


 

 

 

여장남자 시코쿠

 

 

 황병승

 

하늘의 뜨거운 꼭짓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 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

 

다시 꼬리가 자라고 그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을 때

까지 나는 약속하지 않으련다 진실을 말하려고 할수록

나의 거짓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어느 날 누군가 내 필통에 빨간 글씨로 똥이라고 썼던 적이 있다

 

(쥐들은 왜 가만히 달빛을 거닐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골방의 악취를 견딘다

화장을 하고 지우고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푸는 사이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며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포옹을 할 때마다 나의 등 뒤로 무섭게 달아나는 그대의 시선!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아직도 나의 이름을 의심하는가

 

시코쿠, 시코쿠,

 

붉은 입술의 도마뱀은 뛴다

 

장문의 편지를 입에 물고

불속으로 사라진 개를 따라

쓰러진 저 늙은 여자의 침묵을 타넘어

 

뛴다, 도마뱀은

 

창가의 장미가

검붉은 이빨로 불을 먹는 정오

 

숲 속의 손은 편지를 받아들고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강렬한

거짓을 말하련다)

 

기다려라, 기다려라!

 

 

 

 

                                                                                                                                                                 

 

 

 

 

 

응답하라, 시코쿠여 !

 

 

 4 : 여장남자 시코쿠 + 러브 레터

 

문학 모임에서 누근가가 황병승의 < 여장남자 시쿠코 > 를 낭독했을 때, 나는 이 개똥 같은 소리에 당황한 적이 있다. 상대는 국문과 학생들. 그들은 아카데믹한 무림 학원에서 기술을 습득한 무림 맹주들. 손끝을 튕기면 태풍이 휘몰아치리라. 맹무살수가 나에게 " 난해한가 ? " 라고 먼저 선빵을 날렸지만 당황하지 않고 ① 태연한 척 미소를 던지며 코를 파 코딱지를 얼굴에, 팍 ! 끝 ② 도마뱀'이 옥타비오 파스의 불도마뱀'이라는 포에틱딕션을 차용한 것을 아나 ? 라는 질문에 물파스는 들어봤어도 옥타비오 파스는 금시초문이어서 무척 당황스럽지만 내색하지 말고 쓰디쓴 커피와 담배 한 모금 연기를 빨아들이며 빙고, 라고 외친 후 말없이 박수를 짝,짝,짝 ! 끝 ③ 상대방이 지치지 않고 시쿠코가 누구냐고 계속 공격을 하면 ④ 벌떡 일어나며 " 애(황병승)가 많이 다쳤어 ! " 라며 창밖을 본다, 끝. ⑤ 상대방이 비웃으며 개똥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조롱하면 뒷걸음질치며 함부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끝.

 

재작년 해외토픽 한 토막 소개하자면 일하기 싫어하던 우체부 직원이 무더기로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다가 들킨 적이 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딴스홀에 가서 춤을 추기 위해서라고. 또 어떤 이는 편지를 자기 집에 쌓아 두기도 했다. 실제로 편지를 보냈는데 받지 못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때 소중한 편지(letter) 은 잡동사니(litter)가 된다. 배달 사고'란 결국 알파벳 E ☞ I 로 둔갑하게 만든다. 사소한 점과 획 하나가 전체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면 님이 되고, 신부님이라는 낱말에서 님 하나를 빼면 신부가 되지 않느냔 말이다. 전자가 神父(신부)라면 후자는 新婦(신부)다. < 님 > 이라는 글자는 이처럼 아슬아슬하다.

 

편지도 마찬가지다. 답장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은 변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딴스홀에 가기 위해 엉뚱한 짓을 한 ) 우체국 직원이 버린 편지 때문에 헤어진 연인들이 꽤 많이 있었을 것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이별'이다. 라캉은 편지는 항상 수신인에게 도착한다고 말했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LETTER는 수신인에게 전달될 때에만 LETTER가 된다. 이와이 슌지의 < 러브 레터 > 에서 도시 여자'는 죽은 남자친구를 잊지 못한다.  그녀는 우울증에 걸려 있다. 프로이트가 " 애도와 우울증 " 에서 지적했듯이 애도는 슬픔을 다 함께 나누는 행위이고, 우울은 혼자서 간직하는 행위'이다. 죽은 남자는 이별 통보도 없이 겨울 산에서 길을 잃고 사라졌다. 도시 여자가 보기엔 그는 작별 인사도 없이 빠이빠이를 한 것이다. 여자는 그 점이 괘씸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바람난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할 때 " 누구 좋으라고 내가 이혼을 해줘 ? " 라고 말하는 조강지처의 심리 상태와 비슷하다. 그녀는 잊지 못한다기보다는 괘씸하다. 도시 여자는 아무 생각없이 죽은 애인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물론 이 행위는 의미없는 행위다. 살아 있을 때에도 이별 통보도 없이 빠이빠이한 남자였으니 죽어서도 답장을 보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낸 letter는 곧 litter가 되리라. 그런데 답장이 온다. 죽은 남자 이름이 " 정현 " 이라고 하자. 돌아온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 내가 정현인데 넌 누구니 ? 뿌잉뿌잉 " 죽은 자에게서 편지가 온 것일까 ? 라캉이 말한 대로 편지는 항상 수신인에게 도착하는 것일까. 하지만 수신자인 정현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동명이인'일 뿐이다.

 

사연이 어찌 되었든, 답장이 돌아왔다. 답장을 받은 도시 여자는 그를 놓아주기로 한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설산 장면'은 " 응답의 치유 과정 " 을 담는다. 도시 여자는 허공에 대고 소리친다. 오갱끼데스까? 와따시와 갱끼데스. 그러자 메아리도 응답한다. 당신도 잘 있었소 ? 나도 잘 지냈다오. 이 메아리는 죽은 남자의 응답이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바로 이 설산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안부를 묻는다. 말없이 떠나서 미안하다고, 잘 지내냐고 ? 죽음은 쏜살같아서 편지를 부칠 시간이 부족했다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렇게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프랑스어 사랑(amour)와 벽 (mur)은 닮았다. 메아리란 소리가 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응답이 아니었던가.

 

황병승의 < 여장 남자 시코쿠 > 는 처음 읽으면 개똥 같은 소리처럼 보이지만 몇 번 읽다 보면 의외로 쉽다( 잘난 척, 잘난 척. 헤헤) " 꼬리 잘린 도마뱀 " 은 편지를 쓴다. " 찢고 또 쓴다 " 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러브레터'인 모양이다. 누구에게 보내는 것일까 ? 정답은 " 꼬리 " 다. < 꼬리 잘린 도마뱀 > 이 급히 도망치느라 놓고 온 < 잘린 꼬리 > 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 꼬리는 그것을 읽을 것이다 " 라는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깐 < 여장 남자 시코쿠 > 는 한쪽을 잃어버린 도마뱀이 한쪽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 장문의 편지 " 는 대략 이런 내용일 것이다 : 사랑하는 꼬리에게. 보고 싶구나. 이 편지가 제대로 전달될지 모르겠다. 개가 편지를 입에 물고 불 속으로 뛰어들 수도 있거든. 일단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이별 통보도 없이 너를 먼 오지에 남겨두고 떠난 것이 아니다. 내 사랑은 무쇠보다 더 강하고 바위보다 무겁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야밤도주하듯 사선을 넘다 보니 꼬리가 떨어져나갔는지 몰랐단다. 다 내 불찰이다. 나를 용서하렴. 참고 견뎌라.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까지 죽지 말고 기다려라. 사랑하는 나의 꼬리여. 아, 아아아아. 눈물은 왜 뒤가 없어서 눈물이 앞을 가리게 할까. 신을 저주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꼬리 잘린 도마뱀 씀.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연애 편지'다. 영화 < 러브레터 > 와 시 < 여장남자 시코쿠 > 의 공통점은 편지로 접촉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잃어버린 한쪽에게 보낸 메시지가 잘 전달될까 걱정이다. 그리고는 그들이 응답하기를 바란다. 일단 눈물 닦고 이 편지를 다시 읽으면 꼬리 잘린 도마뱀과 꼬리의 신파는 고스란히 시인과 독자의 관계로 이어진다. 시인은 밤마다 찢고 쓰고 다시 찢고 쓴 시를 독자에게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  아니, 그것은 둘째치고라도 우선 시나 제대로 완성할 수나 있을까(시인의 손은 잘려서 숲속에 있다). 하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모양이다. 찢고 다시 쓸 뿐이다. 한때는 " 조금씩 헛배가 부르고 입덧을 하 " 기도 하지만 이내 좌절하게 된다. 여장남자는 결코 임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임이다.

 

이 온갖 근심이 이 시 속에 있다. 다급한 마음에 시인은 " 기다려라 기다려라 " 라고 말한다. 비록 그 말이 " 강렬한 거짓 " 이라고 해도 독자는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시가 써지지 않아서 똥줄이 타는 시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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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4-04-0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세대 답지 않게(?) 저는 편지로 연애했습니다.^^ 이메일이 난무하는 세상이었지만. 얼굴을 보지 않고 몇개월 동안 편지로만 안부를 주고 받고 6개월쯤 뒤에 처음 만났죠. 그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이 러브레터인데요^^
아주 구식인 선배가 저에게 늘 "넌 나보다 구식이야" 라고 했듯 오래된 삶의 방식을 고집합니다. 물론 새로운 것에 환장하기도 하지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4 08:23   좋아요 0 | URL
손편지'가 사라지는 추세죠. 참... 안타까워요.
손편지는 손편지가 가지고 있는 그 묘한 서정이 있는데 말입니다.
전 주로 모으는 성질이 아니어서 다 버리는 스타일인데 편지는 꼬박꼬박 모아두었습니다.

봄밤 2014-04-03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여장남자 시코쿠를 다시 읽어요. 아. 좋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4 08:22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집입니다.

heterotopia 2014-04-03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라캉식 편지 얘기로 하자면 편지는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도착하지 못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을 몇 주 전에 라캉 개론서 비슷한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러브레터>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사람들이 다 명작, 명작해서 봤는데... 정작 그 이상한 사촌? 사촌이었는지 아무튼 어떤 남자의 괴상한 인상만 남았었네요.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4-04 08:22   좋아요 0 | URL
어, 그런가요 ? 그럼 제가 거꾸로 읽은 것이로군요. 편지는 반드시 수신인에게 도착해야 한다를 편지는 반드시 수신인에게 도착한다, 라고 쓴 모양입니다.

저도 그 사촌인가 하는 사람, 참... 이 영화에는 안 어울린다 했습니다.

heterotopia 2014-04-04 16:24   좋아요 0 | URL
그... 에드거 앨런 포 <도둑맞은 편지>를 예를 들면서 썼던 글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뒤팽이란 탐정이 자신한테 의뢰한 G 경찰국장한테 편지를 찾아서 돌려주는데 실은 뒤팽 역시도 편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계속 삼각 형태로 반복해서 돌고 돌고, 결국 편지는 그 누구의 손에도 쥐어지지 않는다는 얘기였던 걸로... 저도 가물가물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