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마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리자

미망 迷妄 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ㅡ 심보선, 시집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중에서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슬픔은 유행성 독감보다도, 에볼라 바이러스보다도 전염성이 강하다. 슬픔은 수인성전염병 因性傳染病도 아니고 수인성전염성 因性傳染病도 아니다. 시인성전염병 因性傳染病 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전염이 된다. 아내가 슬픔에 빠지자 그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던 남편이 슬픔에 빠지고, " 아내 속의 아내 " 는 더 슬프다. 그리고 이 시를 읽고 있는 독자도 슬픔에 빠진다. 이런 식으로 슬픔은 세계를 잠식할 것이다. 감염 속도를 감안하면 일주일 이내에 대한민국이 슬픔에 빠질 것이고, 일본이, 중국이, 과테말라가, 갈라파고스 군도가, 세계가, 인류가, 지구가 슬픔에 빠질 것이다. 이 재앙의 시작은 " 아내의 슬픔 " 이다. 시인은 "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 " 에서 살고 싶다. 그곳은 신나는 세상이지 슬픈 세상은 아니니까. 하지만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유토피아는 " 어느 곳에도 없는 곳 " 이라는 의미이니깐 말이다. 현실은 잔혹하다. "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 " 린다고 말한다. 꾀죄죄한 현실'이다. 슬픔은 늘 이런 식이다.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스크린 속 영화나 티븨 속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대부분은 구질구질한 현실 때문에 슬퍼진다. 시인의 아내도 꾀죄죄한 현실 때문에 슬퍼했으리라. 시인은 아내가 "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 고 말하지만, 그 지적은 틀렸다. 아내는 각진 모서리 끝을 쓰다듬어, 천 번을 더듬어 둥글게 마모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자기 치유이면서 슬픔에서 벗어나려는 묵언수행'이다. 시인은 뾰족한 각을 둥글게 만들고 있는 아내의 " 신기한 마술 " 을 보고 있다. 어루만진다는 것은 뾰족한 것을 둥글게 만드는 행위'이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언제가 아내는 식탁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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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 2014-09-2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틀 아시는군요!

이 양반, 글재주 뿐 아니라 목소리도 참 좋죠.

가뭄에 콩나듯 내킬때마다 읽어주는 책인게 좀 아쉽지만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3 16:00   좋아요 0 | URL
아, 오늘은 댓글이 별로 안 달렸네요.
그래도 엄동 님이 꾸준한 댓글 고객이로군요....

사실 이 팟 캐스트 있다는 건 알았지만 오늘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김영하 목소리는 좋군요. 신형철보다... ㅋㅋㅋㅋㅋ
신형철은 개인적으로 졸립니다.

라로 2014-09-24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좋아요,,,다만 그런 종류의(?) 아내가 아닌 저는 어쩐지 죄책감을 느껴야 할듯한ㅎㅎㅎ;;;;
책 언제 내실 거에요? 북펀드든 뭐든 저도 동참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4 09: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롬 님 ! 일단 의견추렴 중입니다.
동참하신다니 영광입니다. 대박 나면 굴비 보내드리겠습니다..ㅎㅎㅎㅎ

잘지내시고 바쁘게 사시는 소식 잘 듣고 있습니다. 전 아롬 님의 스토커입니다.

2014-10-03 0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03 0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03 0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10-03 03:5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네에 ! 아 저 지금 일어나 막 컴 켰더니 댓글이 달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페이퍼 하나 지운다는 게 그만 전체 클릭을 눌러서 페이퍼 10개가 몽땅 날아갔어요. 신경질나는군요...


유진식당 ( 네이버에 낙원동 유진식당, 낙원상가 유진식당, 종로 유진식당 치면 자세한 내용 나옵니다. 워낙 오래되고 유명한 곳, ) 5시까지 오시면 됩니다.
 

 

 

 

 

           

 

 

내 사랑

 

                                      전윤호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봉긋한 가슴을 눈 여겨 봐두었지
  날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파먹어야 하니까
  난 당신에게
  생살을 찢기는 아픔밖에 줄 게 없어
  지금은 사방이 막힌 빙하기
  당신의 늑골 속에 숨어 단잠을 자다가
  심심하면 손톱으로 그림을 그리지
  참나무 숲과 얼지 않은 강
  멈출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내 사랑
  당신은 나의 무덤이야

 

-  전윤호, 시집 [ 순수의 시대 ] 중에서

 

 

 

 

 

 

 

당신 가슴을 찢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곰곰생각하는발

 

여의도 밤섬을 사서 죽은 고래 한 마리 그곳에 두고 싶다 / 기름 등불 밝혀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다 / 눈 뜨면 아, 캄캄한 세상 / 눈 감고, 다시 눈 떠도 / 아, / 캄캄한 세상 / 고래 뱃속은 암막 커텐도 필요 없고 /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숙면용 귀마개도 필요 없다 / 비가 와도 우산 쓸 필요 없고 설령 하늘이 무너진다한들 / 가라앉지 않을 섬 / 거대한 갈비뼈는 두오모 성당의 아치형 기둥 / 이보다 더 견고한 벙커가 있을 수 있을까 ? / 밤낮없이 캄캄하고, 밤낮없이 은은하고, 밤낮없이 고립된 거대한 궁전

 

세상 밖으로 떠밀려 나온 후 줄곧 그곳을 그리워했다 / 내가 다시 찾아간 곳은 사랑하는 여자의 뱃속이었다 /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당신을 파먹어야 하니까 / 사랑할수록 여자는 헛배 부르고 / 속은 점점 텅 비워지고 남은 거대하지만 슬픈 / 맨홀 나는 당신 속을 파먹고 사는 기생 벌레였다 / 심장과 간과 폐를 갉아먹고 눈물을 마시고 붉은 피에 취했지 / 당신 가슴을 찢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 내가 갉아먹은 속은 당신 심장이 아니라 내 심장이었다는 사실을

 

내 몸 내가 갉아먹고 살았네 / 오오, 시부랄 ! 오히려 잘 됐다 / 심장 따위 ,   필요 없어.

 

 

 

 

 

 

 

 

 

 

 

http://blog.aladin.co.kr/749915104/6695997 : 심장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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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큐리언 2014-09-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산에서 고래고기에 소주 한 잔 합시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3 09:15   좋아요 0 | URL
고뤠? 아닙니다. 전 포경 반대론자`랍니다. 세꼬시나 사주십시요..

만화애니비평 2014-09-23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부산은 오십니까?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3 16:01   좋아요 0 | URL
언제 함 가야 할 터인데.... 워낙 멀어서리..
가게 되면 에피큐리언 님과 만애비 님 같이 만납시다..
스케쥴이 워낙 바빠서 ㅎㅎㅎㅎㅎㅎㅎㅎ...
 

 

 

 

모르는 새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꽃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 햇빛 속에서 겁도 없이.

 

ㅡ 황동규, [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전문 

 

 

 

첫 끝발이 개 끝발이라는 말이 있다. 천재적 재능을 너무 젊은 나이 때 발산하게 되면 끝에 가서 재능이 고갈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데 한때 천재 시인으로 불렸던 오쉬프만젤쉬탐'도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오쉬프만젤쉬탐은 러시아 국민 시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춘기 시절 시를 쓰기 시작해서 스무살이 되기 전에 시집을 출간했던 시인. 고도리에, 똥 흔들고, 따따블에, 쓰리고를 외치고 피박 뒤집어씌워 첫 판을 휩쓸어 노름판 노름꾼을 가재미 눈깔로 만든 오쉬프만젤쉬탐 ! 하지만 나중에는 요 밑에 꼬불쳐 둔 비상금마저 탈수기처럼 탈탈 털리는 신세가 되었다.  순수했던 어린 시인은 어른이 되어 타락했다.  그나 나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지 못했으나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넉살이 좋아서 친화력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이 친화력이 과한 듯하면서 동시에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의 치근덕은 인간적이어서 좋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는 천상 시인이었다. 나와는 정반대'였다. 나는 거절 공포증이 있어서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기지 않으면     여럿이 모이는 자리를 약속한 적은 있어도    단 둘이 만나는 자리를 먼저 제안한 적은 없다. 자칫 잘못하면 치근덕거리는 남자로 오해받는 게 싫어서다.  사랑 고백도 받기만 했을 뿐,  먼저 고백한 적이 없다. 반면 오쉬프만젤쉬탐은 " 거절 공포증 0 % " 환자였다. 약속을 거절해도 서운해하거나 토라지지 않았다. 문득 오래 전에 보았던 자연 다큐'가 생각났다. 수컷 새는 반짝거리는 예쁜 돌을 주워 평소 좋아하던 암컷 앞에 다가가 돌을 내려놓았다.

 

구애 행위'였다. 암컷이 보는 둥 마는 둥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수컷은 보다 더 예쁘고 반짝거리는 돌을 주워 다시 암컷 앞에 내놓았다. 내가 만약에 그 새였다면 첫 번째 거절에 낙담하여 꽁지 빠지게 도망쳤을 것이다. 거절에 대한 불안 공포를 가지고 있는 나로써는 부럽고, 부럽고, 부러운 근성이었다.내가 가끔 떼거지로 사람들을 긁어모아 술을 마시는 이유에는 거절에 대한 데미지'를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까 ?  그러니까 이 작전은 스팸 메일과 같은 형태'였다. 다수에게 메시지를 뿌리면 응답하는 이는 소수지만 이 소수 정예'가 마치 다수 의견처럼 느껴져서 거절당했다는 불안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가지도 아니면서 가지가지한다고 놀려도 좋다. 고래도 아니면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당신이나      오리도 아니면서 오리무중인 당신이나       나나 피차 매한가지'다. 그게 내가 가진 꾀죄죄한 한계'다. 나는 인간이 품은 품성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월남 쌀처럼 푸석푸석한 술자리를 좋아했다. 끈끈한 관계는 질색이었다. 음식은 영양가 있는 게 좋지만 인간 관계는 영양가 없는 게 좋았다. 별 볼 일 있는 사람보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았다. 대화는 즐겁게 관계는 냉정하게 ! 그래서 나는 남자끼리 몰려다니며 " 브라더후드 " 를 강조하는 우정이 못마땅했다. 그것은 " 브라더후드 " 라기보다는 " 불알- 후드 "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내새끼들은 테스토스테론이 과다 분비되어서 쓸데없이 우정과 의리'를 들먹인다.

 

나는 한국 남자들에 왜 그토록 브라더후드     지랄같은 남성 혈맹       를 강조하며 끈끈하게 붙어먹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끈끈한 관계는 사랑하는 애인 한 명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  동규 시집 제목이기도 한 시 [ 버클리풍 사랑 노래 ] 는 읽기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버클리라........      버클리는 도대체 어느 촌구석에 있는 마을일까 ?      양촌리는 들어봤어도 버클리'는 금시초문이어서 버클리풍 사랑 노래'를 내가 과연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한국인은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앵두 같은 입술을 괄약근처럼 오므리며 샐러드를 오물거려도 집에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젓갈 냄새나는 묵은지 한 조각 먹고 싶은 DNA가 몸속에 저장되어 있으니

 

<< 버클리풍 사랑 노래 >> 라고 해도 사실은 << 양촌리풍 사랑 노래 >> 와 비슷하지 않을까 ? 시적 화자인 < 나 > 는 여성성이 두드러진 남성이다. " 오빠만 믿어 봐 ! " 라고 호탕하게 허세를 부릴 만도 하지만  나는 묵묵히 사랑하는 그대가 해야 할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한다. < 나 > 는 사랑하는 "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 꽃꽃이도 /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 그냥 설거지일 뿐. " 이라고 고백한다. 힘과 의리를 외치는 수컷들이 못마땅해 할 짓'이다.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이만큼 준비했다는 생색을 내기 위해서는 티가 나는 이벤트를 벌려야 그대가 감동할 터인데 시적 화자는 단순히 " 그대 모르는 새 해치우는 " 설겆이로 마음을 표현할 뿐이다.

 

누군가는 해야 될, 사소한 일이기에 모르는 새 해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에둘러 설겆이로 표현하는 시적 화자를 보고 있으니 반짝거리는 예쁜 돌을 물어 암컷 새 앞에 떨어뜨리고는 이내 사라지는 수컷 새의 구애가 생각났다. 시적 화자는 예쁜 돌을 주워 사랑하는 암컷 앞에 놓고 가는 대신 설겆이를 선택한다. "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 " 으면 반짝거리는 예쁜 돌이 되리라.       시인이 < 물비누 > 란 시어 대신 < 비눗물 > 이라고 했으면 이 시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란 작은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아름다운 존재는 항상 " 우리 모르는 새 " 찾아온다. " 우리 모르는 새 / 언덕 새파래지고 / 우리 모르는 새 / 저 샛노란 유채꽃 " 이 피고 우리 모르는 새 사랑은 싹 트고......  

 

시를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  태어나서 멋진 프로포즈 한 번 못했다. 설겆이만 한 인생이다. 만약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예쁜 조약돌을 주워 여자 앞에 툭, 던져놓으리라. 그대가 거들떠도 안 본다 해도 그 옛날처럼 꽁지 빠지게 도망치지는 않으리. 돌을 주워 만리장성을 쌓으리. 밤새 끈적끈적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 타액과 정액으로 범벅이 된 얼룩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다음날 "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 서 "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 " 으면 되니까. 더러워진 몸, 내가 깨끗이 씻기리라.  유리 접시'를 조심스럽게 닦듯이 !  가을이 되니 시만 읽게 된다. 가을이니까 !

 

 

 

+

참고로 내가 아는 유일한 새 이름은 은하철 씨'다. 나머지는 모르는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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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D 2014-09-22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때 전 부치느라 참석 못했지만.. 언젠가 페루애님 만나고 싶네요ㅋㅋ 물론 쑥쓰럼을 많이 타서 술 좀 들어가야 말이 나올듯..으헤헹

푸르푸르 2014-09-22 13:11   좋아요 0 | URL
10월 4일에 페루애가 모임 잡을 듯 하니 그때 오세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2 15:12   좋아요 0 | URL
네에, 그날 날을 잡을 듯하니 토드 님 오십시요. 글구 보니 토드 님도 제 오랜 이웃이군요...

samadhi(眞我) 2014-09-22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따라 말놀이(언어유희)가 절정이구려. 저는 관계에 주로 ˝달려드는˝ 성향이 강해서 사람들이 피해다니는 편이지요. 요즘은 체력이 달리기도 하고, 기도 쇠해져서(?) 누그러졌지만. 남자한테 고백했다 차인 적 많아요^^. 지난 주말, 14년 만에 첫사랑을 만났습니다. 남편에게는 다른 친구 만났다고 하고. ㅋㅋ 아, 바람핀 기분. 아무튼 오~랜 만에 추억(이 말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딱 이 말밖에)에 젖어보았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2 15:17   좋아요 0 | URL
오, 좋아하는 수컷 새에게 예쁜 조약돌 주워다 앞에 놓는 스타일이시구랴.
오쉬프 형 인간이십니다.. ㅋㅋㅋㅋㅋㅋ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전 그런 치근덕이 부럽습니다.


+

첫사랑 만난 일 좀 말씀해주세요. 왜 세월이 흐르면 첫사랑 차라리 안 만나는 게 좋다고
하던데요...

samadhi(眞我) 2014-09-22 20:24   좋아요 0 | URL
그런 얘기는 만나서(?) 들려드릴게요 얘기할 거리는 그다지 없지만 ㅎㅎ

푸르푸르 2014-09-2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dimonofcity.blog.me/220129138147

엄동 2014-09-22 13: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거 뭔가요?
아무리 아이디와 패스워들 넣고 엔터를 쳐봐도 넘어가지질 않아요 -0-

푸르푸르 2014-09-22 13:48   좋아요 0 | URL
다시 눌러 보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2 15:14   좋아요 0 | URL
알라딘은 이게 댓글창에 걸면 링크가 안 걸리더라고요...
주소 보니 오쉬프 님 블로그 같소만.....
잠시 글어가서 보겠씁니다.

엄동 2014-09-2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땐, 상대의 사심없는 거절멘트에 괜시리 상처받고
생각에 생각. 꼬리를 물었었는데 ㅋ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낮을수록 거절공포증도 제로에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황동규˝시인의 시들, 진정 가을에 딱이네요

푸르푸르 2014-09-22 13:12   좋아요 0 | URL
아니 그 거절은 주로 여자들인가요?
엄동님을 거절할 남자들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엄동 2014-09-22 13:3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남녀불문이죠 뭐.

아니 어쩌다 그런 선입견을..

그 선입견이 파삭 깨질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푸르푸르 2014-09-22 13:49   좋아요 0 | URL
4일날 깹시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2 15:16   좋아요 0 | URL
가만 보면 황동규 시인 시는 사실 오글거리는 사랑 시가 많습니다.
전 시를 주로 닭살용으로 읽기 때문에
비장한 시도 좋지만 요런 사랑 시도 참 좋네요..
계절이 계절인지라......

수다맨 2014-09-22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동규가 오래전 썼던 시 중에는 오글대는 사랑시가 많은데, 나이가 들수록 그 오글댐이 조금씩은 사라지는 것 같아요. 한결 관조적이면서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야할까요. 지금 올려주신 시가 참 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4 10:27   좋아요 0 | URL
시 좋죠 ? 이상하다.. 수다맨 님 글에 댓글을 분명 달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없네요...
신기하네.. 하긴 늘 취해있으니...
 

 

 

 

그녀의 착한 복수

 

 

 

 

쨍한 사랑 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

 

- 황동규, 시집 [ 우주에 기댈 때도 있었다 ] 중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 속에 그 여자 이름을 썼다 지웠다. "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 " 과 "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 싶은 마음이 썰물과 밀물이 되어 서로 뒤엉켰다.  한때 내 전화만 기다렸던 여자는 어느새 내 전화만 받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미워할수록 보다 간절한 마음이 자랐고,  간절할수록 지독한 미움'이 자랐다. 잊어야 한다는 다짐과 잊을 수 없다는 고집이 싸웠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뿌리를 뽑진 못하고 애꿎은 이파리만 잘랐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었다.  천국이라 해도 사랑을 잃으면 지옥이 되니까. 말하자면 사랑은 지옥에서도 천국을 경험하게 만들고, 말하자면 이별은 천국에서도 지옥을 경험하게 만드니까. 쨍쨍 해 뜬 날에도 우레 우는 날이 되고, 봄바람 불어도 칼바람 되어 추운 날이 된다. 내가 유독 그 여자와의 이별 앞에서 힘들었던 이유는 착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면 냉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떠돌이 개처럼 미련 없이 그녀를 잊었을 것이다. 낡았지만 오래 입어서 편안한, 몸에 맞는 외투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지지난해 봄날. 종로 3가 옛 피카디리 극장 터 거리에서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다.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녀 옆에는 새로 사귄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영화를 보려던 마음이 사라졌다. 좋지 않은 진찰 결과를 통보받고 식욕을 잃은 위암 환자처럼 말이다. 계획을 접고 둘둘치킨에서 술을 마셨다.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던 동료가 나를 위로하자, 겨우내 얼었던 수도가 이른 봄볕에 녹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녹물을 쏟아내듯, 눈물이 터졌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겨우내 꽁꽁 얼었던 수도였고 여자는 빨래감을 들고 수돗가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이내 떠났다는 사실을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젖은 빨래가 쥐새끼보다 빨리 마르던 가을 초입의 늦은 여름 오후, 등골을 타고 또르르 굴러 엉덩이 골에 땀이 고이던 날을 기억한다. 여자가 말했다. " 어쩌면 내가 지금 당신에게 보내는 헌신은 훗날 당신을 향한 복수일지도 몰라 ! "  착한 여자가 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 속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착한 여자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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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terotopia 2014-09-21 2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소라의 노래 중에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게 언제였더라. 한 이 년 전쯤이었을까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네요. 나에 대해 별로 자신이라는 게 없었는데, 사랑에 서투른 사람이란 게 으레 그렇듯이 누군가의 친절이 그렇게 좋을 수밖에 없었던 때가 그런 때였는데...

맥주를 주고 받으며 대화를 몇 마디 나눴던 게 전부였던 게 첫 만남이었고, 바람처럼 쓸데없이 휘발될 것 같은 풋내기 사랑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이건 안 되는 사랑이다, 싶어서, 좋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사람들이 거의 없는 길 한복판에서 멍하니 서 있던 적이 있었네요. 외로움이란 게 짐승이 달려드는 것보다 더 무섭도 괴롭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혼자 서 있던 날 우연히 술자리가 있어서 거기서 눈치없게 소주에 푹 취했던 적 기억이 있네요.

지금도 가끔씩 얼굴을 마주치곤 하지만 남자 대 여자로서가 아니라 학생과 학생으로서... 사심이 없는 척.

그 무렵에 듣게 된 데 이소라의 그 곡인데... 들으면 들을수록 우울해지더군요 :)...

말하자면 사랑 같은 것은... 처음 듣는 이소라의 노래인데 무척 좋네요. 페루애님이 문득 부럽기도 하구요. 짧은 문단 그 사이사이에 많은 흔적들이 보여서.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1 20:46   좋아요 1 | URL
사랑 때문에 술에 취하면 대책이 없죠. 사실 이 노래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라디오 이 노래 나오는데... 아, 시발... 뭔가 콕 찌르더군요. 이소라 노래 가사말이 좋잖아요. 노래 듣다 보니 쨍한사랑노래 라는 시가 생각나더군요. 마음속 설물과 밀물이 온 길가 갈 길이 되어 서도 부딪다보면 격랑이 일기 마련이죠.

저는 일종의 고백 공포증이라고나 할까요. 먼저 사랑 고백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거절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나 먼저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주길 바랐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댕에게.. 이 노래도 참 좋죠. 제가 좋아하는 곡입니다. 고백이란 늘 힘들죠. 용기를 한번 내보시기 바랍니다. 단 한번도 사랑 고백을 먼저 하지 않았던 사람의 후회이니 말입니다.

heterotopia 2014-09-22 00:2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사랑 때문에 술에 취하면 대책이 없는데... 역시나 고백하지 않는 것은 후회만 남는 일이죠. 알면서도, 역시나 거절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는 건 사실이네요. 아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2 15:23   좋아요 1 | URL
고백하지 않아도 아마 그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괜히 토리 님 댓글에 울컥해서 모르는 새`란 글을 쓰게 되었네요. 고백하지 못함... 말하지 못함.... 이거 참... 힘들죠. 짝사랑은 정말 힘든 겁니다. 힘내십사, 주문을 외우겠습니다.

heterotopia 2014-09-22 20:5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새로 쓴 그 글 역시 일독했습니다.

풀무 2014-09-2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아침에 이런 글을... 곰발님의 독한 가을감성-!

그러고 보면 이소라가 오히려 요즘 여류시인들보다 낫다는 생각을 종종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1 23:15   좋아요 1 | URL
가을 하면 시를 읽는 계절 아니겠습니까.
이소라 노래는 확실히 시적이에요. 가사말이 좋습니다.
바람이 분다 같은 경우는 시보다 더 시 같고 말이죠.....

엄동 2014-09-22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곰발님 블로그는
앞으로도 쭈욱.
가을이었으면 좋겠어요
시도, 글도, 음악과 가사마저도 참 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2 15:21   좋아요 1 | URL
글은 모르겠으나 시도 음악도 참 좋죠. 제가 황동규 시를 좋아하는데
특히 이 시 1연 2연 은 딱 그 마음이더군요.
이 모순된 집착과 떨침...

가을 되니 시가 읽힙니다.
역시 가을에는 시를 읽어야 함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박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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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서울에서 돈 3000만 원 가지고 전세를 얻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복덕방     부동산 중계소'라는 이름보다 복덕방'이란 명칭이 좋다     에 들어가 3000만 원 전세 있냐고 물으면 대꾸도 안한다. 자꾸 물으면 오히려 화를 낸다. " 아니 요즘 3000짜리 전세가 어디 있수 ! " 결국에는 서울살이를 포기하고 꾀죄죄한 변두리'로 향하게 된다. 직장은 서울이지만 집은 경기도 거주자가 되는 것이다.  만원 버스를 천 원'만 내고 탔다는 기쁨도 잠시     구천 원 번 건가 ?     서서 두 시간 동안 사과 궤짝 속 사과처럼 사람들과 맞닿다 보면 짜증이 올라온다. 마르지 않은 머리는 헤어드라이 대신 창문 바람으로 말리고 숨을 쉬면 어제 먹은 삽겹살에 소주 냄새 날까 봐 숨을 삼켜 항문 쪽에 가둔다. 내려서 쏟아내야지 !

 

순간, 왜 사나 싶다. 버스에서 내렸다고 해방된 것은 아니다. 지각하지 않으려면 뛰어야 한다. 퇴근은 역순이다. 내가 살던 집은 안양 충훈부 버스 종점 근처였다. 반지하'였다. 쪽창 하나가 있었는데 창문을 열면 길바닥이 보였다. 방은 늘 캄캄했고 볕은 2시에서 3시 사이에 머물다 떠났다. 이 시절, 나는 바닥'이었다. 애인은 떠났고, 마음은 무너졌고, 헛것은 자주 출몰했다. 투명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온 이가 이었으니 그가 바로 은하철 씨'였다. 올 때는 항상 빈손이었으나 그 마음이 고마워 타박하지는 않았다.

 

- 괜찮아 ?

- 응, 괜찮아 !

- 긍정적 생각을 가져. 부정적인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결실이 이루어질 거야.

- 뭔 개소리야 !

- 좆됐어 열 번 외쳐 봐.

- 왜 ?

- 하라면 해 !

-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좋겠어 !

- 봐, < 좆됐어 > 를 열 번 외치면 < 좋겠어 >가 되잖아.

- 음... " 좆됐어 " 의 동의어는 결국 " 좋겠어 " 네. 감동적이다. 시발.

 

 

 

 

쪽창을 열고 밖을 보면 길바닥이 잘 보인다. 당시 내가 벽에 그린 벽화를 보면 답답한 심정이 잘 나타난다. 커다란 창문을 그렸고 환한 볕을 넣었다. 내가 간절히 원한 것은 넓은 창문과 환한 볕이었다. 나는 쪽창을 열어 몇 시간씩 밖을 내다보고는 했다. 반지하 쪽창이다 보니 사람 얼굴이나 상반신은 보이지 않고 다리와 신발만 보였다. 하지만 걸음걸이와 신발만 보고도 생김새를 대충 알 수 있었다. 특히 신발 뒷굽은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뒷굽이 많이 닳은 사람은 보통 두 부류였다. 가난한 사람이거나 성실한 사람. 나는 쪽창을 열고 방에 앉아서 무수히 지나가는 신발을 보며 그 사람을 상상했다.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쪽창을 열고 지나가는 신발을 구경하다가 낯익은 운동화를 발견했다. 낡은 운동화였다. 낡은 운동화는 머뭇거리며 창문 주위를 맴돌다가 사라졌다. 내 애인의 운동화'였다. 뒷굽이 닳았다.

 

신발 모양'만 보면 그녀는 심성이 곱고 느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여자가 내 곁을 떠났다. 생각해 보니, 그토록 오랫동안 그녀를 만났으나 단 한번도 그녀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는 신발 뒷굽을 본 적이 없었다. 부끄러워서 울었다. 그녀는 왜 집 앞에서 서성이다가 떠났을까 ? 캄캄한 밤이 찾아왔다. 뜬눈으로 밤을 샜다. 아침 7시 정각이 되자 은하철 씨가 찾아왔다. 언제나 빈손이었다. 그는 괜찮아로 시작해서 좆됐다 열 번만 외치라는 주문으로 하루 방문을 매조지했다. 은하철 씨는 아침 7시만 되면 내가 사는 집 창문 앞에 날아와 잠시 집구석을 관찰한 후 날아가는 비둘기 이름이었다. 은하철 씨는 쪽창 너머에서 내 방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안부를 묻고는 했다.

 

쪽창으로 바닥만 보다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니 감동적이었다. 물론 은하철 씨가 사람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비둘기 소리를 내며 말했다. 구구구 ! 그러자 은하철도 구구구, 했다. 나는 장난 삼아 << 은하철도 999 >>  만화 주제가를 부르고는 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 정거장에 햇빛이 쏟아지네 행복찾는 나그네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엄마 잃은 소년의 가슴엔 그리움이 솟아오르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999 은하철도999 기차는 은하수를 건너서 밝은 빛의 바다로 끝없는 레일 위에 햇빛이 부서지네 꿈을 쫓는 방랑자의 가슴에선 찬바람 일고 엄마 잃은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999 힘차게달려라 은하철도999 은하철도999~

 

저, 어둡고 캄캄한 행성에서도 햇빛이 쏟아지고, 은하수를 건너 밝은 빛의 바다로 끝없이 레일 위에 햇빛이 부서진다는 데 내 방은 언제 볕이 드냐 ?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립다. 은하철 ! 옛 애인의 낡은 운동화와 은하철 씨에게 이 시를 바친다. 내 시는 아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박형준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전문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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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 2014-09-20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생각날때마다 울었다 라는 제목이 참좋네요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라..

완연한 가을임을 알려주는
스산한 새벽바람이 좋은 지금이에요

전....출근했습니다
조ㅈ.... 좋겠죠?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0 09:18   좋아요 0 | URL
시 좋죠 ? 출근하실 때 시집 하나 넣어두십시요. 시 읽은 좋은 계절입니다.
토요일 출근이라 그나마 만원 버스는 아니었겠군요. 한 삼천 원 버스했나요 ?

umunym 2014-09-2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피식피식 하다가 아- 하고 길게 육성으로 내뱉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0 15: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 육성이 자주 터졌으면 좋겠네요. 봄날 꽃봉오리 터지듯이...

heterotopia 2014-09-2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다가 문득 김종삼 시인의 시집이 생각나서 몇 장 읽고 있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참 좋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0 15:08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참에 김종삼 시인 시를 읽어보아야겠군요. 짧지만 늘 강렬했던 시로 기억합니다...

레베랑스 2014-09-21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ㅠㅠ

곰곰생각하는발 2014-09-21 09:08   좋아요 0 | URL
이 댓글 읽고 본문을 다시 읽으니 슬프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