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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 - 할인행사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다케다 신지 외 출연 / 엔터원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回 : 입 속의 검은 입
전쟁에서 혼자 남아 마지막으로 죽고 싶어하는 군인은 없다고 한다. 명쾌하지는 않아도 인간적인 진리다
ㅡ 알베르스 산체스 피뇰, 차가운 피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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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때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20년이 흐른 후였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청춘을 병실에서 의식 불명인 상태로 흘러보낸 것'이다. 당혹스러운 점은 정신은 " 12살 얼라 " 인데 육체는 " 32살 얼은(어른) " 이라는 데 있었다. 크라는 키는 안 크고 좆'만 쑥처럼 쑥쑥 컸다. 12살 얼라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시기했다. 도대체 이 폭풍 성징을 어쩌란 말이냐 ? 변화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민둥산이었던 곳에 거뭇거뭇한 침엽수림이 군락을 이루었다. 병실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나는 아주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냥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났을 때의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깊게 들숨을 마신 후 날숨을 오래 내쉬었다.
사타구니가 가려워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긁다가 까끌까끌한 거웃을 발견했을 때 느끼게 되는 오묘한 공포심을 당신은 알까 ? 나는 << 나 홀로 집에 >> 에 나오는 얼라처럼 비명을 질렀다. Y지점이 " hairy " 해서 털을 깎고 싶었으나 부끄러워서 엄두가 안났다. " 성장 " 이 아니라 " 성징 " 으로 자라난 육체는 점점 비극으로 치달았다. 나는 몸집만 컸지 정신연령은 아이인, 영화 << 빅 >> 에 나오는 톰 행크스 신세'였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스한 봄이 온다고 했던가. 내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그 사랑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11살 여자'였다. 지금 나는 깜빵에서 이 페이퍼를 작성한다. 요즘, 세상 참...... 좋아졌다 ㅡ
대충 얼개'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구상해 놓고는 사람들에게 모니터링을 부탁했다. 대부분은 박장대소하며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영화 << 빅 >> 과 유사한 설정이라는 조롱과 함께 << 롤리타 >> 의 판타지 버전'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이 유사성'을 장르적 특성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말했다. " 롹이라는 장르에 묶인 롹 음악'은 모두 롹 ㅡ 스럽고, 트로트 장르에 묶인 트로트 가락 또한 폭스트로트 풍으로 모두 비슷하지 않느냐. 내가 구상한 이야기 또한 몸(혹은 영혼)이 바뀌는 << 체인지 ㅡ 서사 >> 장르에 속한다. 그러냐, 안 그러냐 ? " 내가 보기엔 << 프랑켄슈타인 >> 과 << 롤리타 >> 는 동일한 서사 구조'를 가진 작품이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은 정신은 삼척동자인데 육체는 육척거한'인 자의 비애를 다룬 소설이었고
허버트 허버트 씨 또한 정신은 삼척동자인데 육체는 육 척 거한'인 자의 성애'를 다룬 소설이었다. < 비애 > 냐 < 성애 > 냐가 다를 뿐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몸에 맞지 않는 옷 때문에 괴로워하는 어른'이다. 내가 구상한 32살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 열애 > 이지 로리타 컴플렉스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탐 행크스가 연기한 조쉬,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 롤리타를 사랑한 허버트 허버트'는 한통속'이었다. 이들은 정신은 12살인데 좆만 커서 고통받는 성기거대증 환자'다. 부럽다, 시바. 바로 이 체인지ㅡ서사'에 밥 숟가락 하나 얹을 속셈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구상을 포기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연출한 << 인간 합격, 1998 >> 이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옥신각신, 오고가는 말풍선이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할 때 영화 꽤나 봤다던 K가 흥미없다는 듯 말했다. " 그거 기요시의 << 인간 합격 >> 이네... " 영화는 14살 때 교통사고로 10년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나는 주인공을 다루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무릎 탁, 치고 아, 했다. 아, 하고 무릎 탁, 치기에는 영화가 무척 뛰어났다. 도대체 저 인간(구로사와 기요시)은 4달에 한 편씩 영화를 속전속결로 만드는 주제'에 " 내가 영화 한 편을 찍는 데는 보통 서너 달의 시간이 걸린다. 기획이 한 달, 시나리오 한 달, 촬영 한 달, 후반작업 한 달. 이렇게 찍다 보면 1년에 3~4편을 찍을 수 있다. " 기요시, 잡지 키노와의 인터뷰 하나같이 걸작인 이유는 무엇일까 ? 저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맥빠진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까지'는 말머리'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다.
이 자리를 빌려 하고 싶었던 것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걸작 << 회로 回路, 2001 >> 라는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짜증낼 필요도 없다. 내 글은 본래 삼천포는 팔 할이고, 본론이 사족'이니깐 말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인터넷을 통해 유령이 출몰하고 유령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죽거나 실종된다는 이야기'다. 기존 영화 << 링 >> 을 그대로 카피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유령이 출몰하는 근원지가 비디오 테이프에서 인터넷'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천재성이 발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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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로 >> 는 << 링 >> 을 뻔뻔하게 카피했지만 << 링 >> 보다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진지하다. 현대인은 인터넷이라는 연결망 속에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단락短絡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회로'에서 두 점 사이가 떨어지지 못하고 두 점 사이가 접속이 되는 순간 소통이 아닌 불통이 된다는 의미'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외로운 존재'다. 영화를 보다 보면 공포 영화'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게 된다. 저예산 공포 영화에서 모딜리아니 그림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현대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쾌락에 가깝다. 색감을 탈색시킨 우중충한 회색톤과 " 포커스 아웃 " 시킨 화면 그리고 인간과 유령 사이에 개입되는 불순물(들) :
예를 들면 커튼, 건물 기둥, 불투명한 비닐'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점'은 주체와 객체 사이를 끊임없이 간섭하는 노이즈 효과를 발생한다. 이처럼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현대인의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 노이즈 " 에 의해 지지직거린다. 이 글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을 위해 쓴 글로 집요하게 내용을 파고들면 자칫 따분할 수가 있으니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다른 식으로 접근하도록 하자.
영화 제목인 회로回路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 回 > 라는 한자'다. 입 속에 입이 있는 형국이다. 영화 << 링 >> 이 도형 ○이 주는 공포라면, << 회로 >> 는 도형 □ 가 주는 공포'다. 곡선이 따스하고 전원적 풍경'이라면 직선은 차갑고 도시적 형태를 띤다. 제목 회로에서 回 는 네모인 형태 口'가 겹친 형태'인 점을 감안하면 영화 주제'와 절묘하게 섞인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집요하게 口 형태의 미장센을 구축한다. 그것은 컴퓨터 모니터 모양새와 유사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回 는 돌아온다 라는 뜻이다.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니 영화 << 링 >> 의 원형 ○ 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 << 링 >> 에서 우물은 촉촉하고 검은 구멍으로 물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성 성기에 대한 은유로 읽히는데 << 회로 >> 또한 물 위에 떠 있는 배에서 시작해서 같은 장소에서 끝난다는 측면에서 물 이미지와 연관이 있다.
回 는 소용돌이'를 닮았다. 누구나 전쟁터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적이 점령한 적지敵地 에서 유일하게 혼자 남아 마지막으로 죽고 싶어하는 군인은 없다. 하루를 더 사느니 차라리 의지할 동료 병사가 있을 때 죽는 것이 낫다. 죽음보다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홀로 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처절한 외로움을 다룬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귀신은 무서운 존재라기보다는 외로운 존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