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떠나며......
13. 탁류 +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를 보다가 문득 여행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작정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군산행 티켓을 끊었다. 이유는 없다. 군산 터미널에 내렸을 때, < 군산 > 이라는 도시에 대한 내 첫인상은 꾀죄죄죄죄'였다. 한여름 평일 오후여서 거리에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 보니 추레한 저잣거리'가 나왔다. 첫눈에 이곳이 옛 시내 중심가'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을 닫은 나이트클럽과 방석집들이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번성했으리라. 계속 걸으니 작은 시장'이 나왔다. 가게가 대여섯 개 정도 붙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가게 유리에 선팅을 해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옥외 간판에는 모두 " 안주일절 " 이라거나 " 안주일체 " 라는 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술집인 모양이었다.
입간판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누구는 < 一切 > 을 " 일절 " 이라고 하고 누구는 " 일체 " 라고 하니 말이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 切 > 는 끊을 절'이라는 뜻과 함께 온통 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한자다. 하지만 뜻은 정반대'다. < 안주일체 > 는 온갖 안주'를 구비했다는 뜻이고, < 안주일절 > 에서 일절'은 " 아주, 전혀, 절대로의 뜻으로, 흔히 사물을 부인하거나 행위를 금지할 때에 쓰는 말(네이버 국어사전) " 이므로 안줏거리가 일절 없다는 소리'다. 혼자 찌질하게 웃었다. 웃을 때마다 치질에 걸린 괄약근이 욱씬거렸다. 눈에 띄는 점은 가게마다 얼음맥주'라는 현수막을 걸었다는 점이다. 여름 한철에만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맥주면 맥주이지 얼음맥주는 무슨 뜻일까 ? 미지근한 맥주를 파는 데도 있었던가 ?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안주일절이라고 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당혹스러웠다. 맥주집이라기보다는 공사장 인부들 밥을 해주는 함바 집과 비슷했다. 벽에는 으레 D컵 가슴을 가진 비키니 차림의 여성 사진이 있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달력 속 비키니 여자는 내게 " 식욕이 성욕이에요 ! " 라고 속삭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일어났다.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오더니 큰소리로 일어나라고 한 것이다. 내가 앉은 곳은 의자가 아니라 아이스박스'였다. 테이블마다 놓여 있길래 의자 대용인 줄 알고 앉았더니 아이스박스였다. 박스 안에는 얼음에 담긴 맥주로 가득했다. 아, 했다. 그래서 얼음맥주'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아아, 했다. " 얼음맥주집 " 은 셀프 시스템이었다 ! 나는 다시 찌질하게 웃었다. 치질에 걸린 괄약근이 욱씬거렸다. 웃고 있는 사이, 안주일절이 나왔다.
완두콩, 오이, 청양고추, 간장게장, 방어회, 마른 안주 등등. 나는 깜짝 놀라서 주인에게 안주를 시킨 적 없다고 하자 주인은 또다시 큰 소리로 서비스'라고 했다. " 맥주 3병 마시면 안주는 무한정 나오니께 걱정 마시고 드시쇼. " 그러니깐 여기 셈법은 이렇다. 맥주 3병에 만 원이고, 소주는 2병에 만 원이다. ( 추가 주문 시 소주는 1병 당 오천 원 ) 그날 나는 맥주 6병을 마시고 이만 원을 냈다. 돈을 냈지만 공짜 술'을 얻어먹은 기분이 들었다. 술값이 이토록 저렴한 도시라니 ! 나는 그 길로 이곳에 방을 얻어 살기로 했다. 원없이 술이나 마시다가 죽으리라. 여기서 1년을 보냈다. 365일 술을 마셨다. 단골이 되다 보니 밥을 달라고 하면 밥도 주었기 때문에 끼니와 함께 술도 마실 수 있었다.
술집에서 나는 프로야구를 보았다. 엘지는 항상 졌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취해서 무작정 길을 걷고 있었다. 사진관을 지나쳐 갔는데 문득 기시감이 들어서 뒤돌아보았다. 맙소사,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 에 나왔던 그 사진관이 아니었던가 ?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영화가 군산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그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고는 했다. 한석규와 심은하가 달리기를 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가고, 해망동에도 갔다. 사실 군산은 볼거리가 거의 없는 곳이다. 유적지나 명승지라고 해봐야 은파 유원지나 히로쓰 가옥이 전부였다. 일자리도 없어서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날 궁리만 했다. 하지만 나는 80년대 어느 즈음에서 멈춰버린 듯한 군산을 좋아했다.
군산은 자연 환경이 수려한 고장이 아니었다. 군산 바다는 흙탕물에 가까웠다. 탁류였다. 젊은이들은 자조섞인 말투로 똥물이라고 했다. 채만식 소설 < 탁류 > 는 바로 군산이 무대'다. 내용은 출판사 책 소개로 대신한다.
『탁류』의 서사를 이끄는 인물은 초봉이다. 돈에 눈먼 아버지 정주사 때문에 사기꾼이자 호색한인 은행원 고태수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가는데 결혼한 지 열흘을 겨우 넘겨 악랄한 고리대금업자 장형보의 농간으로 남편 고태수는 탑삭부리 한참봉에게 맞아죽으며 그러는 사이 장형보는 초봉을 겁탈한다. 평소 초봉이 믿고 의지했던 약국 주인 박제호는 부인과 별거함과 동시에 초봉의 처지를 이용해 첩으로 들이는데 초봉이 딸 송희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욕정이 시들해져버리자 마침 송희의 친권을 주장하며 나타난 장형보에게 모녀를 떠넘겨버린다. 초봉은 제게 순종을 강요하며 아이를 학대하는 장형보를 맷돌로 쳐 죽이고 만다.
- 출판사 책 소개글에서 발췌
나는 그림엽서에 나올 만한 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도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겨울이 되자 술집들은 더 이상 얼음맥주를 팔지 않았다. 아이스박스에 보관하지 않아도 얼음처럼 시원했으니깐 말이다. 술 마시다가 죽으리라던 애초의 계획은 틀어졌다. 꼬박꼬박 술집에서 밥을 먹다 보니 오히려 살이 붙어서 건강해졌다. 내가 군산을 떠나던 날, 비가 미친듯이 쏟아졌고 방수비닐을 뒤집어쓴 책 절반 가량은 빗물에 젖어서 울고 있었다. 너만 울었냐 ? 나도 울었다. 시바, 되는 일 하나도 없군. 어제까지만 해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때마침 이사하는 날 비가 쏟아진 것이다. 트럭이 군산대교를 지날 무렵 이삿짐 트럭 운전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창밖을 보았다. 탁류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실없이 자주 웃었다. 그럴 때마다 똥구멍이 자주 아팠다.
그때였다, 갑자기 운전수가 브레이크를 급히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차가 기울어지더니 이내 금강 하구로 추락했다. 절반만 젖었던 책은 탁류에 잠겼다. 물론 나도 탁류에 잠겨 사망에 이르렀다. 탁한 물색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죽어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시바, 재수 존나게 없군. 책이 다 젖었어 ! 쓸데없는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났다. 그럴 때마다 똥구멍이 자주 아팠다. 똥구멍이 아픈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살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죽음으로 인하여 가족은 3억에 가까운 보험금을 받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