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닥터 슬립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평점 :
과부 설움은 홀아비가 안다
케이시는 습관처럼 영화감독 존 워터스의 일화를 들먹였다. 그의 초기작 < 핑크 플라밍고 > 에서 여장 남자 스타 디바인은 교외 잔디밭에서 개똥을 먹었다. 워터스는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 빛나는 순간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결국 기자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 그깟 개똥 한 덩이 가지고 뭘 그래요 ? 덕분에 그 배우, 유명해졌잖아요. "
- 닥터 슬립 2, 208쪽




처음 접한 브라이언 싱어 영화는 <<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 이었다. ( 내 기억으로는 << 유주얼 서스펙트 >> 보다 이 영화를 먼저 영접했다. 지금이야 거물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는 처음 듣는 초짜 감독이었다. ) 당시에는 스티븐 킹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은 무조건 의무감을 가지고 보았기 때문에 비디오 가게'에서 이 영화를 고른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킹-마니아 사이에서는 이 영화 원작 소설인 << 사계 >> 에 대한 평판이 좋았다. 킹의 대표작 혹은 " 버금 딸림 화음 " 정도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던 터'라 기대가 컸다. 그래서 영화 감상하기 좋은 " 길일 " 을 택하여 영화를 보았다. 내 예상과는 달리 영화는 평범했다.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실망했다고 말하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킹(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답지 않게 진지하고 무거웠다는 데 그 원인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나치게 영화가 " 야리꾸리 " 했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 동성애 영화 " 였다. 내가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 쇼생크 탈출 >> 를 동성애 영화 범주로 보는 것과 같은 논리였다. ( 여기서 오해는 금물 : 내가 불만을 가진 부분은 이 영화가 동성애 영화라는 점이 아니라 원작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쇼생크 탈출 >>( 클릭 ) 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다라본트는 원작인 <<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 가 가지고 있는 동성애 코드를 예리하게 감지했다. ) 스스로 얼토당토않는 해석이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생각을 쉽게 버릴 수는 없었다. 영화 속 두 남자의 관계가 수상했다.
아, 저 끈적끈적한 눈빛은 대체 뭐지 ?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브라이언 싱어가 게이 감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내가 브리이언 싱어 감독의 소식을 접한 글은 연예 통신'이라기보다는 사회면 기사에 근접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 엑스맨 데이지 오브 퓨쳐 패스트 ( 이하 엑스맨으로 표기 ) >> 영화 개봉을 앞두고 미성년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한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평소 여자를 돌같이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 커밍아웃 " 을 한 것이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꼴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십 년 전 내 의심은 사실로 밝혀졌다. << 엑스맨 >> 은 성소수자'였던 감독의 불안과 입장이 잘 드러난 영화'다.
이 영화를 40자평 형식으로 말하자면 : " 과부 설움은 홀아비가 안다. 뭉쳐서 싸우자 ! " 만약 내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전략 기획 팀 소속으로 홍보 업무를 담당했다면 정치 프레임을 다음과 같이 설정했을 것이다. " 열 명의 마누라를 거느린 만수르가 과부 설움 알겠더냐 ? 과부 설움은 홀아비가 안다, 이것아 ! " 스티븐 킹 신작 << 닥터 슬립 >> 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브라이언 싱어의 << 엑스맨 >> 이었다. 마르크스와 앵겔스가 주먹 불끈 쥐며 외쳤던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 를 살짝 패로디하자면 " 하나의 유령이 미국 전역을 떠돌고 있다....... 만국의 샤이닝'이여, 단결하라 ! " 가 될 것이다. " 샤이닝 " 은 초월적 힘'을 지시하는 그들 세계에서 쓰이는 은어'다.
그들은 죽은 자와 대화를 하며, 과거를 읽고, 접신을 하며, 생각을 훔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무당인 셈이다. 그들은 저주받은 불가촉 계급'이다. 소설 << 샤이닝 >> 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오버룩 호텔 복도를 돌아다녔던, 바가지 머리 스타일이 잘 어울렸던 대니얼 토랜스'는 성장해서 어른이 되지만 끔찍했던 트라우마( 알콜중독자 아버지의 가정 폭력)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또한 심각한 알콜중독자'로 추락한다. 초월적 힘'은 결국 대니'를 우울한 X맨'으로 만들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능력 때문에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가진 X맨(아브라)를 만나는 순간 달라진다. 그들은 서로 연대하여 고난을 극복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샤이닝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긍정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이제 더 이상 괴물이 아니며 혼자가 아니다. 트루낫 집단이 새흡련(새천년흡혈귀권익옹호를위한대연합)으로 모였다면, 샤이닝 능력을 가진 자는 서로에 대한 동병상련'으로 모인다. 민주당 지지자인 스티븐 킹의 정치 색깔이 반영된 결과'이다. 주인공 대니얼 토랜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 타인의 전쟁 " 에 개입한다. 반면 흡혈귀 두목 로즈'는 수치심 때문에 복수를 결심한다. 심리학자 실반 톰킨스는 " 수치심이 우파 정치의 가치관과 이념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핵심 정서라면 죄의식은 좌파 정치를 움직이는 핵심 정서( 제임스 길리건, <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에서 부분 발췌 ) " 라고 지적한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 로즈 무리는 민중의 피를 빠는 공화당 보수 지배 계급이고, 대니얼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 로즈 무리는 서열을 중시하는 집단이지만 대니얼 무리는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 ) 할 말은 많으나 소설 내용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자. 갓 나온 신간 소설 줄거리를 자세하게 풀어 설명하는 것은 친절한 행위가 아니라 고약한 짓에 해당되니깐 말이다. 그래도 궁금하다면 출판사가 제공한 줄거리를 내놓겠다. 내 책임은 아니다.
오버룩 호텔에서 살아남은 대니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오버룩 호텔의 유령들을 보며 공포에 떤다. 오버룩 호텔의 주방장이자 대니의 샤이닝 능력을 알고 있던 샤이닝 능력자 딕 할로런은 대니에게 유령들을 머릿속에 가두는 방법을 알려준다. 유령들의 괴롭힘에서 풀려난 대니는 아버지처럼 알코올에 의존하지 않고 살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후, 대니는 중년이 되었지만 유년기의 다짐을 지키지 못한 채 알코올중독에 빠져 있다. 자신의 샤이닝 능력 때문에 괴로움을 잊기 위해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샤이닝 능력으로 호스피스 일을 하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쫓겨나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티니타운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친절한 몇몇의 조언으로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나가면서 스스로 새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가끔씩 폭풍우가 치는 위태로운 밤이나 심리적 안정을 잃을 때마다 샤이닝 능력이 발동하여 그를 괴롭힌다. 한편 그 즈음 애니스톤 지역에서 아브라라는 아이가 탄생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9.11을 예견하는 염상을 부모에게 보내기도 하는 등 강력한 샤이닝을 갖고 있다. 아브라가 성장하던 어느 날, 그녀는 먼 곳에서 의문의 집단이 야구하는 소년을 괴롭혀 죽이고 거기서 나온 영기를 빨아들여 영생을 누리는 장면을 샤이닝으로 목격한다. 문제는 그녀가 목격했다는 것을 괴집단의 리더도 알게 된 것이다. 샤이닝 능력이 있는 아이들을 고문하고 죽여 그 영기를 마셔 강력해지는 괴집단 '트루 낫'은 수 세기 내에 발견할 수 없던 강력한 샤이닝을 가진 아브라를 추적하기에 이른다. 아브라는 자신에게 위기가 닥치자, 오래 전부터 지켜보아오던 대니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데...
- 출판사 제공
분명한 것은 킹은 이 소설에서 소수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 킹은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킹이 그대를 속이는 법은 없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는 여전하다. 저잣거리 잡배들이나 쓰는 까칠한 입말 표현은 이 소설'을 읽는 맛을 더해준다. " 엿이나 드세요, 엄마 " 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꽤 오랫동안 낄낄거렸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현대 미국 문학의 신화가 될 작가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소설에서 " 열기구 소년의 아빠 기억하시죠 ? (105쪽) " 라거나 " 에이미 와인하우스처럼 꼴까닥하게 돼 ( 189쪽) " 라는 문장을 발견할 때마다 < 왕과 나 > 는 동시대인'이란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열기구 아들 실종 사기 사건과 와인하우스 쇼크사'는 각주를 통해서나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독자가 얼마 전에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쉽게 접했던 사건들이었으니 말이다. 이 자리를 통해 고백하련다. 스티븐 킹 소설에 대한 평가만큼은 공정한 잣대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재미없어도 재미있고, 재미있으면 감동해서 울컥하게 된다. 으리.... 그래, 맞다. 으리 때문에 읽는다.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당시 경마 기록표나 로또 당첨 번호 목록을 가지고 가는 대신 스티븐 킹 소설 몇 권을 가지고 가겠다. 필사를 해서 출판사에 넘기면 로또보다 많은 금액과 명성을 얻으리라. 킹은 킹이다. 나는 그곳에서 곰곰생각하는발'이란 이름을 버리고 스티브 킴'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리라.
당신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불알은 뜨겁다. 오오, 킹이여 ! 가는 길에 영광(에서 굴비!)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