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새끼들아 !

 

세월 호 침몰 뉴스를 보면 < 사리 > 와 < 조금 > 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문득, 김선태 시 < 조금새끼 > 가 떠올랐다. 남도 갯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 조금새끼 " 라는 말을 쓴다. 음력 초하루(매달 첫째 날)와 보름(매달 열닷새 날) 사이, 그리고 보름과 그믐(매달 마지막 날) 사이'에 든 7, 8일과 22, 23일을 " 조금 " 이라 하는데 이때가 물이 가장 낮을 때'다. 반대로 보름과 그믐은 물이 가장 높을 때'다. 이때를 " 사리 " 라고 하는 모양이다. 고기잡이배를 타는 선원들은 < 사리 > 때 먼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 조금 > 때가 되어 항구로 돌아온다고 한다. 뱃사람들이 물이 높을 때 먼 바다로 나갔다가 물이 낮을 때 항구로 돌아오니 그들에게는 조금 때가 주말'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뱃사람들은 " 주말 부부 " 의 원조였다. 이처럼 긴 이별과 짧은 만남이 사리와 조금 때에 맞춰 이루어지니 조금은 "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 " 라고 김선태는 말한다.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아시다시피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 마디 속에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 김선태 시 '조금새끼' 전문  

 

 

" 조금 물때에 밴 새끼 " 라는 뜻을 가진 " 조금새끼 " 는 핏줄은 각각 다르지만 공동체적 운명을 함께 하는 동아리'다. 그들은 "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 " 힌다. 그래서 "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 많다. 가만히 보면 조금새끼들은 물고기떼를 닮았다. 멸치떼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다 거대한 그물망에 잡혀 생을 마감하는,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세월 호'가 진도에서 전복한 지 5일째'다. 희박한 공기와 차가운 수온을 생각하면 희망보다는 기적을 바라야 할 때다. 그러나 실낱같은 기적을 간절히 원하기에는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정부는 속도 없이 우왕좌왕하고, 배는 10미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두컴컴한 고래 뱃속 같은 배 안에 갇혀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 아이들 운명 또한 조금새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들은 " (같은 해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 " 였던 공동체적 운명을 가진 또래'였다.  선장이 떠난 배 안에서 한겨울 몸을 잔뜩 웅크린 짐승처럼 몸을 숨긴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픔이 생강처럼 아려와서 일생 생활에서 생각없이 웃다가도 문득 죄책감이 든다. 

 

나를 포함해서 당신은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선장을 욕할 자격이 없다. 그럴 만큼 우리는 떳떳하지 못한 존재'다. 특종에 눈이 멀어서 윤리를 버린 언론이나 비극을 미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도 공범자'이며,  이미 불법이 관례가 되어 버려서 일상이 되어버린 그 무수한 편법과  각종 규제를 암덩어리'라고 규정하는 그 비열한 청와대도 공범자이다. 또한 이런 글 따위를 쓰면서 비극 앞에서 꽤나 괴로운 척하는 나도 개새끼'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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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 2014-04-20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 개새끼 하나 추가요. (저요!) 지쳐서 무뎌졌다가, 세월호-관제센터 무선 내용 듣고, 욕지기가 게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밤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0 23:53   좋아요 0 | URL
규제는 필요하죠. 규제는 암덩어리가 아니라 규제야말로 이런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이명박이 이 규제를 대폭 풀었죠. 그걸 박근혜가 여전히 이상한 논리로 풀자고 하는 것에 대해 놀라울 따름입니다.

에피큐리언 2014-04-21 00:0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규제를 풀자는 것은 대기업에 선물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강자에게 떡하나 더주자는 논리죠.

에피큐리언 2014-04-20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에 <그런데 이 말이 가난한 어떻게 생겨났냐고요?>에서 '가난한'은 빼야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0 23:52   좋아요 0 | URL
맨 앞에 들어갈 말이 그리붙었군요. 에피큐리언 님 오랜만입니다.
별탈없으셨는지요..

푸르푸르 2014-04-2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 이래서 당신을 좋아하는 거
나도 개새끼라고 할 줄 알아서...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1 18:40   좋아요 0 | URL
오쉬프 님은 개가 아니라 곰입니다.

세이지& 2014-04-2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시비비 니미락내미락 하는 사이에
꽃 같은 아이들이 얼어죽어갑니다..

부끄럽고 슬퍼도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1 18:41   좋아요 0 | URL
모든 게 갑자기 3류로 추락했죠.
사실 1류였던 적은 없었습니다만.

엄동 2014-04-21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일상생활에서 생각없이 웃다가.
문득 죄책감이 든단 말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제발.
모든 가해자들(언론 포함)은 반성하고 뉘우치고 사죄하길.
두달이채 되지 않아 월드컵 열기로 이 재앙을 쉬 지워버리지 않길.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1 18:43   좋아요 0 | URL
월드컵이 올해이던가요 ? 그렇군요, 쉽게 잊혀지겠죠.
때론 망각이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망각이 은폐를 도모하기도 합니다.

방관자 2014-04-26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회의 불법과 부조리를 보아도 못본척 내 안위에 급급했던 우리 사회 모든이가 공범자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7 05:39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방관자입니다.
 

 

 

 

 

 

 

 

 

 

 

 

 


 

 

 

전주를 떠나며......  

 

 

14. 사랑은 봄비처럼 + 달빛길어올리기

 

 

 

부산 영화제'는 딱 한번 갔다. 규모 면에서 보자면 국내 영화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지만 영화제 자체의 맛은 없다. 도떼기시장 같았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영화이지 레드 카펫을 밟는 영화인은 아니지 않은가 ? 그래서 부산 영화제'보다는 전주 영화제를 자주 갔었다(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다들 아실 것이다). 부산 영화제에 비해 조용할 뿐더라 상영 영화들도 더 알찼다. 그런데 요즘은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변질된 모양이다. 영화인과 시네필을 위한 영화제가 아니라 정치 행정에 영화제를 이용하는 느낌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낙원동 아트시네마'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영화제가 더 알차다. 나는 전주에서도 1년 정도 머물렀다.

 

전주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에게 전주를 대표하는 맛집으로 안내해 달라고 주문하자 그가 내려준 곳은 어느 " 100년 전통 전주비빔밥 " 집이었다. 가격은 꽤 비싸서 일반 백반 가격보다 5배는 비쌌다. 맛, 없었다. 그 흔한 비빔밥들과 견주어 비교했을 때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이 따위가 세계적인 맛인가 ? 한번 빈정이 상하자 계속 삐딱해져서 사람들이 전주 비빔밥'을 으뜸으로 칠 때마다 나는 심통을 부렸다.

 

" 이보쇼, 전통이라 함은 옛것을 그대로 계승하여 보존함을 뜻하는데 내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상식에 의하면 비빔밥은 바쁜 농사철에 일꾼이나 부역에 끌려온 백성들이 밥 먹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바가지에 이것저것 섞어 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제사 음식을 처리하기 위한 잔반 처리 방식'이라는 소리도 있으니 이래저래 좋은 의미는 아니지 않소 ? 비빔밥을 전통음식, 전통음식 하는데 전통, 전통, 전통 따지자면 농사철 일꾼들이나 부역에 동원된 백성이 먹던 음식을 재현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오. 비빔밥은 엄밀히 말하자면 빨리빨리의 원조가 아니겠소 ? 전형적인 패스트푸드요 ! 음식이면 그냥 음식이지 뭔 놈의 전통 음식'이오. 전통 하나 들어갔다고 백반을 2만 원에 파는 상술이 나는 못마땅하오. 옛것은 모두 그리 좋답디까 ? 당신은 항상 말끝마다 겨레, 넋, 얼 따위를 섞어서 말하는 습관이 있던데 옛것이 그리 좋소 ? "

 

내가 보기에는 옛것은 무조건 훌륭하다며 전통'을 강요하는 사람은 " 새것 거부 증후군 환자 " 처럼 보였다. 전통에 대한 맹신은 자칫 국수주의자'가 될 공산이 크다. 시대가 변하면 세대도 변해야 하고, 따라서 문화도 변해야 한다. 음식은 시대를 반영하기보다는 당대'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명태가 많이 잡히면 그 전에는 몇 가지 없었던 명태 요리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음식은 당대의 먹거리 공급에 영향을 크게 받을 뿐이지 전통음식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 독립을, 밖으로는 민주 번영에 이바지하겠다고 꼴값을 떨면 안 된다는 소리이다. 음식에 국경이 어디 있나. 맛있으면 장땡이다.

 

스시'를 좋아하면 애국자가 아닌가 ? 전주'는 전통 문화의 도시답게 예스럽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 이미지'는 뭔가 작위적이어서 도시 전체가 민속박물관 같다. 전주는 " 보여주기 위한 도시 " 다. 임권택 감독의 < 달빛 길어올리기 > 는 전주 특산물 홍보 영화 같아서 보다가 잤다. 그가 전주 한지'에 대한 우수성을 알리려고 했다면 극영화가 아닌 다큐로 접근했어야 했다. 정성일은 분명 이 영화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니깐 ! 비빔밥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만 전주는 비빔밥만 빼고는 그럭저럭 좋은 도시'다. 웽이집에서 먹던 콩나물 국밥 맛을 잊지 못하고, 그 수많은 가맥집에서 보낸 불멸의 밤을 잊지 못하며,

 

베테랑 칼국수와 중앙시장 매운 순댓국도 잊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아가씨들이 예뻐서 좋다. 사실 나에게는 " 전주 " 하면 떠오르는 것은 영화제, 한옥마을, 비빔밥, 웽이집, 삼백집, 막걸리 거리'가 아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거리에서 나오는 노래 하나를 듣다가 갑자기 울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내가 평소에 듣던 음악 취향은 아니었으니 즐겨 듣고 좋아할 만한 노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안개가 자욱한 바다 위 솟아오른 바위에서 사이렌이 부르는 노래처럼 들렸다. 나는 길을 걷다가 멈춰섰다. 서울에 두고 온 애인 생각이 났다. 전주 하면 항상 이 노래가 생각난다. 내가 전주를 떠나던 날 비가 왔다. 파란 방수 비닐'로 덮었으나 책 절반은 젖어서 울고 있었다. 나도 울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 트럭은 금강 하구를 지나다가 전복되어 물에 빠졌다. 1.5톤짜리 트럭은 빠르게 바닥을 향해 내려앉았다. 차창 밖은 온통 캄캄했다. 차 앞 부분이 뻘에 쳐박힌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창문을 닫아 놓은 상태여서 물이 운전석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 정도 공기라면 5분은 버틸 수 있으리라. 나는 라디오를 켰다.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오늘 봄비치고는 많은 비가 내립니다. 운전 조심하십시요. 임현정이 부릅니다. 사랑은 봄비처럼.... "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 음악을 끝까지 들을 수 있는 희박한 공기를 선물한 죽음의 신에게 감사했다. 눈물이 봄비처럼 주르륵 흘렀다. 가사를 유심히 새겨들었다.

 

 

묻지 않을께 니가 떠나는 이유 / 이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 야윈 너의 맘 어디에도 / 내 사랑 머물 수 없음을 알기에 / 이해해 볼께 혼자 남겨진 이유 / 이젠 나의 눈물 닦아 줄 너는 없기에 / 지금 나의 곁에 있는 건 / 그림자 뿐임을 난 알기에 / 사랑은 봄비처럼 내 마음 적시고 / 지울 수 없는 추억을 내게 남기고 / 이제 잊으라는 그 한마디로 / 나와 상관없는 다른 꿈을 꾸고 / 이별은 겨울비처럼 두 눈을 적시고 /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내게 남기고 / 이젠 떠난다는 그 한마디로 / 나와 상관없는 행복을 꿈꾸는 너

기도해볼께 니가 잊혀지기를 / 슬픈 사랑이 다신 내게 오지 않기를 / 세월 가는 대로 그대로 / 무뎌진 가슴만 남아있기를 / 왜 행복한 순간도 사랑의 고백도 / 날 설레게한 그 향기도 / 왜 머물순 없는지 떠나야 하는지 / 무너져야만 하는지 / 사랑은 봄비처럼 내 마음 적시고 / 지울수없는 추억을 내게 남기고 / 잊으라는 그 한마디로 / 나와 상관없는 다른 꿈을 꾸고 / 이별은 겨울비처럼 두 눈을 적시고 /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내게 남기고 / 떠난다는 그 한마디로 /
나와 상관없는 행복을 꿈꾸는 너

- 사랑은 봄비처럼

 

사랑은 봄비처럼 내리고 이별은 겨울비처럼 내리는구나.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눈물은 가면과 같아서 뒤가 없으니깐. 그러므로 눈물과 가면은 같은 말이다. 앞을 가리는 것은 눈물과 가면뿐이다. 나는 캄캄한 트럭 안에서 내 죽음에 쓰이는 장송곡을 감상했다. 그때였다. 옆에 있던 트럭 운전수가 내게 소리쳤다. " 안 내리고 뭐하쇼 ? 재수 없으라니깐 이게 뭔 꼴이람. 한 길도 안되니 다행이지 물이 깊었다간 황천길 갈 뻔했오. 오지게 재수없구마이. " 운전수가 와이퍼를 작동하자 진흙이 씻기면서 밖에 보였다. 트럭은 깊은 물에 빠진 게 아니라 얕은 물에 빠진 것이었다. 책들이 죽은 물고기처럼 둥둥 떠다녔다. 나는 낮은 신음소리를 토하며 말했다. " 시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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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손 2014-04-1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곰발~~~~~~~~머해~~~~~~?

나취해써~ㅋㅋㅋㅋ

근데오늘나ㅡ쫌슬퍼ㅡㅠㅠㅠㅠ

아! 근데나,
진짜대박날꺼같애ㅡ

ㅋㅋㅋㅋ



+아참, 올리버색스 책 어때? '뇌신경' 잼나?
담달에 두권정도 읽어볼까하는데..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6 22:01   좋아요 0 | URL
뉴스 보고 있다. 방금 알았는데 여객선이 침몰해서 300명 가량 생사를 알 수 없다고 뉴스에서 속보를 내보네네... 대부분 학생들인 모양이다. 수학여행 간 모양이더라.
마음이 무겁네.....



+

올리버색스 책 읽을 만하다. 글 잘쓰는 뇌신경 의사이니 믿을 만하다.

곰곰손 2014-04-17 03:5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2명 빼고 다 구조된걸로 알고 별 걱정 안했는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야?!
기사들 찾아봤는데 이거, 선내의 학생들이 자기들 부모한테 연락안했음
구조가 더 늦어져서 사상자가 더 늘었을 거 아냐.

이런 대형참사가 터지니 한국 매스컴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네.
어떻게 진상 확인도 못한 상황에 "전원 구조" 이런 보도를 할 수가 있어?
어휴..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타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어떻게 그렇게 안일할수가 있어.
아 정말 분하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7 04:34   좋아요 0 | URL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학생들이 이렇게 사고를 당하면
이상하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생존 확률도 희박한 모양이더라... 참, 이게.... 참......

samadhi(眞我) 2014-04-16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노래 정말 좋아하는데요. 임현정이 저보다 어린데도 깊은 목소리 때문인가, 언니처럼 여겨져요. 우리 현정이언니 노래 참 따뜻하게 부르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6 22:17   좋아요 0 | URL
임현정 다른 노래도 있나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아이들이 사고를 당해서 무겁네요.
살아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2명 사망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사하다고 해서 천만다행이네, 라고 생각했는데
오보였군요.

samadhi(眞我) 2014-04-16 22:57   좋아요 0 | URL
네 다른 노래도 많아요. 첫사랑이라는 노래도 괜찮구요. "사랑은 봄비처럼...." 이 노래 만큼은 아니지만.
윤도현밴드의 "철망 앞에서" 라는 노래 중간에 임현정이 부르는 대목이 있어요. 이 노래를 몇년 전부터 들었는데 그땐 몰랐다가(그땐 임현정을 잘 몰랐거든요.) 오랜만에 들었더니 임현정 목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수색을 중단했다고 하니 더 절망적이네요. 새벽 1시에 재개한다고 하는데 그동안은 어떡한답니까.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7 04:40   좋아요 0 | URL
참담하네요. 살아있다면 아이들이 무척 추울 텐데
날씨도 흐리다고 하고, 물살도 무척 빠르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뉴스 속보를 보는데 희망 섞인 내용은 없네요....

유구일턴 2014-04-17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 소식이 들리기를 계속 기도하는방법 밖에 없네요. ㅠㅜ
 

 

 

 

 

 

 

 

 

 

 

 

 

 

 

 

 

 


 

 

 

 

군산을 떠나며......  

 

 

13.  탁류 +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를 보다가 문득 여행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작정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군산행 티켓을 끊었다. 이유는 없다. 군산 터미널에 내렸을 때, < 군산 > 이라는 도시에 대한 내 첫인상은 꾀죄죄죄죄'였다. 한여름 평일 오후여서 거리에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 보니 추레한 저잣거리'가 나왔다. 첫눈에 이곳이 옛 시내 중심가'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을 닫은 나이트클럽과 방석집들이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번성했으리라. 계속 걸으니 작은 시장'이 나왔다. 가게가 대여섯 개 정도 붙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가게 유리에 선팅을 해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옥외 간판에는 모두 " 안주일절 " 이라거나 " 안주일체 " 라는 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술집인 모양이었다.

 

입간판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누구는 < 一切 > 을 " 일절 " 이라고 하고 누구는 " 일체 " 라고 하니 말이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 切 > 는 끊을 절'이라는 뜻과 함께 온통 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한자다. 하지만 뜻은 정반대'다. < 안주일체 > 는 온갖 안주'를 구비했다는 뜻이고, < 안주일절 > 에서 일절'은 " 아주, 전혀, 절대로의 뜻으로, 흔히 사물을 부인하거나 행위를 금지할 때에 쓰는 말(네이버 국어사전) " 이므로 안줏거리가 일절 없다는 소리'다. 혼자 찌질하게 웃었다. 웃을 때마다 치질에 걸린 괄약근이 욱씬거렸다. 눈에 띄는 점은 가게마다 얼음맥주'라는 현수막을 걸었다는 점이다. 여름 한철에만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맥주면 맥주이지 얼음맥주는 무슨 뜻일까 ? 미지근한 맥주를 파는 데도 있었던가 ?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안주일절이라고 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당혹스러웠다. 맥주집이라기보다는 공사장 인부들 밥을 해주는 함바 집과 비슷했다. 벽에는 으레 D컵 가슴을 가진 비키니 차림의 여성 사진이 있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달력 속 비키니 여자는 내게 " 식욕이 성욕이에요 ! " 라고 속삭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일어났다.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오더니 큰소리로 일어나라고 한 것이다. 내가 앉은 곳은 의자가 아니라 아이스박스'였다. 테이블마다 놓여 있길래 의자 대용인 줄 알고 앉았더니 아이스박스였다. 박스 안에는 얼음에 담긴 맥주로 가득했다. 아, 했다. 그래서 얼음맥주'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아아, 했다. " 얼음맥주집 " 은 셀프 시스템이었다 ! 나는 다시 찌질하게 웃었다. 치질에 걸린 괄약근이 욱씬거렸다. 웃고 있는 사이, 안주일절이 나왔다.

 

완두콩, 오이, 청양고추, 간장게장, 방어회, 마른 안주 등등. 나는 깜짝 놀라서 주인에게 안주를 시킨 적 없다고 하자 주인은 또다시 큰 소리로 서비스'라고 했다. " 맥주 3병 마시면 안주는 무한정 나오니께 걱정 마시고 드시쇼. " 그러니깐 여기 셈법은 이렇다. 맥주 3병에 만 원이고, 소주는 2병에 만 원이다. ( 추가 주문 시 소주는 1병 당 오천 원 ) 그날 나는 맥주 6병을 마시고 이만 원을 냈다. 돈을 냈지만 공짜 술'을 얻어먹은 기분이 들었다. 술값이 이토록 저렴한 도시라니 ! 나는 그 길로 이곳에 방을 얻어 살기로 했다. 원없이 술이나 마시다가 죽으리라. 여기서 1년을 보냈다. 365일 술을 마셨다. 단골이 되다 보니 밥을 달라고 하면 밥도 주었기 때문에 끼니와 함께 술도 마실 수 있었다. 

 

술집에서 나는 프로야구를 보았다. 엘지는 항상 졌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취해서 무작정 길을 걷고 있었다. 사진관을 지나쳐 갔는데 문득 기시감이 들어서 뒤돌아보았다. 맙소사,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 에 나왔던 그 사진관이 아니었던가 ?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영화가 군산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그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고는 했다. 한석규와 심은하가 달리기를 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가고, 해망동에도 갔다. 사실 군산은 볼거리가 거의 없는 곳이다. 유적지나 명승지라고 해봐야 은파 유원지나 히로쓰 가옥이 전부였다. 일자리도 없어서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날 궁리만 했다. 하지만 나는 80년대 어느 즈음에서 멈춰버린 듯한 군산을 좋아했다.

 

군산은 자연 환경이 수려한 고장이 아니었다. 군산 바다는 흙탕물에 가까웠다. 탁류였다. 젊은이들은 자조섞인 말투로 똥물이라고 했다. 채만식 소설 < 탁류 > 는 바로 군산이 무대'다. 내용은 출판사 책 소개로 대신한다.

 

『탁류』의 서사를 이끄는 인물은 초봉이다. 돈에 눈먼 아버지 정주사 때문에 사기꾼이자 호색한인 은행원 고태수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가는데 결혼한 지 열흘을 겨우 넘겨 악랄한 고리대금업자 장형보의 농간으로 남편 고태수는 탑삭부리 한참봉에게 맞아죽으며 그러는 사이 장형보는 초봉을 겁탈한다. 평소 초봉이 믿고 의지했던 약국 주인 박제호는 부인과 별거함과 동시에 초봉의 처지를 이용해 첩으로 들이는데 초봉이 딸 송희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욕정이 시들해져버리자 마침 송희의 친권을 주장하며 나타난 장형보에게 모녀를 떠넘겨버린다. 초봉은 제게 순종을 강요하며 아이를 학대하는 장형보를 맷돌로 쳐 죽이고 만다.

 

 - 출판사 책 소개글에서 발췌 

 

 

나는 그림엽서에 나올 만한 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도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겨울이 되자 술집들은 더 이상 얼음맥주를 팔지 않았다. 아이스박스에 보관하지 않아도 얼음처럼 시원했으니깐 말이다. 술 마시다가 죽으리라던 애초의 계획은 틀어졌다. 꼬박꼬박 술집에서 밥을 먹다 보니 오히려 살이 붙어서 건강해졌다. 내가 군산을 떠나던 날, 비가 미친듯이 쏟아졌고 방수비닐을 뒤집어쓴 책 절반 가량은 빗물에 젖어서 울고 있었다. 너만 울었냐 ? 나도 울었다. 시바, 되는 일 하나도 없군. 어제까지만 해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때마침 이사하는 날 비가 쏟아진 것이다. 트럭이 군산대교를 지날 무렵 이삿짐 트럭 운전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창밖을 보았다. 탁류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실없이 자주 웃었다. 그럴 때마다 똥구멍이 자주 아팠다.

 

그때였다, 갑자기 운전수가 브레이크를 급히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차가 기울어지더니 이내 금강 하구로 추락했다. 절반만 젖었던 책은 탁류에 잠겼다. 물론 나도 탁류에 잠겨 사망에 이르렀다. 탁한 물색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죽어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시바, 재수 존나게 없군. 책이 다 젖었어 ! 쓸데없는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났다. 그럴 때마다 똥구멍이 자주 아팠다. 똥구멍이 아픈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살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죽음으로 인하여 가족은 3억에 가까운 보험금을 받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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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고양이 2014-04-1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란 노래가 떠오를까요. 무심코 영화를 보다가 떠나고 싶다고 떠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1:43   좋아요 0 | URL
여수 좋죠.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폐허가 된 도시가 좋더군요. 강원도 통리라던지 군산 같은 도시가 좋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1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도시가 막 끌려요. 봉준호 영화, "마더"의 배경이 된 소도시처럼 보통 사람들이 지명조차 잘 모르는 그런 동네. 군산하면 징게멩게와 더불어 조정래,『아리랑』이 자동으로 떠오르는데. 식신이라 간장게장도 생각나고. 그런데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네요. 기아 타이거즈의 허접한 두번째 홈구장이 있는 곳이기도 한데요. 그렇게 오랫동안 앉았던 아이스박스 안깨졌습니까?^^ 아무래도 그 박스에서 풍겨나는 냉기에 그 구녘^^이 아팠을 것 같은데 말예요. 오히려 아이스박스 자체는 덜 차가울 지도 모르겠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3:45   좋아요 0 | URL
피식... 얼른 일어나서 의자에 앉았습니다. 전 진짜 그게 의자인 줄 알았어요. 왜 푹신하니까 인테리어 겸 소품 활용이구나 했거든요. 거기서 맥주를 꺼낼 줄은 꿈에도 몰랐음... 아, 사진 있는데 고 사진 올려드리겠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15 13:58   좋아요 0 | URL
앗 사진 보니까 아이스박스가 깨지지 않는 대신 곰발님의 고것(?)이 왜 얼갈이배추무늬가 된 건지 알겠네요. 남도는 역시 음식 인심이 후하죠. 안그랬다간 쪽박나는 거예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4:03   좋아요 0 | URL
서울에서는 저 안주 정도면 한 2,3만 원 하지 않을까 싶군요.
제가 자주 가던 곳은 자매 할머니 두 분이 하셨는데
제가 가면 특별히 삼계탕 끓여주시고는 했습니다.
주위 손님들에게 원성이 자자했음... 저에게만 특별식으로 해주시고는 했거든요..ㅋㅋㅋㅋㅋㅋㅋ
주위 사람들이 막 뭐라하면 한말씀 하시고는 하셨죠.

" 왜 지랄들이여, 내 돈으로 자식새끼 같은 총각 먹인다는데... "

저 떠날 때 작별인사했더니 펑펑 우시더군요..

엄동 2014-04-15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주값이 맥주값보다 싸군요!

히치콕영화나 채플린영화를 다룬 글들도 좋지만
전 곰발님의 이런 글들이 좋아요

선명하고 화사하기보다
추레하고 꾀죄죄해도.
그로 인한 흐린시야가 맘을 참 편하게 해주는
그런 동네들처럼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8:58   좋아요 0 | URL
제가 군산에 대해서 기묘하게 정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뭔가 추레한 느낌... 전주 같은 고장은 마치 민속 박물관 같잖아요.
보여주기 위한....... 처음에는 참 좋은데
이게 나중에는 그닥... 질리더라고요. 이런 지적은 내 이웃이 한 지적인데
그 친구가 워낙보는 눈이 있어서 저는 그냥 생각지 못했는데
그친구는 정확히 말하더군요.

엄동 2014-04-16 10: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민속박물관 같은...

와. 적확한 비유네요

정혁 2014-04-1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두를 구우면 군만두.

산을 구우면 군산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6 03:20   좋아요 0 | URL
그럼 군인은 사람을 구워서 군인'입니까!!! ( 발끈 ㅋㅋㅋ )

rtour 2014-04-1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군산에도 있군요, 이런 술집이요. 군산이 참 황량하죠. 일본식 가옥은 멋지더군요, 정원을 고려한 배치라서. 어쨌건 술 한 잔 하고 싶은 기분 들게하는군요!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8:56   좋아요 0 | URL
네, 군산이 참 황량합니다. 정말 지방에 이런 곳은 강원도 광산촌 빼고는 처음입니다. 볼 게 진짜 없어요. 그런데 그게 은근 매력있습니다. 일본식 가옥이 참 많아요. 군산에는... 옛날에는 < 탁류 > 에서 나오듯이 쌀거래소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다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지만.... 일본의 흔적이 고스란히 있는 곳이 군산입니다.
80년대 분위기가 있어서 영화 촬영을 자주 하는 곳이기도 하죠. 고량주 한 잔 하십시요.

아진 2014-04-29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집 '대박'이네요.. 코가 비뚤어질 때가지 먹고 싶네요. 서울에도 진귀한 집 좀 소개해주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9 08:33   좋아요 0 | URL
아, 아진 님이시군요. 제가 서울 출신이지만 서울에는 진귀한 집을 단 한 군데도 본 적이 없습니다.
비극입니다.
 

 

 

 

 

 

번역'에 대한 생각(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남자'였다. 그는 일단 마음에 안드는 학생을 불러내서 다짜고짜 주먹부터 휘두른 후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른 폭력 선생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주먹으로 학생을 개 패듯 때렸지만 거친 말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거친 말은커녕 고운 말을 하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상황을 재현하자면 : ( 따귀를 연속으로 다섯 대 때린 후 ) " 내가 화난 이유를 알겠어요 ? 몰라요 ?! 왜 몰라요 ? 말을 알아들으라고 귀가 달린 거 아닌가요 ? - 이런 식이었다. 우리들은 이 상황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주먹질과 존댓말의 이상한 동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유일하게 존댓말로 수업을 하는 선생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주먹질을 가장 빈번하게 날리는 폭력 선생이었다. 이 사람은 수업 시간에 영어사전과 함께 국어사전'을 가지고 다닐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사전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해서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수업 시간에 맞는 아이들은 대부분 영어사전이나 국어사전을 가지고 오지 않는 학생들이었니 괘씸죄'가 적용된 탓이리라. 그가 영어 시간에 국어사전을 가지고 오라고 한 이유는 영어 독해를 잘하려면 국어 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 개똥 철학 "  때문이었다. 모범생들은 영어 선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란 듯이 " 대따 큰 " 사전 두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선생이 자신을 보아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푸들처럼 말이다. 선생이 특정 단어를 찾아보라고 명령하면 선생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몇몇 학생은 경쟁을 하듯 사전을 넘기며 단어를 찾아내서 큰소리로 뜻을 읊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그 학생을 향해 방긋 !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선생이 가르친 수업은 < 영어 수업 > 이 아니라 < 번역 수업 > 이었다.

 

요즘 출판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소식은 단연 " 이방인 번역 논란 " 이다. 이번 논쟁'을 보면서 새삼 " 번역이란 무엇인가 ? "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번역 > 이란 주부가 살림을 조금만 게을리하면 티가 팍 나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티가 나지는 않는 < 집안일 > 같다. 번역은 돈이 되는 일도 아니요, 명성을 얻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사소한 이익보다는 번역에 따른 손실이 클 확률이 높다. 번역을 깔끔하게 매조지한다고 해서 칭찬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반대인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반응은 매섭다. " 번역이 개판이네...... " 라는 독자평은 " 배송이 빨라서 좋아요 ! " 라는 댓글 문장만큼 인기있는 레퍼토리'다. 언론사 서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사 서평 담당 기자들이 "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 " 라거나 " 번역이 거칠다 "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던데 그럴 때마다 의문이 든다. 원서를 읽고 나서 대조 평가 끝에 나온 평가인가 ? 그럴 일은 거의 없다.

 

매주 쏟아지는 신간을 읽기에도 빠듯한 서평 담당 기자 양반들이 원서까지 꼼꼼히 살펴서 서평을 쓸 리는 거의 없다. 번역가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원작의 문장 자체가 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란 자신만의 개성적인 문장을 가지고 있다. 코맥 매카시 소설과 플로베르 소설은 느낌이 확~ 다르다. 만약에 플로베르 문장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해서 단문 형식으로 하드보일드하게 번역할 수 있을까 ? 원작이 난해하면 난해하게 번역해야 한다. 오히려 난해한 원작을 쉽게 번역하면 그 번역은 나쁜 번역이다. 무조건 쉬운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을 내면서 " 세대마다 고전 문학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 라고 주장하며 젊은 감수성을 주장하지만 고전을 젊은 감각에 맞게 고전을 다시 번역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비장한 저 말은 그저 책을 팔아먹기 위한 상술일 뿐이다. 19세기 소설에는 19세기 감수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을 21세기 감수성으로 번역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번역된 외국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번역 작품은 절대 오리지날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 아무리 훌륭한 번역'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번역은 필연적으로 번역투 문장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번역 소설을 두고 번역투 문장이라며 비판한다면 어불성설이 된다. 나는 이정서의 도발이 쓸모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소모전이라고 생각한다. 지지한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화가 나서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자중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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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4-04-1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모작가의 개츠비 번역을 질색.합니다. 이 동네의 번역 논쟁은 재미진데, 포탈에선 무반응이라 슬퍼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4 20: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도 여기서 번역 논쟁이 일길래 이야 포텔 반응 좀 볼까나, 하고 들어갔더니 새벽 3시의 밤처럼 조용하더군요..

asnever 2014-04-14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민음사 번역은 별로 신뢰가 가지 않네요.
호밀밭의 파수꾼 앞 몇장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http://asnever.blog.me/70188360728?Redirect=Log&from=postView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4 21:12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번역가를 매우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번역이라는 게 득이 거의 없어요.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욕만 먹는 작업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몇몇 고약한 번역만 아니면 모두 땡큐입니다. 전 무식해서 잘은 모르겠으나
민음사 출판사 자체가 좀 꼴보기 싫다고나 할까요 ? ㅎㅎㅎㅎㅎㅎ. 하여튼 이자리를 빌려 번역하시는 분들 대단하십니다. 독자로써 고맙습니다. 몇몇 꼴보기 싫은 고약한 번역가를 빼고 말이죠.....

과객 2014-04-14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종호 교수의 <파리대왕>은 일본어판을 참고한 것 같네요. 어휘가 그러네요.
제가 읽었던 책은 다른 사람 번역이었던 모양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이방인> 번역 논쟁을 보면서 참 많이 씁쓸하네요.
출판업이 그렇게 서로 치고 싸우고 할 정도로 힘든 상황인가 싶기도 하고,
번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른 채로 그냥 떠들어대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기자들마저도......

이게 우리 문화의 수준이려니, 할까요? 말까요?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07:12   좋아요 0 | URL
일본어판을 꽤 참고하신 것 같죠 ? 저는 문예출판사로 읽었던 것.. 아니다. 잘 모르겠네요....
누가 원문과 대조를 해서 올렸으면 합니다.
유종호가 " 하층토 "라고 옮긴 것 원문에는 영어로 뭐가 쓰였는지 굉장히 궁금합니다만......
전 역설적이게도 이번 소란을 보면서 번역가가 참 소중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 김화영을 비판할 생각도 없고 이정서를 비판할 생각도 없습니다.
솔까말 서평 쓰는 기자들 책 다 읽었을까 항상 의문이 들어요. 대충 읽죠. 그리고는 서평 쓰고.
전 신문 서평 읽고서 기자들이 제대로 읽었구나, 이런 생각한 적 한번도 없습니다.

rtour 2014-04-1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번역..잘 해야죠. 근데 돈도 안되고, 힘 들고..욕 안먹으면 다행인 일인 것도 사실. 안하고 싶죠. :-)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07:11   좋아요 0 | URL
번역하는 일'은 정말 소중한 일입니다. 전 항상 고마운 생각으로 읽고는 하죠. 번역가가 없었다면 읽지 못하니깐 말입니다.

마립간 2014-04-15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가 창작/감동에는 옳고 그름이 없지만 (수평적 가치관의 적용), 번역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 것(수직적 가치관의 적용)으로 이야기하더군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동양의 고전도 주석을 읽으면서 실제 원작자가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썼을까 의심하죠. 가끔 알리딘 서평을 읽고 책을 읽을 때, 책보다 서평이 더 좋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미뤄 생각하면 원저보다 번역서 더 좋을 수도 있을 것을 생각합니다. 확률적으로 희박할지라도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판하는 상황은 조금 우습지만,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비판할 수 있나도 정확한 판단이 안 섭니다.
저는 방식/예의도 중요시 여깁니다. (이에 관해서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비교적 쉽죠.)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1:4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종종합니다. 너무 과한 후세의 해석은 아닌가 하고 말이죠.
서평이 책보다 더 화려한 글빨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런 서평은 좋은 서평이 아니죠..ㅋㅋㅋㅋㅋㅋ

예의 중요하죠. 하지만 싸울 땐 물불 안가리고 싸우는 것도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싸울 때 " 너 몇 살이야 ? " 이런 말 하는 인간만큼 꼴불견도 따로 없죠...

마립간 2014-04-15 12:09   좋아요 0 | URL
저의 의견을 수정합니다. 책보다 좋은 느낌을 주는 서평은 나쁜 서평으로. 대신 서평 자리에 독후감 또는 그냥 글로 대체합니다.

실제 전쟁과 정치는 예禮는 커녕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잘못된 결과가 수정되지도 않습니다. - 그래서 이 두 분야는 저의 스타일이 아니죠. 이 두 분야의 책은 거리감 때문에 읽게 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고 농담한 건데 수정까지 하시면..... ㅎㅎㅎ.

아, 누가 한 말인지는 까먹었는데 책에 이런 소릴 하더군요.
전쟁의 추동은 대개 노획물 때문이었다라고 말이죠. 약탈하고 강간하는 것 때문에 병사들은 열심히 싸웠다고....
누가 말했더라? 하여튼 누가 그리 말했는데 전 이 말에 굉장히 와닿더라고요.
사실 전쟁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를 위한 싸움이기는 보다는 주로 노획, 강간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1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번역이 너무 어색하면 책이 안읽혀요. 지금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 보이는데 몇 번이나 읽다가 만 소설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애들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영어를 일본에서 해석한 것을 한자로 옮겨적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얘기에 무척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식이 아닌 일본식 한자조어를 쓰다보니 이게 이해가 될 리가 없죠. 제가 가장 민감하게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거의 광분하는 정도지요. 일본식 어투, 일본식 한자조어. 그래서 일본소설의 번역투도 너무 일본식이라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늘 의문을 가지거든요. 일본어로 "쏘오까나"였을 "그럴까나" 등으로 하는 식이요. 우리는 "그럴까"가 편하고 당연한데, 일본어처럼 "~까나"를 붙이는 걸 보면 화가 나서^^ 씩씩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4:08   좋아요 0 | URL
그럴까나///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게 그런 의미였군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유종호의 파리대왕이 아마 전형적인 일본어 번역판을 참고해서 나온 걸 걸 겁니다.
막힌다 싶으면 일본판 봤겠지요. 저렇게 해놓고 새로운 번역 운운하다니...
거기에 나오는 단어를 막 끌어다쓰다보니 저런 단어들이 작품에 무작정 들어간 거 아니겠습니까.

samadhi(眞我) 2014-04-15 14:1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진짜 잘 안쓰는 한자어 보니 정말 갑갑합니다. 누군가 아주 잘 정리해 놓았군요. 저도 그런 거 보면 막 교정하고 있어요. 짜증만 내고 책에 몰입할 수가 없어요. 작품 자체의 수준까지 의심하게 돼요.
법조문이 가장 심하죠. 행정법 공부하다가 마구 살의가 일어나더라구요.

엄동 2014-04-15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저 원작의 전달자 노릇을 충실하게 하겠다.. 란
어느 번역자의 말이 생각이 나네요
(정확한 워딩은 아님)

사회초년생때
회사에서 국어사전 떠들어가며
문서를 작성하곤 했는데
(다른건 몰라도 단어의 의미를 모르고 쓰거나 틀리게 쓰는건 되게 자존심이 상했었음)

불과 몇년 사이에
그 두꺼운 사전은 행방이 묘연해졌네요
(회한)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9:01   좋아요 0 | URL
어떤 한계 아닐까 싶어요. 번역이라는 게 말이죠.
오리지날을 뛰어넘으로고 하면 안됩니다.
전 어느 신문 서평에서
원작보다 훌륭하다는 번역본'이라는 찬사를 받는....
이런 말을 쓴 기자의 글을 봤는데 욕 나오더라고요.
그건 오리지날에 대한 모독입니다.
최소한의예의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엄동 님 사전을 끼고 사셨군요 ? 허허..

스누피 2014-05-02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출판사 사장 새끼가 가명 쓰고, 불어 원본도 아닌 영어판 중역 했다는 군요. 참 대단하고 새로운 이방인 번역입니다. 젠장.

곰곰생각하는발 2014-05-04 06:19   좋아요 0 | URL
그렇더군요. 상상을 못했는데 말입니다. 영어판 중역을 하고 과연 이게 최고의 번역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전 처음에 이 호기로운 선언을 의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이가 없더군요..
 

 

 

 

 

 

 

 

 

 

 

 

 

 


 

 

 

상처적 치질

 

 

12. 상처적 체질 + 캐스트어웨이

 

 

 

 

충무로에서 일할 때 영화 포스터를 붙인 적 있다.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시나리오 보조 작가로 들어갔으나 원고지 대신 영화 포스터가 내 손에 쥐어졌다. 화딱지가 났으나 까라면 까는 세계가 바로 충무로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장이 포스터 붙이는 일을 정상 근무 외 잔업으로 인정해서 가욋돈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근무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다. 가욋돈 외에 점심값에 차비까지 주니 수입이 꽤 쏠쏠해서 일이 끝났을 때에는 아쉬워하기도 했다. 쪽을 파는 것도 며칠 지나다 보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로지 <담벼락 > 이었다. 포스터를 붙이기에 좋은 담벼락이 있고, 포스터를 붙이기에 고약한 담벼락도 있었다. " 맙소사, 좋은 담벼락과 성질 고약한 담벼락이 존재하다니 ! "

 

박연폭포처럼 넓고 빙판처럼 매끈해서 영화 포스터 열 장'을 한꺼번에 붙일 수 있는 담벼락은 넉넉한 녀석이었다. 이런 담벼락은 발품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넉넉한 담벼락은 매우 귀했다. 특히 종로나 강남 같은 경우는 더했다. 그래서 우연히 이런 담벼락을 발견하게 되면 불알친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워서 널찍한 등짝을 " 쓰담쓰담 " 하거나 벽에다 대고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유증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 가욋일이 끝났지만 한동안 담벼락만 보였다. 포스터 열 장을 붙일 만한 담벼락을 만나면 잠시 서서 아쉬워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런 담벼락을 만나면 그때 일이 생각난다. " 담 씨 ! 아니... 벼락아, 잘 컸구나, 잘 컸어 ! " 인간'이란 어떤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만 보인다.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구두를 유심히 보게 되고, 가방을 만드는 사람은 가방을 유심히 보게 된다.

 

" 사랑하면 보이나니... " 라는 말은 옳은 소리'다. 내가 영화 포스터를 붙이지 않았다면 담벼락'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미친 놈이 좋은 담벼락 나쁜 담벼락을 구별할 것이며, 넓은 등짝을 " 쓰담쓰담 " 하겠는가 ? 실실 웃으면서 말이다. 과식을 해서 배가 아픈 사람이 길을 걸을 때에는 음식점 간판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반면 약국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반대로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약국 따위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음식점만 눈에 보인다. 이처럼 결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관심을 낳는다. 나는 그동안 치질로 고생을  꽤 한 터라 류근 시집 제목 < 상처적 체질 > 은 이상하게 < 상처적 치질 > 로 읽혀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는 했다. 버스 안에서 서서 갈 때마다 쑥덕거리던 그 말, 말, 말, 말. " 저 사람 치질인가 봐 ! " 아, 아아아.....

 

내가 치질에 대해 집요하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알고 보면 건강한 괄약근을 잃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결핍은 그 대상을 눈에 띄는 존재로 만든다. 팔이 없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팔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 상처적 체질 " 을 " 상처적 치질 " 로 읽었다면, 영화 < 캐스트어웨이 > 에서 톰 행크스는 배구공을 사람 얼굴로 읽는다. 로버트 저맥키스가 감독한 < 캐스트어웨이 > 는 " 결핍 " 에 대한 이야기'다. 도시가 物物이 넘치는 과잉의 공간이라면 무인도는 철저하게 物物이 부족한 공간'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연기하는 톰 행크스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었을까 ? 역설적이지만 배구공'이었다. 그는 배구공으로 윌슨'으로 불리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가 망망대해에서 배구공 윌슨을 잃고 대성통곡했을 때, 나는 묘하게 그가 느꼈을 처참한 심정에 마음이 통했다.

 

나도 한때 등짝이 넓은 담벼락을 만나면 말을 주고받았으니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담벼락이었다. 건물은 우후죽순 새롭게 태어나지만 좋은 담벼락은 점점 사라진다. 골목길이 사라지니 좋은 담벼락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터'가 좋은 가게는 담벼락을 털고 통유리를 깔거나 집 안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주차장 셔터'를 낸다. 안타깝다. 영담모( 영화 포스터를 붙이기에 좋은 담벼락을 사랑하는 모임)라도 만들어야 겠다. 당신들은 모른다. 담벼락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말이다. 그리고 괄약근을 업신여기지 말기를. 나이 들면 남근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괄약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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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 2014-04-13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목에서 이미 게임 끝났네요. 버빠 박진영 말대로, 첫 소절 듣는 순간 게임 끝났다,한 것처럼요. 우하하하하하, 정말 죽이는 제목입니다. 영담모 발기, 파이팅!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3 19:05   좋아요 0 | URL
영담모 발기인 대회 때 스누피 님을 총무 대행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1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담벼락에 붙은 영화포스터를 보며 어떤 영화를 볼 지 잔뜩 기대감에 부풀곤 했는데 그 풍경이 그리워지더라구요. 대형영화사(?) 엔터테인먼트인가 대형극장주인가 뭐가 정확한 용어인지 모르겠으나 걔네들에게 극장이 잡아먹힌 뒤로 도저히 그 배우라고 생각할 수 없던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간판도(그렇지만 정이 가는^^) 담벼락에 겹겹이 붙어있는, 가끔은 뜯어낸 자국이 남아있는 영화포스터도 이제는 볼 수가 없네요. 그 시절 참 느긋하고 촌스럽고 낙낙했는데 말예요. 요즘 아해들은 그것을 못보고 자랐네요. 안타까워라.^^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4 02:15   좋아요 0 | URL
이젠 거리에 영화포스터 붙지 않죠. ㅋㅋㅋㅋㅋ 다 옛일이 되었습니다. 저도 옛날에 담벼락에 포스터 붙으면 그거 보면서 흥분하고는 했는데 말이죠. 영화 간판도 사라지고, 제가 영화에 대해 흥미를 잃기 시작한 시기와 멀티플렉스의 번성과 맥을 같이 하는 거 같습니다. 차라리 집에서 보는 게 낫죠. 낙원동 아트 시네마'가 제 유일한 단골 극장입니다. 이것이 번성해야 하는데 보아 하니 곧 무너질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