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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 - Art+Business 시리즈
로저 코먼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월
평점 :
품절
B 서정의 난폭한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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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로저 코먼
한낮의 더위 때문에 숨이 턱 밑까지 몰려왔다. 뉴스에서는 연일 폭염 특보를 내보냈다. 기상 캐스터'는 짐짓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 같이 무더운 날씨에는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시고 수분 공급은 충분히 하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이런 날에 이사를 한답시고 낑낑거리며 책장 정리 따위나 하는 멍청이 대마왕은 없겠죠 ? " 그때, 나는 무슨 일을 했냐면... 내일 이사 갈 준비를 하느라 낑낑거리며 책장 정리 따위나 하고 있었다. 가전 제품은 재활용센터에 팔고, 주워왔던 쇼파는 1년 후 동사무소'에서 발급하는 노란 딱지를 붙인 후 다시 그 자리에다 갖다버렸다. 버려진 쇼파를 보며 생각했다. "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야 ! "
이삿짐 트럭에 실릴 짐'은 책과 책장이 전부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책을 포장했다. 이런저런 일로 기진맥진해진 나는 저녁에 시원한 맥주로 허기를 채웠다. 다음날 늦은 아침에 눈을 뜨니 아침부터 어마어마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비를 양동이 채 쏟아붓고 있었다. 시바, 그때 마침 이삿짐 트럭이 도착했다. 내리다가 그칠 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삿날을 연기할 수는 없었다. 트럭은 빗속을 뚫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불던지 서해대교를 건널 때에는 대교'가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을 정도였다. " 이러다가 트럭이 전복되어서 바닷물에 빠지면 볼 만하겠군 ! " 그날 내가 버린 책은 100권 안팎이었다.
방수천으로 꼼꼼하게 책을 폭우로부터 보호했다고 생각했으나 엄청난 비와 함께 바람'이 부는 바람에 책은 속수무책으로 물을 먹어야 했다. 집에 도착해서 책을 추려 보니 100권 정도는 떡이 되어서 버려야 했고, 100권 정도는 보기 흉하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울 정도로만 물을 먹었다. 헌책방에 책을 팔려고 해도 물 먹은 책'은 받질 않았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책은 책장이 아닌 책상 밑에 쌓아두었다. 어제 조 단테가 연출한 << 할리우드 대로 / 1977 >> 란 영화를 보다가 문득 로저 코먼이 쓴 <<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 >> 라는 긴 제목을 가진 책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 << 할리우드 대로 >> 에 대한 제작 뒷 이야기를 얼핏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주류 메이저 A급 스튜디오 영화인 << 선셋 대로 >> 를 패로디한 것이 분명한 << 할리우드 대로 >> 는 저예산 영화 현장에 대한 찬가를 담은 영화였는데, 영화 예고편 편집자에 불과했던 조 단테가 이 영화를 감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작비 5만 달러로 일주일 안에 영화를 찍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기에 가능했다. 조 단테는 멋지게 성공했고 후에 B무비에 대한 예찬을 담은 걸작 << 마티니 >> 를 만들었다. << 할리우드 대로 >> 에 감동한 나는 먼지가 쌓일 대로 쌓인 <<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 >> 라는 책을 끄집어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젖은 종이가 마르면서 생긴 얼룩을 보니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날이 생각났다.
초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다 보니 로저 코먼 영화는 손 대면 툭 하고 쓰러질 것 같은 골판지 세트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 : 문을 쾅 하고 닫을 때 벽이 흔들리면 그것은 B급 영화라고 말이다 , 똥 쌀 만큼 무시무시한 종이 괴물, 빈약한 서사의 틈, 형광빛으로 승부를 건 특수효과, 자주 써먹는 고답스러운 나레이션 그리고 지나친 폭력과 노골적인 성 묘사'는 로저 코먼 영화의 싼 티나는 특징이었다. 하지만 A급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와 맞짱을 떠도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는 작품이 많았다. 로저 코먼은 니체가 언급했던 것처럼 모든 가치에 대한 전복을 다뤘다. 모든 권위와 우상은 로저 코먼 앞에서는 한갓 골판지로 만든 세트와 종이로 만든 우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의 영화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 감성이 팔 할'이었다. 내가 영화에 대해 흥미를 잃기 시작한 때는 동네 극장이 갑자기 멀티플렉스化로 재편되는 시점과 맥을 같이했다. " 관객 " 은 이제 " 고객 " 으로 둔갑해 있었다. 관객이라는 단어가 영화를 보는 주체 ( 觀 : 볼 관 ) 에 방점을 찍었다면 고객은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주체 ( 顧 : 돌볼 고 ) 에 방점을 찍었다. 전자가 영화라는 시각 예술에 부합하는 지시어라면 후자는 영화를 자본 이익 창출이라는 점에 주목한 지시어'라 할 수 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자본이 소비자를 왕 대접( 모셔야할 손님 ) 하는 이유는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서다. 더군다나 << 쥬라기 공원 >> 이후,
재현 불가능한 화면을 " 뽀샵질 ( CG ) " 이 그럴 듯하게 재현하면서부터 영화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특수 효과'는 졸속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개발된 것이라고 주장했던 로저 코먼의 말은 헛소리가 되었다. 이제 특수 효과는 가장 비싼 제작비에 속했다. << 반지의 제왕 >> 에서 건달프를 연기했던 이언 멕컬린의 불편한 고백처럼 배우는 대사를 주고 받는 게 아니라 블루스크린 앞에서 혼자 서서 혼잣말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감정의 교류와 연대 그리고 우정을 찾기는 힘들다. 21세기 영화는 모두 번지르한 영화'가 되었고 실사'보다는 만화'에 가까운 영화가 되었다. CG(특수효과)는 모든 것을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관객들은 그 사실에 환호했지만 < 사실 > 과 < 사실的 > 인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나는 그 옛날 B급 영화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낙원동에 위치한 " 서울 아트 시네마 " 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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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괴물 게떼의 대습격 : 100% 종이로 만들었다. 비주얼을 보니 똥 쌀 만큼 무섭다
그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본 영화는 B급 영화'였고 당연히 로저 코먼 영화를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왜냐하면 로저 코먼은 " B급 영화의 제왕 " 이라는 타이틀과 " 팝아트의 교황 " 이라는 월계관을 거머쥔, B 서정의 난폭한 제왕이기 때문이었다. 누가 나에게 로저 코먼이 연출한 << 공포의 구멍 가게 / 1960 >> 와 프란시스 코폴라가 연출한 << 지옥의 묵시록 / 1979 >> 가운데 어느 작품이 더 훌륭한가, 라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로저 코먼이 만든 엉터리 영화 << 공포의 구멍 가게 >> 에 손을 들어주리라. << 지옥의 묵시록 >> 은 << 대부 >> 로 극찬을 받은 프란스시 코폴라 감독이 겁대가리 없이 잘난 척하다가 스펙타클하게 망친 제작 재난 영화였다.
3000만 달러가 넘는 어마어마한 제작비, 15개월에 걸친 촬영기간, 2년이 넘도록 끝내지 못한 후반 작업'은 이 영화에 참여했던 제작사 3곳을 쫄딱 망하게 만들었다. 당시 영화 1편 당 평균 촬영 기간이 55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코폴라 감독은 머나 먼 필리핀 정글에서 월권을 행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말론 브란도가 " 호러, 호러 !! " 라고 낮게 외치는 장면이 전부였다. 반면 << 공포의 구멍 가게 >> 는 이틀 만에 촬영을 마쳤고 제작비는 5만 달러에 불과했다. 규모로 보자면 골리앗과 다윗이었지만 내 눈에는 로저 코먼 식 싸구려 공포 영화'가 더 훌륭한 영화'처럼 보였고, 많은 영화광들이 이 영화에 찬사를 보냈다.
<< 공포의 구멍 가게 >> 는 이틀 만에 후다닥 만들어진 영화였지만 심야 상영, 재상영 전문 극장, 비디오 대여점, 그리고 각종 무대 공연과 리메이크 영화 등으로 30년 이상 살아남은 영화가 되었다. 로저 코먼은 이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릎 탁, 치며 아, 했다. 비주류 신분으로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깨달은 통찰이었다.
난 1백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보면 그 돈이 제대로 쓰였는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다. 3천만 달러, 5천만 달러로 올라가면 방법이 없다. 제작비 5천만 달러짜리 영화는 이렇게 생겼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조지 루카스는 << 스타워즈 >> 에서 돈을 제대로 썼다. 스크린에 그게 나타난다. << 천국의 문 >> 이나 << 이시탈 >> 의 경우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 로저 코먼, <<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 15쪽
로저 코먼이 지적했던 것처럼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 제작 비용 대비 화면의 효율성 " 을 계산하는 것이다. 샘 레이미 감독의 << 이블데드 >> , 코헨 형제의 << 블러드 심플 >> , 프랭크 헤넨로터의 << 바스켓 케이스 >> 를 보는 재미는 바로 제작 비용 대비 효과의 극단적 효율성에 있다. 이러한 영화는 마치 가난한 조강지처가 한 푼 두 푼 아끼며 써내려간 가계부를 볼 때 느끼게 되는 감동과 비슷하다. 자기 머리를 잘라 마련한 시곗줄과 시계를 팔아 머리빗에 감동하듯이 나는 종종 적은 제작비로 악전고투하며 만든 저예산 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로저 코먼의 제작 후일담을 담았다.
로저 코먼이 쓴 서문은 감동적이며 << 공포의 구멍 가게 >> 에 대한 후일담은 흥미롭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입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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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묵시록에 대한 후일담 ㅣ 지금은 영화를 파일 저장 형식으로 쉽게 접할 수 있어서 혼자 영화광 흉내를 낼 수 있었지만 옛날에는 CD 저장 방식이어서 일일이 " 시네마떼끄 " 를 찾아다니며 영화를 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광들 사이에서는 연대가 이루어졌다. 그 당시는 영화 이야기'만 하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오고가는말풍선 끝에 << 플래툰 >>과 << 지옥의 묵시록 >> 가운데 어느 작품이 더 뛰어난 작품인가를 놓고 끝장토론을 펼친 적 있다. 정성일 키드'들은 당연히 << 지옥의 묵시록 >> 에 손을 들었다. 아카데미 작품상보다는 칸느 황금종려상'이 주는 로열티 때문이리라. 열에 아홉은 코폴라 감독'을 지지했고 그중에는 << 플래툰 >> 을 그지같은 영화라고 핏대를 세우는 열혈 키노 키드'도 있었다.
<< 플래툰 >> 이 << 지옥의 묵시록 >> 보다 낫다고 주장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처음부터 << 플래툰 >> 을 열정적으로 지지할 생각은 없었는데 상대 진영에서 << 플래툰 >> 을 그지같은 영화로 폄하하는 바람에 화딱지가 난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 지옥의 묵시록 >> 이야말로 그지같은 영화라고 맞대응했다. 내가 내세운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A급 감독이 만든 영화치고 내러티브가 지나치게 불균질적이다. 2. 제작비 3000만 달러'가 투입되었는데 헬리콥터 장면 빼고는 효과가 없었다. 3. 감독은 제작자와의 약속을 중요시해야 하는데 감독의 고집으로 제작비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고 그것 때문에 제작사가 도산했기에 감독은 책임을 져야 한다. 4. 무엇보다도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는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에는 " 네 똥 굵다 ! " 로 끝났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그 친구들이 << 지옥의 묵시록 >> 을 걸작이라고 한 이유에는 코폴라와 칸느에 대한 로열티'가 작동한 탓이라 믿는다. ( 대부가 걸작이라는 데는 두 손을 들고 엄지손가락 세 개를 올리고 싶지만 지옥의묵시록이 걸작이라는 데에는 엄지손가락 두 개를 DOWN하겠다. 이 작품은 명백히 실패한 영화다. ) 이 영화는 원래 4시간이 넘는 영화인데 극장 개봉은 2시간이 조금 넘는 영화로 상영되었다. 절반을 뚝 자른 것이다. 그러니 관객이 내용을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모였던 친구들은 몸통 절반이 떨어져나간 영화에 열광한 것이다. 마치 장편 < 레미제라블 >을 어린이용 문고 축약본으로 읽고 나서는 정독했다고 말하는 태도'와 비슷했다.
이 영화는 나중에 감독에 의해 다시 편집되어서 2001년에 3시간이 넘는 감독판으로 재상영되었다. 2시간짜리 영화와 3시간짜리 영화는 확연히 차이가 도드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