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은 통한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 원죄 " 를 짊어지고 태어난 불쌍한 운명'을 타고난 족속이다. 인류의 시조 격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original sin 이라고 한다. 아담과 하와는 사과 먹은 것에 대해 신에게 사과를 했으나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화가 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불호령을 내렸고,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야 했다. 한번 미운털이 박힌 놈은 뭘 해도 미운 법. 하나님은 나중에 물호령(대홍수 : 노아의 방주)으로 아담과 하와의 후예'를 징벌하였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모르면 간첩. 너무 많이 알면 빨갱이. 이 기독교 교리(원죄설)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악하기에 후천적 교육에 의해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순자의 성악설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그런데 나와는 혈연 관계도 아니면서 형제자매 님'이라며 친절하게 다가오는 기독교 신앙인'에게 인간은 성선설에 가깝냐, 아니면 성악설에 가깝냐고 물으면 몇몇은 인간은 선한 존재'라고 말한다. 헛점이 보이면 하이에나처럼 후벼파는 본성을 가진 나는 사악하게 말대꾸한다. " 성선설은 이슬람교 기본 교리'입니다. 무신론자나 불교신자 혹은 이슬람교 신자'가 성선설을 믿는다고 하면 반론을 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기독교 신자'가 성선설을 주장하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 라고 다시 한번 불꽃 스매싱을 날리면 나를 형제자매라고 불러서 유사 형제자매가 된 형제자매 님은 눈빛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한순간에 이슬람교 교리를 믿는 사이비 기독교인이 된 형제자매는 치질하게 눈알 불알이며 항문 쫙 조인다.
성선설을 믿는냐, 성악설을 믿느냐 아니면 빈 서판 가설'을 믿느냐는 자유에 속하지만 기독교인이 성악설을 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의 핵심은 " 나는 죄인이올시다 ! " 가 아니었던가. 이 사실을 부정하면 안 된다. 사이비 기독교 신자인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겉으로는 도덕군자처럼 행동하지만 내 머릿속은 송강호가 << 살인의 추억 >> 에서 이단옆차기와 함께 외친 " 강간의 제국 " 이 펼쳐진다. 상상 속에서 이웃집 여자를 탐한 적도 있고, 갑의 횡포에 살의를 느낀 적도 있고,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졸라 아픈 적도 많다. 그리고 타인의 불행에 대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이 정도면 내 본성은 " 성악 " 에 가깝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내 배 부르면 행복했고 나 혼자 칭찬 받으면 우쭐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람 변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으니, 나는 태어날 때부터 사악한 놈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 진심은 통하기 마련...... " 이라는 상투어'가 끔찍하게 느껴진다. 이런 말을 술자리나 티븨 모니터 속 인물에게서 듣게 되면 " 시바, 끔찍하구나 ! "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블루 " 하며 " 다크 " 하고 때론 에스트로겐 분비 때문에 " 분홍분홍한 " 나에게 진심이 통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끔찍한 세상이다. 인간은 10분마다 거짓말을 하고 10분마다 꼴린다(남성의 경우)는 통계가 있다. 이게 바로 인간 본성'이다. << 진심 >> 이란 진짜 마음으로 거짓으로 꾸미지 않은 마음속'을 뜻하니 진심은 아름다운 게 아니라 추악한 것에 속한다.
그런데 진심이 통하거나 간절히 원했더니 꿈이 진짜로 이루어지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 분명하다. 역설적 표현이지만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진심이 통하면 안 되고, 간절히 원한다고 꿈이 이루어지면 안 된다. 까짓것 ! 정은 통해도 된다. 하지만 진심은 통하면 안 된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유행하던 구호는 "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 " 였다. 지성하면 맨유이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40위 권 밖에서 빌빌거리던 한국 축구가, 16강 본선 진출은커녕 그동안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1승조차 거두지 못했던 한국 축구가 4강 진출을 했으니 꿈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말.입.니.다. 이 꿈이 그리 좋은 꿈이 아니었다.
한국과 결전을 치룬 경기가 피파 100년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악랄한 오심 경기'로 화자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허니문처럼 달콤한 꿈이었지만 다른 나라가 보기에는 악몽에 가까운 비터문'이었다. 비열한 수를 쓰든 말든 이기고야 말겠다는 진심이 통했던 것이다. 모레노는 종편보다 무서운 편파로 한국에게 승리를 안겨주었고, 그는 고국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인문학은 수문학으로 고쳐 써도 말이 된다. 짐승 수 (獸)를 써서 수문학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수성(獸性)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 본성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책은 대부분 성공과 처세를 다루는 자기계발서와 반성으로 시작해서 자화자찬으로 끝나는 신달자 식 에세이'가 대부분이다.
달달한 목소리로 아프니까 청춘이야, 라고 말하거나 당신의 무한 긍정을 믿습니다, 라는 박카스 광고 문구를 들을 때마다 현실 속 시궁창을 오아시스'로 만드는, 입 닥치고 무조건 와, 하라는 요구에 무릎 탁, 치고 우, 하게 된다. 인간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 우리 개는 절대 물지 않아요 ! " 라고 말하는 개 주인의 말이 생각난다. 물론 당신이 키우는 개는 주인을 물지는 않겠지만 지나가는 행인'을 물 수는 있어요. 그렇기에 우리 개는 절대 물지 않는다는 말은 일반화의 오류에 속한다. 눈알 불알이며 항문에 힘쓴다고 해서 치질한 내 환경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인간은 인성보다는 수성에 가깝다는 인문학적 결론에 나는 행복하다. 나 혼자만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 맛에 책을 읽는다. 너도 쓰레기다. 히히 ■