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다호 - [초특가판]
구스 반 산트 감독, 키아누 리브스 외 출연 / 서울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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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씌어진 3


                                           

                                             최승자


꿈인지 생시인지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

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나도 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내 이름은 짦은 흐느낌에 지나지 않았다
오 명목이여 명목이여
물 위에 씌어진 흐린 꿈이여)


(죽음은 작은 터널 같은 것
가는 길은 나중에야 환해진다)

 

 

 

해가 밝았다. 모두 다 새로운 다짐을 경쟁적으로 내놓는다. 흡연가는 금연을 시작하고, 애주가는 금주를 선언한다. 새것은 새 자루에 담아야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새해에 < 시작 > 대신 < 끝 > 에 대해 말하련다. 시작보다 중요한 것은 끝이니까. 시작은 " 끝의 티끌 " 일 뿐이다. 어릴 때부터 " 끝 " 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았다. 예술적 아우라는 대부분 끝이 주는 정서에서 나온다. 내가 교보문고 건너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쉬이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읽은, 이른 봄 늦가을 같던 계절에 읽은 최승자 시집 속에서 " 가는 길은 나중에야 환해진다 " 라는 싯구를 읽었을 때 울컥했던 마음은 < 나중 > 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한 시간의 폐허'를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 나중 " 이라는 말은 시간의 맨 끝 혹은 끝나고 난 뒤'를 의미하기에 그것은 더 이상 갈 곳 없음이거나 뒤늦은 회상을 담고 있다. 끝이란 늘 시작하는 과정에 대한 연민과 위로를 품는다. 로드 무비'에서 주인공은 배우가 아니라 길'이다. < 길 > 은 항상 처량하고 삭막하며, 동정 없으며 매섭고 오라지게 춥다. 길은 타자를 품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품는 순간 그것은 길이 아니라 관광엽서에 박힌 풍광 좋은 풍경일 뿐이다. 아, 그러나......  길은 아름답다. 길이 아름다운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로드 무비는 반드시 길 위에서 끝난다. 여정 旅程'은 멈춘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연출한 영화 << 길 >> 에서 짐파노는 젤소미나가 즐겨 부르던 노랫소리에 발걸음을 멈춘다. 젤소미나는 부재하고 목소리만 길 끝 막다른 골목에 남아 있다.

먼지를 쓸고 가던 칼바람이 막다른 골목 벽을 만나 품었던 먼지를 분수처럼 쏟아내듯이, 짐파노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끝이 보이는 막다른 길에 쏟아낸다. 영화 << 파이란 >> 도 마찬가지다. 3류 건달 이강재'가 방파제에 앉아 어미를 잃은 짐승새끼처럼 목놓아 우는 장면이 주는 파토스는 이강재 때문이 아니라 " 길의 끝 " 때문이다. 이처럼 로드 무비는 " 길의 끝 " 을 보여주는 장르'다. " 길의 끝 " 에 다다르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산악 등반가 말로리가 왜 산을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로드 무비는 끝이 있기 때문에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학 작품 또한 끝이 주는 아우라'를 다룬다. 갈 때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서사보다는 되돌아올 수 없는 몰락을 다룬 작품이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끝이 있기에 가능했다.

<< 폭풍의 언덕 >> 은 길의 끝이 벼랑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끝까지 간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끝이 반드시 절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끝은 쓸쓸한 절망과 함께 쓸쓸한 희망을 전하기도 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이 마침내 끝이 보일 때 희망이 생기듯이, 흐지부진한 연애도 끝이 보일 때 차리라 속 시원한 쾌감을 얻기도 한다. < 마지막 > 이라는 낱말보다 < 끝 > 이라는 낱말이 주는 음율'이 좋다. 1음절이 주는 단호함 속에는 신파에 대한 배제'를 담고 있다. 1인칭 소설은 감정 표현을 최소화해야 좋은 문장이 될 수 있다고 배웠다. 1인칭 소설에서 1인칭 화자가 자기 감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촌스러운 문장은 없다.

어젯밤, 꿈을 꾸었다. 왼손 손목을 자르는 꿈이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면서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황한 나는 오른손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왼손을 집었다. 차가운 손끝이었다. 꿈에서 깨어났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 아이다호 >> 를 보다가 다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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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01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 가끔씩 그 철로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처연하게 걸어다니는데 철로의 양끝은 흙 속에 묻혀 있다 …… 김중식 「食堂에 딸린 房 한 칸」
진정한 길에는 무덤이 없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1 18:30   좋아요 0 | URL
문장이 좋아 찾아보았습니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마다

하루 열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 된다 돈 한푼 없어 대낮에 귀가할 때면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다




옐로우 하우스 33호 붉은 벽돌 건물이 바로 집 앞인데

거기보다도 우리집이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이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에 진열된 여자들보다 우리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 배달을 나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 타는 아가씨는 명순氏

紅燈 유리房 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은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 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겠다 싶더니만

반바지 입고 소풍 갈 때 보니까 이건 순 어린애에다

쌍꺼풀 수술 자국이 터진 만두 같은 명순氏가 지저귀며

유곽 골목을 나서는 발걸음을 보면 밖에 나가서 연애할 때

우린 食堂에 딸린 房 한 칸에 사는 가난뱅이라고

경쾌하게 말 못 하는 내가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강원연탄 노조원들이다

내가 말을 걸어본 지 몇 년째 되는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님이라 부르고 용돈 탈 때만 말을 거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놈들은 나보다도 우리 가정에 대해

가계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 하루는 놈들이, 일부러

날 보고는 뒤돌아서서 내게 들리는 목소리로, 일부러

대학씩이나 나온 녀석이 놀구 먹구 있다고, 기생충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상처를 준 적이 있는, 잔인한 놈들

지네들 공장에서 날아오는 연탄 가루 때문에 우리집 빨래가

햇빛 한번 못 쬐고 방구석 선풍기 바람에 말려진다는 걸

모르고, 놀구 먹기 때문에 내 살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내심 투덜거렸지만 할 말은

어떤 식으로든 다 하고 싸울 일은 투쟁해서 쟁취하는

그들에 비하면 그저 세상에 주눅들어 굽은 어깨

세상에 대한 욕을 독백으로 처리하는 내가 더 끝

절정은 아니고 없는 敵을 만들어 槍을 들고 달겨들어야만

긴장이 유지되는 내가 더 고단한 삶의 끝에 있다는 생각




집으로 돌아서는 길목은 쓰레기 하치장이어서 여자를

만나고 귀가하는 날이면 그 길이 여동생의 연애를

얼마나 짜증나게 했는지, 집을 바래다주겠다는 연인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했는지, 그래서 그 친구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뒤에서 스타킹을 걷어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름 전쯤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녔고

모두 깨어 밤새도록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어발기며

쥐를 잡을 때 밖에 나가서 울고 들어온 막내의 울분에 대해

울음으로써 세상을 견뎌내고야 마는 여자들의 인내에 대해

단칸방에 살면서 근친상간 한번 없는 安東金哥의 저력에 대해

아침녘 밥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각기 직장으로

公園으로 술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탈출의 나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 혹 知人이라도 방문해 있으면

난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넘어 멀리까지 귀양 떠난다




큰 도로로 나가면 철로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기차가

있다 가끔씩 그 철로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처연하게

걸어다니는데 철로의 양끝은 흙 속에 묻혀 있다 길의

무덤을 나는 사랑한다 항구에서 창고까지만 이어진

짧은 길의 운명을 나는 사랑하며 화물 트럭과 맞부딪치면

여자처럼 드러눕는 기관차를 나는 사랑하는 것이며

뛰는 사람보다 더디게 걷는 기차를 나는 사랑한다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철로의 무덤 너머엔 사랑하는 西海가 있고

더 멀리 가면 中國이 있고 더더 멀리 가면 印度와

유럽과 태평양과 속초가 있어 더더더 멀리 가면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출처]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문학동네::) |작성자 라디비나


stella.K 2015-01-0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오늘 글은 정말 좋네요. 물론 곰발님 글이 안 좋은 적은 거의 없지만 오늘은 특별히!
시작`은 ˝ 끝의 티끌 ˝ 정말 그렇군요. 길에 대한 곰발님의 단상도 좋고.
솔직히 곰발님 읽는 건 좋은데 단점은 글을 읽고나면 전 글 쓰기가 싫어진다는 거죠.ㅠㅠ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1 18: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새해만 되면 만날 새해 다짐, 새 결심, 새날, 이런 말만 하기에 끝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 시작보다는 끝이란 단어가 더 좋군요.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다음은 한겨레 블로그 박노자 글방에 올라온 << 개인 일상의 시대 >> 란 글을 서재에 옮긴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희망과 다짐보다는 절망과 포기로 이 글을 시작한다. 지하 생활자의 어깃장이라 생각하지 말고 현실을 보자.


개인 일상의 시대

​박노자

저는 이번 신정을 앞두고 계속 여행질해왔습니다. 며칠 전에 오래간만에 모스크바에 들르기도 했습니다. 며칠 밖에 안되는 방문인지라 제 견문은 한계가 많지만, 한 가지 인상을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제가 만난 사람들의 세계관이란 뚜렷하게 과거와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단 "서방"과 "자본주의"에 대한 희망들이 많이 깨진 듯합니다. "민주적 서방"은 우크라이나에서 상당히 비민주적인 새 정권을 세우는 데 지원한 게 뚜렷하게 보였고, 또 6년 전에 고장이 난 자본주의가 여전히 그 모순덩어리로부터 전혀 벗어나지 못해 세계공황에 끝이 보이지 않는지라...몇년 전만 해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방"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매우 드물었으며, 요구의 최대치는 "서구와 같은 합리적인 체제, 공명 선거, 푸틴 권위주의 퇴장" 정도이었지만, 인제는 그 정치사상적 순진성에 상당히 균열이 간 것 같습니다. 2010년, 톨스토이 서거100주년에 권위주의적이며 군사주의적 국가도,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지식인 사회"도 군대 만큼이나 토지사유제 등을 혐오했던 러시아 문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재조명 시도도 없이 그 100주년을 묵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그 무관심에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 참신했습니다. 획실히 "여론"이 움직이고 있어 점차적 급진화의 과정이 "저류", "심층"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들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사회 의식이 점차 바뀌고 좌파에 훨씬 더 열려간다 해도, 사회의 현실은 의식만큼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비판을 인제 서슴지 않지만, 여전히 그 비판자들이 현실적으로 바라는 것은 취직이든 이민이든 아니면 국가로부터의 복지혜택이든 개인적인 "체제에의 편입"이지, 체제와의 현실적 충돌을 대다수가 여전히 피할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지젝 등 "유행 속의 팝 좌파"에 심취할 수 있어도 이 개인적 취향은 현실적 삶에 거의 영향 주지 않는 거죠. 사회의 저항력은 여전히 대단히 낮은 수준에 있습니다. 급진좌파는 "셔클" 차원에서 존재한다 해도, 그 이상 나아가기에는 지반이 아직도 너무나 약하다는 거죠.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가요? 일면으로는 우리 집단의식은 우리 현실을 꽤나 정확히 반영합니다. <미생>의 장그래가 거의 "전국민의 캐릭터"가 되고 상징적 존재가 된 것을 보시죠. 대중문화산업도 반응해야 할 정도로 "노동인구의 비정규직화는 대참사다", "비정규직으로 나라가 망한다", "이렇게 해서 민생이 다 망한다"는 의식이 많이 퍼진 셈입니다. 아니면 최근의 유행작인 <카트>의 열풍을 보시죠. 현재 노동투쟁의 신주류인 비정규직 투쟁이 이미 대중문화 속의 "주요 주제"로 부상할 정도라면...신자유주의에 비판적 여론의 저류가 이미 어느 정도 형성됐다고 봐야 할 셈입니다. "진상고객"부터 "땅콩회항"은 "갑질"에 이어 갑오년의 유행어가 된 게 아닌가요? 그러니까 러시아가 "서방"과 "자본주의"에 실망했듯이, 대한민국도 "경쟁"의 신격화에 이미 나름 실망하여 광범위한 민중층 속에서 "따뜻한 사회", "민생 챙기는 나라"에 대한 선호모드가 만들어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왜 러시아에서 대자본과 군벌, 안보꾼 등의 대표자라고 할 푸틴은 그 어떤 "국유화" 등의 정책없이도 계속해서 80% 이상의 지지를 받을까요? 왜 한국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편에 섰던 통진당의 깡패적인 "강제해산"은 그 어떤 대규모적인 격렬집회의 파도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까요? 왜 그렇지 않아도 말도 안될 정도로 비정규직에 불리한 기존의 비정규직 관련의 법률을 더더욱더 개악시키려는 박근혜의 표독스러운 정권은 "저항의 해일"을 아직도 맞이하지 않았을까요? 왜 현실성이 강한 사회 의식과 너무나 타협적인 사회의 현실은 이 정도로 딴판일까요?
 
저는 이게 준주변부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원자화된 사회에서는 사회 의식은 아무리 좋게 진화돼도, 급진 조직이 매우 미약한 상황에서는 "잠재적 저항층"의 대다수는 그저 개인 일상 속에 파묻혀 삽니다. "저항"을 시도해도 그저 개인적으로, 일상 속에서 피케티를 읽거나 페북에서 급진적 포스트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으로 "저항"을 연출해보는 것이지, 개인으로서 부담이 돼 일상에 방해될 수 있는 연대적인 집단행동을 가급적 삼가한다는 것입니다. 데모해도 죽거나 크게 다칠 시대는 지났지만, 일단 데모하게 되면 사진 채증돼 나중에 막연히 불리할 수도 있고, 또 잘못되면 벌금형 등이 내려질 수 있기에, "격렬집회"는 거의 과거 속으로 흘러간 셈입니다. 모든 가용 자원들이 개인 생존을 위한 사투에 집중되는 개인 일상의 시대, 즉 자본주의 후기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이 이해관계도 불확실한 "타자"들과의 연대에 약간이라도 투자하려 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 개인의 정의감이 아무리 짓밟혀도, 이에 대한 반응을 집단저항보다 개인적 소비로 표출됩니다. 피케티를 읽고 <미생> 보고 장그래를 동정하고...이런 세대의 기준으로 세계를 재단하는 것은 바로 "포스트" 철학이기도 하죠. 패배 당한 1968년의 혁명 이후의 소비/일상의 세대의 커다란 자기변명은 바로 "포스트"에 해당됩니다.
 
개인 일상으로의 회귀라는 우리 아노미는 전혀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기자본주의의 위기는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에 언젠가는 조직과 집단행동의 시대도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피케티나 지젝의 독자 내지 <미생>의 시청자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문재인들의 "복지주의"적 궤변에 넘어가서 보수야당에 표를 던지는 것까지 아마도 "개인적 저항"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정말 답답한 겨울의 시대죠.  

 

세월호는 시작이자 끝이었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 아아 / A > 와 < 오오 / O > 뿐1 이었다. 대한민국의 민낯이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고는 없었다. 언론은 초라한 리얼리티 ( 현실 ) 을 숨긴 채 판타지 ( 허구 ) 를 양산했다. 긴급 편성된 24시 재난 방송은 헐리우드 영화 속 장면처럼 긴박감 넘치게 작동하고 있었다. 최대 인원, 최대 물량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말 그대로 " 지상 최대의 작전 " 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재난 방송이라기보다는 국가 홍보 방송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거대한 스펙타클과 화려한 판타지에는 정부의 프로파간다적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 방송 보도와는 다르게 진도 앞바다는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처음부터 정부는 구조 의지'가 없었다.

 

관료 조직은 일사분란한 게 아니라 뒤죽박죽이었다. 대한민국은  << 오즈의 마법사 >> 에 등장하는 마법 나라 王처럼 초라하고 꾀죄죄한 " 얼라 " 였다.  그들은 콧잔등처럼 보이는 배 밑바닥 꼬투리'가 빨리 가라앉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숨쉬는 게 거북해지는 순간이었다.  "  리얼 " 인 척하는 " 판타지 "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 판타지인 척하는 리얼리티 > 가 세련된 정치적 수사'라면 < 리얼리티인 척하는 판타지 > 는 천박한 기만이었다.  후자는 백마 탄 실장님과 결혼하게 되는 가난한 여자가 주인공인 드라마 연속극이었다. 세월호 방송 보도는 명백하게 리얼리티인 척하는 판타지였다. 기만이었다. 오직 거대한 울음만이 숭고한 수난극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재난 앞에서 일베가 폭식 투쟁을 펼쳤을 때 대한민국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다.

 

그리고 박근혜가 " 통일 콘서트 사제 폭탄 테러 사건 " 에 대한 언급에서 테러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하지 않은 채 테러 피해자인 토크 콘서트 강연자에게 사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을 때  이미 대한민국은 " 위 아래, 위위아래, 위 아래, 위위아래 " 모두 썩을 대로 썩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박노자는 글에서 " 개인은 이해관계도 불확실한 "타자"들과의 연대에 약간이라도 투자하려 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 개인의 정의감이 아무리 짓밟혀도, 이에 대한 반응을 집단저항보다 개인적 소비로 표출 " 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제 21세기 시민 사회는 정부 비판 글'에 대해서는 < 좋아요 > 를 클릭할 수는 있을 만큼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지만     왜 아니 그러겠는가. 단군 이래 가장 많이 배운 세대가 아니었던가 ?   정작 광장으로 나와 손을 잡지는 않는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광장에 나와 " 정의 " 를 외치기보다는 모니터 앞에서 " 정의 " 를 전자 결재할 뿐이다. 여러 모로 보나 이 사이버 지지 방식이 일렉트릭的이며, 소셜네트워크的이며 심플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계급 간  연대는 무너졌고  대신 그 자리를 인문학적 교양과 양심이 결합된 꾀죄죄한 교양과 ( 정치적 ) 취향만 남게 되었다. 현실을 직시하자니 귀찮고 사실을 외면하자니 찔린다. 그래서 저항인 듯, 저항 아닌, 저항 같은 " 좋아요 " 를 누른다. 이것은 일종의 << 송혜교 효과 >> 다.  " 오늘부로 나는 너의 죄를 사하노라 ! "  < 좋아요 ㅡ 버튼 > 을 누르는 순간 자신은 멍청한 보수 꼴통과는 다른 노선을 걷는 것처럼 코스프레를 하지만  차이점은 거의 없다.

 

< 좋아요 ㅡ 버튼 > 은 " RIGHT " 라기보다는 단순한 " GOOD " 기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골목 상권 보호'를 주장하는 글에 < 좋아요ㅡ 버튼 > 을 누르며 지지하지만 정작 자신은 시장 옆에 우뚝 솟은 이마트에서 장을 본다. 중요한 것은 전시 효과이지 실천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가 SNS 여론을 우습게 보는 이유이다. 이곳에서는 말은 넘치는데 실천은 없다. 68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성공한 혁명이었다. 68혁명은 정치적, 사회적, 성적 금기와 같은 모든 금기가 최초로 도전받고 깨뜨려진 시기였다. 그 실패는 가능성에 대한 리트머스였기에 실패에서 희망을 보았다.  68혁명 이후 프랑스는 수많은 사회 변혁이 이루어졌다. 실패가 결국 사회를 변혁시켰던 것이다.

세계는 곳곳에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도 끊임없이 저항했고, 저항했고, 저항했다.  누군가는  분신으로 노동자 권리를 전했고,  누군가는 군부 독재와 싸우다가 죽었다.  박정희 덕에 이만큼 먹고산다는 말은 판타지'다. 대의를 위한 노동자의 희생 덕분에 이만큼 자유를 누리고 산다는 말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투쟁의 역사와 신화는 헛것이 된 것처럼 보인다. 21세기 시민 사회는 어느 누구도 개인적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 내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 네 일에는 관심이 없다. 甲은 승리했고 乙은 실패했다. 자본에 의한 이자 이윤이 노동에 의한 생산 이윤보다 앞서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는 더 이상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게 되었다.  돈이 돈을 낳는 구조가 된 것이다.

 

조현아는 몰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불행의 편린'일 뿐이지 인생 자체의 몰락이 아니다. 그녀는 교도소에서 몇 달 살다가 경제 활성화라는 이유로 특별 사면되거나 가석방될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이때 일을 마치 무용담처럼 말할 것이다. 몰락과 절망이라는 표현은 특혜와 특권으로 이루어진 계급'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부자가 삼대를 못 간다는 속담은 이제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돈이 돈을 낳는 21세기 신자유주의는 대대손손 부를 상속할 것이다. 1968년, 소르몬 대학 벽에 이런 문장이 써 있었다. "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 이 말은 마치 클린 윌슨이 << 아웃사이더 >> 에 쓴 그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이렇다 할 재능도 없고 이룩해야만 할 사명도 없으며, 반드시 전달하지 않으면 안될 감정도 없다. 나는 가진 것도 없으며 무엇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다. 그런데 나는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있다.

- 아웃사이더 中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은 상상(판타지)'에 속한다. 그렇기에 " 리얼리스트 " 이면서 동시에 " 판타스틱 베이비 " 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뻔뻔한 것이 아니다. 소르몬 대학 벽낙서와 콜린 윌슨의 말은 같은 말이다. 나는 가진 것도 없으며 무엇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보상을 바란다. 보수는 이러한 요구를 뻔뻔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말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그것이 비록 확률 제로에 가깝다고 해도 말이다.








  1. A 는 알파이고, O는 오메가'이다. 즉, 시작과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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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4-12-3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정말, 형태만 시종 바꾸는 고체와 사라지길 반복하는 액체 사이와의 사투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1 20:45   좋아요 0 | URL
에휴.. 개새들 ! 진짜 욕 좀 먹는다 싶으면 이름만 살짝 바꿉니다.
칼 휘두르는 양아치에서 갑으로, 갑이 욕 먹으면 멘토`로, 멘토가 시들해지면 힐링 전도사로, 힐링도 욕 먹으면 코칭으로, 이름만 바꾸지 사실 다 비슷비슷합니다.

비로그인 2014-12-31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누르기가 부끄러워지는 글이네요. 그래도 ˝좋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1 20:43   좋아요 0 | URL
아, 글구 보니 여기도 좋아요 였죠. 원래는 곰감인가 그랬는데. 좋아요. 좋아요가 뭡니까. 페이스북스럽게 말입니다.

2015-01-01 0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01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다맨 2015-01-02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때일수록 예상 가능한 대책 마련이 아니라 도리어 불가능한 요구를 (적에게) 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곰곰발님 저번 말씀처럼 대한민국이 점점 망해간다는 것은 왠지 불변의 현실처럼 여겨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2 17:22   좋아요 0 | URL
네, 답답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ㅋㅋㅋㅋ 오죽 답답햇으면....
확실히 세월호 사건은 다른 사건을 압도하는 절대적 절망이 있습니다.
뭔가 그냥 폭삭 가라앉은 듯한 느낌.. 서서히 붕괴되었다기보다는 그냥 왕창 무너진 느낌.. 뭐,그런 느낌이 드네요.
 

 

 

 

乞 : 걸

 

 

 

 

 

헐리우드 영화에서 좀비는 무서운 존재이기는 하나 인간의 힘으로 퇴치가 가능한 존재이다. 좀비가 떼거지로 몰려다니지 않는다면 혼자 어슬렁거리는 좀비 한 놈쯤은 삽 하나 가지고도 때려잡을 수 있다. 좀비는 너무 많이 먹어서, 혹은 너무 굶주려서 행동이 굼뜨고 멍청하다.  괴물치고는 가장 만만한 괴물이다. 좀비의 행동 패턴을 정신분석학으로 풀어내자면 구순기 고착 장애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고, 뜯고, 빠는 구순 쾌락 욕망이 강한 존재가 바로 좀비'다. 이들에게 입은 곧 생식기'다. 그렇기에 식욕은 성욕으로 전이된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 죠스 >> 는 구순기 고착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시각화한 영화'다.  죠스의 " 아가리 1 " 는 식탐을 상징하는 입 口 구멍이면서 동시에 무시무시한 이빨 달린 밑구멍'이기도 하다.

 

무식한 표현을 유식하게 돌려서 말하자면 죠스 아가리'는  " 바기나 덴타타 ( 이빨 달린 질 ) "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 구순기 괴물들 :  http://myperu.blog.me/220167057805 ) 를 참고하기 바란다.  작년에 전남 나주에서 발생한 어린이 성폭행범 고종석은 전형적인 구순기 고착 성격 장애 환자'에 속한다. 신체는 어른이지만 정신은 구순기에 고착된 상태인 것이다. 그가 아이에게 남긴 이빨자국이 그 증거'이다. 그에게 입은 " 음식물을 섭취하는 입구 input " 이면서 동시에 " 욕망을 배출하는 구멍 output  " 이다, 쾌락 기관이다. 좀비와 구순기 고착 장애 환자'라는 표현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면 " 걸신 " 이란 말로 대체해도 된다. 좀비를 동양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 걸신 " 이다. ​< 걸신들린 사람 > 처럼 먹는다,  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걸은 한자로 乞이다.  뜻은 " 어먹을  " 이다. 걸신 乞神은 곧 빌어먹는 귀신'이라는 말. 귀신 중에서 가장 꾀죄죄한 귀신'이요, 멍청한 귀신이라 할 수 있다. 걸신과 좀비가 모두 식욕만 남아 있는 죽은 자'라는 의미에서 걸신과 좀비는 이음동의어'이다. 입으로는 좀비'라고 말하고 손으로는 걸신'이라고 쓴다. 내가 이 단어에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乞이라는 한자 구조'다. 乞의 부수는 乙이다. 그러니까 을은 수천 년 동안 허기에 굶주려서 빌어먹는 좀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수천 년 후를 꿰뚫는 옛날 선조의 선견지명'이다. 뉴스를 보니 대한민국이 내년에는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돌파할 예정이라고 한다. ( 국민 총생산 GDP와 국민 총소득 GNI는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지식인'으로 !  ) 왕년에 " 제국 " 이란 타이틀을 획득한 적이 없는 국가로는 처음으로 국민소득 3만 달러'에 도달하게 되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아, 이 영광스러운 굴비의 맛 !  이 동력을 발판으로 근 미래에는 곧 일본을 앞지를 전망이란 장미빛 청사진도 나온다. 1인당 소득이 삼천 만원'이라고 한다면, 한국인 가정 평균인 4인 가구 기준으로 보자면 일억 이천 만원이라는 환상적인 소득이 발생한다는 말인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듯싶다. 내 주변머리없는 이웃은 모두 거지에 가까운 것일까.  두 자녀를 둔 부부가 맞벌이를 한다고 해도 총소득이 5천만 원을 못 넘기는 가정도 많다. 설레발이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대한민국 노동자  가운데 둘 중 한 명은 월급이 200만 원에도 못 미치는 100만 원대 소득이 고작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치즈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돈을 버는 계급은 서민이 아니라 재벌'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상위 1%가 부를 독식하는 하는 것.

 

이 아메바적 재산 증식은 결국 노동자 몫으로 돌아가야 할 몫을 상위 1%가 갈취했기에 가능했다. 하는 일은 동일한데 오로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월급은 반토막이 났고, 이제 대학 교육은 마치 국가 의무 교육이 되어서 사학 재단에 매년 국민 1인당 천만 원을 조공한다. 천만 원 등록금을 조공한다고 해서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잘 풀리면 롯데리아에서 닭을 튀긴다. 이제 청춘은 창창한 앞날의 < 빛 > 대신 울울한 앞날의 < 빚 > 을 걱정한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빚만 남은 꼴이다. 이러다 보니 < 네 일 > 에는 관심이 없고 < 내 일' > 에만 관심이 가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20대 청춘은 점점 보수로 흐른다. 하지만 그 누가 탓하랴 ?  탁 트인 앞을 보지 못하고 발등에 떨어진 불만 보게 만든 것은 바로 기성 세대'였으니 말이다. 대한민국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 때문에 망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대한민국은 보수와 진보가 팽팽하게 대립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이미 80% 이상이 보수화된 나라이다. 보수끼리 싸운 것을 두고 보수와 진보가 싸웠다고 우기면 어불성설'이다. 대한민국 정치의 후진성은 양 진영 간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 의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거대한 싱크홀'이다.  풍요로운 사회에서 굶어죽는 이는 없으나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기에 헛배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  갑질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는 것은 곧 한국 사회가 신분 사회'로 신속하게 전환되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후'이지 않을까 ?  감성팔이 박정희 향수 영화 << 국제시장 >> 에서 아버지 세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동 ( 피와 땀 ) 을 팔아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이제 아들 세대'는 노동을 팔아도 부를 축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노동자의 절반은 똑같이 피와 땀을 흘려도 200만 원도 못받는 월급을 손에 쥐게 된다. 대학 졸업장보다 중요한 것은 주민등록 등본에 기재된 가족 구성원이다. 조상이 개고생한 걸 모르면 호로 자식이고, 금수저 물고 태어난 놈이 갑이제 ~  내가 보기엔 좀비, 드라큘라, 고스트버스터, 디워, 죠스, 옥토퍼스 따위는 모두 걸신의 현현'이다. 갑이 굶어 죽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결국 식탐에 빠진 괴물은 모두 태생이 乙이라고 보아야 한다.  굶어 죽는 이가 많을수록 이들 괴물은 문명 사회에 출현하여 " 갑질 " 에 대한 복수를 감행할 것이다. 그러니까 좀비나 죠스 따위가 당신 목이나 허버지를 물어뜯는 행위는 " 갑질 " 에 대한 반항, 즉 " 을질 " 이다. 괴물이 두렵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 갑질 " 을 멈추는 것이다. 타인의 허기'를 구질구질하다고 조롱하지 말고 깊이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괴물의 습격을 늦출 수 있다.  결론을 히마리 없이 매조지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내가 보기엔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다. 

 

 

 

 


 

  1. 죠스는 국내 상영 시 << 아가리 >> 란 투박한 제목으로 극장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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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4-12-3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좀비도 생각하고 뛰고 진화하고 있는데, 우리의 생각은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을 못따라가고 있네요 하긴 신도 인간이 이 정도로 생태계 갑질할지도 몰랐을 거예요. 하여간 지구 생활 어려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0 14:44   좋아요 0 | URL
인간이 사악한 게 인류 멸명을 지구 멸망과 동일시한다는 점입니다. 지구는 오히려 인간 멸망이 절호의 찬스 아니겠습니다. 모든 생물은 자가 생산을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죽으면 그 상위 천적의 먹이가 되니 최소한 생산적 주체죠. 오직 인간만이 지구에서 생산은 전무하고 소비만 하는 주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멸망이 지구 멸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만이죠... 지구를 위해서 인류는 멸망해야 합니다. 지구 멸망을 다룬 영화들이 하나같이 인류 구원이 희망처럼 말하는 데 웃긴 짓 아닐까 싶습니다.

비로그인 2014-12-30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비를 소재로 이런 멋진 글을 쓰시다니!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주체적인 의식도 없고 그저 욕망에 걸신들려 살아가는 오늘날 모든 ˝을˝의 모습에 좀비만큼 어울리는 표현도 없는 것 같네요.
영화보면 항상 주인공팀중 일원이 다수를 살리기위해 좀비의 미끼, 먹이가 되는 장면이 나오죠. 이번 땅콩사건도 갑들이 좀비의 습격을 벗어나기위해 좀비떼속에 미끼를 집어던진것 같네요. 우린 당분간 조땅콩을 뜯어먹으며 자기기만적 포만감을 느끼겠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죠. 여전히 우린 좀비고 그들만 사람일테니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0 15:31   좋아요 0 | URL
허허. 감사합니다. 걸이란 한자를 보다가 진짜 5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을은 여전히 굶어죽기 딱인 계급이고 이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포로 다가옵니다.

언젠가는 아마 ˝ 조땅콩 ˝ 을 ˝ 좋다 콩 ˝ 이런 이름으로 시중에 유통될 날이 올 겁니다.

2014-12-30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31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다맨 2014-12-31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국제시장˝을 보지 않았지만 ˝감성팔이 박정희 향수 영화˝라는 말에 적극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이런 저질 영화가 흥행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가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징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1 17: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 이거 뭐.... 서울역 근처에 닭꼬치 잘하는 집 있는데 다음에는 그곳에서 한 잔 합시다요. 향수 영화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박근혜 정권 이후 아주 노골적으로 아버지 세대 어머니 세대를 찬양하는 영화가무더기로 양산한다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에서...

 

티븨에서 의사와 교수가 단체로 나와서 멘토 짓을 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되면 잽싸게 채널을 돌린다. 모 대학 정치학 교수는 종편을 종횡무진한다. 아침 먹고 반짝, 점심 먹고 반짝, 저녁 먹고 반짝 !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니 인기 연예인 못지 않게 스케쥴이 빡빡할 것이다. 그래도 이 사람은 정부 앞잡이는 아니어서 쓴소리를 곧잘 하는데 신뢰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 교수는 정치평론가라는 직함과 함께 현역 교수라는 점이다. 내가 이 사람에게 궁금한 것은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까 라는 의문이었다. 아침부터 방송국에 들락날락거리는 사람이 대학 강의를 제대로 할 리 없다. 궁금하여 이름 석 자 치고 찾아보니 그 대학 학생이 쓴 것으로 보이는 글을 발견했는데 온통 불만투성이'였다. 휴강을 남발하고, 시간 강사 불러서 수업 채우고, 리포트 제출로 대체한다는 것. 1000만 원 등록금을 세대가 보기엔 이런 교수는 염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 정치를 진단하고 호통을 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다. 티븨를 보다 보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자칭 전문직 종사자를 자주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100% 가짜'다. 의사와 교수가 있어야 할 곳은 방송국 스튜디오가 아니라 병원과 대학이다. 마찬가지로 목사가 있어야 할 곳도 예배당이지 방송국이 아니다. 기본 자세도 안된 사람들이 나와서 멘토랍시고, 힐링 전도사랍시고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면 역겹다. 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직업은 " 목수 " 다. 예수도 목수였으니 이 직업은 실로 오래되었다. 목수는 결을 거스리지 않는다. 결대로 대패질을 하고, 못이 들어갈 자리를 미리 살핀다. 왜냐하면 못이 박힐 자리는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목수는 나무를 자르기 전에 다시 한번 길이를 잰다고 한다. 예수 또한 나무를 자르기 전에 다시 한 번 길이를 재지 않았을까 ? 

대한민국은 " 기술 " 을 단순히 남들보다 빨리 일을 처리하거나 볼거리가 화려한 사람을 실력이 뛰어난 기술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들 때 현란한 손동작으로 쉐키 쉐키 쉐키'를 한다고 해도 칵테일 맛이 떨어지면 칵테일 쇼는 " 지랄 " 에 불과하다. EBS에서 방영되는 << 극한 직업 >> 이 SBS에서 방영되는 << 생활의 달인 >> 보다 뛰어난 점은 노동을 단순히 볼거리나 속도 따위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을 품평하자면 << 생활의 달인 >> 이 오징어라면, << 극한 직업 >> 은 원빈이요, << 생활... >> 이 각하의 음성이라면 << 극한... >> 은 문재인의 음성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좋은 목수의 기준은 현란한 못 박기, 나무 빨리 자르기 따위가 아니라 자르기 전에 다시 한번 길이를 확인하는 꼼꼼함에 있다. 그 아무리 나무를 빨리 자른다고 한들 치수를 잘못 재면 도로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된다.

좋은 정치'란 좋은 목수'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순리에 어긋나지 않게 결대로 대패질을 해야 하고, 못이 박힐 자리를 꼼꼼하게 살핀 후 나무의 저항을 계산하는 것. 그리고 자르기 전에 다시 한번 길이를 재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정치가가 배워야 할 대상은 노무현이나 김대중의 유훈 정치가 아니라 목수가 나무를 다루는 방식이다. 대한민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군사 독재를 견재하느라 재벌 독재를 막지 못했고, < 민주화 > 가 " 민주주의의 과정 " 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 민주주의의 완성 " 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치수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과정 없이 섣불리 나무를 잘랐고, 못이 박힐 자리를 확인하지 않은 채 못질을 하다가 나무의 저항을 받아 못이 튕겨나간 꼴이 되었다. 톱질도 엉망이었고, 못질도 형편없었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집권한 후 민주주의는 과거로 " 인터스텔라 " 했다.  KTX보다 빠른 광속으로 말이다. 또한 바늘 구멍보다 좁은 취업 전쟁은 20대를 보수화시켰다. 애늙은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 내 일 " 만 한다. " 네 일 " 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 내일 " 이 없는 것이다. 모두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대체로 추세가 그렇다는 소리.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이들은 이런 " 히마리 " 없는 20대를 겨냥해서 20대 개새끼론을 퍼트렸지만, 이 말은 절반은 옳고 절반은 그르다. 왜냐하면 20대만 개새끼가 아니라 30대도 개새끼이고, 40대도 개새끼이며, 50대도 개새끼이고, 60대도 개새끼'이기 때문이다. 똥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다. 너나 잘할 필요가 있어요. 영화도 빠르게 보수화가 진행되고 있다. 박근혜 집권 이후 흥행 돌풍을 몰고 온 영화들은 대부분 충효와 연관이 있다. << 수상한 그녀 >> 가 내포하는 메시지는 진부한 모성의 답습이다. 여성의 성적 욕망보다 중요한 것은 모성 본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여성은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만 진정한 여성이 된다고 가르친다.  반면 << 명랑 >> 은 " 국민 아버지 " 인 이순신을 호명해서 명량하지 않은 명랑의 다이하드'를 보여준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하다.

옛 조상이 피와 땀을 흘린 대가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모르면 ? 그렇다, 호로 자식'이제 !  영화를 보고 나면 남는 것은 어르신에게 잘하자, 이다.  모르면 원숭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호로 자식이 된다. 끝으로 << 국제시장 >> 은 노골적인 박정희 향수를 건드린다. 이 영화는 흥남부두, 파독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 같은 신파를 적극 끌어들였지만 " 그때 그 시절 " 에 대한 " 그땐 그랬지 " 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를 보고 나면 << 포레스트 검프 >> 의 최루 버전'을 본 느낌이 난다.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는 5,60년대 유행했던 스크린 프로세서'用 화면으로 작용한다. 역사적 배경과 인물이 따로 논다는 말이다.  황정민은 스크린 앞에서 연기를 하고, 스크린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흥남부두가, 독일 탄광 막장이, 베트남 전쟁터 화면이 스펙타클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물과 기름 같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 영화는 새누리당 지지자가 좋아할 만한 모든 미덕을 갖춘 영화'다. 산업화 세대에 대한 예찬과 가난한 시절에 대한 향수를 그린다. 이러한 감성팔이 영화들이 대중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복고 취향이 아니라 퇴행'으로 보아야 한다. 가족 간 핏줄'보다는 노동자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대중 영화가 강박적으로 가족이라는 핏줄과 향수에 빠진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족이 해체 위기에 빠졌다는 점을 말해준다. 흔히 사람들은 위기에 빠진 가족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족뿐이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족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은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바른 정치와 제도'이다. 대한민국 노동 시장은 이제 저임금 중노동으로 재편되었다. " 나인 투 파이브 " 는 이제 " 나인 투 나인 " 이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모든 노동이 극한 직업이 되었다.

대한민국 보수는 성공했다. 재벌은 성공했고 노동자는 실패했다. 이제는 아무도 노동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잔인한 4월, 바다 속으로 침몰한 것은 세월호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도 침몰했다. 대한민국 다 족구하라 그래라. 축구 싶냐. 농구 있다. 야구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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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4-12-26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수 예수는 못박혀 죽고(무려 부활!) 누군가는 정치보복당해 죽고, 우리는 우리의 선택으로 죽음또한 선택하는 거겠군요. 투표 개판되는 거 좀 달라졌으면 좋겠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7 09:03   좋아요 0 | URL
투표는 기본적으로 발등을 보고 투표하면 망하게 됩니다. 앞을 보고 투표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발등에 떨어진 것만 보고, 예를 들면 뉴타운 건설로 집값 올리겟/습니다. 이런 것만 믿고 하니 선거가 개판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다. 선거는 기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투자 아니겠습니까.

수다맨 2014-12-26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다녔던 학교의 정치학과 교수도 걸핏하면 휴강을 냈었죠. 다른 게 아니라 토론 프로그램도 출현해야하고, 라디오에도 나와야하고, 인터넷 방송에도 가야한다면서 말이죠. 어쩌다 수업하는 날이면 자기 대신 동문 후배인 시간강사 불러서 강의시키던 일도 숱했습니다. 이런 인간이 어쩌다가 강단이라도 한 번 서는 날에는 자기도 민주화운동에 한몫 거든 세대였다고 우쭐해하더라구요. 권총으로 딱 한 방만 갈기고 싶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7 09:05   좋아요 0 | URL
인터넷 방송도 한답니까 ? 부지런하신 분이네요... 날마다 서야 할 강당이 오히려 초대 손님 격으로 와서 시부리고 가니 정말 등록금 아깝죠. 강의 준비하고, 대화하고, 연구하는 데에도 시간이 모자른데 와.. 보면 종편을 종횡무진합니다.

마립간 2014-12-27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경이 탐욕스러운 (의사)는 살아남고 인간적인 (의사)는 멸종되고 있죠. 진화론으로 설명이 되죠. 이 괄호 안에 목사, 기자, 교수, 정치인 등 어떤 직군을 넣어도 말이 되는 문장입니다. 진화론으로 설명된다고 해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에 대한 저의 설명입니다.

진화가 목적적이지 않으니, 퇴행이라는 용어는 관점에 따라 옳을 수도,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디테일보다 기본에 충실한 성향, 플라톤적이고 수학적인 성향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7 09:08   좋아요 0 | URL
동네 의원들이 사라지고 있잖습니까. 동네 조그마한 병원이 있었는데 이제는 이런 병원도 없어요. 장사가 안 되니깐 접겠지만 동네 소규모 병원이 문을 닫는다는 것은 의료제도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죠. 이제 병원들은 돈되는 것만 진료를 합니다. 전문병원이 대표적이죠. 말이 좋아 전문 병원이지 쉽게 말해서 돈 되는 것만 하겠다는 속셈 아니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국립 의료원 수가 이토록 적은 나라도 오이시디 중 유일하다고 들었습니다. 의료 정책 지옥이라는 미국보다도 국립 의료원 수가 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리 2014-12-27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들은 얘깁니다. 도거관들은 가을이 되면 강박적으로 이름있는 강사를 데려와 특강같은 것을 하지요. 지방 소도시라 잘 오려는 유명인이 없답니다. 연락하면 대개 비서(?)들이 받는데, 이백 삼백을 부른다더군요. 강연에서는 자본주의니 황금만능주의니를 질타하는 선생들이 그렇다는군요. 돈안되고 시간 뺏기니 지방따윈 안 가겠다는 건데 안 오는게 나은거죠 우리도. 세금 그렇게 퍼주고 그렇게 언행이 따로 노는 말에 박수까지 치는 바보가 되지는 않을테니까요. 개이야기 하시니 생각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8 13:06   좋아요 0 | URL
일반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평균 강사비`보다 과하게 부른 경우로군요 ? 종종. 자본주의를 존나 비판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사는 강사`가 태반이죠. 개인 비서까지 있다면 뭐 사업자 등록해야죠...

luckyguy66 2015-03-1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쎄요. 저는 처음 영화를 볼 때 재밌고 감동적으로 보았거든요.한국전쟁,파독광부,간호사,베트남전 이 모두가 역사적사실이고 우리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인데 사람들이 너무 정치적으로 연관시켜서 생각해서 편을 가르는게 아닌가 모르겠네요.물론, 영화에서는 일부 가공한 부분들이 있겠죠.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사실 저는 새누리당을 지지하지도 않고 지금까지 계속 야당을 지지한 사람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배우 황정민의 연기력에 감동과 눈물을 흘리며 재미있게 보았으며 한국전쟁을 겪고 먹고 살기 위해 파독광부, 간호사를 지원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이게 정치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인터넷에 댓글을 올린 글을 보고서야 느꼈습니다. 대통령이 영화를 봤다고 그 영화가 모두 새누리당 지지하는 영화인가요? 대통령은 영화도 보면 안되는지요? 황정민이 대통령과 영화를 봤다고 새누리당을 지지하는건지요? 글쎄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것 같습니다. 아닌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3-11 05:38   좋아요 0 | URL
굵직굵직한 현대사는 모두 건드리는데 굳이 4.19나 광주사태 등은 빼먹고 나열하는 것도 그렇고 제가 보기엔 박근혜 정권에 대한 향수 혹은 아부 같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황정민 연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딱히 가족 서사`가 촌스럽다고 믿는 1인인지라 더욱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 것 같군요.. 뭐, 영화 보고 국민들이 갈등할 정도는 아닌 것 같구요. 이미 분열되었기에 영화 한 편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정희, 조현아 그리고 산낙지.


 


한때 인문학 분야에서 " ●● 사회 " 열풍이 불었다. 피로 사회, 투명 사회, 행복 사회, 감시 사회, 과로 사회......  그런데 이러한 제목 설정은 새롭기는커녕 진부했다.  나 또한 이 열풍에 동참했다. 내가 내린 진단은 대한민국은 << 낙지사회 >> 였다 ㅣ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70810    해물탕 요리 전문점에 가면 가장 흔한 풍경이 손님이 보는 앞에서 살아 있는 낙지를 펄펄 끓는 냄비 속에 넣는 장면이었다. 낙지는 이내 뜨거운 국물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문제는 가게 손님들이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 하는 태도에 있다. " 국물 맛이 아주 시원해요 ! " 그러니까 숨탄것의 고통 앞에서 당신은 혓바닥에 침이 고이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볼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동물의 생명 윤리에 대한 인식은 진라면 국물에 밥 말아 먹은 모양이다.  

이러한 풍경은 마치 로마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로마 경기장 안에 굶주린 사자와 노예를 풀어놓고 살육을 즐기는 방식 말이다. 그것은 몰락하는 증후가 아닐까 ? 최근 벌어진 통진당 해산 사태를 보면 해물탕 냄비 속 낙지'가 생각난다. 박근혜 정부는 정윤회 파동에 대한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백성 앞에 살아 있는 낙지를 펄펄 끓는 냄비 속에 넣는 이벤트를 마련하고,  백성은 우르르 몰려가 통진당의 사형 선고를 구경한다. 통진당은 해산되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통진당은 뜨거운 물 속에 빠져 죽은 낙지 신세'였다. 이것은 공포 정치를 강화하기 위한 공개 처형 방식과 유사하다. 누구든 까불면 죽는다는 메시지'다.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가게 주인도 나쁘지만, 사실은 그것을 원하는 손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가게 주인은 영악하고 가게 손님은 멍청하다. 헌재에 의한 통진당 해산이 엉터리라는 사실은 법학에 대한 교양뿐만 아니라 논리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석 가능하다. 하지만 가게 손님은 낙지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뜨거운 물 속에 빠져 죽어가는 낙지를 보며 슬픔보다는 싱싱한 해산물이라는 기표와 기의'를 받아들일 뿐이다. 하긴 영화나 보면서 정치적 감각을 키운 영화 마니아'가 제대로 된 당대의 고통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안제이 바이다 영화나 캔 로치 영화에 대해서는 두 손을 번쩍 들며 지지하지만 정작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당대의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 판타지(스크린) " 에 감동할 뿐이지 " 리얼리티(현실) " 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조현아 땅콩 회항에 대한 언론 보도'도 조 씨 남매가 저지른 죄보다 과한 측면이 있다. 언론은 죄를 보도하는 역할을 하는 매체이지 죄를 심판하는 사법부가 아니다. 그런데 종편은 물론이고 지상파 방송은 온통 포청천이 되어서 조 씨 남매를 심판한다. 인민 재판을 떠올리게 한다.  언론이 조 씨 남매의 악행'을 단순히 냄비 속 낙지처럼 볼거리로 치부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지는 말아야 한다. 이처럼 한국인은 점점 잔인하게 변했다. 하지만 명심하자. 당신도 언젠가는 냄비 속 낙지가 될 수있다는 점을 말이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은 " 시각적 쾌락 " 이다. 유식하게 말하자면 과시적 전시 효과'다.  냄비 속 낙지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도 시각적 쾌락이 병적으로 흐른 탓이다.

 

한국인의 시각적 욕망을 들여다보면 과잉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더욱이 수컷의 시각적 욕망은 꽤나 까다롭다. 한국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은 청순 글래머이거나 베이글녀'이다. 글래머'이되 남성에게 순종적이어야 좋은 여자'이다. 글래머'이지만 남성에게 순종적이지 않는 여자는 좋은 여자가 아니다. 속이 보이는 뻔뻔한 수컷의 욕망이다. 베이글녀도 마찬가지다. 몸은 성숙하되 얼굴은 베이비'여야 한다. 롤리타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는 민망하니깐 내세운 논리가 베이글녀'다. " 동안 열풍 " 도 뜯어보면 롤리타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욕망이다. 그리고 허버지를 꿀벅지'라고 욕망하는 부분에서는 식인 욕망마저 느껴진다. 이처럼 여성을 외모와 몸매로만 보는 것도 병적인 시각적 쾌락의 몰입 혹은 전시효과의 극대화'라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죽어가는 낙지를 보며 낄낄거리며 박수치며 웃는 손님이나, 청순 글래머 혹은 베이글녀를 호명하는 좆의 욕망이나, 통진당 해산 사태를 보며 박수치는 젊은 20대 우파의 욕망이나 모두 동일하다. 한마디만 하련다. 소설가 박민규와 시인 류근의 말풍선을 섞어서 흉내 내겠다. " 시바, 조낸 조까라마이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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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4-12-2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리얼리티에 대한 과도한 집중이 판타지 알까기 하고 있는 거죠. 그래, 어디까지 얼마나 더 보여줄 수 있지 하며 말이죠. 판타지는 더!더!더!를 추구하는 리얼리티의 노예화 되어가고 말입니다. 리얼화 추구(시각적 쾌락)를 위한 3d가 판타지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 건 재미난 부분이죠. 그러니 리얼리티와 판타지는 상호배제관계가 아니라 상호소통, 보족관계죠. 통진당 해산은 그렇게 판타지적 완성이 돼버렸습니다.
소설이 왜 허구로서 있음직한 현실을 만들어내는지, 대다수의 독자 또한 여전히 소설을 위한 소설보다 현실을 대변하는 소설을 더 선호하고 우위로 생각하는지를 볼 때도 리얼리티의 입지는 매우 공고한 셈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5 21:50   좋아요 0 | URL
오, 이런 뻘글에 훌륭한 댓글이... 이런 걸 두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것이겠죠. 이 글은 모 영화학도가 올린 글에 대한 저격글입니다.. ㅋㅋㅋㅋ 정치적 색은 다 다르겠씁니다만, 제가 보기엔 통진당 해산 결정은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이 들더군요. 통진당 해산은 말 그대로 현실(리얼리티)에서는 말도안되는 것인데 요게 완성이 되니 정말 판타지가 완성된 꼴이 되었습니다. 허허.. 이런 개지랄같은세상......


AgalmA 2014-12-25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히지 좀 마라, 낙지 판타지야! 하고 싶은 세상이죠. 휴.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5 22:19   좋아요 0 | URL
산낙지 문화`는 아마도 무혈을 무통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빨간 피가 안 나니 최민식이 올드보이에서 뜯어먹는 거죠.
낙지는 다리가 떨어지면 새빨간 피가 철철 넘치도록 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AgalmA 2014-12-2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술 더떠서 산낙지가 반려집단화 되지 못하는 태생적 환경이라는 아쉬움이 있군요. 아니, 내가 키우는 낙지를 잡아먹다니! 문화를 만들어야....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5 22:5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최초로 낙지를 반려동물로 키우겠습니다. 반려 동물하니 달팽이 생각이 나네요. 시장을 지나가다가 왜 즙 내는 개소주 가게 있잖습니까. 그 가게 앞에 왕달팽이를 진열했더라고요. 가만 보니 무진장 예쁘더군요. 보니깐 달팽이즙도 내는 것 같더군요. 불쌍해서 제가 주인에게 왕달팽이 파냐고 했더니 헤헤, 거리시면서 그럼요, 이러시길래 몇 개만 삽시다,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 왜 그러시냐고 묻길래 집에 가서 몇 마리 키울려고 합니다. 했더니 똥십은 표정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말도 안 하시고 들어가시더라고요.. ㅋㅋ 정말 키울려고 했씁니다. 왕달팽이 말이죠..

2014-12-25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6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6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7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4-12-2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아까 달팽이 생각을 한참 했는데 말입니다. 역시 판타지 세계엔 모든 게 동시적으로 돌아다니는 군요 ㅎ...낙지 판타지의 최후를 꼭 들려주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12-26 11:51   좋아요 0 | URL
내년에는 왕달팽이 한번 키울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리얼리티인 척하는 판타지는 재수없는 반면에, 판타지인 척하는 리얼리티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samadhi(眞我) 2014-12-30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네 언니- -+ 뒤끝 쩔어요. 그렇게 아다다, 어버버했으면서도 우기고 속여서 자기가 이기더니 기어이.
답답~한 현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깜딱 놀라고 더 이상 놀랄 일 없겠지 가슴을 쓸면 어느새 더 놀라운 일들 뿐이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12-30 10:20   좋아요 0 | URL
확실히 비현실적이죠.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가지는 것. 정말 끔찍한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